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난춘(亂春)

2020.09.28 16:4209.28

1. 잃어버린 무덤

 

벌써 5일째였다. 여자는 무료하게 서 있는 무인 대출반납기 대신 굳이 독서 중인 자신에게 와서 책을 내려놓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창문틀에 쌓여가는 벚꽃 잎이 무색하게 남자는 기다란 연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일부러 관찰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의 눈동자 색도 그의 코트와 비슷한 연갈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마치 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항상 허둥지둥 지갑을 꺼내 대출카드를 내밀었다. 이제는 아무도 플라스틱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바코드를 인식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구태여 편리한 모바일 카드를 발급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매일 두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빌렸다. 두 권 모두 표지가 너무 바래서 제목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여자는 함부로 이 책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도서관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과거의 무덤이었고, 여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왕릉을 홀로 지키는 고고학자였다. 이제는 펼치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종이책을 꾸역꾸역 관리하기 위해서 여자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것이 순전히 망상적인 안도감을 안겨준다고 해도, 어쨌거나 여자는 그런 안정감을 무엇보다 원했다.

여자는 이미 제 본분을 다 한 책을 보며 남자가 정말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남자에게 말을 거려는 시도는 매번 입술을 달싹이는 것에 그쳤다. 여자는 가끔 이곳을 방문하는 노인들에게 이곳이 얼마나 멋진 지 재잘거리곤 했다.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 더 나아가 디지털을 거부하는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와의 대화는 그녀에게 소소한 행복이었고, 이 일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여고에 처음 부임한 남교사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남자의 연갈색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여자는 도무지 인사 한 마디 건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이 언어 능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해버린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었다.

남자 또한 항상 말없이 책과 카드를 내밀고, 말없이 책과 카드를 받아들었다. 그의 큼직한 손이 책을 쥘 때에도 남자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한 평가의 눈빛이나 무례한 관심의 표시는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 그리움, 그리고 동경이었다. 여자는 생전 처음 보는 이 남자의 동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나마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자의 발걸음은 느리고 규칙적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운동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고개를 들자, 또 다시 광활한 사막 같은 고요함이 여자를 덮쳤다. 그녀는 또 다시 외로워졌다.

시계바늘이 6을 가리키고 여자는 익숙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도서관에 남자 이외에 사람이 방문하지 않은지도 벌써 한 달 째였다. 여자는 수 만 번은 더 움직였을 경첩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스위치로 불을 끄고, 열쇠로 문을 잠갔다.

4월인데도 해가 지니 날이 영 쌀쌀했다. 그녀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대두됐던 이상기후 논란이 올해도 어김없이 신문을 찾았다. 여자는 인공지능 어시스턴트인 안나가 읽어주는 주요 뉴스들을 들으며 과연 내년에는 이 케케묵은 논쟁을 끝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여자는 문 밖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낯선 형체에 헉하고 숨을 삼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허수아비를 본 참새가 된 기분이었다. 도서관 정문 옆 오래된 자판기 옆에 남자가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었다. 아까 빌려간 안드로이드 사냥꾼에 관한 소설이었다. 여자가 놀라서 내지른 숨소리를 듣고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눈에 비친 공포심을 느꼈는지 남자는 살짝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

여자는 사람의 대화가 원래 그렇듯, 자연스럽게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남자는 읽던 페이지에 엄지손가락을 채운 채 멀뚱히 여자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책은 어때요? 그저께도 빌려 가셨던데.”

“재밌네요.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거든요.”

“나이가 많지 않아보이시는데, 어떻게 종이책을 읽을 생각을 하셨어요?”

여자는 2m 간격을 유지하며 어색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들과의 대화에 관성이 생겨버린 입은 실없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요즘에는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정말 적거든요. 실은 시청이 빨리 이 돈 먹는 고물을 폐쇄시키고 싶어 해요.” 남자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는 이런 어색한 상황이 못 견디게 싫었다.

날이 쌀쌀하다 했더니, 여우비가 언제 여름 장마를 내려 보내면 좋을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남자의 반대편 손에 들린 빨간 장우산이 눈에 띄었다. 원목으로 된 두꺼운 우산 손잡이 밑에 가지런한 주름이 20세기 중반 유행했던 스커트를 연상시켰다. 여자의 하늘색 에코백에는 비를 가려 줄 무엇도 들어있지 않았다. 여자는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저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우산 좀 씌워주실 수 있을까요? 집이 정말 코앞인데 깜빡하고 우산을 안 챙겨왔네요.”

“그래요.”

우산을 펼치면서 남자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여자는 정적을 깨려는 뇌를 잠재우기 위해 잠시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에 집중했다. 여자는 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좋아했다.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을 들고 좁은 방에 굳이 돔형 천장을 달겠다고 고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자는 매일 밤마다 안나가 틀어주는 가짜 빗소리가 마치 진짜처럼 들리길 바랐다. 그러면 창문에 비치는 햇살 대신 알람과 함께 서서히 밝아지는 천장의 조명이 덜 비참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돼요. 정말 가깝죠? 다들 직장이 집이랑 이렇게나 가깝다고 부러워해요.”

여자는 요즘 트렌드에 맞게 터키 블루로 칠해진 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한국 사람들이 뽑은 아름다운 도시 1위에 빛나는 산토리니의 흰색 집을 그럴싸하게 꾸며낸 집이었다. 네모나게 각진 3층짜리 집 위에 그리스 정교회를 연상시키는 둥근 돔이 광고 잡지에 나오는 아이스크림처럼 부자연스럽게 얹혀 있었다.

“저...... 갑자기 드린 부탁인데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감기는 안 걸리겠어요.”

여자는 진심을 담아 웃어보였다. 요새는 웃을 일이 많지 않았지만, 봄비에 옷이 젖어 여름 내내 감기를 달고 다니는 일을 피한 것은 분명 그 중 하나였다. 남자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흔쾌히 우산을 씌워주긴 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서 자신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피드백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대화에 절박하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던 시도를 남자가 눈치 챈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여자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쉽게 날릴 생각이 없었다.

“저, 혹시 시간 되시면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그래요.”

남자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2. 잠금 해제

 

지연은 지하 23층에 산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만났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연이 지하 23층에 산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대놓고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남자도 있었고, 그 사실을 이용해서 야금야금 지연의 자존심을 갉아먹으려는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선호는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지, 아래로 내려가는 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건강한 생매장의 충실한 도구가 되어주는 동안, 습관적으로 지연은 침을 크게 삼켰다. 아름다운 도시 프로젝트 이후 없어진 고층빌딩 대신 생겨난 새로운 문화 현상이었다.

지연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서둘러 카디건을 벗고 분주하게 밥을 준비했다. 선호도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대신, 니트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그녀를 도왔다. 요리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지연이었지만, 선호의 칼질 솜씨는 지연이 주눅이 들 정도였다. 전문 요리사의 실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연은 같은 식도락가로서 요리에 대한 선호의 애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요리 자주 하시나 봐요?”

“그냥 음식을 좋아합니다.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애정이 좋아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는 그래서 일본식 달걀찜을 참 좋아해요. 별거 아닌 재료에 별 거 아닌 음식이지만, 만드는 과정이 수고스러워서 한 입 먹을 때마다 만든 사람의 애정이 느껴지거든요. 저는 달걀찜에 칵테일 새우를 두 개 정도 넣는데,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저도 해산물을 좋아해서요.”

“비슷한 점이 많네요.”

선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선호는 식탁 위에 따뜻한 잡곡밥 두 공기와 꽃게를 넣은 된장찌개, 새우를 넣은 일본식 달걀찜, 오이소박이가 차려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누구에요?”

식사를 마치고 거실을 둘러보던 선호는 덩굴식물이 화려하게 수놓은 철제 액자 속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앳된 얼굴의 지연은 지금과 거의 똑같은 머리를 하고 있어서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 빼면 어제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엌에서 복숭아 타르트를 들고 오던 지연이 선호가 들고 있던 사진을 발견했을 때, 지연은 갑자기 시공간이 바뀐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다시 그 때의 악몽이 지연을 덮쳤고, 지연은 무표정한 선호의 얼굴을 지연을 취조하던 형사의 얼굴과, 지연을 추궁하던 선생의 얼굴과, 그리고 지연을 끝없는 정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한 반 아이들의 얼굴과 구분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에요.”

“이런 말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액자에 끼워 둘 정도면 엄청 친한 사람인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죽었어요. 그 친구.”

사진을 내려놓던 선호의 움직임이 멈추고, 다시 차가운 정적이 파도처럼 지연을 덮쳤다.

“갑자기 우울한 얘기로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였는데, 수능도 못 쳐보고 . 그냥 잊고 싶지는 않아서 거실에 둔 거에요. 그게 다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건 정말 실례겠죠?”

선호의 말에는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와 같은 집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지랖 넒은 먼 친척의 무례함이나, 소문에 민감한 사춘기 아이의 호기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호의 말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졌다. 지연은 어쩌면 선호가 진짜 연희의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선뜻 알려주길 꺼려한 것도, 너무 쉽게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것도, 어쩌면 취재 목적으로 접근한 선호의 미끼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연은 물장구 한 번 치지 않고 제 발로 헤엄쳐 미끼를 문 바보 같은 물고기였다.

그러나 선호가 진짜 기자라면 어떻단 말인가? 지연은 사람들의 시선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더는 이 사건을 숨길만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연희가 자살을 한 것도, 그리고 그 원인이 지연인 것도, 그리고 무수한 소문들도 결국은 모두 사실이었다.

“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그 친구 이야기는 궁금하신가 봐요.”

“미안합니다.”

선호가 딱딱하게 사과했다. 지연은 선호가 사진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는 충동적인 욕구와 마주했다. 그러나 그 욕망에는 도서관에서 선호를 마주쳤을 때 느꼈던 무의식적인 억압과 비슷한 불쾌함이 얽혀있었다.

“아니에요. 이제는 오래 전 얘기라 저는 상관없지만, 이름만 겨우 아는 선호 씨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 걸 연희가 원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연희는 자살했어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학을 왔는데, 둘 다 아동 보호센터에서 자라서 금방 친해졌죠. 모든 아동 보호 센터가 그렇기는 하지만, 연희가 있던 아동 보호센터의 원장이라는 사람은 특히 더 쓰레기였어요. 들어가 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아니까, 센터 대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날이 더 많아졌고, 그렇다고 연희가 나쁜 패거리와 어울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플로라를 했어요.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됐는데, 저는 사태가 심각해지는 게 싫어서 선생님한테는 사실 제가 플로라를 구해다 준거라고 둘러댔죠. 저는 성적이 꽤 좋았고 선생님들하고도 친해서 별 문제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메모리 계통 약물이 기억을 잊게 해주는 부작용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좋은 성적이 오히려 족쇄가 돼서 경찰조사부터 교육부 감사까지, 사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졌어요. 형사 조사를 받으면서도 처음에 했던 주장을 고수한 덕분에 사건은 연희와 저 모두 3개월 정학 처분과 500시간 봉사활동 명령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 됐지만, 징계가 모두 끝나고 교실에 들어갔을 때, 저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고, 다시는 옛날처럼 학교를 다닐 수는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저한텐 연희가 있었고, 연희한텐 제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연희는 아니었나 봐요. 연희는 저를 연루시켰다는 죄책감에 플로라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고 저와 그것 때문에 크게 다툰 뒤에 연희는 결국…….”

지연은 숨도 쉬지 않고 사건을 나열하다 연희의 죽음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미 수 십 번도 더 진술한 내용이었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당시 사건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지연의 말이 끝나자 선호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지연의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연은 담담하게 선호의 눈을 마주했다. 이제 친구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힐난이나 친했던 친구의 죽음에 대한 어쭙잖은 동정이라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따라 올 차례였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네요. 당신은 이렇게 살고 있어서는 안돼요.”

선호가 지연의 집을 나서면서 한 말은 그게 다였다.

 

3. 유니온 연구소

 

선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집을 나가버린 이후로, 도서관에는 또 다시 쓸쓸한 적막만이 지연의 곁에 남아있었다. 지연은 선호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여태까지 만났던 수많은 부질없는 인연에 비하면 그다지 나쁜 결말을 아니었다고 애써 위로했다.

지연은 평소처럼 아무도 쓰지 않아 먼지가 쌓인 책상을 닦고, 아무도 찾지 않는 책들을 정리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반납대에 앉아 그나마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뒤적였다.

지연은 봄을 탔다. 벚꽃 잎이 지는 계절마다 찾아오는 연희에 대한 상념이 떨어지는 낙엽보다도 지연을 외롭게 만들었다. 지연은 연희의 새하얀 얼굴을 볼 때마다 목련화를 떠올렸다. 무거운 꽃 때문에 처량하게 휘어진 목련화, 벚꽃에 밀려 사람들의 눈길을 받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밟히는 목련화. 4월 13일이면 지연은 빠지지 않고 연차를 내고 먼발치에서 연희의 무덤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묘지 근처에서 자라는 목련화의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 무덤 근처에 뿌려두었다. 아마 연희라면 무덤 앞 비석에 비닐로 포장된 꽃을 두는 것보다 이것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책 대신 하염없이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고 있던 지연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김지연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택배입니다. 물건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파란 유니폼의 택배 기사는 주먹만 한 박스를 지연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지연이 누구한테서 온 택배냐고 묻기도 전에 다시 문을 나섰다. 지연은 책상 위에 놓인 연필꽂이에서 커터 칼을 꺼내 ‘발신인: 유니온 연구소’라고 적힌 택배를 열었다.

택배 안에는 손가락 크기의 까만색 플라스틱이 하나 들어있었다. 도서관의 유일한 컴퓨터가 20년 전 출시된 4세대 컴퓨터였기 때문에 지연은 끝이 둥근 이 까만색 플라스틱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지연은 능숙하게 택배에서 플라스틱을 꺼내 컴퓨터 모니터 옆면에 꽂았다. 외장 드라이브가 인식됐다는 알림창이 모니터에 뜨고, 지연은 폴더 안 유일한 파일인 <연구파일_시나리오23>을 클릭했다.

 

-생후 3개월 때 성당이 운영하는 아동 보호센터 베이비 박스에서 발견.

-5살 즈음 어린이집 하원 후 집에 아동 보호 센터에서 오후 간식 시간에 키위를 먹다 포크로 입천장이 찔림. 빨간색 포크, 밝고 나른한 분위기. 놀란 수녀님과 친구들.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감. 살짝 찔려서 꿰매지는 않고 연고를 바른 후 한동안 미지근한 죽만 먹음. 그 후로 키위를 싫어하고, 신 맛이 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음.

-6살 봄, 아동 센터에서 단체로 소풍을 감. 그곳에서 처음으로 잎이 커다란 흰 색 꽃을 봄. 수녀님께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 목련이라는 대답을 들음. 누구랑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하얀 꽃만 기억함.

-6살 여름. 오후 간식 시간에 나온 키위를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수녀님이 몰래 복숭아를 한 조각 깎아줌.

 

파일은 지연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다. 해마다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아기는 수 천 명이 넘었고, 그 중에서 목련과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기록을 읽을 때는 누군가 이미 돌아가신 베르타 수녀님이 적어놓은 일지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동 센터 기록을 발견한 사회복지사가 수녀님이 정성스럽게 작성한 양육 일지를 본인에게 보내주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연은 곧 이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에는 지연이 처음으로 야한 동영상을 접한 날과 처음으로 자위를 한 기억까지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지연의 머리는 당장 파일을 지우고, USB를 불태우고, 집에서 짐을 챙긴 뒤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지연은 자신의 인생을 읽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지연의 인생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은 둘째치고라도, 도대체 누가 24년이나 이 파일을 숨겨두고 있다가 이제 와서 파일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도서관에 USB를 보낸 것일까?

지연은 차마 마지막 줄까지 읽을 자신이 없어 서둘러 수백 페이지가 넘는 파일을 닫고 USB를 꺼낸 뒤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그리고 문을 나서자마자 1층 자판기 옆에 기댄 선호를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연 씨.”

도서관 옆에 얇은 롱코트를 입고 있는 선호를 보자마자 지연의 머릿속은 <희대의 살인마, 이선호 도서관 사서 스토킹 후 살해> 따위의 헤드라인들로 가득 찼다. 지연이 들고 있는 것 중에서 그나마 무기로 쓸만한 건 녹이 슬어 끝이 뭉툭해진 열쇠뿐이었다. 그러니 양 손에 가방과 열쇠를 들고 엉덩방아를 찧은 지연이 선호에 대항해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효율적인 냉난방이라고 적힌 표어와 함께 365일 잠겨 있는 도서관 한 쪽 문이 마치 지연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거 알아요. 지연 씨. 지연 씨한테 상처만 주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한데……. 그 파일, 사실은 제가 보낸 거예요. 직접 와서 설명을 드렸어야 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자신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이렇게 오게 됐어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니,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지연은 선호가 자신을 꾀기 위해 무슨 말을 하는 지 집중하면서도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 선호를 자극할까 싶어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지연은 베수비오 화산에 잠긴 미라처럼, 꼼짝 않고 문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제 지연은 허수아비를 보고 놀란 참새가 아닌, 사냥꾼에게 총알을 피해 죽어라 달려야 하는 참새였다.

“지연 씨. 사실 제 이름은 선호가 아니에요. 제 이름은 사실 의진이에요. 심의진. 그리고 그 파일에 지연 씨 인생이 그렇게 낱낱이 적혀 있는 이유는 원래 제가 지연 씨 몸에 살았던, 그러니까 제가 사실은 지연 씨의…….”

선호, 아니 본인을 의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이제 지연이 사실은 자기의 신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지연은 계속해서 도망칠 타이밍을 보고 있었지만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차 한 대 없는 낡은 도서관 근처에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시체로 발견되고 말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저는 유니온 연구소에서 진행한 <인생 재건 프로젝트>의 참가자였어요. 친구의 살인 사건을 목격하고 마약 카르텔의 눈을 피해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 상태였는데, 저는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는 충격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충동적으로 그 프로그램에 자원했어요. 그 프로젝트는 주요 증거인 제 기억을 추출해서 제가 다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어요. 기억을 제대로 추출하기 위해서는 과거 기억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필요하다고, 그게 그 파일이에요. 저는 2045년 6월 13일 수술대에 올랐는데 눈을 떴더니…….”

선호는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숨을 한 번 삼켰다.

“이 남자의 몸으로 깨어났어요.”

지연은 의진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서 말도 안 되게 연기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자신의 망상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정신병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의진은 지연이 문에서 눈을 떼게 할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훌쩍였고, 중간 중간 말을 더듬었으며, ‘프로젝트’를 발음할 때마다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의진의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면, 지연이 받은 파일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당신을 상처주거나 그럴 생각은 정말 없었어요. 정말 나는,”

“내 원래 몸을 되찾으러 왔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 그러려는 생각으로 지연 씨를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에 저를 찾아왔는데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서 사실은 당신 인생이 몽땅 가짜고, 누군가에 의해 쓰인 각본이니까, 내 몸을 다시 되돌려 달라, 이런 말을 할 의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제 앞에 나타나서 이딴 파일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고요!”

“<인생 재건 프로젝트>는 단순히 기억만 추출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저는 죽으려고 했었어요. 말하자면 제 인생을 완전히 포맷시키고 저보다 더 행복한, 누군가에게 새 삶을 주고 싶었어요.”

“막상 죽으려니까 두려웠던 건 아니고요? 본인 입으로 아까 말했잖아요. 충동적인 결정이었다고. 수술대에 올라보니 죽기가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이 불쌍한 남자의 신체로 깨어나서 다시 원래 몸을 찾으려 온 거죠. 내 몸을!”

지연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연희가 죽은 것마저 모두 시나리오였을까? 부유하는 가짜들이 싫어서 사서 일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지연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파일 앞에서 부유하는 가짜만도 못한 가상의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 몸이야, 내 몸이야. 이건 내 몸이야.’ 의진은 온 몸이 부서져라 ‘내 몸이야!’라고 소리치는 지연을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지연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의진은 그것마저 지연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4. 오컴의 면도날

 

면도날에 작은 핏방울이 맺힌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지만, 겨드랑이에만 쓰던 것을 얼굴에 쓰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의진은 푸석푸석한 얼굴을 씻으며 턱을 강타하는 통증을 또 느끼느니 차라리 수염을 기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지속될 거라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다짐은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공포의 선언에 가깝다. 귓가에 울리는 심장소리가 통제를 잃은 메트로놈이 되어 의진의 평평한 가슴 속에서 넘실거린다. 의진은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세면대를 붙잡고 어릴 적 아빠가 데려 간 캐리비언 베이 파도풀에 있다고 상상한다. 너무 커서 제 구실을 못하는 구명조끼를 붙잡으려고 아등바등 할수록 점점 더 높은 파도가 의진의 작은 몸을 덮치고, 의진은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숨을 쉴 수 없다. 하지만 물을 먹는 걸 각오하고 파도에 몸을 맡기면 제 아무리 높은 파도가 덮쳐도 의진은 무섭지 않다. 숨을 쉴 수 있다.

 

의진은 몇 벌 되지 않은 옷장에서 흰색 와이셔츠와 까만색 정장을 챙겨 입고 파란색 넥타이를 매느라 끙끙댄다. 10평짜리 원룸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금고에는 의진을 위한 편지나 일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금고 안에는 운명의 여정을 떠나는 RPG 게임 캐릭터를 위한 장비들이 몇 가지 놓여있었다. 의진의 기억이 담긴 USB와 유니온 연구소를 찾아 갈 수 있는 지도, 그리고 유니온 연구소 출입증이 전부지만, 의진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걱정스러운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의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신체를 내어 준 선호를 위해서라도 함부로 죽을 수는 없다. 의진은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로 간단히 아침을 해먹고 집을 깔끔하게 정리해 둔다. 의진은 선호가 출근했을 때 썼을 법한 배낭에 돈과 휴대전화, 출입증 등을 챙기고 전날 닦아놓은 남성용 구두를 꺼내 신는다.

 

유니온 연구소는 기차를 타고 가야할 만큼 먼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 떠나기 전에 의진은 마지막으로 지연의 집으로 향한다. 의진은 어쩌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생각한다. 모두 부질없는 생각인 것은 알지만, 적어도 기억은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다. 지연의 집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의진은 지연이 죽기 전에 진짜 산토리니에 가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벨이 울리고, 의진은 혹시나 지연이 벌써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 버렸을 까봐 걱정한다.

“왜 왔냐고 물어보기도 지치네요.”

현관문 너머로 들려오는 지연의 목소리는 정말로 지친 것처럼 들린다. 의진은 지연이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완연한 봄 날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하 23층의 모조 대리석은 시리도록 차갑다. 의진은 배낭을 앞으로 꺼내 안고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어제 밤 수 십 번도 더 연습한 말인데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미안해요. 이기적인 거 알지만,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지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7살 때 부모님을 잃었어요. 교통사고였는데,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자세히는 말 안 할게요. 외할머니 집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때 외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집을 팔고 원룸으로 이사했어요. 참, 오해하지는 말아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가 저를 돌봐주셨고, 아버지가 경찰이셔서 연금이 나왔기 때문에 소녀 가장처럼 살고 그러진 않았어요.”

여전히 지연은 아무 말이 없다. 예상한 바다.

“제가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고 했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해진 친구가 있는데, 이름이 승희였어요. 선생님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어디 모난 데 없이 사랑받는 친구였는데,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던 골목길에서 칼에 찔려 죽었어요. 지나가는 마약 중독자한테.”

“플로라였나요?”

“비참한 자신의 생을 잊고 싶어서 플로라를 복용했는데, 오히려 그걸 잊지 못하는 저주에 걸린 사람이었어요.”

“지독하네요.”

“지독하죠.”

“우리는 운명의 실을 끊을 수 없는 존재인가 봐요. 아니, 의진 씨 운명을 끊을 수 없는 존재인가 봐요. 나는 어차피 진짜가 아니잖아요?”

“파일 다 읽어봤어요?”

“그런 질문을 할 거라면 이제 그만 가줬으면 좋겠어요.”

“수술대에 올랐을 때 저는 20살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기억을 모두 지우기 위해서 지연 씨는 17살로 깨어났어요. 연희를 만나고, 사서가 된 건 지연 씨의 운명이에요.”

“큰 위로는 안 되네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연 씨,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지 들어나 보죠.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와서 하려는 부탁이 뭔지.”

“잊지 말아줘요. 지연 씨가 살아 온 인생, 나를 만난 것, 연희를 잃고 아팠던 것, 시나리오를 발견했을 때 충격, 다 기억해줘요.”

“의진 씨.”

“그리고 부서지지 마요.

현관문 너머에서는 대답 대신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의진은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탄다. 지연은 대리석 바닥을 구두 굽의 소리를 따라 함께 걷는다. 드디어 지연의 마음에도 봄이 가고, 파도처럼 시원한, 여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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