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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웅녀가 살아있다

2020.06.25 00:5306.25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는 말은 인사로써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건네는 인사라면 이상한 말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꽤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 그렇다. 처음 들르는 바(Bar)에서 호가든 한 병을 주문한 내게 엉뚱하게도 백세주를 내오는 바텐더가 바로 그런 여자다.

“저……. 주문을 잘못 받으신 것 같은데요?”

“알아요.”

“그런데 어째서 백세주를…….”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저번에는 당신이 한턱냈잖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생산돼 맛이 바뀌었다고 자칭 맥주 애호가들이 외면하는 오가든 보다 오리지널 백세주가 더 낫지 않나요? 병행 수입한 오리지널 호가든이라면 모를까.”

“네? 제가 한턱냈다니요? 그리고 저는 그쪽과 만나 술을 마신 기억이 없는데요?”

“같이 마셨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고……. 상관없어요. 제 이름은 웅녀에요. 앞으로는 웅녀라고 불러주세요.”

“웅녀요? 당신이 웅녀면 저는 단군이겠네요.”

“단군은 제 아들인데……. 아무렴 어때요? 그러면 저는 앞으로 당신을 단군이라 부를게요. 오랜만이에요 단군 씨. 저도 한 잔 따라주시겠어요?”

자칭 웅녀라는 여자는 잔 두 개를 가져왔다.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아름다운 여자 바텐더와 잔을 나누는 일을 마다할 사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같이 마시고 싶다는데 말이다.

“저와 대작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영업은 어쩌고요?”

“영업이요? 안 하면 되죠.”

웅녀는 현관 바깥 손잡이에 ‘CLOSE’라고 적힌 푯말을 매달았다.

“앞으로 단군 씨가 찾아오시면 저렇게 문을 닫을 거예요.”

“네? 여기 사장님이 아시면 어쩌려고요?”

“제가 사장인데 영업을 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요?”

“웅녀 씨가 사장이라고요? 알바가 아니고요?”

“왜요? 이상한가요?”

웅녀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의 조명이 어둡기 때문인지 몰라도 얼굴만으로는 웅녀의 나이가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20대 중반으로도 보였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근사한 바의 사장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집안이 재벌인가요?”

“아닌데요.”

“로또라도 맞았나요?”

“그것도 아닌데요.”

“그렇다면 무슨 돈으로 이렇게 근사한 바를 차리신 건가요?”

“무슨 돈이라니요? 당연히 제가 벌어서 차렸죠.”

“정말요? 정말 웅녀 씨가 직접 번 돈으로 이런 바를 차리신 거라고요? 세상에! 능력 좋으시네요. 나는 인생을 헛살았네.”

“제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시간은 돈이라고 하잖아요.”

웅녀는 지갑에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바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시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드릴게요.”

“1000원짜리 지폐를 앞에 놓고 주문을 외우면 만 원짜리로 변하기라도 한답니까?”

“안 될 이유도 없죠.”

웅녀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받지 못해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대출로 겨우 해결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미등록 제적이라는 불상사는 면했지만,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웅녀의 말에 내 귀가 솔깃했다. 웅녀는 지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E는 MC의 제곱 아닌가요?”

“아니에요. 아인슈타인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복리라는 말을 남겼어요.”

“복리요? 원자폭탄이 아니고요?”

“복리가 무엇인지 아시죠?”

“제가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없을까 봐 무시하나요? 원금에 이자를 더한 금액에 이자가 붙는 방식이죠. 그런데 설마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그런 황당한 말을 남겼겠어요?”

“못 믿으셔도 할 수 없지만 아인슈타인은 정말로 그런 말을 남겼어요. 왜 그런지 제가 직접 증명해 드릴게요. 아니, 단군 씨가 직접 증명해보세요. 그게 더 실감 날 테니.”

“네? 제가 어떻게요?”

웅녀는 종이와 볼펜을 가져와 내게 건네며 말했다.

“간단해요. 월 5%의 복리로 1000원짜리 한 장을 맡기면 한 달 후에 얼마가 될까요? 직접 계산해보세요.”

“굳이 볼펜으로 적어가며 계산할 필요까지 있나요? 1050원입니다.”

“1년 후에는 얼마가 될까요?”

“글쎄요.”

“1796원. 10년 후에는 얼마가 될까요?”

“글쎄요. 한 10만 원쯤 되나요?”

“34만8911원. 20년 후에는 얼마가 될까요?”

“100만 원쯤 되려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종이에 볼펜으로 숫자를 적어 보여주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네? 이게 얼마죠? 일, 십, 백, 천, 만…….”

“1억2173만1593원. 계산이 복잡해 비과세로 계산했어요.”

“설마요? 1000원짜리 지폐가 20년 만에 이렇게 불어난다고요?”

“믿기지 않으면 직접 계산해보세요. 계산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 30년 후에는 얼마가 될까요?”

“20년이 이 정도라면 30년은 어마어마하겠군요.”

“맞아요. 30년 후에는 약 42억 원, 50년 후에는 약 5000조 원이 된답니다. 이로써 시간이 돈이라는 제 말이 맞는다는 게 증명됐죠?”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왜 웅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혹시 다단계 아니죠? 미리 말해두는데, 저는 빚밖에 없으니 데려가도 손해입니다.”

“다단계가 사기꾼 같나요? 다단계의 하부 조직원도 시간과 그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 충분하다면 부자가 될 수 있어요. 물론 그 시간과 인내심이 충분하지 못해 다단계조직이 무너지는 게 더 빨라서 문제지만. 천재라던 아인슈타인도 주식투자에선 실패했거든요.”

“그렇다면 웅녀 씨는 시간과 인내심이 충분하다는 이야기인가요?”

“충분하냐고요? 넘쳐서 주체할 수 없어요.”

“넘쳐서 주체할 수 없다고요? 누가 들으면 영생이라도 웅녀 씨가 하는 줄 알겠어요.”

“맞아요. 세상에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손에 꼽을걸요?”

“아니 그러면 웅녀 씨가 정말 단군신화 속의 웅녀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웅녀가 내게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펴 보이며 웃었다.

“넵! 제가 바로 그 단군신화 속에 등장하는 웅녀랍니다.”

 

나는 다음 날 저녁에도 바를 찾았다. 황당했지만 웅녀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솔로로 지낸 지 꽤 오래된 나로서는 오랜만에 새로운 여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꽤 즐거웠다. 바를 찾은 손님이 모두 나가자 웅녀는 폐점을 알리는 푯말을 현관 바깥 손잡이에 매달았다. 그녀는 내게 맥주 한 병과 잔을 건네며 말했다.

“다시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오가든 대신 백세주를 내오던 분이 오늘은 웬 오가든인가요?”

“이건 호가든이에요. 병행 수입한 오리지널 호가든.”

“정말요?”

웅녀의 말대로 병에는 오가든을 만드는 국내 주류회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호가든 전용 잔에 맥주를 3분의 2정도 채운 뒤 병에 남아있는 맥주를 흔들어 거품을 내 맥주 위를 덮었다. 호가든의 맛은 오가든과 다르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오가든의 맛이 호가든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웅녀는 내게 맛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글쎄요……. 어제 웅녀 씨가 한 말이 기억나서 오늘 낮에 인터넷으로 호가든과 오가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검색해봤어요. 맛이 다르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더군요. 그런데 직접 맛을 보니 잘 모르겠습니다. 제 싸구려 혓바닥이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선입견 때문에 심리적으로 그런 차이를 느끼는 것인지…….”

“브라보!”

웅녀는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더니 손뼉를 쳤다.

“갑자기 왜 박수를?”

“단군 씨는 솔직하세요. 술을 많이 다루는 제 입맛에도 호가든과 오가든의 맛의 차이는 크지 않아요. 어쩔 땐 오가든이 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오가든이 맛없다고 평가절하하는 태도는 선입견 때문에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죠. 단군 씨는 제가 어제 말씀드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나요?”

“네? 설마 웅녀 씨가 정말 단군신화 속의 웅녀라는 이야기 말인가요?”

“단군 씨는 제가 웅녀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시겠어요?”

“당연히 못 믿죠.”

“왜죠?”

“생물학적으로 사람은 그렇게 장수할 수 없으니까요. 웅녀 씨는 자신이 반만년을 살아온 진짜 웅녀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나요?”

“증거요? 제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자체가 증거이지 이보다 더 큰 증거가 필요한가요?”

“그런 말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공자입니다. 춘추시대에 살았던 사상가 공자 말입니다. 웅녀 씨는 제 말을 믿을 수 있어요?”

“아니요. 단군 씨는 공자가 아니니까요. 공자는 제가 직접 본 일이 몇 번 있어서 잘 알아요.”

“아니 어떻게 웅녀 씨가 공자를 알아요? 아무튼! 저도 웅녀 씨도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제가 웅녀 씨가 단군신화 속의 웅녀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는 거예요.”

웅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웅녀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해 살짝 발끈했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말없이 맥주잔만 홀짝거렸다. 웅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비밀을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

“비밀이요? 웅녀 씨가 단군신화 속의 웅녀라는 비밀보다 더 큰 비밀이 있나요?”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더 큰 비밀이 아닐까요?”

“불로장생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꿈 아닙니까? 그래서 진시황도 불로초를 찾기 위하여 곳곳에 신하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으로도 남아있다고 하고요.”

“맞아요.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남동녀 500명을 서복에게 딸려 동쪽으로 보냈죠. 서복은 그때 제주도에 와서 불로초를 찾는 데 성공했어요.”

“네? 서복이 불로초를 찾았다고요? 그것도 제주도에서요?”

“그럼요. 제게서 불로초를 가져간 사람이 바로 서복이니까요.”

웅녀의 이야기는 점입가경이었다. 웅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약 5000년 전 오늘날 두만강 상류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열일곱 살에 다른 부족의 마을로 시집을 간 웅녀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의 여름에 기이한 일을 겪는다.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웅녀는 갑자기 하늘 위에 등장한 거대한 둥근 물체를 보고 두려워 도망을 치다 강렬한 빛에 둘러싸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웅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풍경은 누워있는 자신을 둘러싼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피부색이 달랐는데, 입고 있는 옷의 색은 모두 흰색이었다. 웅녀는 처음 보는 형태의 옷이었다. 그들은 웅녀를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만, 웅녀는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자가 웅녀에게 구슬 하나를 건넸다. 그녀는 웅녀에게 그 구슬을 삼키라는 듯 손짓으로 시늉을 했다. 웅녀는 겁이나 망설였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손짓에 못 이겨 구슬을 삼켰다. 잠시 후 웅녀의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웅녀는 정신을 잃으며 후회했다.

정신을 잃은 웅녀는 개울가를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됐다. 모든 게 꿈만 같았지만, 웅녀의 손에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에게 먹인 구슬과 같은 모양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 구슬을 잘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품속에 깊이 갈무리했다. 그 이후 웅녀에게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사이에 낳은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농사도 풍년이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웅녀에게 평안한 나날들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호환으로 죽고 말았다. 아이들도 별다른 이유 없이 하나둘씩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뿐만 아니라 서른이 넘고 마흔이 가까워져 가는데도 웅녀의 얼굴에선 조금도 나이가 드는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녀가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집요한 핍박을 받고 마을에서 쫓겨난 웅녀는 자신이 늙지 않는 이유가 오래전에 이상한 사람들이 먹인 구슬 때문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됐다. 웅녀는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주로 여기고,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수많은 곳을 떠돌았다. 그러나 영험하다는 제사장들은 그녀가 늙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고, 사내들은 홀로 이리저리 떠도는 그녀를 호시탐탐 노렸다.

절망한 웅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다. 그러나 웅녀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나무에 목을 매면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물에 빠져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죽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도 결코 죽을 만큼 치명상은 입지 않았고 회복 속도도 빨랐다. 깊은 강이나 바다에 뛰어들어도 허우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물 밖으로 나와 있었고, 맹수들도 웅녀를 알아서 피했다. 굶어 죽으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정신만 맑아질 뿐이었다. 악에 받친 웅녀는 죽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오기로 한 번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황야에서 지내다 보니, 먹어도 되는 식물과 먹으면 안 되는 식물을 거의 구별할 수 있게 됐다. 구별법은 간단했다. 먹어도 탈이 없으면 먹어도 되는 식물이고, 탈이 나면 먹으면 안 되는 식물이었다. 어차피 독초를 먹어도 토하거나 어지럼증으로 잠시 고생할 뿐 죽지는 않았으니까. 더불어 웅녀는 어지간한 짐승들의 습성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짐승을 잡는 일이 수월해져 식단도 풍성해졌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자 웅녀는 그 어떤 건장한 사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한 여자가 돼 있었다.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잠든 웅녀는 수많은 별과 다르게 움직이는 다섯 별을 알게 됐고, 그 별들의 움직임이 달처럼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웅녀는 구름의 모양과 벌레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날씨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자신감을 얻은 웅녀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풍흉과 천재지변을 예언했다. 처음에는 웅녀를 배척했던 사람들도 웅녀의 예언이 대부분 맞아떨어지자 그녀를 저주받은 여자가 아닌 신의 대리인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자 웅녀는 더욱 과감해졌다. 웅녀는 곰을 한 마리 잡아 가죽을 벗겼다. 곰의 모든 습성을 파악하고 있던 웅녀에게 곰 한 마리쯤 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웅녀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에게 풍흉과 천재지변을 예언하며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허무맹랑하지만 나름 앞뒤가 맞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정말 대단하신데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을 호령하는 웅녀 씨라니.”

“이제 제 이야기를 믿으시겠어요?”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네요. 그렇다면 웅녀 씨에게 구슬을 먹인 이상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아세요?”

“저는 그때 본 사람들이 막연하게 신이라고 생각해왔어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말이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람들은 미래에서 온 인류이거나 외계인이 아닌가 싶어요. 저를 납치했던 둥근 물체는 요즘 말로 UFO가 아닌가 싶고.”

“그들이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웅녀 씨를 선택해 영원히 살게 만든 걸까요?”

“글쎄요. 저를 통해 무언가를 연구하기 위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죠. 하지만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요. 아니 확신이 들어요.”

나는 웅녀가 어디까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끝까지 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웅녀 씨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웅녀 씨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현자이겠네요?”

“에이! 그렇지는 않아요. 단군 씨가 저보다 훨씬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저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어요. 50년 전에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 일을 흑백텔레비전으로 봤을 때도 저는 사기라고 생각했어요. 우습죠? 정작 저는 말도 안 되게 오랫동안 이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인데. 저는 그저 과거 기억의 파편과 언제까지 제게 주어질지 모르는 시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젊음을 유지하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꿈이 아닌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죠. 현대의학이 꿈꾸는 최종목표가 바로 불로장생이니까요.”

웅녀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면서 산다는 게 불행한 일인가요?”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굳이 표현하자면 99퍼센트의 절망과 1퍼센트의 희망으로 사는 거예요.”

“1퍼센트의 희망이라…….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단군 씨도 지난날을 생각해보세요. 좋은 일과 나쁜 일 중 어떤 일이 더 많았나요?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래요. 사람들 대부분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희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요.”

“그렇다면 웅녀 씨에게 그 희망은 무엇인가요?”

“아무리 긴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희망?”

웅녀가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50년 만이네요.”

 

다음 날 저녁, 나는 또다시 바를 찾았다. 웅녀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했지만, 누가 들어도 거짓인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현관에‘CLOSE’ 푯말이 걸려있었다.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서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오늘도 오실 줄 알았어요, 단군 씨.”

“계셨군요! 그런데 오늘은 왜 문을 닫으신 거죠?”

“단군 씨와 나누는 대화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아마 단군 씨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다른 손님들이 들으면 백이면 백이 미쳤다고 할걸요? 들어오세요.”

맞는 말이다. 이런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는 남녀를 누가 제정신으로 보겠는가. 웅녀는 호가든과 잔을 카운터로 가져와 내게 건넸다. 나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웅녀 씨에게서 불로초를 가져갔다는 서복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이제 제가 웅녀라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솔직히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매우 흥미롭긴 했어요. 제가 웅녀 씨와 헤어진 후 인터넷으로 서복에 대해 알아봤어요. 정말 서복이 제주도를 다녀갔다는 전설이 있더라고요. 서귀포라는 지명도 서복과 관련된 지명이었고요.”

웅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가요, 제가 흥미로운 건가요?”

“대비도 하지 않았는데 훅 들어오시니 이것 참. 웅녀 씨를 보러온 것도 맞고, 웅녀 씨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도 맞아요. 얼른 질문부터 하나 할게요. 불로초를 가져간 서복은 아직도 살아있나요?

“물론이죠. 불로초를 먹었으니 살아있어야죠. 아마 지금 일본에 있을 거예요.”

“웅녀 씨가 말하는 불로초는 외계인들이 건네준 구슬이죠?”

“그렇죠. 하지만 서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전에 다른 이야기를 더 풀어야 해요.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첫 남자에 대해.”

웅녀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나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게 저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웅녀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제가 웅녀 씨처럼 반만년을 살아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어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어요. 단군 씨는 윤회를 믿으세요?”

“전생이나 윤회 모두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며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솔직히 믿을 수 없어요. 저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는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첫 번째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두 번째는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영원한 사랑을 믿나요?”

나는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연 영원할까요? 불같은 것 아닌가요?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려한 불길로 서로를 태우다가, 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잿더미를 지저분하게 뒤집어쓴 채 화려했던 불길을 평생 추억하며 사는 것……. 그게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 아닌가요?

웅녀는 내 잔에 담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사랑은 일종의 운명 같은 거예요. 오로지 나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

“그래요. 일단 웅녀 씨의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할게요. 그렇다면 저는 한때 웅녀 씨와 인연을 맺었던, 그러니까 단군의 아버지인…….”

“네.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라고 불리는 남자죠.”

“네? 제가 환웅이었다고요?”

웅녀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죠. 당신과 저 사이에 낳은 아들이 조금 특별했을 뿐이죠. 저는 제 아들 이름을 단군이라고 지은 일이 없어요. 혹시 삼국유사에 실린 김제상에 관한 이야기를 아시나요?

“대충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는데, 박제상이 아닌가요?”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실려 있고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실려 있어요. 왜국에서 눌지왕의 동생을 탈출시킨 김제상이 왜왕으로부터 얼마나 지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는지도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그걸 믿으세요?”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에 실린 내용이니 믿을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당시 고문 과정을 옆에서 하나하나 지켜본 신라인이 과연 있었을까요? 누가 어떤 방법으로 김제상이 그런 고문을 받았는지 알 수 있죠? 누가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계림에서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은 받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기록했을까요? 역사란 사실이라는 큰 줄기에 정치적인 필요로 가공된 이야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역사적 사실은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한 김제상이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왜국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전부예요.”

나는 웅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웅녀는 내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두려움 없이 제게 다가왔던 첫 번째 남자였어요. 정신이 그리 온전하지 않은 사람. 마을에서 한참 어린아이들에게도 놀림을 받는 바보. 그런데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매우 깊었고, 고통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마치 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죠. 저는 당신이 두려웠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저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권위로 당신을 내쳤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제게 다가오는 일을 멈추지 않더군요. 감히 신의 대리인에게 겁 없이 다가오는 불경한 사내에게 가해진 응징은 가혹했죠. 당신은 한쪽 눈을 잃고 한쪽 팔까지 제대로 쓸 수 없게 됐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제게 다가오는 일을 멈추지 않았어요. 경외의 눈빛 대신 애정 어린 눈빛과 함께. 아직도 저는 당신이 왜 그런 핍박을 받고도 제게 다가왔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바보였으니 그리했겠죠. 제가 이렇게 오랜 세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서 저를 아니 환웅을 받아들이는 데엔 문제가 없었나요?”

“간단해요. 제가 사람들에게 신이 내게 당신을 점지해줬으니 앞으로 당신을 나처럼 섬기라는 선언을 했죠. 게임 끝.”

“아니 그렇게 간단히요?”

“지금처럼 종교를 담당하는 지도자와 정치를 담당하는 지도자가 구분돼있지 않았던 시대였으니까요. 세월이 흐르면서 당신은 점점 늙어갔어요. 저는 구슬을 당신에게 먹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고민했어요. 저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구슬이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줄지, 영원한 생명이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이 축복이 될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요. 영원한 생명이 제겐 축복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환웅, 아니 저는 어떻게 됐나요?”

“결국 세상을 떠났죠. 그 후에 저는 신의 뜻이라는 이야기만 남긴 채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먼 곳으로 향했죠.”

“당신이 떠나면 아들은 어떡하고요?”

“아들은 어렸지만 똑똑했어요. 어쨌든 명분상 신의 대리인인 저와 신이 제게 점지한 당신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니 이보다 더 신에 가까운 사람이 어디 있나요? 아들은 그 명분을 충분히 활용해 위대한 지도자가 됐죠. 저는 아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멀리 서쪽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죠. 그곳에서도 저는 신과 가장 가까운 여자로 명성을 날렸죠.”

“서쪽이라면 중국?”

“네. 그런데 그곳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됐어요. 이번에도 당신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요? 제가 한때 중국인이었다는 말인가요?”

“중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과 더 가까운 종족의 나라였죠. 그는 무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어요. 그가 저를 찾아왔을 때 저는 그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어요.”

“제가 왕이었다고요? 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물론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지혜만을 원해 저를 찾아왔던 당신도 나중에는 저에게 반해 청혼하게 됐죠.”

“그래서 웅녀 씨는 왕비가 되신 건가요?”

웅녀는 깔깔거리며 한참 동안 웃었다.

“왕비요? 당신에겐 저를 포함해 부인만 60명이 넘었어요. 저는 그중 한 사람이었고요. 물론 나중에 정실부인이 되긴 했지만.”

“제 전생이 그토록 화려했다니! 웅녀 씨가 그 많은 경쟁률을 뚫고 저의 정실부인이 됐다고요?”

“어제 말씀드렸죠? 어지간한 짐승을 잡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저는 당신과 함께 늘 전장을 뛰어다니며 무수한 전투를 치렀어요. 그 공으로 정실부인 자리를 차지했죠.”

나는 웅녀의 얼굴과 아담한 체구를 훑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웅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이제는 전쟁터를 종횡무진 활약하던 여장군이라니 말이다. 나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웅녀에게 물었다.

“결국 무정, 아니 저도 죽었겠군요.”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었어요. 당신에게 구슬을 먹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번민했죠. 다시 만난 당신을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처음 당신을 떠나보낼 때와 같은 이유로 구슬을 당신에게 먹일 수 없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저에 관한 온갖 억측과 소문이 왕궁에 난무했죠. 떠날 때가 됐죠. 결국 저는 당신이 죽던 날 몰래 왕궁을 빠져나오고 말았어요.

“어디로 가셨나요?”

“이번에는 반대로 동쪽으로 움직였어요. 백성들 사이에선 제가 당신이 죽던 날 하늘로 사라져버렸다느니 혹은 동쪽으로 떠나는 저를 목격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죠. 그리고 그 소문은 전설이 됐고요.”

“그 전설이 혹시 불로초에 관한 전설로 와전된 건가요?”

“그런 셈이죠. 늙지 않는 왕비가 동쪽으로 멀리 도망갔다는 소문이 세월이 흘러 동쪽 끝에 불로초가 있다는 전설로 변해버렸어요.”

“그 이후로도 저를 만났나요?”

“네. 그 이후로는 당신을 조금 더 자주 만나게 됐어요. 하지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무정 같은 왕이 아니라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100년 만에 만난 일도 있고, 300년 만에 만난 일도 있고요. 심지어 당신이 여자로 나타난 일도 있었어요. 그땐 당신과 자매처럼 지냈죠. 그렇게 오랜 세월 당신과 만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무엇이죠?”

“당신이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하기보다는 당신과 잠시 스치는 인연으로 만나는 게 가슴이 덜 아프다는 사실을요. 저는 이미 제 앞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어요. 당신이 가졌던 많은 이름을 모두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별의 순간에 관한 기억만큼은 제 가슴에 모두 아직도 깊게 남아있어요. 마치 나무에 박힌 못을 뽑아내도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듯이 말이죠. 저는 당신과 조금씩 만나되 영원히 만나는 길을 선택했어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지금과 또 다른 모습으로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는 늘 당신에게 새로운 여자이고 당신은 제게 새로운 남자일 테니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요? 단군 씨, 저는 내일 바의 문을 닫을 거예요.”

“네? 바를 닫는 다고요?”

“이 정도 당신을 봤으면 족해요. 제가 천년만년 여기서 장사를 할 줄 아셨어요? 내일은 일요일이니 별일 없으시죠?”

당황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내게 웅녀가 우산을 건넸다.

“내일 오후 2시에 동대문구청에서 가까운 청계천에서 만나요. 그곳에 고산자교라는 다리가 있어요. 그 다리 아래에서 기다릴게요. 곧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이 우산을 가져가세요.”

“비요? 오늘 뉴스에는 그런 일기예보가 없었는데…….”

“일기예보보다 제가 더 정확할걸요?”

웅녀는 바 바깥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얼떨결에 바에서 나온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내 콧잔등 위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곧 소나기가 거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우산을 펼쳤다.

 

나는 다음날 오후 2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웅녀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실제로 중국 은나라 때 무정이라는 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무정에게는 부호라는 이름을 가진 왕비가 있었고, 그 왕비는 중국 최초의 여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걸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됐다. 또한 은나라는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라는 주장 또한 많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웅녀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바를 닫겠다니. 만날 때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여자이지만 이대로 인연의 끝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제가 조금 늦었죠?”

웅녀는 화사한 화이트 원피스 차림으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웅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여자가 장군이라고?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을 호령했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세요?”

“아니에요. 오늘 웅녀 씨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그런데 정말 바를 정리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그리고 오늘은 단군 씨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요.”

“네? 작별 인사라니요?”

바를 닫는 데 이어 작별 인사를? 겨우 며칠 만나놓고 붙잡겠다고 나서면 우스운 일인 것 같아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주저했다. 그때 자전거를 타며 나와 웅녀 가까이 다가오던 노인이 갑자기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에서 내린 노인은 웅녀에게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이보시오! 혹시 우리 서로 아는 사이 아니오?”

웅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잘못 보셨어요. 저는 할아버지를 처음 뵈어요.”

“그럴 리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노인은 흥분해 웅녀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노인을 만류했다.

“이분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웅녀는 노인의 손에 붙잡힌 손을 빼내며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웅녀는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노인에게 보여줬다.

“누구와 착각하셨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께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나는 노인과 함께 웅녀의 주민등록증을 살폈다. 주민등록증에는 웅녀 대신 김민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90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었다. 그러자 노인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뒤돌아섰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웅녀에게 말했다.

“웅녀 씨, 아니 이제는 민정 씨인가요?”

웅녀의 낯빛이 어두웠다. 웅녀는 자전거를 끌고 멀어져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막내 남동생이에요.”

“네? 그게 무슨?”

“우리 일단 걸으면서 이야기해요.”

저 노인이 내 막내 남동생이라고? 나는 50년 만에 나와 만나 반갑다던 웅녀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멀어져가는 노인을 쫓아가 가족관계를 물어보려 했으나, 웅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웅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세상에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까 제 주민등록증을 보셨잖아요? 장난이에요 장난. 손님으로 찾아온 단군 씨가 솔직히 제 스타일이라 친해지려고 엉뚱한 소리를 해본 거예요.”

“바를 정리한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당연히 아니죠. 그 건물은 제 고모 건물이에요. 바는 고모 덕에 차릴 수 있었고요. 사학과를 졸업한 후에 취직이 되지 않아 이것저것 해보다가 차린 게 바예요. 제가 무슨 돈이 있어 그런 바를 차려요. 고모 덕에 겨우 개업한 바인데 열심히 해야죠. 혹시라도 오해하셨다면 정말 미안해요. 그냥 저는 단군 씨를 놀리고 싶어서 엉뚱한 소리를 해본 거예요. 설마 정말로 제 이야기를 믿으신 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민정 씨 장난이 너무 심하시네요! 이제 민정 씨라고 불러도 되죠? 민정 씨는 정말 작가를 하셔도 되겠어요. 처음에는 민정 씨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렸는데, 조금 전에는 진짜인 줄 알고 할아버지 뒤를 쫓아갈 뻔했어요.”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거짓말이란 게 들켜서 김이 새긴 했는데, 그래도 서복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실래요? 뻥인 걸 알고 들어도 재미있을 거예요.”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복은 제가 머무는 제주도의 동굴로 찾아왔어요. 그는 저를 만나자마자 불로초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처음에 저는 아는 게 없다고 발뺌했지만, 그는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몰라도 저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구슬에 미련이 없었어요. 그저 제 운명은 오로지 제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구슬을 계속 지니고 있었을 뿐이죠. 한편으로는 구슬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정말 구슬이 불로장생의 힘을 가졌는지 말이죠. 제 운명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면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조금 있었고요.”

서복은 이미 환갑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에겐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가져다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서복은 이미 동굴 주위에 군사를 잔뜩 배치해 놓은 터라, 제가 몸을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저는 서복에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물었죠.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저는 미련 없이 서복에게 구슬을 던졌어요. 서복은 구슬을 받자마자 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어요. 저는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재빨리 비밀통로로 그곳에서 빠져나왔고요.”

“서복은 처음에 무척 실망했겠군요.”

“아마도요.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테니 말이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으니 어차피 진시황에게 돌아가 봐야 그에게 돌아올 대가는 죽음뿐이었어요. 게다가 저는 작정하고 숨어버렸으니 서복은 저를 찾을 수가 없었죠. 하는 수 없이 그는 배를 몰아 진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왜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신이 더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겠죠.”

“서복에겐 영생이 더 큰 불행이었어요.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한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됐으니.”

“이후에 서복을 만난 일이 있나요?”

“네. 몇 번 더 만났어요. 첫 번째는 그로부터 약 100년 정도 흐른 뒤였어요. 당시 그는 거지꼴로 혼자 제주도까지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제게 왜 젊어지지 않느냐고 따지며 절규하더군요. 저는 후회하지 않겠다던 기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비웃어줬죠. 그는 죽음을 원했어요. 저는 그동안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모두 서복에게 들려줬지요. 제 말을 듣고 체념한 서복은 결국 다시 왜국으로 돌아가 버렸어요.

“그다음에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났어요. 저는 그때 왜국에서 음양사로 있었어요.”

“음양사요? 무당과 비슷한 일을 했나요?”

“점술을 보기는 하죠. 하지만 실제 음양사는 천문학이나 기상학, 지리학을 연구해 이를 농업이나 군사전략 수립과 같은 현실에 응용하는 과학자와 비슷한 존재였어요. 한곳에 머물러 사는 일이 따분해 왜국에서 살았던 일도 있거든요. 그곳에서 우연히 음양사 일을 하고 있던 서복을 만났죠. 그때는 서로 말없이 스쳐 지나갔어요.”

“마지막은 언제죠?”

“몇 년 전이에요. 홀로 일본에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들른 절에서 만났죠. 이제는 승려가 돼 있더군요.”

“음양사에서 승려요?”

민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몸을 감추기 가장 쉬운 곳이 그런 곳이니 어쩔 수 없죠. 제가 그동안 무당이나 비구니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긴지 아세요?”

“어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렇게 정색하며 말하니 당황스러워요. 아! 벌써 청계천이 다 끝나가네요.”

청계광장을 알리는 원뿔 모양의 조형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가볼게요, 추영랑.”

“네? 이제는 추영랑인가요? 그 이름도 한때 제 이름이었나요?”

“저는 광화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게요.”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괜찮아요.”

“그러면 내일 저녁에 민정 씨에게 들를게요. 내일은 민정 씨가 무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지 벌써 기다려지는데요?”

내게서 멀어져가던 민정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림은 저 혼자로 족해요. 다음에 봐요.”

 

다음 날 저녁, 바의 문은 잠겨 있었다. 문 앞에는 그동안 찾아주신 손님들께 감사하다는 내용이 인쇄된 A4용지가 붙어있었다. 바에 오면 당연히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로 전화번호를 받아놓지 않은 터라 연락할 길이 없었다. 나는 힘없이 거리를 거닐었다. 거리에선 유난히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뒤적이다가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걸린 뉴스를 봤다. 어제 오후 경북 울진에서 세월에 마모됐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신라 시대의 비석이 발굴됐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비석에는 추영과 보현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추영은 사서나 금석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인물명이고, 보현은 지증왕의 딸인 보현공주로 추정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보현은 수지공과 혼인해 영실공을 낳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전문가들은 연인 사이였던 추영과 보현이 현실에선 사랑을 이루지 못해 비석으로나마 둘의 변치 않을 사랑에 대한 맹세를 새긴 뒤 땅속에 묻은 것이 아니냐는 낭만적인 분석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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