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서늘한 가을 초저녁, 그러니까 뉘엿뉘엿 저물던 해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연보라색 어둠이 텅 빈 하늘에 야트막히 내려앉을 무렵, 메마른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누런 잎사귀 하나가 잔바람에 톡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가, 쌓여있는 낙엽들 위로 힘없이 추락하는 그런 초저녁, 여기 어느 자매가 낯선 언덕길을 지나다가 도적들과 맞닥뜨려 곤경에 처하였다.

도적들이 흉기를 겨누고 위협하며 가진 전부를 내놓으라 윽박질렀다. 허나 자매의 수중에는 얼마 없는 푼돈과 몇 줌의 미숫가루가 전부인 마당이라, 이마저도 없어지면 꼼짝없이 굶어야했다. 자매가 응하지 않자 부아가 치미는지 도적들은 거친 언사로 험악하게 굴었으며, 그러는 한편 위아래로 은근슬쩍 자매를 연신 훑어보며 음흉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매 중 언니인 계연은, 비록 몸은 가냘프되 머리가 영민하였다. 입을 다물고 표정을 담담히 하며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이모저모 방안을 궁구하니, 비록 젊음과 어림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있는 나이였으되 그 차분함이 진중하여 일견 근엄한 느낌을 자아냈다.

자매 중 동생인 진미는, 비록 동생이되 언니보다 크고 튼튼한 몸에 혈기가 왕성하였다. 도적들의 협박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했으니, 이를 두고 물론 부질없는 객기라 폄하할 수도 있겠으되 적의에 찬 눈빛이며 자아내는 공기며 범상치가 않았으니 실로 대단한 기백이었다.

이때 홀연 감미로운 목소리가 “멈추어라!”하고 호통을 쳤다. 자매와 도적들이 고개 돌려 살피니, 한 청년이 천천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청년(이라고 해야겠지만 어딘지 소년 같은 느낌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런 청년, 그러니까 말인즉 그런 식으로 아름답게 잘 생긴 어느 청년)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접힌 부채를 한 손으로 쥐고는 그 끝으로 도적들을 겨누며 엄히 꾸짖었다. 그 자태가 희한하게도 우아하고 단정하였다. 꾸짖음을 다 하고서는 자매에게 눈길을 옮겨, ‘이제 안심하시어도 좋다’라는 의미로 가벼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이 웃는 그 모양새가 밤하늘 구름 사이로 다소곳이 떠올라 은은하게 빛나는 초승달마냥 가늘고 고왔다.

도적들로서는 우스운 정도를 넘어 어이가 없었으니, 체구도 작거니와 얼굴도 반반하니 뉘 집 도련님 소리나 들으면 적당할 놈이 별안간 나타나서는 나이 먹은 영감들이 젊은이를 상대로 야단치는 그런 말투로 자신들을 다그치기에 그리 느끼는 게였다. 게다가 변변한 무기도 없는 주제에 고작 부채 하나를 꼬나 잡고 엣헴거리는 꼬락서니란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라.

이에 도적 무리 중 한 놈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가소롭다는 듯 일견은 매우 건방지다는 듯 짧게 코웃음 뱉고서 청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자매가 ‘이렇게 사람 하나 죽게 생겼구나’ 하는 마음에 저희들도 모르는 사이 눈을 찔끔 감으려는 찰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청년이 물 흐르듯 칼을 피하고는 순식간에 손발을 놀려 도적놈을 때려눕히는 게 아닌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머지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아무도 청년을 해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청년에게 반격을 당했으니, 우수수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이 말 그대로 가을날의 낙엽이어라.

이제 보니 청년의 부채는 보통의 부채가 아니요 쇠붙이를 붙여 만든 쇠부채(鐵扇)였으니, 청년은 쇠부채를 펼쳐 방패처럼 쓰다가 다시 쇠부채를 접어 몽둥이를 쓰듯 휘두르기도 하면서 도적 무리를 상대하였다. 혼쭐이 난 도적들은 뒤늦게 부랴부랴 줄행랑을 쳤다.

청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뒷짐을 지고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도적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도적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허리춤에 쇠부채를 도로 차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단정히 하였다. 그리고 자매에게 다가가 안부를 살폈다.

“늦은 시각에 두 여인께서 이런 곳에 계시니, 짐작컨대 필경 곡절이 있어 방랑하는 처지이신 듯합니다. 이 비루한 자가 알량하게도 누추한 집 한 채를 가지고 있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청하건대 잠시 머물러 쉬어 가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 하실는지요?”

이에 자매가 응하여 청년을 따랐다.

청년의 집에 당도하기까지 자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사연인즉 이러했다. 일찍이 자매는 부모와 사별하여 의탁할 곳 하나 없이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어느 대감 집에 가노(家奴)로 팔려갔다. 다행히 주인 대감도 그렇고 마님도 그렇고 주인 되시는 부부의 성품이 모두 온화하였다. 게다가 부부는 늦은 나이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차, 상황이 이러하니 계연과 진미 자매는 부부에게 있어 뒤늦게 맞이한 어린 딸들 같았더라.

허나 시절이 하수상하여 혼란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어느 날은 주인 대감이 정쟁에 밀려 반대편 파벌의 귀족 가문에게 가산을 모조리 빼앗기게 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수덕이라는 이름의 젊은 귀족인데, 급작스레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새로이 가문의 주인이 된 상태였다. 자매가 새 주인으로 모셔야 할 인물이 바로 수덕이었다.

수덕은 비록 용모가 수려하고 무공이 걸출했으나 그 성품이 잔악하고 도량이 협소했으니, 사소한 이유로 집안의 종복들이 허구한 날 매질을 당함은 물론이거니와 때때로 그 정도가 심하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죄책감은커녕 한 터럭의 가엾음조차 느끼지를 아니했으며, 장사를 지내주기는 고사하고 시신을 묻어주는 것도 귀찮아하며 거적에다 실어 날라 인적이 드문 야산에 대충 내다버리곤 하였다.

소작농을 상대로는 흉년에도 자비 없이 수탈을 일삼았으며, 고리대금으로 재산을 불리면서 힘없는 민초들을 착취하였다. 남의 재산을 빼앗기에는 흉년이 제일이라, 풍년드는 해보다도 흉년드는 해가 되면 이를 은근히 반색해 하는 게 낯빛으로 올라와 티가 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제법 고운 아낙이 눈에 들거든 남편 되는 자가 자기보다 약자인지 강자인지를 우선 가늠하고서, 약자이면 지체 없이 무력을 동원해 강탈하고 강자이면 조심스레 예의를 갖춰 거리를 두며 대하다가 자기보다 약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후안무치하게 태도를 바꿔 온갖 술수로 모략해 철저히 몰락시킨 다음 빼앗아갔다.

일각에선 그의 아비가 급사한 것이 사실은 아들 수덕에게 독살 당한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암암리에 나돌았다. 허나 세간에서 이를 대놓고 떠들지 못했으니, 그러한 소문이 조금이라도 나돈다 싶으면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를 여지없이 수덕이 찾아내었고, 찾아내는 족족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출세를 위해 뇌물을 바치는 것에 서슴지 않았고, 자객을 보내어 암살함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총명한 머리로 유언비어를 지어내어 정적을 몰락시키곤 하였으니, 제 아비도 죽였을 거라는 암중의 소문이 딱히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렸음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다.

이런 전차로 계연과 진미 자매는 고민 끝에 도망을 나왔다. 본래 계획하기론 예전 주인인 대감 부부가 있는 곳으로 가려했으나, 도중에 부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유랑하는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러다가 낯선 길에 이르러 도적들을 만나 크게 화를 입을 뻔했다가 청년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자매로서는 이후에 마땅히 몸을 옮길 곳도 없거니와 청년 또한 굳이 자매를 쫓아낼 마음이 없는 지라, 그렇게 청년의 집에 자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버렸다.

 

청년의 이름은 화우였다. 어느 시골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산,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홀로 사는 몸이었다. 알고 보니 주름 하나 찾을 수 없는 얼굴과는 달리, 놀랍게도 화우는 그 나이가 이미 반백을 넘긴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새삼 다시 살펴보니, 자매는 화우의 그윽한 눈길 속에 젊은이한테는 찾을 수 없는 깊이가 있음을 알아보았다. 감미로운 목소리에는 죽음을 앞두고 꺼져가는 생명 특유의 메마른 느낌이 은근히 묻어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제 나이를 모른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젊은이 취급 받는 게 더 좋고요.” 빙긋 웃는 화우의 얼굴에 보조개가 일었다.

화우는 나무를 깎아 도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파는 것으로 생업을 잇는 사람이었다. 마을에 장이 열리면 직접 만든 목기를 가져다 팔고 그 돈으로 생필품을 구입했는데, 친절함과 훈훈함에 마을 사람 모두에게 두루 호감을 사 ‘화우 도령’이라 불리었다. 마을 사람들은 화우를 그저 인품이 단정한 목수 청년으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화우가 노년의 나이라는 것은 물론, 어마어마한 무술가라는 사실조차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자매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따금 자매와 함께 나온다든가 혹은 둘 중 한 사람만 데리고 나온다든가, 아니면 간혹 화우를 대신해 자매가 나온다든가 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어디서 몰래 부인을 그것도 둘씩이나 만든 거 아니냐고 수군거릴 법도 하건만 그런 식의 수군거림은 딱히 없었으니, 평소 화우 도령의 품행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화우가 만든 목기들은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어, 비싼 값에 팔아도 어색하지 않으련만 항상 적은 가격에 팔았으니 화우의 인품을 두고 나쁜 말이 나올라야 나올 수 없었다.

화우가 만드는 목기들 중 특히 대단한 것이 권법가들을 위한 ‘목인장’이었다. 권법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수련하는 동료야말로 최고의 훈련 상대일 것이나, 부득이 홀로 수행해야할 때면 사람만한 크기의 모래주머니를 때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훈련을 대체하거나 혹은 사람 모양을 흉내 낸 목인장을 두고서 실제로 싸우는 상상을 하면서 훈련해야 한다.

어째서 화우의 목인장이 훌륭한가? 그것은 바로, 다른 장인들의 목인장이 사람의 겉모습만 흉내 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달리, 화우의 목인장은 놀랍게도 스스로 움직이는 목인장인 까닭이다. 저절로 움직이는 나무토막과 훈련하는 것이 가만히 서 있는 나무토막에 혼자 주먹질하는 것보다 훨씬 좋음은 당연한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있는 힘껏 기술을 써도 나무토막이 다치는 것이지 사람이 다치는 건 아니다보니 원하는 기술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어, 실로 이보다 더 좋은 훈련도구가 없을 정도였다.

“이 녀석은 제가 제일 처음으로 만든 목인장입니다.”

화우가 자매에게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련하던 어느 목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매가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목인장의 몸 군데군데에 주먹자국이라든가 발길질의 흔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화우가 혼자 살면서도 높은 수준의 무공을 유지한 것은 그가 자신이 만든 목인장과 날마다 수련해온 덕분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화우는 유황이며 수은이며 정체 모를 가루며 온갖 기름이며 하는 것들을 뒤섞은 다음 목인장 안에 만들어 둔 기름주머니에다가 그것을 부어넣었다. 그러자 목인장의 눈 부분에 안광이 들어왔다. 동시에 멈춰 서있던 목인장의 팔다리가 흡사 몸을 풀 듯 움직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호흡하는 것 같았다. 화우의 구령에 맞춰 목인장이 자세를 잡았다. 대련이 다시 이어졌다.

특이하게도 화우는 목인장만큼은 시장에 내다팔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음알음 화우의 목인장이 훌륭하다는 명성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무림의 권법가라든가 먼 곳에 있는 유명한 문파의 심부름꾼이 화우의 집을 소수문 끝에 찾아내어 직접 방문하여서는, 청하건대 목인장 하나만 제작해주시라 의뢰하는 일이 몇 달에 한번 꼴로 잊을만하면 나타났다.

그때마다 화우는 공손한 태도로 거절하였다. 다만 드물게 수락하는 일이 있기는 하였는데, 가난하고 빈궁하여 배움을 구하려는 마음이 굴뚝같으나 형편상 여의치 못하니 어쩔 수없이 목인장이라도 하나 두고 홀로 수련하려는 자들의 경우였다. 화우는 그런 고객이 나타나면 항상 사례금의 절반만 받았으며, 가급적 자신의 목인장을 소문내지는 말아 달라 일렀으며, 비록 그대가 지금은 빈곤할 지나 수행에 매진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나아가 만인에게 기여하리라 응원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화우는 자매에게 무술과 목공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저에게 권법을 내려주신 스승님은, 남편과 일찍 사별한 어느 부인이셨답니다. 부인께서 호신을 위해 수련하여 직접 만드신 무술이지요.” 그러면서 화우가 쇠부채를 보여주었다. “이 쇠부채도 저의 스승께서 물려주신 물건이랍니다.” 도적들을 혼쭐낸 그 쇠부채였다.

“하여 본래는 여인이 쓰기에 적합하게끔 고안된 것인데, 저는 사내치고는 꽤나 조막만한 사람인지라 얼떨결에 저한테도 썩 어울리는 무술이었답니다.” 화우의 체구는 언니 계연과는 비슷했지만 동생 진미보다는 작았다. 손바닥을 펼치고 맞대보면 화우의 손은 진미의 손보다도 작았고, 주먹을 쥐어보면 자그마한 것이 실로 앙증맞을 정도였다. 이 작은 주먹에서 무지막지한 힘이 나올 거라곤 누구도 쉬이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제 나이 반백을 넘겼는데 두 분이 살아갈 날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훗날 우리가 작별하는 날이 오거든 두 분 스스로 지금의 난세를 헤쳐 가셔야 할 터, 호신의 차원에서 익혀두시면 그 쓰임이 요긴할 것입니다.”

화우가 자그마한 송판을 꺼내와 이것을 주먹으로 부셔보라 하였다. 자매 모두 주먹을 휘둘렀으나 송판에는 금도 가지 않았다. 도리어 자매는 저희 손이 더 아파 허공에 손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화우가 싱긋 웃고는 동생 진미에게 송판을 들게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힘을 주어 일격을 가할 때에는 견갑골을 최대한 붙인다는 생각으로 응축시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팔을 몸에 붙였다. 등 근육이 수축되면서 자연스레 팔꿈치가 옆구리 쪽으로 밀착되었다. “그런 다음 배에서 힘을 끌어내 몸을 틀면서, 주먹을 꽂는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내질러야 합니다. 이렇게!”

파악! 화우의 팔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송판을 두 쪽으로 쪼개면서 그 사이로 튀어나왔다. 충격으로 으어어 소리를 내다가 발라당 넘어지는 동생의 모습에 언니가 키득거렸다.

“다음, 재빨리 치며 들어가기.”

계연와 진미를 앞에 세우고, 화우가 다음 동작을 선보였다. 눈 한번 깜빡했을 뿐인데 화우의 오른주먹이 계연의 코앞에 와 있었다. 쏜살같은 주먹에 바람 소리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 바람이 얼굴에 훅 끼치자 이번에는 계연이 아찔함을 느끼며 으어어 소리를 내었다. 동생이 보란 듯이 키득거리며 언니에게 복수하였다.

“제가 서있는 걸 잘 보세요. 일부러 오른쪽을 내밀고 비스듬히 서 있습니다. 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왼발, 그러니까 뒷발을 슬그머니 앞으로 옮겨요. 상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눈치를 못 챕니다. 그대로 이 탄력을 실어서 앞에 놓인 오른발과 오른손을 쭉……!”

이번에는 화우의 주먹이 진미의 얼굴로 쏜살같이 날아가 정확하게 코앞에서 멈추었다. “…뻗어주는 겁니다.”

“이렇게요?” 진미가 말했다. 화우가 무슨 뜻이나 되물으려는 순간, 훅! 하고 화우의 얼굴에 바람이 닿았다. 진미의 주먹이 화우의 코앞에서 정확하게 멈춰있었다. 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슬그머니 뒷발을 움직여 체중을 앞으로 실은 다음 그 탄력을 주먹 끝에다가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말이다. 잠시 동안 화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눈만 깜빡거릴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진미의 입술에서 의기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숨겨진 재능이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이후 진미는 특히 집중적으로 권법을 전수받았다. 진미와 화우 두 사람은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로를 향해 주먹을 뻗고 피했으며 발차기를 날리고 막아냈다. 물론 언제나 스승에 해당하는 화우 쪽이 더 우월했다.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힐 때마다, 진미는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어쩌다가 화우에게 일격을 먹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며 허허 웃는 화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체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다 좋은데 우선 하나 지적하자면, 상대의 하단을 노릴 때.” 화우가 진미의 다리 쪽으로 낮게 깔린 발길질 동작을 취했다. “만약 제가 힘을 다해 가격했다면 어떻게 될 거 같나요.” 화우의 발목이 진미의 다리에 감기듯이 톡 닿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다리를 뻣뻣이 하고 있는 상태라면 심하게 다치겠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제 다리를 노리고 들어와 보십시오.”

이번에는 진미가 방금 전 화우가 한 것처럼 낮게 깔린 발길질을 천천히 취하였다. 그러자 진미의 발목이 닿는 순간에 맞춰 화우가 다리를 접어 올렸다. “이런 식으로 충격을 흘려 넘기는 겁니다.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면 상대방도 물론 아프겠지만 내 다리는 아작 나는 수가 있습니다. 다리에 문제가 생기면 주먹질도 자세가 흐트러집니다. 내 힘으로 상대의 힘을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비록 그 힘은 강인하나, 들끓는 혈기는 다스리셔야 합니다. 흘러가는 개울가의 물과 같이, 상대의 힘 또한 흘리듯 넘기는 연습을 하셔야겠습니다.”

언니 계연은 목기를 만드는 부분에서 재능이 엿보였다. 동생이 무술에 소질이 있었다면, 언니한테는 공예에 소질이 있었던 셈이다. 목기를 만드는 동안 계연의 표정은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이 되어도 졸린 줄을 몰라 하였고 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을 몰라 하였다. 화우가 계연이 만든 목기를 시장에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그게 다른 사람이 만든 물건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자기네가 사간 물건이, 실은 계연이 만든 것인데, 응당 화우의 솜씨려니 했던 것이다.

다만 조금 걱정인 것은 계연이 목기 만드는 데에 몰두하다가 드문드문 기침을 하더라는 점인데, 화우의 눈썰미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잠시 손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계연이 의아한 마음에 속으로 갸우뚱하며 손을 내밀자, 화우가 한손으로 다소곳이 계연의 손을 쥐고 나머지 한쪽 손의 손가락 끝을 계연의 손목 위에 가져다 올렸다.

“타고난 체질상 폐가 연약합니다. 나무를 다루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잘한 톱밥을 호흡 내내 들이킬 겝니다. 이것이 과하면 폐를 손상시킬까 우려되는 바이니, 가급적 작업을 할 때에는 중간 중간 휴식을 두어 폐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하십시오.”

계연은 화우의 지도하에 나날이 발전하였다. “스스로 움직이는 목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대에게만 가르쳐 드리리다. 제가 오랜 세월 공들여 개발한 것이라, 천하에 저 말고 방법을 아는 자가 없답니다.” 마침내에는 목인장 제작 기술을 전수받을 정도로 말이다.

“노파심에 당부하자면 이것으로 부를 바라기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는 용도로 활용하소서.” 그러고서 싱긋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제가 이리 말하지 아니하여도 그리하실 성품이심을 진즉 알고 있답니다.” 이리하여 계연은 스스로 움직이는 목인장을 만들 줄 아는 두 번째 장인이 되었다.

비록 천하가 난세로되 세 사람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동생의 권법은 일취월장하였고 언니는 나날이 장인으로 거듭났다. 시절이란 게 이렇게만 흘러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야속하게도 저 멀리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는 곱상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 사병들 몇을 데리고 화우의 집에 찾아왔다. 자매가 그에게 뉘시냐고 여쭈자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순간 자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듯 속으로 놀라했으니, 그의 정체인즉 잔악무도하기로 천하에 이름난 권력자, 본래 자매가 섬기고 있어야 할 주인, 바로 수덕이었다.

수덕으로 말하자면 잡티라곤 하나 없이 희고 고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깔끔하고 날렵하여 이지적인 느낌을 자아냈으며, 꽤나 훤칠한 팔다리가 맵시 있게 꾸며진 비단 도포와 제법 어울렸다. 허나 살벌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독이 오른 승냥이나 이리의 그것과 같으니 실로 그 속에 잔악한 성품이 엿보였다.

“여기 손재주가 훌륭한 장인께서 계시다고 하던데, 맞소이까?”

물론 수덕한테야 그 옛날에 달아난 어린 시절의 가노 자매 같은 것 따위는 워낙 하찮은 미물이나 마찬가지라 기억 속에 담아둘 리가 없었고, 따라서 지금 수덕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두 여인이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게 훨씬 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도려낼 듯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는 마당이니 자매로선 저절로 긴장부터 하게 되었다.

방 안에 있던 화우가 밖으로 나와 손객을 맞았다. “소인이 그 장인입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일 줄 알았는데, 의외구려. 아무튼 반갑소. 듣자하니 선생께서 퍽 재밌는 물건을 만들 줄 아신다 하더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목인장이라던데, 과연 그러하오?”

“부족한 재주로 장난감을 만든 것에 불과할 뿐, 대단치 않은 물건입니다. 구태여 내다팔 물건이 못 되오니, 면목 없게도 이를 바라고 오셨다면 송구한 마음이라 말씀드립니다.”

“아니오, 괜찮소. 흥미가 당기어 물었을 뿐, 굳이 바라던 바는 아니외다.”

“허면 어쩐 일로 먼 걸음을 하셨습니까?”

“내 예전에 풍문으로 들은 것이 있는데, 유리걸식 떠돌던 사내 아이 하나가 어느 부인에게 거두어졌다 하오. 이 부인이 사실 권법가였는데, 아이가 부인에게 무예를 전수받은 다음, 장성하여 청년이 되고부터 돈을 준다고 청탁하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살인도 밥 먹듯 해치웠다 하더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서 수덕이 화우를 살피는데, 화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되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는 기색까지는 숨겨지지 아니하였다. 수덕이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무림의 고수들도 함부로 대적치 못할 실력자이되 그저 돈푼만을 바라고 행동하니, 세간에서 이르기를 ‘천박한 돈 귀신’이라 별명 지어 불렀다는구려. 세월이 흘러 이 자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즉,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그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 합디다. 뭐, 나무 깎는 재주가 좋았던 지라 시골 어딘가에 숨어서 다만 물건이나 만들어 팔아다가 호구지책하지 않겠느냐고, 근거라곤 찾을 수 없는 시장의 잡설 정도만 있는 듯하오.”

“그것을 어인 연유로 이르십니까?”

“아무 연유 없소. 그냥 생각이 났을 뿐이라오. 다만…” 수덕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시 말꼬리를 늘였다. “…재야에 숨어버린 그런 실력자라면, 그를 찾아내어 부하로 삼고 싶은 마음이 어느 권력자인들 없겠소이까. 아니 그렇소?”

이에 화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 옛날 한신이 토사구팽의 예를 보여준 바, 뛰어난 실력자라면 권력을 가까이함이 그 자신에게 화가 됨을 미리 알아, 스스로 이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자 수덕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입술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서늘하게 쏘아보는 시선을 통해 ‘네놈이 감히…’라고 진노함을 어렵지 읽을 수 있었다.

“오늘밤 자시가 되기 전까지, 그대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겠소.”

수덕이 사병들에게 손을 들어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사병들이 길을 열었고, 수덕이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려 잠시 화우 쪽을 쏘아보고는 발걸음을 옮겨 사병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런 다음 사병들이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화우의 집에서 물러났다. 화우는 그들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화우의 얼굴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의 붉은 빛이 야트막히 내려앉았다. 가벼이 스쳐가는 가을의 잔바람이 유난히도 스산하였다.

화우는 마을로 내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장장이 젊은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대장장이에게 패물을 내밀며 부탁했다. “오늘 밤 자시가 되기 전까지 마차를 구해주게. 자매를 데리고 어디든 좋으니 신속히 달아나게.”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자매와의 작별을 준비했다. 계연에게 목인장을 넘겨주며 화우가 말했다. “공예를 새로이 연구함에 이것을 두고 참고하면 좋은 마중물이 되어줄 겝니다.” 그리고 진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마지막 부탁이니 부디 의협심을 잠시 눌러두소서. 언니와 함께 위험을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라야 합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쇠부채를 꺼내어 계연에게 건네주었다. “혹여 위험한 일에 맞닥뜨리거든 요긴히 활용하십시오.”

시간이 흘러 밤에 이르니, 영롱한 달빛 위로 드문드문 먹구름이 지나가기를 반복하였다. 어둠 속에 저벅저벅 한 무리의 발걸음 소리가 화우의 집으로 다가왔다. 무리가 대문을 지나 들어가니, 마당에는 이미 화우가 무릎을 꿇고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나머지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물러나 있거라. 너희가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그러고 나서 화우를 향해 다가갔다. “자시가 될 때까지 마음을 고치라 일렀거늘, 아무래도 죽음을 택한 모양이구나. 어리석도다. 어찌하여 도망조차 가지 않았을꼬?” 낮에 찾아온 귀족, 수덕이었다.

화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옛날 위왕 조조가 이르기를 ‘내가 세상을 버릴 순 있어도 세상이 나를 버림은 용서치 않겠다’ 하였으니, 그대의 마음 씀씀이가 조조의 그 말과 다르지 않음을 내 진즉 알고 있었노라. 내 생애 범해온 과오가 많은 바, 그대와 조우함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 생각할 뿐 다른 도리가 있으랴.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악한에게 저항함을 회개의 방법으로 삼고자 할 따름이다.” 창백한 달빛이 화우 모습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하는 수 없도다. 무림에 악명이 자자하던 ‘천박한 돈 귀신’, 그 실력을 직접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순식간에 수덕의 주먹이 얼굴을 노리고 날아갔다. 화우가 몸을 젖혀 피한 뒤 재빨리 반격을 가했다. 허나 수덕 또한 옆구리를 틀어 이를 피했다. 두 사람의 손과 발이 허공을 가르며 바람을 일으켰다. 펄럭이는 옷자락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에 흘려 퍼졌다.

자매는 한쪽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함께 숨은 대장장이가 어서 피해야 한다고 조용히 다그쳤다. 동생 진미는 욱하고 튀어나오는 마음을 누르면서 조금만 더, 잠깐만, 이라 버텼고 언니 계연은 혹시 모를 동생의 우발적 행동과 조금이라도 화우를 돕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다스리면서 신중한 자세를 애써 지켰다.

치열한 공방이 오갔으나 승부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수덕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빠른 속도로 화우에게 내질렀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한 뒤 화우는 그것이 날카로운 단검임을 알아보았다. 월광을 받아 그 날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화우가 허리춤에서 쇠부채를 꺼내어 맞서려했다. 아뿔싸, 쇠부채가 없었다. 화우가 앗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칼끝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피하고 피하고 다시 겨우 피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싸늘한 감촉이 화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저도 모르게 화우의 입이 벌어졌다. 숨이 턱 끝에서 막힌 상태로, 소리 없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때 진미가 순식간에 튀어나가 온 몸을 던져 수덕의 몸통에 발차기를 날렸다. 억! 소리와 함께 수덕이 나자빠졌다. 씩씩거리며 이를 악물고 달려드려는 동생을 재빨리 언니가 붙잡아 끌어냈다. 대장장이가 황급히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음질쳤다. 사병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튀어나왔다. 일부는 수덕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고 일부는 도망가는 자매와 대장장이를 뒤쫓으며 소리 질렀다. 화우는 저 멀리 달아나는 자매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자매는 대장장이가 대기시킨 마차를 타고 멀리멀리 달아났다. 어느 낯선 마을에 이르러 그들은 새로이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물론 그곳에 이르기까지 산적을 만났다든가 하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진미가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였다. 새로 정착한 마을에서는 대장장이가 쇠로 만든 물건과 계연이 만든 목기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 괜찮은 가격으로 내다팔 수 있었다.

다만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계연의 경우 따로 목인장을 만들지는 아니했는데, 아무래도 계연에게 그런 재주까지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다보니 계연으로서도 자연스레 이를 만들어야 할 까닭이 없는 탓이었다. 집안에 있는 목인장이라고는 오직 도망칠 때 챙겨온 녀석 하나뿐이었다. 이것은 진미가 권법을 수련할 때 사용되었다.

계절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법이요, 사시사철이 몇 차례 오고감을 거듭하니, 이를 일컬어 세월이라 하더라. 세월이 몇 차례 그 햇수를 바꾸는 동안, 허수아비 황제 아래에 권력가들의 쟁투는 나날이 심해졌다.

그러다 한번은 어느 제후와 수덕이 한밤중에 각자 휘하의 문파를 동원해 싸움을 벌였는데, 제후가 패배하여 그 목숨마저 잃었다. 제후가 소유하던 영지가 모조리 수덕의 손에 넘어갔는데, 수덕은 새로 얻은 영지 일대를 유람삼아 돌아다녔다.

가마가 으리으리하기로는 황제의 가마에 버금갔으며, 호위하는 무사들이며 뒤따르는 악공들의 연주 소리며 춤을 추는 무희들이며, 실로 이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이 도래하여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괴롭혔으나, 겨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가마 행렬을 이탈했다가 수덕에게 죽임당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가 새로 얻은 영지에는 계연과 진미 자매 그리고 대장장이가 안착한 마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가마가 마을로 행차함은 당연한 노릇이요, 예정된 수순이었다. 폭풍우가 당연히 위험을 몰고 오는 중이었다.

잔악무도한 수덕이 수일 뒤면 마을에 당도하리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근처에 있는 온천을 들를 예정이며, 한 며칠 머무르며 여독을 풀 요량이라고 하였다. 진미가 소문을 듣더니 대장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가벼운 갑옷 하나 속히 만들어 주시오.” 그 속내를 미처 못 알아본 대장장이가 무슨 까닭이냐 순진하게 물었다. “딱히 별 뜻 없소. 그저 수련에 매진코자 할 따름일 뿐.” 그렇게 둘러댄 다음, 진미는 묵묵히 목인장 수련에 몰두하였다.

며칠 뒤 수덕의 가마가 마을에 당도하였다. 진미가 사라진 것이 그날 밤이었다. 대장장이가 마련해준 갑옷과 함께. 계연과 대장장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계연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대장장이를 침착하게 달래면서 화우가 물려준 쇠부채를 챙긴 다음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한편 그 시각, 수덕은 이제 막 침소로 들어간 참이었다. 겉옷을 풀어 헤치며 잘 준비를 하려던 찰나, 수덕이 무언가 이상한 공기를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장의 들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진미가 수덕의 등 뒤로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착지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수덕의 목덜미로 손날을 날렸다.

허나 수덕의 반응 또한 재빨랐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수그려 공격을 피한 다음 다시 일어서며 그 반동을 실어 정체 모를 자객에게 옆차기를 날렸다. 진미가 양팔을 교차하여 이를 막아냈으나 비록 정타를 허용하진 않았으되 충격이 몸에 실려 뒤로 밀려났다. 밀려나는 와중에 부딪힌 물건들이 우당탕 쏟아졌다.

“웬 놈이냐!” 수덕이 자객을 향해 외쳤다. 가벼워 보이는 갑옷으로 몸을 덮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자객 진미는 대답 없이 달려들며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상대는 걸출한 무공의 소유자 수덕이었다. 무공에 관해서라면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무림의 온갖 고수들을 개인 교사로 불러다가 체득해온 자였다. 두 사람의 공격과 방어가 백중지세로 호각을 다퉜으되 약간의 차이로 진미 쪽이 밀리는 기세였다.

“나름 재밌는 실력이구나. 네 놈의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하도다.” 진미의 움직임에 수덕이 흥미로워하였다. 무술 강사들을 돈으로 직접 초빙해 수련했으니 내로라하는 고수들의 족보와 계보를 모조리 꿰고 있는 수덕이었다. 허나 이 자객의 공격은, 언젠가 한번 상대한 적이 있는 듯하기는 한데, 이게 어느 문파의 어느 유파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어느 파벌인지를 알아내면 이 자객을 사주한 배후가 누구인지도 쉬이 짐작할 수 있는데, 도통 파악되질 않았다.

그러나 진미는 문답무용의 자세로 일체 대답 없이 공격을 이어갔다. 이에 수덕이 거리를 벌리더니 발길질을 낮게 깔아 자객의 허벅지와 무릎 사이, 갑옷의 틈바구니를 정확히 노려 가격하였다. 묵직한 타격에 일순간 진미의 다리에서 마비될 것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네 스승은 하단부를 방어할 때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야 한다고 귀띔도 안 해줬다더냐?”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수덕의 발길질이 반대쪽 다리에 적중했다. 진미가 반격삼아 몇 차례 주먹을 날렸으되 수덕이 모두 피해냄은 물론이요 도리어 거리를 벌려 진미의 하단부에 추가로 공격을 가하니, 진미의 다리가 부상을 입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봉쇄된 마당이니 진미로서는 주먹질로 승부를 보아야겠다는 다급함에 온몸의 힘을 실어 주먹을 뻗는데, 다리가 무너졌으니 자세가 무너져 빈틈이 생김은 당연한 노릇이요, 이를 수덕 정도의 고수가 알아봄 또한 당연한 바라, 수덕이 여유롭게 진미의 주먹을 피한 다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몸을 틀어 진미의 안면에 팔꿈치를 적중시켰다.

강력한 일격에 진미가 휘청하였다. 수덕이 연이어 폭포수처럼 공격을 퍼부으니 결국 진미가 이를 버티지 못하고 겨우 겨우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놈을 잡아라!” 사병들이 자객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길바닥과 기와지붕과 담벼락을 넘나들며 달아나되 진미는 자신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마침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사병들의 외침소리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기적적으로 계연이 나타났다. 숨이 터지도록 달려 나온 계연은 동생에게 가장 근접한 사병 두 놈을 각각 일격으로 쓰러뜨린 다음 부상당한 동생을 부축하였다. 화살이며 표창이며 따위가 날아들 때면 쇠부채를 방패삼아 막아내었다.

가까스로 도망쳐 집에 돌아왔으나 진미의 부상은 그 정도가 심각하였다. 그날 밤 동생 진미는 언니 계연의 손을 꼭 붙잡고선 눈물 먹은 눈동자로 언니를 바라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언니의 손에서 동생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방심했으면 죽은 줄도 모른 채로 죽었을 것이로다.” 수덕이 호위에 실패한 책임을 이유로 사병들을 처형시키는 자리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문파의 고수들을 초빙하여 개인 교사로 채용, 천하의 모든 무예를 몸에 익힌 그를 상대로 그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 자객이란 진미가 처음이었다. “어째 분이 가시질 않는구나.” 사병들의 목 잘린 머리를 바라보며 수덕이 혀를 찼다.

수덕은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도륙내기로 했다. 사병들을 그리 죽여도 분이 가시지 않았던 게다. 공식적으로 마을사람들 모두를 사형에 처하겠노라 공표하니 살려 달라 애걸하는 목소리들이 찾아왔다. 그에게 있어 가엾은 자들의 애걸이란 퍽 듣기 좋은 구경거리라, 수덕은 이에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양 표하였다. “100일 안에 자객을 색출하면 살려둘 것이요, 그렇지 못하거든 이런 흉악한 마을 따위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법이니 마땅히 모두 멸살할 것이다.”

 

진미를 땅에 묻은 뒤, 계연은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황망히 지냈다. 대장장이가 밥 때가 되었으니 수저를 들라 일러주어야 식사를 하였고 밤 때가 되었으니 자야겠다고 일러주어야 이부자리를 펼치었다. 그러다가 100일의 기한을 두고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는 수덕의 공표를 듣고, 계연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다음날, 계연이 목인장 수련을 하는 게 아닌가.

“동생이 죽은 지가 10년이 지나기를 하였소, 1년이 지나기를 하였소? 언니 되는 그대마저 복수에 눈이 멀어 목숨을 잃을 참이니, 내 훗날 무슨 낯으로 화우 도령의 혼령을 대하겠소? 나 또한 그대 동생의 죽음이 한스러운데, 그대마저 죽음의 길을 걸으려 하니, 이를 보는 내 마음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바를 어찌한단 말이오. 이러지 말고 달아납시다. 비록 수덕의 사병들이 마을 주변을 감시한다고 하나, 야밤을 틈타면 가능할 게요. 달아납시다.” 허나 계연은 묵묵부답 목인장 수련에 매진하니, 마침내는 대장장이도 단념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더라.

하루는 계연이 대장장이에게 부탁하기를 장정 몇을 동원하여 오두막 하나를 지어 달라 이르니, 대장장이가 그 까닭을 물으려다 그 안에서 다른 일체의 방해 없이 수련에만 매진하기 위함임을 쉬이 짐작하고 응해주었다. 오두막이 지어진 뒤 계연은 목기를 만들어 파는 일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나면 오두막 안에 틀어박혔다.

한번은 대장장이가 슬그머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니, 나무토막을 손보던 언니가 깜짝 놀랐다가 대장장이임을 알아보고 안심한 다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일렀거늘 어찌 들어오느냐 타박하였다. 대장장이가 미안해하며 앞으로는 발길을 들이지 않겠노라 하는데, 가만 보니 방금 전까지 언니가 만지던 나무토막의 모양새가 만들다가 만 목인장의 모양새였다.

“지금 무엇을 만들고 계셨소?” 궁금함이 동하여 대장장이가 물었다.

“오랜만에 목인장을 만들고 있었다오.”

며칠 뒤 대장장이는 오두막 근처에 박살이 난 목인장 하나가 버려져 있음 알아보았다. 계연이 목인장이 부서질 정도로 수련하고, 새 목인장을 만들고, 다시 수련하고, 또다시 새 목인장을 만드는 식으로 거듭하고 있다고, 대장장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하였다. 그것이 보통 수준의 집념을 넘어선 것이요, 자신이 말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도.

그러기를 수십일 째였다. 어느 날 식사 도중, 계연이 잔기침을 심하게 하였다. 이쯤하면 멈춰야 할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계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기침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기침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입에서 손을 떼어서 보니,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게 아닌가. 맞은편에 앉아 이 모습을 본 대장장이가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찍이 화우 도령이 나에게 이르길 폐병이 날까 우려되니 반드시 휴식을 챙기라 하였는데, 그것이 이를 두고 이른 말이었나 봅니다.” 그리 말하는 계연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묻어나왔으니, 이는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아차린 탓이라.

그 날 이후 계연은 오히려 더욱 기운을 끌어 모아 오두막에 틀어박혔다. 대장장이가 가끔 착잡한 마음에 차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 그 근처를 걷고 있으면, 오두막 안으로부터 투박하게 치고받으며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오두막 뒤편 한쪽으로 넘어가면 영락없이 부서진 목인장 더미가 내놓여 있었다. 부서진 목인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계연의 각혈 또한 나날이 심해졌다.

어느덧 100일째에 거의 도달한 날, 물러나기 직전의 마지막 겨울 그 끄트머리에 이르러 최후의 추위가 극에 달한 때, 계연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였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화우 도령과 동생을 만났다오.” 말을 하다 말고 피 섞인 기침을 토하느라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대장장이가 계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몸에 편히 기대도록 하였다. “내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 하려나 보구려. 오두막에 들어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보오.”

대장장이는 오늘이라도 방에 들어가 하루 푹 쉬라고 말하려다가, 건강이 상하도록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이 허사가 될 거라 생각하니 계연의 처지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대장장이는, 그렇다면 계연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차원에서라도 오두막에서 수련하게 두는 것이 계연의 마음에 위로되는 일이라 판단, 바램대로 행하시라 하였다. 어차피 100일의 기한이 다 해가는 마당, 곧 죽을 목숨이라면 생전 바라는 바 실컷 행함이 마땅치 않겠는가.

그날따라 바람은 유난히도 스산하였다. 오두막에 들어간 계연은 늦저녁이 돌아오질 않았다. 대장장이는 방안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문득 오두막에서 무술 수행에 몰두하다가 생명을 다하여 쓰러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오두막까지는 야트막한 둔덕 하나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야 했다.가는 길에 하늘을 살피니 어쩐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눈보다도 차가운 겨울 비가 말이다.

빗방울이 드문드문 내리기 시작한 것은, 저기 저 편으로 오두막의 모습이 대장장이의 눈에 이제 막 들어올 즈음부터였다. 겨울의 끝자락을 머금고 있어 얼음보다도 차가운 빗방울이었다. 비가 거세어지기 전에 서둘러야했다.

대장장이가 오두막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듯 폭음이 일면서 오두막 천장이 산산조각으로 사방팔방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대장장이가 비명을 지르며 발라당 자빠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오두막 천장을 뚫고서 하늘 높이 튀어 올라, 포물선 모양의 기다란 연기를 꼬리마냥 흘리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안이 벙벙하여 벌어진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대장장이는 그 정체불명의 것을 잠시 멍하고 보다가, 오두막 전체가 점점 기울어지려는 모습을 보고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얼른 오두막 문을 열고 달려드니, 계연이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서둘러 계연을 들쳐 업고 빠져나오니, 기울어가던 오두막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폭삭 내려앉았다.

“이제 다 됐어.”

계연이 대장장이의 등에 업힌 상태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누이며 말했다. 기력을 다한 목소리에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계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뜻을 이루었기에.

어두운 밤 먹구름 너머로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 시각, 수덕은 누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비가 내릴 모양이군. 늦겨울의 마지막 비가 될 듯하도다.”

뒷짐을 지고 선 자세로 수덕이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젊음의 혈기보다는 원숙한 근엄함을 갖추고 싶어진 탓에 나이든 고관대작들의 모습을 흉내내본 것이었다. 썩 무게 잡힌 느낌이 안 일어났다. 수덕은 일부러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한 다음 목청을 가다듬었다. “늦겨울의 마지막 비가 될 듯하도다. 아아, 늦겨울의 마지막 비가 될 듯하도다. 아, 아.”

과연 늦겨울의 마지막 비가 될 것이라 그러한지,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후두둑 후두둑 나뭇잎이며 땅바닥이며 빗방울이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런데…

“응?”

…저 멀리 하늘 어딘가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꼬리마냥 기다란 연기를 흘리며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허허, 저것은 무엇인가? 봄이 오라 부름 짖는 용이라는 동물이 저것을 두고 이름인가?”

이때까지만 해도 수덕은 여유로웠다. 용인지 똥인지 뭔지 모를 그것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체불명의 그것이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옴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콰과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체불명의 그것이 누각에 충돌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누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수덕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의 중후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찔 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수덕이 정신을 차려 보니, 무너진 누각의 잔해 사이로 정체불명의 ‘그것’이 놓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놓여 있는 게 아니라 ‘서 있다’라고 해야 했다.

“이게 무슨……?”

목인장이었다.

정체불명의 목인장 하나가 쇠로 된 갑옷을 두르고 서 있었다. 진미가 입던 갑옷을 두르고 서 있었다.

100일의 시간 동안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계연이 만들어낸 목인장이, 진미의 철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갑을 두르고 있으니 목인장(木人樁: 나무인형)이라고 하기보다는 철인장(鐵人樁: 무쇠인형)이라고 불러줘야 했다.

 

계연은 생각했다. 100일 동안 수련하면 수덕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무리였다. 스승이나 다름없던 화우가 그의 손에 죽었고, 자기보다 권법에 능한 동생 진미가 역시 그에게 죽었다. 어쩌면 대장장이의 말처럼 야밤을 노려 도주함이 맞을 지도 몰랐다. 아니, 실상은 그 책이 합당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언제까지 도망만을 가야한단 말인가.

설령 지금 도망친들, 앞으로가 무사하단 보장은 어디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에도 한 마을의 사람들 그 목숨이 아무 것도 아닌 양 해치워 버릴 수 있는, 그런 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안전한 곳이란 안전한 삶이란 정녕 도모할 수 있는 일인가.

사실 그 자객은 나의 동생이며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언니인 나에게 죄를 물으라 나선들 그가 자신의 말을 거두리란 보장은 또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처음부터 100일이 되는 날에 피로 잔치를 벌이려는 심산은 아닐 것인가. 그러니 이런 마당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를 상대로 무슨 방책이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어째서 약자는 늘 당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약자는 핍박 받아 마땅한가. 어째서 약자는 대대손손 약자여야 하는가.

무술이란 약자가 스스로 호신하고자 인위(人爲)의 산물로 만든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강자의 무기로 쓰이는 것인가. 인위의 산물이란 마땅히 사람의 삶에 기여하기 위함인데, 어째서 그것이 도리어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이럴 수는 없다.

그리하여 계연은, 무술과는 또 다른 종류의 인위로 복수를 결심했다. 나무를 깎아 목인장이라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이라는 인위를 통해서.

목인장을 상대로 오랜만에 수련하며, 계연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자신을 상대해주는 이 목인장의 움직임 속에, 과거 화우가 보여준 움직임이 담겨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생이 보여주던 일련의 동작들 또한 담겨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목인장을 상대하며 자신이 취했던 동작과 움직임들까지도 목인장이 그대로 습득하여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목인장과 수련할 때 증진되는 것은 수련자의 실력만이 아니었다. 목인장에게도 수련자의 움직임이 그대로 체득되고 있었다! 과거 화우가 목인장을 상대로 훈련할 때마다 목인장에게 화우의 움직임이 모두 학습된 것이었고, 그 결과 화우는 목인장과의 수련을 통해 무수히 많은 과거의 화우들을 상대로 훈련해온 셈이었다.

첫 번째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뒤, 계연은 두 번째 짐작도 맞았을지 확인하고자 작업에 들어갔다. 바로 목인장과 목인장을 서로 대련시켜 목인장끼리 스스로 훈련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짐작을 말이다. 서둘러 새로운 목인장을 만든 다음, 화우가 최초로 만들었던 목인장과 훈련을 붙였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새로운 목인장이, 화우의 목인장이 보여준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 뒤 오두막 안에서 계연은 건강이 상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발휘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목인장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목인장들이 서로 서로 싸워댔다. 그러면 그럴수록 서로 서로 그 실력이 올라갔다. 개중에는 격하게 훈련하느라 박살나는 목인장도 나타났다. 대장장이가 보았던 부서진 목인장은 계연이 부순 게 아니라 목인장들끼리 수련하다가 부서진 녀석들이었다.

무수히 많은 목인장끼리 서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 이제 목인장은 권법에서 실현 가능한 주먹질과 발길질의 경우의 수를 모두 깨우쳤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어마어마한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그 즈음 계연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어,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목인장을 생산하고 목인장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근처까지 다가온 그 순간, 하나의 목인장에게 나머지 모든 목인장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모든 목인장의 실력을 흡수하게 하였고, 그 녀석의 몸통을 동생이 입었던 갑옷으로 덮어 씌웠다.

마지막으로 등에다가 온갖 재료를 뒤섞어 만든 연료를 통에 담아 부착시켰는데, 계산한 것이 맞다면 이 연료가 폭발하는 순간 그 힘을 추진력 삼아 목인장이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었다. 부디 자신의 계산이 정확했길 바라며 계연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 불꽃이 연료통에 닿은 순간,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철갑을 두른 목인장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가듯 쓰러진 계연이었으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득하였고, 때마침 대장장이가 나타나 계연을 구출하였다.

그렇게 날아오른 목인장이, 아니 철인장이,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도깨비 같은 노릇이냐 하는 표정으로 수덕은 철인장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면서 묵직하게 서 있는 철인장의 모습에서 정체모를 압도감이 느껴졌다. 그 뒤편으로 하얀 번개가 번쩍였고, 뒤이어 천둥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철인장의 두 눈에 붉은 빛이 번쩍였다.

사병들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그들은 우선 첫 번째로 저게 뭐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주춤 멈칫거렸다. 두 번째로 기합을 지르면서 에라 모르겠다 달려들었고, 세 번째로 철인장의 손아귀에 곤죽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일어난 번개가 한 자루의 창 마냥 하늘을 갈랐고, 천둥소리가 짐승의 포효처럼 크게 울렸다.

철인장이 뚜벅뚜벅 수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철인장과 수덕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주먹과 발이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눈 한번 깜빡할 시간에 십여 합의 공방이 오갔으며, 양측 모두 그 모든 움직을 모조리 피해냈다.

천하의 모든 무림 고수를 돈으로 초빙하여 권법을 익힌 인간과, 끊임없는 자가 수련으로 권법에 존재하는 모든 수를 학습해버린 존재. 폭포 같은 빗줄기 아래에, 그들 둘의 손발이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공격과 방어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이어지기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수덕이 철인장의 갑옷 틈 사이로 살짝 드러난 지점을 포착하곤 날렵하게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상대는 고통을 모르는 철인장이었다. 철인장이 반격의 주먹을 순식간에 내질렀다. 수덕이 턱주가리를 맞고 밀려났다.

그런데 아뿔싸, 철인장이 비록 고통을 느끼지는 못한다지만 그렇다고 공격으로 말미암은 충격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수덕이 날린 강력한 일격에 철인장의 몸체 내부로 충격이 가해지면서 기름주머니가 터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완전히 찢어진 건 아니었으나, 구멍이 뚫린 곳에서 연료가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새어나온 연료가 나무로 된 몸체를 적시더니 결국에는 갑옷 사이로 흘러나왔다. 흡사 사람이 부상을 입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철인장에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되 문제가 생겼다고 알아차린 수덕은, 공격을 거두고 방어에만 치중했다. 철인장이 시도하는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낼 뿐 공격을 감행하진 않았다. 철인장의 주먹이 빗나가고 허공을 가를 때마다 몸체 아래로 흘러내리는 연료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수덕이 회피에만 집중한다면 승리가 누구에게 돌아갈지 불 보듯 훤하였다.

계속된 실패에도 철인장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바닥에 흘린 연료를 밟아 철인장의 발이 미끄러진 것이다. 순간 무게중심을 잃고 철인장이 기우뚱 흔들렸다.

적의 위기는 자신의 기회인 법이니, 수덕은 철인장의 움직임이 멈칫거림을 포착하자마자 방어에서 공격으로 태세를 바꾸었다. 수덕의 손과 발이 무자비한 속도로 철인장을 난타했다. 철인장이 흔들린 자세를 어떻게든 고쳐 잡으려 애썼으나 그러는 족족 수덕의 공격에 자세가 더욱 흔들렸다.

마침내 철인장의 자세가 완전히 흐트러지자, 수덕은 온 몸의 힘을 전부 실어 철인장을 박살내고자 일격을 준비했다.

“이제 끝이다 이 도깨비 녀석아!”

그때였다.

철인장의 가슴팍이 뚜껑처럼 열렸다.

무언가가 가슴팍에서 튀어나갔다.

그것이 수덕의 이마를 팍! 때리고 튕겨나갔다.

“억!”

쇠부채였다.

가슴팍에 안에 장착되어 있던 쇠부채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발사된 거였다. 인간이라면 가슴팍에서 쇠부채를 발사하는 공격 같은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래서 인간인 수덕은 그런 식의 공격이라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상대는 ‘기술’이라는 인위의 산물, 마침내 계연이 만들어낸 인위의 산물, 철인장이었다.

수덕의 목이 쇠부채를 맞은 충격에 거의 뒤로 꺾이다시피 젖혀졌다. 그 틈에 철인장이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철인장이 뒤에 놓인 왼발, 즉 뒷발을 앞으로 옮기면서 상체를 움직이지 않은 채 귀족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그 탄력을 그대로 실어 오른발 내딛음과 동시에 오른주먹을 내지르며 귀족의 코에 명중시켰다. 코뼈가 뭉개지면서 두 줄기의 코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이와 함께 철인장은 왼팔을 자신의 몸체에 바짝 붙였다. 인간으로 치면 견갑골에 해당하는 부위를 최대한 응축시켰고, 그리하여 팔꿈치가 옆구리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였다. 그런 다음 순식간에 팔을 뻗어, 수덕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았다.

수덕의 가슴뼈가 뭉개졌다. 수덕의 입에서 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철푸덕.

수덕은 꺽 소리도 뱉지 못한 채 쓰러졌다. 철인장이 반듯하게 차려 자세를 취했다. 대결을 마친 권법가의 자세였다.

쿠콰광, 천둥이 울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수덕이 죽었다는 소식에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산천초목도 함께 기쁜지 춥디추운 겨울의 날씨가 그 하룻밤 만에 화창한 봄 날씨로 바뀌었다.

헌데, 아무도 수덕을 쓰러트린 그 쇠갑옷의 협객 즉 ‘강철의 협객’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지 못했다. 비록 신뢰할 근거는 없으나 그를 본 목격자라 자처하는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부상이 심했는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최대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쳤다고, 그렇게만 확인될 뿐이었다.

진실을 아는 오직 한 사람, 대장장이는 철저히 함구하였다. 숨을 거두기 직전 계연이 자신에게 건네준 비서(秘書)를 꼭꼭 숨겨두고서 말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목인장, 그것을 만드는 비법이 적혀있는, 계연이 몰래 만들어둔 비서를. 언젠가 때가 되거든 힘없는 자들을 위해 선량한 이에게 전해 달라 당부하며 계연이 건네준 비서를.

그날 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힘차게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계연은 편안한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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