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조명을 모두 잠재운 거실은 TV가 뿌리는 빛이 울긋불긋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TV 옆과 소파 옆에 세워진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들은 빛의 광란을 응원하며 좌우로 날뛰었다. 홀로 소파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영례는 맥주와 팝콘을 번갈아 공략하면서도 눈은 TV에서 떼지 않았다. 영례가 집중하고 있는 화면엔 인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힘과 속도를 자랑하며 싸우는 괴물들이 난무했다.

저것들을 뭐라고 했지요?”

저기 빨간 로봇은 아이언맨일 거요. 안에 사람이 들었지요. 풀물이 잔뜩 든 저 뚱뚱한 놈은 허얼크, 아까 네모난 망치 휘두르던 놈은…….”

아니, 아니. 저 놈들을 다 합쳐서 뭐라고 했잖아요.”

어벤져스요. 이 영화 제목이 어벤져스잖소?”

오호라, 어벤져스!”

조왕신은 눈을 반짝이며 어벤져스를 되뇌었다. 바람난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사는 영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영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가신(家神)인 성주신과 조왕신이 늘 그녀와 함께였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이지만 집에 오면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가 두 가신에게 있다는 것을 영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두 가신은 영례의 양 옆을 지키고 앉아 함께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영화가 한참 절정에 달했을 때 조왕신이 갑자기 이 영화의 제목이자 등장인물들의 조직을 물었다. 성주신은 조왕신이 도대체 여태까지 무얼 보고 있었을까 의아해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 영화 제목이 바로 저 괴물들 조직이오.”

우리도 저거 만듭시다.”

성주신은 이 난데없는 소리에 미간에 내천()자 주름을 만들고 조왕신을 쳐다봤다.

무얼 말이시오?”

성주신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투로 물었지만 조왕신은 이 세상의 밝은 미래라도 확인한 듯한 희망찬 얼굴로 대답했다.

어벤져스를 만듭시다. 지금껏 보니 저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특출한 힘을 가진 놈들만 모은 것 같잖우? 우리도 특출한 가신들을 모집해서 영례를 지키자는 말입니다.”

이 무슨…….”

성주신도 영례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집안을 수호하는 가신으로서 성주신과 조왕신은 마땅히 영례를 잡으러 오는 저승사자로부터 영례를 지켜야했다. 지난 번 저승사자들이 영례를 데리러 왔을 때 두 가신은 힘과 머릿수에 밀려 하마터면 영례를 그대로 빼앗길 뻔했었다. 그 때, 둘은 지난번과 같은 행운이 없다면 다음번엔 영례의 저승행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승사자들이 영례의 죽음을 유예한 행운이 점점 소진되고 있었다. 영례가 웹소설 플랫폼에 연재중인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완결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영례는 그녀의 소설을 사랑하는 저승사자 구독자가 수만에 이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결말을 궁금해 하는 저승의 구독자들 덕분에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례의 이승 삶을 지탱해주는 행운인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회를 거듭할수록 저승사자들이 영례를 데리러 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두 가신은 근심이 날로 깊어져갔다.

그러던 중에 조왕신이 영화를 보다 어벤져스를 만들어 영례를 지킬 생각을 한 것이었다. 성주신도 그런 생각까지 하는 조왕신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동의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슨 수로 가신들을 모을 것이며, 그렇게 모은 가신들이 과연 자신들처럼 죽기 살기로 영례를 지킬 것인지도 의문이었기에 조왕신에게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왜요? 영례를 지킬 어벤져스를 만들자는 데 문제 있어요?”

성주신이 냉큼 그럽시다.’를 외치지 않자 조왕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따지듯 물었다.

아니, 나도 영례를 지킬 방법을 어서 강구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어요. 나도 조왕신만큼이나 영례를 아낀단 말이오. 헌데, 어디서 가신들을 모은단 말이오? 우리가 있는데 다른 성주신이나 조왕신이 오려고 하겠소? 설사 온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어디 우리만큼 영례를 지키는 데 힘을 쓰겠소?”

성주신의 비관적인 말에 짜증이 확 솟아났지만 조왕신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올라오는 혈압을 내리 눌렀다.

가신이 어디 성주신하고 조왕신뿐이랍니까? 제 집도 못 지키고 떠도는 성주나 조왕 같은 거 저도 싫습니다.”

그러면 다른 가신을 불러 모으잔 말이오? 이 좁은 집에 그들이 들어와 지킬 뭐가 있어야 말이지요. 기껏해야 화장실을 지키는 측간신이나 올까, 다른 신들은 지키려야 지킬 자리도 없어요.”

성주신께서는 늘 거실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앉아서 영례가 지나다니는 것만 지켜보고 계시지요? 저는 영례가 나갈 때마다 따라 나서서 세상 잡귀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성주신은 집은 안 지키고 발 탄 강아지마냥 싸돌아다니는 조왕신이 못마땅한 적이 많았다. 영례가 웬만해선 밖에 나가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가끔 사 올 게 생겨 나갈 때마다 조왕신이 영례를 따라 나가곤 했다. 가신이라는 게 제가 지키는 집에서나 신의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지 밖에 나가면 떠돌이 잡귀나 다름없이 무능했기에 조왕신의 바깥나들이가 영 거슬렸다. 성주신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조왕신에게 불편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조왕신은 성주신의 기분 따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밖에 떠돌아다니는 잡귀 중에 가신 출신이 반입니다.”

그 말에 성주신의 눈이 커졌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도시로 몰려 왔지요? 그 사람들을 따라 가신들도 도시로 왔습니다.”

영례를 지키는 성주신과 조왕신도 영례의 어머니를 따라 논과 밭이 있는 동네에서 콘크리트 숲으로 옮겨왔다.

그 중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는 양옥에 살았지만 없는 사람들은 남의 집 뒷방에서 셋방살이를 했잖아요. 그러면 한 집에 여러 집 가신들이 모이는데 그게 될 말이에요? 당연히 주인집 가신만 남고 나머진 쫓겨났지요. 주인집 가신도 동네가 개발 되면서 양옥집이 헐리고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좁은 집구석에 지킬 것이 없어서 또 여러 가신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나왔단 말입니다. 대문이 없으니 문신이 나가고, 곳간이 없으니 업신이 나가고, 집터에 대한 경계가 무너졌으니 터주신이 갈 데가 없어지고, 애를 안 낳으니 삼신도 발붙일 곳이 줄었지요.”

조왕신의 설명을 들으니 성주신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집을 나간 가신들이 길거리에서 잡귀 취급을 받으며 얼마나 서럽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니 자신이 성주신인 게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왕신의 말을 곱씹다가 의문이 생긴 성주신이 입을 열었다.

그 가신들도 지킬 것이 없고, 갈 데가 없어서 길거리에 나앉은 것인데, 이 집에 들어온다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여기도 대문 없고, 곳간 없고, 마당 없고, 애 낳을 일 없긴 마찬가진데요.”

영례를 지켜야지요.”

조왕신이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조왕신의 머릿속은 온통 흉악한 저승사자들로부터 영례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성주신은 먼 길을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조왕신의 절박함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엉덩이 붙일 자리도 없는 집에 아무 가신이나 데리고 들어와서 영례를 지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절박함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는다. 가신이 집안사람들을 수호하려면 내가 이 집에서 쓸모가 있다는 자부심과 소속감이 필요했다. 성주신은 떠돌이 가신을 모아 어벤져스를 만든다는 조왕신의 꿈이 야무지기만 할 뿐 가능성은 메뚜기 눈알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설명문을 만드느라 머릿속이 고단해지고 있었다. 조왕신이 불을 다루는 신이라서 그런지 마른 장작더미를 집어 삼키는 화마처럼 추진력도 대단하고, 티끌만한 말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초기에 진화하지 않으면 성주신은 어벤져스를 만드는 일에 끌려 다니다 정작 저승사자들이 왔을 땐 대항할 힘이 다 소진되고 없을지도 몰랐다. 성주신이 막 입을 떼려는데 조왕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동안 마실 다닌 줄 아세요? 현대를 이끌어가는 힘은 정보력이에요. 영례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 쓰는 시간보다 인터넷 뒤지며 정보를 수집하는 시간이 더 많다는 건 아세요? 나도 영례 따라 나가서 노숙 가신들 많이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정보를 수집했다고요.”

정보요?”

성주신이 물었다. 조왕신은 가신 중에 으뜸이라며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서 헛기침이나 해대는 성주신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우월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신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뭐겠어요?”

조왕신은 설명에 앞서 질문부터 했다.

집과 집안사람들을 지키는 거지요.”

성주신이 당연한 대답을 했다.

그렇지요. 옛날에는 가신이 집을 지키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의 집을 지키면 되고, 그 집에 지킬 자손이 없어도 다른 집 자손이 여럿이니까 그 중에 한 집 골라 가면 되었지요. 이 나라가 개발이 한창일 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을 나오게 된 가신들은 예전처럼 새로운 집을 쉽게 찾을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집을 구하려고 보니 세상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준비 없이 나왔다가 수십 년을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배운 게 있어요.”

조왕신은 잠시 말을 끊었다. 성주신은 어서 말해보라고 보채는 표정으로 조왕신을 바라봤다. 그 표정을 만끽하며 조왕신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준비성! 바로 변화하는 세상에 맞춘 스펙(spec)을 갖추는 거지요.”

, 스팍?”

성주신은 며칠 전에 영례와 함께 본 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우주여행을 하는 그 영화에서 스팍은 귀가 뾰족하고 꽤 이성적이지만 따뜻한 마음도 있는 남자였다.

스팍이 아니라 스펙이오. 일단 내가 나가서 가신들에게 소문을 내 놓을 거예요. 이 집에서 가신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으면 옆 동네에서 노숙하던 가신들까지 모일 게지요. 면접을 봐서 그 중에 쓸 만하고 스펙 짱짱한 자들을 뽑으면 될 거예요. 물론 힘은 기본으로 장착한 자들이어야지요.”

 


며칠 후, 오랜만에 장을 보러 나간 영례를 따라 조왕신이 밖으로 나갔다. 조왕신의 모집 공고를 들은 길거리 가신들이 면접 일에 맞춰 모여들었다. 이 동네를 비롯해 옆 동네뿐 아니라 이 도시의 모든 떠돌이 가신들이 다 모였는지 집안엔 수천의 가신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좁은 집에 그 많은 가신들이 겹겹으로 겹쳐 있으니 집안은 그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이 열기의 출처를 알 길 없는 영례는 봄인데 벌써 한여름 날씨라며 에어컨을 돌렸다. 면접을 온 가신들은 집안을 구경 다니고 영례를 살펴보느라 가만히 서 있질 않았다. 조왕신은 집안을 정리하기 위해 창고로 쓰는 작은 방에 가신들을 몽땅 밀어 넣었다.

순번은 댁들끼리 알아서 정하시오. 내가 밖에서 부르면 차례로 한 명씩 나오시오.”

조왕신은 집안을 어지럽힌 가신들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실제로 방문을 열고 닫은 게 아니라 가신들이 함부로 나오지 못하도록 작은 방에 결계를 친 것이었다. 조왕신이 소파에 앉아있는 성주신 옆에 자리하자 성주신이 물었다.

이 작은 집의 가신이 되겠다고 저리도 많은 지원자가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저렇게 많은 가신들을 어느 세월에 다 면접을 본단 말입니까?”

성주신이 보기에 작은 방에 들어앉은 가신들을 하나하나 다 보다간 영례가 꼬부랑 할머니가 될 것 같았다.

딱 봐서 아니다 싶은 자들은 초장에 걸러야지요.”

조왕신은 뭔가 생각해 놓은 면접 방법이 있는 듯했다. 성주신은 일단 조왕신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로 했다. 첫 번째 면접자가 방에서 나와 성주신과 조왕신 앞에 섰다.

먼저 어떤 스펙이 있는지 읊어 보시오.”

조왕신이 면접자에게 말했다.

, 수팩이라고 하셨소이까?”

면접자는 스펙이라는 말을 아예 모르는 듯했다.

탈락!”

조왕신이 힘껏 소리쳤다. 그러자 면접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조왕신이 이 집을 수호하는 가신의 권능으로 외부 신인 면접자를 단숨에 내쫓아 버린 것이었다.

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탈락이라니요?”

사라진 면접자를 대신해 성주신이 항의했다.

저 자는 스펙이 뭔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요즘시대에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서 어찌 이 집안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조왕신은 단호한 반면 성주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앞서 사라진 면접자를 측은히 여겼다. 실은, 성주신도 스펙이라는 말을 며칠 전 조왕신에게 처음 들어 알게 된 것이었다.

이번엔 두 가신 앞에 구렁이가 스멀스멀 기어와 똬리를 틀었다.

업신이로군!”

성주신이 말했다. 구렁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엷은 미소로 인사했다. 면접관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리지 않으면서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그대의 스펙을 말해 보시오.”

조왕신이 아까처럼 물었다.

저는 5개 국어를 할 줄 압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입도 커질 뻔했으나 입까지 벌리기엔 면접관으로서의 체면이 상할 것 같아 입 주변 근육에 힘을 주었다.

재산을 지키기도 바쁘셨을 텐데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소?”

성주신이 부드럽게 물었다. 이정도 재주면 이 집안에 들여도 괜찮겠다 싶었다.

내가 있던 집의 외동아들이 명문대를 나와서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공부를 참 많이 했습니다. 저도 어깨너머로 책을 보다보니 5개 국어를 익히고 각종 시사문제에 대해 눈이 뜨이더군요. 그런데 이 아들 녀석이 10년을 아나운서 시험에서 떨어지더니 우울증에 걸려서는 그만 자결을 하였습니다.”

어이쿠!”

성주신이 안타까운 탄식을 작게 흘렸다.

그 집의 자랑이었던 외동아들이 그렇게 가고 나니 그 부모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아들을 따라 갔습니다.”

이런 딱한 일이……. 그대도 탈락이오.”

조왕신은 위로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구렁이의 모습을 한 업신은 앞선 면접자처럼 사라졌다. 성주신은 갑작스런 탈락 통보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조왕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정은 딱하지만 제 집 식솔을 지키지 못한 가신은 이 집안에 들일 수 없는 일이지요.”

다음엔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파리한 얼굴을 한 여자가 힘없이 걸어와 섰다.

탈락!”

조왕신은 말 한번 걸어보지도 않고 그 여자를 내보냈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성주신이 놀라 물었다.

딱 보면 저것이 측간 신인 걸 모르시겠습니까?”

알지, 왜 모르겠습니까? 이 집에서 측간신이 나간 후로 내가 화장실까지 돌보느라 얼마나 힘든 줄 아시는 게요?”

성주신이 언성을 높였다. 조왕신도 성주신만큼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성주신께서 화장실을 돌봐서 이집 화장실이 깨끗한 거지요. 측간신이 어디 측간을 돌보기나 한답니까? 그저 심술이나 부리고 사람 겁이나 줄 줄 알지요. 영례가 어렸을 때 친구들한테 빨간 휴지, 파란 휴지얘기랑 밤에 머리 감으면 귀신이 뒤에서 머리카락 수를 센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혼자 화장실에 못 들어갔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측간신은 있어봤자 영례 심기만 어지럽히고, 저승사자들이 와도 신경도 안 쓸 것입니다. 미련 버리세요.”

조왕신의 말끝이 작두처럼 닫혔다. 성주신이 반박했다간 혓바닥이 사정없이 잘려나갈 것 같았다. 이참에 측간신을 뽑을 생각에 은근히 들떴던 마음을 뒤로 미뤘다. 아직 대기 중인 측간신은 많을 것이다. 측간신이 면접을 보러 나오면 조왕신보다 먼저 말을 걸고 합격을 시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다음 면접자가 자리에 섰다. 조왕신은 면접자를 힐긋 보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럴 게 아니라…….”

조왕신은 성주신이 왜 그러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가신들을 모아 놓은 방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혹시 이 중에 측간신 계시오?”

조왕신이 방안에다 소리치자 가냘픈 팔들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모두 탈락이오.”

그 많은 팔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조왕신은 만족스런 얼굴로 문을 닫고 성주신 옆에 앉았다. 성주신은 측간신이 쫓겨나자 아쉽다 못해 참담한 속내를 감추고 애써 앞만 쳐다보았다. 차마 조왕신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조왕신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첩년을 들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것만 같았다. 조왕신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얼른 다음 면접자에게 말을 걸었다.

무얼 할 줄 아시오? 아니, 그대의 스펙은 어떠하오?”

나는 힘이 셉니다.”

솔깃한 얘기였다. 저승사자와 멱살잡이를 해도 밀리지 않을 힘이 절실했던 터였다.

힘이 어느 정도로 세시오?”

한번은 내 집 장독대에 어느 못된 작자가 짱돌을 던졌습니다. 다섯 개나 던졌는데 내가 그걸 다 막아 장독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습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가신이 날아오는 돌을 막아냈다면 영력(靈力)이 대단할 것이다. 영력으로 싸워야 하는 저승사자와 맞붙기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이제 겨우 네 번째 면접자인데 이런 재목을 만나다니 나머지는 볼 필요도 없이 면접시험을 조기에 마감할 수 있겠다고 성주신이 김칫국을 마시고 있을 즈음 조왕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 힘이 있으신데, 이 집에 들어오시면 무얼 지키실 것이오?”

나는 장독에 골마지가 끼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마당 구석에 물때나 이끼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마당에 병마나 잡귀가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꾸지요.”

터주신은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참 대단하신 건 잘 알겠는데, 이 집에는 마당이 없소이다. 장독대도 없지요. 그러니 이 집에서 무얼 지키실 계획인지 말해 보시오.”

당황한 터주신은 마당을 찾으려는지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 마당이 없으면 없다고 진즉에 말을 했어야지요. 괜히 기다리느라 시간만 버렸잖소?”

터주신은 할 말이 없자 성을 냈다.

그대는 이 집이 아파트라는 걸 모르고 들어오셨는가? 처음에 들어와서 다른 가신들처럼 집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집안에는 어떤 사람이 사는지 살펴보지도 않으셨는가? 그런 자가 어찌 이 집안을 지키고 식솔을 지키겠는가? 일은 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는 자는 필요 없네. 썩 나가시게.”

성주신의 노호와 함께 터주신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터주신이 나간 후에도 성주신은 분이 안 풀리는지 고얀 놈같은 오랜 된 냄새 풍기는 욕을 하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잘 하셨습니다. 어디서 돼먹지 못한 놈이 감히……. 저런 놈은 천 년 만 년 떠돌아 다녀도 쌉니다.”

조왕신은 씩씩대는 성주신을 달랬다.

이후로도 면접을 보는 이마다 탈락했다. 탈락자가 천 명쯤 되었을 때 성주신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면접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렇게 많은 가신들을 만났는데도 쓸만한 자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영 가망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는 것만 갔습니다. 이러다 저승사자들이 오면 어디 멱살 쥘 힘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이제 면접자가 반쯤 남은 것 같습니다. 면접을 시작한 지 일주일 지났으니 앞으로 일주일만 더 힘을 내 보세요. 설마 저 중에 건질 자가 한 명도 없겠습니까? 저승 놈들은 셋인데 우리는 둘 뿐이니 한 명만 건져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됩니다. 영례를 생각하며 기운 내세요. 다음!”

조왕신이 성주신을 다독인 후 다음 면접자를 불렀다. 방문이 열리고 고양이만한 두꺼비가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곳간을 지키는 업신이었다.

그대의 스펙을 읊어 보시오.”

나는 컴퓨터를 좀 할 줄 압니다.”

컴퓨터는 우리 영례도 잘 하는데……. 업신이면 컴퓨터가 아니라 재산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오?”

성주신이 뚱한 반응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업신이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자신감이 슬쩍 내비치는 업신의 입꼬리만큼 성주신과 조왕신은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살짝 올라갔다.

집에 곳간이 없어지고 재산도 모두 은행으로 들어가 버리니 내 자리가 없어지더이다. 자연스레 떠돌이 잡신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은행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간 은행을 돌아다니면서 은행에 있는 돈들을 빼내어 세상천지에 확 뿌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은행에는 돈이 생각보다 없습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행에 돈이 없으면 그 돈은 다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돈은 컴퓨터 안에 있어요.”

컴퓨터 안에 돈이 있다고? 영례가 전에 컴퓨터 뚜껑을 열었는데, 그 속엔 요상한 기계랑 먼지만 있었는데……. 그러면 영례가 빈털터리란 말이오?”

조왕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비록 집안에 재산을 지키는 업신은 없으나 성주신과 조왕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데도 가산을 탕진했으니 가신으로서의 자격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성주신은 눈앞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돈을 컴퓨터 안에 넣어놓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잘 들어 보세요. 인터넷은 아십니까?”

성주신과 조왕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이제 돈을 들고 은행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은 하지 않아요. 물건도 돈으로 사는 일이 거의 없어요.”

카드를 쓰지요. 요즘에 누가 촌스럽게 돈을 들고 다닙니까?”

영례를 따라 마트에 다녀 본 조왕신이 아는 체를 했다.

그렇지요. 카드를 쓰면 물건을 산 사람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 카드사로 가고, 카드사에선 수수료를 뗀 나머지 물건 값을 상점주인 통장에 넣어줍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에요. 이 통장에서 저 통장으로, 계좌라고 하지요. 이 계좌에서, 저 계좌로 돈만큼 숫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거예요. 요즘엔 월급도 돈으로 주지 않아요. 직원들 계좌에 숫자로 주지. 전국이, 아니 전 세계가 돈을 숫자로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잡한 숫자 계산을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다 해요. 아주 정확하게……. 돈이 결국 숫자고 그 숫자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확하게 계산해 주는 게 컴퓨터란 말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업신은 유치원생에게 설명하듯 뼈대만 간추려 설명했다. 영례가 마트에서 카드를 쓰는 모습은 봤지만 정작 돈의 흐름은 본 적이 없는 조왕신도 업신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했으니, 집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본 적 없는 성주신은 업신의 이야기가 외국어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주신의 체면상 못 알아듣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할 줄 알면 이 집안의 재산을 불릴 수도 있는 것이오?”

성주신은 현명한 질문을 선택했다. 아프리카 말 같은 전자금융거래에 관한 말은 쏙 빼고 업신의 본연의 임무에 대해 물었다.

재산을 획기적으로 불리지는 못합니다. ! 물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해킹을 해야 하는 거니까 그건 안 되고, 재산이 새는 건 막을 수 있습니다.”

재산을 획기적으로 불리려면 해킹이란 걸 해야 하오? 그러면 해야지 왜 안 되오? 재주가 없으시오?”

성주신은 업신이 말만 번드르르 했지 실상은 재주도 없는 허세꾼이라고 생각했다.

해킹은 불법입니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로 몰래 남의 계좌에서 돈을 훔쳐서 내 계좌로 옮기는 것이니 도둑질이지요. 가신으로서 어찌 내가 지키는 식솔을 전과자로 만들겠습니까?”

성주신은 아차!’ 했다. 모르면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해킹이 뭔지도 모르면서 업신에게 핀잔을 주려다 체면만 구겼다. 성주신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조왕신이 물었다.

그러면 재산이 새는 건 어떻게 막을 수 있소?”

내가 해킹을 할 수는 없으나 남이 해킹해서 돈을 빼가는 건 막을 수 있지요. 보안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스파이웨어 따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악성코드가 깔릴 일도, 개인 정보가 유출 될 일도 없습니다. 좀비PC? 그건 남의 나라 얘깁니다. 해마다 세금 신고할 땐 내가 손을 써서 세금이 최대한 덜 나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환급을 받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 집은 1인가구인 것 같으니 환급 받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인터넷쇼핑을 할 땐 같은 제품 중에서도 가격이 제일 싼 물건을 앞에 보이게 하면 돈을 아낄 수가 있습니다. 컴퓨터가 알고 보면 멍청한 놈이라서 낮은가격순으로 보면 엉뚱한 것들이 앞에 보이거든요. 하지만 나는 내 식솔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아니까 꼭 필요한 것들을 앞에 보이게 해 줍니다. 또 각종 도박 사이트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도박 사이트 광고까지 차단해서 내 식솔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모니터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수 있습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이 평생 입에 담을 일 없는 해킹’, ‘보안’, ‘스파이웨어’, ‘악성코드’, ‘개인 정보 유출’, ‘좀비PC’ 같은 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면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업신이 바로 이 시대에 딱 맞는 스펙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무릇 사람이란 평생 배워도 모자란 법입니다. 그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신도 마찬가지지요. 가신은 사람과 아주 밀접한 관계니까요. 그래서 저는 컴퓨터가 켜져 있는 내내 웹서핑을 하며 새로운 것들을 익힙니다.”

상승해 가는 업신에 대한 호감도가 웹서핑이라는 초면의 단어로 정점을 찍었다. 새로운 것들을 계속 익힌다는 말이 호감에 신뢰를 얹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업신을 가리키며

합격!”

을 합창했다. 세 가신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부터 그대는 영례의 컴퓨터에 자리하시면 되겠소이다.”

앞으로 이 집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길로 업신은 영례의 컴퓨터로 들어갔다.

보세요. 이 시대에 맞는 스펙 짱짱한 자가 분명 있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사라져 없어진 곳간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아 일거리를 만드는 저 자세, 바로 현대 사회의 가정에 꼭 필요한 가신이 아니겠습니까?”

조왕신은 자신이 저런 재목을 찾아내는 데 큰일을 했다는 것에 뿌듯해 했고, 성주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저 자가 힘은 쓸까요?”

성주신의 물음에 조왕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말들에 취해 감탄하느라 필수장착요건을 잊고 있었다. 불러와서 힘은 좀 쓰느냐고 물어야 하나 고민했다. 힘은 별로라고 하면 어떡하지? 다시 내쫓기엔 업신이 가진 재주가 너무 탐났다. 두 가신은 힘이 약해도 둘 보다는 셋이 낫지 않겠냐며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아직 면접을 볼 가신들이 일주일 치나 남아있었다. 이 중에 재주 있고 힘도 센 자가 분명 있을 것이라, 아니 있기를 바랐다.

업신을 뽑은 이후 사흘 동안 이렇다 할 스펙을 가진 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가신은 너무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탓에 영력을 다 소진해, 후 하고 입김만 살짝 불어도 날아가 없어질 지경인 경우도 있었고, 어떤 가신은 노숙생활 중에 생긴 부정의 문장들이 머릿속에 단단히 채워져, 이 집은 1인 가구이므로 곧 사라져 없어질 것이고 자연스레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가신들도 다시 거리로 나앉을 거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수많은 떠돌이 가신들을 만나, 보고 들은 바를 논리정연하게 열거하며 떠벌리는 그 말에 하마터면 성주신과 조왕신도 홀랑 넘어갈 뻔했다. 성주신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 가신을 내쫓은 덕에 조왕신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성주신 아니었으면 저 놈에게 정신이 팔려 다 포기할 뻔했습니다. 어차피 결말은 떠돌이가 될 염세주의자가 뭐 하러 면접을 보러 와서 정신을 어지럽히는지, !”

조왕신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 둘 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가만 보니 저승 놈들만 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례를 생각해서 긴장합시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심기일전해서 남은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 앞에 선 가신은 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았는지 땅딸막하고 뚱뚱하게 생겼다. 한눈에 딱 봐도 터주신이라는 게 보였다.

터주신이 아파트에서 뭐 지킬 게 있겠소?”

성주신이 물었다. 면접 첫날, 마당도 없는 주제에 불렀다고 성을 잔뜩 내고 쫓겨난 터주신 때문에 그 다음부턴 터주신이 나타날 때마다 스펙을 묻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지킬 것이지를 물었다.

아파트는 뭐 공중에 떠 있답니까?”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면접을 보는 마당에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은 아닌 것 같고 원래 말투가 그 모양인 것 같았다.

아파트도 땅바닥에 붙어 있는 집이니 내가 지킬 땅뙈기 하나 없겠습니까?”

이 집이 서 있는 땅은 이 아파트가 20층짜리니 스무 집이 함께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땅은 놀이터, 주차장, 공원 같은 공용 장소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아파트에 오셨소?”

나는 그리 오지랖 넓은 가신이 아니외다. 내 식솔이 차지한 곳만 지킬 겁니다. 가령, 이 집 주인도 차는 있을 거 아닙니까?”

이 터주신은 주차장을 지키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이 아파트는 지정주차가 아니오. 차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빈자리 찾아서 대야 하니 그 때마다 자리가 바뀌지요.”

조왕신이 설명했다.

나는 입구에서 가깝고 주차하기 편한 자리를 지정주차 자리로 만들 수 있소.”

성주신과 조왕신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영례의 차는 전 남편으로부터 위자료로 받은 대형세단이었다. 차가 커서 주차할 때마다 애를 먹고 있었다. 영례는 좀 더 작은 차로 바꿀까 고민 중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 기둥 간격이 넓은 주차하기 편한 자리를 찾다보면 입구 근처는 항상 만원이었다. 기둥 간격이 조금 좁은 자리는 겨우 주차를 하고 나면 문을 열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없이 입구에서 멀고 넓은 자리에 주차를 하고 마트에서 사온 무거운 상자를 들고 힘들게 입구까지 걸어와야 했다. 영례를 따라 장을 보고 올 때가 많은 조왕신은 입구에서 가깝고 넓은 주차 자리가 항상 아쉬웠다. 집 밖에 나가 본 적은 없지만 조왕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성주신도 안타깝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두 가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 앞에 서 있는 터주신이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대단히 구미가 당기는 재주였다. 그래도 두 가신은 성급하게 합격을 외치지 않고, 허언은 아닌지 구체적인 계획을 물었다.

내가 찜한 자리에 다른 차가 들어오면 운전자의 눈을 흐려 주차선이 똑바로 안 보이게 할 것이오.”

말이 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기가 센 사람은 그 방법이 안 먹힐 수도 있었다.

그게 안 통하는 사람은 차를 조작해서 주차를 못 하게 할 수도 있지요.”

어엉?”

조왕신이 저도 모르게 놀라는 소리를 냈다.

운전대를 돌렸는데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게 한다거나, 아무것도 없는데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센서를 조작해서 경고음을 울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된단 말이오?”

성주신과 조왕신 모두 터주신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수십 년간 마당이 점점 없어지는 모습을 보고 고민 많이 했습니다. 과연 나는 이대로 떠돌다 소멸할 것인가? 그러기엔 세상에 대한 아쉬움과 이 땅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아서 소멸될 날만 기다릴 수가 없겠더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관찰해 보니 사람들이 건물 밖에서 영역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부분이 주차장이더란 말입니다.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아무 데나 주차했다가 벌금 물고, 주차 자리 때문에 칼부림까지 나는 걸 보고 이거다 했지요. 그리고 십 몇 년을 열심히 수련해서 차를 조작하는 재주까지 익혔습니다. 나를 이 집 가신으로 받아주신다면 그동안 갈고닦은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주차 하난 편하게 할 수 있게 해 드리리다. 원한다면 옆자리까지 확보해서 문콕 당하는 일도 방지하겠소.”

진정성이 철철 넘치는 터주신의 말에 성주신과 조왕신은 합격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마음 단단히 먹은 조왕신이 물었다.

힘은 좀 쓰시오?”

차도 조작하는데 힘이 없겠소?”

…….”

합격을 외치려는 성주신의 입을 조왕신이 황급히 막았다.

지하주차장에 있다가도 우리가 급하게 부르면 한달음에 집안으로 올라오실 수 있으시오?”

조왕신이 저승사자가 왔을 때를 대비해 터주신이 힘을 보탤 수 있는지 확인했다.

두 분이 급하게 부를 일이면 집안에 큰일이 생겼다는 것일 텐데 당연히 날아와야지요.”

합격이오!”

조왕신이 소리쳤다. 성주신은 컴퓨터 안에 있던 업신을 불러내 네 명의 가신이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업신은 다시 컴퓨터로 터주신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역시 남은 자들 중에 스펙 좋고 힘도 쓰는 자가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우리는 넷이 되었습니다. 저승 놈들 보다 수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래도 여기서 그치면 안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남은 자들 중에도 업신과 터주신처럼 많은 준비를 해서 스스로 제 자리를 찾는 자가 있길 바랍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기분이 좋게 다음 면접자를 맞았다. 남은 면접자들 중에 터주신들도 모두 내보내고 나니 하루 정도면 면접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가신은 문을 지키는 문신과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이 다였다. 면접을 보기위해 모였던 첫 날, 집안을 구경하던 삼신들 중 대다수가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걸 알고 스스로 나갔다. 남은 삼신들은 혹시나 하는 미련에 남은 자들이었다. 성주신과 조왕신도 삼신들에게는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문신들 중에 쓸만한 자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몇 시간 동안 삼신 두 명과 수십 명의 문신이 거쳐 갔지만 이렇다 할 재주를 가진 자가 없었다.

삼신은 포기하더라도 문신은 현관으로 들어오는 잡귀나 막을 정도면 그냥 붙여 줍시다. 그래도 넷 보다는 다섯이 낫지 않겠습니까?”

면접자가 열 명 남짓 남자 성주신이 피곤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잡귀나 액운을 막는 건 문신의 기본 재주이니 남은 자들 모두 그 정도는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다른 재주 하나 정도는 더 갖고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끝까지 보고 영 없으면 마지막 문신을 붙이도록 합시다.”

조왕신은 마지막 희망의 끊을 놓지 않았다. 말로만 가신 중의 으뜸이었지 평상시에도 조왕신을 이기지 못했던 성주신은 이번에도 조왕신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누렇게 뜬 얼굴로 다음 면접자를 맞았다. 면접자는 역시나 문신이었다.
나는 문간대신이오. 내가 문을 지키면 잡귀와 액운은 이 집에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복만 골라서 들어오게 할 수 있소.”

이 문신은 묻지도 않았는데 두 가신 앞에 서자마자 호탕하게 떠들었다. 일단 그 호기로움은 인정해 줄만 했다.

다른 재주는 더 없소? 지금 말하신 그 재주는 문신이라면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오?”

성주신이 더 듣기도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다. 남은 면접자들을 대충 내보내고 마지막 문신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겨우 기본 재주만 가지고 내가 이렇게 큰소리치겠소이까? 나는 잡귀뿐만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오려는 사람도 막을 수 있소이다.”

사람?”

뚱하게 반응하던 성주신과 조왕신이 관심 있는 눈빛을 보였다.

요즘 혼자 사는 여자들이 얼마나 범죄에 취약한지 아시지요?”

우리도 그게 늘 걱정이라 만약을 대비해 이런 저런 궁리는 하고 있었소.”

성주신이 말했다.

나쁜 놈들이 집안으로 들어온 다음에서야 두 분께서 뭐라도 해보실 수 있겠지요. 뭘 해본다 한들 두 분 다 영력만 있지 물리력은 거의 없으실 테니 사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대는 집안에 침입한 나쁜 놈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말이시오?”

조왕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물론 나도 그럴 힘은 없소이다. 하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게 만들 수가 있지요. 문에 아주 심란한 기운을 새겨서 들어올 마음이 뚝 떨어지게 하거든요.”

이건 그동안 성주신과 조왕신이 불안해하던 걱정을 단칼에 끊어버릴 최고의 재주였다. 이 정도면 합격 감이었다. 그러나 조왕신은 쉽게 합격을 외치지 않고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그 외에 가진 재주가 더 있소?”

문에 심란한 기운을 새기는 기술을 응용해 택배도 지킬 수 있소. 문앞에 있는 택배가 도난당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내가 문을 지키는 이상 문 앞의 택배도 무사할 것이오.”

이것도 두 가신의 마음에 쏙 드는 재주였다. 단 둘이서 집안을 지키는 것도 녹록치 않은데 택배가 오면 문 밖까지 신경 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문신은 합격시킬 수밖에 없는 재목이었다. 업신과 터주신을 불러 문신과 인사를 시켰다. 인사를 나눈 후 문신은 현관문에 스며들었다. 남은 몇 명의 면접자들 중에 문신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니 삼신 한 명이 남았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삼신은 볼 것도 없는 데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말을 걸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인 걸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으셨소.”

조왕신은 스펙 같은 건 묻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애 낳을 일이 없겠소이까?”

삼신이 꼬장꼬장하게 말했다.

에이! 큰일 날 소리요. 혼자 살기도 힘든데 애 까지 낳아서 어찌 살아가라는 것이오? 우리 영례 인생을 힘들게 만드실 작정이면 내쫓기 전에 알아서 가시오. 기다리느라 수고하셨소.”

성주신이 정색을 하고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삼신은 꼼짝도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아이를 점지하기도 하지만 출산도 잘 하게 도와준다오.”

그러니까 우리 영례는 출산할 일이 없다니까 그러시네.”

조왕신이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내가 출산을 어떻게 도와주느냐면…….”

아기 궁둥짝을 멍이 들도록 때려서 얼른 나가라고 하는 것 아니시오.”

조왕신은 삼신의 말허리를 잡아챘다.

내가 궁둥짝을 때린다고 지가 달려 나가는 줄 아십니까? 아기 혼자 힘으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엄마의 자궁이 수축을 해서 아기를 도와 줘야지요. 엄마의 자궁은 어떻게 수축하느냐? 엄마의 뇌하수체에서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자궁을 수축시킨단 말입니다.”

호르몬이라는 말은 성주신과 조왕신도 귀에 익은 말이었다. 그러나 뇌하수체와 옥시토신은 낯선 말이었다. 며칠 전에 업신이 처음 듣는 말을 마구 쏟아냈던 일이 기억났다. 그 날 업신이 한 말들은 이제는 두 가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기억도 안 났지만 아무튼 업신은 참 쓸만한 재목이었다. 그날의 업신처럼 삼신은 낯선 말을 꺼내고 있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이 삼신에게 뭔지 모를 흥미가 생겼다.

그러니 아기가 잘 나오게 하려면 내가 손으로는 아기 궁둥짝을 때리면서 엄마의 뇌하수체에서 옥시토신이 나오게끔 명령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 옥시토신이란 놈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 젖이 잘 나오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면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지 않겠습니까?”

성주신과 조왕신은 영례의 엄마가 아기 영례에게 젖을 물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삼신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 옥시토신은 사랑하는 마음이 들게 한단 말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어디 아기뿐이겠습니까? 이성을 보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도 옥시토신이지요.”

삼신의 말을 듣고 보니 옥시토신이란 놈이 참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삼신이 난데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두 가신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두 분은 이 집 주인이 언제까지나 혼자 살다가 쓸쓸히 늙어 죽길 바라십니까?”

영 감을 못 잡고 있는 표정의 성주신과 조왕신에게 삼신이 물었다.

물론 아니지요. 지금은 비록 이혼해서 혼자 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전 남편 놈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

성주신이 말하다 말고 눈과 입을 접시만 하게 벌렸다.

그러면 그대는 영례가 좋은 남자를 보면 그 옥시토신이란 놈을 불러내어 사랑의 감정이 들게 만들겠단 말이시오?”

그렇지요.”

삼신은 성주신에게 미소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끄덕였다.

나도 우리 영례가 좋은 배필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긴 하지만 혹여 전 남편 같은 후레자식이라도 만나게 될까봐 걱정이 되오. 그런 놈을 만나느니 차라리 혼자 늙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오.”

조왕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수십 년 간 떠돌면서 사람들을 많이 관찰했습니다. 행동에서 우러나는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연습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걸 토대로 이런 사람에게는 어떤 짝이 어울릴지도 연구 많이 했지요.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서 곧 헤어질 사이인지 백년해로할 사이인지 알아맞히는 실험도 해 보았는데, 90프로 이상 맞혔습니다.”

삼신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턱을 살짝 들었다. 조왕신의 표정에서 근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합격이오.”

조왕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성주신이 성급하게 외쳤다.

그대는 이 집의 가신으로서 영례에게 훌륭한 배필을 점지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 주시길 바라오.”

성주신은 삼신에게 이 집 가신의 지위를 주었다. 조왕신도 딱히 삼신을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승사자들을 상대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있는 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면접을 다 끝내고 성주신과 조왕신은 새로 영입한 네 명의 가신들을 모아 첫 번째 가신회의를 열었다. 먼저 가신의 수장인 성주신이 환영의 말을 했다. 다음으로 조왕신이 성심을 다해 이 집 주인인 영례를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저승사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저승사자가 저 여인을 노리고 있단 말입니까?”

모두가 놀란 가운데 터주신이 물었다.

저 여인이 아니라 영례요. , , . 이제부턴 여러분도 이 집의 가신이니 영례라 부르시오. 옆에 계신 성주신과 나는 영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 대로 쭈욱 올라가 수십 대에 거쳐 이 집안 여인들을 따라다니며 가솔들을 보호해 왔소. 그런데 영례 대에 와서 이혼을 하고 집안이 문을 닫게 생겼단 말이오.”

삼신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삼신이 가족을 사랑으로 묶어줘야 하는데, 삼신이 없으니 가정불화가 생기고 이혼도 했던 게지요.”

삼신이 꾸짖듯 말했다. 조왕신도 속으로는 영례보다 먼저 결혼한 여동생을 따라 분가한 삼신을 이 집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게 후회되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삼신의 말에 동의만 했다.

, . 삼신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이제 삼신 덕에 이 집에도 사랑이 꽃피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여하튼, 우리 가신들이 할 일은 흉악한 저승사자 놈들로부터 영례를 지키고 이 집을 지키는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저승사자로부터 영례를 지키지 못할 경우 여러분은 다시 떠돌이 가신이 될 터인데, 그 설움과 핍박을 어찌 다시 겪으시겠습니까?”

가신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제 겨우 보금자리를 찾았는데, 도로 노숙 잡신 취급을 받으며 길거리를 헤매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겨우 얻은 가신의 자리를 죽을힘을 다해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영례를 지키려는 의욕이 넘쳐났다. 회의석은 어느새 저승사자 성토의 자리가 되었다. 흥분한 가신들을 진정시키고 성주신이 말했다.

여러분의 의지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저승 놈들이 꼭 집안에서만 영례를 데려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객사사자 같은 놈을 데려와 길에서 사고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영례가 외출할 땐 손이 비는 분이 영례를 따라 나서도록 합니다. 일단 조왕신은 늘 영례와 함께 한다오.”

나는 자리를 비우면 다른 사람이 주차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어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터주신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어차피 영례에게 좋은 배필을 찾아 줘야 하니 따라 가겠습니다.”

삼신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내가 컴퓨터를 조작하는 건 영례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때뿐이니 나도 따라 나갈 수 있습니다.”

업신이 말했다.

그러면 나와 문신과 터주신이 집을 지키고, 영례를 옆에서 지키는 건 조왕신, 업신, 삼신이 하도록 하십시다. 누구라도 영례를 노리는 저승 놈을 발견하면 얼른 모두를 부르시고, 부름을 받으면 한달음에 영례 곁으로 모이도록 합시다. 그리고 가신은 집 밖에선 힘을 못 쓰니 밖에서도 힘을 써 영례를 지킬 수 있도록 각자 수련을 하도록 합시다.”

성주신이 회의를 마무리했다. 가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영례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영례의 집에 새로운 가신이 생긴 지 석 달 남짓 지났다. 영례의 작품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는 어느덧 마지막회를 업로드하기에 이르렀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작품의 결말을 알게 된 저승사자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 선언하고 가신들에게 경계령을 내렸다.

저승사자들이 좋아한다던 그 작품이 끝났단 말입니까?”

업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컴퓨터 안에 사는 신께서 그걸 모르셨소? 정말 컴퓨터를 할 줄 알기는 하시오?”

성주신이 의심의 눈초리로 핀잔했다.

이상하다 그럼 내가 뭘 본 거지?”

업신은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컴퓨터로 들어갔다. 성주신은 조왕신에게 업신이 거짓으로 재주를 부풀려 이 집안에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백 년을 살았지만 거짓말 하는 가신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두고 봅시다. 저승 놈들이 나타났을 때 업신이 어떻게 힘을 보태는지 보고 판단합시다.”

업신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마지막편이 업로드된 지 사흘이 지나자 천황사자, 지황사자, 인황사자는 이번에도 영례가 일하는 방의 벽을 통과해 들어왔다.

저 놈들은 멀쩡한 문 놔두고 또 벽으로 들어왔습니다. 음흉한 놈들 같으니라고.”

조왕신이 성주신에게 속삭였다. 성주신은 조용히 터주신을 소환해서 저승사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벽 뒤에 숨어 있도록 했다. 문신과 삼신도 저승사자들을 예의주시하며 몸을 숨겼다. 업신은 컴퓨터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은 열린 방문을 통해 문 앞에 있는 성주신과 조왕신에게 인사를 했다. 이미 2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터라 구면이었다. 2년 전엔 영례를 지키는 두 가신과 험악하게 대거리를 했지만 이번엔 두 가신이 저승사자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저승사자들은 영례에게 약속된 수명을 2년이나 연장했기 때문에 가신들이 이번엔 순순히 영례를 내어주는 것이라 여겼다. 삼사자는 가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고개를 끄덕여 저승사자들의 인사를 받을 뿐 저승사자들에게 욕지기를 내뱉지도 멱살을 잡지도 않았다.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두 가신의 얼굴에 왠지 모를 여유로움까지 살짝 비쳤지만 삼사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컴퓨터에 열심히 글을 채우고 있는 영례에게만 신경 썼다.

작가님을 모심에 있어 모두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네.”

천황사자가 두 후배 사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영례에게 약속된 시간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그 몇 분 동안 인황사자는 별 뜻 없이 영례가 쓰고 있는 글을 보았다. 모니터에 채워지는 글을 읽던 인황사자는 오른 손을 들어 모니터를 가리켰다.

, , , !”

인황사자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딸꾹질처럼 만 반복했다.

작가님 앞에서 이 무슨 망동인가?”

지황사자가 인황사자를 꾸짖었다.

큰일 났습니다, 선배님들! 이 글 한번 읽어 보십시오.”

뭔데 그러나? 유서라도 된단 말인가?”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모니터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두 사자 모두 인황사자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뭔지 아시겠지요?”

인황사자가 외쳤다.

시즌투(2)로세.”

천황사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에 대고 말했다. 영례가 쓰고 있는 글은 저승사자와의 로맨스에서 서브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격상시킨 두 번째 시즌이었다. 삼사자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번뇌했다. 반면, 성주신과 조왕신은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역시 우리 영례입니다. 저 기특한 것이 저 살 길은 스스로 알아서 찾았습니다, 그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시즌투가 나온 마당에 어찌 감히 영례를 데리고 가겠습니까? 다른 사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내가 본 게 시즌투였구만. 어쩐지 결말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다 했지.’

컴퓨터 안에 들어앉은 업신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러면 아까 짜 둔 작전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눈치 빠른 삼신이 상황 파악을 하고 조용히 물었다. 저승사자가 오면 숨어 있다가 성주신의 신호로 한꺼번에 덤벼서 저승사자들의 손발을 꼼짝 못하게 붙잡은 뒤, 영례의 사주와 이름이 적힌 적배지를 빼앗아 조왕신이 불태우고, 저승사자들의 허리춤에 있는 오랏줄로 그들을 꽁꽁 묶기로 작전을 짜 놓은 참이었다.

일단은 대기들 하고 계시오. 여차하면 작전을 펼칠 것이오. 헌데, 저 사자들을 보니 오늘 우리가 힘쓸 일은 없을 듯하오.”

조왕신이 깔깔 웃으며 청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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