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면도

2021.01.15 16:5601.15

일주일에 한 번 네가 누운 병실에 들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면도다. 네 이름이 띄워진 병실의 미닫이문을 힘주어 밀고 들어가면 적막 속에 삑삑, 높고 짧은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울린다.

 

병실 속의 유일한 소리. 그리고 네가 살아있다는 신호.

 

가슴에 귀를 대보지 않아도, 손목을 감싸 집중하지 않아도 네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곳에 생을 움켜쥐고 있다고 기계는 오늘도 큰 소리로 알려준다.

 

일주일 만에 네 턱에 파릇한 그림자가 생겼다. 하루만 면도를 게을리해도 턱이며 인중이며 보기 싫게 거칠어지는 나와는 달리, 네 수염이 자라는 속도는 느긋하고 턱선에 퍼진 그림자는 균일하다. 수염마저도 사람의 성정을 닮는구나 생각했다. 사실 너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사람일 거라고 뒤늦게 짐작해 본다.

 

아무튼 기기의 도움을 빌려 드나드는 네 호흡도 그렇고, 네 몸에서 무언가 천천히 자라나고 있음을 아는 것은 나에겐 일종의 안도다. 너는 결코 멈춰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안도.

 

날 면도기로 조심스레 베어내는 면도는 처음엔 나에게도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내 얼굴이 아닌 타인의 얼굴을 다루는 일도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머리카락을 다듬는 곳에서 면도도 함께 해주곤 했다지만 요즘 면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당연했다. 세상이 아무리 달에 하루 만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지고, 뇌의 기억을 데이터화해 클라우드에 업로드하는 첨단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 손으로 해내야 하는 사소하고도 귀찮은 일은 늘 있게 마련이다.

 

원래는 이곳도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로 이 일을 해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그들은 주 1회 정기적으로 중환자 병동에 들러서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수염을 깔끔히 정리해주곤 했는데 모두들 단체에서 보급받은 전기면도기를 사용했다.

 

어느 날 네 뺨에 생긴 작은 상처를 보고 말았다. 물론 정해진 시간 내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게 무결한 완전함을 기대하기란 무리인 줄 알지만, 어쩐지 마음이 상했다. 잠든 네가 못 느꼈을 따끔함이 대신 내게 온 것 같았다.

 

나는 내가 틈나는 대로 들러서 면도할 테니, 함시운 씨는 자원봉사자들의 명단에서 제외해달라고 간호사 스테이션에 부탁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당장 커다란 마트에 들러 면도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샀다. 진열되어 있던 제품 중에 가장 평이 좋다는 고가의 날 면도기, 그리고 셰이빙폼. 새 수건도 몇 장 구매해 미리 세탁해 두었다.

 

조금 우습지만 다음 번 면회 전날 밤은 거의 잠을 설쳤다. 그까짓 면도, 스무 해 가까이 매일 해오는 일이지만 내 얼굴이 아닌 타인의 얼굴이란 부담이 내게도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작 아침엔 늦잠을 잘 뻔해서 내 얼굴 다듬기는 포기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사 스테이션을 지날 때 항상 ‘오셨어요?’라고 알은체를 해주던 간호사가 그날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말이 없었다. 수염이 긴 나는 평소보다 몇 배는 피로해 보이는 인간이 되기 때문에, 아마 바로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삑삑, 소리를 메트로놈처럼 들으며 세면실에서 온수에 듬뿍 적신 수건으로 먼저 네 얼굴을 편안히 이완시킨 후 면도를 시작했다. 갓 시작한 시점엔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리 늦지 않게 평정이 찾아왔다. 네가 세상 무엇보다 가만히 침묵을 지켜주고 있는 덕분이다. 나를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드는 그 사실이, 면도를 하는 데는 상당한 자신감을 주었다.

 

첫 작업은 상처를 내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에 그리 깔끔한 완성도를 내진 못했지만, 나의 손끝은 섬세함이라는 의미를 하루하루 점점 깊이 터득해갔다. 그날 이후로 다섯 달에 걸쳐서 나의 면도 실력은 꽤 수준급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다섯 달이다.

 

네가 의식을 잃었다고 소식을 들은 날은 그 다섯 달 하고, 며칠 전이었다.

 

이른 아침 형사 둘이 찾아왔다.

 

이제 막 일곱 시가 지난 때였다. 휴일이라서 그런 시각에 눈을 뜰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덜 깬 잠에 구겨진 인상으로 문을 열었다. 모르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내 앞에 있었다. 말끔하고 어두운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 민현기 님 맞으시죠?

 

그들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경찰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결이었지만 찰나에 여러 생각이 스쳐 갔다. 최근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기억 못 하는 예전이라도?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지루한 내 인생은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덕이나 윤리를 거스르는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하다못해 무단횡단도, 불법 다운로드도. 나는 세상이 마련해준 규칙대로 살아가는 게 가장 편한 삶이라는 지론이 있다.

 

그런데 자기검열을 막 마친 나에게 그들이 다음으로 말한 이름은 너였다.

 

- 함시운 씨, 만 이십칠 세, 남성, 알고 계시죠?

 

아직 긴장이 덜 빠진 뒤통수에 순간 묵직한 무게가 달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휴일 아침 경찰이 찾아와 누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면 이유를 알기도 전에 모두 조금은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게 어떤 종류의 소식이든 간에.

 

눈을 깜빡이는 내게 형사 하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너는 D 섹터 병원에 의식불명인 채로 입원해 있으며, 네 휴대전화의 가장 최근 통화기록이 나의 번호이고 통화내역 감정 결과 의식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도 나라서 이곳에 찾아왔다고 했다. 나에게는 너의 신원을 확인해 줄 의무가 있다고 했다.

 

어리둥절한 채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그들이 가져온 차에 올랐다. 자동주행으로 병원까지 닿는 데는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겐 끝없는 영원 같았다. 그 병원은 회사에 제출해야 할 건강검진기록이 필요할 때나, 감기나 충치 정도의 치료가 필요할 때 들락거리던 곳이었는데 그날만큼은 그리 낯설 수 없었다.

 

머리에 상처를 입고 중환자 병실에 몸을 누인 사람은 네가 맞았다.

 

- DNA 정보 값으로 신원 일치는 1차 확인했습니다만, 인권위원회 규정 및 절차상 증인의 날인이 필요합니다.

 

형사는 너의 가족 또는 친족 정보가 확인되지 않아 당장 가까운 지인인 나에게 연락했다고 했다. 형사가 내민 손바닥만 한 화면에 나는 여기에 누워있는 이가 네가 맞노라고 서명했다. 관계에는 직장 동료라고 적었다. 형사는 신원이 잘 확인되었으니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놀란 가슴을 조금 누르고 하나둘 떠올랐던 질문을 시작했다.

 

- 함시운 씨는…… ‘인디’인가요?

 

형사는 그렇다고 했다. ‘인디 indie’는 법적인 가족이 없는 독립된 개인을 말한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행성 간 떨어져 사는 경우도 빈번한 시대에 법적 가족이나 혈연관계 같은 구식 체계는 더 이상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었고, 개인에게 따르는 웬만한 대소사는 국가에서 책임을 졌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자발적으로 인디를 선택하는 인구도 적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두 멀지 않은 곳에 지내고 사이도 나쁘지 않은 나는 굳이 인디가 되어야 할 필요는 못 느꼈는데 네가 인디라는 사실은 조금 의외였다. 나의 편견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인디 몇몇은 꽤 차갑고 자기중심적인 느낌이었는데, 너는 그야말로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편이었으니까.

 

형사는 너의 건강 상태에 관하여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의사를 만나 봐도 좋다고 했다. 증인이니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자 병동에서 멀지 않은 의사가 있는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내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본론부터 말했다. 네가 언제 생체 의식을 회복할지 알 수 없다고. 뇌의 손상 범위는 크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만, 회복까지는 한 달이 될 수도, 일 년이 될 수도, 십 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전하는 말투가 덤덤했다.

 

- 십 년이요……?

 

묻는 나의 미간은 아마 잔뜩 구겨져 있었을 것이다. 의사는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 아, 물론 복지 정책상, 십 년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만요.

 

복지 정책은 뭐고 기다릴 수 없겠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사의 설명을 이어서 듣자 다른 ‘인디’ 친구들이 말했던 내용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 함시운 씨가 만 일 년 이내 생체 의식을 회복하지 않을 경우, 환자의 신체는 폐기되고 의식 정보를 섹터 D 공공 클라우드에 업로드 하게 됩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실까요?

 

아무 대꾸 못하는 나에게 의사는 ‘인디’를 부양하는 국가의 시스템이 그렇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신체가 폐기된 시민은, 소속 지역의 공공 클라우드에 데이터화된 의식으로 업로드 된다. 그 존재를 ‘섀도우’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것도 무기한은 아니다. 사망한 그해의 평균 기대수명까지, 보통 팔십여 년에서 백 년 사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게 무슨 의미냐면 그 클라우드 안에서 너의 의식은 고정된다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거라고 해야 할까.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섀도우가 된 너는 태어난 후 스물일곱까지의 기억만을 가진 너로 존재한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증강현실로 볼 수 있는 겉모습은 그 연령에 맞게 변해간다고 하지만 속사람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이 현실을 살아간다면 스물일곱 이후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너는, 그 계산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십이 세기식 첨단 복지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를 구식으로 사는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다.

 

- 그래도 말씀드렸듯이 함시운 씨는 뇌 손상 범위가 작아서 손실되는 데이터가 거의 없을 겁니다.

 

- 그럼…… 손실되는 데이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나요?

 

의사는 웃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서였을 것이다. 알 수 없으니 손실일 테니까. 나도 묻고 나서야 질문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저, 그 손실된 기억에 내가 포함될 가능성도 있느냐였는데. 어쩐지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기에는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십 분 남짓한 의사와의 대화는 무미건조했다. 네 손바닥에 머물러 있는 희미한 온기만큼도 못 되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회사 동료이기에 그랬을까? 네가 ‘인디’가 아니라면, 내가 너의 가족이었다면 그런 표정으로 네게 체온이 남은 시간을 그렇게 선고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의사에게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너와 나는 그저 회사 동료에 불과했고 나는 네가 완전히 멈춰버렸다고 믿었으니까.

 

적어도 그날은.

 

 

 

 

*

 

 

 

 

- 오랜만에 비가 지나가서 그런가, 땅이 깨끗해졌어. 태풍이 오는 줄 알고 뉴스에서는 며칠 난리법석이었는데 경로가 바뀌었대. 새벽에 비껴갔다고 하더라.

 

면도기가 네 뺨에 길을 내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나는 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가족도 뭐도 아닌데 매주 찾아오는 내가 눈에 익어서 신경이 쓰였는지 어느 날 의사는 ‘네가 듣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너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되도록 부지런히 말을 걸어주면 좋다’고 했다. 어쩌면 의사도 네가 그 이십이 세기식 첨단 복지의 수혜자까지는 되지는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일단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너와 나의 공통의 기억은 대체로 회사 일이니까 사무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우리는 작은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 또는 노인층을 위한 맞춤형 실내 디자인 의뢰를 받았다. 사무실에서는 도면상에서 점과 선으로 작업하던 내용을 네 병실에 와서는 길게 말로 풀었다.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고객의 눈높이에서 본 집안의 풍경에 대해서, 시력이 약한 고객이 부엌과 화장실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오래오래 설명했다.

 

그렇다고 항상 일 얘기는 아니었다. 타인에 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것 또한 인간의 구식 즐거움이니까. 사무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종알거렸다. 차장이 영업부 박 과장에게 민원 관련 건으로 크게 면박 준 것도, 경리과에 이 대리가 석 달 뒤 결혼 날짜를 잡은 것도, 디자인팀 한 주임 네 딸아이가 축구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과자를 돌린 일도. 네가 기억할 만한 얼굴들을 하나씩 불러 모아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말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마지막으로는 날씨와 풍경 이야기였다. 맑은 날은 맑은 날에 대해서, 흐린 날은 흐린 날에 대해서. 비가 오면 비. 지진이 있을 땐 흔들림에 대해서. 하지만 지금 아무리 큰 지진이 온다 해도 너는 두려움도 위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 그런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너는 정말 여기에 있는 걸까, 네 몸이 여기에 있다고 너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한 번쯤은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만약 면도를 하다가 실수로 네 뺨에 상처를 내도, 아, 하는 소리조차 낼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 하는 네 목소리를 한번 떠올려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 ‘컨펌해 주세요, 민 대리님.’이라는 목소리는 망설임 없이 떠올릴 수 있지만, 나의 컨펌이 필요하지 않은 네 크고 작은 감정의 결까지는 잘 모르는 탓일 것이다.

 

네가 의식을 잃기 전까지 우린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음이 핑계라면 핑계다.

 

- 선배가 좋아요.

 

의식을 잃기 몇 시간 전 네가 나에게 전했던 목소리만은 분명히 독립된 소리로 기억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내가 너에게 들은 말 중 유일한 사적인 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제가 다름 아닌 나였다.

 

퇴근 후 건물을 막 나서는데 네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도 지금 사무실을 막 나왔는데 한잔 사주실 수 있냐고 조금은 어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았다. 다른 약속도 없었고 다음 날은 휴일이었고. 후배의 회사 생활 고충을 들어줄 생각으로 급조된 자리였다.

 

예상처럼 시작은 업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설계를 하면서 재미있는 것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 제 실력도, 의뢰인과 소통하며 느끼는 어려움도 이것저것 끊임없이 털어놓았다. 평소엔 그렇게 말수가 없던 녀석이 술기운 탓인가 의외로 말을 꽤 하는 편이네, 생각하며 듣고 또 들었다. 회사에서는 묵묵하게 시키는 일에 파묻혀 지냈던 너였기에.

 

여전히 너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신입 시절부터 손이 안 가는 편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는 모범 직원이었다고. 가르쳐주면 스펀지처럼 금방 배웠고, 실수도 거의 없었고, 없는 실수만큼이나 말도 거의 없었다. 심지어 회식을 해도 그 자리에 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어, 함시운 있어?’라고 한번 확인할 정도로 조용한 너였다. 존재감도 하얗고 말간 녀석이었다.

 

사람들이 네 책상 곁을 지날 땐 습관적으로 칭찬을 한마디씩 던지기도 했다. 싹싹하네, 잘하고 있어, 오늘도 열심이네. 그럴 땐 너는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런 네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내가 좋아져 버렸다고 고백했다.

 

테이블 위로, 맥주잔과 맥주잔 사이로 침묵이 앉았다.

 

네가 나를 눈여겨볼 만한 어떠한 접점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희기만 했다. 너만큼 아니어도 나 역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친밀한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고, 사수로서 일은 많이 가르쳐주었지만 살갑게 칭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둘이서 개인적인 자리를 가진 것도 이날이 유일무이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어지고만 있는 나의 침묵에 어색했는지 네가 시선을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곧 ‘컨펌해 주세요 대리님,’과 비슷한 당당함으로 네가 말했다.

 

- 바로 대답 안 하셔도 돼요. 기다릴게요. 어떤 대답이든. 대답만 해주시면 돼요.

 

맥주 한잔을 비운 후라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어느 쪽의 대답이라도 모두 감수할 각오가 담긴 눈이었다. 아마 네가 가진 모든 용기를 끌어모았으리라.

 

- 응, 알았어. 생각할 시간은 주는 거지?

 

- 하하, 그럼요.

 

내 대답에 너는 한결 안심한 빛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나에게도 안도가 찾아왔다.

 

한잔으로는 아쉬웠다. 다음 잔을 주문해서 대화의 시간을 좀 더 늘였다. 내가 모르는 너를 조금 더 알고 싶었고, 네가 모를 나를 조금 더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 우리를 정찰하기 위한. 그래도 아직은 어색함을 완전히 걷어낼 수 없었던 탓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네가 ‘인디’인 것도 몰랐다.

 

시간이 늦어서 우리는 일단 각자의 길로 향했다. 나는 택시를 잡았고 너는 전철로 갈 거라고 했다. 택시에 오르기 전 너에게 조심히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너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게 네 웃는 얼굴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내가 마주 보았던, 아직 의식이 있는 마지막의 너였다.

 

이다음부터는 경찰에게 증인으로서 전해 들은 내용과 나의 생각을 뒤섞은 것이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라 전철역의 플랫폼도 상당히 붐볐다고 한다. 어떤 짐 하나를 덜어낸 너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조용히, 집으로 향할 전철을 기다렸을 것이다. 안내전광판에 표시된 시각을 확인하며, 딱 막차를 탈 수 있다니 오늘은 뭔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쩌면 네 고백에 대한 나의 대답이 얼마나 걸릴지도 생각했을 것이다. 또 어쩌면, 괜히 섣불리 고백한 게 아닐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싸움 소리가 들렸다. 근처의 취객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 하고 언성을 높이다가 곧 한 덩이로 엉겼다. 순간 그 둘만 중심에 남겨놓은 원형 공터가 생겼다. 덕분에 너도 인파를 타고 슬쩍 밀려나고 말았다.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이윽고 대기 승객 대부분은 안전을 위해 그 둘에게서 완전히 멀어지는 쪽을 택했고, 몇몇은 그 둘을 사이를 벌려 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대로 두면 그 취객들이 중심을 잃고 플랫폼으로 떨어질까 다들 우려했던 것이다. 너도 그 몇몇 중의 하나였다.

 

아마 너는 그때만큼은 나에 대해 잠깐 잊었을 것이다. 다급하던 순간이었으니까. 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나를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기와 밀치기를 반복하며 몸이 많이 기울어진 취객 한 사람 대신, 그의 등 뒤에 있던 네가 선로로 추락하고 말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순간이라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대신 소리를 질러준 것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열차는 도착하려면 아직 오 분이 더 남은 상황이었다. 그저 떨어진 것뿐이었다면 다시 플랫폼으로 올라오기엔 충분하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을 잡아 끌어줄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너는 일어나지 못했다. 반짝이는 기다란 철로에 부딪힌 머리는 다시 가누어지지 않았고, 진입 예정이던 열차는 너를 해하지 않기 위해 플랫폼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두운 통로에 임시로 멈추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너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 기다릴게요. 어떤 대답이든. 대답만 해주시면 돼요.

 

기다리는 건 네가 아닌, 내가 되었다.

 

네가 상처 입은 그곳에 존재하던 나의 기억이 얼마나 될지, 답을 알 수 없는 나만 여기에 덩그러니 남았다.

 

- 내일은 햇빛 좋을 예정이라는데, 나들이 지수 90퍼센트…… 근데 월요일이잖아. 너도 알지? 월요 조회랑 오후엔 의뢰인 미팅 줄지어 있는 거.

 

어플리케이션으로 내일 날씨를 확인하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 다섯 달간 일요일에 방문했을 때 나의 멘트는 늘 비슷했을 것이다. 월요일이 두려운 직장인. 그렇게 조금 투덜거리고 난 후에 네 얼굴을 보면 너도 조금은 찡그린 듯 보이기도 한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면 덩달아 엷은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끝없는 독백을 뱉으면서도 잠든 네 얼굴에서 나는 깨어있을 때는 몰랐던 수많은 너를 발견한다.

 

다만 요즘은, 클라우드 속 섀도우가 된 너에게 말을 거는 나를 가끔 상상한다.

 

나는 아직 데이터화 된 망자를 만나기 위해 클라우드에 접속해 본 경험이 없다.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살펴본 정보에 의하면 새도우와의 ‘만남’은 접속자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전용 캡슐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캡슐 내 마련된 좌석에 몸을 맞춰 앉으면 아이 스크린이 두 눈을 덮고 내부 스캐너가 접속자의 뇌 신경망을 천천히 장악하면서, 섀도우와 접속자, 그러니까 너와 나의 기억의 교집합을 찾아낸다고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노출하지 않았던 정보는 데이터상에서도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인지적 정보 교감과 시각적인 효과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세한 촉각까지 느낄 수 있는 버전으로 작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정교한 기술이기는 했다.

 

사용자들의 후기를 보면 그 안의 너는 생생히 반응하고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섀도우라고 부르는 것이 그곳에서는 너일 테니까.

 

섀도우는 정말로 살아있는 듯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눈을 깜빡이고, 생전의 습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몸짓을 하며, 접속자가 질문하는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고 그 둘의 공유된 기억과 관계에 알맞은 대답을 한다고 한다.

 

그곳에서라면 지금처럼 네 생각은 조금도 모르는 채로 나 혼자서만 떠드는 일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상당히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겠다. 너에게 물어볼 것들이 아주 많지만 그곳에서 듣는 네 대답으로 나는 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그곳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된 너를 진심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지. 이곳의 시간으로 무려 일 년이나 기다렸을 네게 내가 접속해 ‘나 역시 네가 좋다’고 말한다면, 그곳의 너는 무엇을 느낄지. 그 일 년 사이 네 마음은 변함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너의 수염은 이곳처럼 일주일마다 같은 명암을 드러내며 자라고 있을지. 그곳의 네 기억 속에서는 지금 너를 면도해 주는 나의 손길도 들어 있는 것인지.

 

이제 와서야 할 수 있는 말인지 몰라도 다섯 달 전, 너의 기다림을 길어지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네 고백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둥글고 매끄러운지는 이미 잘 알았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노래나 장소조차 몰랐지만, 그건 차차 알아 가도 좋을 수수께끼였다. 그때는 미약했던, 아직 잘 모르는 너를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신호는 내게도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헤어질 때 손을 흔든 건 작별이 아닌 ‘또 봐’의 의미였을 것이다. 아마도 주말을 건너기 전에 말했을 것이다. 너의 주말이 이렇게나 길고 길어지기 전에. 봄을 보내고 여름을 지나서 가을을 향하기 전에.

 

 

 

 

*

 

 

 

 

- 오다가 정원에서 오래된 나무를 봤는데, 내가 말했던가. 병원 후문 쪽에 잘 가꿔진 정원이 있어.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아닐까 싶어. 그 나무 몸통 아래쪽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어. 초록이 아니라 연두색 이끼. 나는 이끼는 바위에나 흙 위에만 덮이는 건 줄 알았는데, 나무껍질 위에 자라는 건 처음 봤지 말이야. 근데 보자마자 네 수염 생각이 나더라고. 너도 알겠지만 매주 쉬지도 않고 잘 자라. 아, 그렇다고 나무한테서 이끼를 떼어 낼 필요는 없겠지. 면도가 필요한 건 사람뿐이니까.

 

실없는 말을 이어가며 또다시 파릇해진 네 얼굴을 나는 이제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리한다.

 

오늘은 풍경이다. 병원에 올 때마다 항상 지나는 길인데, 오늘따라 그 나무와 이끼가 눈에 띄었다. 그 앞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병원 건물로 들어가려던 길, 그리고 바깥으로 나오려던 어떤 꼬마와 입구에서 부딪혔는데 그 애가 먹고 있던 요구르트가 나에게 쏟아졌다.

 

꼬마는 울기 시작했다. 먹던 걸 남김없이 엎기도 했고 커다란 어른에게 실례를 끼치기도 했으니 놀랐을 것이다. 아이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였다.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소아병동에 입원 중인 모양이었다. 보호자 없이 왜 혼자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곁에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망친 옷은 옷이고 아이 먼저 달래기가 우선인 것 같았다.

 

나는 괜찮은데, 라고 몇 번을 말해도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그쯤 되었으면 이유는 내가 아니라 요구르트인 모양이어서, 병원 입구에 있는 매점에 얼른 뛰어가 똑같은 것으로 사 와 건넸다. 아이가 눈물을 그쳤다.

 

말 없는 너를 오래 지켜보다 보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뜻을 조금은 알게 된 게 아닐까, 우습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는 요구르트를 들고 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벤치로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아직 눈물이 다 마르지 않았는데도 몸짓만은 씩씩했다. 그리고는 요구르트를 열어서 안에 들어있던 숟가락을 뚝딱 조립하더니 폭폭 떠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보호자로 보이는 어른은 없고, 그냥 자리를 뜨기가 그래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벤치 끝에 앉았다.

 

엄마나 아빠 안 계셔? 간호사 선생님은? 어른의 존재에 대해서 몇 번을 물었지만 아이는 대꾸 없이 요구르트만 먹을 뿐이었다. 혹시 인지기능에 병이 있는 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들을지 모를 대답을 기다리며 네 면도를 위해 가져온 새 수건으로 일단 옷을 대강 닦았다. 그러나 요구르트가 워낙 끈끈해서 깨끗이 닦일 것 같지는 않았다. 몇 번 문지르다가 결국 포기했다. 물로 빨지 않으면 소용없을 얼룩이었다.

 

그냥 아이가 요구르트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아병동에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갑자기 일어난 작은 사고에 분주했던 마음을 비워내자, 새삼 늦가을의 냄새가 훅 끼쳐와 속을 채웠다. 공기는 건조했지만 볕은 은근히 따사로웠다.

 

그 앞에 그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신은 이끼 신발이 연둣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네 수염처럼 겨우 일주일 만에 자라는 이끼는 아닐 텐데.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천천히 자라고 있었을 텐데. 늦은 가을의 냄새와 함께 이제야 비로소 눈에 담겼다.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는 것.

 

너에게 나도 그런 것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언제나 근처에 존재하지만 알아차리는 것과 모르고 지나가는 것을 굳이 구분해야 한다면, 나는 너에게 전자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처음은 어떤 순간이었을까. 나를 너의 눈에 들어오게 했던 유난한 가을볕은 어떤 형태였을까. 묻고 싶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그 대답을 들으려면, 나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너인 너에게 묻게 될까, 섀도우가 된 너에게 묻게 될까.

 

너는 아직 생체의식이 없으며,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약 두어 달이 남았고, 나는 매일 어제보다 오늘의 너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너를 좋아하게 된 건지 미스터리가 된 너를 더 알고 싶어진 것인지 구분이 어렵다. 네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섀도우인 너와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매일 서로를 간섭한다. 이제는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는 지경이다.

 

길고 긴 기다림이다.

 

- 이끼가 예쁘다. 그치?

 

아이는 입만 오물거리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똑같이 시선을 주었다.

 

- 부츠 같다. 겨울 부츠. 나무도 이제 겨울이 온다는 걸 아나 봐.

 

이것도 네 덕분이다. 상대에게 아무런 대꾸가 없어도 태연하게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 엄마도 부츠 얘기를 했는데, 오늘.

 

그런데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하얀 요구르트 통은 깨끗이 비어있었고 내 옷에 진 얼룩과 비슷한 농도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 발이 또 자랐으니 올겨울에는 신던 부츠가 안 맞을 거야. 라고.

 

- 그래?

 

- 응. 그랬어.

 

- 그렇구나. 어린이들 발은 금방금방 자라지. 맞아.

 

이제 아이 기분도 좀 나아진 것 같고 보호자 없이 너무 오래 혼자 있으면 또 안 될 것 같아서 자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너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물론.

 

- 엄마, 어디 계시는데? 데려다줄게.

 

- 못해

 

- 응?

 

- 못해요 아저씨는.

 

아이가 영문 모를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때 저쪽에서 간호사 한 명이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은 재연인가, 재영인가 그랬다. 멀리서 들려온 이름이라 분명하지 않았다.

 

아이는 간호사가 올 줄 벌써 알았던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얌전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나도 괜한 오해를 받기는 싫어서 비슷한 동작으로, 높은 사람을 알현하듯 일어나 다소곳이 섰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간호사는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면회객이고 요 앞 입구에서 아이와 부딪혔고, 나 때문에 아이가 먹던 걸 쏟아서 새로운 걸 사줬고, 보호자로 보이는 분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마침 오셔서 마음을 놓았다고.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간호사는 이제야 완전히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간호사가 나에게 간략하게 털어놓은 아이의 전후 사정은 그 얼굴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현재 심리치료를 위해 장기 입원 중인데, 올봄 비행 사고로 양친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내가 너를 잃은 시점과 비슷했지만, 업로드 시점을 일 년이나 기다리지 않은 것은 이미 신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튼 아이는 잘 지내는 듯하다가도 가끔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어서 가끔 이렇게 직원들이 온 병원을 찾아 헤매는 날이 있다고 한다.

 

- 오늘 엄마랑 얘기를 했다고 했는데요.

 

그래도 아까 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렇게 물었더니 간호사가 대답했다. 아이는 오늘 섀도우인 엄마를 만나고 온 거라고.

 

아이는 심리 안정을 위해 정기적으로 클라우드에 있는 양친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클라우드에서의 만남이 아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사고 직후에 아이의 심리상태도 훨씬 건강해졌고 충격으로 몇 달 입을 꾹 닫고 있던 아이가 다시 말을 시작한 것도 클라우드에 접속하며 양친과 교감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감하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거리감 또한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클라우드와 섀도우는 상실의 과정에서 발생하고야 마는 상처를 줄인다고도 했다. 나는 아까 전 아이가 ‘못해요 아저씨는’이라고 의연히 말했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 업로드는 사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이기도 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너와 섀도우인 너를 구분하는 건 현재 나로서는 무리이지만, 간호사의 그 말만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 있잖아. 나한테 달콤한 냄새 나지 않아? 아직 옷을 못 빨았거든.

 

나무 이끼 이야기와 함께 오늘 늦은 이유를 구구절절 고백하면서 네 얼굴에 남은 면도 크림을 닦았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남은 크림을 닦아내는 결을 따라 살짝 당겨지는 너의 입가가 미소라는 착각이 든다. 그러면 나도 어느새 덩달아 미소를 짓고 만다.

 

- 안녕하세요.

 

그때 들려온 낯선 목소리가 나의 착각을 깨우고, 너의 얼굴도 무표정으로 돌려놓았다. 소리가 난 방향에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또래 여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 누구…… 신지.

 

- 저는 함해원이라고 하는데요.

 

오히려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얼굴은 조금도 닮지는 않았지만 흔치 않은 성씨로 짐작했다. 인디가 되기 전의 네 혈육이라고.

 

오늘은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잦은 날이었다.

 

 

 

 

*

 

 

 

 

나는 그에게 나를 너의 친한 친구로 소개했다. 섀도우가 된 너에게 묻는다 가정했을 때, 그 정도 소개라면 틀린 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저는 일단은…… 동생이라고 해야 할까요.

 

해원이 살짝 찡그린 얼굴로 대답하고서 아무것도 모를 나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딱히 너를 아낀다거나 걱정하는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진짜 핏줄은 아니에요. 오빠는 열두 살 때 저희 집으로 입양됐어요.

 

원래 네 혈연이자 유일한 양육자인 아버지는 전과자라고 했다. 빚이 많았고, 원수도 많았다. 감옥에서 지내야 할 세월도 길었다. 그는 친권을 간단히 포기했고 나라에서는 너에게 그를 대체할 다른 양육자를 찾아주었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해원의 양친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중학교 교사였고, 한 사람은 농부라고 했다. 큰 곡절은 없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해원이 양친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분들이 너를 맡아서 너도 좋은 사람으로 길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 물론 성인이 되기도 전에 말도 없이 집을 나가더니 결국 인디가 되었지만요.

 

- ……‘물론’이요?

 

뒤이어 나온 문장도 그렇고 너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되물었는데, 해원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 오빠가 주변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막말로 되바라졌다고 해야 하나. 늘 제멋대로고.

 

- 그래……요?

 

우리 회사에서의 너는 말수가 적어서 문제라면 문제였지, 되바라진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영 모르겠다는 표정인 내게 해원은 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기억의 교집합에는 없는 너의 이야기를.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실, 험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로서는 믿기 힘든 너였다. 입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네가 새 양친의 돈을 슬쩍했던 일, 학교에 지각, 결석을 밥 먹듯 하던 일, 새 가족들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 또래들에게 싸움을 건 일 등등.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며 그런 말썽은 줄었지만, 늘 무언가에 화가 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이기적인 아이였다고 했다. 친구 하나 없었다. 양친은 늘 학교에 상담으로 불려갔다. 그리고 너는 어느 날 집을 나갔다.

 

그런 사고뭉치인데도 새 양친은 너를 변함없이 기다려주고 지지했다. 주인이 사라진 방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계좌에 용돈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네가 성인이 되자마자 ‘인디’가 되어버린 바람에 친권도 너의 행방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까지. 변함없이. 네게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 듣지 못해도.

 

- 제가 아는 시운이랑은 조금 다른데요.

 

나는 너의 ‘감사합니다’라는 목소리를 아주 금방 떠올릴 수 있는데.

 

- 정말요?

 

- 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전혀 몰라요.

 

- 이상하네요, 친한 친구라면서요.

 

이렇게 병실까지 지킬 정도로 친하다면서 그 정도 과거도 전혀 모르느냐는 약간은 의심이 섞인 목소리였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좋은 과거이든 나쁜 과거이든 나는 너의 과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직장생활이란 일종의 롤플레잉이다. 모두가 성숙한 어른임을 연기하는 곳. 자신의 가감 없는 속내를 보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다.

 

내 생각이 어떻든 그건 상관없다는 듯 해원이 다시 말했다.

 

- 사실 오늘 올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요. 오빠가 우리한테 준 상처를 생각하면 다시 안 봐도 상관없다고 생각도 했지만.

 

너는 가출 후로도 ‘인디’가 된 후로도 새 양친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가끔 해원이 메시지를 보내면 마지못해 생존 신고하기가 전부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오랫동안 답이 없자 이상하다 싶은 예감이 든 해원이 너에게 연락을 해보았고 예감은 맞았다. 수신자는 네 목소리가 아닌 섹터의 복지과였다. 네 대리가 된 복지과에서는 네가 현재 생체의식이 없는 상태임을 해원에게 안내했다.

 

- 그래도 오빠가 섀도우가 되기 전에 한 번은 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왔어요.

 

제 마음 저도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해원에게 이번에는 내가 조금은 짓궂게 물었다.

 

- 별로 좋은 오빠는 아니었는데도요?

 

- 어라, 무슨 말씀이세요,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다고요. 저기요, 초면에 실례지만 친구 분은 형제자매 있으세요?

 

해원이 꽤 전투적으로 물어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 네…… 형이 하나, 동생이 하나.

 

- 저도요, 누군가 질문하면 그렇게 평범하게 대답하고 싶었어요. 나한테도 오빠 하나가 있다고. 사고도 치고 가끔 싸우기도 하고 날 짜증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오빠가 있다고요.

 

- 맞잖아요. 아무리 인디라고 해도…… 그건 행정적인 문제일 뿐이고.

 

- 그렇죠. 인디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어요.

 

- ……그런데요?

 

- 날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가족이라고 우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해원에게 너는 언제나 타인이었다고 했다. 몇 년이나마 함께 살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었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영영 알 수 없었을 그런 사람이라고. 그저 오랜만에 만난 네가 미동 없이 잠들어 있는 가만한 식물인 게 이상할 따름이라고. 찡그리고 투덜거리던 시선과 말은 오간 데 없이.

 

- 차라리 클라우드에서 섀도우로 만나면 이것저것 속 편하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클라우드에서 만나는 너를 상상해 본 것은 나 혼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둘 사이, 잠시 머물렀던 침묵을 잠시 후 해원이 거뒀다.

 

- 그럼 오빠를 조금은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작은 목소리였고 이내 다시 침묵이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거뒀다.

 

- 혹시 시운이가 어떤 일 했는지는 알고 계세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만으로 사실 조금 들떴던 것 같다. 아니면 어쩌면 그가 모르는 네 이야기를 내가 해줄 수도 있다는 자만심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대충은요. 실내 설계 같은 거 했다고는 들었어요. 직업학교에서 배웠다고요.

 

- 맞아요.

 

- 혼자서 뭘 그리기를 좋아하긴 했었어요.

 

그랬구나.

 

나는 네가 골몰하며 모니터 속 도면을 촘촘히 채워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은 불러도 못 알아듣고 작업에만 몰입하던 눈빛도.

 

- 사무실 사람들 다들 시운이를 좋아했어요. 여러 인턴을 썼는데 시운이만 한 녀석이 없었거든요. 실무에서도 도움이 제일 많이 됐고요. 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요.

 

- 정말요?

 

해원은 안 믿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런 네가 진실이었으니까.

 

- 네, 의뢰인들이 시운이랑 상담하면 편안해했어요. 시운이가 솔직히 말을 잘한다거나 영업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몇 번은 계약까지 따내기도 했으니까요.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아본 거겠죠. 의뢰인들이요.

 

- 이쯤 되면 저희가 아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좀 헷갈리는데요. 정말로 맞아요? 이 사람?

 

해원이 잠든 너를 가리키며 물었고 나는 웃고 말았다. 나는 네게도 하지 않았던 네 칭찬을 오늘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 늘어놓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 저희 의뢰인들 중에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분들도 계신데 시운이랑 상담하면 큰 문제가 안 됐어요. 통역이 있으면 쉽지만 아닐 때도 있거든요. 어쨌든 시운이는 정말 인내심 있게 잘 들어요. 의뢰인 한 마디 한 마디 놓치지 않고요. 소리가 얼마나 알아듣기 어렵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지요. 가끔은 신기하다고 생각했었어요. 리듬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그 말을 하면서 기억이 났다. 네가 무심코 했던 이야기 하나가.

 

‘저를 오랫동안 가만히 기다려 준 분들이 계셨는데, 그분들께 배운 기술’이라고 말했던 아주 희미한 기억이 수면 위에 올라왔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그분들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다.

 

되바라진 너와 둥글고 매끄러운 너 사이의 고리가 한 겹 채워졌다.

 

- 일어날 수 있을까요?

 

너를 함께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중에 해원이 물었다. 나에게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인지 너에게인지 구별할 수 없는, 그리고 그중에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내 스스로 대답했다.

 

- 사실 저는 상관없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저와 엄마 아빠에게 오빠는 이대로도 섀도우로도 차이가 없으니까요. 우린 오빠에게 지나간 존재들이고, 지금은 인디이고,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듣지 않는 이상 우리가 모르는 오빠의 모습을 알 방법도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해원이 잠시 말을 삼키며 주삿바늘이 꽂힌 네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그 온기를 떠올렸다.

 

- 이렇게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상하지만요.

 

해원은 그만 갈 생각인지 침대 발치에 걸어두었던 제 코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가, 킁킁거리며 물었다.

 

- 저, 근데 죄송하지만 아까부터 어디서 달달한 냄새나지 않아요?

 

그리고 냄새의 진원지를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 아, 죄송합니다. 오늘 사고가 좀 있었어요.

 

나는 요구르트 얼룩이 남은 셔츠를 다시 괜스레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덕분에 손바닥이 다시 끈끈해지고 말았다. 셔츠자락의 희멀건 얼룩을 보더니 해원이 픽 웃었다.

 

- 보기랑은 다르시네요.

 

- 네?

 

- 꼼꼼해 보이시는데, 뭐 아닐 수도 있죠.

 

- 아니, 그게…….

 

- 감사했습니다 오늘. 오빠 대신 절 만나주셔서요.

 

대답할 새를 놓치고 말았다. 잠시 억울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요구르트 쏟는 어른이라고 오해받는 일이 무슨 대수일까. 해원이 떠나기 전 무언가 꼭 말해야 한다면, 나는 요구르트는 쏟지 않는 어른이라는 해명보다는, 내가 너를 많이 아끼고 좋아한다는 마음일 것이다.

 

해원은 지금의 네가 영영 마지막인 듯 너를 오래 바라보다가는 코트를 얼른 꿰입었다. 시간이 멈춘 고요한 병실이 아니라 크고 작은 바람이 흘러가는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에게 ‘안녕히 계세요.’라며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는 떠났지만 이제껏 모르던 공기가 네 병실에 남아 있었다.

 

그 공기가 알려주었다.

 

둥글고 매끄러운 너만이 아닌 거칠고 되바라진 너를 나도 알고 싶다고. 너와 나의 기억의 교집합에는 없는, 클라우드에서는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예측불허의 너를. 각자의 살갗이라는 물리적인 장벽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밀해져야 드러나는 그 어두운 속내를, 때로 싸우고 고집부리고 화도 내면서, 내가 찾아내 알고 싶다고.

 

아니, 정직한 시간을 들여 알아가고 싶다고.

 

 

 

 

*

 

 

 

 

면도를 막 시작하려는데 복도를 지나던 의사가 앞으로 열흘이 남았다고 친절히도 알려주었다.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는 날짜다.

 

실은 어제 꿈에서도 네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제 ‘10일이 남았어요.’라고 말하는 너는 어쩐지 이미 섀도우였다. 하지만 우리는 분리되어 있었다. 너는 속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투명한 캡슐 속에, 나는 그 바깥에. 나는 너에게 말을 걸 수도 너를 만질 수도 없었다. 마치 스크린 속 영화 예고편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작은 나이프를 들고 캡슐을 열어보려고 애썼다. 너를 거기서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절차를 따르세요.’라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결과는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열었을 때는 올해 여느 때와 같은 일요일아침이었다.

 

습관처럼 면도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할 즈음에는 꿈의 감각이 옅어졌다. 나는 담담해져 있었다. 네 수염이 매주 변함없이 같은 속도와 길이로 자라나고 내가 매주 그것을 정리하듯. 지난 일 년 그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듯, 어떤 항상성이 내 의식 깊이 자리 잡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져 다른 날보다 조금 늑장을 부린 면도를 끝내고서 병실의 블라인드를 열었다. 겨울 오후의 볕이 길게 뻗어 네가 누운 자리까지 닿았다. 너의 어깨부터 귓가까지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기다란 길이 생겼다. 이 볕이 너를 간지럽혀 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하, 간지럽잖아요.’ 하며 웃는 너를 생각했다. 그런 흐트러진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네 웃음은 아직 머쓱해 하며 짓는 웃음이 전부다.

 

모른다. 나의 주의가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 네가 한 번 쯤 시원하게 웃었는지도. 내 희미한 기억 속에 그 순간이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한다. 남들이 본다면 그저 멍청히 허공을 응시하는 걸로만 보이겠지만, 나는 치열하다.

 

그렇게 같은 사무실에서 서로의 곁을 스쳤을 무수했던 순간을 되짚으려 애쓰는 일이 언제부턴가 나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모르고 지나쳤던 너의 웃음을, 손짓을, 아쉬움을 더 자세히 탐색해 보고 싶을 땐 눈을 감기도 한다. 이 차가운 겨울 속에서도 어떻게든 연둣빛 이끼 같은 그 순간을 떠올리려고.

 

잠시 기억을 헤매던 사이, 볕이 어느덧 네 오른편으로 반 뼘 이동했다. 이제는 빛이 눈꺼풀에 머물러 있다. 올해의 모든 계절, 이렇게만 해를 만나는 너는 눈부심을 모른다. 만약 오늘 네가 다시 눈을 연다면 네가 가장 처음 하는 말은 무엇일까, 요즘 내 상상의 주제다.

 

‘선배?’ 그런 틀에 박힌 대사는 기대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그런 어색한 인사도. 그저 캄캄한 밤중에 너 혼자 깨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렇게 화창한 볕 속에서 눈부셔, 중얼거리며 조금은 툴툴대며 돌아왔으면.

 

좀 더 자고 싶은 아이가 칭얼거리듯이. 꿈을 저만치 밀어내는 세상 모든 평범한 아침처럼.

 

오늘도 다시 매끄러워진 너의 뺨과 턱을 가볍게 쓸어보았다. 멈출 줄 모르고 자라는 네 이끼는 다음 주에도 또 여기에 파릇이 돋아날 것이다.

 

나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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