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이의 발 치로 자오랑이 쓰러져 숨을 토해낸다. 그의 손과 발이 부들댄다. 그녀가 무릎을 구부려 자오랑의 귓가로 속삭인다.

 

[殺しはしません, 心配しないでください。]

(죽이진 않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일어나 허 백의 몸을 품으로 안아 올린다. 그를 안고서 그녀는 언젠가 나노하 가문이라는 한 인간들의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자장가 하나를 불렀다. 곤히 잠들어 있는 백의 얼굴을 보며 단이는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그를 부른다.

 

[しろさん。]

(시로 씨.)

 

요코가 그에게 불렀던 별명. 그녀가 허 백을 보며 부르듯 다가갔던 장난스러운 이름. 한때에서 계절처럼 피어났던 그녀와 그 사이의 애칭들. 일본어를 모르는 백이 그녀를 부를 때 내던 서툰 발음까지 단이는 모두 알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백이 그녀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요꼬.]

 

단이가 그에게로 볼을 비빈다.

 

[はい, しろさん。]

(네, 시로 씨.)

[今一緒にいましょう。]

(전 여기 있어요.)

 

단이가 바깥을 향해 걸음을 걷는다.

 

 

 

 

한거정은 저택의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저택 전체로 회사의 일꾼들이 방들과 홀들을 누비고 하녀 안드로이드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뒤를 바짝 쫓거나 훼방을 놓았다. 몇몇의 하녀들은 저택의 방들을 하나씩 열어 보며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수 십, 수 백의 발자욱 소리가 저택의 마루를 뒤흔들고 벽 뒤로 소란을 일으킨다. 어수선한 저택 내 분위기에 소녀 안드로이드 하나가 사람들과 하녀들의 다툼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멋대로 열린 방들을 차례로 구경하던 소녀가 허 백의 방에서 멈춘다. 벽의 아래로 난 작은 구멍을 향해 선다. 그녀의 치마 자락이 쉼 없이 팔락거리고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다른 소녀들도 함께 두런거렸다. 처음 구멍을 발견한 소녀 안드로이드가 앞장서서 들어간다. 몇몇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구멍으로 들어간 소녀는 저 혼자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리었다. 그녀 혼자 굴로 총총 걸음을 내딛는다. 겁을 먹고 뒤에 남은 소녀들이 무어라 말들을 보내지만, 굴은 어두운 그늘의 뱃속에 삼켜진 용감한 소녀의 걸음소리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소녀 안드로이드가 네 개의 구멍이 모인 빈 통로에 닿는다.

 

[あら]

(어머.)

 

남자 인간을 안고 걸어가는 여자 하나. 여자 안드로이드 하나. 그녀는 통로 중 하나에 서서 소녀를 보고 있었다.

 

[誰が注文したんですか?]

(누가 보냈니?)

 

마른 흙을 밟는 구두 소리가 흙으로 지어진 깊은 지하를 메운다. 소녀가 얼어붙어 그대로 멈춘다.

 

[それとも道に迷ったんですか。]

(길을 잃은 거니?)

 

소녀는 조심스럽게 뒤로 움직였다. 눈앞의 그녀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만 아주 조금씩.

 

[もしかしてその下女が私を探せと言いましたか。]

(혹시 하녀가 나를 찾으라고 했니?)

 

그녀의 발소리가 소녀의 발자욱을 따라 천천히 다가온다. 소녀 안드로이드는 손을 꼭 쥐어 제 겁을 달래었다.

 

[確か]

(하긴.)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下女たちがそんなことをするはずがないでしょう。]

(그 하녀들이 그런 짓을 할리 없지.)

 

그녀의 팔이 몸 뒤로 꺾여 옷 속을 뒤적거린다.

 

[あの子たちは]

(걔네는.)

 

소녀의 눈이 그녀의 팔을 뚫어질 듯이 지켜보았다. 그녀의 연산장치가 달구어질 듯 빠르게 열이 오른다.

 

[くだらない子たちなんです。]

(재미가 없거든.)

 

소녀가 몸을 뒤로 돌려 힘차게 다리를 펼쳐들고 동력을 최대로 높인다. 단이의 거대한 조경용 가위가 손에 들린다. 단이는 미소를 지었다.

 

[そうではないですか?]

(안 그래?)

 

소녀의 느릿한 달음박질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앞으로 헤엄을 쳤다. 고요한 바람과 파도의 위에서 버둥거리던 어린 소녀, 안드로이드의 등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녀의 몸이 날카로운 가위에 꿰뚫린다.

 

 

 

방에 남아 있던 소녀 안드로이드들이 어둠 너머로 소리를 친다. 그녀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방의 허공으로 빙글빙글 돌고 굴 속을 가리키며 소리치기도 한다.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들은 고심 끝에 방에서 나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인간 남자가 복도를 가로질러 다가온다. 그녀들은 그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가 소녀들의 팔에 이끌려 벽으로 난 구멍과 마주한다. 남자가 빛을 켜 어둠을 밝히었다. 하나씩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굴속으로 들어간다. 소녀들이 남자의 걸음을 지켜보며 저들끼리 손을 맞잡고 숨을 죽인다. 걸음 몇 개로 남자의 모습이 어둠에 삼켜진다.

 

한거정의 발 아래로 무언가 밟힌다. 그가 든 빛이 땅 위를 비춘다.

 

[妈的!]

(우읍!)

 

피와 부품들이 흩어져있다. 한거정은 발끝으로 쓰러져 있는 안드로이드 몸체를 앞으로 굴리었다. 중국 기업의 심부름용 안드로이드, 천란. 그녀의 배가 꿰뚫리었고 구멍이 난 자리부터 왼쪽 가슴과 어깨까지 갈가리 찢어져 있다. 반으로 두 동강난 안드로이드에서 한거정은 상처 부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몸에 난 구멍은 깔끔했다.

 

[是锐利的东西啊]

(예리한 물건이야.)

 

배에서 생긴 구멍에서부터 시작한 상처는 과할 정도로 지저분하였다.

 

[好像不是沉稳的性格]

(차분한 성격은 아닌 것 같군.)

 

일어나 앞으로 걷는다. 네 개의 굴. 정면의 굴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과 전자음. 그가 소리친다.

 

[的略语, 在那儿吗?]

(자오랑!)

(거기 있어?)

 

숨에 차 허덕이는 비명. 쉰 소리가 들려온다.

 

[的略语!]

(자오랑?)

 

한거정이 정면의 굴로 들어간다. 난잡하게 늘어진 전선들과 모니터 하나. 그가 벽 하나를 가리고 있던 천막을 들춘다. 역한 냄새가 그의 얼굴을 덮는다.

 

[妈的!]

(젠장!)

 

그의 욕이 냄새에 막혀 발치로 떨어진다. 검붉은 핏덩이들이 방치되어 벽과 바닥으로 가득 달라붙어 있다. 연한 살 조각들이 엉겨 붙은 전선의 끝은 날카로운 칼날들이 박혀있다. 녹슬고 오래되어 닳은 전선들과 방치되어 부패한 피곳물들이 방의 중앙에서 부터 번지고 향하여 있다. 한거정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서 시선을 돌린다. 머리와 팔, 다리가 전부 분해되고 척추와 뇌수에 연결된 전선들이 붉은 빛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성인 여성의 몸 덩어리가 혁대와 끈으로 수술용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녀의 척추와 연결된 전선들 중 하나가 단말기에 붙어 있었고 같은 글자를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소리조차 없는 비명이 가족을 부르고 있다.

 

커헉.

 

[没事吧?]

(자오랑?)

 

한거정이 쓰러진 동료에게로 다가간다. 그의 목은 붉은 자국으로 멍이 들어있었다. 한거정은 자오랑에게 재촉하였다.

 

[发生了什么事吗?]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这是什么情况!]

(이게 대체 뭐냐고!)

[犯人到哪儿去了?]

(범인은 어디로 간 거야!)

 

그의 정신없는 재촉에 자오랑은 간신히 팔을 들어 가리켜 보였다. 그의 콜록거리는 숨이 단어들을 쏟아낸다.

 

[彼女が逃げようとしています。]

(그녀가 도망가려 해요, 선배.)

[地下があちこちにつながっています。]

(굴이 이곳저곳으로 퍼져 있어요.)

[彼女を今すぐ捕ま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당장 잡아야 해요.)

 

한거정이 자오랑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请翻译后说话!]

(통역장치를 꺼!)

(끄고 말하란 말이야!)

 

자오랑이 한거정의 얼굴로 제 눈을 들이밀어 굴 너머를 가리킨다. 그가 있는 힘껏 목을 쥐어짜내어 소리를 터뜨린다.

 

[先に行ってください、早く!]

(가요, 어서!)

 

자오랑의 이빨 사이사이로 붉은 핏물이 스며든다. 한거정은 곧바로 일어나 통로들을 질주하였다. 이곳저곳으로 얽힌 어지러운 굴들로 달음질 쳐 연신 숨을 헐떡거렸다.

 

 

 

 

 

재와 먼지만이 가득한 저택의 정원으로 일꾼들이 안드로이드를 회수하여 간다. 제 목을 부러뜨리고 자살한 안드로이드에 대해 그들은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질문이 있는 것은 허 훈 쪽이었다.

 

[안드로이드가 자살도 합니까?]

 

점잖게 빼어 입은 양복의 남자가 정원의 바닥재를 발로 차며 대답한다.

 

[가끔 있는 일이죠.]

 

[가끔 있다니요?]

 

양복의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을 짧게 끊었다.

 

[생전의 기록과 기억들을 이용하였으니까요.]

 

허 훈은 그의 수수께끼에 어울려 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양복 남자의 발끝이 같은 곳을 집요하게 두들기었다.

 

[그래서 뭡니까?]

[안드로이드가 왜 자살한 겁니까?]

 

바닥을 괴롭히던 발을 멈추고 꼿꼿이 서서 남자는 허 훈을 마주보았다. 그가 묻는다.

 

[그런데 고객님은 안드로이드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남자가 허 훈의 눈을 뚫고서 그의 뇌 속을 보려는 듯 시선을 못 박았다.

 

[보통은 주문하신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실 텐데요.]

 

그가 허 훈에게로 바짝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다지 가족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신가 보군요.]

 

허 훈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서 반박하였다.

 

[그건 댁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허 훈의 으름장에 남자가 뒷짐을 지고서 걸음을 물렸다. 뒤로 물러난 그는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가 바닥을 건드렸다.

 

[회사의 정보 집합 처리 개체 칩 중 몇몇은 지나치게 있는 그대로 복사를 해서 말이죠.]

[고객님들의 요청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아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정보 집합... 뭐요?]

 

[뇌 말입니다.]

 

남자는 허 훈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이 아크릴과 열합성 소재로 뒤섞인 단단한 바닥재가 보일 때까지 땅을 파헤치는 제 발끝을 보았다. 허 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 말입니까?]

 

[방금과 같은 이런 상황이죠.]

 

남자의 척추가 펴지고 그의 메마른 눈이 허 훈의 피부에 달라붙는다. 허 훈이 묻는다.

 

[그래서 그게 다 무슨 말이죠?]

 

남자의 혀와 인위적일 정도로 하얀 치아가 건조하게 단어들을 조합하였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당황한 얼굴로 눈을 찌푸리는 허 훈에게 남자는 문제를 내주었다.

 

[고객님의 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알아야 합니까?]

 

남자가 다시 고개를 바닥으로 박았다.

 

[이해에 도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멀리로 일꾼들이 장비를 옮기고 정리를 한다. 하나 둘 자리를 뜨는 그들의 부산스러운 소리에 양복의 남자는 땅을 파헤치던 발을 멈추어 구두에 잔뜩 묻어 나온 흙을 장식용 돌에 갖다 대어 문질렀다. 그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본다.

 

[이제 가봐야겠군요, 그럼.]

 

떠나는 그를 허 훈이 잡는다.

 

[그래서 정답은 뭡니까?]

 

남자가 녹아내린 정원의 천장을 올려다본다. 날씨 조절 장치가 녹고 거대한 원형 모양의 아크릴 벽이 무너진 정원 전체가 흐린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자살을 했더군요.]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을 전한다.

 

[보통은 부정적인 기억과 기록들을 모조리 조정하고 조작을 해둡니다만.]

 

남자가 뒤를 돌고 허 훈의 일그러진 얼굴을 구경 하듯 바라본다.

 

[허 씨 집안의 장남이 꼭 못을 박아 두어서 말입니다.]

 

맨 하늘로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재들이 날리고 정원은 잊히어진 계절을 부르고 있다. 온 곳으로 눈이 덮여 생명들이 잠드는 계절. 시와 동화. 매일 밤 들려주었던 이야기로 아버지가 허 훈에게 해주었던 말.

 

양복의 남자가 입을 연다.

 

[안 그렇습니까?]

 

기억이나 기록을 조작하지 마라. 생전의 모습 그대로 데려와 달라. 허 훈은 제 아버지에게 들어야할 말이 있었다. 너무도 오래전에 들어서 기억나지 않는 그 문장을 허 훈은 알아야했다. 매일 밤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지친 마음을 달래어준 그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의 기억을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겁니까?]

 

자신을 사랑했으니까.

 

[물론입니다.]

 

남자가 제 길로 잿더미를 가로질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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