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하룻밤에 학 이천 마리를 접을 수 있다면

 

“오늘밤 안에 종이학 이천 마리를 접을 수 있을까?”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세미는 영훈에게 묻는다. 알바생 취향인 것 같은 이상한 락 음악들이 울려퍼지기 시작한 강남역 이십사 시간 카페의 구석에서였다. 카페 2층은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코트와 음료수들과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다.

“우리 둘이서?” 영훈은 되묻는다.

“응.”

“몇 시까지?”

“잠깐만”

세미는 요정에게 문자를 보내고, 요정은 금방 대답을 준다.

“해 뜨기 전까지만 하면 된대.”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요정들 부탁은 원래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둘 다 그 뜬금없음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세미는 도착한 문자의 나머지를 영훈에게 읽어준다.

“원래 매일 해주던 분이 있었대,”

“이천 마리씩 학을 접는 걸?”

“응. 하루 이천 마리씩 접고 매일매일 날씨가 좋아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었대. 지난 2월 초부터 계속. 그런데 오늘 갑자기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못 접게 됐다고. 종이랑 상자 같은 건 요정들이 열한 시까지 갖다줄 수 있대.”

영훈은 생각에 잠긴다.

“잠을 안 자면 할 수 있을 걸. 조별 과제 빨리 해서 보내고 야식 사오면 열두 시 쯤 될 거고. 그때 시작한다고 해도 일곱 시간은 있어. 중간에 두 시간 정도는 졸거나 딴짓 한다고 쳐도 다섯 시간.”

“다섯 시간?” 세미는 묻는다.

“요즘 해가 일곱 시쯤 뜨거든.” 영훈은 밤을 아주 자주 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앎과 평정심으로 말한다. “한 사람 당 일 분에 한 마리는 접는다고 치면..”

“일 분에 한 마리를 접을 수 있어?”

“..이 분에 한 마리?”

“십 분에 세 마리.” 손으로 하는 일에 유난히 자신이 없는 세미는 보수적으로 말한다. “너무 못생기게 접으면 안될 것 같아.”

“그러면 십 분에 세 마리는 접는다고 치면, 한 시간에 삼십 마리. 30x5=150. 그런데 우리는 두 명이니까 육백 마리..” 영훈은 약간 침울해진 눈치이다. “이천 마리가 생각보다 많군.”

“잠깐. 그러면 사람이 두 명에서 세 명만 더 있으면 되겠는데?”

세미는 반짝 희망을 가지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학 이 천 마리 접으실 분〉 채팅창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요정들 부탁입니다.**

올해 날씨가 자꾸 이상해지고 있대. (가만히 두면 작년 3월처럼 이상하게 덥고 하루 종일 황사? 하얀 먼지?로 덮인다고 함.) 그래서 매일 학을 접어서 소원을 빌어야 날씨가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 오늘 하루만 도와주실 분! 영훈이랑 저는 강남역 5번 출구 ** 2층 구석 긴 테이블에 있어요. 자정 시작. 그런데 더 일찍 와도 돼. 우리는 11시 반쯤 잠깐 가방 두고 나가서 야식 먹고 올 예정.

“저는 갈 수 있어요.”

“작년 3월 진짜 최악...”

정우와 미경의 답장은 거의 동시에 온다. (그 둘도 이제 세미와 영훈만큼이나 난데없는 요정의 부탁들에 익숙해 있는 터였다.)

“알바 끝나면 감. 나는 근데 밤새서는 못 있어. 내일도 알바랑 수업 있어서.”

빛을 받고 있는 뒷모습 프로필 사진 아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걸어둔 미경은 언제나처럼 매우 바쁜 것 같았지만, 의외로 더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하루 종일 접은 게 겨우 이거야. 생각보다 어렵더라구. 그렇지만 너희 인간들은 우리보다 종이접기를 잘 하니까..”

학이 백 마리쯤 든 상자와 백 장씩 묶인 색종이 뭉치들을 가득 들고 온 요정은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대단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미는 십 분 당 세 마리를 어떻게 어떻게 접기는 했지만 과연 이렇게 못생긴 학들이 요정들의 말대로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약간의 회의를 경험하고 있었다. 늘 인간의 희망의 근간이 되는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손을 멈추고 자기 앞에 놓인 학들을 하나하나 들어서 살펴보기 시작한 정우도 비슷한 자기 반성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훈은 구석 자리에 반쯤 몸을 접어넣고 앉아 멀리서 봐도 유난히 목이 곧은, 잘생긴 학들을 접고 있었지만, 과연 십 분에 한 마리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미경은 아르바이트 경력에서 오는 힘인지, 일정한 스피드를 잃지 않고 있었다. 조금 대중 없이 묶여 있던 색종이들을 잘 살펴보고 하트나 별 무늬가 없는 것들만을 골라서 가져갔던 그녀는 어느 사이 착착 깔끔한 단색 학들을 접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경의 맞은편에는 요정이 앉아서 그녀의 반의 반 정도의 속도로 유난히 부리가 동글동글한 학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걸 원래 하던 사람은 언제까지 매일 이천 마리씩 접어야 되는 거야? 영원히?”

미경의 질문에 요정은 고개를 흔든다.

“이천 마리로 안 될 거야. 2월까지만 해도 하루에 천 마리면 됐거든. 날씨가 바로 좋아졌어. 그런데 어느새 그걸로는 안 되더라구. 이대로 가면 4월에는 하루에 삼천 마리, 5월에는 아마도 사천 마리..”

“4월에 사천 마리일 수도.” 영훈이 조용히 지적한다.

“그럴 수도 있지.” 요정은 인정한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정미 씨 혼자 힘으로 계속 날씨를 지킬 수는 없겠지.”

“사람을 더 구하면?” 세미가 묻는다.

“매일매일 잊지 않고 학을 그렇게 많이 접어줄 사람이 또 있을까..? 시대의 흐름을 돌이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겠지.”

“아. 다른 시대에 태어나고 싶었다. 정말.” 미경은 세상에서 제일 진심인 목소리로 말한다.

“잘하면 늦기 전에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도 찾고 있어. 정말로..” 요정은 포기하지 않고 말한다. “아직 시간은 있어. 정미 씨 말로는 하루 삼천 마리까지는 혼자서 어떻게 될 것 같고, 그보다 늘어나면 친구들에게 부탁해볼 수도 있다니까..”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학들이 늘어나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고 학들은 별로 늘어나는 것 같지 않고, 세미가 책상 위에서 눈을 떴을 때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도 끝나고, 요정은 빈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 잔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세미는 처음에 미경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보니 몸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 자세로 턱을 괴고 잠들어 있었다. 영훈은 잠깐 자고 일어나려고 알림을 맞춰둔 듯 휴대폰을 잡고 조금 더 안정적인 자세로 엎드려 자고 있다. 2층은 거의 비어, 깨어있는 것이라고는 창문 옆 구석에서 노트북을 마주하고 후드를 쓰고 아주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애, 그리고 어쩐지 잘 세워지지 않는 학의 꼬리 부분과 씨름하고 있는 정우 뿐이었다.

그러나 영훈의 앞에는 아까 그의 속도로는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은 학들이 쌓여 있다. 세미는 상자 안에도 생각보다 많은 학들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영훈이 모두의 학들을 모아 상자에 넣고, 조금 더 하다가 잠든 것 같았다.

“우리, 생각보다 많이 했네. 잘하면 진짜 오늘 밤 안에 되겠다.”

간혹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지만 바깥은 어쩐지 아주 조용한 것 같다. 창문에서 워낙 먼 곳에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면 봄밤이었다. 그때는 아직 그들 모두 대학생이었고 서울의 밤이 그들에게 더 어두운 얼굴을 보여주기 전이었다. 정우는 아까 시킨 아메리카노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이 담긴 종이컵만 가득 쌓아두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래? 날씨 엄청 좋을 것 같은데.” 세미는 제안한다.

“그럴까요.”

정우는 말하지만 어쩐지 움직이지 않고 학에서도 눈을 떼지 않는다. 혼자라도 나갔다 와야지, 세미가 결심하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정우가 입을 연다.

“이거, 4월에는 삼천 마리가 아니라 사천 마리가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러면 6월에 하루 만 마리가 넘고 7월에는 이만 마리가 넘는데.. 서울을 다 뒤진다고 해도 하루에 학을 이천 마리씩 접어줄 사람을 열 명 구할 수 있을까요?”

세미는 머릿 속으로 숫자를 쓴다.

5월 팔천 마리

6월 만 육천 마리

7월 삼만 이천 마리

8월 육만 사천 마리..

“나는 7월까지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어쩌면 그 다음 달까지도. 벌써 9월에 십만 마리가 넘는구나.,”

그때까지 요정들이 서울의 날씨를 지킬 다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세미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그렇게 빨리 일어날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생각에는 아주 큰 슬픔이 있다. 봄이 나중에 언젠가 서울로 다시 돌아오더라도 일단은 그들 곁을 떠날 거라는, 전과 같이 있어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세미는 서울 사람이었고 서울 사람 중에 서울의 봄을(특히 무서울 정도로 부드러운 그 봄밤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세미는 다행히 그 새벽에 그 큰 슬픔을 다 느끼지는 못한다. 맞은편에 앉은 정우가 손을 멈추고 아주 슬픈 생각을 참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은 전염성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슬픔들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곁에 있는 사람을 용기 있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그렇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올해 봄이 있는 거잖아. 당분간은 정미 씨가 어떻게든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세미는 실제로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로 말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는 그걸 아주 잘 기억해야 돼. 그 봄의 좋은 부분들을. 그리고 학을 접는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봄이 한꺼번에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 거야. 작년에도 그랬잖아. 먼지가 있고 이상하게 더운 날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들이 있었어. 그걸 잊어버리면 안돼.”

기억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기억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가 물어보면 세미 자신도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희망의 말들이란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세미와 정우는 네 시 반쯤 더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이미 충분한 학들이 있고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므로 뭘 먹으러 다녀오거나 잠깐 눈을 붙여도 됐겠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열심히 학을 접는다. 여전히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슬픔을 쫓기 위해서였다.

네 시 사십 분쯤에는 손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맥락없이 바다가 생각난다.

네시 오십 분에는 영훈이 휴대폰 진동에 눈을 뜨고, 조용히 책상 위를 둘러보고, 밝은 목소리로 “많이 했네”라고 말한다.

다섯 시 십 분쯤 세미는 미경이 불편해 보이는 자세지만 사실 아주 고른 호흡으로 편안히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섯 시 반에 그들은 남은 색종이가 백 장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여태까지 접은 학들을 정리해서 상자에 담기 시작한다. 색종이는 넉넉하게 이천 오백 장을 가져왔다고 했으므로 어느새 이천 마리 넘게 접은 셈이었다.

세미는 피곤했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았고 조금 기분이 상쾌한 것도 같았다.

“용 접어본 적 있어?”

영훈이 맥락 없이 묻는다. 책상에 엎드려 어느새 다시 졸고 있는 줄 알았지만 휴대폰으로 뭘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용?”

영훈은 〈멋지고 쉬운 드래곤 접기〉블로그 포스트를 스크롤해 보여준다. 쉬운 방법이라고 해도 확실히 용 접기는 학 접기보다 복잡해서, 상당량의 색종이가 연습 과정에서 희생되고 만다. 하지만 접다보니 재미가 있고 접어놓으니 정말로 멋져서, 그들은 결국 용도 스무 마리 가까이 접어서 학들 사이에 집어넣는다. 그것은 남아있는 슬픔을 걷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요정은 다섯 시 오십 분 쯤 나타난다.

“응. 용도 있으면 좋지. 용들도 소원을 들어주고 옛날에는 날씨를 바꾸기도 했으니까. 정미 씨가 용 접는건 어렵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용케도 접었네.” 요정은 종이학들이 차곡차곡 들어있는 상자를 만족한 듯이 들여다본다. “정말 고마워.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을 거야. 피곤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돌아다니면 좋을 거야. 바로 들어가서 자기에는 아까운 날씨야.”

“다 된 거에요? 이걸 어디 갖다 주고 그럴 필요는 없어요?” 세미는 조금 얼떨떨해서 묻는다.

“천 마리 접었잖아. 소원은 이뤄졌어. 아주 멀리서부터 느낄 수 있었어. 밖에 먼지가 아니라 봄 안개가 끼어 있었거든.”

“그러면 학은..”

“아. 학들. 정미 씨는 아들이 천 마리씩 포장해서 블로그로 팔았다고 하던데. 그래도 되고, 나눠가져도 되고.”

아주 상쾌한 표정의 요정이 어느덧 푸른 새벽 속으로 떠난 뒤 그들은 조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많은 종이 동물들과 함께 남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팔릴 것 같지는 않았고 버릴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마도 1/4씩 들고 가는 방법 밖에 없었고, 영훈과 미경은 카운터에 가서 말해서 어떻게 어떻게 커다란 카페용 선물 상자 세 개를 얻어온다.


영훈과 함께 교보문고와 꽃이 있는 인도 카레 집과 2층이 넓은 카페들을 돌아다니면서 보낸 그 하루는 늦게까지 빛에 가득한 날이었다. 많은 것이 바람에 날리고, 아무 생각 들지 않고, 사실 많은 것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 봄은 그런 식으로 내내 날씨가 좋지만 역시 많은 기억을 남기지는 못한다. 슬픔이 없고, 아주 가벼워서 쉽게 날려가버렸던 탓이다. 진짜 좋은 봄날들이 그렇듯.

그렇지만 학 이천 마리의 밤이 남긴 것은 종이 동물들과 가물가물 완벽한 봄의 기억 뿐은 아니었다. 〈학 이 천 마리 접으실 분〉 카카오톡 방은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살아남아, 흩어져버릴 것 같은 날들의 매듭이 되어준다.

영훈이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사진을 공유한 그날도 그랬다. 그것은 수많은 종이학들이 빛을 둘러싸고 모여들어 있는 것 같은 사진이었다. 금속 링 같은 것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거기 다시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 새들이 매달려 있었다. 빛은 보이지 않는 중심부로부터 발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학과 새와 물고기들의 초현실적인 그림자가 천장에 비쳤다.

“종이학 샹들리에래. 장난 아니지. http://www.omiyageblogs.ca/2010/07/paper-inspiration.html

세미의 학들은 두 달째 침대 밑에 선물 상자 채로 기약 없이 들어있을 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세미는 그 사진에 왠지 끌려서 한참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데도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해둔다. 그 사진에 감명 받은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일주일 뒤 카톡 방에 미경은 “작업중”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업로드 한다. 금속 링과 실들과 실로 연결된 종이학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와.”

세미의 감탄사에 미경은 “주말에 만들 거야. 성공하면 방법 공유하겠음”이라고 쿨하게 답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주말에 그걸 만들고 성공하고, 링조명 사는 곳 링크와 작업 과정 사진 열한 장을 공유한다.

영훈: “나도 언젠가.”

정우: “언젠가2”

여름은 좋은 여름들이 그렇듯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영훈은 약속을 지킨다. 추석 연휴에 자리를 잡고 만들 계획으로 날개가 예쁜 학들을 고르는 중이라고 했으므로, 세미는 자신의 학들을 기증한다. 연휴가 지나고 완성된 것은 미경의 것보다 조금 미니멀리스트했지만 예쁜 샹들리에였다.

정우의 언젠가는 그렇게 빨리 지켜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빨리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으므로.

미경은 학 이천 마리를 접은 날 이후로 종이접기에 취미가 들린 듯 별도 접고 종이 배도 접고 훨씬 더 복잡한 구조의 생물들도 접기 시작한다. 미경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종이배 커튼이나 별들을 달아 만든 장식 전구의 사진 같은 것을 〈학 이 천 마리 접으실 분〉 채팅방에 업로드하고, 큰 성원을 받는다. 그 중 한 장은 미경의 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된다.

그들의 채팅방은 영원히 살아남지는 못한다. 한때 북적였던 모든 메신저 대화창들이 그렇듯, 그리고 우리 기억 속 서울의 봄이 결국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방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그들 곁에 머물러준다. 늦게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세상이 비어있는 낮이나 비가 내릴 것 같고 잠이 잘 오지 않는 새벽 같은, 슬픔이 응집되어 발생하는 순간들에 특히 그랬다.

영훈은 주로 한강 다리를 건너다가 찍은 사진들을 공유한다. 그는 어느 다리가 걸어서 건너야 좋은 다리이고 어느 다리가 자전거로 건너면 좋은 다리인지 알아내는 프로젝트 중이라고 했다. 몇 장에는 세미의 초록색 코트자락이 찍혀 있었다.

정우는 대답하는 시간만 보면 아주 종잡을 수 없어서 항상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일어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우는 빼먹지 않고 모든 사진을 확인하고 반드시 댓글을 달아준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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