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갇히거나, 뺏기거나

2020.09.28 16:4009.28

정민은 굵게 꼰 밧줄의 까슬까슬한 촉감을 어루만졌다. 한 때는 악착같이 버텨야겠다고,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민은 이내,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정민, 왜 네가 뒤돌아보냐?’

‘정민아, 얘 좀 봐. 지 부르는 줄 알고 뒤돌아 봄’

‘아 그냥 놔둬. 이 새끼 좀만 더 하면 담임한테 꼰지른다고.’

‘시발, 우리가 뭘 했다고.’

정민은 다양한 크기의 칼이 박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펼쳐진 가장 완벽한 복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복수의 문이 열렸을 때, 어떤 숨으로도 떠오를 수 없을 만큼 깊게 잠긴 공기 속에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붉은 허우적거림이 잔잔한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

 

“작가님, 이것 좀 수정해 주세요.”

“28번? 뭐 때문에?”

“간판 보는 시간이 너무 길답니다. 좀 줄여 달래요.”

“처음부터 간접광고 30% 특가로 구매한 거 아니었어?”

“네 맞는데……. 말씀을 드려도 별로 소용이…….”

“알았어. 일단 줘봐.”

한 숨을 쉬면서 종이 뭉치를 받아들였다. 보나마나 ‘정민 씨는 정말 아날로그한 사람이네, 아직 종이를 쓰는 것 보니까.’ 따위의 말들이 오갈 것이 분명했지만 도저히 디지털 화면으로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다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메이커로 글을 쓰다 보니 스크린만 쳐다봐도 눈이 뻑뻑했다. 옆자리 한 대리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민 씨. 또 반려야? 그 사람도 진짜, 이 정도 했으면 넘어가야지.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요.”

더 대꾸할 힘도 없었다. 한 대리는 한동안 내 눈치를 보더니 결국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이며 내가 평소에 자주 마시는 허니 자몽 블랙티를 내밀었다. 티는 응결 방지용 컵에 담겨있었다. 내가 컵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들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걸 배려한 것이다. 나는 눈꼬리가 살짝 처지게 웃으며 컵을 받아들였다. 오늘도 웃음의 의미를 오도하면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할까 말까 고민하겠지. 한 대리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애저녁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는 은밀한 호의를 즐기는 편을 택했다.

‘당신의 인생에 황홀한 기억을.’ 블랙티를 홀짝이며 메이커 앞머리에 붙어있는 문구를 읽었다. 메모리 프린팅 기술이 무너진 여행 산업을 재건열쇠가 되어줄지 누가 알았을까. 360도 뇌 스캔이 가능해진 이후, 완전한 시냅스 지도가 완성되었고, 이제 메모리 메이커의 손에서 탄생한 이미지를 1분이면 뇌에 입힐 수 있었다. 누군가는 스플리트에서 만난 낯선 이와의 하룻밤을, 누군가는 뉘른베르크에서 한 시간을 헤매다 찾은 한여름 밤의 맥주를 양분 삼아 평생을 살아간다. 모리아 여행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양분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사람들은 PPL이 잔뜩 담긴 기억들을 억지로 주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순간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하지만 모리아 여행사에 입사한 지 6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한 번도 모리토-메모리 포토의 줄임말로, 사진처럼 기억을 찍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를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가짜 기억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가느니 그냥 집에서 재밌는 영화 한 편 보는 게 나았다.

“그나저나 정민 씨. 66번 고객 있잖아,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요?”

“콕 집어서 정민 씨를 작가로 쓰고 싶다고 했다던데. 정민 씨 이제 유명 작가로 이름 좀 날리나봐?”

한 대리는 잘됐다는 의미로 한 얘기였겠지만, 마치 진열장에서 고른 상품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꺼림칙했다. 게다가 진짜 작가도 아닌 나를 굳이 콕 집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행사 홈페이지에 내 이름이 올라와 있기는 했지만, 메모리 메이커에게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사의 유일한 20대 여성 메모리 메이커도 아니었다.

“근데 이상한 게 그것 뿐만은 아냐.”

한 대리는 짐짓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 비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차도 얻어먹은 김에 대충 말동무나 해주다가 점심을 먹으러 갈 계획이었다. 한 대리의 말대로 모니터에 오후에 66번 고객과 상담이 있다는 팀장님의 메시지가 떴다.

“뭔데요?”

“그게…. 66번 고객, 정민 씨랑 이름이 똑같대.”

난 또 뭐라고. 멀쩡하게 생겨서 소개팅을 수십 번 하고도 애프터 한 번 성공하지 못한 화려한 전적의 남자다웠다.

“아 그래요.”

“신기하지 않아? 굳이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메이커를 골랐다는 게.”

“글쎄요.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이름 때문에 고른 건지도 알 수 없잖아요.”

“아니야 정민 씨. 콕 집어서 여기 김정민이라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고 예약을 잡았대.”

“근데 대리님은 이걸 어떻게 아셨어요? 메이커랑 접수원 말고는 고객 개인정보에 접근 권한이 없을 텐데.”

나는 일부러 권한을 힘주어 발음했다. 메이커들이 은근히 다른 부서의 직원들을 차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다. 한 대리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어디서 들었다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이유가 뭐가 됐든, 한 동안 한 대리는 내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면에 빽빽하게 들어찬 PPL 목록을 훑어보며, 이번에 삼성에서 새로 출시한 홀로그램 워치를 그랜드 캐니언 여행기에 어떻게 집어넣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김정민입니다.”

“반가워요. 내 이름도 정민이에요.”

여자는 화려하게 기른 손톱을 자랑하듯 움직이며 명함을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털에 파묻힌 목은 5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끈했고, 책상 위에 버젓이 올려놓은 파란색 가죽 가방엔 좌우가 뒤집힌 C가 음각으로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허세가 넘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거슬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흐린 눈동자 때문인지 특히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책상 위에 미리 준비해둔 커피를 홀짝이며 인사말을 건넸다. 내 목소리는 은퇴를 앞둔 경찰이 경범죄로 체포된 10대 앞에서 미란다 원칙을 읊는 것만큼이나 생기가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접수 내용을 보니, 직접 메이커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희는 여행에 관련된 기억만 제공합니다. 직접 메이커를 만난다고 해서 불법 메모리를 만들어 드릴 수는 없어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죠?”

“네?”

여자는 붉게 칠한 입술을 볼 끝까지 끌어올렸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눈동자만 쳐다보자, 3cm는 되어 보이는 여자의 속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올라왔다. 나는 인기 여행 국가와 유적지, 그리고 특별 요금이 추가된 가상의 도시와 행성들이 적힌 홀로그램 서류철을 펼쳤다. 6년 동안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섹스를 하고 싶다느니, 상사를 죽이고 싶다느니 따위의 말을 건네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졸업한 과를 물어보는 질문은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메이커로 저를 선택하신 거군요? 맞습니다. 상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6년 째 모리아 여행사에서 메이커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다른 메이커들도 모두 훌륭하지만, 스토리텔링만큼은 제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따라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는 여자가 지었던 것과 비슷하게 입 꼬리를 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렇군요. 메이커로써 자부심이 넘치는 게 느껴지네요. 여기서 하는 일이 만족스러운가 봐요? 연봉은 얼마나 돼요?”

“그런 사적인 질문은 허용…….”

“정민 씨. 나는 정민 씨를 메이커가 아닌, 작가로 고용하고 싶어요. 연봉은, 글쎄 한 여덟 자리 정도면 되려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모범적인 시민입니다.”

“내 제안을 듣기도 전에 불법적인 일이라고 단정 짓다니, 좀 기분이 나쁘군요. 물론 이해는 해요. 요새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나는 모리토 테마파크를 기획하고 있어요. 그래서 롤러코스터처럼 짜릿한 이야기를 써줄 사람이 필요해요. 유명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한테도 연락해봤지만 그 사람들은 맞춤법이나 시나리오 법칙에만 집착할 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못 내놓더군요. 그래서 정민 씨를 찾은 거예요. 재밌는 이야기를 생생한 기억으로 써 줄 사람을 찾고 싶어서.”

나는 텅 빈 접수 문서가 담긴 서류철을 덮고 가만히 개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작가, 김정민.’ 모두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한탄하며 기울이던 소주잔도, 조금만 노력하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던 교수의 타성에 젖은 조언도 다 유명 작가가 될 내 자서전에 들어갈 추억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마트폰에서 홀로그램 포스트잇과 볼펜을 띄워 개인 메일 주소를 적었다.

“이미 저에 대해서 조사는 충분히 하신 것 같으니, 구체적인 업무와 연봉, 회사 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시원시원하네요. 마음에 들어요.”

여자는 경련이 올 정도로 활짝 웃으며 홀로그램 포스트잇을 개인 스마트폰에 집어넣었다. 나는 회색과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여자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더더기 같은 인사치레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의자를 집어넣고 문을 나서는 순간, 앞서 걷던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

“네?”

“나 좀 깐깐한 사람이거든.”

여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발랄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여자의 즐거운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연봉이 여덟 자리라는데, 아무렴 어때.

 

-

 

오후 내내 66번 고객과의 미팅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 대리가 농담조로 저녁을 같이 하겠냐고 물었는데 한 참 동안 대답을 안 해서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 볼 정도였다. 그 덕분인지 두통이 너무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데 성공했다. 여자가 건넨 명함을 검색해보니 ‘한정민, 가상현실계 부동산 거물’이라는 기사가 떴다. 테라피 목적으로 개발된 VR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상담소만 전국에 20개 넘게 갖고 있고, 모두 목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건물 값만 수백억에 달한다는 기사였다. 그 밑에는 잡지사와 한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딸을 잃은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VR 테라피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심신의 평안을 주고 싶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한 참이나 한정민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일단 언론에 이렇게 많이 알려진 걸 보니 나 하나 벗겨먹자고 사기 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나를 알게 돼서 연락한 건진 모르겠지만, 한정민 정도의 재력이면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개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고 생각했다. 곧 손가락은 5개의 손이 되어 나의 배를 서서히 쓰다듬었고, 발을 타고 또 다른 손이 다리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 위에 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는 심장을 가다듬고 완전히 얼어붙은 머리를 굴렸다. 나는 혼자 산다. 그렇다면 점점 늘어나 내 몸을 뒤덮고 있는 손은 1. 거미거나, 2. 내 집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거나, 3.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다. 그러나 허여멀건 마르고 긴 손가락이 여전히 얼어 있는 내 왼 팔을 피아노 치듯 두드리고, 피부에 차가운 흔적을 남기자, 내 유약한 가설은 완전히 무너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털어 하얀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백 개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비릿한 살결을 맡고, 손가락의 차갑고 축축한 촉감이 온 몸을 가득 채워도,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핏기 없이 하얀 피부와 대조적으로 잘린 손목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책상과 키보드를 적셨다. 손은 책상 밑에서 끝도 없이 올라왔다. 이제는 손의 무게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손은 라운드 티를 경계로 목 위를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수 십 개의 손이 왼 팔을 빈틈없이 쥐었고 나는 베수비오 화산을 뒤집어쓴 미라처럼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거미처럼 똑같은 박자로 새끼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을 두드리던 손의 진동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그리고 일순간 모든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목걸이를 해줘야지!”

목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반대편 천장 구석에서 창백한 얼굴의 한정민이 손을 뻗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한정민은 누가 잡아당긴 듯 크게 뜬 눈 아래위로 뒤집어진 눈꺼풀이 비정상적으로 빨갛게 부어 있었고, 손을 뻗은 어깨 밑으로는 몸통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온 몸을 감싼 손의 무게 때문에 목과 얼굴을 제외하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한정민의 잘린 목이 아기 걸음마처럼 좌우로 달랑거렸다.

“목걸이를 해줘야지!”

한정민이 양손으로 내 목을 붙잡고 외쳤다. 세모꼴로 날카롭게 갈린 손톱이 목에 깊고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손톱에 찍힌 목을 타고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한정민이 핏줄 선 눈을 얼굴에 들이밀고 외쳤다.

“목걸이를 해줘야지!”

 

-

 

“정민 씨,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어제 두통이 심하다더니.”

“잠을 좀 못자서요. 괜찮아요.”

‘괜찮아요.’를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어제 일은 꿈이었을까? 가위에 눌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때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귀신이 나를 괴롭혔지만, 어제 일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기괴했다. 게다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 자세로 잠에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정민 씨. 이게 뭐하는 짓이야!”

눈앞에 생생하던 목이 잘린 얼굴은 출근한 지 10분 만에 사라졌다. 팀장님의 호통 소리에 여기저기서 졸고 있던 까만 머리통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박 팀장은 임원이 모두 메이커인 모리아에서 드물게 접수처 직원에서 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워낙 유능하기도 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객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어서, 직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싸이코패스 부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직원들에게까지 그런 관용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박 팀장이 아침부터 사무실 전체가 울리도록 소리치는 건 분명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메이커가 상전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아,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 지금 나랑 장난 해? 어제 66번 고객 미팅, 왜 안 나갔어?”

“무슨 말씀이세요? 어제 2시 반에 3번 회의실에서 고객님과 상담 진행했는데요.”

“정민 씨.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 이해하겠는데, CCTV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뻔한 거짓말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66번 고객 민원 들어왔어. 30분을 기다렸는데 메이커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고!”

“저 정말 상담 나갔어요. 정말이에요!”

박 팀장은 분노한 손짓으로 반투명한 태블릿을 꺼내 CCTV 영상을 틀었다. 3D 홀로그램으로 영상이 재생된 덕분에 텅 빈 미팅 룸에 혼자 기다리고 있는 한정민의 모습이 부서 전체에 공개됐다. 이제 당분간 모리아 직원들의 점심은 내 뻔뻔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영상을 보고 있으니 웬일로 우유부단한 성격의 한 대리가 나섰다.

“팀장님, 어제 제가 정민 씨한테 사무실 번호를 잘못 가르쳐 준 것 같습니다. 아침에 접수처에서 전달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숫자를 착각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박 팀장의 분노는 금방 한 대리로 향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만년 대리인거야. 8살짜리도 할 수 있는 일을 말이야, 까먹었다니 어이가 없어서. 아침부터 민원 처리한 접수처 직원에게 사과하고 오늘까지 시말서 써서 제출해. 그리고 정민 씨도 말이야, 아무리 이게 원래 업무가 아니라지만 회의실 번호 하나 확인을 안 하고 상담을 나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이딴 식으로 하면 나도 인사 보고를 하는 수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갔다. 입사 이후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박 팀장은 하나라도 더 건수를 잡겠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에 눈을 부라렸다. 혹시라도 불똥이 튈 새라 다들 모니터에 얼굴을 쳐 박고 있었다. 박 팀장이 개인 사무실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눈짓이 오갔다. 대부분 꼴좋다는 의미였다.

한 대리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어깨를 쳤다. 뒤를 돌아보니 한 대리가 특유의 순박한 표정으로 화면에 ‘커피 마실래요?’라고 적힌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리님도 추현동 출신이라는 거죠? 저 그 옆에 2단지 아파트 살았어요. 고등학교 때 이사 간 뒤로 한 번도 다시 간 적 없는데, 아직도 그 동네 사신다니 신기하네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의미가 큰 곳이라…, 그건 그렇고, 두통은 좀 괜찮아졌어요?”

“아, 네. 덕분에요. 그리고 아까 저 대신 거짓말 해주셔서 감사해요. 안 그래도 박 팀장님 벼르고 계셨을 텐데.”

“같은 처지에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죠. 안 그래요? 그나저나 저는 메이커가 아니라서 이제 슬슬 사무실에 돌아가야겠네요. 정민 씨는 커피 좀 더 마시다 와요. 팀장님 오시면 제가 쉴드 쳐줄게요.”

한 대리는 어색하게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제 딴에는 윙크라고 한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윙크보다는 얼굴 경련에 가까웠다. 한 대리는 헤벌쭉 웃으며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한 대리의 눈동자 색은 맑은 갈색이었다. 6년 만에 처음으로 한 대리 얼굴을 가까이서 봤다. 그 이상한 안경만 빼면 꽤 준수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한 대리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짓고 있으니 소름이 돋아서 먹던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 컵을 씻었다.

탕비실은 1평 남짓한 공간으로, 싱크대와 냉장고를 제외하면 제대로 앉을 공간조차 없을 정도로 좁았다. 커피를 물처럼 마셔대는 부서 직원들을 생각하면 냉장고부터 붙박이장과 벽면을 패턴도 없이 모두 흰색으로 칠한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컵을 싱크대 위에 올려두고 수돗물을 껐다.

그리고 여전히, 물방울이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색 붙박이장과 냉장고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 와이셔츠에도 붉은 색 꽃잎을 만들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쳤다.

갑자기 강하하는 자이로드롭에 머리카락이 끼여 두피가 벗겨졌다는 괴담처럼, 뒤에서 날카로운 갈퀴가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본능적으로 갈퀴를 향해 손을 뻗자마자 날카로운 가시에 손을 깊이 베였다. 근육까지 찢어진 손바닥이 악몽 속 하얀 손처럼 빠른 속도로 부패했다.

강제로 고개를 젖혀 위를 쳐다봤지만, 갈퀴를 쥐고 있는 것이 너무 빨리 움직여서 거미처럼 천장에 발을 붙이고 있는 맨발만 겨우 보였다. 두드러기 같은 핏방울이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하얀 천장을 가득 채우고, 무거워진 핏방울이 간헐적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누가 내 목을 막은 것처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두피가 뜯겨서 흐르는 건지, 천장에서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는 피가 이마를 타고 턱 끝에서 툭툭, 둔탁한 소리를 냈다. 비릿한 피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갈퀴로부터 벗어나려고 버둥거릴수록 더 많은 머리카락이 뽑혔다. 나는 두피가 뜯겨나가지 않도록 힘을 빼고 갈퀴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휘둘렸다.

싱크대 벽면에 걸린 가위가 보였다. 가까이만 다가가면, 가위를 잡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살짝살짝 힘을 줘서 갈퀴의 방향을 싱크대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싱크대에 가까워졌을 때, 있는 힘껏 몸을 당겨 가위를 낚아챘다. 얇은 린넨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에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천장을 향해 뻗어 있는 머리카락을 향해 마구잡이로 가위를 휘둘렀다. 싱크대의 매끈한 면에 기형적으로 비친 나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피에 흠뻑 젖은 등에 달라붙어 마치 인간을 뜯어먹은 산짐승처럼 보였다.

갈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탕비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러나 복도의 상황은 탕비실 내부만큼이나 처참했다. 모리아와 6층을 나눠 쓰는 반대편 사무실은 전자 담배를 파는 회사였는데, 투명한 유리문이 굵은 금속 체인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안에선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이 피를 뒤집어 쓴 채 유리문을 밀기 위해 2센티미터 정도 되는 문 사이 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똑딱,

똑딱,

똑딱.

절망으로 얼룩진 표정이 쌓여 만들어낸 압력이 문 틈 사이로 겨우 삐져나온 손목을 마치 스냅단추를 여닫듯 부러뜨렸다.

나는 사무실에서 눈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쳐다봤지만, 문이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는 바닥이 없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도르래가 기괴한 잡음을 쏟아냈다. 3면이 막힌 걸 확인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리아 사무실 쪽으로 발을 디뎠다. 책상마다 몸뚱이가 끌려 나간 핏자국과 LED 등이 경고등처럼 마지막 숨을 깜빡이는 곳으로. 한정민을 처음 만난, 바로 그 곳으로.

각 사무실 끝에는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나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붙잡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달렸다. 무엇이 나를 쫓아오는 지도, 내가 무엇을 향해 가는 지도 몰랐지만, 그 문이 이 악몽을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나는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30명의 사원이 근무하는 모리아 사무실을 아무리 달려도, 비상계단 문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무서움보다는 더는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여기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돌았다.

다리에 피가 느껴졌다. 사원증을 너무 세게 쥐어서 아까 가시에 베인 오른손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신경을 관통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피 대신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직도 복도 반대편에서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유리문을 열기 위해 사람들이 얼굴과 손을 들이밀었다.

‘후회할거에요.’ 도대체 무엇을? 나는 나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동명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가 이 악몽과 관련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질문에 답을 알았다. ‘후회할거에요. 정민 씨.’ 나는 한 번도 뉘우친 적 없는 죄를 저지른 것을 처음으로 깊이 후회했다.

“정민 씨, 여기에요!”

한 대리의 목소리는 박 팀장의 사무실에서 들렸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온 몸에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어르고 달래서 나는 다시 박 팀장의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비상계단 문처럼 사무실에도 영영 도착할 수 없을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리님!”

나는 문을 열자마자 책상 위에 아무렇게 널브러진 박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통이 갈퀴에 긁혀 내장이 다 튀어나온 박 팀장과. 그리고 한 대리는 갈퀴를 들고 있었다. 피와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갈퀴를 든 한 대리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동료의 과도한 업무 떠넘기기에도 싫은 소리 하나를 못해서 순박한 웃음만 허허 짓던 한 대리가 아니었다. 그건, 한 대리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나는 전쟁터에서 전우의 전사에 정신을 잃은 신병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땐, 이미 코앞까지 주둥이를 들이민 갈퀴가 내 셔츠를 낚아챈 뒤였다.

나는 갈퀴의 막대 부분을 움켜잡고 한 대리를 밀쳤다. 한 대리는 나의 도발적인 움직임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힘을 줘서 막대를 끌어당겼다. 쓸데없이 튼튼한 옷이 끈질기게 나를 잡아당겼다. 박 팀장의 개인 사무실은 이상하게도 세로로 긴 직사각형이었는데, 덕분에 막대가 벽에 닿아 갈퀴가 내 등을 할퀴기 전까지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고개를 숙여 슬라이딩 하듯 미끄러졌다. 그리고 왼손에 쥐고 있던 가위로 한 대리의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다. 한 대리는 괴수처럼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갈퀴를 휘둘렀지만 갈퀴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한 대리 옆에 바싹 붙어있는 나를 떼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있는 대로 한 대리의 몸통을 찔렀다. 울컥하고 튀어나오는 피와 함께 가위 끝에 딸려 나오는 내장 냄새가 사무실에 진동했다.

한 대리는 갈퀴를 집어던지고 맨손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엄청난 악력이 내 어깨를 붙잡고 뒤틀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한 대리의 얼굴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살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 대리가 갈퀴에 긁힌 상처를 손톱으로 짓눌렀다. 엄청난 고통 때문에 지금껏 절대로 놓지 않았던 가위를 쥔 왼손에 힘이 풀렸다. 한 대리는 온몸이 구멍 난 상태에서도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대리는 찢어진 귀를 입에 걸고 외쳤다.

“귀걸이를 해줘야지!”

한 대리는 완전히 무력해진 내 귀를 잡고 잘라냈다. 서걱서걱 귀가 잘리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내 온 몸에 퍼졌다.

“대리님…제발…….”

내 간절한 외침은 한 대리가 반대편 귀를 잡고 잘라내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

 

“정신이 들어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눈을 뜨자마자 두 귀를 만져봤다. 다행히 양쪽 다 멀쩡했다. 한정민과 한 대리는 둘 다 공들여 준비한 저녁 맛이 어떤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정말 기억이 안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분명 말렸어. 그러게 누가….”

“잔소리는 그만해요. 방금 일어났잖아요.”

한 대리는 능청맞게 한정민에게 핀잔을 줬다. 한 대리는 이상한 안경을 벗은 탓인지 태도도, 말투도, 외모도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괜찮아요, 정민 씨. 사용 설명서에도 일시적인 기억상실을 겪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어요. 금방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

“기억상실이라뇨?”

“자네나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정민 씨한테 설명이나 해줘.”

나는 속이 파진 달걀 모양의 의자에서 일어나 존재 이유가 의심스러운 낮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아 시야가 캄캄했다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서서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차가운 공기를 훅 들이켰다.

나와 한정민, 한 대리가 서 있는 곳은 바닥이나 벽지 설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넓은 창고였다. 창고에는 의자가 두 줄로 마주 본 채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반숙 모양의 의자 내부는 빨간색 가죽으로 덧대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렸고 의자 바깥은 매끈한 흰색 플라스틱이 감싸고 있었다. 총 12개였다. 나는 붉은 립스틱과 언제나 그렇듯 과한 아이 메이크업을 한 한정민을 쳐다봤다. 한정민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어때? 정민 씨? 괜찮았어?”

드문드문 파편적인 기억이 뇌를 콕콕 찔렀다. 하지만 기억의 순서를 완전히 짜 맞추기는 역부족이었다. 한정민의 말을 무시하고 한 대리가 설명을 이었다.

“정민 씨는 모리토가 처음이라 부작용이 더 심했을 수도 있어요. 방금 건 정민 씨가 가장 최근에 쓴 메모리인데, 엄청 애착을 갖고 쓴 거라 베타 테스트 전에 직접 한 번 체험해보고 싶다고 해서 준비한 거거든요. 뇌에 원래 남아 있던 기억에 메모-리오를 융합한 거라 훨씬 더 충격적이고 생생했을 거예요.”

“그래서 정민 씨, 괜찮았어? 어때?”

“그니까 제가 방금 겪은 게 다…, 모리토였다는 거죠?”

“그렇다니깐. 아직도 기억이 다 안 돌아온 거야?”

“엄청 끔찍했어요. 누가 이걸 돈 내고 하겠어요?”

한 대리와 한정민은 내 말을 듣자마자 서로 마주보고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 하이파이브를 했다.

“하지만 정민 씨, 호러-리오가 우리 모리토 파크의 가장 인기 어트랙션인걸. ‘원작자도 무서워 한 바로 그 호러-리오!’ 카피 라이트는 정해졌고, 이제 돈 벌 일만 남았네!”

“저, 그러면 모리토에 한 번 갇히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요?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신호를 보낸다거나…….”

“모리토라는 게 뇌에 시냅스 신호를 보내서 기억을 새기는 거 아냐? 돌이나 철판에 새긴 걸 무슨 수로 지워?”

“원래 모리토는 영상으로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작업이 진행되잖아요. 제가 확인 절차도 없이 바로 이걸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어요.”

나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항변했다. 두통은 많이 가셨지만, 모리토 이전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라는 사실이 무서웠다. 빠른 발걸음으로 창고를 빠져나가던 한정민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각을 맞춰 돌아섰다. 놀이공원에서 볼 법한 안내원 안드로이드 같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아까와는 달리 진지했다.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이미 새긴 부분을 잘라 내거나, 아니면 부숴 버리면 되니까. 모리토는 기억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정해진 행동 밖에 할 수 없지만, 자살은 선택할 수 있어.”

모리토 내 자해나 살인을 막기 위해 신체를 해치는 기억은 실제 육체에도 심각한 부적응을 초래했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한 대리가 다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한 대리의 어깨 너머로 한정민이 발랄한 발걸음으로 창고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고래 뼈로 만든 빳빳한 파니에 위로 주름 진 초록색 아코디언 치마가 팔랑거렸다. 나는 달걀 의자가 깔린 커다란 창고 한 가운데에, 경미한 두통을 이고 한 대리와 함께 서 있었다.

“정민 씨, 이제 걸을 수 있겠어요? 해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요.”

나는 더는 질문을 쏟아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콜라 한 잔이 간절했다.

 

-

 

사택은 오래된 대학교 기숙사를 연상시킬 만큼 좁고 더러웠다. 한 대리가 임시로 머물 곳이니 며칠만 참으라고 사정을 하지 않았다면, 당장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호텔을 잡았을 거다. GPS로 숙소 위치를 찍어보니 모리토 테마파크라는 이름과 함께 수십 개의 리뷰가 떴다. 그리고 그 아래엔 컨뷰션 잡지와 함께 한 인터뷰 기사도 있었다. 나는 인터뷰 기사는 굳이 읽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될 텐데 괜히 기억이 돌아오기도 전에 기사를 읽어서 기억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 하루 동안 겪었던 일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뇌에 주어진 엄청난 자극 때문인지 나는 너무 피곤해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 있던 안대를 쓰고 옆으로 돌아누우니 바지 주머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잔뜩 구겨진 종이였다.

종이는 기껏해야 가로세로 3센티가 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침대 밑 2번 째 서랍, 다이어리를 열면 숨겨진 공간에 금속 배지가 있음. 금속 배지의 뾰족한 뒷면으로 세 번째 서랍을 열면 권총이 있으니, 도망치는 데 실패했다면 권총으로 자살할 것. 한 발밖에 없으니 신중하게 사용할 것. 사람을 쏘는 것은 소용없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둑질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황급하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도어뷰 렌즈로 밖을 봤다. 문 앞에는 숙소를 들어올 때 봤던 경비 아저씨가 서 계셨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경비원은 도어뷰 렌즈에 눈을 들이밀었다. 아저씨의 눈은 동공과 구분이 거의 안 될 정도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나는 문고리를 꽉 붙잡았다. 숙소 문에는 디지털 도어락 외에 물리적인 방식으로 잠금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한 대리가 부탁해서 왔어요. 혼자 지내는 게 걱정된다고. 잘 있는 지 확인 좀 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아, 괜찮아요.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대리가 이 커피도 전달해 달랬어. 안에만 있으면 목마를 거라고.”

“‘안에만 있으면’ 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목이 마른데 커피는 왜 줘요?”

나는 한정민과 미팅을 할 때도, 한 대리와 탕비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커피를 마셨던 것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커피는 마시지 않으리라. 나는 거만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걸 바로 후회했다. 내가 트릭을 눈치 챘다는 걸 알면 안 되는데.

“나야 모르지. 그냥 이 건물 지키는 경비원인데. 그나저나 문 안 열어 줄 거요? 이거 빨리 전달하고 연속극 봐야 해.”

“그냥 앞에 두고 가세요.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요.”

“거참 이상한 사람이네. 나중에 잃어버렸다고 뭐라 하지나 마쇼.”

경비원은 커피를 앞에 두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돌아갔다. 나는 문가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쪽지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절대로 사람들 눈을 쳐다보지 말 것.’

 

꼭두각시는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복도에는 눈이 파진 경비원이 과하게 큰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어야지!”

나는 발에 피가 나도록 달렸다.

 

벌써 한 시간 째였다. 아무리 이 층을 돌아도 밖으로 나가는 문이나 다른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경비원은 일정한 속도로 내 뒤를 쫓았다. 그는 절대로 더 빠르거나, 더 느리지 않게,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도끼를 들고 달렸다. 욕실용 슬리퍼의 싸구려 고무에 쓸린 피부가 발갛게 부어오르고, 새끼발가락에 생긴 물집이 터져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 거렸다. 그리고 19번 째 내 방문 앞을 지나쳤을 때, 나는 쪽지를 펼쳐 들었다.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냐. 이미 새긴 부분을 잘라 내거나, 아니면 부숴 버리면 되거든. 모리토는 기억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정해진 행동 밖에 할 수 없지만, 자살은 선택할 수 있어.’

 

나는 방문을 열고 디지털 도어락을 빠르게 잠갔다. 그리고 쪽지가 지시한 대로 금속 배지를 꺼내 책상 밑 세 번째 서랍의 자물쇠를 열었다. 다행히 권총은 약실이 분리되는 리볼버가 아닌 피스톨이었다. 경비원은 이제 철문을 도끼로 부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경비원이 뾰족하게 잘린 철문에 몸을 집어넣기 위해 아등바등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끝이다.

 

-

 

곰팡이가 핀 벽지에 붙은 침대 위에 정민이 누워 있다. 아드레날린에서 겨우 빠져 나온 정민의 눈이 회색 안대를 빠져나오자마자, 경비원이 도끼를 내려친다. 무딘 도끼 탓에 예상과는 달리 도끼가 척추를 파고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비원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정민이 갑작스러운 고통으로 꿈틀댄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음성 대신 목울대에서 피가 울컥울컥 치솟는다. 이미 신경이 조각난 하체는 벌써 생기를 잃었고,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하얀색 린넨 파자마를 천천히 물들인다. 죽은 딸의 이름으로 개명한 한정민은 한 대리와 경비원을 껴안고 마침내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김정민을 보며 눈물과 함께, 경련하듯 웃는다. 그 웃음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하하. 하. 하하하. 하하.

미친 웃음소리가 죽은 정민의 귀에 닿을 때까지, 그들은 웃고, 웃고, 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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