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17년

2020.06.30 20:1406.30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별을 겪다 보니 사람에 인색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놓은 문장이다. 언제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렇게 바래고 구겨진 살이 있는 걸 보아 아마, 몇 달 만에, 아니 1년 만에 재회하는 듯싶다. 2017년도 다이어리다. 날짜도 이미 인쇄되어 있어 2020년용으로 고칠 수도 없다. 다만, 2017년 1월에 샀을 때 누군가와 약속했던 것처럼 나는 이 다이어리를 꽉 채울 것이다. 설사 그게 유언이더라도, 쓸데없는 소설이나 일기 따위라도,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아니면 지나가버린 연인들을 다시 인연으로나마 끌어들이는 짓을 해버리더라도.

그러나 그럴 배짱이 없다. 나는 과거로 뒷걸음질 하며 다가오는 미래의 나를 피해 숨바꼭질하기 바쁘다. 미래의 ‘나’는 꽤 똑똑해서, 아니면 그때에도 지금과 별 달라진 게 없는지, 내가 숨는 곳마다 나타나 목덜미를 붙잡고 희부연 안개로 서린 미래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너까지 필요 없다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며 미리 준비해둔 목줄과 칼과 연탄가스 등을 줄줄 읊어댔다.

고생했다, 너도. 이제 편히 쉬어라. 나 좀 그만 찾고. 거긴 천국일 거 아니야.

맛있는 거 많이 먹어라, 하면 문득 내 죽음을 뒷바라지 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제사는커녕 기억해줄 사람조차 찾기 힘들다. 분명 뉴스엔 올라갈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토록 원했던 네이버 실시간 검색순위 ‘1위’를 차지하지도 몰랐다. 몰락한 토크쇼의 제왕,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자살예방교육을 했던 비운의 토크쇼 제왕, 동시에 새 정부의 슬로건 마냥 학교폭력 가해자의 말로, 또는 학교폭력 마지막 세대, 이쯤으로 불리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거창하다. 감히 누가 그런 수식어를 달아준다고.......

달력을 뒤적인다. 내 생일이 머지않았다. 동시에 내 기일이 멀지 않았다.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라고 첫 데이트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매사 자기 꿈이 자기 생일에 죽는 거라고 했다. 물론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몰던 화물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다음 생일까지 300일 넘게 남은 때였다.

나는 마저 세제를 세숫대야에 붓는다. 한참 동안 팬티를 빤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빨래판에 박박 문지르고, 짓이기고, 팡팡 털었다가 다시 뭉쳐 짓뭉갠다. 팬티를 빠는 나는 팬티를 입고 있다. 내 것이 아니다, 애인의 것이다. 육십 중반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애인의 무언가를, 예를 들자면 지금 팬티를 빠는 것처럼 항상 뭔가를 깨끗이 하려 했다. 이를 닦거나 세수를 하거나 샤워하기 싫어하는 애인을 커다란 리트리버 마냥 세면대 앞에 세우고 샤워부스로 미는 건 항상 내 몫이었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이대로 사귀다가 누구라도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어떡하지.

남은 사람? 남은 사람은....... 재산 상속 받고 신나게 해외여행이나 다닐래.

그 나이에? 혼자?

안 그래도 늙어서 이리저리 기대는데. 여행에서까지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아.

여행 다닐 돈은 있고?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껴안는다, 끌어안는다, 꽉, 숨조차 쉬지 못하게, 아주 꽉.

그가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군내를 풍기며 내 뺨에 키스를 했다. 그리곤 주름에 처진 살가죽을, 힘없이 늘어진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며. 변하는 건 시간일 뿐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듯 굴었다. 언젠가 TV에서 봤던 할아버지 할머니 노부부처럼. 나는 끝까지 하고 싶은 거 하다 살 거야. 애인은 누구에게 다짐하듯, 또는 다짐을 받아내듯 속삭였다. 나는 팬티를 대야에서 건져 내 수건걸이에 넌다. 곧 마를 것이다. 내가 잘 때쯤 되면 킁킁대며 오묘하게 섞인 그의 내밀한 흔적을 좇으리라. 세제 냄새와 함께.

처음과 끝을 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나는 다시금 그 말을 떠올리며 미리 차려놓은 밥을 먹는다. 아들, 양아들 성찬이, 셰프로 음식점을 내 승승장구 중인 성찬이 해놓고 간 밥상이다. 어느 하나 무른 것 없이 맛없는 것 없이 맛과 정성이 젓가락에 묻어난다. 내일이다. 내일은 내 생일이었고, 생일이고, 생일일 것이다. 운이 좋다면 내일은 나의 기일로도 쓰일 것이다. 새삼 내일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게 아닐까, 의지하는 게 아닐까, 도움만 받고 떠나는 게 아닐까 자책한다. 그럴 때면 애인이 해준 말을 떠올린다. 시간은 쓰라고 있는 거야. 시간이 언제나 우리 편은 아니지만 동시에 그 어떤 누구의 편도 아니니까. 첫 번째 자살 시도 후 그가 내 손을 잡고 한 말이다.

이런. 나는 신음하며 앓는다. 먹으려던 세제는 빨래에 다 써버렸다. 작년처럼. 그 외 죽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누가 와서 매일 숨겨놓는 것일까. 내가 찾지 못하는 곳에, 있다면 성찬이일까. 하긴, 요리엔 생각보다 많은 위협적인 도구들이 쓰인다. 나는 다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찬장과 서랍을 이리저리 뒤진다. 날카롭거나 위험한 물건들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샀던 다른 도구들도 어디다 치워놓은 건지 가져간 건지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전화를 건다. 성찬이 받는다.

필요찮은 안부를 묻다 본론으로 넘어간다. 네가 치웠니.

네...... 위험하니까요.

그는 짧게 대답한다. 생전 애인을 더 따랐던 아이는 조금은 내게 유해졌다.

그보다 내일 생신이신데, 가게로 초대해드릴까 해서요. 시간 되세요?

시간이야 차고 넘치지. 네 말대로 그러마.

오늘은 뭐하셨어요?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도 틀은 것 같지가 않았네요.

그의 야트막한 웃음소리에 나는 멈칫, 주저한다.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기분이다.

그냥 책 읽고, 집안일 했다. 먹는 건 다행히 네가 챙겨주니까.......

그 애는 작은 레스토랑의 셰프였던 애인을 따랐다. 요리하는 게 좋다는 이유였다. 애인도 그런 아이가 귀여웠는지, 재능을 발견한 건지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밀어주었다. 나는 할 말이 없다. 그 애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으므로. 다만 그 애가 아빠만 두 명인 게이들 밑에서 자란다고, 쪽팔린다고, 화를 낼 때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안아주는 것밖에 하지 않았으므로. 그럴 동안 애인은 그 애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준비했다. 포옹은 잠시뿐이고 음식은 오랫동안 혀에 녹아들어 말을 할 때마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날의 애인의 요리의 맛을 떠올리게 하므로.

그래, 내일 생일이지.

나는 했던 말을 중얼거린다. 근데 어쩌면 제사를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고 덧붙이려다 만다. 내가 죽으면 그 애는 제사를 치를 것이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내와 이혼한지 2년이 조금 넘었을까, 그 애. 꼭 제사가 아니더라도 나를, 잘 따르던 애인처럼 기억해줄 것이다. 죽고 나선 내 모질고 감춰진 질투가 드러날까. 퍼뜩 정신을 차린다. 화장실로 향한다, 팬티는 아직 물에 젖어 축축하다. 꼭 애인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느낌이다. 항상 차갑고, 피부가 얇아 심장이 비치던 단단한 가슴, 위에 올린 내 손을 기억한다.

자살예방교육 강사가, 그것도 왕년의 토크쇼 제왕이 죽었습니다.

기사 헤드라인을 상상해본다. 아니 이제 그런 수식어는 붙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21세기이고, 내가 했던 추한 행동은 맨 앞을 장식할 것이다. 죽음보다도 앞선 중요한 과거가. 50줄이 다 되어서 지난날의 학교폭력과 군대에서의 가혹행위-그들이 그렇게 불렀다-가 드러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독일의 경찰이 과거의 죽는 그 순간까지 찾아내는 나치 추종자라도 된 것과 다름없었다. 수차례 사과를 하고, 사과문을 쓰고,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고 광고회사에 위약금을 물고. 한 순간에 빅뱅이 터진 양 모든 우주가 내게서 빠져나가버린 기분이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해달라는 내 말을 듣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인들에게 증언을 부탁해도 그뿐이었다. 그들은 지나온 시간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나를 버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연을 잃어버렸다. 나는 사람에 인색한 인간으로 변해갔다.

애인이 입던 바지 주머니에서 영수증 하나를 발견한다. 인근 마트에서 산 각종 세제와 주방 도구들이 죽 아래로 나열되어 있다. 그게 곧 내 유서였다. 구매한 모든 것들로 죽음을 완성하고자 한 때문에.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더러운 곳이 눈에 띄고, 또 내가 결벽증으로 한때 앓았던 만큼 지저분한 상태와 정리되지 않은 집안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온 세제와 주방도구들로 청소를 했다. 물때를 제거하고 제자리를 잃어버린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주고 이따금 중얼거리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성찬이 바꾼 도어락 비밀번호를 외웠다.

미안하다. 미안해. 죽어서 갚으마.

나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 잠시 괴롭혔던, 끝내 죽어버린 한 아이를 떠올린다. 군대에서 중령으로 근무했을 때 얼차려는 물론이고 정강이를 까거나 주먹을 휘둘렀던 행위를 깊이 참회한다. 시계를 쳐다본다. 내일까지 얼마가 남았나, 게슴츠레 뜬 두 눈으로 TV 예능프로그램을 응시한다. 내일까지 얼마나 남았으려나.

언변이 좋아서, 나름 잘생겨서, 무엇보다 친화력 좋고 사교성이 좋아 우연히 얻은 자그마한 라디오 쇼에서 지상파 메인 MC가 되기까지의 세월이 머릿속으로 흘러든다. 움츠러든 기억의 세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떠올린다. 참 많이 못됐던 시간들이었다. 다시 시계를 본다. 5분이 지나 있다. 나는 몇 분만에 죽을까. 5분은 너무 빠른 것 같고 10분을 넘어서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다. 그러니

7분 정도로 합의를 보자, 고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린다.

이제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빨아놓은 팬티를 가져와 코에 가져간다. 세제 향에 어지러울 때까지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면을 만지고, 한편으로 애인의 모습을 생각한다. 남은 건 그게 끝이다. 나머지, 그의 흔적들은 모두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언젠가 전문청소업체가 집안으로 들이닥쳐 애인의 것들을 버리거나 빼앗아가거나 이건 괜찮겠다며 남겨두고 갔던 사실을, 현실을 온 힘을 다해 걸음 하나까지 머릿속으로 복원해낸다. 개새끼들. 시발놈들.

감히 누구 것을. 나는 칼로 자해하며, 죽는다고 위협하며 그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건 노인의 객기에 지나지 않았다. 금방 성찬과 직원에 의해 제압당한 채 1층 현관 앞의 승용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유품이 어떻게 정리되고 버려지는지, 그 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청소업체의 마지막 배려였다. 나는 그대로 따라갔고, 거대한 공장 같은 곳에 발을 들이밀었다. 소각장이었다. 기계가 물건들을 분류하고 소각로에서 불길이 너울거린다. 사중 강화유리창을 통해 내다본 애인의 마지막을 가만히 바라보, 아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이목구비를 하나씩 감상해나가듯 분류되어 불길에 휩싸이는 그의 물건들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렇구나. 너는 그렇구나.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시계는 11시 55분을 조금 넘어선 채 멈춘다. 예능프로그램이 끝났다. 초침이, 분침이, 시침이 시치미를 떼듯 가만히. 마치 나와 기 싸움이라도 벌이겠다는 양. 이건 틀림없이 애인의 망령이 조작질을 해대는 거다. 나쁜 놈, 남의 약속 건드리지 말라고 속으로 뇌까린다. 그러나 유구무언이라는 듯 시계는 여전히 그대로다. 11시 55분, 나는 벌떡 일어나 시계를 벽에서 떼어내려다 없다. 시계가 없다. 시계가 분명히 있어야 할 자리엔 애인과 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 액자가 위태롭게 걸려있을 뿐이다.

사진을 향해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다. 부르다 소리친다. 소리치다 화를 낸다. 화를 내다 숨이 가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시 시계가 보인다. 나는 오랜 옛날 버렸던 액자로 다시금 변할까 두려워 둥근 시계의 모서리 아닌 모서리를 움켜쥔다. 한 숨에 1분이, 두 숨에 2분이 지난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다 나는 다시 58분에 멈춰 선 분침을 본다. 바늘 끝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선 안 된다는 듯 버틴다. 정말이지, 연인에서 인연으로나마 남고 싶은 내 마음을 모르는 걸까.

나는 숨을 죽인다. 모든 것들을 죽인다.

나와 네가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지우고 없애고 죽인다. 던지고 싶지만, 칼끝으로 유리라도 깨뜨리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뜨겁게 굳어가며 소각장의 불길 사이를 지나는 것 같다. 재채기가 튀어나온다. 59분, 이번엔 서로에게 키스하는 그와 내가 눈에 들어온다. 갑작스레 온 몸의 피가 두 눈으로 몰리며, 동공을 적시다 뺨을 횡단한다. 간지럽다. 턱 끝에 방울로 맺힌 눈물 때문에 간지럽다. 얼른 닦고 긁어내고 싶다, 싶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나는 애인이 울지 못한 울음을, 눈물을 대신 흘리며 눈을 감지 않으려 애쓴다.

이젠 그에게 쓸 시간에도 인색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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