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너희가 잠긴 심해

2020.10.02 10:2310.02

쿵쿵쿵. 무슨 소리게? 천둥소리? 뭔가 무너지는 소리?

무너진다 하니 쓰는 말인데─ 이 모든 건 집을 너무 튼튼하게 지은 탓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앞으로 내가 이 말을 몇 번 반복하게 될 거다.

아무튼 그건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외딴곳, 아무도 찾을 이 없을 것 같았던, 산비탈 아래 우리 별장 문에서 울린 소리. 쿵쿵쿵.

비탈 정도가 아니라 완전 구덩이겠지.

이제 와서 이렇게 정정해 봤자 소용없다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구덩이의 존재 의의를 생각해 보시라.

어디, ‘남의 발목을 초대하고,’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비틀거리게 해서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 딱 우리 파티 꼴 아니야. 이거 쓴웃음이라도 짓고 싶은데 영 그럴 힘이 나지 않는군. 하긴 파티를 즐겼으니 당연한 일이지. 다 끝내고 드러누울 힘만 남겨뒀었단 말이야.

하지만 정말로 여기 오지 않고 집에서 선물이나 돌렸으면 좋았을 것을! 기껏 품 들여 축하할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바보같이 그걸 몰랐고 그 삯으로 이 병신 같은 별장 속에 갇혀 버렸다. 함정. 구덩이. 끔찍하게도 세상과 동떨어진 무대의 정 가운데.

쿵쿵쿵.

아, 그렇지. 아직 저걸 열어 주지 않았었군. 이해하시라. 작가는 자주 독자보다 앞서나간다. 그래서 까탈스러운 꼬맹이처럼 부주의하게도 주접부터 떨곤 하지.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가 다 정리되어 있는데, 딱 하나 어디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것만은 도통 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그리로 가지 말고. 현관은 이쪽.

집이 좀 복잡하긴 하지. 안 그래요, 여러분들? 우리 사업가 친구가 큰맘 먹고 지은 별장이라 그럽디다. 이 안에 자기 로망을 다 담았거든. 잘 봐, 저기는 당구대도 있고, 저쪽은 우리 넷이서 비우려면 한평생 걸쳐 마셔야 할 양주 장도 있지. 저 통로로 가면은 그 친구 취미인 목공 작업장도 있어요. 그러니까 별장도 이리 튼튼하게 만들지 않고 배겨? 하지만 자, 불평은 그만둡시다. 여기가 현관이니까.

참 허세는 거하게 부려놨어요. 그렇게 생각 중이지, 다들? 하지만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쓰겠다는데 뭐 어쩝니까. 내 자존심을 걸고 말하는데 정말 정직한 친구거든. 어찌 그따위로 단순하게 사는 인간이 돈을 벌었을까. 의심도 해 보고 물어도 봤지만 내가 알겠어요? 세상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는 거지. 아 알았어요. 이제 엽니다. 수다는 그만 떨 테니까 보채지 마쇼.

문을 열었더니 보이는 건─짜잔! 웬 거지 새끼였다. 아마 우리 별장의 위용을 보고 이끌렸나 보지. 옷은 다 헤졌고 머리는 며칠 동안 안 감은 듯했다. 냄새는 나도 모른다. 다들 취해 있었다고 내가 말했던가? 근데 우리가 왜 다 같이 현관으로 우르르 몰려갔을까? 아하, 난 알겠다. 다들 취해 있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는 기막히게 멋진 술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맹이는 아직 술잔을 들어 볼 나이도 채 안 돼 보였다. 우리는 으르렁거리면서 꼬마에게 쏘아붙였다. “거지새끼가 어딜 귀한 음식을 넘보느냐. 남에게 거저 줄 것은 단 한 방울도 없다. 당장 꺼져라! 꺼져서 사라져라, 이 비렁뱅이야!”

거짓말이다. 가끔 사람들은 이런 기대를 한다: 별장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성격이 고약하고 더러울 거야! 아, 물론 그들은 고약하고 성격이 더럽다. 내 친구들. 내가 토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 친구들. 하지만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그 꼬마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 사실, 우리가 먼저 집 안에 들어오길 권했고, 반응이 없자, 음식이나 다른 걸 좀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었다고, 독자들이여. 우리가 술에 취해서 무슨 고상한 위선을 떨든 간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꼬맹이는 그냥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가 그놈 애미애비라도 쳐 죽인 듯이.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우리가 그놈 애미애비라도 쳐 죽인 듯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고. 밉고 독살스런 눈매를 쳐들고, 무슨 용감한 장군님이라도 되는 듯이 우릴 상대하고 있더라고. 나 원 세상에. 분 풀 데가 마땅찮아도 유분수지. 우리가 괴물인가? 아니! 우리는 이 일에 철저히 인간적으로 반응했다. 동냥을 할 거면 살갑게 하든지. 아니면 불만을 냉큼 꺼내 보란 말이다! 언성이 높아졌고, 주먹도 한두 번 허공에 휘둘렀다. 꿈쩍도 안 했다. 그 상태로 얼어서 죽은 것 같았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는 다가가 만져 보았다. 꼬마는 살아 있었다. 그렇지만, 꿈쩍도 안 했다. 한 사람은 벙어리냐고 물어보았고, 한 사람은 귀머거리냐고 물어보았다. 한 사람은 부모를 찾아줘야 한다고 걱정했고, 한 사람은 먹을 것을 갖다주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전부 마지막 제안에 동의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빵이나 맛있는 것을 집어서 돌아왔다. 현관께는 비어 있었다. 야, 아무렴. 당연히 그렇지. 두말할 것 없이 합당한 이야기 아닌가?

다시 보니 새삼스러운 장면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생생한 저 두 눈알 속 불꽃을 우리는 왜 몰라봤던가!─잠깐만. 이런 게 당신네들이 지적하는 사항인가? 우리가 잠시 뒤 처할 재앙을 예고했어야 한다고? 웃기는 소리.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이 감옥을 피할 방도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소모적인 분쟁으로 옳니 그르니 하는 짓은 그만두자.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고, 만일 없다면, 지금보다 나았던 과거를 추억하며 애수에 잠겨서 나를 보호하는 일뿐이다. 애수심에 잠기는 편이 깊은 수심에 잠기는 편보다 낫지 않겠나 생각한다. 내가 방금 것을 새삼스럽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 친구 중 하나가 뱉은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꼬맹이의 부모를 찾아줘야 한다는 말. 아주, 사려 깊은 말. 이 칭찬받아 마땅할 말을 던진 사람을 T라고 하자. 여러분 중 누군가는 T로 시작하는 이름이 무얼까 고민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럴 줄 알고 내가 트릭을 좀 섞었다. 바로 중간 이름의 이니셜을 쓰는 것이다. 처음의 이니셜이 아니라. 좋다. 이러면 구분하기도 훨씬 편하고, 가짜 이름의 사용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말의 죄책감 또한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다. 나는 거짓을 작성하는 일을 죽기만큼 싫어한다. 아버지는 내게 항상 정직하라 가르치셨다. 직장에서도 항상 정직해지라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가 어느 때건 어느 순간에서건 내게 정직해질 것을 요구해 왔다. 나는 우리 사회의 충직한 시민이다. 오, 감동받은 내 영혼이여. 한 방울 눈물을 떨구는군. 나머지 눈의 한 방울은 T를 위해 흘린 것으로 하자. 사려 깊은 내 친구. 언제나 남을 돕지 못해 안달이었지.

T는 의사였는데 이 주변 일대의 유일한 의사였다. 하루하루가 외진의 연속이었다. 파티 날짜도 그의 일정에 맞춰서 잡은 거다. 이만큼 편의를 봐줬으면 한 번쯤 굴해 줄 법도 한데, 그는 내일 아침 일찍 또 진료가 잡혀 있다고 사양했다. 술을 사양했다. 의사가 기름진 음식은 다 처먹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친구들의 표적은 나로 좁혀졌고, 나는 오늘은 정말로 토할 각오를 하고 이 별장에 발을 들였다. 그때 생각한 게 이런 실토는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어깨를 으쓱할 것도 없다. 우린 전부 기나긴 세월 속에 갇혀 있다 백골로 출토되게 생긴 판이니 뭐.

나는 우는소리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위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물론, 우리 모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지요. 그럼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내가 언제 ‘죽음’의 무게라고 했지 ‘삶’의 무게라고 했냐? 개새끼. 네가 바로 가진 자의 전형을 보여주는구나. 무슨 의도로 말하건 항상 없는 자에게 갈고리가 되어 박히지. 들어 봐, 네가 가진 것은 앞으로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의 가시밭길이야. 내가 가진 것은 위에서 내 숨통을 찍어 누를 가공할 수압의 가시발톱이고. 억지 라임이 아냐. 물이 허파로 들이찰 때 얼마나 아픈지 네가 안다면 내 펀치 라인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될걸.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설명하려면 또 그놈의 현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 다시 일어나 볼까요? 아까 길은 설명했으니 이번엔 잃어버리든 말든 신경 안 쓰고 갑니다.

아까부터 듣고 계셨죠? 이 천지개벽하는 소리 말입니다. 허, 군중들이 환호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하긴 환호성이나 아우성이나 비슷하니까. J는 그랬거든요. 걔는 뮤지션인데 하필 군 복무를 전쟁터에서 했어. 어디 전쟁터냐고? 사람들이 적의에 받쳐서 옷 색깔로 피아 식별하는 공간이 다 전쟁터지 어디야. 거기서 한 번 데이더니만 인제 무대 연주할 때마다 PTSD가 온다더라고. 소녀 팬들 환호성 틈에서 화염병 튀어나올까 봐. 하여튼 그런 환호성인지 아우성인지 들린다는 소리에 우린 전부 일어나 창밖을 확인하러 갔지. 산등성이 쪽에서 뭔가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말했다시피 우리 별장은 비탈 밑에 있어서. 잘 안 보였거든. 그래서 다 같이…… 이번에도 다 같이네. 다 같이 현관으로 나가서 확인해 보려고 한 거야. 자, 다 왔소. 어디 숫자를 한번 세어 볼까?

하나, 둘…… 어이. 몇 명 비는군그래.

흠……. 여기서 기어코 길을 잃는군그래. 이렇게 목적지가 명확한 글도 몇 없는데. 거기서 딴 길로 새는 게 가능한 일이요?…… 허, 참, 나. 그래. 그래, 뭐 그네들은 알아서들 살라지. 난 계속 쓰겠소. 여러분들은 여러분 내키는 대로 쓰시구려. 이게 맞는 말이긴 하지. 이 집에 규칙 따윈 없으니까. 다들 파티를 즐기러 오지 않으셨소? 당신들이 쓴 모자도 거꾸로 된 모양이 아주 우습구먼. 으하하, 술을 마시면 이렇게 된다니까. 문장이 제멋대로 돌아가요. 이것 좀 봐, 방금도 거꾸로 말하지 않았어? 아무튼 현관 밖을 바라봅시다. 아, 이제야 좀 살겠군. 새벽 공기가 차고 상쾌해.

어슴푸레한 하늘. 살랑거리는 바람. 또렷해지는 울림. 쎄쎄쎄하는 잎사귀 소리.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정답고 정다운 새벽 풍경. 하지만 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작은 새들의 소리는 벌써 들리지 않고, 큰 새들은 떼 지어 먼 곳으로 향한다. 반대편으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아우성, 환호성, 그도 아니면 장성한 대성통곡처럼.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굉음과 고성. 높은 강의 물이 콸콸 흘러넘치는 소리. 우사가 눈물을 흘린대도 그만한 범람은 일으키지 못했으리라. 토사가 멀리서 이십구 척 높이로 튀었다. 마당 앞의 개울은 벌써 대문 앞까지 번졌다. 우리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금세 도망칠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끝장’이었다. 이 별장은 원래 물속에 잠겨 있을 땅에 세운 것이었다.

“……그놈이 기어이 둑을 터뜨렸군!”

G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놈이 기어이 저질렀어!”

G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눈에 불을 튀기며 자신의 별장을 덮쳐드는 물살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펄쩍 뛰었고, 그를 잡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런 뒤에 다 같이 난리법석을 부리며 빙빙 돌았다. 집 안의 모든 창문과 통로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서로 부딪치고 욕지거리하며 손짓 발짓 가리지 않고 온 집 안을 휘젓는 데 열중했다. 소리는 사방에서 차올랐다. 먼 방의 세탁기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져서. 규칙적이게도 출렁거리며. 대신 소리는 엄청 커서 바로 내 귓가에 대고 침을 삼키는 듯이 꼴깍거렸으며, 마치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림이 있었고, 끝에 물거품이라도 이는 듯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허우적거리는 팔에서 땀이 튈 때마다 흠칫거리며 틈새를 재점검했고 테이프로 이중삼중 틀어막았다. 녹색의 격자무늬 방이 만들어졌다. 무늬는 초현실적인 비상구 표시등처럼 빛났다. 하지만 우리가 나가는 문이 아니라 수마가 들어오는 문이었다. 비상구를 모조리 봉인하라, 우리가 영영 잠들지 않도록! 창밖으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지나다녔다. 누군가 돌아다니면서 커튼도 쳤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얇고 붉은 커튼에 끔찍한 그림자가 만화경처럼 배회하길래 방방마다 불을 켜 두었다. 우리 별장이 가득 찼다. 더 이상 들어올 공간은 없어! 혹시라도 불손한 침입자가 있는지 수색하기를 몇 시간째, 우리는 마침내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완전한 정적이었다.

손이 떨리는군. 젠장, 그건 완전한 정적 따위는 아니었다. 완전한 정적 같은 건 없다. 완전한 고립이 있을 뿐이다.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하자면 내 마음속은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우리 다 같이─이 단어를 너무 자주 썼으니 ‘바보같이’로 바꾸자─거친 숨만 몰아쉬기 바빴다. 우리에 갇힌 짐승들처럼. 밖 같은 건 없다. 궁박이라면 있겠네. 우리는 서열 싸움의 장으로 변신하고. 우리는 저열한 우민 나부랭이가 되어 여러분을 즐겁게 해 줄 따름. 어떤가요,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인제 배우들의 입장은 다 끝났습니다. 자…… 식순에 따르면…… 배경 음악이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테마곡으로 코헨의 바이올린 오케스트라는 어떨까요?…… 좋아, 좋아. 겹낫표: 여는 곡. ‘랩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지?”

J가 말했다. 오, 독주자가 보컬도 겸하나 보군. 나는 반응한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그냥 모른다고?”

G. 마이너. 불행한 부조리극의 전조를 알리기 좋은 코드지. 삑사리가 나기 직전의 드라마틱한 떨림이 있거든.

“몰라.” “네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서류상으론 완벽했어.” (이제 내 정체도 여실히 밝혀지고 있다.) “머저리 같은 새끼.” (이거 말고!) “공사 감리도 제대로 했어.” “지금 우리가 무슨 상황인지 알기나 해?” 뭐, 그만두자. 격양된 상태에서는 속에도 없는 말이 오가곤 한다. 흥, 우리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그때 있었을까? 내가 처음부터 말했듯이, 이건 집을 너무 튼튼하게 지은 탓도 얼마쯤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마음 편히 죽었을 텐데. 순식간에. 쓰레기 물청소하듯이. 퓩. 생애 마지막 기억으로 이러니저러니 치고받은 기억을 수거할 필요도 없이.

하지만 내가 허가해 줄 때만 해도 치수 사업은 완벽해 보였다. 그건 확실히 해 두고 가자. G가 돈을 대기도 했고. 그러니까 지가 별장도 지었겠지. 우리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안전성은 보장돼 있었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리 계획을 박살 내려고 저지른 짓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둑을 터뜨렸단 말이다. 누가?

“그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

이야, 그거 추리인가? 웃어도 좋다. 나도 거의 그럴 뻔했으니까. 새파랗게 변한 G는 책임을 돌릴 대상을 찾지 못해 야단이었다. 그러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도록 하자. 이제 와서 누가 잘못했나 가려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는 힘을 합쳐야 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구먼. 이 소설이 주는 교훈. 메시지. 작가가 밝히는 주제. 나는 항상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차이가 뭘까 생각해 왔다. 요새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대중문학: 작가가 이야기 뒤에 숨어서 주제를 전달함. 순문학: 작가가 이야기를 수단으로 독자에게 손수 주제를 전달함. 그러니까 독자가 작가의 목소리를 작중에서 직접 인지하느냐 마느냐가 그 차이를 가르는 것이다. 당연히, 순문학이 좀 더 지적이다. 왜냐하면 그건 지식인들 간의 ‘대화’니까. 그러니까 ‘대중’문학이라고 멸시하지. ‘대중’하고 어떻게 대화를 하나? 그것은 관념적인 ‘유행’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거대한 강줄기나 다름없다. 강에 대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다. 같은 작가들. 특정 직군들. 아니면 강물. 젠장, 강물에 대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 강물이 내 숨구멍에서 5m를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뭔들 못하겠는가?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순문학을 토대로 나의 삶을 되새겨 보시라. 잘근잘근. 우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해. 아, 이건 너무 단순하군. 세상에는 도와줄 가치가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잔인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당연한 사실을 구구절절 읊어서 작품을 망치는 걸 보니 나도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가 보다. 내가 과연 그런 사람일까? 독자 여러분이 판단하는 게 좋겠다.

보자! 내 자랑스러운 얼굴.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표범처럼 번득이는 눈매. 눈 밑의 주름은 고된 업무가 남긴 상흔이지만, 그마저도 퇴폐적인 멋이 있다. 코는 거꾸로 된 자작나무처럼 길고 곧다. 자줏빛 입술은 보기 좋게 도톰하다. 이렇게 강렬하고 매력적인 얼굴도 드물다. 색은 흙빛으로 약간 어두우니 남성적인 야성미를 살리고, 어깨는 충분히 벌어져 얼추 역삼각형 몸매가 잡힌다. 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많이 먹는 것을 싫어한다. 말쑥한 차림새가 잘 어울리는 키에 자연스러운 눈웃음도 항시 대기 중이다. 지방 관리치고 이만하면 훌륭하다. 턱을 쓰다듬으며 깨끗이 면도한 얼굴을 살펴본다. 거기엔 아직 발굴되지 않은 훌륭한 보물이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씩 웃는다. 그것이 이 얼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상대방도 화답하고. 그러면 더 이상 이 거울 따위 두 세계의 융화에 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나도 저 안에 있다. 저도 나 안에 있다. 두 얼굴 다 행복하다. 천만 안심되는 광경이다. 분명히 나는 어딜 가서든 잘 지낼 수 있겠지. 어느 세계, 어느 무대에서건.

사이좋게 말이야.

아, 저쯤에서 G가 다가오는군. 나를 묘사했으니 그도 설명해야지. 그는 돼지다. 돼지 사업가. 양복을 차려입은 돼지. 사실 그만큼 살찌진 않았다. 그래도 돼지 소리 들을 만큼은 퉁퉁하다. 온몸이 더운물에 불은 것 같다. 자다 일어난 듯한 눈. 반으로 쪼갠 표고버섯 같은 코. 입술은 턱에 밀려서 간신히 목을 쳐들고 까치발을 한 느낌. 그리고 저건 누군가? J가 뒤에서 나타나는군. 그 옆에 T도. 내게 다가오는 G에게 주목하고 있다. 둘이서 또 치고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지. 하지만 난 괜찮다. 난 멀쩡하다. 그리고 G가 뭐라 지껄이건 간에 스스로 잘 통제할 자신이 있다. 아까도 참았잖는가. 그러니 하던 일을 이만 계속하겠다. J는 곱슬머리가 잘생긴 기생오라비 같은 놈. 비실비실하지만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모성애를 일으키는 모양. 사업가는 돼지. 아티스트는 기생오라비. 너무 전형성에 기대는 거 아니냐고? 뭘 잘 모르는 친구로군. 난 이제껏 지켜져 온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모종의 가치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유 없이 어떤 법칙을 만들거나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즘도 사업가는 돼지가 되기 십상이고─예술가는 잘생겼기 마련이다. 그래야지 주목받고 눈에 띈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은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의사인 T를 보라. 이 친구는 골절이나 파상풍을 상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그의 외모는 확실히 별난 구석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 바는 아니다.

“이딴 걸 왜 쳐다보고 있는 거야.”

G가 신경질을 내며 커튼을 쳤다. 저쪽 세계가 사라졌다.

“거울 대용으로 썼을 뿐이야.”

나는 다정하게 언급했다. G는 날카로워진 사람이 유독 그러듯 온갖 이치에 화를 내고 다녔다.

“꼭 이따위로 굴어야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꼭 우리 앞에 저 바깥을 훤히 드러내야 만족하겠느냐고?”

“네 앞에서 그러지 않았어. 아까까지 난 혼자였다고.”

“K, 이 새끼야!”

G가 소리 질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도 별 명분 없이 그랬을 것이다.

“G, 진정해.”

J가 다가와서 말렸다. G는 가만히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지.”

T의 말이었다. 난 어쩐지 억울함을 느꼈다. 저 말이야말로 한 대 쥐어박기 딱 걸맞은 소린데. 왜 나만 히스테리에 시달려야 하는지? G는 가만있었다.

“그래,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지.”

하지만 나는 인내심 강한 사람이므로 이번에도 다정하게 받아 주었다. G를 힐끗 쳐다보니 그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J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물이 새지 않는다면 몇 주쯤.”

“몇 주?”

“나도 모르지.” 나는 거북하게 우물거렸다.

“그건 식량의 양에 따라 달렸어. 하지만 오래 버텨 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다들 우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T가 못마땅한 짐승이 그러듯이 이를 드러내며 설명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 말을 이었다.

“이 별장이 버텨 내리라곤 아무도 몰랐겠지.”

“그러면 뭘 어쩌겠다는 거야?” 답지 않게 실용적인 J가 다시 물었다. “물이 빠질 때까지 못 기다린단 말이지? 백 년 넘게 호수로 남아 있던 이 구덩이에서, 응?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거야? 다른 방법이 있어?”

“우리가 직접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난 수영 못해…….”

G가 말했다. 우리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바닥을 뚫어져라 보는 자세 그대로 겁에 질려서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도 수영 못해.” 내가 말했다. G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구원받은 듯이.

“……너도 못해?”

“그래, 나도 못해.” 나는 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G는 개의치 않고 고맙다는 듯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젠장, 나도 이런 깊은 곳에서 수영해 본 적은 없어. 해변에서 첨벙거려 본 게 전부란 말이야.”

J가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대관절 몇 미터 깊이에 파묻힌 거지?”

“5m쯤 될 거야.” T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뭍까지 최소한 20m는 헤엄쳐야 할걸.”

“미안해…….”

G가 말했다. 우리 모두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미안해─‘미안하다’고? 도대체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구덩이 한가운데 별장을 짓고 거기에 우리를 초대할 생각을 했다는 거? 우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들 조금 짜증 내고 있었다.

“여기서 수영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내가 그를 무시하고 말했다.

T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군.”

“네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와야 해.”

“…….”

T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초조함과 동시에 괴팍한 복수심을 만끽하며 독촉했다.

“‘다른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

T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군.”

다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리는 방을 정했다. 가장 구석진 방. 사고가 벌어져도 수습할 수 있는 방. 목공놀이 방. 아니다. 취소. 이건 G가 너무 아쉬워해서 봐 줬다. 얼간이. 자기 목숨보다 빨리 죽을 소품일 걸. 그래도 어쩌겠는가. 습작이건 야심작이건 다들 아버지의 자식인 것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므로 그 옆방을 쓰는 데 동조했다. 그런데 여러분은 거슬리지 않아요? 바로 내가 저렇게, 한마디 뱉었다가, 곧바로 정정하는, 어쭙잖은 리얼리즘의 혓바닥 놀이의 반복. ‘아니다. 취소.’ ‘거짓말이다.’ ‘내가 잘못 알았어.’ 여태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 꿰고 있다는 양반이 어찌 이런 화술을? 이건 사실 독자 여러분의 감성에 편승하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저 친구도 그런 실수를 범한 게로군. 무의식에 비추어 헛소리가 조절이 안 되는 게야. 그럴 수 있지. 나도 가끔 그러는걸. 생각건대 잘난 작가가 되려면 이렇게 남들의 마음을 갖고 노는 사업가적 수완도 갖춰야 한다. 비록 G는 본인이 사업가인 나머지 예술을 너무 낭만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발목을 잡았지만. 여하간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자. 상사에는 서로 지켜야 할 도리가 있거든.

목공실 옆방은 무슨 방이었을까? 침실은 아니었겠지. 침대가 없었거든. 이건 실없는 소리였고, 양탄자가 깔렸고 붉은 안락의자가 은은한 푸른 조명 아래 빛나고 있던 걸 보면 휴게실이었을 것 같아. 망치 좀 가지고 놀다가 피곤해지면 이리 와 눈 잠깐 붙이는 거지. 안락의자는 뒤로 평평해질 때까지 젖혀지고, 맨발을 담아 놓는 푹신한 발 받침까지 있더라고. 하나 갖고 싶더만. 하지만 그 외에는 스탠드랑 탁상시계랑 그거 올려놓을 작은 서랍장밖에 없었다. 원체 방이 많으니 버리는 공간이 생길 수밖에. 이래서 큰 걸 설계할 땐 조심해야 한다니까.

좋다, 그래서 우리는 창가의 테이프를 뜯어내고…… 이런, 제기랄. 이번엔 진짜 틀렸다. 있었던 일을 들려주려는 데 왜 오류가 발생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연히 우리가 그 방에 모였을 때는 테이프를 뜯지 않았다. 그건 최후의 최후 단계니까. 혹시나 벌어질 사고라면 바로 그 순간의 몫이니까. 우리는 그냥 “이 방이면 괜찮겠군” “그래 나쁘지 않아” “잘할 수 있겠어?” “그럼” 따위 거짓말의 연속으로 방을 겹싸듯 덧채웠을 뿐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한동안 모여서 우물거렸다. T는 옷을 벗을 생각도 안 했다. 그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보다 자기 자신의 고상함과 명예가 더 중요했다. 나는 상식적으로 겉저고리만이라도 벗으라고 주문했고 그제야 그는 내 말에 따랐다. 그 밖의 것은 고집을 지켰다.

우리는 문지방을 넘으면서 각자 마지막 응원하는 말을 남겼다. “죽지 마.” J의 말. “부탁하네.” G. “양말이라도 벗지 그래?” 내 헛소리. T는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분위기를 못 맞춘 것 같아 손만 냉큼 흔들고 나와 버렸다. 우리는 문을 닫았고 곧장 문틈을 걸레로 쑤셔 막았다. 그런 다음 위로 녹색 테이프 칠을 했다. J가 문을 두드려 신호했다. 곧이어 T가 창가의 테이프를 제거하고, 창문에 손을 대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상상했다. 최소한 우리는 “흡” 하는 소리가 중간에 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쪽에서 다른 소리는 일절 내지 않았으니 그것만은 T의 소리가 틀림없었다.

잠시 뒤 문에서 쿵쿵쿵 소리가 났다.

“뭐야?”

J의 벼락같은 고함이었다.

“조용히 해 봐.”

문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물소리가 나는지 알아보려고 침묵했다.

쿵쿵쿵.

“뭐야, 뭔데?”

J가 다가서며 문에 귓구멍을 댔다. 손바닥이 음각 장식을 덮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J가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다시 웅얼거리는 소리.

J가 돌아서서 통역했다.

“창문이 안 열린대. 수압 때문에.”

우리는 즉각 다시 달라붙어 문의 테이프를 뜯었다. 문을 여니 T가 당황한 얼굴로 양말을 벗고 서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 목소리가 하도 웃겨서 하마터면 진짜 웃을 뻔했다. 나는 경직되는 입꼬리를 느끼며 창문을 노려보았다. 다시 내가 보였다. 행복한 얼굴.

“부수는 수밖에.”

내가 말했다. J와 T가 움찔했다. 나는 G에게만은 그럴 겨를을 주지 않고 어깨와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닦달했다. “이봐, 어서 망치를 가져오라구. 목공실에서 공구 상자를 가져오란 말이야.” G는 뛸 듯이 놀라더니 마음에서 우러난 순발력으로 내 말에 따랐다(극한 상황에서는 먼저 무너진 사람이 신분 격하를 겪기 마련이다). 그는 정말로 공구 상자를 통째로 들고 뛰어왔다. 나는 만족스럽게 장도리를 쥐어 올렸다.

“자.”

T는 장도리를 보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대신 감겨 주고 물러났다.

“노루발 부분으로 가격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 “창문 모서리를 때려. 방범용 강화 유리라서 단단하거든.”

T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방 안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황급히 문설주를 지나쳤다. 인사는 반복하지 않았다. 대수롭잖게 손을 흔드는 것만 빼고. T는 여전히 장도리를 손에 쥔 채 혼자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우리는 문을 닫았다.

청테이프로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을 무렵, 이 친구가 정신이 나갔는지 신호를 기다리지도 않고 창문을 쳤다. ‘쿵’인지 ‘콱’인지 ‘텅’인지 애매한 소리가 났다. 내가 “야!” 고함을 지르며 손을 바쁘게 놀렸다.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래?” J가 물었다.

“몰라.” 나는 문 위쪽 틈새를 덧씌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 비슷한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깩’ 소리와 비슷했다. 아니면 ‘끼룩.’ ‘삐악.’ ‘찌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에 귀를 댔다.

“……깨져, 안 깨진다고.”

“다시 해 봐! 다시! 모서리 때려도 마찬가지야?”

언성을 높이며 문틈을 더듬어 보았다. 잘된 것 같았다. 어딜 만져도 매끄러운 테이프였다.

둑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팍’ 물이 튀는 소리와 T의 ‘악’ 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소리와 찰박거리는 소리도 기억한다. 물소리는 그 나중의 모든 소리를 삼켰다. 콸칼대는 시퍼런 소리와 날 선 차가움이 방 안으로 쇄도했다. 객실의 산소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푸른 물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우리 구역이 한층 줄었다. 항해는 지속 가능한가? 물론이죠, 선장님! 선원들은 무사합니다. 목숨은 그렇게 한순간에 가는 게 아니라구요, 나는 허우적거리는 소리나 숨넘어가는 소리 한 번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다행히도 진실로 밝혀졌다. 1인칭 서술자의 불완전함을 구태여 변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흥분하여 정적이 그 방 안을 채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G와 J가 궁금해했다.

“어떻게 됐지?”

“잘된 것 같아.”

“어떻게 알아?”

“물 차는 소리밖에 안 들리잖아.”

“그래서?” J가 지껄였다.

“그래서라니?” 나는 심기가 불편해 콧잔등을 찌그리며 물러났다. “뭔가 잘못됐으면 T가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겠지.” 돌아보니 J가 학자연하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K, 그게 바로 이상한 점이야.”

J가 말했다. “T가 깬 창문으로 물이 쏟아질 거잖아.”

“그래서?” 내가 응수했다. 도대체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 못한 게 있어. 봐봐. 유속이 엄청날 거라고. 사람은 그런 격류 속에 몸을 집어넣을 수 없어. 저 방이 가득 차서 흐름이 막히지 않는 이상,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단 말이야.” 그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문에 쏘아 보냈다.

나는 잠시 골통 속에 냉수가 차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런 씨발.”

“이상하지? 너도 이상하지?” J가 채근했다. “─T!”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폭포수 같은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창문 높이는 벌써 잠겼을 테니 아마 빙그르르 도는 소용돌이 소리. 둑 터지는 소리만큼이나 강력한 음파로 시작된 소리. 하지만 쥐어 터지도록 물로 맞고 있을 T의 대답은 없음. 심지어 비명도 “악”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왜? 뭔데 이렇게 용감한데? T는 논의하지 못한 감압실 장면 추가에 놀라서 우리와 한바탕 욕설이라도 주고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침묵한다. 왜? 쓰러지면서 뒤로 머리라도 깨졌나?……

자, 이 부분이 내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상상해 보시라. K는 어뢰 탐지병처럼 땀을 흘리며 문에 귀를 대고 있고, G는 사고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되어 하인처럼 수발들 채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J가 옆에서 포로처럼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흐느적흐느적 발목 위쪽을 가만두지 않고 있다.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일 데가 없는 탓이다.) “방 안을 확인할 방안 없어?” 포로의 멍청한 유머. 수병은 침묵. 다음 차례는 G. G는 대사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제 내 차롄데…… 내가 말해야 하는데! 이윽고 사태를 알아챈 G가 빽 소리를 지르며 뛰어간다.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목공실이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나 결정하지 못한 사이 그가 다시 나온다. “어딨어! 어딨어!” 다시 들어가려다가 비틀대며 돌아온다. G가 공구 상자 앞에 무릎 꿇는다. 전동 드릴을 찾아낸다. 우리가 한심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것이 배터리로 작동되는 것임을 확인한다. J, K 둘 다 안색이 변한다. G가 소리 지른다. “내가 확인할게, 내가 확인할게!” 두 사람이 그를 잡는다. 하지만 드릴이 작동되자 도로 펄쩍 물러난다.

“뭘 하는 거야?”

“방 안을 확인해야지!”

“잠깐”

“시간이 없어!” G가 찔러총 자세로 돌격한다.

“옆방으로 가, G.” J가 명령한다.

“옆방으로?” G가 드릴을 두 손으로 붙잡고 공중으로 쳐올리며 묻는다.

“그래, 목공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확인하자고.”

“맞아, 복도에선 안 돼.” 내가 거들었다.

G는 고분고분 우리 말을 따른다. 하지만 너무 빠르다. 우리가 방해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뛰어들더니 공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하!) 벽에 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저걸 어떻게 막아?” J가 변명하듯 소리친다. “씨발.” 도움 안 되는 새끼. K가 중얼거리며 복도 저편으로 튀어 나간다. 드드드드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 멋진 가죽 구두가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으며 질주한다. 드드드드드드드득. 밝은 털. 붉은 모직. 커피색 무늬. 손바닥에 따뜻한 감촉이 스치고. 드드드드득. 드득. 호텔 복도와 하얀색 문설주를 몇 개 뛰어넘은 수병이 아주 급한 사람처럼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5초 경과. 수병의 품 안에 수건이 한가득. 생각해 둔 용도로 써먹으려면 물에 한 번 적시는 편이. 그러나 생각의 속도보다 구두 소리가 더 빠르다. 타일을 딱딱거리는 경쾌한 소리는 금세 부끄러운 공연을 한 듯 폭 파묻혀 사라진다. 넘어진다. 이런 씨발. 수건 두 장이 버려진다. 머릿속에서 G는 벌써 수십 번씩 죽었다. 살해당한다. 뒈지게 내버려 둬. K는 츤데레처럼 우물거린다. 그딴 놈 하나 없어도 여기서 평생 버틸 수 있어. 스스로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독백. 하지만 살의만큼은 진심이다. K가 돌아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내가 소리쳤다. 왜냐하면 그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은 아직 침수되지 않았다. J와 G 둘이서 벽에 난 구멍에 달라붙어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드릴은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난…… 난 방 안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G가 용케 계속 말했다. “T는 우리 유일한 살길이니까…… 혹시나…… 잘못되면…… 우리가 바로……” 와들와들. 두 손이 뭔갈 잡고 있다. 질질 흘리지 않도록 침을 삼킨다. “혹시나 잘못돼 있으면 말이야…… 다시 데려올 기회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안색이 새파래졌다. 나는 그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을 오직 그가 붙들고 있는 물건 하나만 보고 참았다. 그건 더욱 기상천외했다. 돋보기.

“돋보기?”

J가 거기서 눈을 뗐다. G와 함께 붙잡고 있던 손도 떼 버렸다. 구멍을 막고 있는 볼록렌즈는 흔들리지 않았다. G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소리 질렀다. “뭐냐고?” 소리를 안 지를 수가 없었다. J는 구석으로 가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주 귀찮다는 듯이. 내 음성을 막아보려는 근소한 노력으로 보였다. 나는 J에게 쿵쿵 걸어가려고 했다.

“K, 네가 먼저 봐.”

G가 말했다. 나는 매서운 독사 같은 눈을 그에게 쳐들었다. 상대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걸 미리부터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건 양보였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갔고, 볼록렌즈를 멀찍이서 노려봤다. G의 양손이 아래위로 이오니아식 기둥처럼 말려서 지지하고 있었다. 렌즈 안쪽은 물로 차 있었다. 벽의 색깔이 동그랗게 젖어 있어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서 구멍 안쪽을 살폈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구멍 안쪽을 뭔가가 막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쪽 눈을 감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자세를 취하자, 저쪽 편에서 검은 것이 슬슬 물러나더니 깨끗한 푸른빛이 비쳐 들어왔다. 그건 사파이어로 만든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비취와…… 라피스 라줄리. 차보라이트. 녹마노. 전기석의 푸른 실선이 체에 거른 섬광처럼 흩날리고. 그 위에 방울방울. 작은 아쿠아마린. 투명하고 부드러운 광경.

그 안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한 형체…… 천장의 푸른 등을 받으며. 붉은 의자 발 받침 위로 살짝 떠 오른. 스탠드의 코드를 허리에 숄처럼 두르고. 방금 우리 사이를 지난 탁상시계에서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들어 그 나른한 시선을 움직이는…… 너울거리는 팔 위로…… 이쪽을…… 아, 세상에……. 머리에 예쁜 꽃이 피었군. 백일홍처럼 붉다. 텃밭에 루비를 뿌리는 가을의 신처럼. 인자한 눈빛과 꽃잎이 휘날린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바다 아래 배롱나무 정원을 만든 것 같군. 만발한 산호초. 모든 것이 볼록렌즈 안에 담겨 있다. 그 피가 소용돌이치며 은하수처럼 이어진다. 곡선은 오로라처럼…… 아래 있는 모든 것에 그림자를 지우고…… 그 끝에는 작은 펄서…… 장도리가 아직 돌고 있다.

어렵지 않다. ‘팍’ 소리로 되돌아가 보자…….

단 두 문장이면 된다.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 T는 손에 든 망치를 놓쳤다. 망치는 물살에 빙그르르 튀어 올랐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틀거렸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전기가 나갔다.

G가 ‘억’ 했다. 나는 황급히 그 옆에서 물러났다.

“안을 봤어?” 그가 외쳤다.

“그래.” 어둠 속에서 나는 외쳤다.

G는 여전히 돋보기를 붙잡고 있는 듯 같은 자리에서 외쳤다. “뭘 봤어? T는 나갔어?”

“우린 전부 끝났어.”

나는 외치고 방에서 도망쳤다. 기억해 둔 문의 위치가 정확했다. 뒤에서 고함 소리가 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불을 가져올게.” 내가 외쳤다. G가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나는 더듬더듬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전구 밑을 기면서 랜턴을 찾는 동안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곤두세웠다. 그 방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J의 욕지거리도 들렸다. G는 계속 지껄였다. 나는 랜턴을 찾아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물 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문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물방울이 여기까지 튀었다. 나는 빛을 움직였다. 바닥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더 뒤로 움직이자 검붉은 형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불쾌한 덩어리가 내장을 뒤집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랜턴을 더 위로 들었다. 물줄기가 방을 횡단했다. 벽에 뚫린 구멍이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넓혀지고 있었다. 나는 G를 쳐다보았다.

“K.”

G는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로 가득했다. 눈은 누가 파먹은 것처럼 움푹 들어가 있고, 입가에는 벌써 수염이 자라서 지저분해 보였다. 주름이 칼로 판 것처럼 깊었다. 나는 랜턴을 돌려 창밖을 비춰 보았다. 내 얼굴이 보였다. 행복하진 않지만, 아직 잘 견디고 있는 얼굴.

커튼이 없었다. 빛을 다시 내렸다. 커튼을 잡아 뜯어 거기 사로잡힌 J가 발버둥 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그를 도왔다. J가 욕을 했다. 나는 함께 욕을 하며 검붉은 커튼을 잡아당겼다. 커튼이 찢어졌다. J가 불빛에 휘둥그레져서 튀어나오는 모습이 꼭 알에서 태어나는 신화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방향을 완전히 거꾸로 잡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J가 G를 쳐다보았다. G는 아직도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랜턴을 집어 그를 비췄다. G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구멍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새끼 잡아.”

J가 소리쳤다. 나는 랜턴을 잡고 일어서려다가 커튼 자락을 밟고 미끄러졌다.

앞으로 꽈당 넘어졌다. 볼까지 물에 다 젖었다. J가 자기가 쫓아갈 요량이었는지 기어와 내 랜턴을 붙잡고 일어섰다. 나는 그를 붙잡아 같이 일어서려다가 둘 다 넘어졌다. 우리는 서로 어깨를 눌렀다. 내 코가 물속에 처박혔다. J가 랜턴을 집어 올렸다. 나는 그만 화가 나서 팔을 휘두른다는 게 그의 턱을 쳐 버렸다. 랜턴이 떨어졌다. J는 거꾸로 엎어졌다. 발목이 통째로 잠겨서 앞으로 갈 때 무릎을 크게 써야 했다. 나는 랜턴을 집고 밖으로 나왔다. “나올 때 문 닫고 수건으로 막아.” J가 욕을 했다. “알아들어? 문 닫고 수건으로 막으라고!” J가 욕을 했다. 다시 들으니 빨리 G나 쫓아가란 의미였다. 나는 축축해진 카펫을 딛고 엉거주춤 복도를 건넜다. G가 사방에 부딪쳐 가며 현관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아니이 미친 새끼야.” 내가 소리 지르며 그를 추격했다.

“왜 우우는 거야? 지금 어디 가는데에? 뭐 하자는 거야?”

G가 흐느끼며 째지는 목소리로 징징거렸다. “너무 무서워.”

“뭐어가 무섭냐 이이이 말이야.” 내가 헐떡이며 외쳤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나 도저히 이 안에 못 남아 있겠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남은 게 아니고 억지로 갇힌 거지, 병신 새끼야.”

“그만, 그만해, 나 그만할래.”

“그만하긴 뭘 그만해, 씨팔.” 달그락, 달그락. 잠금장치를 찾고 있군. “가만있으라니까!”

“안 돼!!”

“도대체 뭘 본 거야?” 내가 소리 지르며 그를 덮쳤다. 돼지 같은 G의 몸이 무너졌다. 내 손이 그의 머리를 세게 밀었다. 쿵. G는 뒤통수를 대문에 부딪히고 신음하며 쓰러졌다. 그가 마구 몸부림을 쳐서 아예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그가 저항했다. 나는 G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에서 꾹 눌렀다. “다 죽자고?” 내가 소리쳤다. “같이 다 죽자고 이러는 거야, 미친 새끼야!” G의 눈자위가 희번덕거렸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발버둥은 좀 줄어들었다.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동공을 쫓아갔다. “자, 자, 들어 봐…… 아직 시간은 있어. 아직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쥐어짜듯이 낱말 단위로 생각해서 타일렀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있을지도 모르지…… 없다고 누가 그래?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올 거란 말이야……” 누가? 구조대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G는 내 억지에서 도망치듯이 눈동자를 까뒤집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뒤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J가 틀림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뗐다. G는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다. 랜턴을 들고 돌아보니 J가 당도해 있었다. 그도 온몸이 젖었다.

“문틈은 막았어?” 끄덕. 불안해서 대충 쑤셔 놓고 달려온 모양이다. 그럴 필요 없었다. “여긴 내가 막았어.”

“뭐 하려고 했는데?”

“현관문을 열려고.”

“미친 새끼.”

J가 다가왔다. 그럴 시간에 보강이나 하러 돌아갈 것이지. 나는 그의 무식함에 기가 막혔으나,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픈 마음에 랜턴으로 G의 모습을 비춰 주었다. “다 끝났어, 이제 그럴 힘도 없을 거야.”

뭐라고?

“미친 새끼.”

J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J는 나를 욕하고 있었다.

“씨팔, 미친놈아.”

나는 고개를 내렸다. G의 얼굴이 푸르딩딩했다. 입술은 부어 있었다. 눈두덩은 아까 울었으니 그렇다 치고. 피부가 보라색이었다. 멍든 것처럼. 아니면 죽은 사람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막이 내린다.

실선…….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진실이다. 솔직히 어쩌다 이 지경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난 글 따위 쓰지 않았다. 독자도 작가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나는 이런 말장난이나 하며 여기 계속 앉아 있다(내 친구의 몸뚱이 위에). 시간은 흐르고 있고, 상황은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다. 충분히 쉬었다. 한 번 더 회상에 빠지면 이건 현실 도피가 되겠지만 난 그렇게 비겁하진 않다. 이제 준비됐다.

그리고 나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작가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결말을 정해 놓고 사람을 몰아붙이는 족속이니까.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아직!). 그리고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나를 너무 혹독한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다. 생각해 보시오, 허무맹랑한 환상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의 삶의 시선으로. 그 시선으로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과 물소리와 집 안 전체에 깔린 푸르스름한 빛을 생각해 보란 말이오. 그리고 내 옆에서 지껄이는 J도……. 지치지도 않는지(나는 너무 지쳤다)……. 한숨. 이 ‘푸르다’라는 말조차 나를 지치게 한다. 이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푸르름. 푸른 바다. 푸른 상록수. 푸른 잎사귀…… 대관절 파란색을 일컫는 것인지 초록색을 일컫는 것인지? 푸른 보석, 사파이어. 푸른 새싹, 에메랄드색. 푸른 하늘, 싱그러운 이미지. 아, 그렇다면. 혹시 저 맑고 깨끗한 심상을 지닌 색을 ‘푸르다’고 하는 걸까? 푸르른 삶. 푸릇한 젊음. 짙푸른 마음. 시퍼런 봄. 푸르죽죽한 얼굴. 푸르딩딩한 얼굴. 푸르께한 혈색. 푸르스름한 형광 밑 감금.

관두자, 관둬……. 모든 것은 결국 색깔론으로 회귀한다. 푸른색이 정상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그리고 인간의 재미없는 겉모습에 빗댄다면, 푸른색이 예술적으로 취급될 여지는 하나도 없다. 오로지 정맥혈만. 그 멋대가리 없는 1차원적 비유만 드러날 뿐이다. 내게는 살아 있는 피가 필요하다. 맥동하는 심장. 이 차갑고 죽어버린 시야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그런데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비정상이면서도 예술적인 푸른색을 찾았다. 그건 바로 푸른 장미다.

잠깐만, 뭐라고?

아니다. J의 말은 무시하자. 그는 정신이 나갔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너무 매달리면 사람이 돌아버린다. 기준이 오락가락하게 된다. “아니야, 난 그런 것 따위 보지 않았어! 보지 않을 거야! 볼 것도 없구만, 뭐!” 그러면 나중에 창밖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다. 진짜로 뭔가 볼까 봐. 봤어도 아니라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그러다 인지 능력이 감퇴하고 감각이 마비되고 양심도 자빠뜨리게 된다. 아니다. 나는 거짓을 고하기를 죽기만큼 싫어한다. 그러니 저 친구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런데 창밖을 보지 않고 살기란 가능한 일인가? 물론 가능하다. 당신이 푸른 장미를 키우는 데 집중한다면. 들어 보라, 우선 화분을 준비하고, 양질의 흙을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 당신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다음…… 뭐라고?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내가 죽였다고?…… 맙소사. 인제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군. 제발…… 정신 차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너’도 그게 사고라는 걸 알잖아. 그놈을 막으려면 온몸을 다 써야 했다고.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니…….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래, 그렇담 맘대로 하라지. 이런 거로 싸울 때가 아냐. 나는 항상 뭔가 진전시키는 데만 흥미가 있거든.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조심, 조심…… 그래, 일어나고. 여기 내 손 잡아. 잡으라니까, 자!

이리로 와. 이리로 오라고.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 스텝을 보라지. 오른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오른발, 왼발. 왼발. 찍고 턴. 흩날려라 비탄. 야, 잘하는데. 우리 같이 공연해도 되겠어. 잠깐 귀 좀 빌리지, 응? 괜찮아, 원래 프로들은 중간에 이렇게 사인도 나누고 그런다고. 즉흥적으로 합을 맞추려면 그래도 이야기 한마디씩 서로 나눠 봐야지 않겠어요? (소곤거림) 이건 내 생각인데…… 그 꼬맹이 말이야. 아무래도 진짜배기 새끼 악마 같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놈을 쫓는 퇴마 굿을 하는 거지. 무당한테 들은 적 있거든. 형체 없는 것을 상대할 때는 같은 모호함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네 생각엔 이게 잘될 것 같아?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이런 마케팅만큼 모호하고 실체 없는 수단도 없잖아. 아, 아, 아. 궁금한 건 이게 아니지. 너한테 묻고 싶은 건 하나뿐이야. 다른 질문은 별로 의미도 없고 네가 대답도 못 할 거거든. 너한테 묻고 싶은 건 딱 하나뿐이야.

그래서…… 감상이 어때? 소설의 틀이 깨졌을 때.

모든 게 사실은 네 이야기라는 게 밝혀졌을 때 네 기분이 어땠느냐고.

잠깐만, 이봐…… (웃음) 자빠지면 어떡해? 자, 여기 손을 줄 테니…… 뭐라고? 잘 안 들려……. 미쳤다고? 개새끼라고? 알았으니까 내 손이나 받아…… (얼굴에 피가 튄다) 거참 왜 이렇게 야단법석인지 모르겠군.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돌아서서 걸으며) 좋아, 좋아! 맘대로 해. 혼자서 일어나 보라고! 우린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섰어. 우린 지금 시퍼런 바다 아래 직면했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단 두 가지야─T처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든가, G처럼 졸렬하게 내빼다가 나자빠지든가. 똑같은 상황에 처하고도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어, J. 저기 있는 G를 봐. 보랏빛으로 부었지. 푸른색이 멋대가리 없는 죽음으로만 나타났을 뿐이야. 반면에─T, 그 사려 깊었던 친구─T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자고. 그는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지. 그는─한평생 잊히기 아까운 놀라운 예술 작품으로서 남았어. 그게 진정한 푸르름의 방향이야, J─우리는 죽음과 작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해. 너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어? 비겁자, 아니면 불멸?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한테도 야망이 있다면 소리 내 외쳐 보란 말이야, 이 겁쟁아! 그리고 마침내 무대가 열립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렇게 활짝─(커튼을 활짝 젖힌다) 여러분 이 광경을 좀 보십시오!

경솔하고 민첩하게. 다른 말로 부박하고 용감하게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금세 무릎에 힘이 풀렸다. 어찌 그리 순식간에 모든 의지가 박살 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창밖에는 내가 없었다. 나와 다른 존재들만이 죽은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완전히 잘못된 세계에 와 있다. 내 영혼의 푸른 허영이 독백했지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세계란 것을 알았다. 나쁘지 않은 세계였다. 하지만 흙이 없다. 황급히 나의 화수분을 파헤치는 내 손가락이…… 아, 그래! 아무렴 그렇지! 화분은 물기로 가득 찼다. 푸른 장미는 뿌리째 썩어 있었다.

엉거주춤…… 뒤로 주춤대며 물러나는 내 꼴이 보인다. 보이지 않아도 뻔하다. 영락없는 쥐새끼 모양이다. 온몸은 젖었고 소 뒷굽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실례. 이건 J의 얼굴이지.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신음한다. 내 주먹에 떡이 된 두 볼과 턱이 처량하다. 비참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쓰러져 있다. 오오, J. 그대 정녕 찾아냈군. 저게 바로 내가 찾던 몰골이다. 고난과 역경에 지친 두 눈, 피멍과 흉터로 부어오른 살갗. 그러나 결코 지지 않고 이글거리는 생을 향한 투지. 나라고 왜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겠어, 하지만 나는 너무 두렵다…… 저 선택을 강요하는 색깔들이. 왜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가? 나도 저들처럼 방관하며, 전지적 시점에서 남들을 평가하기만 해선 안 되는가? 아, 신이시여……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참담한 탈주병의 심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창가의 반대편으로. 복도 저편에서 흘러넘치는 물소리를 응시하며, 뒤로는 철문의 양각 무늬를 한붓그리기 하듯 손가락으로 쫓으면서. J가 내 모습을 보고 몸부림친다. 그 생의 투지가 흔들린다. 미안하다, 친구여. (달그락거리는 소리) 울부짖지 말아라. 피투성이 고행자여, 그대는 기억될 것이다. 파괴될지언정 쓰러진 적 없는 인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망친다. 도망치련다. 본래부터 항상 비겁한 인간이었다. 뭔데, 당신은 아닐 것 같아? 당신이라면 당당히 두 발 뻗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아? 너희가 잠긴 이 심해에서? 하! 하! 하! 뜻대로 해 보시게, 여러분. 나는 이만 퇴장할 테니. 그리고 저쪽의 괴물! 이놈, 두억시니야. 네가 나를 잡을 수 있을까? 원한다면 그 창을 넘고 쫓아와 봐라. 이 몸은 이쪽으로 간다. 저 광활한 인X수X 아래 숨으면, 아무리 너라도…… 찾기가 어렵겠지! (난 쥐새끼 가면을 쓰고 도망칠 테니까!) 그게 바로 서로 돕고 사는 우리네 인간들이라 이 말씀이야!

그리고 나는 문을 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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