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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해피 해피 애니멀

2020.09.28 16:5509.28

2093년 12월 25일. 관찰 1일차

구슬처럼 깨끗하고 까만 눈 위에 살짝 잡힌 쌍커풀. 약간 멍청하지만 순진하고 활력 넘치는 성격. 안기고 싶은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까지. 알고리즘이 내 시냅스까지 분석한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사모예드 한 마리가 왔다. 엄마의 강력한 반대로 동물이라면 홀랑 마음을 뺏겨 버리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렸을 때부터 햄스터 말고는 한 번도 인간 이외의 포유류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은 없었는데, 잘 키울 수 있으려나.

 

2093년 12월 26일. 관찰 2일차

달력 쪽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자고 있더니 내가 포인터를 움직이자 졸린 눈으로 열심히 꼬리를 흔든다. 설명서에 따르면 먹이는 하루 두 번, 쿠키나 폐기 문서로 주면 된다. 딱히 버릴 만한 문서가 없어서 위키피디아에서 사향 고양이에 관한 문서를 복사해서 줬더니 꼬리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귀가 축 쳐졌다. 내일은 다른 먹이를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항상 바탕화면에 있던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분양 받을 때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너무 많으면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조언을 새겨듣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창문 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384개의 문서를 모두 열어보고 나서야 동아시아 지부 요원들의 위치가 담긴 기밀문서에서 복실이를 발견했다. 상부에 보고해야 했지만, 보고 즉시 전량 회수 조치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연구가 모두 끝나면 언젠가는 보고를 할 것이다. 언젠가는.

 

2093년 12월 27일. 관찰 3일차

오늘은 늑대에 관한 문서를 복사해서 줬다. 복실이는 마치 하얀 눈밭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흰 바탕에 놓인 글자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원래 사모예드는 활동력이 좋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꼭 산책을 시켜줘야 하는데 다행히 복실이는 10분 정도만 아이콘으로 터그 놀이를 해주면 만족도가 유지된다. 하지만 1시간 이상 접속을 하지 않으면 삐져서 뒤돌아 있거나 폴더 사이로 숨어버린다. 두세 번 쓰다듬어주면 금방 다시 꼬리를 흔들기는 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복실이가 마주해야하는 모니터 저편의 공간은 너무 삭막하고 공허했다. 모니터의 끝에 볼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복실이를 보다가 결국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했다. 일 핑계를 댔더니 4시간이 넘도록 답장이 없다. 복실이 간식만 주고 전화를 해 봐야겠다.

 

2093년 12월 28일. 관찰 4일차

늘 포인터만 흔들면 활기차게 뛰어다니던 복실이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옆으로 드러누워 축 늘어져서 좋아하던 쿠키에도 반응이 없었다. 황급히 사용설명서를 읽어보니 모니터가 한 대만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54%나 증가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테란트론 사의 특수 모니터를 한 대 사야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요원 A-38759.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나?”

“아직까지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돌보는 데 드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단순한 방치형 육성 게임으로 보입니다.”

“이제 행성 내 이용자가 3500만 명으로 늘었어. 앞으로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네. 조금이라도 이상 신호가 있으면 꼭 보고를 하고. 분명히 우리 쪽 기밀문서를 훔쳐가려는 공작일거야. 아니면 네트워크를 완전히 망가뜨리든지.”

“네. 꼭 보고하겠습니다. 화성에서는 별 일 없습니까?”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아직은 움직임이 없네. 도무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으니 원.......”

“그렇군요. 특이한 점이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팀장님, 연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는 테란트론 모니터가 한 대 필요하다고 합니다.”

“화성산(産) 물품을 사게 하려는 경제적인 공작인가?”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알아보니 모니터를 만드는 업체는 직원도, 회사도, 자본도 다 지구 쪽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니터로 화성이 이익을 보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거죠. 그리고 가격도 무척 쌉니다. 모니터 하나에 E-35형 건전지 한 개 값 정도니까요.”

“그것도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모니터는 보내줄 테니 절대 방심하지 말고 계속 보고하게. 그 모니터 업체는 내가 따로 알아볼 테니까.”

“예, 그러면 수고하십쇼.”

 

2093년 12월 29일. 관찰 5일차

복실이는 이제 완전한 성체가 되어 쿠키를 먹거나 다른 강아지를 발견하면 하울링도 하고, 100cm나 되는 모니터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구름 같은 솜털로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복실이는 차갑고 딱딱한 모니터 속에 갇혀 있었다. 만질 수도,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존재, 나의 복실이. 디지털 반려동물 커뮤니티에 들어가니 나와 같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마우스를 공동 구매한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이 마우스는 초창기 광마우스 형태로, 동그란 외형에 시냅스에 자극을 주는 센서가 달려 있어 마치 진짜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구매하기를 눌렀다.

 

2093년 12월 31일. 관찰 7일차

“팀장님. 다름이 아니라 비품명세서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스피커가 필요한데요. 역시 테란트론의 자회사인 테란 테크의 스피커로.......”

“스피커? 지금 스피커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네. 드디어 화성 놈들의 속셈을 알아냈다고! 저번에 산 모니터. 전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아나? 4KW야. 자그마치 4KW! 에어컨 열 대 분량의 전기를 그 작은 모니터 하나가 잡아먹는다고! 환경오염 때문에 행성 운송 수단의 70%를 전기 기반으로 바꿨는데, 모니터에, 스피커까지 전력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겠나? 여름도 아니고 한 겨울에 행성 전력 수급에 빨간 불이 켜졌어!”

“팀장님 하지만 여기서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놈들이 해피 해피 애니멀을 배포한 진짜 이유를 몰라요. 어쩌면 정말 기밀문서를 노린 걸 수도 있다고요!”

“자네 눈에는 이 뻔한 사실이 안 보인단 말인가? 화성에는 행성 전체의 전기를 공급하고도 남을 발전기가 있다네. 모래 폭풍의 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기 때문에 자원 하나 안 들이고 전기를 생산하지. 과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전기료가 거의 0원이 된 후로 행성 전력의 적자 수준이 이미 한계치를 넘었어. 이러다가는 지구 전체가 멈추는 건 물론이고 경제도 다 화성 놈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거야!”

 

그러나 이미 남자의 귀에 팀장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홀린 듯 모니터를 쳐다보더니 팀장의 호통에도 아무 말 없이 인터넷에서 테란 테크의 광마우스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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