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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정원의 여자들 - 13.5

2021.04.12 19:1904.12

한거정은 부목을 한 팔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병실을 빠져 나갔다. 메마른 콘크리트 바닥을 밟으며 자오랑에게로 전화를 두드린다.

 

(여보세요?)

 

(자오랑, 나야.)

 

(선배?)

 

한거정은 복도와 대합실을 건너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병원 입구를 지키는 안드로이드가 보란 듯이 서있다. 한거정은 벽 뒤로 몸을 숨기고서 그림자 아래로 눈을 가늘게 뜬다.

 

(LT소재 공장으로 와.)

 

(갑자기 무슨.....!)

 

노인이 보호자와 함께 병원의 문을 나선다. 그의 거동이 옆으로 기울고 보호자가 채 잡아내지 못한다. 안드로이드가 노인을 향해 몸을 돌린다.

 

(선배..?)

 

한거정이 재빠르게 걸음을 놀려 병원 밖으로 탈출한다. 거리 위 빼곡한 인파 속으로 몸을 부딪히며 한거정은 목을 움츠렸다. 하얀 병원복과 슬리퍼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인파를 찾아 몸을 구부린다. 그의 굽은 등으로 갖은 색의 광고 홀로그램이 앞 다투어 상영된다. 거리는 바쁘게 안드로이드와 인간, 공단 노동자들로 채워져 쉼 없이 표류하였다.

 

(선배 지금 어디에요?)

 

한거정은 고개를 들어 도시 전체로 물든 각종 기업들의 색과 문구들을 본다.

 

'Gold Wing D.S Ave.'

 

홀로그램과 전광판을 차지한 문구와 목소리들이 가득한 소음 잔해들 사이에서 한거정은 한쪽 귀를 막아 소리쳤다.

 

(밖으로 나왔어, 지금은 골드 윙 기업 거리야.)

(조사해야할 게 있어!)

 

(뭐라고요?)

 

전화 단말 너머로 함께 소리 지르는 자오랑. 한거정의 목소리가 군중들과 기업들의 홍보 문구로 덮여간다.

 

(LT 소재 공단에 뭔가가 있어!)

(거기로 가야 해!)

 

(LT 소재 공단이라니.)

(그 공단 공장만......!)

 

'저희 골드 윙 배달 서비스는 높은 품격으로 고객들에게...'

 

자오랑의 목소리가 광고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아져 간다.

 

(젠장 할.)

 

거친 욕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한거정은 그런 자신에게 놀라 입을 막고서 조심스럽게 외쳤다.

 

(먼저 LT 기업 거리로 가.)

(거기서 만나자고!)

 

전화를 끊고 한거정은 한껏 몸을 움츠린 채 거리를 내달렸다.

 

 

 

자오랑은 제 목을 매만졌다. 붉게 부어오른 목으로 목도리를 둘러멘다. 그가 전화를 열어 통화를 넣는다.

 

[네, 홍안 산업 행정부서입니다.]

 

자오랑이 귀를 두드려 통역 단말을 가동한다.

 

[댁 네 기체는 언제 회수하러 오십니까?]

 

[백한 기업의 저택 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딱딱한 말투의 중년 여성 목소리. 침묵 사이로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진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출발은 했습니까?]

 

[저희 회사 소속 현장 보고 팀이 도착할 겁니다.]

 

자오랑은 발을 구르며 재촉했다.

 

[언제 말입니까?]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주변 잡음 소리만이 울리는 전화에 자오랑이 볼멘소리로 쏘아 붙인다.

 

[저기요?]

 

[기다려 주세요.]

 

전화가 끊긴다. 자오랑은 좁은 사무실의 환기팬으로 고개를 빼었다. 반 지하로 지어져 창하나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은 얼굴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조각 팬뿐이었다. 책상과 의자들 틈으로 몸을 기댄다. 늘 그렇듯 날은 흐렸고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어왔다. 자오랑은 한거정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으며 자물쇠로 걸어 잠근 창고로 다가섰다. 그가 자물쇠를 연다.

 

빛 하나 없는 공간. 폐기물과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굴러다니고 먼지가 덮인 부품들이 어질러진 곳. 그 한가운데서 철제 의자에 안드로이드 하나가 묶여 있다. 자오랑은 전화 단말로 손전등을 밝힌다.

 

총알이 뚫려 지나가 완전히 망가지고 날아간 머리 파편들. 피와 흙으로 얼룩이 된 치마와 옷가지들. 허 씨 저택의 비밀 굴에서 안드로이드들을 살해한 정원용 기계가 밧줄로 묶여 있다. 자오랑이 그녀의 다리를 건드려보았고 넋이 나간 얼굴을 빛으로 비추어 보기도 하였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안드로이드를 두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설마하니 깨어나겠어.

 

자오랑은 창고 문을 닫고 다시 자물쇠를 걸어 잠그었다. 좁고 지저분한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현관을 연 그의 앞으로 한 남자가 서있었다. 자오랑이 당황한 얼굴로 알은 채를 하였다.

 

[허 백씨 안녕하십니까?]

 

허 씨 집안의 차남이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를 구해주셨다고요.]

 

[네, 뭐.]

 

자오랑이 한껏 긴장한 목소리로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갈색 코트를 벗으며 허 백은 사무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오랑이 앞을 막아선다. 허 백이 자세를 곧게 피며 자오랑을 마주본다. 허 백이 사무실 문을 손으로 짚어 열어젖히는 걸 자오랑은 막지 못한다.

 

[갑자기 이렇게 오시는 건.]

 

[잠깐이면 됩니다.]

 

허둥지둥 거리는 자오랑과 반대로 허 백은 자연스럽게 한거정의 사무실 의자로 앉아 여유롭게 등을 기대고 누웠다.

 

[제가 여기에 온 건...]

 

지이이이이잉.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는 자오랑. 허 백은 낡은 전등으로 밝혀진 침침한 사무실에 남겨져 고개를 휘 둘러보았다. 자오랑이 급한 몸짓으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허 백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얇은 철문이 경박스러운 소리를 내며 닫히고 부리나케 골목을 내달리는 달음질이 멀리로 넘어간다. 허 백은 곰팡이가 핀 벽시계를 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ねんねんころりよ おころりよ

잘자라 잘자라 우리 아가

 

坊やは良い子だねんねしな

우리 아가 착한 아가 잘자라

 

坊やのお守はどこへ行った

아가 엄마 어디에 갔나

 

あの山こえて里へ行った

저 산 너머 고향으로 갔지

 

언제고 연인에게 들었던 노래. 그녀의 무릎에 기대어 정원 소리를 들었던 시절. 손 한 짝을 포개어 머리칼이 그녀의 숨에 날리던 어느의 오후.

 

ねんねんころりよ おころりよ

잘자라 잘자라 우리 아가

 

허 백은 자꾸만 과거를 부르었다. 그리고 좁고 너저분한 사무실의 뒤 편, 자물쇠로 잠긴 창고 속에서 머리 한쪽이 박살난 안드로이드의 입에서 같은 음정의 구절이 비집고 나오려 한다.

 

(ねん..... ねん.... ころりよ.... おころりよ)

 

일정하지 않은 박자와 엇나가는 음정.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되는 잡음.

 

(坊やは..... 良い.... 子だねん.....ねしな)

 

접혀지고 꺾이는 관절을 땅으로 디뎌 움직이는 고철 덩어리.

 

[うちの坊や]

(나의 아가)

 

줄에 묶여 의자가 멋대로 구르고 끌려 다닌다. 반쯤 부서지고 엉망이 된 안드로이드가 밧줄에 묶이고 고장 난 음성을 내며 잠긴 문으로 머리를 박았다.

 

[私来ました, 陽子です。]

(저 왔어요, 요코예요.)

 

목소리로, 고장 나고 엇나가는 잡음 가득한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私来ました, 陽子です。]

(저 왔어요, 요코예요)

 

안드로이드가 그를 부른다.

 

[私来ました]

(저 왔다구요.)

[しろさん]

(시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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