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게이인 너를 사랑했다

2020.06.22 00:0106.22

나…….사실 게이야.

 

게이라고? 그 말에 먹던 것을 뿜을 줄 알았는데, 담담했다.

 

응. 게이야. 너니깐 믿고 말해주는 거야. 비밀 꼭 지켜.

 

비밀이라면서 나에게 말하는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 날. 사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요양원에 버리고 온 거라는걸. 엄마는 미성년자는 장례식장에 가는 거 아니라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기간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도. 할머니는 진짜 돌아가셨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요양원에서 전화가 걸려온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전화를 받은 엄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슬퍼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고, 택시를 불렀다. 장례식장에서 본 할머니의 몸에는 살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보기 흉하다며 휙, 나가버렸다. 한쪽 구석에서 조의금을 세며, 싱글벙글하는 엄마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인심 썼다. 오만 원은 너 용돈 해.

 

엄마는 내 손에 오만 원을 쥐여주었다. 엄마의 눈치를 쓱 살폈다. 그리고는 오만 원을 건네받았다. 아무도 몰래. 오만 원을 라이터 불로 태웠다.

 

이건, 할머니에게 가야 할 돈이라고.

 

혼잣말을 삼킨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에는 어떠한 힘도 없다. 오만 원은 그 종이 쪼가리는 재가 되어 하늘 높이 사라져 버렸다. 잘된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끝났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시골집은 한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하필 집을 계약한다는 날에 늘 넘어지던 마지막 계단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다. 눈물이 났다. 다리가 까져 피가 나서 눈물이 나온 게 아니었다. 넘어져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인데.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치니 비로소 남의 집이 되었다.

 

 

*

 

우리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문창과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너와 나뿐이라서 그런지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말도 잘 통했다. 죽이 척척 맞았다. 그 후 글쓰기 모임이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도 종종 만났다. 만나서 같이 서점에 가서 서로의 책을 골라주기도 했다.

 

나는 공포소설이 좋더라고.

 

나도 공포소설 좋아하는데.

 

그 애가 공포소설을 좋아해서일까? 유독 마음이 잘 맞았지. 그 후 카페에 가서 같이 글을 썼다. 서로의 글을 봐주며, 그 애가 지적한 내용이 평소라면 화가 났겠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눈치를 많이 보던 내가. 눈치를 보지 않고 밥을 먹게 되었다. 입에 소스를 잔뜩 묻히고 허겁지겁 먹던 너를.

 

휴지를 건넸다. 입 좀 닦고 먹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애에게 핀잔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입을 닦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그 모습이 그냥 좋았다.

 

그 후 우리는 꽤 자주 만났다. 주로 홍대나 이대나 신촌에서 만났다. 만나서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오랜 시간 정차 없이 걷기도 했다. 그 애를 만나는 날이면 길치가 아닌데도 길치가 되었다. 이렇게라도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건지. 아니면 머리가 새하얘져서 진짜 길치가 되어 버리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래 걷고 싶었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우리는 친구니깐 손은 잡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너를 안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입술이 타들어 갔다. 그럴수록 너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너를 다시 만난 건 수시 실기를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실기를 본 기념으로 만나서 맛있는 걸 먹기로 했다. 아직 합격자 발표가 남았지만, 그전에 합격을 기원할 겸 산 하나를 넘었다고 할 수도 있기에. 사실 이런 건 다 핑계였다. 친구 사이에 만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냥 만나고 싶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너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럼 이 엿 같은 기분도 좋아질 거 같아서.

 

*

 

엄마야 아빠야 선택해.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혼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혼이라니? 나한테 말도 안 했잖아.

 

우리 일을 너한테 왜 말하니. 아니 이제 남아지.

 

그래도 말을 해야지.

 

엄마는 말을 딱 잘랐다.

 

그래서 누구야? 선택해.

 

나 아무도 안 선택해. 둘 다 내 소중한 가족이야.

 

그래. 다 컸으니 나가 살아.

 

아빠가 불쌍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빈털터리로 집에서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모른다. 아빠같이 착한 사람이나 엄마랑 살아줄 거라는 걸. 엄마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달에 네 번 이상 시골에 내려가 도박을 했다. 엄마는 유일한 숨통이라고 했지만, 이건 분명한 도박이었고, 돈을 모두 날린 날에는 부부 싸움을 했다.

 

아빠는 호구였다. 호구.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엄마의 비유를 살살 맞추기에 바빴으니깐.

 

이 집 팔아서 나 다 줘 그동안 고생한 값은 받아야지.

 

알겠어. 다 줄게.

 

나는 짐을 쌌다. 동생은 엄마를 선택했다. 동생은 영리해서 아빠처럼 호구로 남진 않을 거 같아서 안심되었다.

 

*

 

나…….사실 게이야.

 

응. 게이야. 너니깐 믿고 말해주는 거야. 비밀 꼭 지켜.

 

그럼 여자 안 좋아해?

 

솔직히 연애를 해보진 않았지만, 여자에겐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거 같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게이라서 싫으면 지금 떠나줘. 욕 안 할 테니까 다 차단할 거야. 호모 새끼랑은 말 안 해.

 

좀 놀라긴 했지만, 차별 안 해. 나 평화주의자거든.

 

비밀이라며, 그 애는 곧 자기가 게이라고 SNS에 다 떠벌리고 다녔다. 게이가 정말 싫었다. 차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애만은 게이가 아니길 바랐다.

 

*

 

한동안 멍하게 지냈다. 습작한 종이를 박박 찢었다. 수북이 쌓이는 종이 쪼가리를 보며 웃을 수도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실기는 떨어졌다. 그 애의 합격 소식을 접한 건 SNS였다. 오랜만에 다시 연락했다.

 

[잘 지내? 대학 합격했다며 축하해.]

 

[어. 오랜만이다. 나야 잘 지내지. 축하 고마워.]

 

[우리 너무 안 만났다. 이번 주에 시간 되면 만날래?]

 

[미안. 이번 주는 애인이랑 만나기로 했어.]

 

[그럼 언제 만날 수 있어?]

 

[다음 주 수요일쯤?]

 

[그럼 그때 홍대에서 만나자.]

 

[그래.]

 

끌어안고 있던 곰 인형을 더 꽉 끌어안았다. 가위로 인형을 팔을 잘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형 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쌓인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다시 인형의 팔을 꿰매며 몇 번이나 손이 찔렸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가 그 애가 말했다. 달걀은 얼마나 빨리 깨지는지 아느냐고.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달걀은 1초도 못 버티고 툭 하고 깨져 버리는 거 같다. 나는 그 애에게 좀 더 단단하게 보이고 싶었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여기가 내 세상이구나. 이런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딱 이 네모 칸만큼의 슬픔이 밀려 왔다. 쭈그려 누우며 그 애가 생각났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는데, 웃으며 만날 수 있는데, 눈물이 났다. 나를 위로하는 건 꿰맨 자국이 여기저기 있는 곰 인형뿐이었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나오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홍대는 주말, 평일 할 거 없이 사람이 많았다. 핸드폰을 보니 조금 늦는다고 톡이 왔다. 잠시 맞은 편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영풍문고 안은 조용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점은 유일한 쉼터였다. 부부 싸움이 잦은 날은 서점으로 피신했다. 여기는 적어도 싸우는 사람은 없으니깐.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책은 거짓말을 한다.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집은 거짓이 없다. 거짓말을 좀 해도 될 텐데. 너무 정직하다. 새가 아무렇게나 새똥을 찍찍 싸대듯 입에서 거친 발언들이 새똥처럼 쏟아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를 만나서. 너는 비밀이 없다.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데도. 이렇게 순수할 수 있구나. 너의 몸은 아마도 1급수 물로 이뤄져 있을 거야. 나는 그런 생각들을 너를 볼 때면 잠시나마 나도 1급수의 폭포수가 된 마냥 깨끗해질 수 있었다.

 

에세이 코너에서 책 한 권을 골랐다. 사랑과 위로의 말들이 가득한 시시콜콜한 책이었지만, 나는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막 마치고 나니 네게서 톡이 왔다.

 

[차가 밀려서 10분 정도 늦을 거 같아.]

 

[괜찮아. 영풍문고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짧은 답을 했다. 시간이 조금 더 생겨 시집 코너로 갔다. 시는 거짓말을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다. 우울하고 아픈데, 지금 당장 쌍욕을 하고 싶지만, 절대 그걸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거짓말이라면 숨기지 않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시집 한 권을 손에 들었다. 밤의 팔레트라는 시집이었다. 전에 스치듯 읽은 기억이 있다. 독특한 문장들 사이에 잔잔히 밀려오는 슬픔을 독자가 고스란히 자기 서사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시집도 한 권 샀다.

 

한 참 찾았잖아.

 

계산하느라 톡을 보낸 줄도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몰랐다. 너는 투덜거리지 않았다.

 

덥고, 배고프다.

 

뭐 먹을래?

 

글쎄. 삼겹살?

 

글쎄라면서 삼겹살이라고 외치는 네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그래 이런 모습에 남자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야. 그렇게 나의 감정을 천천히 억눌렀다. 고백하지 않길 잘했다.

 

그럼 무한리필집 가자.

 

가려던 무한리필집이 있는 건물이 검게 그을려 있다. 근처에는 펜스가 쳐 있다. 내부 수리로 인해 당분간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근처 무한리필집을 검색했다. 한 군데 찾긴 했는데, 갈수록 처음 보는 건물만 나왔다. 돌고 또 돌다 보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겨우 찾은 무한리필집은 휴일이었다. 결국, 근처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대충 배를 채웠다. 무얼 먹든 난 좋았다. 너랑 있으면 어떤 음식을 먹어도 다 맛있었으니깐.

 

밥을 먹고 늘 그렇듯 카페를 갔다. 네가 좋아하는 쑥 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자연스레 노트북을 켰다.

 

글은 너랑 쓸 때 제일 머리가 잘 굴러가는 거 같아.

 

너는 그렇게 말하고 쑥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캐러멜 라떼가 담긴 컵을 빨대로 빙빙 돌리기만 했다.

 

얼음 다 녹기 전에 마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듣기가 싫었다. 오기를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만 더 마셔줘.

 

너의 컵에 캐러멜 라떼를 따랐다. 너는 싫다는 저항 따윈 하지 않았다. 내가 따라준 라떼를 맛있다는 표정으로 마셨다. 우린 그 후 말없이 글을 썼다. 너는 간간이 폰을 들여다보는 거 같았다.

 

누구랑 톡해??

 

아. 애인.

 

애인이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얼마나 귀여운데.

 

애인을 좋아하는 게 당연했다. 당연했는데, 질투가 났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그 애와 사귀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펐다. 아니 고백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에겐 더 크게 다가왔다. 차라리 고백했고 차였다면 이것보단 덜 슬프지 않았을까?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아 노트북을 덮었다.

 

왜? 집에 가려고?

 

아니, 글도 안 써지고 답답해서 좀 걷고 싶어졌어.

 

잠만. 애인한테 톡 좀 보내고.

 

나와 너의 시간에 애인이란 단어가 껴 있다. 이것이 살덩어리라면 도려낼 수 있었을까. 찌꺼기가 여기저기 끼어 있다. 도려낼 수 없는 찌꺼기가

 

*

 

나 동거하기로 했어.

 

동생의 말에 마시던 물을 뿜었다.

 

뭐? 동거?

 

그래. 동거.

 

평소 착하고 나름 성실했던 동생이 일탈 같은 건 해본 적 없던 동생이 그것도 동거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가 뭔데??

 

엄마 짜증 나서.

 

그게 이유라고? 엄마랑 잘 지냈잖아.

 

요즘 맨날 싸웠어. 칼 들고 너 죽고 나 죽고. 이제 지겨워서 못 살겠어.

 

그럼 자취를 하던가.

 

나 무서움 잘 타잖아. 밤에도 스텐드 안 켜면 잠 못 자는 거 알면서.

 

선 듯 같이 살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어지간히 동생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사실 나보다 어른스럽고 성숙한 동생이었기에. 그건 아니고. 동생 남자친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손만 잡고 자라고 하면 진짜 손만 잡고 잘 거,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벌레 하나 못 죽이고, 동생에게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자기야를 외치던 동생의 남자친구는 동생보다 더 믿을 만한 존재였다.

 

그래. 동거하든 말든 알아서 해라.

 

세상 쿨한 척 동생에게 말했다. 차라리. 혼인신고를 먼저 하든가. 뭐 동생이 알아서, 하겠지.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인지 실기를 준비할 기분이 아니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나오고 다른 모임을 알아봐야지. 생각한 지도 꽤 흘렀다. 모임을 찾아보려는데 맞는 모임이 없었다. 맞는 모임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모임을 만들었다.

 

글쓰기 모임에 인원을 모집합니다. 순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환영입니다. 장소는 2호선 중 한 곳이고, 평일 오전이나 주말 오전에 스터디 카페에서 만날 예정입니다. 참가비용은 따로 없고요. 스터디 비용만 나눠서 내시면 됩니다. 한 달 기준 2번 이상 모임을 진행할 예정이니 미리 작품을 읽고 합평문을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참여를 희망하시면 답글 달아주세요.

 

[글쓰기 모임 만들었는데, 참여할래?]

 

[나야 무조건 좋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거절이라도 하면 고백한 것도 아닌데, 차인 사람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같이 하겠다고 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연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줘.

 

네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다. 고백을 받았는데, 받아주고 싶다고.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나는 그렇게 물었고, 그 애는 우린 절친이잖아. 라고 대답했다. 절친이라. 절친. 물론 좋은 단어다. 어감도 좋다. 줄임말도 아니었다. 차라리 줄임말이라면. 예를 들어 절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 이런 말을 줄임말이라면. 웃고 넘길 수 있었을까. 첫 연애는 여자랑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잘 생각해봐. 입이 간질거렸지만, 짧게 대답을 마쳤다. 결국, 너는 연애를 했다. 그럴 거면, 어차피 받아줄 거면서 나한테 왜 말한 건데. 혼잣말을 뱉어보지만, 속만 꽉 막힌 채 답답하게 타들어 갈 뿐이었다.

 

 

*

 

물냉면을 시켰다. 단칸방은 더위에 취약했다. 배달이 늦어 면이 불었지만, 다행히 얼음은 녹지 않았다. 인위적인 신맛이 났다. 나는 언제 제일 인위적인 사람이 되었던가. 잠시 생각해 본다. 물냉면은 시원했다. 속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너란 사람을.

 

 

한쪽에 쌓아둔 책을 펼쳤다.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편지 같았다. 열어보기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다.

 

언제나 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야. 너와 내가 언제까지나 절친이었으면 해. 사실 이 말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우리 사귀어도 연인 아니 사랑해 보다도. 절친한 사이가 되자. 그게 좋겠어. 언제 한 번 그런 생각 했어. 내가 트렌스젠더였다면 그래서 남자가 된다면. 너와 사귈 수 있었을까. 내 마음을 전부 전할 수 있었을까. 성별이 우린 갈라놓는 이유를 난 알 수 없었지. 아니 알면서도 화가 났어.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 작은 벽이 있다고 생각 안 할게. 내가 너를 좋아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알아도 말 안 할래. 우리는 지금처럼 절친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의 앞날을 응원할게.

신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시는 슬픔 대신 신맛이 나거든. 혼잣말을 되뇐다. 눈이 펑펑 내렸다. 실기를 이주 앞두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아빠 오늘 돌아가셨단다.

 

사인은 자살이라고 했다. 아빠는 왜 자살을 했을까? 엄마에게서 벗어났는데, 엄마가 감옥이라고 했던 아빠였는데, 그 감옥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리웠던 걸까?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엄마는 담담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담담하게 조의금 봉투를 열어보는 엄마의 모습은. 데자뷔일까. 할머니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할머니도, 아빠도 모두 돈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깐. 구름은 흘러간다. 모습을 바꾼다. 햇볕이 쨍쨍했다. 이런 날 폭설이라도 온다면 좋을 텐데.

 

안녕하세요.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저 지영이 남자친구예요.

 

아, 안녕하세요. 지영이도 안 왔는데, 여긴 어떻게……?

 

지영이 대신 왔습니다. 그게 도리인 거 같아서요.

 

그는 나에게 조의금 봉투를 내밀었다. 받지 않겠다는 작은 실랑이를 하고 있던 그때 엄마가 내 손에서 봉투를 가로챘다. 맹수도 정이 있지 않을까. 이런 날은 네게 기대고 싶다.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너에게 알리지 않았다. 말하면 올까 봐서. 이런 비참한 모습을 네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좋은 모습만, 밝은 모습만 애써, 그런 척 멍든 사과 말고 비싼 사과의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국화꽃을 놓고 절을 했다. 그냥 간다는 사람을 겨우 붙잡았다. 육개장과 호박전을 내놓는다. 아빠의 인생만큼 초라한 상이다. 음식 개수라도 더 늘리면 이 시간 만큼이라고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지영이 잘 지내죠?

 

그럼요. 겉으론 그래도 속은 착해요. 지금은.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요.

 

든든하게 드시고 가세요.

 

*

실기가 끝난 지 3주 만에 너를 만났다. 한강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한강에 가자고 했다. 한강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추웠다.

 

미안. 추운데, 한강에 오자고 해서.

 

아냐. 나 겨울 좋아해.

 

실은 아빠 돌아가셔서 장례 치른 지 조금 됐어.

 

헉. 왜 말 안 했어?

 

그냥, 너 온다고 그럴까봐.

 

당연히 내가 가야지 우리 절친이잖아.

 

돈만 아깝지.

 

절친인데, 왜 아까워.

 

나는 말을 돌렸다.

 

애인분은 잘 만나?

 

그럼, 좋아 죽지.

 

그렇구나, 다행이네.

 

근처 식당으로 가서 수제비와 만둣국을 시켰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겨울에는 몸 녹이는데, 이만한 음식이 없다. 호호 불어가며 수제비를 먹었다. 온몸이 따끈해졌다. 수제비는 어릴 적 아빠가 자주 만들어 주시던 음식이었다. 라면 밖에 못 끓이던 아빠가 라면 다음으로 자신 있던 음식이었다. 취사병 시절 반죽을 많이 해봐서 반죽엔 자신 있다나. 아빠가 끓여주신 수제비는 투박했지만, 맛있었다. 넣은 건 없지만, 깊은 맛이 났다.

 

수제비는 몸을 녹일 만큼 따뜻했지만, 물론 맛있었다. 그랬지만, 예전에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잊을 수 있는 맛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너는 만둣국을 다 먹고 폰을 만지고 있었다. 얼굴에 웃음이 피어 있다. 그래. 너라도 행복 하자.

 

우리는 늘 그랬듯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너의 입에서 게이라는 말도, 애인이라는 말도 나오기 전으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절친이 되지 못해도 난 고백을 했겠지. 편지를 네 두 손에 주었을 것이다.

 

너도 대학 가면 연애도 하고 그래.

연애라.

 

대학에 붙었다. 최종적으로 등록 신청을 포기했다.

 

나 대학 안 가려고.

 

왜? 실기도 붙었고, 시 더 쓰고 싶다며.

 

그래, 시를 더 쓰고 싶어졌어. 그래서 안 가려고.

 

난, 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우린 절친이지?

 

그럼.

 

그래, 그거면 되었다. 우리가 영원히 절친이라는 사실 하나면. 눈이 그치고 해가 났다. 너는 영원히. 깃발을 들고 외칠 것이다. 인권에 대해서.

 

나는 묵묵히 응원할 것이다. 너의 앞날을.

 

게이인 너를 사랑했다. 꽃이 저도 봄은 온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우리가 자주 가던 홍대입구역 카페에 앉아, 너에 대한 시를 막 완성하려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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