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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백비탕

2021.01.19 18:2501.19

 

1

또 탈이 났다. 저녁으로 뭘 먹었더라? 기름진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나? 반주로 소주를 곁들인 탓도 있겠지만. 그러면 어김없이 토사곽란이 뒤따른다.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편이지만 유독 토사곽란은 주기적으로 앓곤 한다. 그러면 토사곽란으로 기진맥진한 나를 위해 아내는 항상 백비탕을 끓여온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어느 약보다 효험이 있었다.

무색무취의 맹물을 끓인 것뿐인데 약을 먹은 것처럼 효과가 나타나는 게 신기했다. 엄마 손이 약손이라면 아내가 끓여주는 백비탕은 약물인 걸까? 아마 아내의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일 거다. 물만 끓여다 준 정도로 무슨 정성 운운이냐고 하겠지만, 아픈 사람을 옆에서 간호해본 적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정식적으로 힘들고 신경 쓰이는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아내는 오랫동안 아픈 가족을 위해 간병인 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사소한 위장병 정도는 수고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아픈 사람만 봐도 진저리가 난대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내는 한 번도 귀찮아 한 적이 없다. 탈이 날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내 탓을 하며 잔소리한 적도 없다. 익숙한 듯,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내 옆을 조용히 지켜준다. 정성스럽게 끓여온 백비탕과 함께.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진짜 우물에서 정화수를 떠 와 그 물로 백비탕을 끓였을 거다.

부엌에서 물 끓이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내가 아내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장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모습에 반했던 점이 컸다. 아내는 친모도 아닌 장모님의 병수발을 몇 년째 묵묵히 들고 있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병간호를 그리 오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내는 내 앞이라도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싫은 내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인내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장모님이 결혼식장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까지만이라도 거동이 편해지신다면 그때 결혼식을 올리자고 약속했지만, 결국 장모님은 외동딸이 결혼하는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다. 어렸을 적 친가족을 모두 잃은 슬픔, 양부모까지 차례로 잃은 아내의 슬픔을 내가 보듬어주고 싶었다. 모든 슬픔을 내 두 팔에 안고 평온으로 바꿔주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감싸주고 돌봐주는 건 아내이다. 지금처럼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 기진맥진해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어느새 끓여와 말없이 건네주는 백비탕을 한 잔 마시고, 따뜻해진 속과 따스한 토닥임을 받으며 잠드는 내 옆을 떠나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말이다.

“내가 계속 아픈 채 이렇게 누워있어도 날 사랑할 거야?”

“그럼. 물론이지. 당신도 그럴 거잖아?”

아내 말대로 내가 반대로 간호해주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아내도 알 수 있을 텐데. 일부러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니라는 걸, 고마운 만큼 미안해한다는 걸. 하지만 건강한 사람을 일부러 아프게 만들 수도 없으니 내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

“금방 괜찮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속이 탈 난 것뿐이니까.”

 

2

잠에서 깼을 때 가스 냄새가 옅게 났다. 몸이 아프니 신경도 예민해지는 모양이다. 아내가 가스레인지를 끈 뒤 환기를 시키지 않은 걸까? 마침 목도 말라 일어난 김에 부엌으로 조용히 향했다. 잠든 아내가 깨지 않도록. 이상하게도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자면 어쩐지 목은 더 마르곤 했다. 애써 백비탕을 마셔놓고선  차가운 물을 마시는 걸 아내가 알면 혼날지도 모르니 얼른 마시고 들어가자. 부엌 창문을 열어 시원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물 한 컵을 들이켜자 언제 아팠냐는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항상 똑같은 밥을 먹는 아내는 탈이 나지 않고 나만 나는지 억울하긴 하지만 허약한 위장을 타고난 내 몸뚱아리를 탓할 수밖에 없겠지.

가스레인지 위에는 차갑게 식은 주전자만 놓여 있었다. 주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주부들은 담배를 피지 않아도 폐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바꾸면 그나마 나을까? 하지만 당장 급한 건 따로 있었다.

오래된 주택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막상 살아보면 고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단독주택을 고집한 건 아내였다. 웬만한 일에는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아내였는데, 신혼집을 구할 때에는 아파트나 다세대가 사는 주택이 아닌 단독주택이라야 한다고 못 박았다. 나중에 집을 팔 때 집값 문제라든지, 출퇴근 거리라든가, 주변 편의시설 따위에 대한 내 걱정은 정작 발품을 팔아 인근 동네까지 샅샅이 뒤져 마침맞은 집을 찾아낸 아내의 안목에 투덜댈 핑계조차 사라져버렸다.

거기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리모델링과 증축을 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와 다 함께 살면 정말 좋을 거라는 말도 아내가 먼저 꺼냈다.

사실 나도 지겨운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주택에서의 생활을 꿈꾸기는 했었다. 예상과 달리 너무 이른 주택 생활의 시작에 확신을 가질 순 없었지만 행복해 보이는 아내의 얼굴만으로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라 여기기로 했었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던 아내의 얼굴도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 날 퇴근 후 깜깜한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어둠 속에 앉아있는 아내를 뒤늦게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왜 그러고 있냐고 물으니 아내는 집에 전기가 나갔다고 했다.

“두꺼비집은 확인해봤어?”

고개를 젓는 아내의 희미한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들어와서 한 번도 두꺼비 집을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신경하기는. 두꺼비집이 지하실에 있다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다.

“냉장고 안에 음식 다 상할 텐데. 씻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는 걱정하는 내용과 달리 그다지 걱정하는 말투로 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어떤 문제가 생겨도 유난히 담담한 편이긴 했다. 우선 흥분부터 하고 보는 나와는 달리 차분한 성격의 아내라 마음에 들었었는데, 지금은 지나치리만치 차분한 말투가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렸다.

어디에 보관해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손전등 대신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윽, 차가워.”

왜인지 지하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새는 곳이 있나? 며칠 동안 비가 온 적은 없는데? 역시 오래된 양옥은 사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투덜대는 와중에 두꺼비집은 금방 발견했다. 역시나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바닥에 고인 물을 밟고 축축해진 발이 어쩐지 찜찜했다. 설마 차단기를 올리다 바닥으로 전기가 흐르진 않겠지? 핸드폰 불빛으로 바닥을 훑어보았다. 물에 젖은 전선이나 전자제품은 없는지. 하지만 정신없이 쌓여 있는 잡동사니에 뭐가 뭔지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걸레를 가지러 계단을 오르려던 참이었다. 계단 위에는 아내가 우뚝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언제 왔어?”

“혹시나 싶어서.”

아내는 손전등을 건네주었다. 걸레로 바닥의 물을 닦고 차단기를 올리자 집 안에는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오래된 집이라 손 가는 데가 많다며 괜히 아내에게 우는소리를 했다.

“물도 새는 거 같은데, 언제 시간 날 때 천장이랑 벽도 점검해봐야겠어.”

 

3

“웃, 차거!”

갑자기 얼굴 위로 떨어진 물방울에 깜짝 놀랐다.

똑.

에어컨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젠 에어컨마저 말썽이냐며 짜증 내는 소리에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똑.

발치에도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라 핏물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봤지만 에어컨에 핏자국은 없었다.

“여보?”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저렇게 놀라지? 그제야 내가 코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휴지로 콧속을 틀어막으며 당장 에어컨을 바꿔야겠다고 말하는 내 말투가 슬슬 짜증을 넘어서고 있다는 걸 아내도 눈치챘는지, 고장 난 게 아니라며, 송풍으로 돌려주면 금방 마른다고 설명했다. 아내의 그 말은 또다시 내 의견을 묵살하고 본인 주장만 밀어붙이는 것 같아 발끈하고 말았다.

“에어컨 얼마나 한다고? 좋은 걸로 사면 오래 쓰고 좋잖아? 왜? 돈 아까워?”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데에 돈 쓰지 말자는 거지.”

“이게 왜 쓸데없는 데야? 내가 버는 돈이 얼만데?”

말다툼은 유치하게 흘러갔다. 서로 얼굴을 붉힌 채 입을 닫고 뒤돌아섰지만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에어컨에서 물이 새는 것도, 정전이 되는 것도, 지하실 바닥이 축축한 것도, 코피가 나는 것도 전부 다 단독주택을 고집한 아내 탓인 것만 같았다.

 

튼튼하지 못한 위장은 유전인지도 모르겠다. 제사를 지내고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가 즐거운 아버지는 과식과 과음을 한다 싶더니 곧 더부룩한 배를 만지며 불편해하셨다. 소화제를 찾는 아버지에게 백비탕을 끓여 드리겠다는 아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됐어. 뭘 또 물을 끓여? 사 오고 말지? 약 하나 얼마나 한다고?”

애도 아니고 그때까지 꽁해서는. 그 태도에 부모님도 탐탁지 않아 하신 건 당연했다. 따로 불려가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설마 며늘아기가 돈이 아까워서 그랬겠냐고, 그 정성이 기특한 거 아니겠냐고, 오히려 약만 건네주는 것보다 더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고, 너는 엄마아빠 아플 때 신경이나 써준 적 있냐고, 혹시 너 평소에도 그렇게 부인 무시하는 태도로 대하냐는 등등의 타박하는 소리를.

“유일하게 편이 돼줘야 할 남편이 저렇게 철이 없으니, 쯧쯧쯧. 니가 네 아내 부모이자 형제자매 역할을 대신해줘야 할 거 아냐?”

친가족이 모두 죽은 후 혼자 남은 아내는 친척 어른 밑으로 입적되었다. 그래서 아내는 누구보다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다. 가족이 아프면 정성을 들이고, 남달리 절약 정신이 투철한 이유는 아내의 사정을 안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나는 벌써 그걸 잊어버린 건가? 아니면 무신경해진 걸까?

 

집으로 돌아온 뒤 밤중에 몰래 거실로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사과할 타이밍도 놓친 스스로가 한심하고 창피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할까? 다가갈지 말지 고민하느라 또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데, 울고 있던 아내가 무언가를 꺼내 눈으로 가져갔다. 휴지나 손수건은 아니었다. 작은 병 같은 걸 눈 밑에 대더니 계속 울고 있었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래, 어두워서 잘못 본 걸 거다. 눈물을 병에다 담아서 뭘 하려고?

 

4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려 퇴근길에 화해의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똑. 똑.

그 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에어컨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아니었다. 설마 지하실 말고 물이 새는 곳이 더 있나? 소리를 따라 가보았다.

똑. 똑.

베란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지만 물이 새거나 떨어지는 곳은 없었다. 김치냉장고뿐이었다. 그렇다면 저기서? 바닥 틈새는 어두워 물이 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김치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니 얼음이 잔뜩 껴있었다. 저 얼음이 녹으면서 새는 건가? 에어컨으로 모자라 김치냉장고까지 바꾸자고 할 수도 없으니 한숨만 나왔다. 김치통 위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뭔지 확인하려 봉지의 매듭을 풀려는데, 워낙 꽁꽁 싸매어 놔서 손톱만 아프고 풀리지 않았다. 뭐길래 이리 묶어 놓은 거야? 성질대로 비닐을 확 뜯어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서 뭐 해, 여보?”

어느새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그냥. 근데 이건 뭐야? 제법 무거운데?”

“고기야. 저번에 먹다 남은 거.”

“무슨 고기?”

“그냥 이것저것.”

아내는 항상 고기를 보관할 때면 나중에 해동해서 먹기 편하도록 소분을 하고 종류별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먹다 남은 거래도 김치냉장고 안에다 아무렇게 넣어둔 것은 좀 의아했다. 아내가 봉사활동 가는 동물 보호소에 가져가려는 걸까? 괜히 또 꼬치꼬치 캐물으면 애써 사 온 화해의 케이크가 도로 아미타불이 돼버릴 테니 그때는 그냥 넘어가 버렸다.

아내는 이미 화가 다 풀렸는지 제사 음식만 계속 먹다가 케이크를 먹으니 아주 맛있다며 고맙다고 했다. 오히려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려던 나는 쑥스럽고 더 미안해졌다.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 나는 철이 덜 든 거다. 이 집에서 어른은 아내뿐이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한참 먼 모양이다. 그러니 내게는 아내가 꼭 필요하다. 그런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끔 해서는 안 된다.

 

기분이 좋아져 남은 케이크까지 혼자 다 처리해버린 게 화근이다. 또 탈이 났다. 다행히 토하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잠을 깨 배 속에 있는 케이크를 모두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 설사를 해야만 했다. 침대로 돌아와 곤히 잠든 아내의 등에 코를 박고 다시 잠에 들려는데, 아내의 몸은 이상하게도 서늘하면서 묘한 냄새가 났다. 꼭 차가운 밤거리의 공기 냄새 같은.

 

5

아내는 점점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왜 이렇게 늦어? 새 애인이라도 생겼어?”

아내는 웃어줄 힘도 없다는 듯 외투를 벗어 장난스레 나에게로 던지곤 화장실로 사라졌다.

“정작 봉사해줘야 할 사람은 집에 있다고. 부인 기다리다 목 빠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불쌍한 남편이 여기 있다고오.”

피곤에 전 몸을 씻고 나온 뒤에도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칭얼거렸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 최대 장점이 건강한 몸뚱아리라며 연애 기간 동안 항상 너스레를 떨었던 게 민망하게도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에게 언제나 비실대는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픈 나를 배려해준다고 일찍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도 어쩐지 나와 있을 시간을 피하려고 그러는 건 아닌가 싶어 괜히 의심도 들었다. 철없는 남편의 한심한 질투다. 아내가 바람을 피울 리는 없잖아?

 

분명 그렇게 믿고는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걸까? 사람이 아프면 원래 별생각이 다 드는 걸까? 그래서 밤새도록 편하게 푹 자라며 아내가 건네주는 백비탕도 의심스러운 걸까? 백비탕을 마신 날이면 다음 날 아침 일어날 때까지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지곤 한다. 그렇다면 설마 백비탕에 수면제라도 탄 걸까? 이런 생각까지 드는 내가 의처증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 이렇게 의심만으로 괴로워하기보단 차라리 두 눈으로 확인해보자.

 

속이 안 좋은 척 백비탕을 끓여달라고 한 날 아내의 눈을 피해 백비탕을 몰래 버리곤 이른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저절로 눈이 떠졌고, 예상대로 아내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가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내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찬 새벽공기에 얇은 외투를 입고 미행을 하려니 절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동네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어두운 산길을 아내는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일부러 들키지 않으려 원거리에서 미행하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아내와의 거리는 벌써 한참이나 멀어졌다. 나는 등산은커녕 걷는 것도 싫어하는 인간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산 것도 자가용이었으니까.

들킬 걱정이나 아내를 놓칠 걱정보다 나중에 산을 내려갈 걱정에 더 심란해졌을 즈음 다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에 몸을 숨기고 숨을 고르며 지켜보는데, 아내는 가방에서 페트병을 꺼내 약수터로 가 물을 긷기 시작했다. 두 병을 모두 채우고 가방에 다시 넣고, 아내는 왔던 길을 되돌아 산을 내려갔다.

그게 다였다. 어이가 없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의심을 했던 자신이, 약수터 물까지 길어와 백비탕을 끓여주고 있었던 아내를 무슨 불륜이나 하는 사람 취급했던 못난 남편이. 못난 정도가 아니지. 찌질하지.

찌질함을 씻어내릴 겸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려 호스 물줄기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을 받아놓은 대야 안에서 꿈틀거리는 실뱀 같은 형체가 보였다. 이미 찬물을 끼얹은 듯 피가 가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6

아내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양모인 장모님은 아내에게 절대 운전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었고, 아내 또한 운전면허를 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의 두려움이 아직 있다면 내가 그 두려움을 떨쳐주고 싶었다. 수고롭게 약수터 물을 길어올 필요가 없대도 운동 겸 다니는 거라는 아내에게 자동차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덜 걷고, 무거운 가방을 계속 짊어지지 않아도 될 테니. 사실 아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대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아내에겐 평생을 따라다닐 트라우마일 테니까.

그런데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내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면허를 따면 내가 몰던 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새 차는 초보에겐 부담스럽다며.

틈틈이 나에게 운전 연습을 받은 아내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차례대로 단번에 붙어 보였다. 시험을 치르러 가는 아내에게 나도 운전면허를 한 번에 따지 못했다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제 밤늦게 집에 오는 핑계는 못 대겠네?”

운전면허증을 받고 기뻐하는 아내를 보며 나 또한 뿌듯했다.

 

아내가 차를 몰고 다니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에 찍힌 한의원을 발견했을 때에는 의아했다. 아내가 한의원을 다녔던가? 어쩌면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사고로 가끔 비가 오면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며 장난스럽게 말하곤 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픈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할 것이지.

“다음 주에 시간 되면 같이 병원에 갈까? 잘 아는 정형외과 있는데.”

하지만 아내는 되레 나더러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당신 항상 비만 오면 허리가 쑤신다, 어깨가 결린다, 목이 아프다, 앓는 소릴 늘어놓잖아?”

“그거야 당신이 비만 내리면 부침개 부쳐 달라고 하니까 귀찮아서 한 소리지? 당신보다 내가 열 배는 더 건강할걸?”

그러면 한의원에는 왜 갔냐고 묻지 않았다. 어쩐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카드 명세서를 보며 또 쓸데없는 데에 돈을 썼다고 혀를 차는 아내의 옆에서 나는 아내의 카드 명세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한의원은 없었다. 현금으로 지불했을까? 아니, 정말 한의원에 간 게 아니라 그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간 것뿐일지도 모르잖아?

“네, 안녕하세요. 저기... 지인 추천으로 치료를 받고 싶어서 그러는데 예약할 수 있을까요? 아뇨. 무슨 치료인지 자세히는 모르겠고, 교통사고로 허리가 좀 안 좋아서 물리치료를 받으려고요.”

아내의 이름을 듣고 타자를 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다시 돌아온 접수원의 목소리는 아내가 한의원에서 받은 진료는 물리치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물리치료가 아니라고? 그럼 한약을 지은 거냐는 내 물음에 그건 답해 줄 수 없다며, 고객과 나의 관계를 묻는 바람에 전화를 꺼버렸다. 아내 것도, 내 것도 아니라면 부모님에게 지어다 드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카드로 결제하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왜 말하지 않은 걸까? 부모님에게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만 할 수 없었다. 만약 부모님도 아니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7

빗소리에 잠이 깼다. 보통은 비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자는데 이상하게 눈이 떠졌다. 거실 쪽에서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다. 아내가 TV를 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비가 오니 으슬으슬 추웠다. 아내를 방으로 데려오려 거실로 나서는데 아내도 빗소리에 잠이 깼는지 창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걷는 뒷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걷는다기보다 몸을 끌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잤다가 몸이 결리거나 다리에 쥐가 났을 수도 있다. 힘겹게 몸을 이끌고 창문 앞에 도착한 아내는 비가 쏟아지는 창을 열더니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었다. TV 불빛과 가로등 빛에 비치는 아내의 얼굴은 비를 흠뻑 맞으며 입을 헤 벌리고 빗물을 마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빗물에 상체가 흠뻑 젖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악몽이라도 마주한 듯 나는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빨리 잠들기만을 바랐다.

빗소리가 작아지고 TV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쓰으으윽, 턱! 똑, 똑, 똑... 쓰으으윽, 턱! 똑, 똑, 똑... 쓰으으윽, 턱! 똑, 똑....”

거실에서부터 이어지던 그 소리는 화장실 안에서 멈췄다. 다시 이불 밖에서는 희미한 빗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는 내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여보....”

아내가 방으로 들어온 줄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자?”

왜인지 아내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 막히는 침묵을 참을 수 없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르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백 년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아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아내의 몸이 내 몸에 닿지 않아도 차가운 기운은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다시 또 천 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이내 코를 고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코를 고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밤 일은 오히려 그동안의 의심을 씻어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아내의 몸이 불편한 건 확실했고,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얄미운 비에 어린애처럼 반항을 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맞다. 김치냉장고 안에 있던 검은 비닐봉지도 한약이나 약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닐봉지는 이미 없어졌다. 혹시 냉장고 속이나 다른 곳에 꽁꽁 숨겨뒀을까? 지하실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보물찾기마냥 집착하고 있는 내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실망한 채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아내는 백비탕을 끓여주었다. 속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주는 거지?

백비탕을 끓여온 아내는 갑자기 늘어난 자신의 운전실력을 자랑했다. 이제는 자신이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술 마시고 대리 부를 필요 없다고, 내가 당신을 데리러 갈 테니 회식이나 술 약속이 잡히면 부담 갖지 말고 자길 부르라고, 토사곽란 때문에 자제하는 거라면 가끔 즐기는 정도는 괜찮을 거라며, 이렇게 자기가 백비탕을 끓여줄 테니까, 라고.

나는 점점 알 수 없었다. 정성스럽게 물을 끓여주는 아내의 모습과 의심이 드는 아내의 모습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아내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지. 나는 아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아는 모습이 아내의 전부일까? 아니면 내가 만든 아내의 모습일까?

 

8

“왜? 무슨 냄새 나?”

나도 모르게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아니, 그냥. 요즘 후각이 예민해졌는지 물비린내 같은 게 나는 거 같아서.”

사실은 오히려 반대다. 요즘 따라 후각과 미각이 둔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를 먹어도 싱겁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다가 위장병이 도지는 횟수도 잦아졌다. 그런데도 무미 무취의 백비탕에서는 왜 옅은 맛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을까? 만약 의심과 불안에도 맛과 향이 있다면 그와 똑같을 것 같은 그런 맛과 냄새가.

문득 아내와 똑같은 밥과 반찬을 먹는데도 나만 탈이 나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그릇이나 수저에 미리 발라 놓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왜? 아내가 날 죽이려고? 그런 의심과 공포를 상상하는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 단지 첫눈에 반한 이상형이라서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의심하는 점 이외에는 단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자다. 아내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들 내가 땡잡았다고 말했다. 역시 내가 배가 부른 걸까? 만약 나중에 그동안 의심했던 것들이 모두 내 오해였을 뿐임이 밝혀진다면 어떡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했던 걸 아내가 알아차린다면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무리 착한 여자라도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 여자인데.

그런데 아내는 왜 나를 선택했을까? 그냥 혼기가 차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나는 내가 이상형의 여자를 만나 구애를 하고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아닌 아내가 나를 선택한 것이라면 어떨까?

 

“무슨 약 찾아?”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약 성분을 검색해보다 아내에게 들켰다.

“어디 아파?”

“음... 요즘 위장병이 도지는 것 같아서. 뭐 좋은 약 없을까 싶어서.”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당신이랑 의논할 게 있어.”

아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되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내는 간호직 시험을 공부해볼까 한다고 얘기했다.

“무슨 소리야? 동물 보호소에서 봉사활동하고 있잖아?”

그거랑 같냐며 웃는 아내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내는 장모님의 병간호를 오랫동안 했었다. 아픈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뭐야? 그랬다면 내가 당신이랑 결혼했겠어?”

갑자기 머릿속에는 아픈 환자들을 돌보며 존재 이유를 강렬하게 느끼다 일부러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 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난이 아닌 심각해진 내 낯빛에 아내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돈은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모아둔 건 있으니까.”

또 돈, 돈, 돈!

“돈 때문이 아니잖아!”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놀란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인지 말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 나도 몰랐으니까.

 

9

화를 삭이려 집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눈이라도 맞아야 할 것 같았다.

집 앞에 눈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이 겨울의 운치는커녕 곧 나의 미래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만 같았다.

‘봐, 난 행복한 눈사람이야. 겨울에는 이렇게 멋진 눈사람이 될 수도 있고, 녹으면 백비탕으로 끓여 먹을 수도 있지.’

“개소리!”

괜히 눈사람을 향해 분풀이를 하듯 발로 차버렸다.

“퍽!”

그런데 생각보다 발이 얼얼했다. 무슨 얼음덩어리로 만들기라도 했나? 부서진 눈사람을 손으로 털어보았다. 그러자 정말 얼음덩어리가 나왔다. 황당했다. 누가 눈사람 안에다 얼음덩어리를 넣어 만드는 거지? 아니, 어쩌면 얼음덩어리를 숨기려 눈사람을 만든 걸까? 하지만 왜?

아내는 약수터 물이 얼었다며 약수터에 가지 않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또 아내를 의심한다. 그래,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친 건지도 모른다. 애써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부수고 다니는 사람들을 엿먹이려고.

골목길 집들을 둘러보았지만 눈사람이 있는 집은 우리 집 앞뿐이었다. 우리 집 앞이 이렇게 동네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면 누가 만들어 놓은 걸까? 확인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미행하는 짓 따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찌질해서가 아니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눈 감고, 입 닫고, 귀 막고 믿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아내를 지켜보면서 특별할 것 없는 곳을 오가는 아내에 안심이 들다가도, 저것조차 용의주도하게 나를 속이고 있는 거라는 불신이 불쑥불쑥 떠올라 스스로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어느 날 아내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라 운전하면서 초조함과 동시에 아내의 차를 놓치지 않으려 신경이 곤두섰다.

아내의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양옆에 산을 끼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막길을 오르는가 싶더니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설마. 아니겠지. 등산을 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사실 이미 나는 짐작하고 있었던 거다.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 차 밖으로 나온 아내는 가방을 메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 한 켠에는 한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약수가 흐르는 명산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곤두섰던 신경과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맥이 빠진 나는 한동안 운전대를 잡지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씁쓸하기만 했다. 자괴감이 들면서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찜찜함이 가슴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감속운행’ 표지판을 보고도 속도를 줄일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상습결빙구간’이라는 표지판을 지나칠 때에는 순간적으로 저게 무슨 말인지 해석이 되지 않았고, ‘사망사고 다발 지역’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할 새도 없었다. 차는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운전대를 돌리고 브레이크를 밟는 내 노력을 무시한 채 가드레일을 박으며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아래는 절벽이었다. 살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내의 가족들이 당한 자동차 사고였다.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일까? 운전 부주의였으니까? 우연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10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아내에게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나냐고 물었다.

“...당신은 운명을 믿어?”

아내는 밤새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모두 들려주었다. 아주 평범하고 보통의 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사고 이야기만 뺀다면.

사고가 난 순간의 기억은 없다고 한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차들이 굴러떨어져 엉킨 지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입을 벙긋거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살려달라고,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고 외치며 손짓, 발짓을 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무거운 돌로 자신을 누르고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혼자 동떨어져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 아비규환 속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모두 듣고 지켜보아야만 했다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탓에 사상자들을 구조하는 데에 애를 먹는 와중에도 자신이 거기 있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나둘 실려 간 뒤에도 혼자 남아 며칠을 그곳에 방치될 때까지. 어쩌면 자신이 투명 인간이 되었거나 이미 죽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가 와서 날이 흐린 탓에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고, 그래서 며칠을 거기서 누워있었는지 모르게. 자신이 깨어있는지 잠든 건지도 인지할 수 없었으니. 그나마 비가 와서 그 물을 마시며 며칠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등산객이 자신을 발견했고 그래서 살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했지만, 자신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아내를 처음 만난 건 동창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선배의 지인으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몇 마디 오고 간 것이 전부였지만, 그 첫인상만으로 나는 아내에게 호감을 느꼈다. 결혼식 후에 선배를 졸라 소개를 받고, 처음에는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친구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끔 술자리 모임에서 만나는 정도였다. 가벼운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진 뒤 나는 아내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아내는 누군가를 사귈 생각은 없다며 거절했다. 낙담하여 다시 고백을 도전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망설이던 중에 선배가 아내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와 그놈은 대학 커플이었다. 하지만 여느 연인처럼 다툼이 잦아지고, 관계를 정리하려 이별을 통보하는 아내에게 그놈은 여느 연인들과 달리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며 아내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스토킹에 몇 년을 시달리던 아내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고, 우여곡절 끝에 접근금지 명령까지 얻어냈다. 법은 무서웠던 모양인지 그 뒤로 스토커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혹시나 주변에 그 녀석이 얼쩡거리는 걸 발견하면 바로 신고해버리라며 선배는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내 휴대폰으로 직접 걸려온 전화로.

“제가 누군지는 알죠? 만나죠? 할 얘기가 있으니까.”

 

11

스토커 녀석은 대뜸 아내와 자신이 계속 만나고 있는 걸 아냐고 으스댔다.

“당신 와이프가 그러던데? 헤어질 거라고. 곧 완전히 나에게 온댔어.”

아내와 달리 스토커 녀석의 말은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믿음이 없으면 의심할 것도 없지. 다 개소리니까.

“거짓말. 당신도 걔를 믿지 못하니까 미행한 거 아냐?”

미행이라면 이 자식이 전문가겠지. 나는 아내에게 걸리지 않을 것만 걱정했지, 아내와 나를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해해. 걔가 워낙 사람을 못 믿게 만들잖아? 그래서 나도 뒤를 밟은 적이 있지. 아마 그쪽도 산 좀 타느라 숨넘어갈 뻔했을 거야?”

스토커 녀석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산을 좋아할까? 정말 약수터에만 가는 걸까?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달빛을 받고 있는 마누라의 모습을 본 적 있어? 그런 모습을 보면 홀릴 수밖에 없지. 아주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그러면서 아내가 몰래 들어갔다 나온 동굴 속에서 짐승의 해골을 발견했다는 얘기까지 했다.

“어때? 감이 좀 잡혀?”

무슨 감? 목이 말라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라도 마셨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구미호잖아, 구미호. 당신이 같이 살고 있는 여자가.”

차라리 원효대사 이야기였다면 재미없는 개그로 듣고 넘겼겠지만, 이건 재미도 없을뿐더러 한심하기만 하다.

그 뒤로 자신과 100일이 되기 전에 헤어진 이유가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정기를 차마 다 흡입하지 못하고 놓아준 거라는 더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지껄여댔다.

“당신은 아내가 구미호여도 받아들일 수 있어? 난 있어. 그 정도로 사랑하니까.”

미친놈. 사랑하는데 왜 때렸지?

“그건 오해야. 실수로 손이 나간 것뿐이야.”

손만 나간 건 아닐 텐데? 발길질은?

“날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다고! 정당방위였어. 그리고 가끔씩 화를 돋우기도 했어. 당신도 같이 살아봐서 알잖아? 당신 부인이 사람 신경 살살 곤두서게 만드는 경향 있는 거.”

미친 놈은 바로 나다. 이런 스토커 새끼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고 여기까지 온 내가 병신이다. 아내는 의심하면서 이런 놈이 지껄이는 말에는 헛된 기대를 하고선.

“이제 보니 딱 간 빼먹기 좋은 유형이네.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겠어.”

저놈은 자신이 하는 말을 정말 믿어서 하는 걸까?

“최근 들어 슬슬 몸이 아프지 않아? 예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통증을 느껴봤다거나? 그럴 때마다 아주 애지중지 간호를 해줬지? 그게 걔 주특기야. 남자의 정기는 다 빨아먹어 놓고선 모르는 척 수발이란 수발은 다 들어주지.”

술에 절을 대로 전 내 간을 본다면 그런 말을 못 할 거다.

“빼먹을 게 간뿐이야? 왜 아프게 만들겠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 보험금을 빼먹으면 그만이잖아? 죽어 나간 가족들 사망 보험금으로 떵떵거리고 살았던 거 몰라?”

아내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가족을 전부 뺏긴 데에 대한 보상금이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돈도 아니다.

“그렇다면 양부는? 똑같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건 알아? 굉장한 우연이지? 아주 의심스럽게?”

구미호에 이젠 살인범 취급인가? 문득 내가 했던 의심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살고 싶으면 걔한테서 빨리 떨어져. 걔 옆에 있으면 다 죽어 나간다고. 우연으로든, 재수 없게든, 고의로든.”

그래서 아내가 다시 세상에 혼자 남도록 내버려 두라고?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댁은 상관 안 해도 돼. 그렇게 음기가 강한 여자를 감당할 사람은 나뿐이니까.”

개소리를 늘어놓는 스토커 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왔다. 놈과 얼굴을 계속 마주 보고 있다가는 저 면상에다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전, 한 가지 물어보았다.

“백비탕? 그게 뭐야? 먹는 거야? 한약이야? 그런데 그게 뭐?”

놈은 백비탕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 말은 아내가 끓여주는 백비탕을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걸로 족했다.

 

12

차라리 단순히 미친놈이라면 더 상대하기 편했을까? 끊임없이 전화를 해대는 놈을 무시하자 어느 날 영상 하나를 보냈다. ‘구미호의 정체_192’라는 제목의 영상은 아내가 부동산 사람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보러 왔을 때의 모습을 원거리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뒤 내용이 궁금하면 연락 줘.’

뒤 내용이 구미호의 정체를 알려주는 거라면 궁금하지도 않다. 그럴 리도 없을 게 뻔했고, 순순히 보여줄 리도 없겠지. 하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영상이 이런 것만이 아니라면 더 이상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스토커는 모일, 모시, 모 장소로 나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준비한 돈과 함께.

어쩌면 아내는 여태껏 협박을 받으며 돈을 뜯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라 이제는 내 돈까지 뜯어내려는 수작이겠지. 어차피 돈이 목적이면서 장황하게 개소리를 늘어놓은 건 나를 약 올리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던 거다.

 

만날 장소에 도착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이것도 약 올리는 방법 중 하나인가? 나중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건수를 잡으려는 수작일 수도 있고. 아내를 의심했던 때와 비교한다면 이런 개수작 정도에는 마음의 동요도 일지 않는다. 단지 아내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만 걱정될 뿐이었다. 아내와 내가 언제까지고 놈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오직 그 생각만 들었다. 떠올려야 한다.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방법을....

방법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태우게 하려고? 하지만 전화기까지 꺼놓은 녀석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전화가 왔다. 스토커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찾는 사람은 내가 확실했다.

“혹시 구미호 남편분이신가요?”

스토커는 자신의 폰에다 내 이름을 그렇게 저장해둔 모양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어느 카페 직원인데, 스토커가 가게에 폰을 놔두고 가서 최근에 통화를 한 번호로 연락을 한 거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휴대폰은 이미 누군가 찾아간 뒤였다. 혹시나 싶어 다른 번호로도 연락을 했었는데 마침 가족이 전화를 받고 찾아갔다는 것이다. 나는 내 휴대폰 속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 여자였나요?”

직원은 다른 알바생이 전해준 거라 자신은 모른다고 했다.

“그럼 폰을 놔두고 간 날 그 사람 혼자 왔었나요?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였나요?”

동행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진 속 여자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날 CCTV를 확인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결국 딱딱한 얼굴로 거절 의사를 밝혀 소득 없이 카페 밖으로 나와야 했다.

놈과의 연락은 영영 끊겨 버렸다. 좋아해야 할까, 의심해야 할까?

 

13

얼마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 스토커 녀석은 절벽 위에 서서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웃음을 없애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차 한 대가 녀석을 향해 돌진해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떨 때는 차를 모는 사람이 나였고, 어떨 때는 아내였다. 아니면 우리가 함께 타고 있거나. 운명 공동체처럼.

악몽으로 모자라 감기에까지 시달렸다. 어렸을 적 이후로 감기는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인 만큼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지독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아내는 당연한 듯 내 옆에서 간호를 해주었다. 따뜻한 백비탕을 끓여오며.

 

반찬 몇 가지를 싸놓은 게 있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아내는 잠시 집을 비웠다. 늦지 않게 올 테니 몸이 안 좋으면 전화하라는 당부를 하고.

혼자 집에 있는 게 꽤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 아내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아내 없이 나만 있는 건 이치에 어긋난다는 듯이. 이 집이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사를 가고 싶었다. 아니,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 숨어 살고 싶었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 곳으로. 아니면 나 혼자만....

똑, 똑, 똑.

감기 기운에 잘못 들은 건 아니다. 집에서는 물이 새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집 안이 아니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정확히는 저 아래에. 지하실에서. 그러고 보니 지하실에 내려가 본 지도 오래되었다. 설마 물바다가 되어 있을까? 그걸 핑계로 아내에게 이사를 가자고 할 수도 있겠다. 감기약을 먹고 졸린 머리를 부여잡으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실망스럽게도 지하실은 물바다와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서늘하긴 하지만.

똑, 똑, 똑.

분명 물소리는 들리는데 어디서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들고 온 휴대폰으로 스토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에 귀를 기울임과 동시에 전화벨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도, 전화벨이 울리지도 않았다.

약 기운 때문인지 지하실에서 하던 내 행동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조종해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정신이 몽롱했을 뿐, 거기서의 일은 전부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움직인 것이다. 손가락은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집을 둘러보는 아내와 부동산 사람의 모습이 풀잎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뻥긋대는 입 모양만 보이는 아내와 부동산업자는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영상이 끝나면 다시 재생해서 끝까지 보았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마지막 즈음에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장면만을 반복해서 보았다.

우? 무? 아내의 입 모양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우... 우무, 우므, 우무, 우물, 우물?”

입 모양은 분명 우물이라고 발음하는 것 같았다. 왜 이제야 생각났지? 아내는 우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아내의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어렸을 적 추억은 자주 놀러 가곤 했던 친척 시골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마을에는 이제는 쓰지 않아 입구를 막아 놓은 우물이 있었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우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 상하수도가 설비되고 집들도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마을 우물은 점점 쓸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물물도 조금씩 줄어들더니 어느새 말라버렸다고. 분명 찾을 일 없는 우물인데 이상하게도 우물 속에 사람이 빠지는 사고가 간혹 생겼다고 한다. 팔 하나, 다리 하나 부러진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개중에는 목숨을 잃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장정 둘이 들기에도 무거운 돌로 우물 입구를 눌러 놓거나, 아예 나무판자로 우물 둘레를 빙 둘러 막고 못질까지 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물에 빠지는 사람은 주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도저히 무슨 수로 우물 속에 들어가 빠진 건지 알 수 없게. 그래서 우물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안 되는 금기의 장소가 되었다. 가끔 멋모르고 우물가를 지나가는 사람은 꼭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깊은 우물 속에서 똑똑 떨어지며 울리는 물소리가. 다시 물이 차올라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똑, 똑, 똑.

그리고 우리 집에서도 물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천장에서 떨어지거나 벽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아니다.

아내는 언제나 약수터에서 부지런히 물을 길어왔다. 추운 날도 마다하지 않고. 걱정하는 나에게는 한파가 지날 때까진 쉬겠다고 약속했지만, 몰래몰래 약수통을 채워오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보여주려고? 약수통을 길어온다고 믿게끔? 눈사람 속 얼음덩어리도?

정화수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약수터 물이 사실은 정말 정화수였다면, 이른 새벽마다 우물에서 길어오는 진짜 정화수였다면....

‘사실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궁금해서 한 번 찾아가 본 적이 있어. 물론 밤에 말고 환한 대낮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물이 새어 나오는 자국은 없을까, 우물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누가 내 팔을 확 잡아끄는 거야. 엄마였어. 엄마는 저기 빠지면 어떡하려고 혼자 왔냐고 화를 냈지. 우물은 분명 단단하게 막아놔서 절대 빠질 일이 없게 생겼는데도 말이야. 여기서 혼자 놀다 우물에 빠져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얼마나 슬프겠냐며, 이상하게도 엄마는 이야기를 과장해선 혼을 냈어.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정작 살아남은 건 나 혼자 뿐이라는 거야. 우물에 빠져 죽을 운명을 엄마가 막아준 대신 엄마와 다른 가족들에게 죽음의 사자가 닥친 걸까? 당신은 운명을 믿어? 태어나고 죽을 운명은 정해진 걸까? 사람들의 인연 또한 운명인 걸까? 그래서 당신과 내가 만났을까? 우리도 운명일까?’

그때 내가 뭐라고 했지? 아마 운명이라고 했을 것이다. 죽음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이라고.

쌓아둔 물건들을 치우며 바닥을 살펴보았다. 아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만약 우물이 있다면 찾아야 한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내가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뜬금없이 아내와 내가 싸웠는지 물었다. 무슨 소리냐고 하니, 사실은 오늘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한 건 아내였다는 것이다. 시부모님에게 할 말이 있는데 남편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며. 혹시 둘이 싸워서 그러나 싶었지만 심각한 얘기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급하게 지하실을 올라가 자동차 시동을 걸며 어머니에게는 아내가 찾아와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일렀다. 왜 그러냐고, 너 무슨 사고 쳤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내 문제가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걔한테 문제가 있을 리는 없잖아?”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갑자기 꺼졌다. 다시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서둘러 후진을 하는데 무언가 부딪혔다. 눈사람이었다. 나는 눈사람이 깔아뭉갤 정도로 뒤로 밀어붙인 뒤 박살 난 눈사람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백미러로 보이는 눈사람의 잔해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겨울이 지나 눈이 내렸었다면 이상하긴 했다. 눈이 왔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차로 오가는 도로였다. 그래서 차가 뱅글뱅글 돌 때도 결빙구간에서 미끄러진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익숙한 도로에서 왜 갑자기 사고가 난 걸까? 전복된 차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친 탓인지 아니면 약기운 때문인지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가로등이 거꾸로 매달려 나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부순 눈사람을 비추던 그 빛처럼. 눈사람 안에는 얼음덩어리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났을까? 아니면 이번에는 다른 반짝이는 것이 들어있었던 걸까? 불빛에 날카롭게 반짝이는 얼음조각과 같은 뾰족한 것들이?

누군가 자동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도와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정신은 점점 흐려졌다. 아내는 그때 어떻게 버틴 걸까? 정말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운명? 지금 나의 상황도 운명이듯이?

길 너머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아내 같기도 했고, 낯선 사람 같기도 했다. 아내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다.

 

14

나는 목과 허리의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밖으로 나왔다. 어기적이며 기는 모습에 아내는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당연히 웃을 수밖에. 가끔 내가 교통사고가 난 걸 까먹고 이렇게 침대 밖으로 나오려 기어 다니곤 하니까.

다행히 부러진 곳이나 외상은 없었다. 대신 뇌진탕 증상이 있으니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일렀다. 정말 그 때문인지 퇴원 후 집에 돌아와서도 기억력이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다. 물론 아직 몸도 성한 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목과 허리를 잔뜩 굽히고 걷고 있으면 아내는 다정히 다가와 미소 지으며 필요한 게 있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당신은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두통과 어지러움에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올라오곤 한다. 예전과 달리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뇌진탕 후유증 때문이긴 하지만. 한두 달은 그런 증세가 지속될 수 있으니 안정은 필수라며 아내는 언제나처럼 내 수발을 들어주고 있다. 변한 건 없다. 아내는 여전히 내 곁을 지키며 간호를 하고, 음식조차 먹기 힘들 때는 백비탕을 끓여온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한숨 자고 나면 통증과 불안이 모두 사라질 거라며.

회사 일이나 급한 용무는 아내가 혼자 처리한 모양이다. 입원기간 동안과 퇴원 후까지 이어지는 간호는 말할 것도 없겠지. 병원에서는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던 상태라 병문안을 온 손님들도 아내 혼자 정신없이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병원에 오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괜히 걱정 끼쳐드리기 싫어 간호를 도와주겠다는 부모님도 아내는 마다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정신을 차리고 기억이 돌아오면 만나는 게 나을 테니. 내 간호만으로도 정신없을 아내를 위해서도. 그럼 간단히 안부 연락만 해볼까?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적이 언제였지? 그런데 휴대폰을 어디다 뒀더라?

요즘 멍한 상태일 때가 너무 잦다. 이것도 뇌진탕 후유증일까? 너무 피곤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다. 그때 연락해 보자.

 

부엌에서 물 끓이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내가 아내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장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모습에 반했던 점이 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병간호를 그리 오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자다. 천사 같은 여자다. 백의의 천사가 있다면 바로 아내겠지?

“금방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머리가 잠깐 탈 난 것뿐이니까.”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는 내가 아내를 위해 뭔가를 해줘야겠다. 아내가 바라는 게 뭐였더라? 욕심 없는 사람이니 꿈도 소박했던 것 같다.

나 같은 행운아는 세상에 흔치 않다.

똑, 똑,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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