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꽤나 신비한 현상이야.]

 

[보고는 보류하시기로 한겁니까?]

 

[물론이야, 친구.]

 

[어색하니 그런 호칭은 빼죠.]

[연구는 좋지만 책 잡히지는 마요.]

 

[알았어, 나의 친구.]

 

남자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전등 빛들이 공기 아래로 유영하는 휑한 공간을 걸어 남자는 제 볼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기기나 설비, 그 흔한 연구실의 단말 화면도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여자는 허리까지 늘어뜨린 꽁지머리를 흔들며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수술대 위 마른 체형의 몸. 살갗 위로 드러난 갈비뼈. 여자의 손가락이 남자의 피부를 훑어 위로 향한다. 근육이라고는 없는 앙상한 뼈와 가죽들. 쇄골을 쓸며 부러진 목에서 멈춘다. 골격근이 피부를 찢고 밖으로 비어져 나온 기역자 모양의 사고현장. 표정은 그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다.

 

[좋아 새로운 친구.]

[네 비밀을 말할 차례야.]

 

옆으로 꺾인 목을 바로 세우며 여자는 바닥 타일을 발로 두드렸다. 타일이 위로 올라가 감추어져 있던 정비용 장비와 수술 장치들이 조용히 정렬된다. 작고 세밀하게 세공된 장비들이 얇은 받침대에 올려져 있다. 여자가 장비들을 집고서 불꽃을 튀긴다. 짧은 정비 후 여자가 남자의 등으로 손을 집어넣어 만지작대었다. 기묘한 기계음이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른다.

 

[.......]

 

[말해봐 친구.]

 

[........]

 

[걱정할 것 없어.]

[그 허 씨 남자들은 없으니.]

 

[.......여긴 어디죠?]

[그리고 전.]

 

눈과 입이 닫힌 얼굴 아래로 목소리만이 튀어나온다. 여자가 음성 출력기기를 손보며 음량을 확인한다. 남자의 목으로 뚫린 구멍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돌리고 조인다.

 

[전 어떻게 된 거죠?]

 

남자 형태의 몸에서 출력되는 늙은 남자의 목소리.

 

[자 말해줘, 친구.]

[넌 누구지?]

 

[전.]

 

덜컥.

 

두꺼운 철로 된 문이 안으로 움직인다. 문을 밀어 불쑥 나타난 이는 말쑥한 차림새의 남자였다. 여자가 그를 맞는다.

 

[방해는 사절인데.]

 

빳빳하게 묶은 머리칼을 세차게 흔들며 여자는 다리를 꼬았다. 남자가 재킷을 앞으로 당겨 주름을 없앤다. 거만한 말투로 문장이 튀어나온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연화 씨.]

 

여자가 콧방귀를 낀다.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생략해.]

[징그러우니까.]

 

늙은 몸체의 목구멍에 들어간 여자의 손이 부품을 몰래 돌린다. 남자가 점잖게 자세를 잡고 서서 용건을 말하였다.

 

[경과보고를 부탁드립니다.]

[절차상 필요한 과정이라서요.]

 

[나중에 말해주지.]

 

여자가 말을 짧게 끊는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신경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차였다.

 

[경과를 보고해주십시오.]

 

[좋아.]

 

여자가 소리 나게 의자를 끌어 수술 장치들과 기기들을 바닥 타일로 내린다. 그녀는 제대로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몸이 의자 등받이 기대어지고 다리가 한껏 아래로 꼬아진다. 파묻힐 듯 앉아 있던 그녀는 입 꼬리를 이죽거렸다.

 

[그 절차 상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말해주지.]

 

여자가 얌전히 눕혀진 기계 덩어리로 손을 벌리고 연극을 하듯 팔을 휘적거렸다.

 

[목 부러진 바이오로이드 하나 그리고.]

[자살로 유추해 볼 수 있는 행동 그리고.]

[원인은 생전의 기억 그리고.]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만 벌리는 그녀에게 남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여자의 이죽거리는 입 꼬리가 기운을 잃고 아래로 쳐진다. 여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남자에게 면박을 주었다.

 

[네가 다 알고 있는 것들뿐이야.]

[거기서 뭘 더?]

 

남자가 기계 몸체로 다가가 상체를 구부린다. 그의 눈이 늙은 남자의 발가락에서부터 여자의 손으로 헤집어진 목에 까지 닿아 훑어 올라간다. 안드로이드에게 눈을 박고서 남자는 말하였다.

 

[칩은 어디 있죠?]

 

여자가 꼬았던 다리를 바꾸고 팔을 머리에 인다. 의자 가득 그녀의 몸이 파묻혀 뒤로 기울어진다.

 

[칩은 문제없어.]

 

남자가 눈을 들어 여자를 노려본다.

 

[그게 다야.]

 

여자의 태연한 말소리와 행동에 남자는 구부렸던 상체를 길게 펴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게 전부이면 안 되죠, 박사.]

 

[그 호칭이 훨씬 좋은 걸.]

 

[당신은 고객들의 기호에 맞추어 정보 집합 처리 개체 칩을 조정하여야 합니다.]

 

[충분히 거리감도 느껴지고 가깝지 않은 호칭이야.]

 

[우리 회사의 제품에서 이런 사고가 재발되어서는 안 됩니다.]

 

[친근하지도 않고 딱딱한 느낌의 어투까지.]

 

[우리 Well Life 사의 모토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앞으로 그 호칭을 써주겠어?]

 

남자의 눈이 여자를 내려다본다. 색도, 빛도 없는 우울이 가득 담긴 남자의 무뚝뚝한 얼굴에서는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여자가 비꼬는 어투로 남자를 불렀다.

 

[절차의 츠지다 씨?]

 

남자가 안경을 고쳐 올리고 자켓을 다시 앞으로 당긴다. 남자가 말한다.

 

[칩은 어디 있죠?]

 

여자가 답한다.

 

[아무 문제없어.]

 

츠지다가 집요하게 캐 묻는다.

 

[チップはどこにありますか]

(칩은 어디 있습니까?)

 

연화가 끈질기게 되받아친다.

 

[No problem.]

 

[칩 속에 내장된 생전의 기록들에 대한 보고가 필요합니다.]

 

[This is not your business.]

(그건 네 알바 아니지.)

 

[手続きは、規則です。]

(절차는 규칙입니다.)

 

남자의 끝없는 질문에 여자는 혀를 빼며 어깨만을 으쓱거렸다. 그녀의 장난 같은 모르쇠에 츠지다는 눈을 감고서 뒤로 몸을 젖혔다. 숨을 들이키는 숨소리가 텅 빈 연구실을 채운다. 남자가 연화의 얼굴로 상체를 기울여 또박또박 다시 묻는다.

 

[저 칩 속에든 것이 정말 허 정 맞습니까?]

 

여자가 남자에게로 이죽거리며 발을 휘적거린다.

 

[뭐래.]

 

여자가 엄지를 치켜들어 제 옆에 누운 늙은 몸체의 바이오로이드를 가리킨다.

 

[그럼 이게 누구인데?]

 

남자가 등을 돌리고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츠지다가 연화에게 경고의 말을 낮게 이르었다.

 

[그런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연화가 손을 까딱인다. 츠지다는 짧은 한숨을 내고서 두꺼운 철문을 열어젖혔다. 연화는 배웅하던 자세 그대로 목구멍에 들어있던 부품을 반대방향으로 돌리었다.

 

[자 친구,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얘기해줘.]

 

여자가 고개를 뒤로 돌려 늙은 몸체를 쳐다보았다.

 

[넌 누구지?]

 

덜컥.

 

다시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여자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망할 절차의 빌어먹을 츠지다, 바쁘니까 나중에 오겠어?]

 

[선배.]

 

두 번째 방문자는 자신과 함께 연구를 하던 동료였다. 연화가 다시 표정을 푼다. 그녀의 목소리가 친근한 느낌의 분위기로 뒤바뀐다.

 

[여, 친구 무슨 일이야?]

 

[그 호칭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아까 나가더니, 무슨 일?]

 

동료가 문간에 선채로 손만을 이리저리 휘적거리었다.

 

[손님이 와서 말이에요.]

 

[손님?]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손님이라면.

 

[안내소로 보내야지.]

 

[그게.]

 

동료가 문 너머와 연구실 사이에서 눈을 굴렸다. 그는 난처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허 씨 집안의 사람이 찾아 왔어요.]

 

연화가 고개를 틀어 늙은 안드로이드를 돌아본다.

 

[허 씨 집안?]

 

[네, 그게.]

 

동료가 몸을 비킨다. 철문 너머로 바른 맵시에 수수한 차림의 사내가 불쑥 발을 내딛는다. 루비 원석의 장식용 시곗줄이 양복 자켓 사이로 드문드문 보인다. 동료가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소개한다.

 

[이 분이 허 정이라는 분의 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남자가 연화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화는 허 씨 저택에서 온 방문자의 손을 맞잡았다. 동료가 철문을 닫고 연구실을 나간다. 연화와 허 씨 저택의 남정네, 둘만이 남겨진다.

 

[누구시죠?]

 

남자가 답한다.

 

[저 분의 아들, 허 훈이라고 합니다.]

 

연화는 차분하게 웃어보였다. 누가 보기에도 어색하고 과장된 미소가 얼굴 가득 일그러진다.

 

[무슨 용무로?]

 

허 훈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칩을 꺼내 손으로 펼쳐 여자에게 보여준다. 단호한 말투로 허 훈이 말하였다.

 

[저 칩을 내게 주시오.]

 

여자가 한껏 찡그려진 입가로 단어들을 뱉었다.

 

[왜죠?]

 

허 훈이 손에 놓은 칩을 보란 듯 내밀며 말하였다.

 

[이 칩이 제 아버지, 허 정입니다.]

 

[그렇군요.]

 

연화의 시큰둥한 반응에 허 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저 칩은 제 것입니다.]

 

[맞아요, 허 씨 집안의 저택용 바이오로이드였죠.]

 

허 훈이 들고 있던 칩을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서 늙은 몸체의 바이오로이드에게로 다가갔다. 연화는 몸을 기울이며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제가 흥미가 동해서 말이죠.]

 

허 훈이 연화에 맞서 함께 팔짱을 끼었다.

 

[뭐하자는 겁니까?]

 

연화는 이죽거리던 입을 풀고 턱을 매만졌다. 굳어있던 근육을 풀며 저택의 남자를 마주본다. 그녀가 허 훈에게 손을 내민다. 허 훈은 내팽겨 쳤던 칩을 주워 연화에게 건네었다. 칩을 돌려보고 빛으로 비춘다. 손에 쥐어져있던 칩이 연구실의 어둠 너머로 던져진다.

 

[무슨!]

 

[그럴싸한 걸 가져오세요.]

 

한껏 몸을 기울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발을 까딱인다.

 

[양산 형 메이드 시리즈 칩하고 우리 회사 칩하고 비교하면 안 되죠.]

 

눈을 피하고 헛기침을 뱉는다. 허 훈의 당혹스러운 얼굴 앞에서 연화는 안드로이드의 음성 출력을 높였다. Well Life 사의 제품들은 모두 정교한 카메라와 마이크 가능을 하는 정교한 기록 장치들이 내장되어 있다. 회사는 보다 세심하고 배려있는 서비스를 베풀어야 했다. 고객들의 모든 정보와 사생활을 녹화함으로서 회사의 모토는 굳건히 지켜져 왔다.

 

[제가 좋은 걸 발견했어요.]

[당신과 이 안드로이드의 대화 말이죠.]

 

허 훈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연화는 신이 나 조잘거렸다.

 

[겨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안드로이드라니.]

 

허 훈이 멋대로 수술대로 다가가 제 아버지의 몸을 딴 기체를 더듬었다. 허 훈의 손이 안드로이드의 두개골을 훑는다. 연화가 눈썹을 올리고서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안드로이드의 두개골을 잡고 훑어가려 하자 익숙한 말투가 그를 막아 세웠다.

 

[그만!]

 

허 훈의 팔을 붙잡은 안드로이드가 절규하듯 소리친다.

 

[제발, 그만하세요!]

 

연화가 웃으며 허 훈을 달랜다.

 

[함께 들으시죠.]

[그녀도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데.]

 

허 훈이 팔을 내리고 뒤로 물러선다. 연화가 구두 굽으로 바닥 타일을 두드리자 허 훈의 밑으로 의자가 올라온다. 두 사람이 수술대에 누운 안드로이드를 바라본다.

 

[자, 친구 무서워하지 말고.]

[얘기해줘.]

 

연화의 고개가 안드로이드의 목 가까이 닿아 부딪힌다.

 

[어째서 겨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거지?]

 

안드로이드가 답한다.

 

[죽고 싶어서요.]

 

허 훈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연화 역시 고개를 올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드로이드는 제 속에 품어왔고 바라왔던 것들을 이야기하였다.

 

[죽을 수 있는 생명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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