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은이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였다. 허 백, 저택의 주인 분들 중 하나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그녀는 하녀에게 부탁해 겨울과 계절에 대해 공부하였다. 어째서 겨울이 오는지, 겨울이 오면 왜 동식물들이 잠에 드는지, 눈으로 덮인 그 세상이 왜 그리도 온통 선 잠에 빠져야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질문을 하였는지. 은이는 연산장치가 있는 머리를 짚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려는 건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려 하는지. 정말 인간이 되고 싶은 걸까.

은이는 겨울이 보고 싶었다.

[우리도 죽을 수 있을까.]

그녀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 인간 분께 실례가 된 것은 아닐까.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지는 않을까. 인간이라면, 겨울을 경험한 인간이 있다면 기계 덩어리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한거정은 저택에 있는 모든 안드로이드들을 찾아다녔다. 기계가 하는 증언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녹화기록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자오랑이 빠르게 수첩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이런 식이면 너무 오래 걸려요.)

한거정의 눈이 발갛게 타들어가고 있다. 어젯밤으로 저택을 녹화한 가정용 안드로이드들의 기록들이 쌓이고 쌓인다. 자오랑의 눈에 한거정의 방식은 터무니없고 쓸데없어 보였다. 수첩을 뒤적이며 정보들을 추린다.

(실종된 안드로이드가 사라진 건 차남의 방에서부터였어요.)

(그 차남과 관련된 뭔가가 있을 거예요.)

(기다려봐.)

수첩을 톡톡 두드린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의 귀로 자오랑의 말이 맥없이 떨어진다. 자오랑은 그런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차남은 극단적인 인권단체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리고 식물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허 씨 저택의 정원은 기업의 상징이기도 할 정도로...)

한거정의 허리와 머리통이 기록 단말기에 고꾸라질 듯 한껏 꺾여있다. 자오랑은 궁금하였다.

(그 하녀의 기록은 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한거정이 눈을 비빈다.

(자네가 들었다던 그 증언 기록?)

(분명 자기 입으로 요코와 정원용 안드로이드가 같이 있다는 걸 보았다는데요.)

(그럼 가서 확인해 봐.)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

(안드로이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아니, 안드로이드는 거짓말을 못해.)

(그럼, 대체.)

(기록 데이터들이 덧씌어졌거나 조작 당한거지.)

(누군가가 그 하녀 안드로이드를 조작했다는 겁니까?)

(그럼, 그럼 누군가가.)

한거정이 눈을 짚고 다시 치뜬다. 안드로이드들의 기록 단말을 들여다보고 다시 눈을 짚는다. 한거정은 피로해진 눈을 쉬게 하고 싶었다. 눈에 힘을 주었다가 풀고는 다시 화면을 본다. 그에게는 풀어야할 의문이 남아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합니까?)

(글쎄.)

한거정은 그 누군가가 짐작은 되었다. 그러나 '' 그랬지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였다. 1분 간격으로 단말 화면을 들여다보고 다시 눈을 짚는 그에게 자오랑이 외치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무얼?)

(그 안드로이드가 조작 당했다는 거 말입니다.)

한거정은 뒤로 허리를 젓히고서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의 몸뚱어리에서 뼈 삭는 소리가 들린다.

(저택 예절 중 하나야.)

(저택 예절이요?)

(저택의 모든 안드로이드들은 그에 맞는 예절들이 기록 돼.)

(그런데 제 주인이 잠든 방으로 안드로이드가 들어가는 걸 내버려둔다고?)

연신 한숨을 내쉬고서 한거정은 벽에 기대었다.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올린다. 찌푸려진 미간이 피곤에 찌든 탓에 풀어지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가 내려가는 눈꺼풀과 함께 가라앉는다.

(그렇게 될 경우, 그 안드로이드는 폐기될 거야.)

(저택 예절에 어긋나는 거지.)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우리에게 실마리를 준 셈이군요.)

(실마리?)

자오랑이 밖으로 나가 하녀를 부른다. 그가 무언가를 물었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벽에 기대어 쉬고 있던 한거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저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안드로이드에 관련한 이상한 사건을 맡을 때마다 자오랑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저택의 하녀들이 말하길 요코는 차남의 방으로 갔다고 했어요.)

거기까지는 사실일 것이다. Well Life 사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는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녀가 제 주인의 방으로 가는 것을 하녀 안드로이드들이 막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정원용 안드로이드와 함께 있었다고 말한 하녀는 단 한 기 뿐이다.

(그리고 듣기로는 이 저택의 정원 중 하나가 관리되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자오랑이 제 수첩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사건의 피해자와 용의자가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고 그들의 신상 정보들이 지저분하게 얽혀 있다. 한거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지만 도통 수첩의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말로 해줘.)

(이 집 차남, 허 백은 인류학자이자 식물학자들의 클럽인 시에라 클럽의 회원입니다.)

한거정의 갸웃거리는 고개로 자오랑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시에라 클럽은 극단적인 인권단체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자생적 환경을 보호하는 단체이기도 해요.)

(그런 사람이 저택의 정원 하나를 방치한다?)

자오랑이 옷을 고쳐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한다. 한껏 들뜬 표정이다. 한거정이 있는 안드로이드 전담 현장 보고 팀으로 스스로 좌천되기를 자청한 이상한 청년, 자오랑. 안드로이드가 얽혀 있는 온갖 사건들에서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그의 사건 해결 방법 중 하나. 그가 말한다.

(제 직감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뭔가가 있어요!)

한거정은 몸을 일으키며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자네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기를 비네.)

두 사람을 하녀가 안내한다. 둘은 허 씨 집안 저택의 버려진 정원으로 향한다.

 

 

 

모든 노력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들여 준비했던 집안의 기둥이 쓰러지려 한다. 분노가 휩쓸고 간 노인의 몸은 차분한 냉기가 발밑에서 부터 천천히 번지어 갔다. 노인은 나이든 심장을 따라 걸음과 박동을 세었다. 하녀에게 부탁해 기름통을 준비한다. 부엌 서랍에든 성냥갑을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노인 역시 허 백이 끔찍이 여기던 정원으로 향하였다.

 

 

 

은이는 몸을 일으켰다. 광합성 조절기와 강수량 조절기까지 꺼둔 허 백의 정원은 먹구름이 낀 맨 하늘을 보고 있었다. 새싹들이, 흐린 먹구름으로 고개를 든다. 건너편으로 수리가 끝난 난이가 물을 뿌리고 은이는 허 백 몰래 인공 첨가물을 땅에 주입하던 중이었다. 노인이 정원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노인은 기름통을 정원의 주변으로 흩뿌렸다. 몸을 일으킨 은이와 노인의 눈이 마주친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겨울을 겪어 살아남은 인간을 만나야 했다. 성냥의 머리로 불똥이 튄다. 은이가 난이 쪽으로 몸을 튼다. 물뿌리개 통을 들고 선 난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성냥의 노란 불씨가 노인의 손에서 정원의 상록수 뿌리에까지, 푸른 풀밭의 곳곳으로 빨갛게 번지어나간다.

노인은 그대로 서서 불길을 맞았다. 늙은 인간의 몸이 불타오르고 상사화로 덮인 꽃밭이 잡아먹힌다. 난이의 옷가지가 불에 옮겨 붙어 맥없이 고꾸라진다. 노인과 난이의 사이에서 은이는 언니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부서지는 거야, 죽는 게 아니라.

주인님, 허 백 주인님. 정말 꽃이 시들면 다시 피어나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부서지고 다시 고쳐지는 것도 꽃과 같은 것인가요. 그런데 주인님.

불길로 휩싸이는 정원. 은이의 주변으로 불길이 거세게 오른다. 아크릴 전광판이 녹아내리고 깨진다. 밖으로 어수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우수수 쏟아지는 천장의 조각들로 은이는 생각하였다.

우리는 왜 꽃처럼 아름답지 않은가요.

굼뜬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녀의 몸은 제 의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불길에 이기지 못한 정원이 무너지고 한쪽으로 기운다. 불길에 휩싸여 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난이를 두고 은이는 노인을 안아 올려 그의 온 몸에 옮겨 붙은 불을 끌어안았다.

저택의 하녀 안드로이드들의 활약으로 불길은 자택으로까지 번지지 못하였다. 은이는 불길이 삼킨 잿더미를 돌아보았다. 저택용 안드로이드인 그녀의 눈은 그 무엇도 흘리지 못했다. 제 기억 장치에 기록된 소중한 것들을 뒤에 두고서 간신히 살린 노인은 얼마 가지 못하고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허 훈은 제 동생을 떠보았다.

[정말 요코가 죽었다고 생각해?]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훈은 자신의 질문을 바꾸어야 했다. 저택을 배경으로 주인을 둘러싼 여자 안드로이드들의 실랑이와 암투. 그는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형은 그게 정말 인간이라고 생각해?]

허 백이 먼저 질문을 던진다. 만약 여기서 동생이 생각을 바꾸고 Well Life 사의 안드로이드를 찾아다니는 것도 꽤 볼만한 이야깃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너는 어때, 생각이 달라졌어?]

허 훈의 기대와 다르게 백은 지겹도록 같은 대답만을 내놓았다.

[아니.]

허 훈의 눈 아래로 허 백의 손이 초조하게 떨린다. 요코의 부모님은 그녀를 진짜 자신들의 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백이 제 손톱을 당기고 살갗을 뜯는다. 허 훈은 다시 그를 떠보았다.

[Well Life 사에서 만든 안드로이드들은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니야.]

[인간의 의식을 옮긴 거지.]

자신의 이야기를 동생이 듣고 있는지 허 훈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제 동생, 백의 믿음이 고집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의 몸에 인간의 의식을 옮기는 건.]

[이미 많은 기업들이 시도해온 사업이었어.]

[우리 할아버지도 준비하고 계셔.]

[그런 게 될 리가 없어.]

[백아.]

허 훈이 동생을 부른다. 허 백의 뒤통수가 외골수처럼 한 곳만을 보고 있다. 훈은 그런 동생의 모습으로 저 혼자 쾌재를 불렀다. 고집이 있다는 건 제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이 해온 선택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허 훈은 그의 의심에 확신을 줄 여러 단어들을 신중하게 골랐다.

허 훈이 백의 뒤로 양 팔을 벌린다. 땅과 제품을 파는 기업가처럼 훈은 제 동생에게 생각을 고칠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도 곧 돌아오실 거야.]

허 백의 고개가 훈에게로 홱 틀어진다. 그의 눈이 훈을 흘겨보고 있다. 훈은 확신에 찬 몸짓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Well Life 사가 아버지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

[곧 저택으로 돌아오실 거야.]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하녀가 둘은 부른다. 허 백은 금방 의자에서 뛰어올라 복도로 뛰쳐나갔다. 허 훈에게 필요했던 것은 배우들이었다. 제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현할 수 있는 이들.

[무슨 일이지?]

하녀가 담담이 이야기한다.

[정원에서 일어난 화재로.]

[큰 어르신이 돌아가셨습니다.]

허 훈은 하녀 안드로이드를 제쳐 정원으로 향하였다. 화재가 일어난 곳에 대해, 들은 적이 없지만 훈은 자연히 동생이 아끼던 정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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