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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살>

하얗고 소복하게 거리는 계절을 덮고 있다. 제 몸들을 가려 잔뜩 의복을 갖춰 입은 것처럼 보였다. 두꺼운 점퍼 탓에 열기가 전해졌다. 마사코는 쓰고 있던 안경을 닦아내었다. 이곳 역시 아는 곳이다. 한 두 동이 있을까 말까 한 작은 아파트 단지들. 층의 개수도 적었고 주변 상권도 별거 없던 동네였다. 아주 잠시 머무르고 떠났던 동네. 이곳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정말 잠깐 있다가 떠났으니까. 

거리에 있던 편의점 유리로 모습을 비추었다. 안경을 쓴 젊은 여성.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밋밋한 색의 크로스 백을 메고 있었다. 대학생처럼 보였지만 나이는 그보다 더 들어 보인다.

 

여기선 어떻게 해야 돼?

 

- 알게 될 거예요.

 

마사코는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약속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 옵니다.

 

마사코는 뿌옇게 번지는 유리 너머로 눈을 찌푸렸다. 남자아이. 단지를 훌쩍 벗어나 서리가 낀 보도를 잽싸게 달려 나가는 소년. 마사코는 뒤따라 스바루를 좇았다. 학교를 가는 것도,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공원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잽싼 달음질은 사람들이 있던 곳에서 벗어나 비탈을 올랐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위험한 곳으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흔들며 아이의 자욱을 되밟아 나갔다.

아이는 호수에 있었다. 빈 야외단련장과 호수 하나. 산 아래 지어진 단련장은 등산로가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할 그 장소는 땅이 얼어붙어 바람만이 날카롭게 불었다. 아이가 아무도 없는 겨울 호수 위로 발을 딛고 있다. 마사코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슈욱.

 

아이가 어설프게 다리를 휘적거린다. 얼음 위로 미끄러지나 방향이 제멋대로 꺾인다. 아이는 한껏 입을 오므리고서 팔과 다리를 허공으로 흔들어 대었다. 마사코는 차분하게 아이를 불러 세웠다.

 

얘,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위험해.

 

아이가 고개를 돌린다. 미끄러지는 얼음으로 아이의 고개도 함께 돌아간다. 마사코는 나무로 된 난간을 넘어 조심스럽게 얼음을 두드려 보았다. 스케이트를 탄 적은 없었다. 호수가 언 것을 본 적은 많았으나 그 위를 타 본 적은 없었다. 마사코는 몸을 사방으로 흔들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스바루도, 마사코도 함께 팔을 좌우로 뻗고는 우스꽝스럽게 넘어진다.

 

괜찮니?

 

마사코는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로 미끄러졌다. 손을 뻗는다. 노란색 벙어리 장갑이 마사코의 손을 꼭 붙잡는다. 양손을 맞잡은 채로 돌아간다. 호수는 단단히 얼어있었고 둘은 얼음을 타기에 영 어설펐다. 마사코와 스바루가 다시 넘어진다. 

 

아얏.

 

마사코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문지른다. 웃음. 얼굴로 번지는 미소. 마사코는 그 아이가 웃고 있는 모습에 넋을 놓으며 보고 있다. 이 아이가 웃던 게 언제였더라. 아니, 언제부터 웃지 않게 되었더라.

마사코와 스바루는 야외단련장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여기 오니?

 

네.

 

친구들은?

 

없어요.

 

마사코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

 

이사를 가요. 매일.

 

그러니.

 

두 사람의 입김이 모여 주위로 잔뜩 번진다. 그가 떠나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떠나고 도망쳤다. 아주 멀리로. 그 기억으로 부 터. 그 사건으로 부 터. 무섭고 두려웠다. 김이 안경으로 번져 스바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사코는 그 편이 대화하기에 더 편했다.

 

여기 오는 건 놀려고 오는 거니?

 

말이 없다. 돌아오는 대답들이 포수가 쏜 총성을 듣고 재빠르게 도망이라도 친 것처럼. 스바루는, 아이는 작은 참새가 볍씨를 물듯 짤막하게 답하였다.

 

그냥요.

 

엄마는 여전히 우시니?

 

네?

 

앗. 마사코는 김으로 번진 안경 뒤로 숨으며 말을 더듬었다. 화제를 바꾸자.

 

아니, 그게 요즘은 어떤 만화를 보니?

 

안 봐요.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집에 티비가 없어요.

금방 또 이사 갈 거거든요.

 

분명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오늘 누나는 재밌었는데. 내일 또 오니?

 

네.

 

정말?

 

네.

 

수줍어하는 듯한. 부끄러워하는 듯한. 어린 아이다운 말들.

 

저도 재미있었어요.

 

마사코는 안경으로 입김을 불었다. 더욱 짙어지게. 아주 번져 너머로 날 볼 수 없게. 스바루가 말한다.

 

그럼 내일 또 봐요.

 

응.

 

올 거예요?

 

응.

 

울어요?

 

뺨으로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마사코는 얼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보았을까. 엿보았을까. 내 표정을. 내 얼굴을. 왜 울고 있다고 생각할까. 마사코는 결심이 서는 듯했다. 내가 엄마라고 말할까. 미래에서 온 엄마라고 말을 하면 믿어줄까. 

 

차원을 넘어 시공간으로 -

우주특급 전대 우리는 영웅 -

무서울 것이 없는 무적의 영웅 -

 

어린이 프로그램의 노래. 스바루는 간신히 음을 잡으며 서툴게 불렀다. 엇나가는 음과 버벅대는 박자에도 아이는 꿋꿋이 노래했다. 차가운 바람에 발갛게 부은 손을 스바루의 노란색 장갑에 쥐여주었다. 스바루는 마사코가 내민 손을 꼭 쥐었다.

 

세상을 다 함께 구하자 -

우리는 무서울 것 없는 특급 전대 -

무서울 것이 없는 무적의 영웅 -

 

마사코와 스바루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를 보며 마사코는 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 이제 다음 시간대로

 

이게 대체 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 마사코 씨.

 

다 알잖아. 스바루가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 지 다 알잖아.

 

- 미래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건.

 

마사코는 핸드폰을 크로스 백 안으로 거칠게 집어넣으며 스바루가 돌아간 아파트로 달려갔다. 자신과 지금부터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마사코는 자기 자신이 아이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방치하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아파트로 가서 스바루를 구하자. 마사코로 부터 아이를 구하자. 스바루의 엄마가 숨이 찰 때까지 달린다.

 

 

 

<옛집>

벌써 두 시간째이다. 미코는 제 허벅지를 두드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저 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걸까. 전철을 타고 도착한 오와히라 마을은 작고 소박한 동네였다. 관광 명소나 커다란 백화점 하나 없는 마을.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이제 슬슬 해가 질 시간이다. 스바루는 정처 없이 자신의 옛 기억들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스바루가 뒤를 돌아본다. 미코는 손을 흔들며 더 돌아보라는 식으로 고개도 함께 끄덕였다.

역시 우울증은 도통 모르겠다. 미코는 그런 얕은 농담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릴 적 남자아이들에게 고무줄이 잘리는 기억이나, 작은 기모노 인형을 모으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노랗게 물이 든다. 제법 감상이 있는 마을이다. 문득 온천에 가고 싶어졌다.

 

돌아가요.

 

벌써?

 

스바루가 노을을 가리킨다. 미코는 미심쩍은 듯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기지개를 폈다.

 

됐어. 피곤하기도 하고, 가려면 내일 돌아가.

 

그럼 어떻게.

 

미코는 지갑이든 주머니를 보란 듯 툭툭 두드렸다. 학생 한 명쯤 재워줄 돈 정도는 가지고 있다. 정말 볼일이 끝난 걸까. 미코는 뉴스에서 보도되던 여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원 대합실에서 조용히 허리를 숙이던 여인.

 

엄마는 안 찾아?

 

엄마 찾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에요.

 

그럼?

 

그냥 만날까 해서요.

 

미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사람들이요. 날 지켜준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스바루는 잠잠이 난색으로 물드는 햇살 사이로 잠겨갔다. 입을 열고서 말을 한다. 그것은 가까운 누구도 듣지 못했을 이야기일 것이다. 가장 가까운 자기 자신조차 외면하려 한 이야기.

 

어릴 적에 겨울이 되어서 얼어붙은 호수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누나 한 명을 만났는데

그 누나가 절 살렸거든요.

 

뭘 하려 했는데?

 

어둡거나 슬퍼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빛 탓이었는지. 햇살 탓이었는지. 한참 동안 빠진 감상 탓이었는지. 소년의 얼굴은 개운해 보였다.

 

죽으려고 했어요.

차가운 겨울 호수에 빠지면 정신을 잃고 익사를 한대요.

그래서.

 

소년 너머로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땅거미가 고개를 든다. 사람들이 다들 집으로 돌아간다.

 

아프지 않게 죽으려 했어요.

 

모두 집으로 가는데 이 아이만은 어디로 가려 하는 걸까. 미코는 이런 종류의 환자를 다루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하였다. 스바루의 얼굴이 너무 밝아 허튼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젠 괜찮다느니 하는 시답잖은 위로 같은 것들. 미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 가득히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나간 일이니 됐어.

배고픈데 밥이나 먹자.

뭐 먹고 싶어?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른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도통 알 수 없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의 가운데서 두 사람은 옛집의 거리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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