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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낙타만이 알고 있다

2020.10.26 14:0510.26

낙타만이 알고 있다

 

옥탑방 앞 평상에 놓인 재떨이를 마지막으로 비워주던 날, 영숙은 유진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유진이 써온 재떨이는 이 빠진 낡은 사기대접이었다. 재떨이에 수북한 꽁초들은 그가 항상 피우던 카멜 필터였다. 밝은 황토색 필터가 습기와 담뱃진에 찌들어 얼룩덜룩해진 채였다.

마치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일부러 눌러담고 있는 것처럼, 유진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여간해서는 재떨이를 비우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차마 그 추레한 축적을 보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영숙이었다. 그 결과, 옥상의 재떨이를 비우는 일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영숙의 일이 된지 오래였다. 그 기간은 유진의 짧았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한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유진은 고등학교에서 담배를 시작했다. 그의 첫 담배는 도라지였다. 그 다음은 장미였다. 하나같이 그의 또래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들이 피우던 담배였고, 또 하나같이 어느새 단종되고 만 담배였다. 유진이 20대에 진입했을 즈음, 그의 또래였던 어린 남자들 사이에서는 말보로 레드가 유행했다. 한 번은 유진이 기껏 다른 담배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말보로 레드를 사고 나서, 딱 한 개비를 피우고 통째로 남에게 줘버린 일이 있었다. 말보로 레드가 독하다는, 그래서 남자답다는 세간의 인식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숫자로 표기된 니코틴과 타르의 양과 별개로, 그가 느끼기에 말보로 레드는 지나치게 깔끔한 담배였다. 담배는 연기를 마시는 것인 이상 매캐해야 했다. 그가 좋아하는 담배들에는 언제나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있었다.

그러니 장미가 단종된 이후 한동안 그 어떤 담배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가 카멜 필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경계가 흐릿한 노란 사막 위로 한 마리 낙타가 걸어가는 그림이 그려진 담배였다. 카멜 필터를 피우는 동안 유진은 더 이상 청년이라 부르기 어려운 나이로 접어들었다.

그가 담배 맛이 변했어, 라는 쪽지만을 남긴 채 별다른 말 없이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서던 날까지 열흘 정도, 유진은 궐련들을 한두 모금만 피우고 꺼버렸다. 고로 재떨이에는 담긴 꽁초들은 기실 불에 닿지 못한 부분이 불에 닿아 사라진 부분보다 길었다. 유진이 담배 한 대에서 태우는 구간의 길이는 그가 열 손가락에 달고 있었던 조개손톱의 길이만큼 짧았다. 영숙은 재떨이를 비우고 부시며, 유독 남들보다 작고 여렸던, 생인손을 자주 앓던 유진의 손톱을 생각했다.

 

타슈켄트 공항을 나서자 택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인천으로부터 8시간을 비행해 도착한 알마티에서 공항을 나서지도 않고, 푹신한 의자라곤 없는 환승 대기실에서 또 8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오른 영숙은 노곤했다.

알마티 공항의 직원들은 필요한 만큼만의 영어를 구사했다. 나가지 않습니까? 8시간 기다려야 합니다. 러시아어와 카자흐어의 문자마저 낯선 영숙은 그대로 공항에 남아있기를 선택했다. 통유리창 바깥으로 아침의 새파란 하늘과 초원이 맞닿아 있었다. 풍경과 대조적으로 어둑어둑한 환승 대기실에 남은 이는, 영숙을 제하면 갈색 양복을 입은 남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인종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영숙은 알마티행 비행기에서 어떻게든 잠들어 보려고 와인을 홀짝였다. 결과적으로, 머리만 아팠다. 머리를 싸맨 채 두어 시간 졸다가, 더 이상 공항 직원들조차 보이지 않는 옹색한 환승 대기 공간에서 좌우로 계속 거닐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루하면서도 불안했고, 어깨와 목과 허리가 결렸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공항 문을 나선 뒤 몇 걸음만 걸어나가 바람은 쐴 수 있었을 터였다. 영숙은 후회했다. 이제는 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같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한 나머지, 흡연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기도 했다.

갈색 양복의 남자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지루함에 지쳐, 줄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둘은 시선을 교차했다가 다시 서로의 눈빛을 피했고, 어색하게 침묵 속에 머물렀다. 영숙이 나가지 않아, 마침내 남자가 말을 걸었다. 시가례뜨? 남자의 담뱃갑에도 낙타가 그려져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한복판에 다다라서야 영숙이 난생 처음 담배를 입에 대본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어느새 남자는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영숙은 물을 넘기지 못해 겨우 입안만을 축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담배를 빨았다. 그녀의 궐련이 타는 시간이 길었다. 남자는 말없이 그녀에게 담배 한 대를 더 쥐어주고 나갔다.

한때 영숙은 한 동료와 화실을 공유했다. 담배는 대체로 지금보다 독했고, 또 사람들이 지금보다 담배에 관대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동료는 그림 그리는 남자의 전형으로부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골초였다. 그가 태우는 88 라이트는 화실에 있는 동안만 해도 하루 한 갑이 넘었다. 그는 서너 시간에 한 번쯤은 영숙에게 맛이라도 보겠냐며 담배를 권했다. 구태여 맛을 보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흡연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던 영숙은 매번 같은 말로 거절했다. 대학 입학 이래 그를 만나고 그의 곁에 있었던 시간만으로도 어차피 자신은 골초나 매한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가 언제나 아낌없이 사용하던 창백한 유백색의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그의 군청색 앞치마가, 그의 담뱃갑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흰색과 하늘색의 88 라이트 때문에, 그렇게 영숙은 남편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유진의 몸에서 진득하게 묻어나는 담배 냄새는 영숙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남자의 냄새보다 지독했다. 종일토록 담배를 피우던, 그녀의 동기이자 동료이자 불륜 상대였던 그 골초도 유진만큼 심하게 냄새가 나진 않았기에, 영숙은 유진을 자주 타박했다. 유진이 하루에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우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유진은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그리 많이 피우지는 않는다고 해명하다가, 도대체 영숙이 무슨 상관이냐며 대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영숙이 뭐라 말하든 얼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하곤 했다. 그럴 때면 영숙은 자신이 아는 어떤 골초는 종국에 목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고 뾰족하게 내뱉게 되곤 하였으나, 그가 바로 88 라이트가 잘 어울렸던 그 남자라는 것은 차마 유진에게 말할 수 없었다. 다만 유진은 사실 목에 구멍 뚫린 사람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영숙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가로지르는 항로에서, 처음으로 비행기 창 너머 광활한 땅을 볼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본 대지는 곳곳이 순하게 주름져 있었고, 비행기가 타슈켄트에 내려앉을 때까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담배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의 말마따나 유진은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는 사람이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리문을 나서자마자 있는 타슈켄트 공항의 주차장은 작았고, 택시 기사들은 영어 숫자들과 달러라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었다. 이곳에 동북아 출신의 여성은, 더군다나 그녀 또래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이방인임이 명백했다. 그들이 부르는 가격은 바가지임이 분명했지만 영숙은 흥정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영숙은 그저 가장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 택시 기사에게, 호스텔의 주소를 쓴 쪽지를 건넸다. 유진이 인쇄한 후 챙겨가지 않은 예약 내역에 나와 있던 주소였다. 기사가 그녀의 손에서 트렁크를 뺏어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새해를 맞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유진은 담배맛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가 피우는 카멜 필터는 요즘 새로 디자인된 갑에 담겨 팔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담배인 까닭에 아직 예전 디자인의 카멜 필터를 보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곳곳에서는 백색과 적색의, 다소 무미건조한 행색의 카멜 필터가 종래의 사막 그림이 그려진 카멜 필터를 몰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새 디자인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담배맛도 다르게 느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는 편의점 세 곳을 돌았는데도 카멜 필터를 파는 곳이 없었다. 카멜 필터를 구할 수 없다면 한라산을 사서 피우는 유진이었다. 하지만 한라산도 은근 취급하지 않는 곳들이 많을뿐더러, 추운 날에 다시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싫었다. 그는 자신의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카멜 필터 한 갑을 떠올렸다. 국내에서 사라지기 전 기념으로 남겨둔, 비닐도 뜯지 않은 원래 디자인대로의 카멜 필터였다. 담배는 피우더라도 갑만 남겨두면 될 일이었다. 그는 바람 부는 옥상에서, 그 카멜 필터를 뜯고 한 대 물었다.

그가 원래 기억하는 대로의 맛이었다.

 

영숙은 루스탐과 같이 뒷좌석에 앉았다. 그가 주차장에서 영숙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또 카멜 필터 한 대를 물고 있었다. 알고 보니 루스탐은 영어가 아주 능숙했고, 어학 실력에 비례해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행색이 의심스럽지 않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현지인과 함께 택시를 타고 비용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초행자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영숙은 그의 끝없는 말에 피곤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자기 얘기를 떠들어준 덕분에 낯선 도시, 낯선 동행인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루스탐은 자신이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일했던 기술자라고 했다. 소련의 해체 이후 루스탐과 비슷한 처지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인물들은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역으로 그는 러시아계 석유 회사에 잘 안착해 쿠바에서 일했고, 2000년 이후로는 아내가 죽었을 때를 빼면 우즈베키스탄에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고 오직 러시아와 쿠바를 오가며 살았다. 그가 이제는 마침내 은퇴해서 집에 가는 길이고, 그동안 현장에서 귀동냥한 것만으로도 스페인어와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아들은 그가 보낸 돈을 차곡차곡 모아 무려 티무르의 무덤 코앞에 있는 저택을 사들이고 최근 호텔로 개조했다는 자랑으로 루스탐의 장황한 이야기가 치달았을 때, 택시 기사가 루스탐의 말을 뭐라고 자르며 끼어들었고 차는 타슈켄트 시내로 접어들었다.

영숙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말들이 오갔다. 영숙과 루스탐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다가 또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루스탐 앞에 흔들어대기를 반복하던 택시 기사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가 몇 마디 더 하자 루스탐은 벌컥 화를 냈다. 그는 지폐 몇 장을 급히 내던지다시피 하고 영숙의 손목을 잡아끌고 내렸다. 루스탐이 차체를 쾅 때리며 한 번 더 고함을 치자 기사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고, 루스탐이 마지못해 돈을 조금 더 준 끝에 트렁크가 열려 둘은 짐을 꺼낼 수 있었다. 택시 기사가 처음 부른 금액에서 삯을 더 올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택시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영숙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어떤 대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모르는 밤거리에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남겨진 그녀가 바보 같게도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우즈베크어도 할 줄 알잖아요. 아는 언어가 많네요. 루스탐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우즈베크어는 못해요. ? 지금 저 사람이랑은 무슨 언어로 얘기한 건데요? 러시아어죠. 난 타지크인이거든요.

루스탐은 영숙을 호스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가 주소를 검색하기 위해 꺼낸 핸드폰에 뜬 시각은 오전 1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호스텔에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숙박 예약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한 뒤,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내신 돈 절반 드릴게요. 타지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랍 속에 남겨두었던 카멜 필터는 이틀도 되지 않아 모두 동났다. 연후 며칠간 유진은 변해버린 카멜 필터에 잔뜩 실망해 한라산과 디스 플러스와 아메리칸 스피릿과 세븐 스타를 피웠지만, 결국 그가 알던 카멜 필터가 아닌, 새로운 카멜 필터를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걸어나왔던 날, 집 앞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이 더 이상 장미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무심하게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또 한 가지가 자신의 인생을 영영 떠났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영숙이 군청색 앞치마의 남자와 함께 이룬으로 떠났을 때도 그랬다. 유진이 이룬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어본 것은 영숙이 그에게 자신의 출국을 통보했을 때였다. 그녀가 공항으로 출발하던 순간까지만 하더라도 유진은 자신이 영숙으로부터 굉장히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유진이 그것을 알았을 때쯤, 영숙은 이룬의 예술가 레지던시로부터 짐을 뺐다. 피레네 산맥과 대서양이 만나는 작은 마을에서 남자와 함께 지낼 거처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영숙이 치스토라와 로모에 맛을 들이고,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약간의 바스크어 인사말을 익힐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남자와 결별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는 사람들 사이 정도에서나 그럭저럭 알아주는 편이었던 영숙의 이름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져 있었다. 물론 그것이 오직 영숙의 작업 그 자체로부터 연원한 성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비일비재하다면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또 좁디좁은 미술 바닥에서의 일이기도 했지만, 유부녀였던 영숙이 감행한 사랑의 도피는 그녀가 지닌 예술가로서의 유명세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했던 것이다. 스캔들성의 화제를 통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이름값 있는 예술가로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동안 유진은 뒤에 남겨져 있었다.

희고 붉은 카멜 필터 갑을 노려다보던 유진의 마음속에 다시 싹트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과거 유진이 떠나며 그의 깊은 내면에 심어두었으며 연후 그의 생이 그린 궤적이 북돋았으나 한동안 동면하고 있었던, 묘연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비록 스스로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유진의 흉중 깊은 곳에는 분리 불가능한 두 가지 믿음이 얽혀 있었는데, 그 중 첫째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의미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그것이 어떠한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유진은 새로운 카멜 필터의 측면에 인쇄된 문구를 발견했다. MADE IN PHILIPPINES.

돌이켜 보니 그가 여태껏 사랑해온,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가 인쇄된 담배를 만드는 나라가 필리핀일 리 없었다.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그의 기억에 확실히 필리핀은 아니었다. 국내에 유통되는 카멜 필터의 디자인이 바뀐 동시에 제조국도 변경되었고, 그래서 맛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애써 원래 자신이 피우던 담배의 원산지를 정확히 기억해내려 했다. 그리고 한참을 끙끙대던 끝에, 그는 사막과 낙타에 어울리는 한 나라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숙은 아프로시요프 열차에서 루스탐의 옆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전날 밤 영숙은 루스탐이 객실을 예약한 호텔에서 빈 방을 잡을 수 있었다. 숙소조차 예약하지 않고 온 자신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그녀가 나이를 더 먹었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무작정 타슈켄트까지 날아온 일부터 무모하다면 무모했다. 고로 영숙은 더 대담하게,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루스탐에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를 대접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다음날 일찍 눈을 뜬 루스탐은 미리 끊어둔 아침 기차표를 취소하고 저녁표를 산 뒤, 영숙의 방문을 두드렸다. 가까운 곳이니 일단 그 호스텔에 같이 가본 후, 같이 늦은 아침식사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영숙은 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의 호스텔에 루스탐과 함께 간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직원 없이 사장만이 호스텔을 지키는 시간이었는데,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묵을 곳을 찾는 것 같지는 않은, 타지크인 남자와 동아시아인 여자가 이룬 이상한 조합의 한 쌍이 이것저것 캐묻자 사장의 표정이 미묘해졌지만, 영숙은 겨우 루스탐의 도움을 받아 약 5개월 전의 숙박 명부에서 유진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루스탐이 전해준, 아예 영어를 못하는 사장의 말은 이랬다. 그 한국인, 기억하지. 하루 묵자마자 직원을 한참 붙잡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길래,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 우즈베키스탄에 큰 담배 공장이 어딨냐고 물어봤다더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어. 사마르칸트에 담배 공장이 있다고 알려줬어. 그러자 체크아웃하고 기차역으로 가는 것 같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탐은 노상 테이블에 앉아 영숙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마르칸트에 갈 건가요? 입을 연 탓에, 그가 볼 한 쪽으로만 우물거리고 있는 쁠롭의 밥알 몇 개가 보였다. 역시나 쁠롭을 씹고 있었던 영숙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괜찮으시다면, 기차표와 숙소 예약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호텔이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영숙은 휴지로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잠시 둘 사이에 말은 없었다. 루스탐은 그녀의 목덜미를 훑어봤다. 영숙은 그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저녁에 영숙을 기차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가 아프로시요프 열차에 오를 때 루스탐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를 올려주었다. 영숙은 일부러 별다른 내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영숙이 남자들의 이런 행동이 낯설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오랜만일 뿐이었다.

그리고 루스탐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금도 그녀는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핸드백에서 작은 도자기 인형을 하나 꺼내 그에게 말을 붙였다. 외국인 여행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지 않을 듯한 싸구려 인형은, 중앙아시아 특유의 납작한 사각형 모자를 쓴 노인이 주전자를 껴안고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러보는 곳마다 이 기념품을 파는 거 있죠. 이 남자가 누구죠? 루스탐은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군데요?라고 말할 뻔하다가,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 모쉬페끼! 그가 발음하는 마지막 자음이 목젖으로부터 떨려나왔다.

아주 웃긴 사람이에요. 부하라에 살던 이슬람 선생인데, 나스르--딘이라고도 하죠. 혹은 러시아어나 영어로는 나스레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아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어느 날, 모쉬페끼가 낙타를 타게 되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평생 낙타를 타본 적이 없었단 겁니다

 

기차로 이동한 유진은 사마르칸트역에 내렸다. 이곳에 그가 찾고 있는 카멜 필터의 공장이 있을 것이었다. 해외 자본이 설립한, 우즈베키스탄에서 제일 큰 담배 공장이라고 들었다.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카멜 필터의 맛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환승 대기 시간을 포함해 꼬박 이틀을 이동에 쏟을 필요는 없었다. 하다못해 해외 담배 구매 대행 업체를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카멜 필터를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유진 자신조차 자기가 어째서 이 유라시아의 한복판에까지 와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상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입이 기억하는 대로의 카멜 필터로 가득 채워넣기 위해 가져온 트렁크를 끌고 역 앞 광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맛과 디자인이 바뀌기 전, 사막을 걷는 낙타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원래의 카멜 필터가 그를 자신의 근원으로 불러들였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택시 기사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어쨌든 어디로든 가야 했다. 한 택시 기사가 그에게 소리쳤다. 호스텔? 레기스톤? 유진은 갈 곳을 몰랐지만, 최소한 이 택시 기사가 자신을 어디로든 데려갈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손톱 옆이 쿡쿡 쑤셨다. 손가락 끝이 부어올라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한 발짝 내딜 때마다 매번 발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듯했다.

 

천 년도 더 전,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거칠디 거친 사막 너머로, 갑자기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가 나타납니다. 수없이 많은 낙타에 보물들을 싣고 온 대상들은 마침내 휴식을 취하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중국에서까지 상인들이 찾아왔다니까요. 어쨌든 부하라가 그런 곳이었으니, 낙타는 언제나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가축이었죠. 그런데 지혜로운 선생님께서 한갓 낙타 타기가 무섭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는 낙타에 겨우 타서는, 자신이 얼마나 낙타를 잘 모는지에 대해서 허풍을 떨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낙타가 제멋대로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사람들은 모쉬페끼에게 물었어요. 선생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세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내가 아니라 낙타가 알지!

사마르칸트 역에 내렸을 때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어서, 벽면 최상단의 원형 스테인드글라스는 대리석 바닥에 빛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비록 영숙으로서는 이곳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여인이 푸른 물결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이룬의 성모성당을 떠올리게 했다. 17세기에 완공된 성당은 폭이 좁았고 언제나 어두침침했다. 제단 뒷면 배경의 금박조차 빛이 바래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었기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 흘러들어오는 빛의 물결이 두드러졌다.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룬 체류 시절 때때로 남들 몰래 제단에 올라 빛의 공간 속에 들어가 있곤 했다.

아지즈! 기차역을 걸어나와 루스탐이 외쳤다.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고 있었던 아지즈라 불린 청년은 경적을 두 번 울리더니 뛰쳐나와 아버지와 격한 포옹을 했다. 직후 그는 루스탐을 따라오던 영숙을 발견하고, 루스탐에게 이 사람은 누구냐는 눈빛을 보냈다. 루스탐은 타지크어로 짧은 설명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숙은 두 사람과 함께 아지즈가 운영하고 있는 호텔의 중정에 앉아 가벼운 저녁을 들게 되었다. 이름은 호텔이었지만, 아주 큰 건물은 아니었다. 2층으로 세워진 건물이 빙 둘러 사각형으로 가둬놓고 있는 정원에는 카펫 깔린 평상이 네 개 흩어져 있었고, 포도 덩굴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남한에서부터 아무 것도 모르고 오직 누군가를 찾기 위해 무작정 오셨다는 거군요. 지금 여기 계시다니, 운이 좋으세요! 아지즈는 오른손으로 집어든 삼사에 식초를 뿌리며 영숙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했다. 영숙도 이해할 수 있도록, 루스탐은 영어로 말을 이었다. 너 그 담배 공장 알지? 내일 아침 식사 후에 거기 좀 다녀와야 해. 내일 내가 차 몰고 나가도 문제없지? 아지즈는 순간 멀뚱히 루스탐을 바라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영숙은 고맙지만 스스로 찾아갈 테니 괜찮다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부자 사이에 빠른 타지크어로 몇 마디가 오가자, 아지즈는 실실 웃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지즈는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 이름은 누군데요? 유진. 유진이요.

밤이 내려앉았다. 영숙은 처음 와보는 나라에서, 처음 보는 남자로부터 겁도 없이 무턱대고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루스탐은 쿠바에서 일하다 은퇴해 돌아왔다고 했으니, 못해도 60대일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루스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그들은 호텔에서 걸어나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광장 건너편 레기스탄을 보며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막대한 크기의 아치형 문들과 기둥, 그리고 밝은 청록색의 돔으로 구성된 레기스탄의 발치를 거니는 사람들은 손톱의 조반월 정도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톱에 떠오른 초승달과 하늘의 달을 보며, 영숙은 도대체 어디에서 자신이 조반월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을지에 관하여 엉뚱한 상념에 빠졌다.

달이 아름답군요. 그녀의 시선을 좇던 루스탐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유진이라는 남자와 영숙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를 물으려다가 급하게 얼버무렸다. 내년 여름에 21세기의 가장 긴 월식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볼 수 있어요. 레기스탄은 월식을 보기에 좋은 곳이죠. 그 유진을 찾으신 후에, 또 오세요. 영숙은 눈읏음만 지었다. 두 번째로, 이 남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받아요. 내게 남은 마지막 카멜 필터예요. 역시나 그가 귀엽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또 그로부터 담배를 받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유진이 찾아 떠났던 맛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전날 저녁 택시 기사가 구르--아미르가 가까운 골목의 호스텔로 데려갔던 유진은 트렁크를 들고 나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레기스탄이 보였다. 사실 담배 공장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을 것이라면 이미 지나온 길에서 진작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생각보다 담배를 파는 곳을 찾기가 녹록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언덕길을 올라 겨우 찾아낸 구멍가게 한 곳에서는 담배를 팔았지만, 카멜 필터는 보이지 않았다. 또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구멍가게에서 구비하고 있는 담배들의 종류였다. 그가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실상 전무하다 해도 무방했지만, 어쨌든 아직 피워보지 않은 담배를 맛보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딱히 이국적이라 할 법한 담배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발에 채일 듯한 다비도프, 말보로, 켄트, 폴몰 중 고민하던 그는 결국 그나마 자신이 피워본 적 없는 폴몰을 한 갑 달라고 했다. 폴몰은 충분히 독하지 않았고, 그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꽁초를 짓밟았다.

물론 일반인이 담배 공장에 직접 찾아가서 담배를 사려 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곳 사마르칸트의 공장을 직접 찾아간들, 카멜 필터를 자신에게 팔아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카멜 필터는 유진을 이미 우즈베키스탄까지 이끌어 왔다.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리고 카멜이 국제적인 브랜드인 이상, 공장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이다. 고로 일단 공장에 쳐들어간 뒤 누구든 붙잡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카멜 필터를 원 없이 사들일 방법이 무엇인지, 원제품의 재고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물어볼 수는 있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승용차 한 대가 그의 앞에 섰다. 택시? 에어포트? 트레인? 유진의 주머니에는 호스텔 직원에게 인터넷 검색을 부탁해 담배 공장의 주소를 적어둔 쪽지가 들어 있었다. 차를 세운 남자는 예상외의 목적지를 보고 눈이 커졌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유진은 돈을 먼저 내라는 뜻인 줄 알고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내졌더니, 두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붙이는 시늉을 했다. 일단 담배나 한 대 줘보라는 뜻이었다. 유진은 속으로, 차에서 내리는 대로 아예 한 갑을 통째로 그에게 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카멜 필터였다.

 

루스탐은 구태여 영숙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한 뒤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려 정문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들을 경비가 주시하고 있었다. 루스탐은 오른손을 가슴팍에 붙이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살람 알레이쿰. 경비도 일단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알레이쿰 살람. 루스탐이 경비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에게 대답하는 경비의 어조는 마치 재담을 풀어놓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영숙은 지켜볼 뿐이었다. 둘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루스탐은 영숙에게 영어로 말했다. 그는 여기 있었어요. 영숙은 다급해졌다. 그래서요? 지금은요? 경비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영숙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루스탐이 손을 잡고 그녀를 끌었다.

다시 차에 탄 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던 루스탐이 꺼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그를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외모만 보고,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하지만요. 어쨌든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불러 왔고요. 유진이 돌아간 뒤, 그 직원이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줬답니다.

 

유진이 대면하게 된 인물은 칼처럼 날카롭게 다림질된 양복을 빼입은, 코카소이드의 느낌이 강하게 내비치는 외모의 남자였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그가 영어로 건네는 인사의 발음으로부터 유창함이 느껴졌기에 유진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말했다. 한국으로 수입되는 카멜 필터의 제조국이 우즈베키스탄에서 필리핀으로 바뀐 이후, 카멜 필터의 맛이 변했어요. 원래 카멜 필터를 구하고 싶어서 한국에서부터 왔습니다.

순간 남자의 얼굴이 온통 의아한 기색으로 뒤덮였다. 그는 관자놀이를 몇 번 주무르고 나서 유진에게 담배를 한 대 주었다. 유진은 별 생각 없이 궐련을 받아물었고, 남자는 그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길쭉한 다비도프였다. 유진이 담배 연기를 내뱉은 것과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뱉은 것은 동시였다. 남자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이곳은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 우즈베키스탄의 공장입니다. 제가 알기로 카멜 필터는 R. J. 레이놀즈에서 제조하죠. 유감입니다만, 우즈베키스탄을 우크라이나와 혼동한 게 아닙니까?

 

더 이상 유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영숙은 우즈베키스탄에 그대로 머무르는 중이었다. 유진의 이름으로 예약된 기차 좌석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일을 빼고, 대사관과 현지 경찰은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사마르칸트발 부하라행 열차였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유진은 서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서는 타슈켄트를 지나야 한다. 영숙은 최소한 유진이 우크라이나로 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했다.

영숙이 루스탐과 함께 부하라를 헤집고 다닐 때의 일이었다. 유진이 체류했을 시점으로 추정되는 때 즈음 어느 동북아인 남성이, 바퀴가 부수어진 커다란 트렁크에 질빵을 대고 등에 진 채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시 외곽을 향해 걸어나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한 식료품점 주인의 말이 있었다. 식료품점 주인이 가리킨 곳으로, 거대한 중앙아시아의 태양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유진의 행방에 대한 증언은 그것으로 끊겼다.

자포자기한 채로 호텔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영숙을 보다못한 루스탐이 그녀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영숙은 낙타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곳 부하라와 더 서쪽의 히바 사이에는 300 킬로미터에 걸쳐 키질쿰 사막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으면 해요. 내가 젊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낙타를 타고 이동해 야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키질쿰 사막의 밤은, 정말이지 아름다웠어요.

과연, 모닥불 위로 바라본 키질쿰 사막의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 무리 중 깨어 있는 것은 영숙과 루스탐뿐이었다. 영숙은 천년도 더 전, 이 길을 따라 이동했을 대상들의 행렬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커다란 형체가 있었다. 낙타였다. 카멜 필터에 그려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낙타와는 다른, 중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쌍봉낙타 한 마리가 영숙과 루스탐을 향해 다가왔다. 주인도 없어 보이는 낙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릎을 접어 모닥불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입에 물고 있던 켄트를 뱉어버릴 정도로 놀란 루스탐이 사막 트레킹 가이드를 깨우기 위해 대뜸 달려나가려 했지만, 영숙은 낙타가 놀라 날뛰지 않도록 소리 없이 루스탐을 제지했다. 루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영숙은 보았다. 지금 그녀 곁에 앉은 낙타는 이곳까지 관광객들이 타고온 다른 낙타들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발톱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발톱의 세로 길이가 짧았다. 그리고 낙타의 발은 발톱 양 옆을 기점으로 상처나 염증이 있는지 기이하게 부풀어올라 있었고, 발톱은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빠져버릴 듯했다.

루스탐. 영숙이 말했다. 루스탐, 나스레딘의 낙타는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나요? 루스탐은 전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영숙은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유라시아는, 특히 이곳에서는, 아주 넓어요. 정말로, 그래도 낙타는 길을 아나요? 어느덧 낙타는 일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달이 지는 방향이니, 서쪽이었다.

영숙은 예전에 루스탐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하나 더 떠올렸다. 살람 알레이쿰이라는 루스탐의 인사말을 들은 뒤, 그에게 무슬림이냐고 물었던 날에 들었던 이야기였다. 신에게는 이름이 100개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 중 99개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이름은, 낙타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타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표정이 거만하다고 하죠. 멀어져가는 낙타를 보며, 영숙은 루스탐에게 고백했다. 유진은 내 아들이에요. 아니, 이제는, 내 아들이었어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루스탐이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그녀의 백발이 별빛 아래 들썩였다. 사막을 지나는 실크로드의 대상과 그들의 낙타가 외롭지는 않았으리라는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영숙이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들을 눈물로 적시며 울기 시작하자, 루스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두 어깨를 끌어안았다. 루스탐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테였다. 그의 품에 안겨, 영숙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낙타가 신의 마지막 이름을 알려줄 때까지, 하다못해 최소한 21세기의 가장 긴 월식이 올 때까지는, 이 남자와 실크로드의 도시에서 같이 지내볼까. 물론, 이 남자가 담배를 끊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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