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숲의 시간

2021.04.07 20:5704.07

숲의 시간

 

“세미야, 우리는 아무래도 꿈 속에 있는 것 같아. 지난 일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봐. 도저히 우리가 알던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얘기야. 기적적으로 미세먼지가 반으로 줄어들고, 각국 정상이 기후협정을 체결하고, 전세계 사람들이 갑자기 나무를 심기 시작하고, 남극의 빙하를 수복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상용화되다니. 네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지 않아?

일 년에 걸친 관찰 끝에 나는 우리가 실제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 아마 우리 세상의 원본이 되는 실제 세상이 있고 우리의 원본인 실제 존재들도 있을 거야. 작년 4월 초, 그 세상에서 누군가가 아주 특별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여기는 그 누군가의 꿈 속인 거야.”

“누군가의 꿈이라기에는.. 너무 전부 진짜 같지 않아? 꿈이 이렇게 복잡하고 길고, 한 번 꿈꾸는데 이렇게 많은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어?”

“꿈 속의 시간이랑 바깥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잖아. 그리고 모든 꿈이 하룻밤에 헛되이 사라지는건 아니야. 이 우주에는 특별한 꿈들이 있어. 꿈꾸는 사람의 손을 떠나 자기 자신의 생명을 띄고 또 하나의 진짜가 되어버리는 꿈들. 그 꿈들은 아예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되어, 꿈꾸는 사람이 깨어나거나 심지어 죽은 다음에도 계속돼. 나도 그 존재를 들은 적만 있고 이렇게 들어와본 건 처음이야.”

세미의 오랜 친구 요정은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카페의 불투명한 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미야, 너도 알지? 이건 네 꿈 속인 거. 내가 지금 이걸 말하는 건 네가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야. 깨어나고 싶다면 말이야. 이 세상은 이제 원본이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려고 하고 있어. 나와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새로운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갈 거야. 우리는 네 꿈이 만들어낸 복제지만 원본과는 별개의 진실된 존재를 갖게 됐으니까. 너만이 아직 두 세상에 걸쳐져 있어. 너의 마음과 몸은 원래 세상, 일 년 전 4월의 잠 속에. 너의 영혼은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지만 이제 선택을 할 때가 왔어.”

세미가 집에 도착할 쯤에는 빗방울들은 진짜 세찬 빗줄기가 되어 있다. 엄마는 부엌에 있는 듯 했지만 마루에는 tv가 환하게 켜져 있다. 세미는 텔레비전 화면 속, 반 년 전 심은 나무들이 무성한 숲이 되어 석촌호수 주변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을 본다. 석촌호수 숲을 배경으로, 양 당이 온실가스 감축과 지구 재녹화를 위한 법안 발의에 극적으로 합의했으며, 남극 빙하 두께가 90년대 수준으로 회복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딩에 맞먹을 정도로 높은 나무들 사이로 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이 보였다. 냄비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엄마는 깔깔 웃으면서 할머니와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할머니의 치매는 너무 심해져서 걸어다니지도 못했고 하루 종일 알아들을 수 없는 욕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세미는 깨닫고 만다. 이건 사실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원래 진짜 세상에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건 이 세상이 꿈 속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꿈.

 

창 밖으로는 조금씩 계속 빗소리가 들리고, 영훈의 집은 어둠에 잠겨 있다. 하지만 영훈의 방은 아주 밝았고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커피와 과자들이 있었다. 세미가 과제를 같이 한다는 핑계로 영훈의 집에 놀러온 것은 그 달 들어 벌써 두번째였다. 영훈은 커피에 탈 우유를 조금 더 들고 들어와서 묻는다.

“돌아가지 않으면 원래 세상의 너는 어떻게 되는데?”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음, 그러니까 죽은 게 된대.”

“일 년 전 4월에?”

“응.”

“반대로 네가 돌아가면 이쪽 세상의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냥 없어지는 거야?”

“아냐. 그냥 없어지는 것처럼 되지 않게 요정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어. 마법을 써서 캐나다 워홀을 간 걸로 하고, 엄마 아빠 허락도 몇 달 전에 받은 걸로 해주겠다고. 그리고 캐나다에서 잘 사는데 집이랑 연락은 잘 안 되다가, 결국 캐나다 사람이랑 결혼하고 캐나다에 눌러앉는 거야. 엄마 아빠가 놀러오겠다고 할 때마다 무슨 사정이 생기고.”

영훈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과제를 하던 노트북을 아예 덮어버린다. 그리고 책장 위에서 안 쓴 공책을 하나 꺼내와서, 첫 장을 펴고 그 장의 맨 위에

KakaoTalk_20210407_172315415.jpg 라고 적는다.

“앞의 건 장점이고 뒤의 건 단점이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세미가 말한다.

영훈은 “지금 세상(꿈 속)에서는 유학으로 처리” 뒤에 괄호를 치고 “장점”이라고 쓰려다 말고 펜을 멈춘다.

“왜 장점인지도 말해줘.”

“음. 워홀간 게 되면 엄마 아빠와 친구들을 막 엄청 슬프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장점. 물론 갑자기 외국 가서 연락도 안 되고 다시 오지도 않으면 다들 좀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슬프게 하는 거랑은 다르니까. 죽은 게 되면 엄마 아빠와 친구들을 갑자기 너무 크게(아마도?) 슬프게 할 테니까 단점.”

영훈은 세미의 말을 천천히 받아적는다. 그대로 비는 그치지 않을 것만 같고, 집은 집이고 봄은 봄이고 지구는 지구고 동네는 동네대로 계속 그대로일 것만 같았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또 좋은 점 뭐 있지.” 세미는 말하면서 생각한다. “일단 날씨가 좋다. 너무 좋고, 미래가 걱정되지 않는다. 단점은 원래 세상이 어떻게 됐을지 걱정된다.”

“그렇다고 돌아가서 네가 뭘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맞아. 돌아간다고 치면 단점은 그거야. 미래가 엄청 걱정되는데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을 거야. 아마도 아주.” 영훈은 조용히 말한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돼?”

세미는 들여다보고 있던 공책에서 눈을 뗀다. 보통 영훈은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그렇게 확실히 자기 생각을 밝히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 년 전, 나도 생각나. 세상 일 년 후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나쁜 생각은 안 하려고 하지만 가끔 미래는 생각하기도 싫다고, 우리 말하지 않았어? 봄 없어지는 거. 여름이 우리가 모르는 어떤 무서운 계절로 변하는 거. 전부 그냥 하얀 먼지로 덮여버리는 거. 세미 네가 이런 꿈을 꾼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무려 꿈이 변해서 진짜 세상이 될 정도로 간절하게. 기적적으로 정말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난 거잖아. 돌아갈 생각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도 진짜 잘 모르겠어.” 세미는 영훈의 공책에 daisy-clipart-colourful-flower-18-transparent.png ←이렇게 생긴 작은 꽃을 몇 개 그리다 말고 말한다. “사람들 때문인가?”

“사람들은 여기도 있잖아.” 영훈은 세미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너는 이미 여기 있잖아. 원래 세상 일은 원래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돼?”

세미는 꽃을 더 그리는 걸 포기하고 영훈을 마주본다.

“..너도 거기 있잖아.”

“나는 여기도 있잖아.”

“여기의 너는 날씨가 좋아서 행복하고 자전거도 많이 타고 미래도 걱정하고 있지 않은데, 원래 세상의 너는 미세먼지에 고통받고 다가올 여름을 걱정하면서 미래를 무서워하고 있을 거 아냐.” 세미는 지적한다.

“걘 걱정할 것 없어. 네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잘할 거야. 은근히 어디서나 알아서 잘 사는 애야.” 영훈은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여기의 나도 완전히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야. 세상이 괜찮다고 내 미래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

“근데 아마 괜찮을 거야. 여기서는.”

“그런 게 아니라, 이 좋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너랑 최대한 잘 살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고. 그런데 네가 없어지면 도루묵이잖아.”

집에 돌아오는 길은 비가 오고, 어둡지만 하나도 어둡지 않고, 동네 냄새가 난다. 세미의 방에는 밤 늦게까지 멈추지 않고 빗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 밤이었다. 세미는 밤새 다른 생각에 잠겨, 같이 쓴 노트를 받아온다고 하고 두고 온 것도 다음날 아침까지 깨닫지 못한다.

 

그 주에는 비가 자주 오고 사이사이 꽃이 핀다. 라디오에 따르면 그해 여름은 평년보다 강수량이 조금(물난리 정도는 아니고 아주 조금) 많고, 평년보다 서늘할 모양이었다. 에어컨 판매량 저하가 우려된다고 했다.

 

동네 카페에서 세미가 영훈을 다시 만난 것은 또 비가 도시를 지켜주던 날로, 영훈은 페이지 가장자리가 꽃으로 가득한 공책을 세미에게 건넨다. 세미는 그것을 반갑게 받는다. 그리고 펜을 들고 줄을 쳐가며 그날의 노트를 다시 읽는 데 몰두한다. 세 시간 동안, 나지 않을 것 같은 결론이 날 때까지. 그 동안 영훈은 노트북을 열고 뭔가 하는 듯 하다가, 카운터에서 쿠키를 몇 개 더 사와서 세미에게도 주고 자신도 한 조각 먹고, 결국은 그냥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역시 안 되겠어.” 세미는 선언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단점이 너무 커. 그러니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안 슬퍼질 수는 없어. 나는 이 선택을 하기 싫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 세상에 너랑 있고 싶은데, 그래도 너무 슬플 것 같아.”

카페는 문을 열어둔 채였다. 그래서 테라스 밖으로는 아직 끝도 없이 남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실내는 비 내릴 때 특유의 우주에 있는 것 같은 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미는 떨릴 정도로 솔직하게 말한다. 그 정도로 마음을 다 털어놓은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런 건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단 돌아가기로 했어. 아무 인사도 없이 그런 세상에 사람을 남겨놓고 오기는 싫어서야. 너도, 엄마도. 물론 결국은 다 어떻게든 살겠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려고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걔도 엄청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좀 말할 것들이 있어. 그것만 말하고 어떻게든 다시 올게. 다시 여기로 올 방법을 찾을게.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다른 것도 말도 안 되잖아. 내가 이런 좋은 꿈을 꾼 것도, 그 꿈이 진짜가 된 것도, 우리가 진짜가 된 꿈 세상에 와 있는 것도. 아니 생각해보면 원래 세상부터가 하나도 말이 안 됐어. 몇 년 사이에 하늘을 볼 수도 없게 봄이 먼지로 가득 차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아니면 잠도 잘 수 없게 되고, 그런 일들 다 말이 안되잖아. 그러니까 내가 여기로 돌아오지 못하리란 법도 없어. 어딘가에는 그런 방법이 있을 거고, 난 언젠가는 그 방법을 찾을 거야.”

영훈은 짧은 시간에 아주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언젠가 말인데, 아주 먼 미래인 거지? 그러니까 몇 달이나 몇 년 정도가 아니라, 몇 십 년. 어쩌면 몇 백 년..”

“..맞아.” 세미는 인정한다. “가서 당장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원래 세상의 요정들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꿈에 대한 책도 읽고 모든 방법을 다 찾아보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언젠가는 어떤 기적적인 우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주, 아주 오래 기다리면 말이지?”

“솔직히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좋아. 기다릴게.” 영훈은 말한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한 계속. 다음 생에도 기억이나 영혼이 이어진다면 그때도. 어쩌면 한 번의 생으로는 좀 빠듯할 것 같으니까..”

“나는 정말 돌아올 거야. 그래서 너랑 석촌호수 숲을 산책할 거야. 그러니까 진짜 기다려줘야 돼.” 반은 근거 없는 희망으로, 반은 간절한 확신으로 세미는 말한다. 어쩌면 그런 희망과 그런 확신이야말로 우주를 직조하고 있는 실들이었으므로.

 

세미가 떠나는 날, 밤하늘은 보라색에 시간처럼 끝이 없다. 아직 있는 벚꽃들은 그러다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파트는 일 년새 몰라보게 자란 나무들로 덮여 있었지만, 또 고등학교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요정들이 알려준 대로 한양아파트 2동과 3동 사이로 가니 그 너머는 가로등도 아파트도 없는 안개 들판이었다. “나 갈게.” 세미는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내고 출발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미세먼지와 새벽 안개가 구별할 수 없이 섞인 우리의 세상이었다.

 

 

 

(식목일에 올리려고 했는데 이틀 늦었어요!)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715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열한 장 키미기미 12시간 전 0
2714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열 장 키미기미 12시간 전 0
2713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아홉 장 키미기미 2021.04.10 0
2712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여덟 장 키미기미 2021.04.10 0
2711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일곱 장 키미기미 2021.04.08 0
2710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여섯 장 키미기미 2021.04.08 0
2709 단편 네 번째 질문 피클 2021.04.08 0
2708 장편 정원의 여자들 - 다섯 장 키미기미 2021.04.07 0
단편 숲의 시간 작은것들의미밍즈쿠 2021.04.07 0
2706 장편 정원의 여자들 - 네 장 키미기미 2021.04.07 0
2705 장편 정원의 여자들 - 세 장 키미기미 2021.04.06 0
2704 장편 정원의 여자들 - 두 장 키미기미 2021.04.06 0
2703 장편 정원의 여자들 - 한 장 키미기미 2021.04.06 0
2702 단편 판타스틱 엔딩 킥더드림 2021.04.02 0
2701 중편 표적은 살아있다 신나길 2021.03.23 0
2700 단편 경비견 (3. 24. 수정) 한때는나도 2021.03.22 0
2699 단편 뛰어 봤자 플랫폼 소울샘플 2021.03.22 0
2698 단편 패어리오의 전언 (A Message from Fairy-O) 신나길 2021.03.19 1
2697 중편 복개 하천에는 수달이 산다 ㄱㅎㅇ 2021.03.14 0
2696 단편 다 죽어버려 1 키미기미 2021.03.14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