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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층계참 라파엘, 올해의 콘셀로디 발견! 3 층계참 라파엘, 올해의 콘셀로디 발견!”

 

봄버두 안장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기대고 선 라파엘이 손목에 찬 송신기에 대고 보고했다. 새로 장착한 기계가 신기한지 손톱 끝으로 톡톡 두들기는데, 귀 뒤의 칩 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신기 건드는 거 그만 할래? 귀 따갑거든.]

 

“죄송합니다. 작동이 잘 되는지 어떤지 궁금해서 만져보고 싶었어요.”

 

[콘셀로디 이미지 이쪽으로 전달하고 행사 전까지 잘 지켜봐.]

 

“알겠습니다.”

 

[특히 물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신경 써서 살피고.]

 

“예.”

 

[……라파엘?]

 

“네, 말씀하십시오.”

 

[실패하면 행사고 뭐고 없다. 첫 임무니까 대충해도 되겠지 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압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교육받았는지 아시잖아요. 달력에 꽂을 크라프트지에 예쁜 색 입혀서 출력이나 해 두시지요, 선배님.”

 

라파엘이 눈앞으로 내려온 짙은 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했다.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마 아래 우묵하게 자리한 녹색 눈동자가 줄곧 저 아래 걸어가는 한 소녀를 따르고 있었다.

 

[봄버두 타고 다닐 때 설정 확실히 해. 유령 봤다고 신고하는 사람 나오게 하지 말라고.]

 

많은 변화를 겪으며 온갖 신기한 것투성이로 이루어진 세네칸이지만, 향수와 순박함을 잃지 않은 주민들에게 유령이나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호기심과 흥미를 채워주는 멋진 소재였다.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공중 정원 ‘그라다’가 들려있는 걸 매일 보면서도 말이다.

 

“신경 쓰겠습니다. 지금부터 이미지 송신합니다.”

 

송신기에 달린 촬영 버튼을 누르자 봄버두 앞유리에 눈금과 초점이 생겨났다. 손잡이를 잡고 왼쪽 몸선을 축으로 틀자 봄버두 방향이 바뀌어 소녀의 얼굴이 확연하게 잡혔다. 앞유리에 잡힌 뽀얀 얼굴이 화면에 가득 들어찬다. 이미지를 본부에 전송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파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올해는 너구나. 콘셀로디.”

 

-

 

구두를 내밀자 둥근 앞머리 부분의 하이라이트가 반짝하고 빛났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좋아 연달아 앞으로 내디뎠다. 여유롭게 대지를 감싸는 아침 햇살이 구두와 커다란 돌 바닥과 사각거리는 치마 끝자락에 닿아 부서지며 마리솔을 눈부시게 했다.

가느다란 실눈을 연거푸 손으로 비비면서도 이런 부옇고 쨍한 빛 아래 설 때면 그녀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성을 감지하고는 했다. 커다랗고 두꺼운 돌로 튼튼히 쌓아 만든 길을 걸으며 마리솔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길 옆으로 나란히 흐르는 강, 유유히 흐르는 수면 위에서도 빛은 잘게 쪼개져 소리 없는 반짝임으로 재잘댔다. 주먹을 꼭 쥐며 물 쪽에서 한 걸음 멀리 떨어졌다.

 

마리솔 시선이 이내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새하얀 오프렌으로 만든 작은 부케, 일 년에 단 한 명만이 이 작은 부케를 착용해 자신이 올해의 ‘콘셀로디’임을 알린다. 마리솔은 잠시만, 아주 잠시만 이 기분에 취하겠다고 다짐하며 햇살과 콘셀로디가 된 자신을 원 없이 만끽했다.

 

좁게 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어선 안 된다는 걸 잊지 않은 것이다. 거대한 사각 설탕을 쟁인 것 같은 돌 바닥 표면이 잘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로 우툴두툴해 혹여 구두 가장자리에 흠이 생길까 조심스레 걸었다. 소리가 벽에 부딪쳐 울리는 바람에 작은 소리조차 선명히 들렸다.

또각또각 구두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동굴 같은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이 골목을 지나면 다시 햇살과 마주한다. 모든 것이 마리솔을 들뜨게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내년에는 진짜가 되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진정 센탈라의 수호를 받을 수 있겠지!’

 

골목을 벗어나 드디어 도착한 곳에는 비스듬하게 절반 정도만 모습이 드러난 창문과 드러누운 듯한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높다란 건물의 꼭대기와 뾰족한 첨탑, 텃밭이 있었을 옥상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원한 창이 모두가 하나같이 기울어진 모습으로 튼튼한 돌 바닥 사이로 파묻혀 빙산의 일각처럼 일부만 지면 위로 빼꼼히 나와 있을 뿐이다.

마치 걸리버 나라의 건물이 소인국에 놀러 와 잠들었다가 무른 지면 아래로 쑥 빠진 걸 순간 포착한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그렇게 제멋대로 놓인 건물 사이로 새로 지어진 건축물과 자연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조성된 자연의 푸른 잎사귀들이 어우러져 있다.

마리솔은 세네칸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장소에 있을 때면,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시간적 분화구에 도달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늘 앉는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모은 무릎 위로 팔꿈치를 기대고 손으로 턱을 받혔다. 그 자세에서 아주 편안한 각도 앞으로 시선을 던지면 울창한 나무와 제멋대로 들쑥날쑥한 건물 사이를 뚫고 참하고 고고하게 지면까지 도달하는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었다.

마리솔이 명당자리를 정해놓고 자주 찾는 유일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주변 무엇보다도 밝음을 자랑하며 곧게 뻗어내는 자태에 그녀는 또 한 번 신성을 느꼈다. 차분하게 마음이 채워지고 있다. 지금 같아선 본인이 센탈라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약간 몽롱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환상까지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는지 시선 끝으로 천사가 보인다. 정말 흡족하다.

 

‘오와, 천사도 저렇게 잘 생긴 천사라니.’

 

마리솔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눈을 껌뻑 껌뻑거리며 그라다 공중 정원 위로 떠 있는 존재를 바라보다 어쩌면 천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복 입은 천사는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등에 날개가 달린 것 대신 바이크와 자전거를 합친 듯한 둥글둥글한 동력 기계 위에 올라탄 모습을 보자니,

 

“어, 어……?”

 

-

 

“엇, 뭐야!”

 

방심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란 라파엘이 봄버두에서 몸을 떼며 일어나 모니터를 살폈다. ‘아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른 T.P 수치를 최대로 쭉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방금까지 보이던 뭔가가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다.

 

아, 제발. 그라다에서 유령이 있는 걸 봤다는 신고만은 하지 말아주기를.

 

시간을 보니 오전 여덟 시, 점점 해가 뜨거워질 시간이다. 콘셀로디가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까지 대강 열두 시간 정도가 남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다짐하는 중에 귓가에서 지직하더니 아리엘 목소리가 들렸다.

 

[라파엘, 보낸 화상이 콘셀로디 맞아? 매치가 안 되는데?]

 

“네에?”

 

라파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 쪽을 향해 봄버두에 달린 카메라를 줌업해 화면을 확대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왼쪽 손목에 오프렌 부케가 확실하게 보인다. 콘셀로디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러겠는가.

 

“오프렌은 그해 콘셀로디에게만 판매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기는 한데 네가 보내준 화상을 아무리 입력해도 프로그램이 반응하질 않아. 더 가까이 가서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팔목에 차고 있는 게 오프렌인지 확인하고, 화상 다시 찍어서 보내 줘.]

 

라파엘은 봄버두의 작동법, 제동과 변환 등 차분히 숨을 가라앉히고 기초 지식을 배운 순서대로 떠올렸다. 그라다로 들어와 마음을 다잡겠다는 의지로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후 눈썹을 덮을 만큼 길어날 때까지 한 것이라곤 오직 훈련뿐이었다.

 

오늘 그의 임무 달력에 ‘술 한 모금의 날’ 크라프트지를 붙이는 것으로 그 결실을 봐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아래 세상 편하게 발 뻗고 버려진 도시 정글 안에서 노닥거리는 여자에게 아무 일 없도록 등에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 저 안까지 들어갔지? 겁도 없네.”

 

기계 수치를 전부 확인하고 돌아보자 콘셀로디가 들쑥날쑥한 건물을 지나 본격적인 정글이 시작되려는 숲의 한 지점에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어둠이 내려앉은 곳, 서늘하고 우중충한 기운이 서려 있다고 알려진 숲의 입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괴이한 정글 공터를 지나 온갖 마녀 신화의 배경이 되는 숲 가장자리를 제 발로 찾은 것은 마리솔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로 엉기어 하나를 이룬 듯 보이는 커다란 올리브 나무를 바라봤다. 아래로 흐드러진 날렵한 잎사귀들을 들추고 기둥에서 막 가지로 이어지려는 부분의 투박한 나뭇결을 매만져보기도 했다. 올리브 나무 나뭇결에서 돌기가 일어나 움츠러들며 그 틈에서 생겨나는 검은 공간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모도’ 요정이 나타나 새로운 세계를 구경시켜 준다는 말이 있다.

 

마리솔은 그런 환상적인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라곤 했다. 새하얀 크림을 물결 모양으로 짜내어 장식한 것 같은 오프렌 부케를 찬 지금,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보다 더 극적인 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 기대 없이 올려다본 하늘에서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아름다운 천사의 환영까지도 보았으니 다른 날도 아닌 오늘이라면 혹시 기대를 채워줄 즐거운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진 이 숲까지 굳이 들어와 올리브 나무를 찾아낸 것이다.

그늘 안으로 들어서니 쌀쌀한 기운이 몸을 싸고돌아 마리솔은 약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바람이 불자 길쭉한 나뭇잎들이 가지를 타고 들썩이며 서로 부대껴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깊은 감상에 빠진 탓인지 문득 형체 없이 찰나에만 존재하는 소리나 바람처럼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뜬 마리솔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칠고 투박한 껍질을 이룬 울툭불툭한 나무 표면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 마음을 들어줄 거라는 아주 순진한 생각만으로 그녀는 용감하게 본격적으로 올리브 나무 기둥과 가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 어딘가에서 ‘바스락’ 하고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장작불이나 화롯불에 따닥하고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오른손으로 왼손목을 얼른 감추며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세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을 때 몇 발자국 앞에 깔린 나뭇가지가 또 한 번 부러졌다. 그러더니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지잉하는 소리와 철컥하는 소리.

 

‘버려진 자연의 한가운데 기계음이라니, 이 무슨 부조화야.’

 

모도 요정이 머무는 곳은 대체로 악한 기운과 정체불명의 유령이 잠들어 있다고도 했던가.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행동을 했는지 깨달으며 숲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부피감을 가진 존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몸이 절로 뒷걸음질 쳤다.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망상을 만들어 나무 사이사이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다가 등 뒤를 급습할 것 같았다. 마리솔은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잠시 왼손목을 내려다보며 오프렌 부케가 상하진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세차게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늘만 벗어나면 다시 반짝이는 신성이 그녀를 맞이할 것이다. 그녀가 있던 환한 그곳. 발을 구를 때마다 구두에 짓이겨지는 마른 나뭇잎과 잔가지 그리고 흙이 뒤엉기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 그늘진 나무 사이엔 젖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야. 숲으로 들어갔다간 구두가 젖을 수도 있었다고. 바보같이 그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불안함이 죄책감으로 바뀌려는 순간, 눈앞에 제법 두꺼운 나뭇가지가 부러져 뾰족한 부분이 마리솔 쪽을 향해 들려 있었다. 위로 뛰어넘기엔 높이 걸려있어 이대로 달렸다간 다칠 게 분명했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주변을 얼른 살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비켜가야 했지만, 잔가지 아래로 커다란 나무 기둥이 가로로 누워있어 마땅한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크게 틀었다. 덕분에 몸이 휘청거렸다. 발목에 무리가 갔는지 시큰한 통증에 눈 한쪽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멈춰!”

 

뒤에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또래의 목소리 같았지만, 장난기 많은 요정이 흉내 내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리솔은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렸다.

 

“위험하다고!”

 

뒤에서 바람이 일어나며 나뭇가지와 풀잎과 잎사귀들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빠르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어둠이 끝나가고 있다. 그림자 끝이 보였다.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마도 숲의 한쪽엔 너른 잔디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발목 아픈 걸 참아가며 있는 힘껏 달렸다. 이제 곧 빛의 세상이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

 

“앞은 호수란 말이야, 콘셀로디!”

 

호수!

 

마리솔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마침내 어둠을 벗어난 마리솔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많은 양의 빛을 감당하기 어려워 눈을 감았다가 이내 실눈을 떠 자신이 당도한 곳을 확인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잔디 위를 뒤덮은 따스한 신성이 아니라 호수 수면에 닿아 날카롭게 퍼지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며 몸이 붕 하고 떠올라 심장이 아래로 덜컹 내려앉았다. 뒤를 돌아보다 떨어지는 바람에 눈앞으로 푸른 하늘과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리고 희미하던 천사가 점점 선명해지며 자신을 향해 팔을 뻗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천사잖아. 나를 불러준 게 아까 그 천사였어.’

 

체공시간이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시선은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천사에게 고정하고는 오른손으로 왼손목의 끈을 풀어 부케를 땅 저편으로 던졌다. 동시에 천사가 마리솔을 끌어안고 함께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깊은 곳 어디선가 빨아들이는 것처럼 쉼 없이 아래로 아래로 몸이 내려갔다. 사방이 물로 가득해 웅얼거리는 듯하던 소리가 사라지고 수면 위로 아른거리던 빛도 조금씩 멀어져갔다.

겁에 질려 온몸에 힘을 준 그녀를 감싸 안고 함께 호수에 몸을 던진 그가 물속으로 빠지자마자 양손으로 마리솔 얼굴을 잡고 자신의 눈을 맞추도록 유도했다. 입에서 공기 방울이 새는 것을 볼 때마다 울상이 되려는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여자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이 마리솔을 감동하게 했다.

 

어두워질수록 커지는 두려움을 몰아내며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무사할 것이란 안도감에 몸부림은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갯짓하자 흐르는 물결을 따라 그의 짙은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르며 그 와중에 마리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정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제복만 아니었더라면, 이번에는 그를 인어라고 믿었을 것도 같았다. 천사든 인어든 사람이든 그가 무엇이든, 마리솔은 그의 존재가 몹시도 반가웠다. 공중정원에서 사는 신비의 남자가 자기를 위해 물에 뛰어들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계속 자신의 상태를 염려하며 살피는 그의 진지하고 분주한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이제 숨이 거의 다해 정신을 놓을 지경이 되었을 때도 마리솔은 정말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흐릿해진 시야 안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어떤 관을 통해 숨을 한껏 들이마시던 그가 마리솔의 얼굴을 다시 꼭 잡더니 자기 쪽으로 그녀를 잡아당기며 자신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입술을 맞춘 것 같았다.

 

‘아, 나란 애는 죽기 전까지도 대책 없는 망상을 벗어던지지 못하는구나.’

 

눈은 더욱 감겼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의 답답함과 고통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완전하게 놓기 전, 다시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힘이 느껴졌다.

 

2.

 

마리솔은 이제 그만 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던져버린 오프렌 부케가 말짱할 테니 지금 돌아가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부케를 어떻게 찾으러 가지? 나는 호수에 빠졌는데.

 

생각은 자연스럽게 흘러 호수에 빠졌던 걸 기억나게 했다. 첨벙 소리가 끝마치기도 전에 세차게 일렁이는 물결과 들쑥날쑥한 틈을 비집고 들리는 물방울, 공기 방울 소리. 푸른 수면 너머 아른아른 빛나던 빛, 점점 빠른 속도로 어두컴컴해지던 주변과 그녀를 강하게 부여잡고 놓지 않던 손.

 

그래, 손이 있었어. 그 손이 나를 다시 위로 건져주었던 것 같은데…….

 

고통스럽던 차에 숨을 불어넣어 주고 끝없이 가라앉을 것 같던 그녀의 몸을 잡아당기며 위로 끌어올려 주던 사람이 있었다. 물 위로 힘겹게 떠오르자 영영 이별일 줄 알았던 빛이 새롭게 그녀를 맞이해주던 것도 생각났다. 땅 위에서 또 한 번 몸이 뜨며 하늘을 날기도 했는데, 편안한 안도감에 그대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건 내 환영이었을 거야. 그렇긴 한데……’

 

검게 그려지는 실루엣이 떠올랐다. 얼굴을 조금이라도 기억해내고 싶은 마음에 눈을 찡그리자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러자 따스한 온기가 그 주름 진 부분에서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뒤이어 물방울 하나가 볼 위로 뚝 떨어졌다. 미간을 두드리던 온기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현실감을 느낀 마리솔이 천천히 눈을 떴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빛을 등지고 차분하게 축 내려온 짙은 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었다. 좀 더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자 이내 좀 더 자세히 얼굴이 보였다. 그늘져 짙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호기심과 염려를 담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리솔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맞아, 딱 이런 얼굴이야.’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사람이었다. 가까이 있어 본 적도,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여자애들의 입을 통해 하도 많이 듣는 바람에 혼자서만 잘 알고 있는 인기 많은 남자애 같은, 그런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들어, 콘셀로디?”

 

그가 말을 건넸다.

 

“네에.”

 

“그럼 일어날 수 있겠어?”

 

손으로 바닥을 디뎠다. 은연중 손에 흙과 잔디 같은 게 잡힐 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닿은 것은 푹신한 듯 딱딱한 바닥이었다. 라파엘은 손을 내밀어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잡아 세워 주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여기 꽤 높은 곳이거든.”

 

높은 곳이라는 말에 시선이 발 디딘 자리 바로 아래로 향했다. 마리솔 입에서 절로 ‘우와!’ 하고 탄성이 터졌다. 발아래로 서로 기대며 의지하듯 옹기종기 모인 지붕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며 행진하는 네모진 돌 바닥, 그리고 그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그라다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평소 보는 것보다 더 맑고 푸르러 물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데다가 수면 아래 존재하는 건물 일부가 보이기도 해 알지 못했던 세나칸의 신비스러움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시선을 옮기자 마을을 두르고 광활하게 펼쳐진 저주받은 숲과 그 경계를 나눠주는 과거와 현재가 머무는 그녀만의 신성한 장소도 훤히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비밀스럽게 감춰진 곳은 어디도 없는 것 같아 어쩐지 자신의 행적이나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기분에 묘한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다.

 

‘남자애가 여기서 이렇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겠구나.’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타고 휘날리다 살포시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그제야 마리솔은 자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옷이며 머리에 아직 젖은 부분이 남아있었지만, 바람에 온기가 실려있어 주변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온몸이 다 젖었을 텐데 언제 이렇게 말랐을까. 내가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나?

 

마리솔은 확인차 라파엘을 휙 바라봤다. 내내 그녀를 보고 있었던지 곧장 시선이 부딪혔다. 깜짝 놀란 마리솔은 황급히 시선을 피해 눈을 깜빡거리며 그의 머리카락과 제복을 살폈다. 살피는 척했다.

 

“용감하구나.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활기가 들어찬 목소리에 말투는 다정하다. 약간 어린애 다루는 듯한 말투긴 했지만. 라파엘이 손을 내밀었다.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할 때처럼 그런 비슷한 자세다. 마리솔이 어리둥절해 하자 라파엘이 웃었다. 남자애 정말 잘 웃는다. 꾸밈없는 맑은 미소가 근사한 얼굴과 몹시도 잘 어울렸다.

 

“여기 계속 있으면 사람 눈에 띌 수가 있어. 그렇게 되면 내가 좀 곤란해지거든.”

 

곤란하게 된다는 말에 마리솔은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얼른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간 눈앞의 남자애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홀로그램 영상처럼 투명해져 형체를 뚫고 뒤의 배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놀란 마리솔을 보며 라파엘이 잡은 손을 더 꼭 잡았다.

 

“내가 유령처럼 보일 거야. 원래는 전혀 안 보여야겠지만.”

 

잡은 손을 위로 들어 보이며 라파엘이 또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고 있어 이런 형태로 보이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라다에 오래된 마법사들이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봐.’

 

공중 정원 ‘그라다’는 하늘에 높이 떠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얼핏 보이는 흘러내린 잎사귀나 나무줄기, 길어나는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만으로 그라다 내부를 상상할 뿐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세네칸 사람들이 그런 장소를 두고 온갖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리솔은 확신했다. 언젠가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그라다가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 세네칸을 감시하려고 정차한 우주선이란 것은 완벽하게 엉터리 같은 생각이라고.

 

마리솔은 뭐에 홀린 듯 라파엘을 바라보며 그가 이끄는 대로 얌전하게 걸었다. 그는 녹음이 휘황찬란하게 드려진 아담한 정원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기댈만한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엉겨있던 나뭇가지들이 서로의 팔을 풀어 뒤로 물러나듯 자리를 내주더니 땅이 열리며 그 안에서 새로운 나무줄기로 엮인 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파엘은 마리솔을 그 의자에 앉혀주었다. 잡은 손을 놓자 모습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평소처럼 나타난다. 마리솔은 어디서부터 신기하다고 여겨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괜찮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

 

나란히 앉은 라파엘이 팔에 장착한 뭔가를 조작하자 주변을 두른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더니 그들이 들어온 입구까지 막아 공간을 더욱 아늑하게 했다.

 

“미안. 일반인을 데려오면 안 되는 규칙이 있어서 시야를 좀 가렸어.”

 

“저 때문에 규칙을 어긴 거라면 죄송해요.”

 

마리솔은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라파엘은 명랑하게 웃을 뿐이다.

 

“아니야. 내가 실수해서 그런 거야. 콘셀로디. 처음 임무부터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실은 지금 나 되게 당황한 상태거든.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만 나네. 아리엘이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많이 웃지 말라고 했는데.”

 

라파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팔을 들어 머리를 매만지는 옆모습을 마리솔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는 반짝임 가득한 푸른 자연 속에서 단연코 시선을 잡아끄는 단 하나의 피사체였다. 아직 젖은 부분이 남은 살짝 헝클어진 짙은 머리카락과 씻고 바로 나온 것처럼 이제 막 물기가 마른 맑은 얼굴을 보며 남자에게서도 투명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아리엘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물론 그걸 물어볼 정도로 용감하진 못했다. 실은 누구인지보다는 어떤 관계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제가 물에 빠지는 바람에 이런 거잖아요. 그건 제 잘못이지 그…그쪽……”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자, “라파엘. 내 이름은 라파엘이야.” 라고 시원한 대답이 들렸다.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 이름을 가졌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기 공중정원 그라다 3 층계참 소속이야. 이제 막 배정받았어. 그리고 콘셀로디, 네가 나의 첫 번째 임무야. 뭐, 완전히 망했지만. 둘러댈 말이 필요한데 좋은 생각 혹시 없어?”

 

“뭘 둘러대야 하는데요?”

 

“아, 그렇지.”

 

라파엘은 마리솔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속한 3 층계참은 세네칸의 모든 축제를 담당해. 내가 맡은 건 이번 ‘성 센탈라의 날’ 에 콘셀로디가 행사하기 전까지 무사하도록 돌봐주는 거였어. 그러니까 내가 오늘 하루는 널 지켜줘야 하는 거지.”

 

‘지켜준다’는 말을 언제나 듣기 좋다. 하지만 마리솔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진다.

 

“그런 건 시청에서 담당하는 걸 줄 알았는데요. 오프렌도 시청에서 허가받고 사는 걸요.”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라다에서도 담당하는 게 있어. 그라다에서 하는 모든 일은 뒤에서 이루어진다고 할까. 쉽게 말하자면 시청은 국가 소속이지만, 그라다는 세네칸이 차지하고 있는 실제적 공간적 의미적 영토 소속이야. 이해가 어렵겠지만, 말하자면 그래.”

 

“네, 잘 모르겠네요.”

 

라파엘이 갑자기 풀이 죽어 보이는 마리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여자애가 기분이 안 좋아졌을 땐 라파엘이 말실수했기 때문이라고 아리엘이 말한 적이 있다. 왜 그러는지 물어봤다간 여자를 더 기분 상하게 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라파엘은 난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로 공중정원은 세네칸의 시작이라고 했어요. 위에서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에서부터 시작해 호수와 강이 흐르고 깨끗한 공기와 맑은 기운을 만들어 사방으로 퍼트려 준다고요. 공중정원을 두고 만들어진 이야기는 그래서 대부분 숲이나 꽃의 요정, 생명에 관한 것들이 많아요. 우리 같은 사람이 있고 그들이 회사에서 근무하듯 일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라다 실체에 실망한 건가. 나한테 서운한 게 있는 건 아니고?’

 

“기운 내, 콘셀로디. 이곳에 있는 동안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내 첫 번째 콘셀로디라서 나한테는 네가 좀 특별하거든.”

 

“제 이름은 마리솔이에요. 저는 콘셀로디가 아니에요.”

 

“마리솔. 예쁜 이름이네. ‘술 한 모금의 날’은 못 적겠지만, 이름은 적어둬야겠다.”

 

마리솔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라파엘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다 이내 표정을 바꿨다. 대체로 남자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고 라파엘도 그랬다.

 

“그런데 ‘술 한 모금의 날’은 뭔가요?”

 

아예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 라파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라파엘은 자기 일을 물어봐 주는 게 좋은지 꽤 신나 보인다. 임무에 실패해놓고 그 사실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그건 그냥 우리끼리 하는 놀이야. 그라다에서 일하던 세네칸 정령들은 마을을 위한 일을 한 가지 마무리하면 축하하는 의미로 술을 마셨대. 그라다에서 흐르는 물줄기 알지? 그걸 받아서 목을 축일 정도로 딱 한 모금만 마시는 거야. 정령의 손길이 닿으면 물이 바로 술로 변하거든. 아주 독해서 딱 한 모금으로 충분했다고 해. 그래서 우리는 임무를 완수하면 손수 만든 크라프트지에 ‘술 한 모금의 날’이란 글을 인쇄해서 개인마다 가진 임무 달력에 붙이는 거야. 정령이 하던 일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란 자긍심에서 시작한 건데, 요즘은 성과를 자랑하는 데 사용하는 셈이야. ‘나 이만큼 일 잘한다’ 같은 거랄까.”

 

앞을 바라보며 술 한 모금의 날에 관해 설명하는 라파엘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 아주 맑은 기운이 쏟아졌다.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그가 아끼는 그라다의 푸름을 닮은 것만 같다. 환한 얼굴을 보며 마리솔은 그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라파엘, ‘술 한 모금의 날’ 그거요. 지금도 적을 수 있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걱정 하지 마. 변명은 내가 할게. 나 때문에 호수에 빠진 거니까. 평범하게 다가갔으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참, 그래도 이건 잘 주워왔지.”

 

팔목에 찬 무언가를 손으로 누르자 둥글고 아기자기하게 생긴 바이크가 공중에 뜬 상태로 날아와 라파엘 앞에 다가와 멈췄다. 손잡이에 달린 작은 바구니에서 네모진 투명한 상자를 꺼내며 그가 말했다.

 

“얘는 ‘봄버두’라고 해. 주로 그라다에서 땅으로 이동할 때 타는데, 그 외에도 활용도가 아주 높은 개인용 이동기기이자 컴퓨터야. 그건 그렇고 이거……”

 

라파엘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오프렌 부케였다. 크림처럼 말린 부분을 건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마리솔의 팔을 잡아 왼쪽 손목에 끼워주었다.

 

“정말 인상적이었어. 물에 빠지는 와중에 부케 내던질 생각을 하다니. 센탈라가 알았다면 감동했을걸.”

 

“저, 라파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꼭 해야 해요.”

 

마리솔이 라파엘 말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작정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 전체에 깃든 어떤 의지가 그녀를 씩씩하게 해 주었다. 라파엘은 마리솔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 좋아. 무슨 말인데?”

 

“실은 저 말이에요……”

 

“아, 잠시만.”

 

순간 라파엘이 손을 들어 보이며 마리솔의 말을 막았다. 고개를 아래로 돌리며 어떤 소리에 집중했다.

 

“네, 라파엘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라파엘, 너 지금 어디야?]

 

아리엘의 목소리다.

 

“그라다 동편 정원에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마리솔은 작정한 말을 얼른 해 버리고 싶어 조급한 마음으로 라파엘을 바라봤다. 그가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파엘이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더니 어느 순간, 말을 멈추었다. 잠시 후 “잘 알겠습니다. 곧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얼굴로 마리솔을 바라봤다.

 

“저기, 마리솔.”

 

“네?”

 

“본부에서 선배가 그러는데, 네가 ‘콘셀로디’가 아니래. 정말이야? 콘셀로디가 아니야?”

 

마리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제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어요. 저는 올해의 콘셀로디가 아니에요.”

 

3.

 

그라다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봄버두는 아찔한 속도로 공간을 한 겹 두 겹 가르며 미친 듯이 질주했다. 정도를 벗어나는 각도로 기울어질 때면 마리솔은 눈을 질끈 감고 라파엘의 허리를 세게 감싸 안았다. 머릿속엔 절대 손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보다도 당장은 이것이 더 큰 걱정거리다. 봄버두 움직임에 따라 마리솔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쉴 새 없이 휘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꽉 잡아!”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리솔은 손가락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수신기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파엘! 어디야? 5 층계참 요원 내보냈어. 콘셀로디 사칭범 가까이 있어?]

 

콘셀로디 사칭범? 나 말이야? 내가 그렇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저는 다시 내려가는 중이라서요.”

 

라파엘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선배에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음성 상태가 왜 이래? 똑바로 하는 거지? 봄버두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빠르게 달리는 도중인 데다 방향을 휙휙 바꾸는 바람에 몸이 들썩거려 숨도, 목소리도 고르지 않았다. 아리엘이란 여자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라파엘, 대답해! 너 어디야? 괜찮아? 아직 시간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알았지?]

 

“제가 아직 작동을 자유롭게 못 해서……, 선배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파엘은 성급히 송수신기를 끄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관자놀이 부근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이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게 했다. 시선이 마리솔에게로 향했다. 그녀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더니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봄버두 속도를 낮추었다.

 

“미안. 정신이 좀 없지?”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속인 여자애를 향해 라파엘은 여전히 웃고 있다. 말투는 또 얼마나 다정한지 마리솔은 저도 모르게 그의 등에 한쪽 뺨을 기대고는 눈가를 더욱 붉혔다.

 

‘저는 올해의 콘셀로디가 아니에요.’

 

이렇게 고백했을 때 라파엘이 한 말에 마리솔은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럴 리가. 넌 내 첫 번째 콘셀로디잖아.’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괜한 고집을 부려보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버린 눈을 하고 있었다. 실망과 섞여 표출되는 안타까움이 그를 유약하고 더욱 어려 보이게 했다. 마리솔은 그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올해의 콘셀로디는 내 언니, 마리아나에요. 그런데 언니는 센탈라에게 어떤 애정도 없어요. 공중정원에 관한 것도 늘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면서 제가 가진 환상을 부수려고 들었거든요. 전 세네칸의 많은 이야기를 사랑해요. 그것들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늘 바라왔다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 언니가 콘셀로디로 뽑혔을 때 저는 정말 좌절했어요.

그런데 간밤에 언니가 받아놓은 오프렌 부케가 책상 위에 놓인 걸 봤어요. 언니는 축제에 불려 나가기 전까지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전 잠시만 그걸 손목에 차고 콘셀로디가 된 기분을 맛보려고 했던 거에요. 아주 잠깐만요. 그뿐이에요. 누굴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라파엘은 마리솔의 말을 별 어려움 없이 믿어줬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에 마리솔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리솔, 5 층계참 요원들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야겠어. 물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놀라지 마.”

 

마리솔이 얼굴을 등에 기댄 채 끄덕이자, 라파엘은 다시 빠르게 깊은 호수를 향해 봄버두를 몰았다. ‘부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 공기가 봄버두 옆으로 들고 일어났다. 타래를 풀어내는 실 모양으로 투명한 어떤 기운이 넘실대며 흐느적거리다 봄버두 뒤로 지나치면서 방사형으로 쫙 펼쳐졌다. 동시에 일직선 방향으로 봄버두가 쭉 튀어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는 공기층을 다 헤집고 다른 차원으로 통과라도 할 기세였다. 귀가 멍해지는 것 같아 한쪽 손으로 귀를 꾹 눌렀다.

봄버두 주변으로 투명한 입자가 아주 빠른 속도로 블록을 쌓으며 바깥과 안쪽을 나누듯이 벽을 세웠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봄버두와 라파엘, 마리솔을 감싼 커다랗고 투명한 구가 만들어지자 안으로 상쾌한 공기가 들어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들은 곧장 호수 아래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아랫부분에서 엄청난 양의 공기 방울이 구름처럼 일어나며 봄버두를 물 아래로 밀어 넣었다. 물보라 같은 하얀색 공기층과 주변으로 출렁이는 물살의 단층이 투명한 막에 쉴 새 없이 모양을 달리하며 부딪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의 존재를 외부 변화를 차단하는 급격한 단절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부에는 계속 신선하게 뿜어져 나오는 공기가 매끄럽게 순환해 어느 곳에도 김이 서리지 않았다.

라파엘은 봄버두를 한참이나 물 아래로 끌고 내려가서야 악셀 버튼을 껐다. 사방이 잠잠해지자 그가 몸을 돌렸다.

 

“괜찮아?”

 

라파엘이 물었을 때야 비로소 마리솔은 어둡고 폐쇄된 공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네.라고 소리 내 대답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봄버두 아랫부분에서 새어 나왔다. 그러자 바깥과 안쪽의 경계가 안개 같은 빛으로 어슴푸레하게 구분되었다.

 

“고마워, 마리솔.”

 

윗부분은 어두워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그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콘셀로디도 아닌데 오프렌 부케를 끝까지 생각해 줬잖아. 진짜 콘셀로디라도 다 그렇게는 못할걸.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손끝이 따끔거리면서 동시에 따스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로받는 기분을 가질 수 있다니.

 

“내가 실수로 잘못 짚은 사람이 그런 너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마리솔은 라파엘이 너무 좋게 생각해 주는 게 부끄러워 가만히 듣고만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 이제 어쩌나요? 우리 둘 다 어떻게 해야 하죠?”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아. 5 층계참 본부에는 내가 착각한 것으로 보고를 올리면 그만이야. 약간의 징계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별일은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태평한 소리다. 걱정이란 걸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일까. 마리솔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5 층계참은 경찰 같은 일을 하나 봐요?”

 

“규율 담당이야.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죄다 모인 곳이라서 건물만 들어가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니까. 다른 부서와 왕래도 차단하느라 본부가 수면 아래 건물에 있어. 아까 그라다에서 내려다봤을 때 본 건물 있지? 거기야.”

 

“강 아래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진짜 있었군요. 몰랐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들 입장에선 편하고 좋을 거야. 아리엘도 원래는 거기 소속이었어.”

마리솔에게 대답이 없자 라파엘이 또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을 쥐어 보였다.

 

“아, 맞다. 나랑 무선 주고받는 선배 말이야. 이름이 아리엘이거든.”

 

라파엘 입에서 ‘아리엘’이란 이름이 나오자 마리솔은 문득 생겨나는 호기심 꾸러미를 열어보고도 싶고, 동시에 알기를 미루고 꽁꽁 여며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3 층계참으로 배정되자마자 선배도 옮겼어. 가까이서 날 감시한다나 뭐라나.”

 

“왜 감시를 해요?”

 

“내가 못 미더워서겠지. 말로는 날 아껴서라고 하지만.”

 

아껴서…….

 

“나도 같이 있는 게 편하고 좋아. 아리엘이 5 층계참에 있으면 걱정될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얘길 저한테 다 해 줘도 괜찮은 거에요? 안 될 것 같은데요.”

 

“비밀로 해 줄 거지? 사실 요원이나 그라다에 대한 거 일반인에게는 비밀이거든.”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요원이 되었을까 심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쨌거나 마리솔은 듣고싶지 않은 이야기를 피하고자 대화 주제를 바꿨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콘셀로디는 원래 어떤 방법으로 찾죠?”

 

“시청에서 입력한 데이터를 받아서 주소로 찾아. 마침 집을 확인하다가 손목에 부케를 찬 네가 나오는 걸 본 거야. 그러는 바람에 다른 생각 없이 너라고 믿어버린 거지.”

 

라파엘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끝까지 확인하지 않는 바람에 미안하게 됐어. 그리고 고마워. 특히 부케를 젖지 않도록 던져 놓은 거,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내가 얼마나 안도하는지 모를 거야. 그래서 나는 내 첫 번째 콘셀로디를 마리솔, 너로 기억하게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할게.”

 

“저도 죄송…….”

 

“어, 잠시만.”

 

라파엘이 갑자기 마리솔 팔에 손을 대며 말을 멈추게 했다. 그의 시선이 봄버두 앞유리창으로 향했다. 스위치를 누르니 안개처럼 발목 부분만 어스름하던 푸른 기운이 위까지 퍼져 그들을 가둔 구 전체가 밝아졌다.

내부가 환해지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에서 불을 밝혔을 때 아늑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과장된 그림자들로 인해 바깥세상에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파엘이 마리솔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원들이 이동했어. 이제 약간의 시간만 벌면 괜찮을 거야.”

 

라파엘이 송수신기를 켰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마리솔에게까지 들렸다.

 

“선배님, 들리십니까? 지금 선배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디야? 맘대로 송수신기 끄지 말라고 했지! 콘셀로디도 아닌 일반 여자앨 맘대로 찍어서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데이터 안 넘기고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부서 들르지 말고 곧장 나한테 와.]

 

“올라가겠습니다. 그런데 비상계단에 센서 좀 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배님.”

 

마이크에 대고 푹 내쉬는 상대방 한숨 소리가 우웅하고 울렸다.

 

“저는 물 위로만 올라가면 아무 데나 내려놔 주세요.”

 

“무슨 소리야. 말했잖아. 너 내 콘셀로디라고. 축제 끝날 때까지 데리고 있을 거야.”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마리솔은 입을 다물고 라파엘 허리를 꽉 붙들어야 했다.

 

“마리솔! 꼭 잡아!”

 

한참을 제자리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세게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 물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무겁게 느껴져 속도가 빨라질수록 마리솔의 뒷목에 힘이 들어간다. 방심했다가 목이 뒤로 꺾일 것만 같이 어깨를 최대한 움츠리고 있는 힘껏 라파엘을 붙잡았다. 물 위로 올라오자 투명한 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아리엘은 키가 컸다. 짙은 색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 말 꼬랑지처럼 찰랑거린다. 손을 들어 연신 허공을 찔러대고 걸음을 멈추는 법 없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흥분한 상태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목소리는 우렁차 과거에 5 층계참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을 자랑했었다는 라파엘의 말을 실감하게 했다.

 

“누누이 말했지! 첫 임무라도 대충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하셨습니다.”

 

“콘셀로디 화상 매치 안 된다고 했을 때, 바로 매뉴얼대로 했어야지, 왜 여자애를 따라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때마다 마리솔은 꼭 자신이 혼나는 것만 같아 한껏 움츠러들었다. 아리엘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얌전하게 앉아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화들짝 놀란 마리솔은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대 같은 여자를 바라보며 침만 꿀꺽 삼켰다. 아리엘은 허리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여 마리솔을 내려다봤다. 하자 없는 물건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더니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순간 아리엘의 미소가 라파엘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이, 신참.”

 

“네, 선배님.”

 

“너 이런 애가 타입이야?”

 

마리솔이 라파엘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고도 때에 맞지 않는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대답이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라파엘은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라는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봤다.

 

“실전 대비해서 훈련 많이 한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묻는 거야. 매뉴얼을 알았을 텐데 그대로 하지 않고 이 여자앨 따라갔잖아. 이 여자애가 콘셀로디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맘에 들어서 그런 거냐고.”

 

“저……그건 제가 팔목에 오프렌 부케를 차고 있는 걸 보고 라파엘이……”

 

“라파엘이?”

 

아리엘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포착한 마리솔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신참. 가짜 콘셀로디한테 네 이름도 알려줬어?”

 

마리솔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라파엘 표정은 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이름도 알려주고, 요원들에게 숨겨주고, 본부까지 데리고 왔다?”

 

아리엘 목소리에 기운이 빠졌다. 골치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래, 라파엘한테 또 뭐 들었어?”

 

“어, 없습니다.”

 

아리엘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뚫어지라 들여다보면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힘 말이다. 마리솔은 입술을 안으로 모으며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아리엘은 허리를 더 숙여 마리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이렇게 보아하니 꽤 귀여운 아가씨잖아. 저 녀석이 진짜 맘에 들어 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닙니다, 선배님.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라파엘 말에 아리엘이 허리를 세우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가장 큰 모니터가 세워진 곳으로 가 마리솔네 집에 붉은 점이 그려진 화면을 크게 띄웠다. 옆으로 마리솔의 언니 마리아나의 사진이 함께 떴다.

얼핏 마리솔이라고 착각할 만큼 흡사하다. 단, 마리솔의 눈이 ‘저는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분위기라면, 마리아나에게선 ‘너보단 내가 좀 더 알지’와 같은 자신만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진을 확인하자 마리솔은 얼른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얼굴이 비슷해서 긴가민가했어. 하지만 덕분에 쌍둥이라 실수한 거라고 둘러댈 수 있을 거야.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넌 진짜 콘셀로디한테 찾아가 봐.”

 

“네, 알겠습니다.”

 

라파엘이 마리솔 쪽으로 걷자 아리엘이 그를 제지했다.

 

“혼자 가. 여자애는 여기 두고.”

 

“데리고 가겠습니다.”

 

“기억을 부분적으로 지워야겠어. 나도 그러고 싶진 않지만, 다 네 잘못이다, 라파엘.”

 

기억을 지우다니, 마리솔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라파엘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라파엘의 시선도 마리솔에게 향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모든 수습은 제가 하겠습니다. 기억을 지우는 것도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 말할 때 라파엘은 마리솔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리엘이 라파엘의 표정을 살피고는 마리솔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원래 알던 사이 아니지?”

 

“아니야.”

 

“나한테 맡겨. 잘만 하면 오늘이 네가 바라던 ‘술 한 모금의 날’이 될 수 있다니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 뭐든 그냥 내가 하게 두면 안 돼? 내 임무잖아.”

 

“라피, 너 추천한 사람이 나라는 거 잊은 건 아니지? 내 체면도 좀 생각해 줘야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단 말이야.”

 

마리솔은 정색하는 라파엘 얼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저, 저기요.”

 

그녀가 둘을 부르자 속닥거리던 천사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마리솔을 바라봤다.

 

“죄송한데요, 두 분은 어떤 관계……”

 

아, 결국 물어보고 말았어.

 

마리솔 질문을 이해한 아리엘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서서 곁눈질로 라파엘을 흘겼다.

 

“나에 대해선 말 안 했나 봐?”

 

“안 한 건 아닌데, 다 말한 건 아니야.”

 

라파엘이 마리솔을 향해 애써 웃으며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어금니 물고 말하지 말랬지. 자꾸 까불면 이따 집에 가서 죽는 수가 있다.”

 

아리엘이 길고 가느다란 팔을 라파엘 목에 두르더니 다른 팔로 감아 휙 꺾었다. 라파엘이 캑캑 거리자 바로 풀어주긴 했지만, 마리솔 눈이 휘둥그레지는 데는 그걸로 충분했다. 기침해대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톡톡 두들기더니 라파엘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리엘이야. 라파엘의 선배이자, 셋째 누나이자, 막내 누나지.”

 

4.

 

푸른색 레이저 기둥이 까만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기둥에서 갈라져 나온 얇은 빛줄기를 사방으로 쏘아대자 레이저끼리 부딪치는 곳에서 하얀 연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가 완전하게 내려앉은 밤, 세네칸을 뒤덮은 마녀 레티시아의 검은 드레스가 유난히 짙고 깊었다. 그런데도 촘촘하게 자리해 반짝이던 별들이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은 공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사되는 푸른 레이저들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쿵쿵 울려대는 북소리와 심장박동을 불규칙하게 뛰도록 유도하는 현란한 기계음이 땅 위의 모든 곳을 장악하고 소음과 불빛에 맞춰 열광하는 사람들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갔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박자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이윽고 다리 주변으로 나란히 선 가로수를 따라 설치한 탐사용 고광도 대형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켜졌다.

발광하는 새하얀 빛덩어리에 사람들은 눈을 가리며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호수 쪽으로 향했다. 새로운 아침이라도 열리듯 밝아진 시야에 익숙해질 때 즈음 부드럽고 매혹적인 멜로디가 은은한 바람을 타고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멜로디는 매끄럽고 강력한 최면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좀 전의 흥분을 잠재우고 선량함과 소박함이 깃든 저마다의 이상을 떠올리게 했다.

 

어디서부턴가 시작된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번지더니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기, 콘셀로디가 등장했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축제를 위해 마련한 호수 위의 다리. 그곳에 올해의 콘셀로디가 화동 두 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섰다.

드론 두 대가 마리아나의 머리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밝히며 그녀에게로의 집중을 유도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오프렌 부케를 찬 왼손을 들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신과도 같은 당당한 몸짓과 대중의 시선을 즐기며 기뻐하는 표정이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화동이 든 바구니에서 오프렌 잎사귀를 꺼내 다리 위에 뿌리기 시작하자 라파엘은 고개를 돌려 마리솔을 바라봤다. 축제 불빛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도 마리솔의 눈동자엔 맑은 빛이 어려 얼핏 유리알 같았다.

넋 놓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감상하던 그녀는 라파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바로 옆에서 그렇게 뚫어지라 보는 건 아무래도 낯간지러운 일이다. 손을 대면 알아서 고개를 돌릴 거로 생각했지만, 손바닥에 얼굴이 맞닿은 상태에서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썹 뼈와 곧은 콧등, 매무새 선명한 입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눈을 깜박거리는지 기다란 속눈썹이 움직이며 손가락을 간질이자 마리솔은 손을 내리며 시선을 저 아래 마리아나에게로 향했다. 봄버두에 나란히 앉은 상태로 눈이 마주치게 된다면 어색한 기분이 들 게 뻔했다.

 

“기분은 어때. 좀 나아졌니?” 마리솔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 알아? 우울한 사람 어깨엔 마녀 레티시아의 검은 드레스가 올라간다고.”

 

세네칸에선 어둠을 ‘마녀 레티시아의 검은 드레스’라고 표현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무서운 동화 중 하나기에 이야기 좋아하는 마리솔이 모를 리 없다.

 

“어깨가 어두워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우울을 믿어버리게 된대. 그냥 마녀의 검은 드레스가 어깨를 가렸을 뿐인데.”

 

밤바람에 마리솔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리다 내려앉았다. 라파엘은 어깨 앞으로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조심스럽게 목 뒤로 넘겨주었다. 옆얼굴이 잘 보이게 되자 만족스러운지 제복 입은 소년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보니 오늘 저 자리는 마리아나의 자리가 맞는 것 같아요.”

 

라파엘은 마리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축제가 벌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지금 여기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고요.”

 

이번에는 마리솔이 고개를 돌렸다.

 

“제 어깨에 마녀 레티시아의 검은 드레스 같은 건 이제 없어요.”

 

“그렇구나. 뭔가 여전히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길래……, 내가 착각했나 봐.”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치즈 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오프렌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그것들과 참 잘 어울리는 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솔은 호수 아래서부터 바람이 일어 잎사귀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아름답게 흩어지는 장관을 상상했다. 휘날리는 오프렌 사이에 두 팔을 벌리고 자유롭게 춤을 춘다면 정말 멋지겠구나 하는 그런 상상.

 

“라파엘, 아쉬움이 남는 건 좋은 거에요.”

 

마리솔의 음성이 유난히 맑게 들렸다. 해 질 녘, 공기가 순환하는 시간대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울림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마리아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어느덧 중반까지 걸어가 열심히 꽃잎을 뿌렸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늘 같은 날 남는 아쉬움이라면, 정말 그럴 거야.”

 

‘아마 나만큼은 아닐 걸요.’

 

“원래 일기를 쓰진 않지만, 오늘 같은 날은 뭐에다가 라도 남기고 싶을 정도야.”

 

“달력에 ‘술 한 모금의 날’을 적어넣을 수 있겠네요.”

 

라파엘이 웃었다.

 

“그게 좋긴 한데, 내가 남기고 싶은 건 그것보다는 뭐랄까……”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리저리 돌던 고개가 마리솔을 향해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너 같은데. 마리솔.”

 

그는 또 웃었다. 학교 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학생이 우연히 마주한 존재감 없는 여자아이에게 몸에 밴 친절을 베풀 때와도 같은 그런 미소다. 단순한 매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애 입장에선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저의 부끄러운 역사를 두고두고 기억하시겠다는 거에요?”

 

“설마. 아침에 저주받은 숲에서 말이야. 네가 나무를 아주 진지하게 바라보며 표정이 계속 바뀌던 게 인상적이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풍부한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궁금했지. 네 얼굴 보느라고 아래 나뭇가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밟는 바람에 네게 들켜버린 거야. 그런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너는 바라보는 사람을 완전히 빠져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아두면 좋겠어.”

 

마리솔의 눈매가 동그랗게 커졌다. 라파엘이 한 말은 자신을 향한 칭찬이고, 아마도 들어본 적 없고, 기대해 본 적 없는 칭찬일 것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좀 없어 보이는 것만 빼면 너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자꾸 자존감을 빼앗으려고 들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두지 마.”

 

라파엘이 고갯짓으로 마리아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평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눈치가 빠른 모양이다.

 

“오늘은 정말 좋은 하루였어. 오늘 이후로는 콘셀로디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리엘 감시가 심해질 테니 대화를 나누게 되는 콘셀로디는 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는 나도 엄격하게 규칙을 지킬 생각이고.”

 

피이이이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라파엘의 왼쪽 뺨이 휘황찬란한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두 사람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서 불꽃이 팡팡 터지며 마녀 레티시아의 검은 드레스에 화려한 무늬를 선사했다. 아래를 보니 어린 화동 두 명과 함께 마리아나가 다리에서 건너 마차를 타고 있었다.

 

“끝났네. 이제 내려가야겠어.”

 

라파엘이 마리솔을 잡아 뒷좌석에 잘 앉는 것을 도운 후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축제는 아직 끝이 아닌데요.”

 

“콘셀로디는 이벤트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정이거든. 집에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그때가 내 임무의 끝이지. 그러니 아직은 방심할 수 없어. 나를 잘 잡아, 마리솔.”

 

라파엘이 봄버두 핸들을 잡자 뒤에서 마리솔의 양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등에 얼굴을 기대 따스한 온기가 퍼지더니 팔을 좀 더 조이는 힘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끝났다.’라는 자신의 말에 마리솔이 쓸쓸해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가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 아쉬워한다는 건, 좋은 거지. 라파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출발할게.”

 

라파엘 목소리는 등을 타고 마리솔에게 전달됐다. 마리솔은 눈을 꼭 감았다.

 

-

 

“빨리 좀 와. 하도 서 있었더니 다리 아프단 말이야.”

 

불만 가득한 마리솔에겐 관심 없는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 말린 풍성한 머리카락을 연신 매만지며 마리아나는 자꾸 주변을 흘깃거렸다.

 

“수업이 언제 끝났는데 이제야 나오는 거야.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까지 이러네.”

 

마리솔은 계속해서 언니의 시선을 바라며 투정을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나는 들어주는 척조차 없다가 마리솔 어깨에 팔을 휙 두르더니 귓속말로 뭐라고 속닥인다.

 

“보지 말고 듣기만 해. 우리 왼쪽으로 뒤에 있는 남자애 말이야. 키 작은 애 말고 옆에 금발 머리. 괜찮지? 내가 콘셀로디 한 거 현장에서 봤다면서 아까 나한테 말 걸었거든.”

 

땅 꺼지게 한숨이 나왔다. 수업 끝나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려주었건만, 이런 수고는 알아주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얘기만 늘어놓는 마리아나다. 워낙 이성에 관심이 많아 입만 열면 남자애들 이야기긴 했지만, 콘셀로디 이후 그 빈도가 무척이나 잦아졌다. 덕분에 피곤이 느는 건 마리솔이다.

 

“성 센탈란지 뭔지 덕분에 나한테 말 거는 남자애들이 는 건 좀 기분 좋은 일 같아.”

 

“그럼 대답해 주고 대화하면 되잖아.”

 

“원래 주가가 오를 때는 쉽게 행동하는 게 아니거든. 이게 다 전략이라고. 암튼 이럴 땐 네가 나한테 필요해.”

 

“내가 왜 필요한데?”

 

“원래 잘 나가는 여자애 옆에는 떨어지는 여자애가 같이 따라다니는 거란 말이야.”

 

“뭐라고?”

 

마리솔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마리아나가 재빠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마리솔이 뒤로 밀려났다. 말을 못 하게 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계속 밀어대는 탓에 속도를 잡지 못한 다리가 휘청거렸다.

 

잡을 곳이 없이 어쩔 줄 모르는데 어떤 손이 나타나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그제야 뒷걸음질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마리솔이 놀란 눈을 하자 마리아나는 그제야 입에서 손을 뗐다.

 

“너 조용히 안 할래? 애들이 듣잖아. 창피하게.”

 

‘어, 이상하다…….’

 

마리솔이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리자, 마리아나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손가락을 연신 튕겨댔다. 많이 해 본 듯 손목 스냅이 상당히 자연스럽다.

 

“너 지금 일부러 머저리같이 구는 거지? 나 안 도와주려고. 진짜 이럴 거야?”

 

“아니야. 방금 누가 나를 잡았단 말이야. 내 뒤에 누구 없었어?”

 

“얘가 정신이 나갔나, 왜 이래?”

 

마리아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짜증 난 말투로 마리솔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저, 마리아나?”

 

마리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마리아나가 말하던 키가 큰 금발 머리 남자애가 다가와 그녀를 부른 것이다. “어머. 루카스. 거기 있는 줄 몰랐어.” 마리아나는 바로 정색하며 남자애를 향해 뒤로 돌며 손으로 마리솔을 휙 밀었다.

손으로 밀친다는 건 ‘이제 됐으니 말 걸지도 방해하지도 말라’는 아주 익숙한 사인이다. 함께 집에 가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저녁이 되면 둘이 뭘 했는지 구구절절 떠벌이는 마리아나 이야기를 들어줘야겠지만.

 

이제 자유롭게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으로 바람이 휙 하고 휘었다. 옆에서 앞으로 돌던 바람이 이번에는 다시 뒤로 불었다.

 

‘뭐지?’

 

근처의 나무들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어디서고 바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인가. 생각하려는데 어깨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 끝이 살짝 들고 일어나다 어깨 뒤로 몇 가닥이 넘어갔다. 마리솔은 손으로 얼른 머리카락을 잡고 그 자리를 비켜났다.

 

“누, 누구세요?”

 

허공에 말을 한 게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했는지, 마리솔은 얼굴을 붉히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단 한 순간도 맘에 드는 때가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참다가 문득 달리기를 멈추었다.

 

옆으로 따라붙던 바람이 앞으로 향했다 다시 자신 쪽으로 휘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바람 따위. 그런 건 자신의 비굴한 일상에 비하면 오히려 신비한 사건에 속하는 것일 테니.

 

자매에게 바보 취급에 이용당하는 것이 싫고, 지금처럼 아무 잘못 없이 지레 겁먹고 도망하는 것이 싫고, 싫으면서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잘 참으면서 지내고는 있지만, 가끔은 단 한 명만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감싸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지만, 어느새 내려앉은 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시며 이슬 같은 눈물방울 하나가 동그랗게 매달렸다. 볼을 타고 또르르 흐르려는 찰나 온기를 가진 손가락이 마리솔의 눈물을 부드럽게 훔쳐 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리솔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번뜩 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바로 코앞에 가까이에 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손을 내리면서 그녀가 조용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호, 혹시. 바…바람의 정령님?”

 

마리솔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어디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멀찍이 공중정원이 보인다. 언제든 푸름을 잃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환상의 공간.

 

저 위에선 온갖 요정들이 싱그러움의 가루를 뿌려대고 있다지.

 

마리솔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며 무거웠던 마음을 상상으로 달랬다.

 

-

 

봄버두 앞유리를 정성껏 닦아내고 나니 투명한 표면에 자신이 반사되어 보였다. 이미 깨끗해진 유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대듯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표정이 그리 밝진 않았다.

 

“라파엘! 아리엘 선배가 기다리고 계시던데. ”

 

동료 한 명이 본부에서 막 나오더니 라파엘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아리엘과 처음 보는 소년이 보였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제복이 살짝 어긋난 느낌이다. 새로 들어왔나? 되게 아기 같네.

 

“왔어? 여기 교육생이야. 일주일간 데리고 다니면서 봄버두 작동법하고 마을 지리 같은 일반적인 것들 알려 줘. 후에 테스트 있을 거니까 똑바로 가르쳐야 해.”

 

아리엘은 간단한 말로 웬 남자애 한 명을 떠넘기고는 바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교육은 해 본 적 없던지라 난감한 속도 모르고 어린 소년은 해맑은 얼굴로 라파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3 층계참 소속 교육생 다니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목소리조차 앳되다. 과거 자신도 저러했을까, 라파엘은 생각했다.

 

“몇 살이야?”

 

“이번 주면 열다섯 됩니다.”

 

“그래. 그라다로 올라온 건 처음인가?”

 

“네, 그렇습니다.”

 

“별명 같은 거 있어? 부르기 쉬운 거. 본부에 이미 다니엘이 세 명이나 있거든.”

 

“아……, 저 없는데요. 내일까지 만들어 오면 안 되겠습니까?”

 

소년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하다. 앞으로 아리엘이 엄청나게 놀리겠구나 싶어 라파엘은 다니엘이 벌써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럼 설명해 볼까. 여기 모니터실은 주로 아리엘 선배와 그 이상 직급 요원들이 사용해. 우리 사무실은 나가면 있어. 문 열고 막 들어오면 보이는 곳이라 오는 도중에 봤을 거야.”

 

사무실 한가운데 각자의 이름이 적힌 부스가 서로 마주 보는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니엘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거 라파엘 선배님 달력입니까?”

 

“맞아. 나름 신경 써서 꾸미고 있어. 예술가적 소질이 없어서 그 정도가 최대야.”

 

“와, 이거 대단합니다. 저도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요?”

 

라파엘은 다니엘이 내미는 걸 한참 들여다봤다. 평범한 달력인데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다니엘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야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 그래. 내가 운이 좀 좋았거든.”

 

“저도 운이 좋아지고 싶습니다, 선배님.”

 

의욕 충만한 교육생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라파엘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 녀석, 귀엽네.

 

“그런 건 좀 타고나야지. 봄버두 설명해 줄 테니까 나가자.”

 

“네, 선배님.”

 

다니엘이 라파엘의 달력을 얌전히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임무가 시작된 첫날, 하늘색 크래프트 종이가 예쁜 압정으로 꽂혀있다. 종이에는 정갈하고 선명한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라다 3 층계참 소속 라파엘, 술 한 모금의 날’

 

“선배님! 선배님께서는 별명 같은 거 없습니까? 본부에 라파엘이란 이름도 여럿 있던데요.”

 

“특별한 별명은 없지만, 오늘 들은 말이 있는데 그걸로 별명 할까 싶긴 해.”

 

“오늘이요? 그게 뭡니까?”

 

“좀 낯 간지럽기는 한데, 아까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바람의 정령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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