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스크래치 페이퍼

2020.09.28 16:4109.28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게 여간 신기한 모양이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뚫어져라 연필만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엽다. 반면 엄마는 지치다 못해 잔뜩 숨이 죽었다. 제 존재감을 여기저기 뻗치는 머리칼은 대충 머리띠로 제압하고, 원래 아이보리인건지, 때가 탄 건지 구분하기 힘든 스웨터 소매는 세 단으로 접어 올렸다.

 

“48개월이면 성인돼서 기억도 못해요. 7세 이전에 수술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벌써 며칠 째 보채는데 놀이공원에 갈 형편은 안 되고, 도무지 방법이 없네요. 정교할 필요는 없으니 부탁 좀 드릴게요.”

 

“일단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관리소에서 허가를 안 내주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만 14세 미만 아동은 친족 동의가 있어도 허가를 잘 안내주거든요. 신청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아무 놀이공원이나 상관없으니, 장소는 놀이공원, 동행자는 엄마, 이동수단은 대중교통, 날짜는 2169년, 11월 16일 하루, 맞으신가요?”

 

“네. 아이가 풍선이랑 공룡을 좋아해요. 공룡 풍선을 들고 노는 장면도 넣어주실 수 있나요?”

 

원래라면 공룡 풍선 같은 세부 사항은 추가될 때마다 최소 15000원씩 받지만, 아이의 양말에 수줍게 난 구멍이 눈에 밟혀 공룡 풍선 옆에 작게 서비스라고 적어 두었다. 깐깐해 보이는 외향과는 달리 마음이 여린 실장님도 이런 식의 서비스는 곧잘 눈감아 주시는 편이어서, 나는 가끔 다운 사이드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서비스를 제공하곤 했다.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삽입, 수정된 기억은 법정 진술 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수술로 인한 부작용 및 이인증(離人症), 인지 부조화는 병원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이작 원칙 세부 사항은 앞에 패드에 적혀 있으니 읽고 동의하시면 싸인 부탁드려요.”

 

여자는 패드에 적힌 글자는 본 채 만 채, 어딘가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동의서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 선 주. 많아봐야 삼십대처럼 보이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고리타분한 이름이었다. 어쩌면 21세기 업사이드로 이주에 실패한 학자나 교수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기본패키지 하셔서 총 52000원입니다.”

 

여자가 샛노란 65년 형 밀키웨이 칩이 박힌 손목을 바코드에 갖다 대자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여자의 손목 위로 홀로그램 영수증이 출력되었다. 손목을 내리면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내리는 영수증은 아름다웠지만,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꿈꾸던 백 년 전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운 미래의 일면이라고 생각했다.

 

“결제 완료 되셨고, 신청서 허가까지는 이틀에서 사흘정도 소요되세요. 허가 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나 반려될 경우 백 퍼센트 환불 가능하니 그 점은 염려 마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당신의 인생에 황홀한 행복을! 좋은 하루 되세요.”

 

여섯 살배기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아마 놀이공원에 보내주겠다던 엄마가 왜 삭막한 사무실에 왔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2086년, 완전한 두뇌의 시냅스 스캔이 가능해지면서 특정 시냅스 자극을 해마에 가하면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당시에는 이렇게 순전히 유희를 위해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서, 초기 기억술은 심각한 PTSD 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트라우마를 삭제하는 것보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결국 인류는 어떤 기억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게 낫다는 데 합의했다.

 

기억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지금은 트라우마 치료 외에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기억술을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돈을 모아 유럽 여행을 가는 대신 삼분의 일 가격으로 유럽 여행을 갔다 온 기억을 이식받거나, 휴가가 짧은 직장인들이 먼 곳으로 해외여행을 다녀 온 기억을 이식받는 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식받은 기억들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성형 수술한 눈이나 코라고 해서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벨이 울리고 연이어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수북한 백발을 곱게 쪽진 노인이었다.

 

“당신의 인생에 황홀한 행복을! 어떤 일로 오셨나요?”

 

“기억을 하나 주문하고 싶어서 왔네. 수정도 가능하다고 들었네만.”

 

기억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기억의 삭제, 삽입, 그리고 수정. 삭제나 삽입의 경우 여러 임상실험을 거치면서 부작용이 거의 없어졌지만, 과거의 기억을 들어내고 그 안에 새로운 기억을 삽입하는 일은 달랐다. 수술 과정의 복잡성은 둘째 치고, 현실감을 상실하는 이인증 부작용이 심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기억 수정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라…….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고 특별한지 특별하지 않은지 판단하는 게 어떻겠나?”

 

월요일 오후라 뒷손님도 없었고, 워낙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 이 일을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젊은 사람을 붙잡고 괜히 과거의 영광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싶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기억 수정은 심리 상담소나 정신 병원에서 신청하는 것이 아니면 반려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피차 시간 낭비하느니 노인을 구슬려 돌려보내는 것이 나았다. 내가 계속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자 노인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돈은 원하는 만큼 주겠네. 이야기라도 들어봐 주는 게 어떻겠나?”

 

불퉁한 표정의 나에게 건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곳은 기억시술소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이상적인 행복을, 그리고 자신의 가장 시커먼 그림자를 풀어놓는 곳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돈을 받는 사람이었고, 이곳을 찾는 그 누구도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 경청이란 내가 그들에게 응당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기억시술소에 죽치고 앉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작년부터 기억시술소 협회는 상담 시간이 십오 분을 넘으면 추가로 돈을 청구하기로 합의했다. 이제는 십오 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오 분마다 따개비마냥 책상에 붙은 부저가 시끄럽게 고막을 할퀸다. 대외적으로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의 담석을 고통스럽게 뱉어내는 사람들에게 오 분마다 부저를 울리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한 처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노인의 부드러운 부탁에 마음이 풀렸다.

 

“원하시는 만큼 말씀하셔도 됩니다.”

 

“고맙네. 보기 드문 젊은이야.”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최초의 기억 시술자 중 한 명이라네. 나는 원래 다운사이드의 고아원에서 자랐지. 지금이야 다운사이드와 업사이드의 차별이 많이 사라졌다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다운사이드 사람들은 업사이드에 출입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 당시 14살이었던 나는 업 사이드에 보내 준다는 말에 고민도 하지 않고 임상 실험에 참여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랬다고 하더군. 지금은 그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말이야. 나는 단순한 기억술 임상 피험자가 아니라 M프로젝트 참가자였거든.”

 

M프로젝트라면 역사책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M프로젝트는 다운사이드에 거주하던 고아들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새 인격을 부여해 업사이드에 입양시키는 프로젝트로, 원래는 다운사이드와 업사이드 간의 차별을 완화하고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참가자의 수가 적고 부작용이 심해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문득 M프로젝트의 참가자 중 칠십 퍼센트 이상이 치매나 파킨슨 같은 뇌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겉으로 보기에 별 이상은 없는 것으로 봐서 노인은 운 좋은 삼십 퍼센트에 속한 듯 했다.

 

“그러셨군요. M프로젝트 참가자를 이렇게 실제로 뵙다니 영광입니다.”

 

나의 말에 노인은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서진 우주선의 생존자처럼, M프로젝트 참가자는 영웅이 될 수도 있었던 피해자였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냥 피해자였다. 국고를 낭비한 과학자들의 비참한 결과물. 어쩌면 난생 처음 들어봤을 수도 있는 립 서비스에 노인은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나까지 마음이 맑아지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고맙네. 나도 자네를 만나서 영광이야.”

 

“아닙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M프로젝트로 인한 후유증이나 부작용은 없으셨나요? 시냅스 스캔 검사 전 확인을 해야 해서요.”

 

“다행히 나는 3차 실험에 참가했기 때문에 별 다른 부작용은 없었네. 뇌질환도 없고 이인증이나 성격 장애도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업사이드의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은 아니었어. 있잖나, 자네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될 수 있다면, 그 둘 중 무엇이 자네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라……….”

 

“고대 그리스 때부터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고민했지만 여전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라네. 그리고 어차피 분리가 불가능한데 그런 고민을 해 봐야 어디 쓰겠나? 하지만 최초의 M프로젝트 이후 사람들은 마침내 한 사람의 기억을, 인격을, 정신을 분리해 냈다고 믿었어. 건강한 신체에 완전히 다른 한 사람을 옮겨 담을 수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었네. 다운사이드의 기억은 완전히 잊은 채, 업사이드에서 부잣집 자제로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어.”

 

“무슨 문제가 있으셨나요?”

 

노인의 파란색 눈에 애수가 일렁였다. 메모리 메이커 자격증을 위해 트라우마 환자들을 면담할 때 봤던 바로 그 눈이었다. 노인은 한 동안 말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노인은 차마 남에게 꺼내기 힘들었던 가슴 속 응어리진 한을 나에게 한 올 한 올 풀어놓는 중이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한낱 전봇대만 못할지 몰라도, 결국 인간은 타인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한다. 노인은 그 과정 속에 있었다. 나는 노인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그저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었거든. 중요한 건, 이웃이, 그리고 사회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였지. 내 기억 속의 나는 업사이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업사이드에서 자란 업사이더였지만, 사람들은 내가 M프로젝트 참가자라는 것을, 다운사이드 출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 처음에는 그게 단순히 내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와 파란색 눈은 분명 업사이더들과는 달랐으니까. 그래서 방학이 되면 하루 종일 해변에서 온 몸을 태우고, 학교에 갈 때면 하루도 빠짐없이 컬러 렌즈를 끼고 다녔네. 주머니에 인공 눈물이 없으면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지. 하지만 그렇게 용을 써도 나는 완전한 업사이더가 될 수 없었어. 나에게는 항상 다운사이드 출신이라는 투명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거든. 정체성이라는 놈은 참 우습지 않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규정하는 건 절대 내가 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내가 아무리 나 자신을 업사이더라고 생각해도 사회가 나를 다운사이더로 규정해버리면 그만이라네.”

 

시종일관 담담한 목소리와 엷은 미소를 유지하던 노인의 얼굴에 켜켜이 울분이 쌓였다. 주름 사이사이마다 엉겨 붙어있는 멸시와 차별이 노인을 더욱 늙어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휴지를 건넸다. 그리고 조용히 부저에 연결되어 있는 플러그를 뽑았다. 내가 노인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그래서 다운사이드로 다시 이주하신 건가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 스무 살이 되자, 내 기억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거든.”

 

“벗겨지다니요?”

 

“초기의 기억이식은 원래의 기억을 들어내고 새로운 기억을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기억을 까맣게 칠하고 그 위에 새 기억을 입히는 방식이었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페인트칠이 벗겨지듯 새로 입힌 기억이 벗겨지기 시작한 거야. 드디어 업사이드에 오기 전 진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지. 나는 기쁜 마음에 다운사이드 사람을 돕는 재단을 세우고 다운사이드로 이주했다네. 드디어 어딘가에 마음 편히 소속될 수 있다니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하지만 다운사이드에서 조차 나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네. 아무리 피부가 하얗고 눈이 파란색이어도 업사이드의 말을 쓰고, 업사이드의 문화를 배운 나는 그들에게 외지인에 불과했지. 심지어는 고급 옷을 입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갑자기 낙후된 시설에서 홀로 수모를 당하려니 무섭고 슬펐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네. 나에게는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벗겨진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기억해내신 거군요.”

 

“그래, 나는 벗겨진 기억 안에서 첫사랑을 발견했어. 말랐지만 다부진 체격과 훤칠한 키, 오뚝한 콧대하며 짙은 눈썹까지. 마치 백마 탄 왕자님을 발견한 것 같았지. 처음에는 어렴풋한 형체만 기억이 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벗겨지면서 우리가 함께 나눴던 대화며, 즐겨 읽던 소설들이 떠오르더라고. 어찌나 설렜는지 모르네. 매일 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짝사랑 상대를 떠올리며 밤잠을 설쳤지. 만나면 어떤 말을 할까, 이미 여자 친구가 있으면 어쩌나……. 하지만 생각보다 다운사이드는 넓었고, 그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 알다시피, 다운사이드에 제대로 된 인구조사가 시작된 지도 얼마 안 되지 않았나. 그렇게 수 십 년의 세월을 그를 찾아 헤맸지.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을 왜 그렇게 허비했나 싶기도 한데 그 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해 보였어. 그 사람은 업사이더도, 다운사이더도 될 수 없었던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나침반이었으니까. 오직 그 사람만이 진짜 내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었으니까 말일세.”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작정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고 그 카타르시스에 전율하는 것 같기도 했고, 후회와 미련이 가득한 인생을 돌아보며 호흡을 가다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노인과 말하기 시작한 지 30분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흔해빠진 신파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노인의 인생사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침묵 속에서 노인을 향한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서 찾으셨나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그녀의 고개도 힘없이 휘청거렸다. 노인의 눈에서는 끝끝내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이 파란색인 것은, 여태껏 쉴 새 없이 흐른 눈물이 물든 자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달에 찾았다네. 다운사이드 국립 병원에서. 췌장암 4기라고 하더군.”

 

“암이라면 이미…….”

 

“그래. 인류가 암을 정복한 지도 벌써 50년이 흘렀는데, 가난은 아직 힘든 모양이야. 원래도 발견이 힘든 췌장암을 평생을 계단 청소부로 살아 온 사람이 무슨 수로 미리 알아챌 수 있었겠나? 할 수 있는 수를 다 써보았지만 도리가 없었어. 찾은 지 이틀 만에 내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떴다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슨 말씀을 더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을 해줄 필요는 없네. 글을 써주게.”

 

나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최초의 M프로젝트 참가자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허가가 날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라도 반려된다면 실망만 커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고작 20년을 조금 넘게 산 내가 그녀의 기구한 인생을 보상할 만한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노인이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수 십 년의 기억을 바라는 것이 아닐세. 딱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그와 함께 보낸 추억을 만들어주게. 나머지 기억마저 계속 벗겨지면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마흔이 되자마자 벗겨지지 않은 기억들은 다시 덧칠했다네. 이제 내게 남은 건 한 줌의 진짜 기억과 이름과 가짜 기억밖에 없어. 어차피 평생 가짜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그 가짜 기억으로 행복해지기라도 해야겠네.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게.”

 

“신청은 해보겠지만,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꼭 염두에 두셔야 해요. 아셨죠? 수정은 정말 웬만하면 허가가 나지 않아요.”

 

“내 자네를 원망하는 일은 없다고 장담하지.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나는 마지못해 계약 조항들을 읊었다. 노인은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연신 고맙다는 말을 외치더니 한 참이 지나서야 패드에 정자로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조, 아자, 현자 맞으신가요?”

 

“그렇다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럼 먼저 시냅스 스캔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옆문으로 들어오셔서 침대에 누워주세요.”

 

침대에 누운 노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나는 노인에게 시냅스 스캔을 위한 전자기 헤드를 씌운 후, 스위치를 켰다. 기분 좋은 백색소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한 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스크린을 점자 형태의 뉴런 신호들이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제 곧 있으면 그녀의 기억은 책상 위 모니터에 이미지 형태로 출력될 것이다. 까맣게 칠해진 기억 가운데 홀로 채색된 그녀의 진짜 기억들만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진짜 조아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 요즘 사람답지 않게 연필을 손에 쥐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짜 기억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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