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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밀라를 위하여

2021.02.28 02:1402.28

‘9월 12일. Tue. D-17. 신제중학교 B동 3층 자습실에서 쓴다.

나는 존나 힘들다.’

등 뒤에서 팔이 쑥 튀어나와 다이어리를 낚아챘다. 뒤를 돌아보니 자습 감독이다. 안경 쓰고 키가 작은 아저씨다. 애들 말론 고시생이란다. 공부 안 하는 애들은 자습실에서 내보내겠다고 30㎝ 자로 책상 칸막이를 탁, 탁, 치며 감시한답시고 돌아다니는데, 자습 분위기를 제일 방해하는 새끼가 본인인 줄도 모른다.

자습 감독이 내 다이어리를 쥐고 뚫어지라 쳐다본다. 당황스럽다. 썅…. 남의 일기를 왜 읽어, 변태 새끼가. ‘나는 존나 힘들다’라고 딱 한 줄 썼는데 존나 오래 쳐다보고 있네. 감독은 자습실에서 공부 말고 딴짓하면 벌점을 준다. 처음으로 벌점을 받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자습 감독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안경알 너머의 눈알 한 쌍이 다이어리를 보다 말고 나를 보았다.

자습 감독이 웃었다.

다이어리를 돌려준 자습 감독이 천천히 멀어져간다. 탁, 탁, 하고 책상 칸막이를 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나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자습 감독은 나에게 벌점을 주지 않았다. 자습 감독은 그냥 웃었을 뿐이다.

무섭다.

집에 돌아와 자습실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파를 다듬고 있던 엄마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너 시험공부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서관에서 할 거야.”

안방에서 아빠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짢다는 표시이다. 안에서 듣지 말고 밖에서 의견을 내고 싸우든가 말든가 하면 될 것을, 짜증 나는 개수작이었다.

엄마가 혀를 찼다.

“잘 해. 학원비 낸 거 다 쓸데없게 만들지 말고.”

마치 학원비보다 자길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없단 말투이다. 엄마는 늘 자기 인생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딸년이라는 것처럼 말한다.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면 아빠는 헛기침을 한다. 그건 동조의 의미이다.

아빠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편의점을 받았을 땐 드디어 상사의 꼰대질에 위 아플 일 없다며 웃더니, 편의점 일을 시작한 석 달 동안은 괜찮다 괜찮지 않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주말 저녁, 학원에 다녀왔을 때 식탁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빠가 나를 보곤 히죽 웃었다. 눈이 벌갰다. 그 눈으로 딱 한 마디 했다. 속았어.

그 후로 아빠도 엄마도 자기가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너무 힘들다며 내게 털어놓진 않았다. 단지 짜증을 낼 뿐이었다. 아빠의 예전 직장 동기에게 속아 운영하게 된 편의점 적자 때문에, 엄마를 아랫것 취급하는 보험 고객들 때문에 힘든 거면서. 고객들에겐 못하는 싫은 소리를 자식에게 퍼붓고.

저렇게는 살기 싫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이상하다. 이대로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 것 같다. 즐겁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간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중학교 2학년에 영원히 머무를 것만 같다.

그런 기분 때문인지 점점 무기력해진다. 수행평가도 학원 숙제도 할 수가 없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일기를 쓰기로 했다. 한 장 한 장 써나가는 일기. 그제도 어제도 살아있었고 오늘도 살아있다는 증명.

그렇지만 아무도 모를 말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만 계속 얘기하는 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책에 쓴 일기의 일부를 트위터에 옮겨 적었다. 트위터에다 직접 일기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학교에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휴대폰을 담임에게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SNS도 많은데 왜 트위터냐면, 블로그는 요새 쓰는 애들이 거의 없고, 페이스북은 실명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 싫기 때문이다. 실명제라는 건 자기 계정에다 부모가 지어준 본명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걸 누가 좋아해? 누가 페이스북 검색창에다 ‘윤진서’를 검색해 나를 찾아내는 건 상상만 해도 싫다.

트위터 어플에서 깃펜 버튼을 눌렀다. 글 쓰는 창이 떴다.

‘9월 3일. Sun. D-26. 내 방에서.

애니메이션 ‘표범성의 카밀라’를 전부 봤다. 원작은 벨기에의 라파엘 베버라는 작가가 쓴 소설인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아일랜드 작가의 ‘카르밀라’ 소설을 오마쥬한 소설이라고 했다.’

140자 넘을 것 같다. 새 트윗에다 마저 써야겠다.

‘‘카르밀라’는 1872년 작품이라는데 학교 도서관에 없어서 읽어보진 못했다. 아무튼, 다 봤다. 뭐라 할 말이 없다. 끝내주는 작품이다. 더 설명하기 힘드니까 그냥 꼭 보세요, 재밌어요.’

트위터 친구인 요루님이 내 트윗을 리트윗했다. 두 트윗 모두. 요루님은 내가 쓴 트윗들을 리트윗함으로써 내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유한 것이다.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요루님이 코멘트를 남겼다. ‘RT)표범성의 카밀라를 꼭 보셔야 해요. 제 인생작이에요.’

요루님은 어느 대학의 국문과 학생이다. 닉네임이 ‘요루’이다. 본명은 모른다. 그렇지만 나와 취향이 비슷하다는 건 안다. 대학생인데다 국문과라 그런지 안목도 높다. 똑똑하고 털털하고, 누구에게나 활달하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사람.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 존댓말을 쓰는, 상호 존중하는 친구이다. 언젠가 담임이 또 이상한 뉴스를 보고 왔던 날, 자습 시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반 애들에게 이런 헛소리를 했다. 얘들아,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니니까 조심해라. 순 개소리이다. 지는 다 늙어 갖고 인터넷에서 친구 하나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겪어보지 않은 세상은 가짜라고만 생각하는 꼰대 새끼.

‘표범성의 카밀라’의 1화를 처음 보고 내가 트위터에 감상을 남기자, 요루님은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모두에게 공개되는 트윗과 달리 트위터에서 ‘쪽지’란 건 내게만 개인적으로 보내는 것이고, 나와 요루님 둘밖에 볼 수 없다. 요루님이 내게 말했다. ‘저 혼자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작품인데 ‘†안티소셜†’님도 좋아하신다니 너무 기쁩니다! 혹시 주말에 시간 되세요?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서 사시면 저랑 만나서 같이 카밀라 얘기 좀 해주세요.’

개인적으로 메세지를 받자 요루님과 더 친해진 기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주말에 시간이 안 된다. 학원엘 가야 해서. 사정을 전하자 요루님은 화들짝 놀란 이모티콘을 쪽지에 담아 보냈다.

‘†안티소셜†님 중학생이셨어요? 죄송합니다, 저는 대학생이나 직장인인 줄 알았어요. 말투가 너무 어른스러우셔서!’

 

‘9월 5일. Tue. D-24. 안세미의 방에서 쓴다.’

안세미가 나를 초대했다. 5교시 끝나고 걔랑 같이 걔네 집으로 왔다. 드림힐 아파트에 산다. 평수는 42평. 안세미는 내게 자기가 구한 구체관절인형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나도 궁금했었다. 이때까지 내가 가진 인형이라곤 솜을 채워 넣은 봉제 인형, 초등학생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미미 인형이 전부였다. 구체관절인형은 그런 싸구려 인형들과는 전혀 다르다.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인형이다. 눈은 크리스털같이 반짝거린다. 그만큼 값이 비싸서 나는 갖지 못했다.

안세미가 구했다는 인형은 예쁘다. 먹구름 같은 곱슬머리에 눈은 물빛이다. 품이 넉넉한, 새하얀 린넨으로 만들어진 얇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맨발은 연약해 보이고 조그맣다. 사랑스럽고, 처음 보는 데도 왠지 익숙하게 느껴진다.

안세미가 나를 툭 쳤다.

“진서야, 이름 좀 지어 달라니까? 넌 글 잘 쓰잖아.”

잘 쓰진 못하는데 안세미보다는 잘 쓴다.

“노트북 켜 봐. 네가 카밀라 보는 동안, 나는 인형 이름 생각해 놓을게.”

안세미가 내게 인형을 보여주고 싶어 했듯이, 나는 안세미에게 카밀라를 보여주고 싶었다.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세미는 좀 멍청했던 것이다. 여드름 투성이의 얼굴, 커다란 눈이 더 커다랗고 두툼한 눈꺼풀에 짓눌려있는 게 둔해 보이는 인상이다. 버섯 뚜껑같은 단발머리엔 치렁치렁한 레이스 머리띠, 우리 반 남자애들이 토 나온다고 말하는 그 머리띠가 올라앉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얘가 학교 밖에선 머리띠에 달린 것보다 더 많은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외국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드레스 디자인 자체가 못생긴 건 아니다. 어울리는 사람이 입으면 예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안세미는 아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거울도 안 보나? 집에 돈이 너무 많아서 미친 걸까? 아무튼, 그런 안세미도 카밀라를 보면 나와 공통된 화제가 생길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엎드린 안세미가 노트북을 열었다. 내가 가져온 ‘표범성의 카밀라’ DVD를 틀었다. 나도 카밀라를 보기 위해 안세미의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다행히도 안세미의 침대는 커서, 나는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세미에게 딱 달라붙지 않아도 되었다.

‘표범성의 카밀라’가 시작되었다.

총 2막으로 구성된 애니메이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침울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 애니메이션의 메인 테마이다. 곡 제목은 ‘For Carmilla’. d단조. 화면 한가운데에 천천히, 검은 수면에 춤추는 빛처럼 ‘표범성의 카밀라’라는 타이틀이 떠오른다. 곧장 화면이 바뀐다.

1막. 표범성의 전경. 중세풍의 잿빛 성벽들 중심에 역시 잿빛인 첨탑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내레이션. 늙은 여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표범성이라는 이름은, 성을 둘러싼 울창한 나무들이 햇빛을 받으면 그 나뭇잎들이 성 위에다 표범의 무늬와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라고, 늙은 여자는 그 이야기를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성 주변을 빙 두른 해자가 깊게 파였기에 성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도개교를 건너는 것뿐이다. 그러나 도개교는 굳게 다물려 있다. 도개교가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마을에서 가장 늙은, 바로 내레이터 그녀이다. 62년 전, 어린 내레이터는 도개교가 내려오고 마을 사람 중 하나가 해자를 넘어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은 내레이터의 아버지이다.

화면은 점차 성문으로 향하는 실오라기같이 좁고 구불구불한 숲길을 따라가 성벽 문 앞에 다다른다. 도개교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해자 앞에서 멈춘다. 시점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 깎아지를 듯 높은 표범성 위의 하늘에 닿는다.

처음 그 하늘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초저녁이나 잠들다 깬 새벽녘에 보았던 하늘이 떠올랐다. 묵직하고 짙푸른 빛깔의 하늘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무너지는 아파트 잔해에 악 소리도 못 내고 깔려버린 사람처럼. 폐가 눌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저 하늘이 사실 공기 덩어리가 아니라 푸른 물 덩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공기가 아니라면 비현실적인 무게감에도 실체가 생기는 셈이니까. 그렇지만 물에서 숨을 쉬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이 하늘은 우리에게 겨우 숨을 쉴 정도의 여유만 허락한다.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의지가 있다고 이죽거리는 것 같다.

표범성 위의 하늘은 무겁고 푸르다. 그 하늘 한가운데에 흰 태양이 이글거린다. 태양이 제 발밑에 있는 것들을 비웃고 있다. 그 태양이 화면 가득히 잡혔을 때, 문득 메인 테마가 뚝 끊긴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메인 테마 밑에 깔린 다른 소리 또한 듣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옛날 텔레비전에서 나던 지지직거리는 소리이다.

2막. 메인 테마와 마찬가지로 d장조 곡인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죽음과 소녀’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표범성 안을 비추고 있다.

붉은 벽지로 도배된 듯한 성안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활기가 넘친다.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일지 모른다. 사람들 구둣발이 하도 많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둘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깨끗한 식탁보 위에 차려진 진기한 음식들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춤추는 아가씨들은 높이 뛰어오른다.

화면 좌우로 사람들의 무리가 커튼처럼 자리 잡은 그 중심에 카밀라가 등장한다. 카밀라는 먹구름 같은 곱슬머리에 물빛 눈, 창백한 얼굴이다. 웃고 있지 않다. 이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 때마다 긴 속눈썹이 동공을 가린다. 별안간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난다.

그 순간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다. 음악이 멎는다. 한 명, 파티에 참석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 하나만 초조하게 성안을 둘러보고 있다. 바로 1막에서 성안으로 들어간, 내레이터의 아버지이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성안의 내부가 더 잘 보인다. 좀 전까지 화면에 보이던 화려한 액자나 테이블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성안의 거대한 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좁은 문이다. 문을 열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진다. 한순간, 저 아래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아닌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

시선은 계단의 단면도를 보여주며 하강한다. 점점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아니, 추락한다. 바닥에 닿자 퍽, 소리와 함께 신음이 울린다. 천장을 바라보려고 하나 천장이 없다. 검은 하늘뿐이다. 바닥을 짚으려 하나 손에 닿는 감각이 이상하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옥 벽에 촘촘히 뚫린 감시 구멍처럼.

추락한 사람의 시점으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형체는 점점 또렷해진다. 바로 붉은 바닥 위에 맨 발로 서 있는 카밀라이다. 카밀라는 웃고 있다. 포만감에 젖은 얼굴이다. 카밀라 위로 비가 내린다. 붉은 빗방울이 카밀라의 뺨과 눈꺼풀, 턱에 떨어지고, 카밀라는 비를 마신다. 희었던 린넨 드레스는 온통 붉다. 검은 머리카락도 언뜻언뜻 붉어 보인다.

흰 발이 들뜬 듯 춤을 추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아, 카밀라의 발. 아까 인형의 흰 발을 보았을 때 익숙하단 생각이 든 건 착각이 아니었다고.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뒤를 비춘다. 입가가 벌겋게 물든 표범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고, 화면이 암전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안세미의 표정을 살폈다. 화면에 집중하는 것 같긴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땠어?”

내가 묻자 안세미가 입을 열었다.

“너무 좋았어.”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좀 지루했어. 저번에 네 말 듣고 검색해보니까 혹평이 많더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걔들이 멍청해서 그래.”

나는 좀 격앙되어서 대꾸했다. 안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덧붙였다.

“카밀라 예쁘더라.”

“그치.”

“이제 인형 이름 정하자.”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안세미를 힐끔 보았다. 애니메이션을 나쁘게 본 것 같진 않았다.

“인형 이름, 카밀라라고 하자.”

안세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애니메이션 볼 때보다 뿌듯한 얼굴로.

트위터에다 썼다. ‘친구에게 카밀라를 보여줬는데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그래도 걘 카밀라 캐릭터 자체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자기 인형 이름을 카밀라라고 하겠다고 했다.’ 요루님이 리트윗하고 코멘트를 남겼다. ‘아쉽네요. 일본에서도 평점이 나쁘긴 했지만…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기면 좋을 텐데.’ 나는 동의한다.

집에 와서 얼마나 돈을 모아야 구체관절인형을 살 수 있을지 계산했다. 내 한 달 용돈은 이만 원이니까… 와, 끝내준다. 3년 동안 용돈을 하나도 안 쓰고 모으면, 나도 원하는 인형을 가질 수 있다. 시발.

 

국어 수업 끝나고 점심시간이 된다. 반 애들은 종 치자마자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고, 담임도 교실을 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나는 담임을 붙들었다. 내 책상은 교실 맨 앞자리라 쉬운 일이다.

“선생님, 혹시 지금 시간 있으세요?”

담임이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시간? 내지 뭐.”

앞문으로 나간 담임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교실을 나서며 내 책상 뒤의 뒷자리, 안세미의 책상을 힐긋 보았다. 비어 있었다.

 

‘9월 13일. Wed. D-16. 학교 본관 2층 2학년 교무실.’

점심시간의 교무실은 시끄러웠다. 이제 막 자기들 책상 앞으로 돌아온 선생들, 질문할 것이 있어 찾아온 극소수의 학생들.

자기 의자에 앉은 담임이 내게 조그만 간이 의자를 내밀었다. 나는 거기 앉았다.

“그래, 진서가 선생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

담임이 활짝 웃었다. 원래 잘 안 웃는 사람인데 내게는 웃어준다. 안세미는 담임이 공부 잘 하는 애들을 편애한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선생도 사람인데 성실한 애를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선생님, 저 자습실 이용 취소하고 싶어요.”

담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습실에서 공부하는 게 더 좋지 않아? 교실에선 자습 시간에도 애들이 떠들고 난리인데.”

담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나는 자습 감독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뗐다. 자습 감독이 웃었다고. 그러면 담임은 묻겠지. 자습 감독이 왜 웃었니? 난 다이어리 얘기를 해야 할 거고, 자습 시간에 ‘존나 힘들다’라고 썼던 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도로 입을 닫았다. 담임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쥐었다. 체온이 높고 축축한 손으로 내 손등을 토닥거린다. 갑자기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불쾌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다.

“우리 진서, 참 잘 하고 있어.”

어쩌라고. 누가 칭찬을 해 달랬나? 속도 모르고, 담임은 한층 더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지난 학기보다 등수도 많이 올랐지? 저번에 진서네 부모님이랑 진서가 쓴 희망 고등학교에 ‘외국어 고등학교’라고 적혀 있던데, 지금처럼만 하면 문제없을 것 같아. 좀만 더 힘내자, 우리.”

‘우리’.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뭐냐. 나랑 담임? 담임도 외고 시험 보게?

그리고 지금처럼 하기만 하면 뭐가 문제없다는 건가. 전교 4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증거일 뿐이다. 올림픽을 봐도 금, 은, 동. 즉 1, 2, 3이다. 4는 없다. 그러나 멍청한 우리 반에선 내가 1등이다. 담임도 내가 1등이 아니었음 이렇게 점심시간에 이야기 나눠주는 수고도 안 했겠지.

그때 수학 선생이 담임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네 반 애들 식당 내려갈 차례예요.”

담임은 일어나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웃어 보인다. 그리고 교무실을 떠난다. 나도 담임을 따라 교무실을 나왔고, 교실로 돌아간다. 계단 한 층을 내려가고, 복도를 따라 쭉 걸으면 2-1반 교실이 나온다.

누군가 내 손을 붙든다. 안세미이다. 숨이 차 보인다.

“어디 가 있었어? 책상엔 없던데.”

“나…? 교무실 다녀왔는데. 너는 어디 갔었어?”

안세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냥 위층 화장실 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이야 1층에도 있는데.”

남자애들 몇 명이 튀어나온 것을 개시로 반 애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밥 시간이다. 안세미가 내 팔에 팔짱을 끼었다. 나는 반 애들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식당이 있는 지하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느린 안세미는 앞으로 걸어가려는 내 걸음을 자꾸만 세운다. 짐스럽기 짝이 없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교실 내 자리로 돌아와 단어장을 펼쳤다. 내가 다니는 학원은 수요일마다 영단어 시험을 본다. 중고생 단과 전문 스피드러너즈 학원. 이 부근 중학생들한테 인기가 좋아 학원에 들어가려면 학원 내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내 짝이 자리를 비운 책상에 안세미가 앉았다. 안세미는 내 옆에서 단어를 외우는 나를 힐금거린다. 신경 거슬리게.

“너도 공부해.”

내 말에 안세미가 히히 웃었다.

“너도 그 소리 하니. 집에서 맨날 듣는데.”

“야, 니네 공부해? 점심시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처키이다. 맨 뒷줄에 앉는 키가 작고 똥똥한 여자애. 원래 이름은 박선경인데 쟤 친구들이 다 처키라고 한다. 정말 옛날 공포 영화 '사탄의 인형'에 나오는 그 못생긴 인형을 빼닮았다. 원래 이름보다도 처키란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린다. 내가 다니는 스피드러너즈 학원 레벨 테스트를 같이 봤었는데 떨어졌다. 그 후로 자꾸 내 주변을 알짱거리며 말을 건다. 일진 따위와 어울리는 애답게, 악의가 넘치는 미친 년이다.

처키가 생글생글 웃으며 앞자리로 걸어왔다. 뒤에 웬 남자애도 달고 왔다. 우리 반 애인데 잘 모른다. 이름이 뭐였더라, 김 뭐…

“야, 안세미. 넌 공부도 안 하면서 왜 진서 옆에서 알짱거려? 진서는 서울대 갈 건데. 너랑 다르게.”

처키가 제멋대로 지껄였다. 남자애가 실실거렸다.

“니나 잘 해, 미친년. 지는 반에서 꼴찌이면서. 안 그래, 진서야?”

안세미가 잔뜩 굳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처키가 내 책상을 힐금거리다가 노트 하나를 집어 들고 읽었다.

“9월 12일. T…”

씨발년이. 나는 처키 손에서 다이어리를 확 빼앗았다.

“T.U.E. 투가 뭐냐?”

처키가 중얼거리자 남자애가 왁 웃었다.

“투스데이잖아, 등신년아.”

처키도 무안한지 아무 말이나 해대며 미친 듯이 웃어댄다.

“진서야, 지금 웃었어? 와, 시발. 쪼개네. 지는 전교 4등이다 이거네.”

“아, 안 쪽팔리냐? 투스데이를 몰라, 어쩌려고. 니는 대학도 못 가. 그냥 뛰어내려.”

난 안 웃었다. 단어 외워야 하는데 미친 연놈들이 자꾸 방해하고 앉았네. 억지로 웃어줄 기분도 아니었다.

내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봤는지, 안세미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나는 벌떡 일어난다.

“진서야, 어디 가?”

남자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교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내 팔을 꼭 붙든 안세미가 떨어질세라 빠르게 걷는다. 머리띠의 레이스가 우스꽝스럽게 나풀거렸다.

4층 도서관은 숨기에 딱 좋았다. 떠들고 싶은 애들은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 빽빽하게 나열된 서가는 나무가 가득한 숲속 같았다. 서가 사이에 숨으면 나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안세미는 서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애는 다른 애들이 공부하고 있는 소파 한구석에 나를 앉히고 두두두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 박선경 때문에 너무 힘들어.”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바보야, 도서관에서 떠들면 어떡하니. 안세미는 더욱 안달이 나서 목소리를 높인다.

“너는 쟤 아무렇지도 않아? 쟤가 너 욕하고 다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나한테 더 심하게 굴긴 하지만, 너한테 아무 짓 안 하는 건 아니야. 저번에도 다른 애들한테 네 뒷담 하더라, 네가…”

사서 선생님이 걸어왔다. 한소리 할 표정이었다. 나는 안세미를 끌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이 있는 4층 복도에선 아무도 뛰어놀지 않았다. 저 멀리 음악실에서 서툰 현악 연주가 흘러나왔다.

“나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 있었어. 3층 화장실에 갔어. 1층 화장실 가면 걔들이 찾아낼까 봐.”

화장실에 숨는 건 찌질하지 않나. 자기가 겁보라는 걸 광고하고 싶은 멍청이들만 화장실에 숨겠지. 도서관에 숨으면 공부하러 갔다든가 책 빌리러 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다. 겁 나서 숨었단 걸 들키면 더 심하게 물어뜯기기 딱 좋을 텐데.

그러나 나는 함께 이곳에 있자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똑같은 곳에 똑같이 숨으면 우스울 것이다. 반에서 친구 없는 애들 둘이 꼭 붙어서 일진 애들 피해 도망을 다니는 꼬라지라니.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 뿐인데.

안세미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소 눈깔 같은 것을 깜작여 눈물을 털어낸다. 둔해 보인다.

“진서야, 나…”

그때 다행스럽게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안세미가 쿵쿵거리며 내려오는 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안세미는 왜 모를까. 내가 저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세미에게 어떤 비밀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안세미가 속 깊이 묻어둔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밥이나 같이 먹고, 음악실이나 실험실에서 함께 앉고. 모둠 과제를 함께 하고. 그렇게 지내고만 싶었다.

그날 나는 트위터에 적었다. ‘친구가 자꾸 나한테 누가 내 험담을 했다고 알려준다. 굳이 그걸 왜 말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요루님이 맞장구쳤다. ‘그런 애들 너무 싫어요. 괴롭히는 애들보다 더 싫어.’ 맞아. 나는 침대에서 트위터를 하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안세미가 처키보다 더 짜증 나.

나는 요루님에게 DM을 보냈다. ‘요루님도 자꾸 멍청한 애가 요루님한테 도움 요청하고 그런 적 있으세요? 솔직히, 왕따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애가 자꾸 저한테 들러붙어서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도 반에서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말예요.’ 요루님이 슬퍼하는 표정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저는 그럴 때 적당히 대꾸해요. 걔가 하는 말에 계속 알았다고만 하거나, 아니면 그냥 읽씹해요. 카톡 보내면 안 본 척하고. 너무 귀찮게 굴면 계폭하는 거죠.’

 

‘9월 15일. Fri. D-14. 학교 본관 1층 2-1반 교실.

안세미가 최고로 멍청한 짓을 했다. 카밀라를 학교에 데리고 왔다.’

반에서 처키와 같이 어울리지 않던 애들까지 안세미의 책상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다. 나는 등교하자마자 안세미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고, 다신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친 건가, 학교에 인형을 갖고 와? 안세미가 의기양양하게 실실거리며 내게 손을 흔드는 모습도 못 본 척했다. 책상에 앉자마자 단어장을 펼쳤고, 학원에서 외워오라고 숙제로 내준 페이지를 계속 읽었다.

안세미가 내 자리까지 걸어왔다. 품엔 카밀라를 안고 있다.

“진서야.”

안세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처키가 낄낄거렸다.

“야, 진서가 니 쪽팔린대.”

안세미는 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안 봐도 불썽사납게 실룩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나는 단어장을 계속 들여다보는 척 했다. 소리내어 읽었다. …카밀라를 끌어안은 안세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9월 20일. Wed. D-9. 이영빌딩 11층 스피드러너즈 학원 엘리트반 교실.

안세미는 월요일에도 카밀라를 데리고 왔다. 화요일에도 갖고 왔다. 그러나 오늘은 가져오지 않았다. 안세미 본인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형을 가져올 때마다 처키가 안세미 책상에 찾아가 웃음을 터뜨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저랑 매일 같이 다니는 남자애들과 함께 인형을 던지며 주고받고 놀기도 했다. 인형을 왜 가져 온 거야? 집에만 놔뒀어야지, 덜 떨어져갖고.

학원에서 본 영단어 테스트에서 오십 개의 단어 중 두 개를 틀렸다. 나는 시험지를 돌려받았고, 쉬는 시간에 내가 틀린 단어를 찾아 복습할 예정이었다. 그때 처키와 어울리던 학교의 우리 반 남자애가 내게 걸어왔다. 그 새끼가 사근사근하다 못해 가증스러운 낯짝으로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진서야, 너 트위터 한다면서?”

화면에 카밀라에 대해 적은 내 트윗들이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도로 시험지로 돌렸다.

“아니.”

남자애가 계속 채근했다.

“안세미가 이거 네 트위터라는데. 걔가 학교에 갖고 온 인형 있잖아, 우리가 그거 갖고 놀다가 학교 운동장 하수구에 빠뜨렸거든. 그랬더니 막 울고 난리 치는 거야. 니들은 모르겠지만, 진서랑 자기한텐 카밀라가 중요하다고. 카밀라가 인형 이름이래매?”

안세미가 울었다고? 안세미는 잘 우는 애가 아니었다. 여드름쟁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견디는 애였다.

나는 남자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몰라. 내가 중학교 2학년씩이나 되서 인형 갖고 놀겠냐?”

남자애가 나를 바라보았다. 웃음기 담긴 눈으로 나를 보던 그 새끼가 별안간 입으로도 씩 웃었다. 하마터면 면전에다 욕을 할 뻔했다. 처키의 눈알엔 샤프심을 박아주고 싶었고, 이 새끼는 학원 창문에서 밀쳐버리고 싶었다.

“야, 진서 니도 참 힘들겠다. 왕따년이 들러붙어갖고…네가 우리 반 일등인데, 그치 진서야.”

남자애는 횡설수설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교실 맨 뒷자리였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씨발새끼. 처키년이랑 똑같은 지능으로 무슨 스피드러너즈 학원엘 다니고 있냐. 스투피드러너즈 학원 따로 차려서 나가라.

 

9월 25일. 月 D-4. 학교 본관 1층 2-1반.

아침 자습 시간에 담임이 안세미를 데리고 교실 앞문으로 쓱 들어왔다. 바깥엔 처음 보는 여자 어른이 서 있었다.

담임이 말했다.

“얘들아, 갑작스럽지만 세미가 전학을 가게 되었어. 세미가 새 학교 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빌어주자, 응?”

뭐야. 전학. 전학?

나는 안세미를 쳐다보았다. 안세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담임이 말하는 동안 불안한 눈으로 자꾸 교실 앞문을 쳐다보았다. 안세미, 나 좀 봐. 나는 열심히 안세미를 노려보았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잠깐만요, 하고 안세미를 질질 끌고 교실 밖으로 나가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담임이 열심히 떠들고 안세미가 비통한 얼굴로 서 있는 교실 앞으로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대로 뛰어 올라간 진상 관객 꼴이 될 터였다.

안세미는 결국 나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교실 밖을 나갔다. 여자 어른은 엄마였던 모양이었다.

수업 시간 직전이 되자 다들 책을 찾으러 사물함이 있는 복도로 나갔다.

나는 맨 꼭대기에 있는 내 사물함을 열었다. 사물함 바닥엔 교과서 말고도 처음 보는 쪽지와 꾸러미가 있었다.

내 사물함 자물쇠 비밀번호 4자리를 아는 애가 누구지.

나는 굳은 손으로 쪽지를 비벼 펼쳤다.

‘미안. 사실 2학기엔 전학 가려고 했었어. 미리 너한텐 말을 해야 했는데 못 했어. 저번에 도서관 앞에서 말하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대신 카밀라를 남길게. 너와 내가 이름을 붙인 인형이잖아. 이 애를 나라고 생각하며 잘 돌봐줘.’

내 사물함에 번쩍거리는 포장지로 포장된 꾸러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인형이, 카밀라가.

복도를 지나가던 애들이 뭔가 하고 힐끔힐끔 시선을 던졌다. 나는 내 사물함을 닫았다. 아무도, 절대 못 열어보도록 자물쇠 다이얼을 마구 돌렸다.

아, 이 미친년이. 진짜 씨발. 아.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뛰어갔다. 교무실 문에 ‘학생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시험 문제 출제 기간이었다.

담임이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진서야, 무슨 일이야?”

나는 겨우 대꾸했다.

“선생님, 저 휴대폰 좀 돌려주세요.”

담임이 당황했다.

“진서야. 무슨 일인데 그래.”

“연락하려고요.”

“누구한테? 어머니한테 연락할 거면 선생님 폰으로 해.”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담임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진서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시험 기간에 막무가내로 교무실 들어오면 곤란해.”

“병원에 가려고 그래요.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이 보기엔 진서 아파 보이지 않는데? 출결 점수도 고등학교 갈 때 중요한데, 참을 수 있으면 책상에 엎드려 있자.”

“아녜요. 휴대폰 주세요. 저 지금 괜찮지 않아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단단히 눌러놨던 속엣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외고 못 갈 것 같아요. 이렇게 못 살겠어요. 그만두고 싶어요.”

담임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내 어깨를 붙든 손은 뜨끈하고 축축했다.

손바닥처럼 뜨끈한 목소리가 말했다.

“진서야, 선생님 동생 이야기 들은 적 없지?”

들었다. 몇 번이나 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애도 너처럼 많이 힘들어했거든. 그런데 대학 가서 세상 구경을 하니까 달라지더라. 지금은 인생사는 게 즐겁대. 왜 중학생 고등학생 때 별것도 아닌 일로 고민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존나 무책임하네, 시발.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라니. 이 좆같은 게 지나가기 전에 내가 죽어버리면? 나는 지금 실시간으로 겪는 중이라고. 나한텐 지나간 일이 아니란 말이야. 이대로 이렇게 계속 살게 되면? 이대로 영원히 고여있으면? 산 채로 곪아 썩어버리게 된다면?

“야, 선생님은 너네 나이 때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스무 살로 가고 싶다. 야생동물을 운반하기 위해 마취 주사를 놓듯이, 누가 내게 마취 주사를 놓아줬으면 좋겠다. 누가 잠든 나를 스무 살까지 옮겨 줬으면 좋겠다. 내가 힘들다고 할 때 누군가 비웃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영원히 잠들고 싶다.

담임이 무안한 듯 하하 웃었다.

“이제 교무실 찾아오면 안 돼. 시험 끝날 때까진, 알겠지?”

그렇게 엄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떠밀었다.

교무실 문이 닫히자 다른 선생들이 담임에게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담임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등수가 잘 안 올라가니까 부담감이 큰가 봐. 오죽하겠어.

휴대폰은 종례 시간이 되어서야 돌려받았다.

나는 트위터 어플을 켰다. 요루님에게 DM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요루님이 없었다.

요루님의 계정이 어디에도, 없었다.

 

‘9월 28일. 목. D-1. 학교 본관 1층 화장실.

내일부터 시험이다. D-DAY.

안세미는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요루님 계정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교무실엔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수학 기출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다 화장실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트위터에다 썼다. 조례 시간에 휴대폰을 제출하지 않고 빼돌렸다. 이제 트위터는 비공개 계정이다. 내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내 이야기를 볼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넓은 타임라인에 내 글을 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동굴에서 혼자 소리 지르는 기분이다.

손목을 그으면 나는 피를 흘리겠지, 카밀라의 먹잇감들처럼. 그러면 나는 카밀라와 이어지게 되고, 내 시간도 흐르기 시작할지 모르지.

손목에다 커터칼을 들이댔다가 영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그만두었다.

죽는 게 잘 안 된다, 이런 마음을 트위터에 적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어쩐지 좀. 그랬다.

 

배가 아파 보건실에 가겠다고 거짓말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담임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나는 사물함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꾸러미를 꺼내 계단을 올랐다. 1층, 2층, 3층, 4층. 옥상으로 가는 문은 늘 잠겨있었기에 나는 4층에서 멈추었다. 4층 도서관 문도 잠겨있었다. 사서가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합창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음악실을 지나쳐, 4층 복도 제일 끝 창문으로 갔다. 가장 큰 창문이었지만 사람이 뛰어내리기엔 턱없이 작았다. 학교 뒷산과 곧장 이어지는 창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온통 나무만 보였다. 하얀 왜가리 몇 마리가 소나무 위에 앉아있었다.

나는 꾸러미를 풀었다. 카밀라의 물빛 눈이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카밀라. 나와 달리 즐거운 카밀라.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무섭다. 카밀라는 영원히, 그러나 나는 언젠가 죽는다. 멈춘 시간 속에서.

성 속 카밀라를 찾아 헤매다 우리에 빠져 뼈가 박살 나고 표범에게 먹힌 사람들. 창문 밖으로 양손을 뻗었다. 카밀라는 우리 아래에 있다. 카밀라에게 피를 보내자. 내 최대한의 분발, 최선의 장례.

왼손으로 인형의 몸통을, 오른손으로 인형의 머리를 잡고 비틀어 꺾었다. 떨어뜨렸다.

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지만 퍽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걸까, 그래서 돌에 부딪히지 않은 걸까.

박살 나지 못한 걸까.

그러나 차마 내려가 살펴볼 용기는 없었다.

손바닥이 따끔하게 아파 펼쳐 보았다. 인형을 꺾을 때 찔린 것인지, 피 몇 방울이 묻어있었다. 넘쳐 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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