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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프로듀서 신유란은, AI 음악가 ‘에이다’와 세 번째 대결을 치르기 30분 전, 이 대결이 자신의 패배로 끝날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체념과 평안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모호한 기분이 느껴졌다. 회전의자 시트의 두툼한 등받이에 몸을 파묻듯 누이며, 한순간에 긴장감이 풀리면 으레 그러하듯, 유란은 나른하게 퍼지는 몽롱한 느낌에 잠겨 들었다. 무념무상. 생각이라는 작용이 정지된 상태. 흡사 잠들기 직전 머릿속으로 상상과 기억이 한데 뒤섞여 형체가 없는 상념으로 희끄무레한 연기마냥 두둥실 떠다니는, 그런 상태였다. 그 형체 없는 상념 속에서, 문득 유란은 팬데믹 시대 이전에 겪은 어느 짧은 기억을 떠올렸다.

패셔니스타로 일컬어지며 연예 기사에 오르내리는 지금의 유란과는 달리, 그때의 유란은 어딘지 조금 늘어난 감이 있지만 아직까진 입을 만한 수준의 아이보리 색 스웨터에다 색감이 바래 낡은 기색이 슬쩍 올라온 자주색 야상을 걸치고 있었다. 새로운 곡 하나를 써주기로 계약한 어느 아이돌 그룹 소속사 대표와 미팅이 있어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으며, 이제 와서 곡이 마음에 안 든다고 퇴짜 맞는 건 아닐지 근심하며 지하철 역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한 분이 지하철 역 벽면 한쪽에 마련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분하고 태연한 연주였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서로 다른 건반 소리가 감미로운 선율을 이루었다. 유란은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할머니는 연주를 마치고는 옆에 놓여있던 손수레를 질질 끌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 모습이 유난히도 작아보였다.

유란은 할머니가 떠나간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방금 전 할머니가 연주한 곡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건반을 두드렸다. 물론 모든 부분이 다 기억나는 건 아니라서 연주 곳곳에 적당한 변주가 있었으며, 연주하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다는 점도 작용했을 테지만, 어딘지 자신의 연주에는 방금 전 할머니가 선사한 느낌이, 소리가 부드럽게 온도를 감싸는 느낌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란 스스로 음악을 다루는 자신의 실력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동시에, 이 순간을 기점으로 유란의 커리어는 점점 성공하기 시작했다. 그날 그 순간 이전까지는 푼돈에 불과한 저작권료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매일 같이 계좌를 확인해야 했지만, 그날 그 순간 이후의 저녁 미팅 자리에서는 소속사 사장이 유란의 곡을 칭찬하며 높은 금액으로 계약을 갱신해주었다.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새로 발매된 아이돌 그룹 앨범에 곡이 실렸으며, 이것이 숨어있는 명곡으로 팬들에게 회자되다가 타이틀곡과 더불어 음악 프로에서 시연되기에 이르렀다. 자가용은커녕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이고 환승해야 목적지에 도착하던 삶이 매니지먼트 소속사가 마련해준 밴을 타고 이동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팬데믹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란의 삶은 다시 한 번 거듭났다. 유란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이었는데, 작업실에서 심심풀이로 하던 개인방송이 대박 난 것이다. 별 의도 없이 시도한 ‘라이브 스트리밍 작곡’이 크게 터졌다. 간단하게는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피아노로 즉석에서 연주하는 것부터, 복잡하게는 여러 가지 사운드 파일을 그 자리에서 편집해 하나의 곡으로 완성시켜 들려주는 것까지, 말 그대로 실시간 작곡 과정의 쇼 이벤트였다. 마치 ‘어때요, 참 쉽죠?’라는 말로 유명한 화가 밥 로스의 그림 쇼처럼. 밥 로스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며 이런 저런 설명을 곁들이다가 어느새 완성된 그림으로 시청자들을 감탄시켰듯 유란은 지금 이 에디팅이 어떤 과정이며 어떤 의도인지 부지런히 설명했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하나의 음악이 완성되어 재생되고 있었다. 오프라인 콘서트가 궤멸해버린 팬데믹 시대에 유란이 보여준 라이브 스트리밍 작곡 이벤트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흥미로운 퍼포먼스였다. 그렇게 유란은 온택트 라이프에 부합하는 퍼포먼서로, 새로운 분야의 셀럽 스타로 떠올랐다.

AI 음악가 에이다와의 대결을 치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해보죠.” 앞으로 겪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몰랐던 그 당시의 유란은, 대결을 제안 받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거의 즉각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히 대답해 버렸다. 유란에게 대결을 제안한 AI 개발업체 ‘프라임소프트’ 측의 담당자가, 허무할 정도로 금방 결론이 나자 당황한 나머지 어색하게 웃는 것을 숨기지 못하여 그 모습이 화상 통화 화면에 고스란히 나타났을 정도였다. 담당자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대결에 관한 세부 사항을 논의하려 했지만, 유란은 새로 발매할 앨범의 트랙 작업이 우선이었기에 소속사와 협의해 달라 이르고 화상 통화를 마무리했다. 당장 자신에게 시급한건 원맨밴드 ‘마에스트라’의 신규 앨범을 완성하는 일이었으니까.

마에스트라는 신유란 자신이 유일 멤버인 원맨밴드로, 이번에 내놓을 앨범의 경우 모든 트랙에 서로 다른 뮤지션들의 피처링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트랙마다 그 음색을 서로 다른 색깔로 구성해, 하나의 앨범 그 자체로 다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게 목표였다. 인공지능 음악가와의 대결? 그런 건 가십거리가 필요한 기자들이라든가 1인 언론을 빙자하며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는 이슈 팔이 유튜버들한테나 재밌게 들릴 이야기였다. 물론 인공지능이 흥미로운 음악을 구사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위협을 느낄 건 아니라는 게 유란의 생각이었다.

AI는 분명 예술 분야에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음악 또한 예외가 아니긴 했다. 바흐의 음악을 학습한 ‘딥바흐’가 음악 전문가들이 속을 만큼 완벽한 바흐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었고, 2016년 프랑스 음악 저작권 협회에서는 정식으로 인공지능 ‘아이바’를 작곡가라고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딥바흐는 그냥 또 하나의 바흐였으며, 아이바가 베토벤을 능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작곡은 그렇다고 치고, 작사는? 작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작사라는 영역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AI가 팝 뮤직 분야를 침범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멜로디를 만들고 비트를 깔 수는 있겠지만, 그런다고 인공지능이 에미넴이 되는 건 아니었다.

소속사와 프라임소프트 간의 협의, 그리고 신유란의 동의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누가 만든 건지 가려놓은 상태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원을 공개한다. 24시간에 한해 투표 버튼을 제공, 청취자는 계정당 1회의 투표를 행사할 수 있다. 24시간 후 투표 종료와 동시에 누적 투표수를 공개, 승부를 가린다. 이런 식으로 총 다섯 번 대결을 실시, 먼저 3번의 승리를 거둔 쪽이 최종 승자로 판가름 난다. 그리고 이 대결에 쓰인 모든 음악은 신유란과 에이다의 콜라보레이션 앨범으로 발매한다. 5판 3선승제이므로 가능한 대결의 수는 최소 3회에서 최대 5회이며, 따라서 앨범에 실릴 트랙은 최소 여섯 곡에서 최대 열 곡으로, 제작 및 발매는 유란의 소속사가 담당하고 판매 및 유통은 프라임소프트의 모회사인 플랫폼 업체가 담당한다.

이와 같은 소식이 공개되자, 예상대로 신유란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반면 소식을 보도하는 기사문과 이를 접한 대중들은 호들갑이었다. 업계 내부의 의견은 엇비슷하게 반으로 나뉘었다. “인공지능이 곡 쓰는 거야 처음도 아니니까 그게 신기할 건 없지. AI가 만든 음악이 딱히 경쟁에서 이길 정도로 대단하다 싶은 건 아직 없잖아. 기껏해야 나쁘지 않은 게임 BGM 정도일 걸?” 이렇게 시큰둥한 반응이 있는가하면, 진지하게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베팅 다 끝났으니까 그쪽에서 이렇게 나왔겠지. 아직 공개된 적 없는 AI라며. 언어 학습 능력이 있어서 작사도 할 줄 안다던데,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주변에서 어떻게 반응하든 신유란은 개의치 않았다. 잘 나가는 IT회사가 자기네 제품 팔아먹을 마케팅 수단으로 요란스런 이벤트를 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잘 하는 결정인지 모르겠다고 찝찝해하는, 전직 프로듀서였던 소속사 사장을 오히려 유란이 별 일 없을 거라며 안심시킬 정도였다. 며칠 뒤 공개된 에이다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프라임소프트가 보내온 영상에서, 에이다의 아바타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CG로 구현한 가상의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진짜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에이다예요.” 인공적으로 합성하여 여성을 흉내 낸 목소리, 그러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짜 목소리, 그렇지만 누가 들어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에이다는 자신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면서 중간 중간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와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 그리고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는 물론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합성 목소리까지 들려주었다. 아바타의 외모도 지금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지금의 모습만 보여드리겠다고 말할 때에는 위트까지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에이다 스스로 구사하는 행동이었다. 입력된 스크립트가 아니라.

“아직도 배울 게 많은데, 부끄럽지만 제가 만든 음악을 이렇게 보여드리게 됐네요. 아직 가사를 붙이지 않아서 미완성 상태인 곡을 우선 들려드립니다. 이걸로 유란 님께 조금이나마 저에 대한 소개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가상의 스튜디오에서 에이다가 몇 차례 마우스를 클릭하자, 에이다가 만든 음악이 재생되었다.

작업실에서 영상을 지켜보던 유란은, 잠시 영상을 멈추고 헤드폰을 연결했다. 다시 영상을 재생한 다음, 헤드폰에 손을 얹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그저 간단한 인스트루멘탈 음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패드 사운드가 깊게 깔린 와중에 영롱한 소리가 들렸다. 금속 재질의 타악기 소리 같긴 한데, 무슨 악기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여러 악기의 소리를 믹싱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영롱한 소리가 일정한 음계로 반복되고 있었다. 유란은 사이드 테이블 옆에 놓인 마스터 키보드 쪽으로 손을 옮기곤 음계에 맞춰 건반을 두드렸다. 5개의 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5가지 음을 활용하는 체계, 펜타토닉 음계였다.

펜타토닉 5음 체계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음율 체계였다. 중국에서는 이를 음양오행에 대입하여 궁, 상, 각, 치, 우라는 다섯 가지 음 이름을 부여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음악가인 피타고라스가 고안한 음계 중 첫 번째 음계가 펜타토닉이었다. 펜타토닉은 세계 각지의 전통 민요에 가장 많이 발견되는 음계이기도 했다. 국악의 12음율 체계에서 중, 황, 무, 임, 태 다섯 음만 활용하는 경우 또한 펜타토닉의 사례였다. 한마디로 이 곡은 현대의 악기 소리로 고대 음악의 인상을 구현한 셈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란이 받은 인상에 불과한 거였다. 과연 에이다가 고대 음악을 구현하겠다고 ‘의도’했을까? 에이다는 알고리즘 프로그램인데, 음악적 의도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게 가능한 얘기일까? 잠시 후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피아노의 멜로디가 펜타토닉 음계와 정확히 화음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변칙적인 타이밍에 킥이 들어오면서 코드가 스위치 되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약간 엇박자 같은 킥에 맞춰 멜로디의 흐름이 메이저 코드와 마이너 코드를 여러 차례 오갔다. 스위치 타이밍이 연거푸 어긋나가면서 엇나감의 반복 그 자체가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음악이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긴장감을 이루었다. 독창성 또는 신선함이라고 부를 만한, 신비로운 긴장감을. 만약 이게 사람이 작곡한 것이었다면 창의적인 실험을 하셨노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유란 님과 만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유란 님의 음악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뵈어요.” 에이다의 온화한 미소로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유란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작업실을 빠져나와 소속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다. 저 멀리 강물처럼 굽이치는 도로 위로, 스멀스멀 움직이는 차량들의 불빛이 흘러가는 물결마냥 이어지고 있었다. 유란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먹먹한 어둠 속에서 한점의 담뱃불이 벌겋게 타올랐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연기가 바람 속에 부서지듯 흩어졌다. 두 모금 더 담배 연기를 뱉은 후에야 생각이 정리되었다. 에이다가 보여준 곡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함부로 시도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구성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리 없이 해냈다. 만약 거기에다가 그럴듯한 가사까지 첨가해 낸다면? 영상에서 자신을 소개하던 내용으로 보아, 언어를 구사하는 수준도 가사를 작성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유란은 뒤늦게 자신이 안일했음을 알아차렸다. 에이다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유란은 작업실로 돌아와 마에스트라 앨범에 수록할 생각으로 만들어둔 곡들을 살폈다. 주의 깊게 파일 하나 하나 모두 점검한 다음, 아직 가사를 완성하진 못했으나 곡의 구성 자체는 완성된 어느 가이드 곡을 골랐다. 원래는 소울 스타일로 보컬을 구사하는 어느 여성 가수에게 전달할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란은 가수에게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지금 당장 가사를 완성해서 가이드 곡 파일과 함께 전송해 줄 테니 이 노래를 에이다와의 첫 번째 대결에 활용하자고 합의했다. 가수가 흔쾌히 동의해주어서, 그리고 유란에게 응원의 말까지 건네주어 그 기운을 받은 덕인지, 유란은 순식간에 가사를 완성했다.

가사와 함께 가이드 곡 파일을 전송하고 이틀 뒤, 가수가 녹음이 완료된 파일을 보내왔다. 딱 유란이 예상했던 완성도였다. 비록 독특한 지점이 뚜렷한 곡은 아니었지만 서정적인 분위기로 촉촉하게 감수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정한 취향을 저격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두루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게 바로 유란이 노린 지점이었다. 에아디가 영상에서 들려준 곡은 독창적인 구성을 매력적으로 어필했지만, 이걸 뒤집어서 말하자면 취향에 따른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결의 승패는 누가 더 대단한 음악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청취자들의 표를 획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어차피 수준급의 실력자가 맞붙는다면 완성도에 대한 우열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며, 결국 호불호의 측면에서 얼마나 불호를 피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유란이 첫 번째 대결을 위해 준비한 곡은, 불호를 최소화하기에 적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펼쳐진 첫 번째 대결에서, 신유란은 패배했다.

 

스트리밍 조회수 자체는 신유란의 곡이나 에이다의 곡이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말인즉 두 곡 모두 완성도 있는 음악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득표수에서는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것이 유란의 곡이고 어느 것이 에이다의 곡인지 모르는 상태로 두 곡을 감상했으며, 각자의 판단에 따라 ‘VOTE’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결과, 에이다의 곡이 엄지손가락 투표 아이콘을 더 많이 획득했다.

작곡자가 공개되지 않은 24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 댓글로 자기 생각을 달았다. 이 곡은 사람이 만들 수가 없다, 무슨 소리임 저 곡이야말로 인간의 창의성이 깃든 곡인데, 만약 저 곡이 신유란 거라면 반성해야 한다 어디 인공지능만도 못한 음악이나 만들고, 딱 듣자마자 5초만에 어느 쪽이 기계가 만든 건지 티가 남, 막귀 새끼 아는 척 오지네, 내가 현직 밴드 드럼인데 어따대고 막귀 타령이야 애니 프사 하고 다니는 찐따 새끼야, 현재 파리1대학에서 음악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두 음악을 비교하자면 어쩌구저쩌구 그러므로 어쩌구저쩌구입니다, 너 파리1대학이 1등이라서 1대학이 아니라 그냥 번호가 1번인 건 알고 떠드냐, 파리1대학 웃기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1대학 왜 1대학인지 아는 사람, 그거 니 엄마가 암, 암(x) -> 앎(o), 아진짜 맞춤법무새 다 죽어버렸으면, 스포츠토토 승률 100프로 지금 당장 접속하기 https://thisisallfake.uknow, 제 채널 접속하시면 꽁돈 2만원 벌어요 하루 30분 투자해서 학생 주부 부업 만들기 거짓말 아님 사기 아님 https://thisisfaketoo.also

24시간이 지나고 작곡자가 공개되자, AI가 예술 영역도 인간을 앞질렀다는 기사문들이 비슷한 제목에 비슷한 문장으로 쏟아지듯 게시되었다. 충격적인 소식을 알리는 양 제목으로 느낌표를 남발하면서 섬네일은 별로 상관없는 이미지 파일을 달아놓고는 정작 내용을 살펴보면 기사를 통해 다들 아는 이야기를 가져다가 요약한 것에 불과한 동영상이 유튜브를 중심으로 유통되었다. 평론가니 교수니 미학자니 하는 이들의 오피니언이 이러한 흐름에 가세했는데,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조회수라든가 댓글이 달린 개수 등은 그들의 오피니언이 제일 적었다.

유란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에이다의 곡을 계속해서 듣고 들었다. 적막한 작업실에선 계속해서 음악을 다시 듣느라 헤드폰을 쓴 유란이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만 이따금씩 툭툭 튀어나왔다. 사실상 곡에 대한 분석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주어진 결과를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는 어느 인간의 강박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들으면 다시 들을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대결에 에이다가 내놓은 곡은 유란이 내놓은 곡을 철저하게 부서뜨렸다.

에이다의 곡은 도입부에서 노이즈를 은은하게 깔아놓은 상태로 시작되었다. 보통의 경우 노이즈는 감점으로 작용할 요인이었지만, 에이다는 이것을 듣는 이의 귓가에 자연스레 스며들 로우파이 사운드로 활용했다. 어두운 느낌의 패드 사운드와 더불어 천천히 반복되는 세 종류의 음정이 마이너 코드 음계를 이루며 곡 전체에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메인 파트에 들어가면서 무슨 악기인지 모르겠으나 에코 이펙트로 덧씌워진 소리가 백그라운드로 깔리면서 아득한 느낌을 일으켰다.

비음 섞인 여성 보컬이 몽환적으로 가사를 읊었고, 뜻밖의 타이밍에 남성의 목소리가 속사포로 랩을 구사했다. 남성의 랩은 무수히 많은 단검을 던지듯 몰아치다가 어색하지 않게 플로우를 바꾸어 리드미컬한 랩을 구사하더니, 잠시 후 단어를 짧게 끊어 치는 스타카토 스타일로 다시 한 번 플로우를 바꿨다. 그런 식으로 짧은 랩에 무려 7번이나 플로우 체인지가 일어난 다음 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그러다가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정확히 15초 간격으로 첨가되더니, 일렉기타 사운드가 그 모든 소리를 칼로 찌르듯 관통하면서 하나의 선율로 끊어지지 않은 채 점점 더 높은 음으로 치달았다. 여성의 목소리가 기타 소리에 맞춰 포르타멘토로 올라가며, 다시 말해 낮은 음에서 점점 더 높은 음으로 올라가며 절정에 다다랐다. 마무리에 이르러 하나씩 소리가 소거되었고, 그리하여 점점 저 멀리로 무언가가 아득히 사라지는 아련함을 자아내면서 곡이 끝났다.

에이다의 곡은 강렬한 인상을 선사했다. 과감한 구성은 인간 작곡가의 도전적인 시도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되게끔 안전하게 곡을 구성한 유란의 선택은, 에이다가 선택한 강렬함과 과감함에 박살 난 셈이었다.

“피아노는 타악기다. 건반으로 현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야.” 유란의 어머니가 아침상을 차리면서 어린 딸 유란에게 말했다. 가끔 이 시간 즈음에 이웃집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타악기는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로 음악을 만드는 거다. 당연히 기본 속성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어. 피아노를 저렇게 막 다루면 그렇잖아도 날카로운 소리가 엄청 거칠게 들린다.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되는 거야.”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이웃집 소음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에 정당한 근거를 끌어들였다. 큼직한 이목구비에 묵직한 턱선으로 얼굴 자체가 단단한 인상을 주는 분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표정을 굳히니 딸 유란과 꼬마 남동생은 물론 실업자 신세인 아버지도 힐끔힐끔 시선을 피하며 어서 이 불편한 공기가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너희 엄마가 실은 음대 다니다가 그만둔 사람이란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재미난 비밀을 수군거리듯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늘어진 러닝셔츠만 달랑 걸치고 있던 탓에 그렇잖아도 마른 몸이 더욱 빼빼 말라보였다. “학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뒀는데, 그래서 조금이라도 모자라다 싶은 음악이 들리면 엄청 짜증나 해.” 대학생이 된 유란이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를 따라 우연히 참가해본 작곡대회에서 얼떨결에 3등상을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기 시작한 후에도, 어머니는 딸의 작품을 엄격하게 논평했다.

피아노 소리가 기본적으로 날카로운 소리라는 말에 동의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다시 말해 피아노 소리가 파괴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 합당한 주장일까? 감상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주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애초부터 이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배경이 있는 탓에 유란은 소리가 지닌 본성이라는 것을 예전부터 고민해왔고, 음악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이 부분을 심도 깊게 고려해왔다. 유란이 누군지도 모를 어느 할머니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서, 아직 자신이 소리를 다루는 실력은 한참 모자라다고 느낀 것도, 어쩌면 소리를 대하는 유란의 태도가 유란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소리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글렌 굴드는 키가 작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아니스트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칠 때면 자연스레 그 자세가 건반을 내려다보게 되는 것과 달리, 글렌 굴드에게 피아노 건반은 다소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연주 때마다 피아노에 거의 몸을 붙이다시피 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자세를 취했다면 우스꽝스러울 테지만, 글렌 굴드라는 천재가 신들린 연주를 선사하며 피아노 건반에 몸을 붙이다시피한 그 특유의 자세는 청중들로 하여금 역시 천재는 뭔가 다른 법이요 과연 천재다운 모습이라고 느끼도록 하였다.

이와 비슷한 또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글렌 굴드 특유의 신음 소리였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멜로디에 맞춰 뜻 모를 신음 소리를 흘리곤 하였다. 음반을 녹음할 때에도 그런 짓을 했는데, 남들 같으면 정신병자 소리 듣기에 딱 좋은 짓이었으나 레코드 중간 중간 미미하게 들리는 굴드의 신음 소리는 희한하게도 피아노 소리에 착착 감겼고, 음악 소리에 녹아들며 독특한 조화를 빚어냈다. 물론 어쩌면 단지 천재의 신음 소리라는 이유만으로, 그러니까 일단 천재의 작품이라고 하면 무조건 후하게 평가하고 보는 그런 경향처럼, 단지 그 주인공이 글렌 굴드라는 이유만으로 한낱 신음에 불과한 소리에다가 온갖 미적 가치를 끌어 붙인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대결에서 에이다가 내놓은 곡을 듣고, 유란은 글렌 굴드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묘한 신음 소리가 음악 자체보다 더 화제가 되었던 글렌 굴드의 음반이 떠올랐다. 에이다가 내놓은 두 번째 곡은 인공적으로 합성하여 만든 사람의 목소리, 그 중에서도 신음 소리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소리를 악기처럼 활용하여 음악 속에 배합시켰다. 그 음악이 유란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주었다.

에이다가 내놓은 두 번째 곡은 다른 종류의 소리 없이 오직 현악기 소리로만 도입부를 구성했다. 다채로운 현악기 소리가 완급을 조절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기타, 심지어 하프 소리까지. 온갖 종류의 현악기 소리가 마치 실개울이 한데 모여 강물을 이루듯 신비롭게 어우러졌다. 때로는 감미롭고 잔잔했으며 때로는 몰아치는 파도 같았다. 그리고 현악기가 자아낸 물결을 따라 비애와 환희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있을 희미한 신음 소리가 미미하게 흘러나왔다. 곡 후반부에 이르러 전조가 일어나면서 음량이 커졌고,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서로 다른 소리들이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들 듯 어우러지더니, 전혀 다른 새로운 소리 그 자체를 이루면서 마무리 되었다.

유란은 생각했다. 이건 AI가 천재의 음악을 학습한 결과인 걸까? 아니, AI라는 이름의 또 다른 천재가 등장했다고 말해야 더 정확한 걸까?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까지도 신유란 자신의 패배라는 사실은 어쩌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종류의 천재가 탄생한 게 아니냐는, 두려운 진실이 아니었을까.

 

5판 3선승으로 계획된 대결이 에이다의 3연승으로 끝나는 거 아니냐고 조심스런 예측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번 대결의 중계권을 구매한 방송사 그리고 스트리밍 채널 입장에선 수익상 아쉬운 노릇이요, 지켜보는 세간의 입장에선 씁쓸한 광경이며, 신유란 본인과 음반 업계 관련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란은 마에스트라 앨범 작업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다음 대결을 어떻게 치를지 고민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세 번째 대결이 마지막 대결이 될 수도 있는 판이었다.

그러다가 프라임소프트 측에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세 번째 대결부터는 라이브 작곡 이벤트로 방식을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에이다와 신유란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라이브 방송으로 즉석 작곡을 벌여서 승부를 겨뤄보자는 거였다. 방송사들과 스트리밍 채널들끼리 합의해 각각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에이다의 곡을 그리고 다른 한 그룹은 유란의 곡을 동시에 방송하고, 라이브 연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실시간 투표를 받아 더 많이 득표한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는 게 구체적인 제안 내용이었다.

“이 새끼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네.” 소속사 사장이 프라임소프트와의 화상 회의를 마친 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네 상품의 음원 제작 능력은 검증이 끝났으니까 더 할 필요 없고, 이제 어디 라이브 연주로 시합을 벌여도 자기네 상품이 먹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거네.” 라이브 작곡. 못할 건 없었다. 팬데믹 이후 새롭게 떠오른 라이브 작곡 퍼포먼스에서 손꼽히는 실력자가 신유란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부분에서까지 신유란이 밀린다면, 그건 말그대로 인간의 완벽한 패배였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정적 사이로 오가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침묵이 서로의 심정을 전달해주었다. 유란은 망연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장이 한숨을 뱉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얘네들 음원 플랫폼 하나 인수한대. 다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어제 기사 났어.” 프라임소프트의 모회사가 음원 플랫폼을 인수 합병하기로 한 기사였다. 이제 그들은 에이다를 필두로 하여 제작비가 거의 절감된 음원을 높은 수준으로 생산하고 유통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굳이 라이브까지 가자고 하는 걸까요.”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려는 거지. 자기네 상품이 그냥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느껴지게 만드려는 거야. 아우라가 있는 인격으로 보이게끔 작업 거는 거지.”

그들이 인수한 회사에는 CG기술로 유명한 영화제작사와 애니메이션 업체 그리고 VR 게임 개발사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값싸고 질 좋은 음원을 생산하는 데에 그치려는 게 아니었다.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 공연 예술이 궤멸하면서 반대급부로 떠오른 온라인 예술, 바로 그 시장 자체를 장악하려는 거였다. 온라인에 의존하는 공연 예술이라면, 오프라인의 실물 인간 대신에 가상의 아바타로 공연을 치르는 일이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만약 가상의 아바타가 실제의 인간처럼 수준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면, 자본가의 입장에서 굳이 인적 자원에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문제는 제아무리 AI 아바타가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들 대중들이 AI의 공연 예술을 사람의 그것처럼 대해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대단한 예술적 퍼포먼스가 치러진들 그것이 프로그램의 산물임을 미리 알고 접하는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높지 않았다.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예술가 본인의 피땀, 각고의 열정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접하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인격체가 그 자신의 ‘자아(self)’를 바쳐가며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접하기 때문에, 결과물의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AI의 작품은 그 자체로 반쪽짜리 매력을 선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에이다에게 자아의 이미지를 작업하기로 했다. 최고 실력의 예술가와 대결을 펼치고,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점점 에이다라는 존재를 하나의 스토리로 인식하게끔 유도한 거였다. 에이다를 단지 실력 좋은 프로그램이 아닌, 엄연히 존재하는 서사(narrative)로 구축하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유란과의 대결에서 최종 승리를 획득한 다음, 그들은 에이다를 주인공으로 하는 페이크 다큐라든가 가상의 예능 프로그램 따위를 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플랫폼에 런칭할 것이다. 실제 아티스트들이 투어 공연을 펼치듯 가상공간에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개최할 것이며,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거대 규모의 스케일을 가상현실 기술로 구현해낼 것이다. 그렇게 신유란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활약하는 분야를, 자신들의 영토로 정복할 것이다.

 

라이브 대결을 앞둔 마지막 날 밤, 유란은 간만에 깊이 잠들었다. 평소 잘 꾸지도 않던 꿈을 꾸었으며, 또렷한 정신으로 아침에 깨어났다. 하기야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대결을 앞두고 혼신을 다해 사전 작업을 했으니,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 버린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 대결을 돕기 위해 많은 동료들이 자신의 음원 파일을 유란에게 전해주었고, 유란은 그것들을 살펴보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마에스트라 앨범 피처링에 참여해준 이들은 자신의 피처링을 얼마든지 활용해서 꼭 좋은 결과를 일궈 달라고 응원해왔다. 동료들이 보내준 음원 파일은 세션 연주 음원부터 래퍼가 직접 만든 랩 벌스, 보컬리스트가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 등 다양했다. 라이브 작곡 퍼포먼스는 그 자리에서 쓸 수 있는 도구를 최대한 미리 많이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랩 벌스라든가 보컬 녹음 파일 등은 조합 과정에서 가사의 의미가 통일되지 않겠지만, 최대한 음악에 맞게 배치하여 추상적인 흐름만 맞추어도 충분한 게 라이브 작곡의 특징이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보내준 음원 파일을 일일이 검토한 끝에, 유란은 모두 여섯 종류의 작곡 플랜을 세웠다. 라이브 대결에 돌입하면 상황을 봐서 가장 적합한 작곡 플랜으로 음원을 에디팅 할 것이며, 중간 중간 다른 작곡 플랜을 접목시켜 에이다의 퍼포먼스를 상대로 유연성 있게 대처할 생각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플랜 작업이 끝났고, 유란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시간의 순서를 거스른 채 뒤섞여서 떠올랐다. 꿈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타악기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서 차츰 그 모습이 희미해졌다. 피아노와 어머니는 사라졌지만 피아노 소리는 여전히 남아 귓가에 들렸다. 주변 풍경이 대학교 동아리방으로 바뀌었다. 작곡대회에 유란을 데려갔던 동아리 시절의 친구가 있었다. 작품이라는 건 결국 창작자의 자아 그 자체야. 친구가 말했다. 너의 음악은 너의 어느 자아일까? 친구는 사라졌다. 피아노가 다시 나타났다. 할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저런 음악을 하고 싶었어. 유란이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유란에게 물었다. 너의 음악은 무엇이니?

잠에서 깬 유란은 커피를 내리면서 간밤의 꿈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할머니가 연주하는 것으로 끝난 꿈속의 음악을 떠올리려 했지만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음악에서 느낀 따스한 느낌, 포근한 인상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꿈속의 내용을 복기하다가, 유란의 머릿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라이브 작곡에 쓰기로 계획한 플랜들 중에서, 혹시 꿈속에서 들은 그 음악, 예전에 할머니가 들려준 피아노 연주만큼 감미로운 것이 있었던가?

작업실에 도착한 유란은 여섯 개의 플랜을 다시 검토하였다. 첫 번째 플랜. 어제 계획할 때에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속에서 다시 들은 할머니의 연주와 비교해보니 거칠고 투박해보였다. 두 번째 플랜도 분명히 유려한 음악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세 번째도, 나머지 모든 플랜들도,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운드 파일 하나 하나를 다시 체크해가며 여섯 개의 플랜을 모두 수정해 보았지만, 수정한 결과물도 유란의 마음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에이다와의 세 번째 대결까지 대략 1시간 정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어떻게 사운드 파일을 재배열해도, 에디팅 방식을 바꾼다고 하여도, 에이다를 상대할만한 라이브 작곡 플랜은 마련되지 않을 거라고, 유란은 마침내 깨달았다. 어떠한 구성의 음악이라도 지금의 유란은 만족할 수 없었다. 음악은 창작자의 자아. 지금의 유란은 어떻게든 승리하고 말겠다는 집착 속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리 소리를 바꾸고 바꾸어도 그렇게 바뀐 소리에서는 유란이 품은 승리에의 집념, 그것만이 유란의 자아로서 담겨져 나올 뿐이었다. 에이다는 그러한 강박적 집착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창조할 거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결을 치르기 30분 전, 신유란은 이 대결이 자신의 패배로 끝날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체념과 평안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모호한 기분이 느껴졌다. 회전의자 시트의 두툼한 등받이에 몸을 파묻듯 누이며, 한순간에 긴장감이 풀리면 으레 그러하듯, 유란은 나른하게 퍼지는 몽롱한 느낌에 잠겨 들었다. 무념무상. 생각이라는 작용이 정지된 상태. 흡사 잠들기 직전 머릿속으로 상상과 기억이 한데 뒤섞여 형체가 없는 상념으로 희끄무레한 연기마냥 두둥실 떠다니는, 그런 상태였다.

대결 5분 전, 유란을 바라보는 소형 카메라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유란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중계되기 시작했다. 유란은 한차례 숨을 고른 후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유란은 지금 긴장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이겨야한다는 강박으로 말미암은 그런 긴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패배가 분명한 전투를 앞두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전장에 임하는 병사의 자세에 가까웠다. 유란의 손가락이 쥐락펴락 움직였다.

대결 3분 전, 유란은 준비해둔 장비들과 미리 샘플링 된 사운드 파일을 체크했다. 어쩌면 이 중에 많은 것들이 쓰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이브 작곡에서는 일단 쓸 수 있는 수단을 최대한 마련해야 했다. 에이다가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유란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한 플랜대로 실행에 옮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발상이 즉흥적으로 떠올라 다른 음악을 구사할지.

대결 1분 전, 유란이 귀에 이어피스를 착용했다. 대결이 시작되면 이어피스를 통해 에이다가 연주하는 음악이 들릴 것이었다. 유란은 이어피스를 통해 에이다의 연주를 들으면서 얼마든지 자신의 연주를 변경할 수 있었다.

대결 21초 전, 유란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대결 14초 전, 유란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대결 6초 전, 유란이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다.

대결 3초 전, 유란이 마지막으로 한숨을 뱉었다.

대결 시작.

유란의 손이 버튼 위에서 멈칫거렸다. 유란의 손끝이 이어피스를 가벼이 눌렀다. 이어피스에서 에이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피아노 화음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피아노의 화음 사이로 기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그 소리가, 새벽을 열며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연상시켰다.

이어피스로 들리는 기타 소리. 그리고 피아노의 화음.

기타 소리는 짧게 3개의 음을 잔잔히 반복했다. 피아노의 화음은 기타 소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기타가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면, 피아노는 문이 열리며 비추기 시작하는 햇살이었다.

에이다의 연주가 시작됐건만 정작 유란은 아무 연주도 하질 않자 방송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당연히 의아해했다. 혹시 방송사고가 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유란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유란은 첼로 소리를 재생시켰다. 중후한 현악의 소리 하나만이 흘러나왔다. 그게 다였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악기 소리가 현란한 음악을 이룰 것이라 예상했는데, 정작 유란의 선택은 그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원래 유란은 일단 첫 번째 플랜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 플랜의 도입부는 피아노였다. 그러나 이어피스를 통해 에이다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리고 기타 소리가 피아노의 화음에 감싸인 것을 듣는 순간, 유란이 머릿속에 준비해둔 계획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유란의 손이 첼로 사운드를 재생시켰다. 지금 이어피스에 들리는 기타와 피아노의 조화된 소리, 그것에 가장 어우러지는 소리를. 유란이 연주하는 소리만 들으면 허전하고 비어있는 느낌이었지만, 에이다의 연주와 유란의 연주를 동시에 들으면 두 연주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유란의 음악 그 자체로는 허전하고 텅 빈 소리에 불과했기에 시청자들로서는 유란이 왜 이렇게 엉성한 음악을 들려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란은 에이다의 소리에 철저하게 호응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들려오는 소리에 반응하며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소리. 그것은 ‘무아(無我)’의 소리였다.

잠시 후 유란의 귀에 드럼 소리가 들렸다. 에이다의 연주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드럼 소리는 청량한 분위기를 일으켰다. 유란은 이에 맞춰 오보에 소리를 추가했다. 새로이 추가된 소리들이 서로 맞물려 저 높이 하늘 어딘가로 비상하는 기분을 일으켰다. 밝게 빛나는 에이다의 목소리 사이로 유란이 그 빈 공간에 자신의 소리를 채워 넣었다. 그렇게 서로의 소리가 서로의 소리를 채워 넣고, 비추고, 어루만져 주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하나 된 그 모든 소리가 찬란하게 빛났다.

동시에, 실시간 투표가 종료되었다.

유란이 귀에 꽂힌 이어피스를 뽑아냈다.

투표 결과가 화면으로 공개되려는 순간.

유란은 마침내 미소 지었다.

결과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비로소 소리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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