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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속박

2020.09.30 21:2909.30

‘내가 왜 여기까지 와 있지.’

정신없는 걸음 후 정신을 차려보면 숲의 낯선 곳까지 와 있는 예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곧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숲의 근방에서 우림과 다투고 난 후에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게 이 정도로 정신을 빼앗겨 버릴 일인가 하는 자문의 답은 ‘그렇다’였기에 놀랍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이상 신경을 쓰기엔, 눈앞의 생소하지만 분명한 것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그가 더 큰 근심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음울한 녹색들 사이에서 과연 빛이 나는 저택은 무시하기 힘든 것이었다. 예인은 다시금 소문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법…. 이것도 마법?

그는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섰다. 숲속의 아름다운 저택에는 마법사가 산다고 했다. 그 내부엔 값비싼 보물들과 괴상한 주문들이 적힌 마법책들이 가득차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마법사는 사람들을 적대하며 차갑고, 침입자에겐 무시무시한 응징이 가해지기 때문에 접근해선 안 된다고 했다.

별안간 억센 물방울들이 머리칼과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예인은 굳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에겐 지금 그런 말들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을 맞기 위하기라도 한 듯 열려 있는 저택의 정문으로 멍하니, 적당한 속도로 걸어갔다.

경계를 넘자, 무시무시한 응징 따위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그건 안에 응징을 내릴 누군가가 있을 거란 예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어 왔다.

화려한 외부와 달리 칙칙한 내부의 인테리어는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발을 들이고 있는 홀은 그랬다. 그는 그곳을 가로질러 꺾어지는 복도에 들어섰다. 방들을 무시하고 한 번 더 꺾으니 그의 속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왠지 마법이 담겼을 것만 같은, 주변이 예쁘게 장식된 영롱한 샘이 그 끝에 있었다.

물은 깨끗하게 반짝였지만 바닥을 보이진 않는 채였다. 예인은 그 신기한 것에 홀린 듯 접근하다 그만 놀라고 말았다. 주저앉아 물에 비친 것을 더 자세히 보았다, 스스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그 자신을.

‘내가 이렇게 험한 몰골이었던가?’

옷은 더럽고 얼굴은 핼쑥하고 표정이 좋지 않다. 마치 험난한 오지를 며칠간 탐험한 사람처럼, 변변한 것도 먹지 못한 채…. 그러고 보면 위가 비어 있음을 느끼는 그이다.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지. 그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인은 일어서 도망치듯 거울을 뒤로 했다. 그가 다음으로 발을 들인 곳은 부엌이었다. 이상한 느낌마저 주는 뱃속의 허기를 먼저 해결해야 했으니.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다란 식탁 위의 음식들은 딱 봐도 썩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 사람이 없게 된 지 꽤 됐을 거란 생각을 잠깐 한 뒤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 나갔다. 악취에 한 손으로는 코를 막으며 느리게, 그러나 세심하게 뒤지는 수고의 끝엔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냉장고에 든 생야채는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수납공간들엔 조금의 향신료와 소스만이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허탕을 친다면 생야채라도 먹을 생각으로 부엌 근처의 ‘창고’라 쓰인 문을 열었고, 그러자 처음으로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거기에 온갖 장기 보존적인 식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온갖 종류의 것들이 뒤섞인 지저분한 곳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니고 있던 칼로써 바로 통조림의 내용물을 떠먹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배가 채워지고 나서야 다른 생각, 이를 테면 이 널찍한 창고를 둘러볼 생각이 드는 그였다.

식품들 외에 또 일관성이 느껴지는 것은 예술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 그가 허기지지 않았더라면 가장 먼저 그것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을 것이다. 뒤늦게 그리 된 그는 잡동사니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 흉상 앞에 섰다.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안면, 눈을 덮은 검은 천… 을 차마 그는 만지지 못한다. 등골을 타고 찬 기운이 흘러내렸다. 가까이서 눈에 담은 불쾌한 익숙함이 천의 안쪽을 확인하는 것을 허하지 않고, 그것에서 멀어지라, 이곳을 벗어나라 명하고 있다. 그것에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예인은 빠르게 창고를 벗어나 문을 닫았다. 방금 전을 못 본 것으로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록 더욱 강하게 감겨 오는 현상은 일종의 속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그 생각에 집착하는 대신 다른 주제를 끌어들였다. 여기 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된 걸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 바로 보이는 문들 중 가장 가까운 것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놀란 전적이 있는 그의 마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인의 정체와 행방에 대해서도 말이다. 방 한가운데를 크게 차지한 장미 덤불. 그 안의 가시덤불. 그 안에 갇힌 사람의 상. 이것들에선 그 어떠한 정보도 읽어낼 수 없다, 머릿속에 달라붙은 불길한 이미지를 강화할 뿐. 그는 더 가까이 가지도 않은 채 뒷걸음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의 여닫음 끝에 예인의 머릿속에 하나의 정보와 하나의 결심이 섰다. 1층의 방들의 기괴함(가장 심한 것은 방 안에 조성된 미로였다.)들은 설치 미술이라 할 수 있어 보였다. 아마 예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아. 그에 대한 더 많은, 좀 다른 정보는 위층에서 얻어야겠어.

2층의 방문은 아래보다 적었다. 먼저 열어 본 몇 개의 문들이 그동안과 똑같은 광경을 보여 주었으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남은 것들 중에 주인이 주로 쓰던 방이 있겠지. 그러고 보면 보물이랑 책도 거기 있으려나.’

그렇다 해도 이미 가득차 있다고 볼 순 없는 것 같지만. 대체 이런 소문들은 누가 퍼트리는 거야? 예인은 그것들이 항상 희박하게 진실과 일치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젠, 지금의 그것이 반이라도 맞아 드는지 확인하기에 2개의 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따로 떨어져 향하는 방향이 달라 뭔가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이 적힌 금속판이 붙어 있었건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식별할 순 없었다.

따라서 그는 별 기대를 갖지 않은 채 가까운 것에 먼저 손을 댔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압도당하고 말았다. 낮은 기대감이 보기 좋게 배반당했기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있었기에. 그렇지만 시선을 때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럴 수가 없었다. 아까의 도망침은 결국 무용지물이었다. 커다란 액자에 걸린 자신이 자신을 붙잡은 채 놓아 주질 않는다.

‘내가 왜 저기 그려져 있지…?’

이유를 떠올려 낼 수가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지만 그중 어떠한 것도 산뜻하지 못하다. 짜증이 울컥 샘솟아 그는 굳게 앞으로 나아갔다. 반드시 뭔가를 알아내겠어, 그런 그의 눈에 이번엔 책상 위의 화려한 상자가 눈에 띈다. 옆에는 채 걸리지 않은 자물쇠가 놓여 있다. 뚜껑을 열자,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배반당하고 말았다.

놓인 것은 화려한 보물이나 그것이 사라져  빈 풍경이 아닌 칙칙한 색의 두터운 공책이었다. 표면의 글씨, 지우. 이게 주인의 이름인가.

-오늘 숲에서 길을 잃은 마을 사람을 도와줬다. 그는 답례로 돈을 주고 떠났다.

-또 그 사람을 마주쳤다. 밀렵꾼의 덫에 걸린 그를 하는 수 없이 내 집에서 치료했다.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만 대화에 말려들어 버렸다. 예술적인 대화에 말이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하마터면 예인이 저택에 걸린 방어 마법에 걸릴 뻔하였다. 돈 따위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니다. 저번의 보답으로 먹을 것을 주러 온 것이었다. 앞으로도 종종 선물을 가지고 찾아오겠다고 했다. 차마 거절하는 대신 나는 그에게 방어 마법을 무시할 반지를 주었다.

.

.

.

-예인의 생일에 보여 줄 것을 작업하는 중이다, 창고에서.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한 서재에서 할까 잠시 생각했으나 역시 그건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요즘 예인의 낌새가 이상하다. 나를 피하고, 멀찍이서 나를 관찰하는 눈치다. 알 수 없는 실없는 질문들을 해 오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시간에 맡기는 것뿐.

-작품을 완성했다. 눈을 가린 것은 미완성이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실은 나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바로 내일이 생일이건만 우린 아직 개선되지 못했고 난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래도 내일은….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림의 얼굴에 곧 엷은 미소가 번진다.

“네 말대로, 그 책에 나온 대로 자주 그 동작을 하더라. 눈이 침침하고 손이 떨린다고 하고. 그리고 도무지 서재를 보여 주려고 하질 않아.”

예인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 채 시간을 끌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순간이 와 버리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반지를 지닌 우림, 지우와 친구였다던 그의 충고가 진실로 느껴지는 순간이.

“난 어떻게 하지…?”

“이미 알고 있잖아.”

 

-난 지금 꽤 급하게 이 글을 써 내리고 있다. 떠오른 좋은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예인이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해도 내가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가 한 말로 보아 우림이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 불온함을 되돌리기 위해 서재로…. 문소리가 들린다. 분명 그야.

마지막 문장을 뒤로 하고 예인은 꽤나 다급한 발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잔상이 오차도 없이 그를 따르는 것인지 그가 따르는 것인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망설임은 죽고, 끝냄의 순간이라는 본능적 직감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

은색 칼은 아주 깊게 박혀 들었다. 하필 마지막 모습이 그의 분노를 부추겼기에.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 곳에서 자신은 마법책을 뒤지고 있는 모습. 또 무슨 꿍꿍이를 펼치려고?

“카펫… 더러워지는데….”

뭐?

그는 엎어진 몸 뒤에서 얼어붙었다. 이상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데, 자신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 얘기와 다르잖아. 그러고 보면 이 공간도 뭔가 다르잖아. 그의 예상과는 달리 협소한 공간에 작은 책장에 적은 책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야, 안 돼.”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는 책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법에 관련한 거라곤 하나도 있지 않다. 마지막 남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사랑에 빠지게 하는 주문, 사랑에 빠지게 하는 주문….

예인의 눈동자는 공허하다. 흉한 시신은 그가 우림과 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몸을 숙였다. 끝 페이지가 펼쳐진 책이 마치 당연하게 정해진 것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그것을 보자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됨과 동시에 지금이 반복할 때임을 알았다.

“…….”

머릿속의 특정한 파편들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고 나서야 이곳에서 나갈 기분이 드는 그였다, 그것도 빠르게. 빠르게, 그는 서재를 나서 복도를 흘러 계단을 내렸다. 다시 문들을 지나치고 칙칙한 홀에 들어서 정문을 열었다.

아직 비가 내렸다. 예인은 그 한복판으로 처음이 아닐 뜀박질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 비도 처음이 아닐지 몰랐다. 그게 온통 피를 씻어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가 기억을 더욱 바래게 하는 느낌이었을까. 그때? 그때가 언제지?

더욱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감각, 자신은 달아나고 있다는 감각만이 남았다. 무언가로부터. 그게 뭐더라,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멸의 직전 희미하게 빛난 안타까움이 그를 멈췄다. 시선의 끝엔 빛이 나는 저택이 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 있지.’

 

 

 

* 러블리즈의 오블리비아테에서 영감을 받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9GUqqRzIZgw

https://www.youtube.com/watch?v=TArBtJ0Iw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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