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영화 작품에 관하여.

 

1. 적당한 영화를 찾지 못했다. 오마주를 명시하지 않는 작품에서, 누군가의 영향력을 발견해내는 것은 내게 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길고 사람은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기에, 어떤 사상과 표현이든 누군가의 독보적인 공로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시를 받은 것과 스스로 깨우친 것을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결국 알아보기 쉬운 개인의 특징적인 표식을 이용하기 마련인데, 그러면 결국엔 ‘미로’나 ‘도서관’이 나오는 작품은 죄다 보르헤스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딱지를 받게 된다. 나는 이 사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독창성이 부정되는 미래 세대에겐 물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느닷없이 데포르메당하는 보르헤스에게조차 부당하다. 나는 그보다는 좀 더, 그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을, 공통으로 반영하는 영화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적당한 영화를 찾지 못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남의 작품에서 누군가의 영향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우리에게 ‘독창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모든 미로는 보르헤스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모든 미로가 미노타우르스 신화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처럼 모든 영향력이 뒤섞인 결과물 속에서는, 어떤 특징적인 ‘표식’이 방향을 잡아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누군가의 표식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연장선에 놓을 수가 있다. 관점을 달리해서 보자, 나는 심지어 ‘조커’에서조차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조커’란 올해(2019) 개봉한 워너 브라더스의 영화를 말한다.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관람한 지 아직 얼마 안 돼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탓도 있다. 지금이 12월인데, 10월 초에 보았다. 굳이 자세히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영화 얘기가 아니라 보르헤스 얘기를 하려는 것이니, 기타 영화 외적인 부분은 모조리 창작해도 좋겠다. 이를테면 영화감독의 이름을 피에르 메나르로 하자.

 

2. 피에르 메나르는 알다시피 그 유명한 『돈키호테』의 저자다. 그는 자신의 환상이 세간에 존재하는 무언가와 똑같은 형태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뒤늦게 파악한 사람이다.1) 그는 세르반테스가 가진 ‘특징적인 표식’을 상대로 완벽한 패배를 겪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아무튼 그는 예술가였으니까, 자신의 실패를 다시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해볼 마음을 먹는다. 여기에서 ‘조커’라는 캐릭터가 행사하는 존재감이 의외로 컸기에, 피에르 메나르는 종국에 배트맨의 레퍼런스를 빌려오기로 결정한다.

나는 지금 배후의 사정을 직접 밝히기가 껄끄러워 이렇게 여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조커’가 보르헤스 영향하에 탄생했다는 주장은 조심스럽다. 알려진 대로, ‘조커’는 시사회에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압도했고, 다시 대단히 많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찬사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중 영화와 보르헤스를 연관지은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서로 이해받지 못하는 타자와의 해후’라는 멋진 표현을 써낸, 카프카의 견해이다. 그는 이 비평문에서 보르헤스와 더불어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조커’는 실은 이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보르헤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피에르 메나르가 영화를 찍게 된 동기와 결부되어 대단히 많은 장면마다 자기 단편들의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내가 찾아서 옹립하고 영화 해석의 열쇠로 내세운 주제(피에르 메나르의 실패)에 대해 여러분은 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낱 코믹스의 빌런이, 피에르 메나르의 주제와(그리고 보르헤스와) 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당연히 상관이 있다. 조커라는 캐릭터는 대단히 다채롭다. 그것은 다년간에 걸친 공동작업물이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서 처음 출몰하여 배트맨의 시시한 악당으로 인용되었고,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와 팀 버튼의 ‘배트맨’(1989) 등 쟁쟁한 재창조 작업을 통해 주인공 배트맨에 버금가는 인지도와 상징성을 갖게 되었으며, 인제는 오히려 배트맨이라는 시리즈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 하나의 캐릭터로서 독립적이고도 독특한 생명력을 확보했다. 피에르 메나르는 조커가 거쳐온 수많은 ‘조커들’에게 주목했고, 그것들이 서로 복제되면서도 조금씩 다른 부분들을 제각기 내포함을 발견했으며, 결국에 첫 모델과 마지막 모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특히 복제를 거듭하면서 얼마나 ‘거대한 존재’로 발전했는지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거장이 되고 싶었던 피에르 메나르에게는, 이것이 가장 매력적인 구석으로 보였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주무르고 불멸로 남고자 했던 그의 집념이, 빛나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미완성작 『돈키호테』처럼 완전히 ‘0’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독창성을 100% 발휘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작품에 독창성을 ‘20% 정도’ 섞어 변조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마치 굴복하듯이)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피에르 메나르는 이 캐릭터가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매우 적합하고,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장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 이 도발적인 작품을 만약에 당신이 모른다면, 그것이 현대를 출발지로 하여 17세기 세르반테스 作 『돈키호테』의 원형에 닿으려는 노력이었으며,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사실만을 알아두자.

 

3.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은, 피에르 메나르가 『돈키호테』의 실패 이후 극단적 허무주의자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극단적이냐면 그는 일부러 쓸모없는 일에 열중할 지경이었다. 『돈키호테』의 ‘해설서’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분들에게 그의 논리를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는 영생하는 허무를 지배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다. “모든 가치는 시간에 풍화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는 아예 처음부터 가치가 부존재하는 일,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는 말’을 자신의 『돈키호테』에 다시 달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어느 날 아르헨티나에서 웬 삼류 작가가 피에르 메나르를 추모하며 앙리 바슐리에 부인을 공격하는 글이 발표됐던 것이다.

이 ‘해설서’는, 허무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가치 판단을 쏙 빼고 있는 사실만 나열한 것이었으므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피에르 메나르는 그것이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지 미리 그 글에서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로, 심지어는 반박을 너무나 완벽하게 차단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가장 의미 있는 평론은 안타깝게도 피에르 메나르의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었다. 즉, ‘풍요로운 독서’ 운운하며 이제껏 여러 번 재발견돼 왔고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시간의 지층 속에 퇴적될 왜곡된 교훈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피에르 메나르는 수 년에 걸쳐 자신의 실수를 재검토했다. 결과적으로, 지금껏 그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사상을 매체로 전달받을 때, 이처럼 그 습득 과정에서 피치 못할 변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진하게 100% 온전한 생각을 전달해 버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왜곡되고, 도달된 인식은 사실상 자신의 본래 생각과는 어긋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처음부터, 20%가량이 왜곡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혹은 80%가량은? 그렇다면 상대방이 그것을 맞받아 꼬는 도중에, 거꾸로 실타래를 깨끗이 풀어버리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피에르 메나르는 바로 이 효과를 노리고 적절한 표현의 수단을 찾아다닌 것이며, 앞서 말한 이유에 더불어 자기주장을 조금 더 노골적이고, 덜 지능적으로 담아낼 ‘조커’라는 코믹스 빌런에게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내가 제시하는 해석을 따라, ‘조커’ 이면에 담긴 피에르 메나르의 진의를 감상해보도록 하자.

 

4. ‘조커’의 주인공 조커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조커의 극중 이름은 아서 플렉이다. 그는 흥분하면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와서 주체하지 못하는 신경병을 앓고 있다. 별로 중요한 설정은 아니다. 단지 해당 배역이 배트맨의 악당을 모티브로 하였음을 알리는 특정한 표식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그의 꿈이 더 중요하다. 아서 플렉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남을 웃기지만 스스로 불행한 어릿광대.’ 수많은 조커를 거쳐서 다시 위고의 『웃는 남자』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조커의 외관적 고립은 그윈플레인의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중간에 거친 무어의 영향력이 반영된 결과이다. 밝혔다시피, 그는 『킬링 조크』로 조커의 이야기에 기념비적인 기여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어의 다른 코믹스 『왓치맨』를 첨언할까 한다.

여기서도 ‘코미디언’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통찰력은 비범하나 거꾸로 반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이다. 그게 추악한 사회에 대한 즐거운 풍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는 시대와 함께 변화한 추악함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웃으며 죽는다. (이 점에서 흥분한 군중과 마침내 합일을 성취한 우리의 ‘조커’가, 무어의 ‘코미디언’에서 한층 진일보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코미디언의 고립은 그윈플레인의 고립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엄연히 ‘자기 인식’의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도 자각하지 못한다.) 『왓치맨』에서는 이 성취를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서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지?’라는 농담 비슷하게 ‘코미디언은 누가 웃기지?’라는 질문을 초반부에 배치해 두고 있다. 이러한 성찰은 2019년 판 ‘조커’에 그대로 승계되어, 아서 플렉이 자기 코미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서 플렉은 코미디로 남들을 웃기면서 사회와 연결되고 싶은 존재이다. 다만 그에겐 재능이 없다. ‘코미디로 웃긴다’는 것이라 함은, 곧 ‘비정상’에 대한 과장과 깔봄을 통해서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행복과 호의에서 우러나는 웃음과는 전연 다르다. 그러나 아서 플렉은 코미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반응으로 쏟아지는 이 필연적인 ‘경멸’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탓에 스스로 고립되고 말았다.

아서 플렉이 농담의 포인트를 짚지 못하는 장면을 한번 보자. 그는 다른 코미디언의 유머를 경청하며, 수첩에 내용을 열심히 필기한다. 하지만 항상 아무도 웃지 않는 장면에서만 웃는다. 정작 남들이 웃는 대목에서는 웃지 못한다. 상담을 받을 때 화면에 스치는 유머 노트에서 우스운 재료를 발견하기 힘든 것도 똑같은 맥락의 정황 증거이다.

이것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된 논쟁거리가 되었다. 사회적 억압에 짓눌리는 역할로 관객들의 공감을 사야 하는 주인공이, 일반 사람의 보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지적 불구처럼 행동하다니? 이것은 신경성 웃음 발작을 지닌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주인공이 당하는 멸시와 수난이 자칫 정당화될 만한 위험을 무릅쓰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 애크로이드는 이러한 각본을 두고 “아서는 영화 내내 지능의 결함을 지참하여 우리들은 도달할 수 없는 특수한 경로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 감독도 실은 그를 조롱하고자 했던 것인가? 조커는 실로 ‘어릿광대’에 불과하다.”라는 말로 극렬히 폄하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네흘류도프상의 ‘수상자 변경 사건’에 이바지했던 심사위원 R. 레프는, 영화가 사회를 짓누를 무게가 주인공 아서를 일반 대중 사이에서 ‘끌어내려 버린’ 탓에 여실히 ‘가벼워지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사회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비평하려 들면, ‘조커’는 다분히 초보적인 구성과 핵심 캐릭터의 모순성으로 인하여 별 볼 일 없는 작품으로만 남게 된다. 그러나 ‘조커’는 원본과 복사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피에르 메나르의 당시 관심사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는 사실 사회적인 메시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J. D.2)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평소 방 안에 틀어박혀 눈 먼 상태나 다름없이 지내왔으므로, 아마도 자신의 존재밖에는 중요성을 인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차단은 그가 허무주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영생을 추구했다는 괴상한 이야기를 설명해 준다. 따라서 ‘조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불멸성을 이해했던 방식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피에르 메나르의 이웃에 살던 사람. 워드스미스 대학에서 ‘킨보트’라는 이름으로 문학 강의를 했다.

 

5. 피에르 메나르는 지적인 글을 추구했으되, 너무 지적인 것은 경계했다. 『돈키호테』의 해설서를 통해 ‘완벽한 작품’은 결코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보르헤스가 ‘무한과 동의어로 다뤄지는 작가’라며(‘무한과 동의어인 작가’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위상을 평가했던 점을 참고했다. 알다시피, 셰익스피어는 사후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가 중 하나이다. 그 인기의 비결은 여러 가지가 꼽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이다. 구체적인 상징성을 가지는 캐릭터─셰익스피어의 햄릿, 로메로의 좀비, 여러 신화의 신들─는 그 상징만 공통한다는 인식이 있으면 자유롭게 변조해 유동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캐릭터 창조자의 이름은 후대의 은유에 빌붙어서 오래도록 수명을 유지하게 되고, 그것으로 원전의 기억도 가치롭게 보존되면서 점차 불멸에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피에르 메나르가 좋은 캐릭터를 짓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좋은 캐릭터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메나르에게는 그 장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실패를 여기서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존에 ‘캐릭터’란 것에 대한 관심이 일절 없었고, 오직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라는 한 가지 테제를 위해서 작중 인물을 사용하던 그였다. 이를테면 피에르 메나르의 예술관은 ‘지금 내 말은 전부 픽션이다.’라는 패러독스의 실존 문제와 닮았다. 그는 ‘가능하다’는 것을 작품 속에서 증명했지만, 증명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가능하다’는 증명을 보아도 사람들은 여기에 공감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그가 추종한 작가가 보르헤스인 것만 알아도 충분할 것이다. 악명을 상속받은 것은 그의 선택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피에르 메나르도 큰 불만이 없을 줄로 믿는다.

이와 같은 약점을 본인도 잘 인지하고 있었기에, 피에르 메나르는 차기작으로 ‘패러디’의 형태를 시도했다.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를 편리하게 재가공하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패러디─혹은 n차 창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로서 불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강자들을 압도해야만 했다. 즉, 지금까지 조커에 덧대졌던 표식들을 뛰어넘는, 새롭고도 구별되는 ‘특징적 표식’을 창조해 달아야 했다는 점이다. 피에르 메나르는 자신이 여기서 실패해 S.A.C.3)에 빠지거나 다만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계기 역할에 그칠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 시대가 그를 도왔다. 21세기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학문이 보급되고, 예술의 자유가 인정되는 시대였다. 더불어 피에르 메나르는 연이은 실패로 잊힌 무명의 작가이자, 이제 갓 데뷔하려는 감독이었다. 누가 그에게 기대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그가(우리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였던 그가!) 어떤 대단한 걸작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조커’에 특별한 표식을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는 이 작품으로 일반 대중의 우상이 될 수 있었다!

 

3) Stand Alone Complex; 원본 없이 복사본만이 돌아다니며, 이들 모두 자신이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현상.

 

6. 즐거운 자기 예언인데, 아서 플렉은 영화 중에 웨인 사 직원 3명을 살해함으로써 빈민층의 영웅이 된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아서 플렉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중 ‘광대 분장을 한 자에게 살해당했다’라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같은 열차 칸에 탑승했던 여자가 아서의 모습을 증언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다면, 그녀가 죽은 세 은행원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을 것이다. 토마스 웨인이 시장 선거 출마를 앞둔 시점에 그런 직원들의 죽음을 공개 추모한 것과는 모순된다.

따라서 신원 불명의 광대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는, 순전히 현장 근처 cctv에 아서 플렉의 분장이 잡혔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단순히 ‘상류층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광대를 영웅시했다는 것이 된다. 토마스 웨인의 빈민 멸시를 불러온 이러한 묘사는 과연 정당한가?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피에르 메나르는 정치적인 동기로 작품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아서 플렉이 머레이 쇼에 출연할 때 읊은 대사를 기억하라). 나는 심지어 이것조차 자기 예언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가 개봉된 이래 오갔던 관객들의 설전으로 완성되며, 관객들이 직접 자기 빗댐의 대상으로 굴러떨어지게끔 만든, 피에르 메나르의 또 다른 장난이다.

이 장난을 설명해주는 것은, 우습게도 ‘조커’의 가치를 두고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화에 쏟아지는 찬사가 전부 대중적 호감에 영합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에 불과하며, 실제로 우리가 관람한 것은 진부한 삼류 복수극이라고 한다. “단지 ‘성공했기 때문에’ 환호하는 것이, 작중 피에로 가면을 쓰고 줏대 없이 몰려다니는 얼간이들과 뭐가 다른가? 이 한심한 작품에 실제로 꼽을 만한 독창성은 하나도 없다.” 통렬한 비판이며, 반박할 방법도 없어 보인다. 심술궂은 ‘Echo’라는 유저가 지적했듯이, ‘조커’를 낱낱이 해체해 보면, 그것은 기존의 존재들에 의존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잠깐만, 그러면 피에르 메나르는 이 관점에 동의하고 있었단 말인가?

‘성공’이라는 ‘유일한 표식’에 관한 자학적 예언이라도 끼워넣어, 작품에 구차한 문학적 향취나마 덧대보려 했던 것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작품을 해석할 때는 언제나 작품이 담고 있는 다른 텍스트를 참고해야 한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텍스트는, 작품의 창작자 바로 자신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피에르 메나르는 자기 작품의 가치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가 ‘코미디’를 잘 아는 사람이었단 것을 기억하자. ‘조커’를 두고 설전하는 그 어느 쪽이든, 모두 ‘조커’ 속에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찾게 하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유머 감각이었다. “모호함은 곧 풍요로움이다.” 언젠가 그가 말한 바 있듯이. 그의 작품은 너무나 풍요로워, 마치 내면에 한 세계 전체를 품은 것처럼 모든 충돌과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의 인도를 따르다 보면 우리는 결국 다른 길을 택한 어느 한 편과 겨루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싸움판’은 가장 재미있는 코미디 무대 중 하나이다.

 

7. 비록 ‘조커’의 성공에는 관객의 몫이 지대하지만, 그들이 직접 완성할 무대의 초안을 제시한 것이 다름 아닌 ‘조커’라는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조커’의 성공은 특유의 논쟁성에 기인한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파급력을 우려했다. ‘조커’는 물론 피에르 메나르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거대한 농담이다. 적어도 80%에서 20%의 분량에 관한 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들이 무언가 불쾌한 사건이라도 야기하는 게 아닐까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그런 자들이 피에르 메나르의 역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시야를 너무 얕잡아 본 생각이다. 피에르 메나르는 당연히 그런 자들의 존재를 예측했고, 오히려 작품의 가치를 뛰게 하는 데 이용했다. 알다시피, 영웅은 난세에 나오는 법이고, 걸출한 연구 성과는 학계가 ‘죽었다’는 평가를 들을 때 나오는 것이며, 명작은 그 영화의 상영 여부가 불투명할 때 탄생하는 것이다. 성공을 위한 충분한 파급 효과를 위해서, 피에르 메나르는 의도적으로 사회를 혼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네흘류도프상의 박탈이었고, 그리하여 ‘조커’는 오히려 명예로운 수상작들에 버금가는 흥행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똑똑했던 메나르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코미디는 주관적인 거예요, 머레이. 잘난 여러분 시스템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무엇이 웃긴지 안 웃긴지를 결정할 수 있죠.” 너무 당연한 소리를 심지어 동어 반복하고 있다. 나는 차라리 둘 중 한 문장은 빼는 게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피에르 메나르는 이해를 돕고자, 평소보다 ‘덜 지능적인’ 작품을 골몰하고 있었으므로, 노력이 다소 과해서 얼마간 적당선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괜찮다. 대다수 관객들은 오차 범위 이내에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8. 하지만 이 같은 피에르 메나르의 메시지에도 불구, 여전히 ‘조커’에 쏟아지는 찬사에 회의를 표시하는 자들이 있다.

우선 제임스 와일드를 위시한 마들렌 파의 비판이다. 그들은 ‘조커’가 ‘피에르 메나르’라는 존재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평가 절하한다. 추측건대, 메나르가 스타일을 바꾼 데 대한 학술적 배신감에서 기인한 듯싶다. 이러나저러나 여러분들은 마들렌 파가 ‘두꺼운 장편소설’이 아니고서야 칭찬한 전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들의 관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마 러닝타임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불어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는 자기가 코미디를 이해하듯이,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속성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쨌건 ‘놀러 왔으리라’는 사실이다. 오롯이 자기 표현을 위해서 작품의 분량을 고집하는 것은, 자기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착각이자, 관객의 시간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처사이다. 그들의 시간은 비록 여가 시간일지언정 똑같이 소중하다. 피에르 메나르는 관객들이 자기 작품으로 인하여 고통받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작품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작품이 창조주를 떠나 그 자체로 독립해 존속하기를 바라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마들렌 파는 넘어가자.

둘째로, 영화에 교훈이 없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반론할 가치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 영화가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식에게 ‘해피happy’를 강요하는 아서 플렉의 어머니와 뭐가 다른가? 피에르 메나르가 창조주로서 자신의 작품에 가졌을 애착을 되새겨보길 바란다. 그리고 어쨌거나 영화에는 교훈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힘을 겨루는 과정에서, ‘조커’가 구축한 세계─중 일부─를 산산히 파괴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도 한 사회를 뒤집을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9. 말이 나왔으니, 랜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아서 플렉에게 권총을 쥐여준 그 친구이다. 사람들은 그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아서를 경멸한다고 단정한다. 그리하여 영화 시작부터 두들겨 맞은 아서에게 총을 구해다 주고, 나중에 그가 자기에게 총을 구해 달라 했다는 거짓말을 하여 아서를 곤궁에 빠뜨렸다는 음모를 펼친다. 물론, 그런 가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부디 ‘상호 텍스트’를 기억하자. ‘조커’는 『킬링 조크』의 재해석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한 텍스트 상호 간 맥락을 고려해서만 분석을 시도할 수 있다. 잘 보시라.

『킬링 조크』의 핵심 테마는 바로 이것이다: “‘비정상’이라는 것은 그럴 듯한 허상에 불과하며, 모두 ‘단 하루의 재수 없는 날’만 있으면 자기처럼 광기에 물들 것이다.”라는 조커의 말. 훌륭한 주제이나, 다만 『킬링 조크』는 이것을 조금 아쉽게 다루었다. 작중 조커의 행동거지가 이미 ‘재수 없는 날’ 탓으로 돌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길 희망하는데, 자기가 ‘흥행에 실패한 코미디언’이라고 해서 ‘범죄 집단’의 ‘범죄 모의’에 끼어 ‘한탕 해 보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지는’ 않은 것이다(물론 놀란의 배트맨 연대기가 계승한 바와 같이, 그의 과거사는 전부 미치광이의 한 가지 ‘조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작품 속 메시지의 표현 방식을 지적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무시한다). 따라서 『킬링 조크』 속의 조커는 스스로 ‘비정상’의 개념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주제 의식을 흩뜨리면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우리의 ‘조커’가 개연성을 더 낫게 다듬는다. 피에르 메나르는 ‘비정상’의 허상성을 폭로하기 위해서 꾀를 짜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작중의 사회를 통째로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는 말했다시피 주인공 아서가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는 아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가 부모에게 사납게 제지당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조커’에서 사회의 비정상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소재이다.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인가? 나라도 아서와 같은 일들을 겪었다면, 어린이 병원에 공연하러 갈 때 총을 지참했을 것이다. 아서가 실수로 총을 떨어뜨렸을 때, 어린이들의 반응을 유심히 보라. 그들은 아서가 재치 있게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혹은 간절한 미소를 띤 채, 손가락을 입술에 댈 때도, 정색한 그대로 침묵을 지킨다. 엄중한 심판관들의 얼굴이다. 나는 거기서 화형대 앞에 선 베르나르도 귀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배되는 사회의 비정상적인 규범은, 순수성을 감히 의심할 수 없는 주인공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리고, 심지어는 랜들에게까지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 (음모론자들은 랜들이 정신 결함자인 아서의 돌발 사고를 노리고, 장전된 권총을 줘 놓고, 나중에 본인에게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자의로 지껄였다고 주장한다. 랜들이 자살하고 싶었다면 타당한 추론이다. 그러면 나중에 그가 아서의 집을 찾아간 일도 설명되니까.) 이처럼 개인에게 강압적이고 보편 윤리에 경직된 사회를 묘사함으로써, 관객들은 피에르 메나르가 구축한 사회를 부정하게 되고, ‘비정상’은 없어져야 한다는 사상으로 점차 이끌린다. 일반적 동정심에 기반한 심리 효과를 탁월하게 활용한 것이다. 더 나아가 ‘조커’ 단독으로는 하찮은 조무래기 악역이었을 랜들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작품과 관객의 기초 관계마저 이미 역전되었음을 깨닫는다. 즉, 작품 스스로는 깨우칠 수 없었을 진실에 대해, 관객이 오히려 작품 바깥에서 도움과 교훈을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 마지막으로 상대할 비판은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것이 악랄한 Echo 씨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Echo 씨는 이상 언급한 ‘조커’의 모든 장점들이, 이미 여러 번 선점된 바 있는 ‘재활용 쓰레기’라고 말한다. 그 표현의 저급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것은, 같은 장점을 지니고도, 지금껏 ‘조커’와 같은 반향을 이끌어 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인즉 피에르 메나르의 ‘조커’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글과 같은 결론을 무수히 여러 번 추출해 낼 수 있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왜 이제까지 이러한 리뷰가 한 번도 작성되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의심스러우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려고 한다.

우리는 귀족이 인사하는 방식을 안다. 모자에 손을 살짝 갖다 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귀족을 모방해 남들을 웃기는 광대가 있는데, 그 역시 모자에 손을 갖다 대는 짓으로 인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둘을 다르게 본다. 귀족의 인삿짓에는 그만한 품위가 있고, 심지어 작은 두려움을 주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귀족에게는 누군가를 실제로 압도할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4) 그러나 똑같이 차려입었어도 광대의 인삿짓은 어딘가 모르게 경박하며, 어색하고, 다소 겉멋을 부리는 티가 난다. (그가 흉측하게 생겼다면, 이런 인상은 더 심해진다.) 이것이 바로 베냐민이 주창한, ‘아우라’라는 개념의 유무이다. 특정한 예술 작품에는 단순한 복제본에 존재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비록 얼마간의 시간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위엄을 조금 깎았을지 모르나, 아서가 화장실에서 춤을 출 때, 보고 듣던 모두가 전율했음을 나는 안다.

Echo 씨가 열거한 ‘복제 씬 리스트’는 길게 이어지지만, 설령 그 장면들이 복제인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고작 ‘하나의 흠결’을 전체의 결함으로 부당히 확대시키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불과하다. 나는 Echo 씨의 리스트 중 맨 처음의 것만을 여기에 반박해 두기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이 주장의 신뢰 가치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코멘트 다섯째 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의 연인이 사실 망상이었다는 설정은, 너무나 안일하고 기지도 번득이지 않는, 기계적 장르 패러디의 일환에 불과하다.” 확실히, 그 부분은 선배 감독이 벌써 ‘파이트 클럽’(1999)에서 비틀어 본 선례까지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Echo 씨는 기존의 존재를 엮는 작업의 난이도를, 그 가치로 그대로 치환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외관의 형태가 아니라, 피에르 메나르가 그 활용으로써 의도한 효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서 플렉이 자신의 연인을 만들어낸 행위는, 그가 그의 어머니와 동일한 망상벽을 앓고 있다는 신호로서 기능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또한 하나의 복사본에 불과하다. 작품의 명시적인 주제 표현이며, (오히려 Echo 씨의 지적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치는,) 수준 높은 자기 풍자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 망상이 아서 플렉이 가졌던 또 하나의 가능성이며, 어머니의 망상벽이 확인됨으로 인해 아서의 자아가 완전히 폐쇄되기 전까지는 두 가능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는 해석을 한다. 그가 행복해질 수도 있었던 선택이 ‘그녀의 방문 앞에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끌어 쓴 문학적 표현만을 위한 비평이 아닌가 심히 의문스럽지만, 여하튼 관객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란 결국 존재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씩을 선택해 그럴듯하게 엮어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에디 애너벨도 이 해석을 통해서 사실은 아서 플렉이 사랑받는 것이 진실임에도, 그의 정신적 결함을 이유로 영화상의 결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추측한 바가 있다.

다만 망상 속의 여인이 코믹스의 ‘조커 부인’을 의미한다는 추문은 무시해도 될 것 같다. 가능한 가능성에 너무 치중하느라 한꺼번에 모든 해석을 취할 수 없는 관객의 한계를 벗어나지 말자. 거장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이 결국 여러분 3차 창작가들의 잡탕 놀이터는 아니다.5) 이는 완전히 별개인 무어나 놀란의 조커를 가져와 혼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조커가 스스로 입을 찢은 계기로서 설정한 그의 부인은, 즉 조커가 가장으로서 책임지는 인물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는데, 이 역할은 피에르 메나르의 영화에서는 그의 어머니 페니가 대체하고 있다. 자, 비록 내가 주장한 대로, ‘의도한 왜곡’을 되꼬아 바로잡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인물 개념을 뒤바꾸고, 명백한 장면의 의의를 멋대로 교체하는 행위는, 지양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원작자를 무시하는 악의 어린 ‘조롱joke’으로 비춰질 것이므로!

 

4)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 떠오른다. 칼리굴라는 어느 날 원로원 의원 한 명과 대화하다가 크게 웃었다. 의원이 왜 웃는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게 떠올라서 그랬소.” 칼리굴라는 확실히 자기만의 특징적인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수에토니우스가 그랬거나.

5) 하위 문화에 대한 멸시. 스노비즘. 그 비슷한 어휘를 활용해 이 대목에 쏟아지는 비난에 조금 답한다. 요컨대, 일반 상식적인, 자연 법칙에 올바른, 언어의 보편성에 버금가는 최소한도의 논리만은, 이야기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양한 세계관이 혼재된 코믹스에서 각 ‘유니버스’들을 활용하기 위해, 위급 중에 다른 세계선으로 홀랑 넘어가 편안히 조상들에 대한 사담이나 함께 나눈다는 이야기는, 분명 ‘존재하지만’, 분명 ‘희한하며’, 작가의 ‘설정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언급된 ‘놀이터’에서는 항상 그림자처럼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1. 자신의 아버지라고 믿었던 토마스 웨인에게, 아서 플렉은 ‘패배자’ 소리를 들으며 내침당한다.

놀라운 장치이다. 나조차 지금 깨달았다. 그것은 ‘원작자를 무시하는 악의 어린 조롱’에 대한 피에르 메나르의 반응이다.

 

12. 내 작은 인용들이 모여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보다 더 뛰어난 서사를 자랑하게 될까 겁난다. 부분 부분의 단속적 아이디어가 연속된 하나의 장면보다 결국 뛰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특히나 ‘조커’처럼 작품 속에 사회가 포함되는 경우, 시종일관 지적인 전개만을 보여줄 순 없다. 인간들의 형편없는 개연성이 첨가되는 탓이다(이것은 장편소설이 잘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보다 뛰어나게 되는 것은 내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므로, 적당한 지점을 골라 이렇게 필요 없는 단락을 추가 삽입하여 균형을 맞추겠다. 여러분은 내가 ‘조커’ 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지겨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 또한 다 알고 있을 ‘조커’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 지겹다. 부디 쌍방과실로 넘어가자. 모든 것이 결국은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을 돋보이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13. 나는 지금 휴대폰 메모장으로 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Echo 씨의 코멘트 수신을 알리는 팝업이 떴다. 랜들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한다. 랜들이 경찰의 지시를 받아, 아서의 수상한 점을 캐 보기 위하여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 이거야말로 대단한 음모론이다! Echo 씨는 자신의 환상이 그저 진실이길 바라면서 떼를 쓰고 있다. 아서 플렉이 상상 속 연인과 이어졌으면 하고, 랜들이 평범하게 악역이라서 그를 탓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해피 엔딩 클리셰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선한 음모론을 도입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발 자기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처럼 작품의 질적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14. 사람들이 세계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귀가 채찍을 인식하듯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문학자가 지구를 인식하듯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길이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정답은 없다. 정해진 답이 없을 때, 우리는 각 길의 가치를 비교해 승부한다. 최소한 각자가 보기에 다른 길보다는 가치 있는 선택이 있다. 그것은 남들과 대립하여 공멸하는 선택지를 피하는 과정에서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그것이 세계가 지금까지 이어진 방식이고, 우리가 남아 있는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운명론자들은 시간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다. ‘조커’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 예시로 사용하면, 이를테면 ‘조커’의 ‘반향’ 자체는 이미 필연적인 시대의 내정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금, 은 등 다섯 가지 시대로 정한 것과 비슷하다. 단 그리스 사람들은 인류의 퇴화를 가정하지만, 운명론자들은 무한의 승리를 가정한다. 아무튼 연대적으로 따졌을 때, 번화의 시기라면 특이 단계에 반드시 특정한 깨달음이 뒤따르고, 퇴화의 시기라면 특정한 불화가 뒤따른다는 것이 그들 운명론의 골자다. 따라서 ‘조커’가 탄생한 현대는, ‘조커’가 될 수 있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이 반드시 함께 범람하며, 불확정 상태의 오비탈 모형처럼 서로 근소한 차이를 두고 선‧후행한다. 그리고 ‘조커’는 그들이 하나씩 놓치고 있었던 요소들을, (‘선택받음’을 포함해,) 순전히 우연에 입각해서 집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우연은 필연에 의해 모여든 각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 결과이고, 따라서 ‘조커’는, (모든 것은,) 단순히 예견된 운명의 복제본에 불과하다.

이들의 주장은 이미 고려할 가치가 없다. 심지어 운명의 실재를 긍정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진작 내정된 추첨의 결과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렇다. 결국 운명이 우리 앞에서 직접 공연하지 않는 이상, 모든 ‘전율’(물론 ‘진짜 전율’을 뜻한다)은 복제본으로부터 탄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운명의 원본’이란, 쓸모없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것은 실제로 다른 훌륭한 선택지에 가려서 인지받지조차 못하고 있다. 명시해 두건대, ‘매립된 쓰레기’보다 ‘재활용 쓰레기’가 더 나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적어도 깨끗이 씻어서 우리가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커’가 재활용 쓰레기라는 소리는 아니다.

 

15. Echo 씨가 계속해서 반박 코멘트를 달고 있다. 나는 집중력에 혼선이 오는 것을 느낀다. 잠깐 인터넷 연결을 끊고, 그의 주장을 본질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논리를 찾기로 한다. Echo 씨는 ‘진실로 믿는 것 자체’가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니 플렉이 자기를 가정부로 고용했던 토마스 웨인과 연인 사이였다는 망상을 계속 고집한 것이, 결국 사람들에게 진실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나는 그가 자기 말의 모순성을 깨닫고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페니 플렉은 토마스 웨인의 아이를 뱄으며, 그것이 아서 플렉이고, 다시 말해 장차 배트맨이 될 브루스 웨인과 조커가 배다른 형제지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토마스 웨인이 페니 플렉과의 사이를 끊임없이 부정하며, 그녀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관심을 강박적으로 끊었던 사실은 왜 간과하는가? 고담 시의 비전을 위한 그의 망상 또한, 진실이고, 그렇다면 아서 플렉은 페니에겐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며, 토마스 웨인에겐 아니라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서’라는 하나의 존재가, 남들의 인식 여하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Echo 씨의 이러한 비평을 더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어렵고 두껍기까지 한 코멘트를 미처 다 읽지 못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읽지 않았어도 내용은 알 수 있다. 인제 그를 완벽히 패퇴시켰으니, 그만 그를 차단하고, 이 불필요하게 길어진 글을 마무리 지어 보자.

 

16. 불쌍한 아서 플렉은 극중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도하지만, 당연히 실패하고 만다. 코미디의 본질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그에게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누군가 자신의 형편없는 코미디를 영상으로 담았고, 이것이 자기가 동경하던 코미디 쇼에서 방송으로 중계된 것이다. 그 영상은 열풍을 불러일으킨다. 아서 플렉은 모든 사람을 웃긴 주인공으로서, 그 코미디 쇼에 출연 제의까지 받는다. 그는 처음에 자기에게 쏟아진 멸시와 조롱에 당황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깨닫고 출연을 결심한다.

『왓치맨』에서 코미디언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전부 농담이야. 전부 농담에 불과해.”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전부 다 빌어먹을 코미디였어!” 여러분은 두 배우의 감정 연기 차이에 주목하길 바란다. 코미디언은 허탈감에 기인한 실소지만, 조커는 깨달음에 흥분한 목소리다. 나는 여러분이 알아차리지 못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은 피에르 메나르가 이전 ‘조커물’들과의 구별점으로서 영화에 각인하려 했던 진정한 ‘표식’이다. 그가 직면한 비판들을 모조리 뛰어넘고 정상에 우뚝 설 수 있게 해준 본질,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마침내 훌륭하게 밝혀진다.

아서 플렉은 끝내 코미디를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이 모두를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머레이 쇼’를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아서 플렉이 누구인가? 코미디로 사회와 연결되고 싶어 했던 존재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즉, 모두에게 자신과 똑같은 비극을 안겨 주어, 모두를 웃게 하는, 세계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향한 경멸이 타의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으되, 혼자서만 웃었던 『왓치맨』의 ‘코미디언’에서 얻은 장족의 발전이며, 아서 플렉이 정신적 결함을 가져야만 했던 이유와, 영화 내내 계속하여 암시되던 원본-복사본의 상징이 모두 설명되는, 맥락으로나 기능적으로나, 가히 최고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장면이다. 마침내 진정한 어릿광대로 각성한 조커는, 붉은 수트를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고, 이 열광은 ‘머레이 쇼’의 출연으로 모두에게 전파되어, 고담 시 전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런데 피에르 메나르가 누군가? 자신의 환상이 세간에 존재하는 ‘무언가와 똑같은 형태’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파악한 사람 아닌가? 그 유명한 『돈키호테』의 저자 아니던가? 조커가 품었던, ‘모두에게 똑같은 비극을’, 이라는 소원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꿈이었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조커에게는 브루스 웨인, 즉 ‘배트맨’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숙적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는 결코 ‘웃지 않는 남자’라는 것을. 어릿광대는 애초부터 꿈을 달성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불타는 도시와 망가진 경찰차 범퍼 위에서, 조커는 자기 앞에 몰려든 군중들을 향해 외친다. “이 패배자들!” 피에로 가면의 군중들이 환호한다. “너희는 모든 걸 잃었어!” 군중들이 다시 환호한다. 비평가들이 시사회에서 찬사를 보낸 또 다른 장면이다. 아서 플렉이 토마스 웨인에게 들었던 ‘패배자’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조커가 그들을 욕보이고 있음에도 불구, 군중들이 환호성을 올리는 아이러니로써 창작자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본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표현하였든, 결국 작품은 관객에게 지배된다. 그러니 대중적으로 성공해 봤자 개인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는 일응 그럴듯하며, 심지어 ‘조커’의 대중적 성공을 고려했을 때 시니컬하기까지 한 해석이다. 적어도 토마스 웨인의 대사와 연결짓는 시도는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 나는 밀란의 비평을 존중하며, 그에 기반한 작금의 해석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결부해 얻은 가치도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조커의 외침에 자조적인 감정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디 호아킨 피닉스의 배역 해석이 영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하시라.) 조커는 여기서 오히려 기뻐서 날뛰었는데,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이토록 열광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이 왜곡되고 있음을 알았고, 마침내 모든 인간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그 자리, 꿈에도 그리던 ‘사람들’로 둘러싸인 그 무대 한가운데에서 깨달은 것이며, 따라서 사회와의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비실존’의 영역에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그토록 환희롭게 외치고, 급기야는 춤까지 벌이게 된 것이었다.

 

17. 피에르 메나르가 허무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그는 이 싸움에서 마침내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조커’는 자신의 고독을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진리’로서 정의한다. 그것이 피에르 메나르에게는 ‘공허’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영구적 허무 앞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조커’는 모든 야욕 끝에 스스로를 잡아먹은 뱀, 또는 세계에 대한 그의 ‘항복 선언’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영원’이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피에르 메나르가 탄생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듯이. 모든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피에르 메나르는 자신의 깨달음을 영화에 녹여 냈던 것이고, 우리는 그의 지난 삶을 간접적으로 반추하며 그 무모하고도 열정적이었던 도전을 기리고 ─ 또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조심할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되던질 후세를 위해서, 피에르 메나르는 마지막 한 가지 묘수를 남겨 놓았다. 여러분은 기억해야 한다. 조커의 마지막 대사,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야.”의 참뜻을. 조커의 삶이 모조리 ‘조크’라는 사실을. 피에르 메나르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사상, ‘지금 내 말은 전부 픽션이다.’라는 테제를. 여기서 피에르 메나르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중 모든 개념은 ‘감독─작품’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 번 거꾸로 뒤집히며,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야.” 피에르 메나르가 진정 ‘조커’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8. 카뮈가 말하고 있듯이, 피에르 메나르의 ‘조커’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의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아직 이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고, 피에르 메나르의 의도에서 벗어나 조난당해 있다. 나는 이대로라면 파도에 똑같이 휩쓸리고 말 이 작품과 미래의 당신들을 중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니 시시한 실물을 모호함으로 감추는 것도 여기까지다.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로 하자.

‘조커’는 사회 변혁을 꿈꾸는 영화이며, 피에르 메나르는 유사한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점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적 표식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조커’의 관객들이 자신의 교훈을 ‘실천’할 것임을. 즉 (영화사史 측면에서) 여전히 같은 주제의 ‘반복’이되, 이제까지와는 다른 (현실 속에서의) ‘새로운 반복’을 탄생시킬 것임을. 그것이 바로 미래 세대에 하나의 ‘상징’으로 남고자 했던 피에르 메나르의 야심 가득한 선언이며, 지금까지도 자신의 방 안에서 가장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결과이다.

 

19. 피에르 메나르가 『돈키호테』의 해설서를 스스로 덧붙인 전과가 있기에, 오해를 막는 차원에서 밝힌다. 이것은 피에르 메나르의 글이 아니다. 나는 울산대학교 소속 학생 박부용이다. 지도 교수의 이름은 송병선, 스페인중남미학과에서 보르헤스를 가르치고 있다. 이 글의 이전 판본은 19년도 2학기 과제로 제출되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652 단편 드라큘라 ㄱㅎㅇ 2020.10.21 0
2651 단편 undoing 이아상 2020.10.21 0
2650 단편 무쇠인형의 복수 - 강철협객전 두영 2020.10.20 0
2649 단편 21세기 뮤지컬 로봇이 23세기까지 살아남은 것에 대하여 미믹응가 2020.10.20 0
2648 단편 아빠의 고향 키미기미 2020.10.20 0
2647 단편 이제 미래는 없다 붉은파랑 2020.10.17 0
2646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에필로그 키미기미 2020.10.15 0
2645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완)1 키미기미 2020.10.14 0
2644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14) 키미기미 2020.10.14 0
2643 단편 헬라(hela) sang 2020.10.12 1
2642 단편 삼송동 블랙홀 오피스텔 해수 2020.10.10 0
2641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13) 키미기미 2020.10.09 0
2640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12) 키미기미 2020.10.08 0
2639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11) 키미기미 2020.10.05 0
2638 장편 되감아요 스바루군, 돌아가요 마사코 씨 (10) 키미기미 2020.10.04 0
2637 단편 신의 목소리 키미기미 2020.10.03 0
2636 단편 머리 달린 여자 계수 2020.10.03 0
2635 단편 기분 나쁜 드와이트 박부용 2020.10.02 0
단편 피에르 메나르, 조커(2019)의 감독 박부용 2020.10.02 0
2633 단편 너희가 잠긴 심해 박부용 2020.10.02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