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20.08.25 21:3308.25

  0

 

  1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불은 켜져 있고 테이블엔 희수의 핸드백이 엎어져 있었다. 오자마자 급히 화장실에 간 모양이군. 놀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피곤이 앞섰다. 쓰러지듯 소파에 안겼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땐 꼭 휴대전화를 보게 된다. 퇴근 내내 봤던 인터넷 뉴스를 다시 뒤적였다. 10분 전에 봤으니 당연히 새로운 건 없다. 그래도 또 손가락을 옆으로, 위로 밀고 있다. 알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그런 종류의 의문들은 얼떨결에 애인을 임신시킨 무책임한 남자처럼 금세 사라져 버린다.
  온라인은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 유출로 난리였다. 순수한 이미지의 배우인데 까발려진 건 외설적인 문자들이었다. 기사마다 댓글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험담할 만한 사건의 발생에 신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발견하면 동정하기보단 안심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도 한심한 댓글들을 보며 조금은 안심한다.
  소름 끼쳐. 당신은 그럴 줄 몰랐는데 깜짝 놀랐어. 맞아, 젠틀하고 신사다운 이미지였는데. 젠틀하고 신사다운 건 같은 말 아닌가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들 난리야? 남자는 다 똑같아,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달려든 여자들이 잘못이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당신이 우리 오빠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그러는 넌 뭘 아는데? 아니, 어떻게 아는데? 푸드드득.
  화장실에서 닭의 날갯짓을 닮은 소리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한 달짜리다. 어떻게 놀려줄지 상상하며 기다렸다. 쏴아- 콰르르륵. 문이 열리고 희수가 나왔다. 모른 척 휴대전화만 봤다. 그녀는 얇은 폴라티에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목을 몇 번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팔목에서 끈을 빼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노래를 틀었다. 얇고 높은 남자의 목소리는 신기했다. We don't talk anymore, We don't talk anymore. 그녀는 콧소리로 멜로디를 따라 하며 싱크대로 갔다. 팔을 걷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이 흐르고, 찰리 푸스의 리듬에,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 소리가 좋아 한동안 듣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나를 못 본 척했다. 그런 줄 알았다. 
  “시원해?”
  말을 걸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봤다.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고개만 갸웃, 하더니 다시 설거지를 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시원하냐구.”
  희수는 그릇을 떨어뜨렸다. 물을 잠그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빠?”
  “응.”
  “장난하지 마.”
  “그러게, 장난 아니던데? 소리가 완전...”
  “어디 있어?”
  “응?”
  “어디 있냐고?”
  “뭐가?”
  “그만해, 나 무서워.”
  “왜 그래?”  나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손을 얹으니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대로 피했다. 그사이 노래가 끝나 조용해졌다. 잠시 후 다음 노래가 시작됐다. 여전히 찰리 푸스, 이번엔 Attention이었다. 
  “오빠?”
  “너 왜 그래 진짜.”
  “오빠가 안 보여.”  나는 옆에 놓인 그녀의 휴대전화를 들어 노래를 껐다. 슬슬 짜증이 났다. 
  “알았어, 놀려서 미안해.”
  “......”
  “그만하자고.”
  “장난 아니야.”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평온했다.
  “정말 안 보여.”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사라졌다. 

 

  2
  모임 장소는 개인 카페였다. 골목 안이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게다가 반지하였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정면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거울 왼쪽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다. 시계를 보니 아직 삼십 분이 남아있었다. 나는 어떤 약속이든 먼저 가서 기다리는 쪽이다. 누군갈 기다리게 하는 건 질색이다. 라떼를 주문하고 조명이 아늑한 곳에 앉았다. 
  모임은 각자 책을 가져와 읽고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집에는 책이 없어 서점에 들렀다. 재미도 있고 남들 보기에도 나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는 얕아 보일까 봐 스테디셀러를 살폈다. 결국은 순전히 제목만 보고 골랐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잘 고른 것 같아 카페로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책을 읽었지만 진도는 더뎠다. 눈으로 글자를 쫓다 보면 어느샌가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페이지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집중이 되지 않아 자주 눈을 비볐다. 시간이 흐르고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뒤늦게 도착한 모임 장은 당황한 눈치였다. 새로운 참여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각자 책을 읽는 한 시간이 지나자 모임 장이 테이블을 돌며 조용히 말했다. 
  “네 분씩 짝을 지어서 대화 나누도록 할게요.”
  내가 앉은 테이블에 여자 둘과 모임 장까지 네 명이 모였다. 사람들이 짐을 옮기고 자리를 잡는 어수선한 사이 휴대전화로 책 내용을 검색했다.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하고 싶었다. 문득 맞은 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구불구불한 단발머리에 목이 시원하게 드러난 니트를 입은 여자였다. 내가 멋쩍게 웃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히 민망해져서 검색하는 걸 그만뒀다. 
  모임 장이 모임에 대해서 짧게 설명했다. 읽은 책을 설명하거나 떠오른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것.
  “그럼 저부터 할게요.”
  그가 읽은 건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한 책이었다. 일종의 음모론이기도 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가 시체로 발견된 사람이 정부의 인체실험에 이용됐을지도 모른다는 식이었다. 모임 장은 이야기 사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각을 물었다. 능숙한 진행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농담이 오가고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지루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했다. 다음 순서는 볼록 렌즈 안경을 낀 여자였다. 그녀는 영어로 된 책을 꺼내 들었다. 
  “음... 저는 이 책을 읽었는데요. 음... 뭐라 해야 할까. 일단은 되게 인상적이었구요. 음... 저자의 사상이 되게 여러 관점? 시점? 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더라구요. 아, 원서로 읽는 걸 추천드려요. 번역이 이상하거든요. 음...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쪽에서 칼 포퍼랑 바슐라르를 가장 좋아하는데 조금만 말씀드리자면. 음... 일단 귀납적 추론방식에 대단히 회의적인 형태로...”
  자꾸만 음, 음, 거리며 늘어놓는 지루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애썼지만 힘들었다. 전문용어와 영어가 난무했고 어찌나 사족이 많은지 요점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할까?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칼 포퍼니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 않고 계속 떠들었다. 
  모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딴생각에 빠졌다. 우리는 왜 여기서 이런 곤욕을 견디고 있을까. 주말에 침대에 늘어져 휴대전화를 붙들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차려입고 나와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 말이다. 물론 외로움 탓이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순전히 자신의 외로움 때문에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쓸데없이 입을 놀린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다. 사람들은 단내나는 입속을 환기하고 굳은 몸을 풀었다. 다음은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자다. 그녀의 가죽가방에서 나온 책은 ‘싯다르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번엔 또 얼마나 대단한 사상과 철학을 듣게 될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책 읽기 모임은 두 번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책 표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음... 저는 요즘 제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요, 지인이 이 책을 추천했어요.”
  그리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근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정말 재미없어요. 웬만하면 보지 마세요.” 
  그게 끝이었다. 그러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웃으며 이유를 묻고 질문을 하고 농담을 나눴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꼬부라진 단발머리, 싱그러운 미소,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당당함이 좋았다. 그러나 가장 나를 매료시킨 점은 스스로에 의문을 가지는 성숙함이었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잘 없다. 나를 잘 알아야 남도 알 수 있다는 걸 다들 모르는 모양이다.
  그날 그녀가 알려준 책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여전히 내게 싯다르타는 정말 재미없는 책으로 남아있다. 처음 희수를 만난 날을 생각하면 항상 그게 떠오른다.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싯다르타가.

 

  3
  두 달 정도를 매일 만났다. 밤새 떠들어도 할 이야기는 넘쳤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얼굴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할 말이 떠오르니까. 속도가 붙어 한참 떠들다 보면 말이 없는 짧은 공백마저 대화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 같았다.
  당시 나는 작은 원룸에 살았다. 서울 생활이 녹록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책상에 앉으면 집안 어디든 한 발에 갈 수 있었다. 싱크대, 화장실, 침대까지. 집에 누가 온 일은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초대하기 싫었다. 분명 실망할 거고 그럼 나는 실망하는 그녀를 보며 나 자신에게 실망할 테니까. 그러나 희수는 불평했다. 숨기는 게 더 이상하다는 이유였다. 
  “만나는 사람이라면 집 정도는 보여줄 수 있어야죠.”
  “좀 작아서...”
  “그게 중요해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혹시 집에 시체라도 있으면 어떡해요? 나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 봐야겠어요.”
  “네?”
  “정 싫으면 말구요. 나도 집 있어요. 갈래요.”
  “아, 알겠어요.”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그땐 그것도 귀여워 좋았다. 그녀는 엉뚱한 면이 있어서 항상 예상 범위 밖에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처음엔 그런 걸 인간적인 매력으로 착각하는 법이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방안을 둘러봤다. 청소를 아무리 해도 정리가 안 된 느낌은 여전했다. 공간이 한 사람의 생활을 채우기 버거운 탓이었다. 
  “좀... 좁지요?”
  “그러네요.”
  나는 애꿎은 빨대만 쪽쪽 빨았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맛있어요?”
  “네.”
  그녀가 갑자기 내 커피를 뺏어 들더니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같은 건데.”
  “묘하게 다르네요.”
  “뭐가?”
  “모르겠어요. 더 단가?”
  그녀는 몇 번 더 맛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대가 다른가?”
  그녀는 갑자기 빨대를 빨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빨대를 몇 번 건드리다가 입술로 감싸 몇 번 빨다가 이로 살짝 물었다. 나는 음란한 상상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슬쩍 보며 말했다.
  “뭐해요?”
  “네?”
  “손이라도 잡아요.”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멍청하게 있다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래도 부드러워 느낌이 좋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진짜 손만 잡을 거예요?”
  “...”
  “갈래요. 나도 집 있어요.”
  나는 일어선 그녀에게 얼른 키스했다. 입술도 차가웠다. 그녀가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뜨거워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엉거주춤 포옹하다가 곧 격렬하게 뒤엉켰다. 
  그 뒤로 희수는 주말마다 우리 집에서 잤다. 덕분에 나는 자주 부끄러웠다. 후미진 동네를 이사 다니며 느낀 건데 건물이 낡으면 이웃들도 구질구질하다. 배려 따윈 없는 것이다. 낮에는 개 짖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밤에는 중년 부부가 싸우는 소리에 시달렸다. 끼니때마다 어디선가 청국장이나 고등어 비린내가 밀고 들어왔다. 우리는 맨바닥에 깔린 슈퍼 싱글 매트리스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그 모든 것들을 웃어넘겼다. 방만큼 작아진 내 마음이 머쓱해 할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등을 쓸어줬다.
  “미안해.”
  “뭐가?”
  “그냥...”
  “자기는 모르나 보네.”
  “뭘?”
  “나는 알아. 자기의 세상은 이보다 훨씬 넓은걸.”
  꾹 참았는데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실제보다 말이 더 진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언제나 그런 것에 꼼짝없이 매혹되고 만다. 

 

  4
  우리는 야간 진료가 가능한 안과를 검색했다. 전화를 거니 대부분 마감이었다. 나는 위급한 환자라고 매달렸다. 그럼 응급실을 가세요, 라고 탁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대형 안과에서 겨우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바꾸고 바꿔 세 명에게 사정했다. 예정된 진료가 끝난 뒤에 잠시 봐주기로 했다. 
  짐을 챙기고 오가며 우리는 몇 번 부딪쳤다. 희수는 그때마다 혼잣말처럼 욕을 했다. 내가 그녀를 피하는 게 맞다. 보이지 않는 건 그녀니까. 나는 최대한 그녀를 배려했다. 문을 열 때나 통로를 지나야 할 때는 그녀가 앞서고 뒤를 따랐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물끄러미 운전대를 보다가 말했다. 
  “오빠.”
  “응?”
  “내가 운전할래.”
  늦은 밤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안과에 도착하니 외래간호사가 기다리라고 했다. 퇴근이 늦어져서 그런지 말투에 짜증이 가득했다. 잠시 후 희수는 눈에 안약을 넣고 이상한 소리가 웅웅대는 기계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우리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그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머리를 뒤로 넘긴 의사가 반겼다. 젤을 너무 발라 머리가 반짝였다. 그는 우리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곤 사무적으로 말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각막에 자잘한 상처가 많은데 렌즈를 오래 끼셔서 그럴 거고. 수정체... 여기 보시면 하얗게 보이는 부분 있죠? 이게 나중에 백내장이나 시력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십 년이나 이십 년? 나중에요.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구요. 걱정하실 건 아닙니다. 일반적인 수준이니까요. 그래도 정기적으로 검사는 받으세요.”
  환자는 초조하고 의사는 덤덤하다. 그건 나의 고통과 남의 고통이 다른 탓이다. 진료실에서 의사를 만나면 늘 그걸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 말이다. 
  “문제가 없다구요?”
  희수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검사 결과는 그렇습니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워 먼저 말했다. 
  “특이한 일이잖아요.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저만 안 보인다는 게... 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 갑자기 그런 거니 일단은 경과를 좀 보시죠. 하루 이틀 뒤에도 계속 안 보이면 다시 오세요.”
  희수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나도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밖에는 몇몇 직원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수납을 하고 희수의 뒤를 쫓았다. 안과는 한 층을 통으로 쓰고 있어 유리문 하나만 열면 바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밋밋한 정적을 깨뜨리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미친 돌팔이 새끼. 갑자기 안 보이면 더 위험하지. 경과를 봐? 웃기는 소리 하네. 나중에 눈에 진짜 이상 있으면 소송 걸 거야. 좆같은 씨발 새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거북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상스럽게 욕을 했다. 기분이 많이 상하거나 당황할 때면 반사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그 작고 귀여운 입에서 씨발이나 새끼가 튀어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그게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누구나 서로를 잘 모르니까. 가까워져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있다. 그런 건 시간문제 같다. 그렇다면 모든 게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 건가?
  완곡하게 몇 번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욕설도 불편한 나로선 곤욕이었다. 한동안은 지나치게 마음이 쓰였다. 언제 욕이 튀어나올까, 싶어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시간을 임의로 잘라내 버리는 것이다. 처음엔 어렵지만 반복하니 익숙해졌다. 관계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사소한 단점은 있다. 
  우리는 말없이 엘리베이터의 숫자만 바라봤다. 그때 직원 하나가 유리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죄송한데, 수납에 이상이 있어서요. 잠깐만 기다리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차에서 기다릴게.”
  나는 도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조용하게 깔리던 클래식 음악이 꺼졌다. 잔뜩 켜져 있던 불도 몇 개만 남고 다 꺼졌다. 어쩐지 아늑했다. 부드러운 소파가 몸을 감싸니 긴장해 굳어있던 팔다리도 늘어졌다. 문득, 오늘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함이란 걸 깨달았다. 금세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진료실로 들어가시겠어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진료 말고 수납 때문에 기다리는 중인데요.”
  “담당 선생님이 드릴 말씀이 있다시네요.”
  나는 힘겹게 일어나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무척 바빠 보였다. 
  “잠깐 앉으시죠.”
  그는 서류를 뒤적이다 필기체로 뭔지 모를 글씨들을 썼다. 이어 마우스를 클릭하고 옮기고 타이핑했다. 그 와중에 사무적인 말투는 여전했다. 감정이 없는 그 말들은 마치 보이스웨어를 사용한 기계 목소리 같았다. 
  “생각해보니 제가 예전에, 비슷한 환자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자애였는데, 중학생인가? 그랬을 겁니다. 그 애한테 두 살 위 오빠가 한 명 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오빠가 안 보인다는 겁니다. 검사를 해보니 눈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담당의는 사춘기 여자애니까 관심받고 싶어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라고 내심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고 돌려보냈죠. 그런데 몇 달 뒤에 애가 차에 치여 죽었어요.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렇게 됐죠. 담당의는 눈에 정말 이상이 있는데 미처 놓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답니다. 근데 그러고 나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요. 사고 당시 애 가방에 노트가 있었는데 거기 오빠 얘기랑 그림이 있었습니다. 거기 쓰여있기론 오빠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보였대요. 근데 단짝 한 명 말고는 누구한테도 그 얘길 안 했습니다. 그럴만했죠. 아랫도리만 보였거든요. 허리 아래가 다 보인 게 아니라 그거만.”
  의사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가운을 벗어 걸고 코트를 걸쳤다. 고된 일을 마쳐서 그런지 얼굴이 편해 보였다. 조금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무척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노트에 그런 글이랑 그림이 잔뜩 있으니... 무식한 사람들이 떠들어댔죠. 친오빠가 오랫동안 뭐, 강간이나 하다못해 유사성행위라도 했을 거다. 오빠 친구들도 자주 놀러 왔단다. 그러다가 아버지도 그랬단다, 술만 마시면 애보러 간다고 서둘렀단다. 끔찍하고 잔인하지만, 소문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기본적으로 남 이야기니까. 암튼 그 집 아버지가 여기저기서 사람들하고 싸우고 사고치고... 그러다가 결국 가족이 단체로 어디 섬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요?”
  의사는 코트를 추스르며 대답했다. 
  “진실이 뭔진 모릅니다. 그냥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인지, 정말 눈에 이상이 있어 빨간불이 안 보였던 건지. 그림은 그냥 사춘기 소녀의 짓궂은 장난이었는지, 그게 아니면 진짜로 그 애의 삶을 치고 가버린 뭐가 있었던 건지. 모르죠. 사실 그 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나는 갑자기 불쾌함이 밀려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도움은 안 되겠네요.”
  갑자기 의사가 내 팔을 세게 붙잡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잘 보살펴 주세요. 가족이잖아요.”
  의사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는 팔을 뿌리치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로비는 불이 꺼져 있었다. 눈먼 사람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 겨우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희수가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목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연신 목을 만지고 있을 뿐 내가 온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한 바퀴 돌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진짜 표정이 드러난다고 한다. 희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마음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을까? 유심히 봤지만 알 수 없었다. 표정에 언뜻 뭐가 보인다 싶다가도 담배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수석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희수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그러게.”
  “뭐가 문제래?”
  “별거 아냐.”
  “그러니까, 뭐?”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응.”
  희수는 더 캐묻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SUV는 거칠게 코너링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갑자기 그녀가 했던 욕설이 떠올랐다. 좆같은 씨발 새끼, 좆같은 씨발 새끼.

 

  5
  만난 지 일 년 즈음부터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신도시에 둘이 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아파트를 장만했다. 주차장엔 고급 SUV가 있었다. 모두 희수의 것이었다. 나는 작은 광고 회사의 기획자로 수입이 변변치 않았는데 그녀는 카피라이터로 재능이 있는지 사정이 넉넉했다. 프리랜서로 원할 때만 일하면서도 말이다. 나중에는 자기 이름으로 브랜드 네이밍 업체를 만들 계획도 있었다. 
  “이름은 뭐로 지을 건데? 브랜드 네이밍 업체면 이름이 진짜 중요하겠다.”
  “모르겠어. 오빠가 하나 지어줄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라고?”
  “으, 식상해. 오빠는 안 되겠다.”
  “맞아. 그냥 잘하는 거 할게!”
  나는 훌러덩 옷을 벗고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우리는 뭐든 잘 맞았다. 취미도 생각도 비슷해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주말엔 시골이나 바다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종일 집에 틀어박혀 뒹굴었다.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갔다. 코사무이, 블라디보스톡, 바르셀로나, 몬트리올. 사진과 동영상을 모은 외장하드는 금세 가득 찼다. 볼 때마다 넉넉한 잔고를 살피는 것처럼 흐뭇했다. 따지고 보면 온통 빤하고 빤한 일뿐이지만 어쩐지 빤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나는 마냥 행복해졌다.
  하루는 와인을 마시며 밤새 보드게임을 했다. 지는 사람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벌칙이었다. 내가 먼저 그녀의 얼굴에 그리고 다음 게임에 곧바로 당했다. 희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집중해서 내 얼굴에 수염을 그렸다. 나는 취기가 오른 채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수성 매직으로 그린 이상한 점과 선들이 가득했다. 스파이 영화에서 벗어던지는 가짜 얼굴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마음의 속도란 계기판에 찍히지 않는데.  
  돌이켜보면 이전의 만남은 모두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연애라는 장기공연에서 친절하고 다정한 남자친구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진짜 사랑이, 관계가 뭔지 몰랐다. 이제야 온전히 나를 이해할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뭐든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희수야, 미안. 종치는 거 같이 못 볼 거 같아.”
  “뭐? 왜?”
  “정동진으로 출장.”
  “전에 말했던 그 클라이언트야?”
  “응. 해 뜨는 거 좀 찍어오래.”
  “그 사람 진짜! 그런 걸 왜 대행사에 시켜. 대기업인데 지네 홍보팀 있을 거 아냐.”
  “모르지 뭐.”
  “오빠도 가야 해? 팀장인데.”
  “팀장이니까 가야지. 어떻게 애들만 보내.”
  “그것도 그런가.”
  “희수는?”
  “점심땐 미팅 있고 끝나고 동창들이랑 잠깐.”
  “늦어?”
  “아니, 다 결혼한 애들이야. 나만 혼자 새해 보게 생겼네."
  “일찍 자고 있어. 끝나고 최대한 빨리 올게.”
  거짓말이었다. 나는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해 이벤트 샵에 들렀다. 집에 돌아와 꼬마전구를 천장에 주렁주렁 달고 바닥에는 연핑크 색 꽃잎을 깔았다. 여기저기 촛불도 올려놨다. 희수가 식상하다고 놀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주머니에서 검은색 박스를 꺼냈다. 벨벳으로 마감한 작은 박스 안에는 목걸이가 있었다. 예전부터 청혼할 때 목걸이를 쓰고 싶었다. 반지는 어딘가 아쉽다. 목걸이가 진짜 구속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마음이 들떴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기다렸다. 
  저녁 뉴스가 끝날 무렵, 번호키가 눌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놀래켜줄 생각으로 방 안에 숨어 있었다. 대화 소리가 들려 슬며시 밖으로 나와보니 당황하는 희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어색한 인사를 몇 마디 했다. 안녕하세요. 희수 동창이에요. 부군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들은 바가 없었다. 잠깐 집 구경만 하고 가려고 했어요. 나는 왜 왔느냐고, 언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럼 가볼게요. 희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그냥 가. 저녁 먹고 가. 우리는 꼬마전구가 빛나고 꽃잎이 깔린 거실에서 치킨을 먹었다. 한동안 어색했다. 맥주를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취기가 오르자 두 사람은 말이 많아졌다. 다들 광고 쪽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니까 광고가 그딴 식이면 되겠냐고?”
  “최희수 씨, 카피 잘 뽑는 건 인정하는데요, 그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선생님, 마케팅은 일방적입니다. 인터렉티브가 어쩌니 하는 거 다 거짓말이에요. 메시지는 하나! 이걸 사라! 그게 끝!”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느낌이나 착각일 뿐이랍니다.”
  “너 이 씨...”
  희수는 잠시 과장되게 입술을 깨물더니 나에게 말했다. 
  “얘 얼마 전에 이혼했어.”
  나는 웃었다.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형님, 죄송합니다.”
  어느새 형님이 된 나는 또 웃었다. 
  “둘이 살던 집에서 혼자 새해를 맞는 기분이 어떻겠어.”
  “얼씨구. 그만해. 취했어.”
  “안쓰러워서 보낼 수가 있어야지.”
  그랬겠지. 
  “됐어. 우울한 얘기 그만하고, 너는 형님이랑 계획이 어떻게 돼? 아직인가?”
  “우린 사귀기 전에 얘기했어. 결혼이나 육아는 안 하기로.” 
  그런 얘길 했던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 속에 덜렁거리는 박스가 눈치 없이 튀어나올까 조심했다. 
  그는 11시쯤 일어났다. 우리의 연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를 보내자마자 희수는 소파에 늘어졌다. 나는 그가 먹다 남긴 맥주캔과 닭 뼈와 젓가락을 치웠다. 설거짓거리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희수는 늘 설거지를 미룬다. 결국은 아쉬운 쪽이 하게 된다. 어느새 다가온 희수가 뒤에서 안았다. 
  “오빠, 뭐 준비했었어?”
  “그냥... 새해 기념 서프라이즈.”
  “내가 눈치가 없었네. 미안해.”
  미안한 일을 왜 했을까? 아니, 정말 미안하긴 한 걸까?
  “아냐, 잘했어. 친구가 진짜 힘들 때 잘해줘야지. 그런 게 나중에 기억에 남거든.”
  “고마워, 오빠.”
  “고맙긴.” 
  “역시 오빠는 다정해.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희수는 내 볼에 뽀뽀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는 설거지를 했다. 오래되어 눌어붙은 음식물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우리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해되지 않았다. 희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를 무척 좋아한다. 그건 내 착각이었나? 또 잊은 건 없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희수는 씻고 나와서 나에게 기댔다. 우리는 함께 제야의 종 행사를 봤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숫자를 외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저마다 달랐다. 오, 사, 삼, 이, 일. 땡. 고개를 돌려보니 희수는 내 어깨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희수야, 희수야. 새해야.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6
  해가 바뀌고 일은 바빠졌다. 새로 들어온 영업팀장 덕이었다. 원래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라 광고는 하나도 몰랐다. 그런데도 여기저기 다니며 대기업 프로젝트를 줄줄이 따냈다. 팀이 다섯 개로 늘고 사무실도 훨씬 넓은 곳으로 옮겼다. 나는 초창기 멤버고 성실히 일했지만 정치에 약해서 따돌림을 당했다. 궂은일이 몰리고 한 달에 절반 이상 출장을 다녀야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희수는 가끔 불만을 얘기했지만 금세 적응했다. 하루는 씻고 나오니 출장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희수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새로 런칭하는 커피 브랜드 이름을 구상 중이었다. 말을 거니 집중했는지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 
  “가방 싸놨네?”
  “응. 고맙지?”
  “말도 안 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뭘.”
  “이번엔 좀 긴데. 일주일 정도 걸려.”
  “알아. 속옷이랑 양말 넉넉하게 넣었어.”
  “어떻게 알아?”
  “전에 얘기했으니까.”
  “언제?”
  “언제?”
  “내가 언제 얘기했어?”
  “기억 안 나.”
  “다른 사람한테 들은 거 아냐?”
  “다른 사람 누구?”
  “그건 모르지.”
  희수는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누구한테 들었는지 궁금해서.”
  “자기가 얘기했겠지! 내가 누구한테 들어?”
  “너 아는 사람 많잖아. 우리 영업팀장도 안다며.”
  “그냥 건너 건너 들은 거지. 일 잘한다고.”
  “만난 적 있어?”
  “그게 지금 중요해?”
  “만난 적 있냐고.”
  “있어. 왜?”
  “좋았어?”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덜컹,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깼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바퀴를 내린 비행기가 착륙장을 달리고 있었다.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비행기가 멈추자 나는 바로 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어?”
  “방금.”
  “고생했어. 조심히 다녀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응. 희수는 괜찮아?”
  “나? 왜?”
  “그냥...”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정말로?
  출장 중엔 늘 선잠을 잤고 이상한 꿈을 자주 꿨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희수가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오직 내가 준 목걸이만 목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거실에 덩치 큰 남자들이 제 물건을 덜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희수는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 남자들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다. 희수는 손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다가 목걸이를 잡는다. 그리고 제 목을 조른다.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눈도 빨갛게 충혈된다. 나는 그녀를 말리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그건 꿈일 뿐이다. 희수는 내가 돌아올 때마다 늘 다정하게 반겨줬다. 짐을 받아서 정리하고 옷을 세탁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각자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날은 꼭 잠자리를 가졌다. 뒤죽박죽 한 일정 탓에 한 번쯤은 생리현상이 걸릴 법도 한데 어쩐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녀는 늘 괜찮은 날이라고만 했다. 
  우리는 누워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키스를 했다. 그러고 나는 그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골반을 지나 손목으로 갔다. 희수는 특히 손목 안쪽, 향수 뿌리는 곳을 좋아했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졌다.
  “더 세게 해줘.”
  나는 마치 흡혈귀라도 된 듯 그녀의 손목을 빨고 깨물었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뽑을 듯 움켜쥐었다. 그리곤 신음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 욕해줘!”
  희수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무시했다. 취향을 존중하고 배려하지만 영 아닌 것도 있다. 평소에 욕을 하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고, 욕을 하면 성욕이 쑥 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답 없이 애무를 계속했다. 그녀는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듯 걸걸한 소리로 말했다.
  “욕하라고, 씨발놈들아!”
  깜짝 놀랐지만 분위기를 깨기 싫어 모르는 척했다. 일이 다 끝나고 욕실에 다녀오니 그녀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나는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문득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을 만지니 축축했다.
  “희수야? 울어?”
  그녀는 아이처럼 훌쩍이며 눈물을 쏟았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밤새 그녀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뻐근했다. 밤새 몸에 힘을 주고 잔 듯했다. 특히 손과 팔이 심했다. 스트레칭하고 한참을 주무르다 일어났다. 옷을 입고 거실로 나가니 희수는 폴라티 하나만 입고 브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잘 잤어?”
  “응. 희수는?”
  “나도.”
  얇은 커튼을 통과한 은은한 햇살이 거실에 가득했다. 들릴 듯 말 듯 아늑한 클래식 음악에 달콤한 과일 향 디퓨저가 제 몫을 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멋들어졌다. 사워크림을 곁들인 호밀빵에 브라트 부르스트 소시지, 유기농 토마토가 들어간 부라타 보코치니 샐러드.
  “커피는 블랙 아이보리야.”
  들어도 뭐가 뭔진 몰랐다. 어쨌든 고급레스토랑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근사하네.”
  “얼른 먹어봐.”
  맛도 기가 막혔다. 나는 과장해서 눈썹을 씰룩거렸고 희수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브런치를 먹었다. 지난밤이 꿈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일부는 꿈이란 확신까지 들었다. 기억이란 게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어떤 기억들은 내 것 같지가 않다. 오래되어 낡아버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소홀하게 여겨서인지, 지나쳐버린 삶의 어떤 토막들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생활 중 만나본 어리숙한 사람들 얘기를 했다. 자기는 그럴듯하게 속인다고 생각하지만, 속이 빤히 보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가장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꿈도 못 꾸는 바보들.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못난 사람들의 흉내를 냈다. 우리는 코미디 프로를 보는 것처럼 웃었다. 행복이란 게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손목을 봤다. 안쪽에 흉터가 있었다. 가로로 길쭉해서 마치 칼로 그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게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7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일단 하루만 경과를 보자고 했다. 그러고 강남의 유명한 안과나 큰 대학병원을 가보자고. 희수는 영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어쨌든 수긍했다.  
  희수는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 창가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태양이 반사된 작은 행성일지도, 외계인의 전초기지일지도, 떡메를 든 토끼 남매의 보금자리일지도. 그때 내게 달은 일종의 공백 같았다. 존재 자체가 위협인 구멍. 까맣게 채운 밤하늘을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작은 틈. 나는 혼자만의 공상에서 깨어나 말했다.  
  “희수야.”
  “응.”
  “너 가족 이야기했었나?”
  “갑자기 왜?”
  “기억이 안 나서. 언니가 있다고 했나?”
  “오빠.”
  “어머니는?”
  “얼굴도 몰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아빠랑 오빠랑 자란 거야?”
  “응.”
  “지금은 어디 계셔?”
  “몰라.”
  “왜?”
  “그걸 굳이 알아야 해?”
  “얘기하기 싫어?”
  “의사가 물어봐? 가족력이래?”
  “그런 건 아니고.”
  “그렇든 말든 싫어. 가족력이든 유전이든 내 눈이 어떻게 되든, 가족 얘기는 싫어. 연 끊은 지 오래라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나는 왜 만났어?”
  급하게 브레이크가 걸리며 차가 길가에 섰다. 고요했다. 금요일 밤이지만 신도시의 왕복 팔차선 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지나가는 차도 없어서 마치 커다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갑자기 이쪽으로 이사 온 게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탁탁 들어맞는 잘 짜인 계획도시. 이런 곳에는 삶의 온기가 절대 가까이할 수 없다. 
  “갑자기. 궁금해서.”
  희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했다. 
  “다정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다. 
  “오빠는 다정한 사람이야. 배려심도 깊고 이해심도 많고. 나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감정조절도 힘들어. 나도 알아. 내가 정말 까다로운 사람이란 거. 오빠 말고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줄 사람이 더 있을까 싶어.”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돌려 희수를 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왜 울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검은색 스키니 진에 달처럼 눈물이 맺혔다. 나는 손을 뻗어 그곳을 더듬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이내 돌처럼 굳었다. 나는 계속 허벅지를 더듬으며 말했다. 
  “내가 뭐 잘못한 거야?”
  “아냐, 오빠. 내가, 내가 이상한 거야.”
  “뒷좌석으로 가.”
  희수는 순순히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에 탔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불안한 눈빛이 계속 사방을 살폈지만 보이지 않는 나를 찾을 순 없었다. 
  “오빠, 어디 있어? 나 안 보여.”
  나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빠가 운전하는 거야? 집으로 가는 거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이 허벅지에 닿자 희수는 또 깜짝 놀라며 굳었다. 
  “왜 이래...”
  나는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희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온몸을 정성스레 만졌다.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경직된 몸이 풀어지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의 바지를 벗기고 완전히 밀착했다. 빨개진 볼과 따스한 온기, 숨소리가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를 느꼈다. 그러나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폴라티를 벗겼다. 목에 처음 보는 시커먼 멍이 있었다. 두 손을 대보니 어쩐지 꼭 들어맞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그녀의 목을 쥐었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캑캑 대기만 했다. 나는 허리를 움직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 곧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옮겨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우리는 함께 절정으로 치달았다. 

  눈을 뜨니 희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보여?”
  “응, 잘 보여.”
  “다행이다.”
  “더 잘래?”
  “몇 시야?”
  “한 시간 정도 지났어.”
  “집에 가서 자자.”
  “응.”
  우리는 옷을 입고 차에서 내려 굳은 몸을 풀었다. 차가운 밤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희수는 길게 하품을 했다. 
  “내가 운전할까?”
  “응. 졸리다.”
  나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희수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심지어 코까지 드르렁 골아댔다. 나는 휴대전화로 그 소리를 녹음하며 킥킥댔다. 이것도 한 달짜리네. 그리곤 벨트를 채워주고 나도 멨다. 출발하기 전에 백미러를 한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봤다. 둥그런 보름달이 덤덤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은 여백이 무너지는 밤하늘을 겨우 틀어막고 있는지도. 바퀴가 천천히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8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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