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대서양의 공기 중을 부유하던 물의 정령들은 아일랜드 영토에 부딪히면 창백한 이슬비가 되어 부서져내린다.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은 접이식 우산을 품에 지니고 다닌다. 유스터스 거리에 들어서자 금박 우산, 마녀의 지팡이처럼 끝이 뾰족한 우산, 지방시의 별모양 로고가 기울어진 우산, 동백꽃잎들이 즙처럼 으깨져 번져보이는 우산, 우산들이 치마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며 지나갔고 우산들은 풍선이나 열기구처럼 두둥실 떠오를 지경이었다. 벌꿀빛 도는 금발, 당근즙 같은 빨강 머리, 떡갈나무 둥치 같은 고동색, 고수머리, 직모를 가진 더블린 사람들은 유모 메리 포핀스처럼 하늘로 빨려올라가지 않기 위해 우산을 꼭 쥐고 종종걸음을 쳤다. 길 양쪽으로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박혀있었는데, 우산이 착지할 때마다 바람을 불어넣어 도로 띄워올리는 공기 펌프 노릇을 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빗방울로 변한 물의 요정들이 우비를 걸친 내 어깨 위를 서성이며 노크한다. 근육 속에 맺혀 있던 피로가 김을 내뿜으며 증발한다. 방금 물을 준 베고니아 화분처럼 몸에는 어렴풋한 생기가 감돈다. 세븐업 캔뚜껑을 따면 기포가 솟아오르고 크레이지 팝핑 캔디를 씹으면 알갱이들이 톡톡 터진다. 외피 속에 숨겨져있던 물방울 모양의 석류 알갱이들도 불시에 과즙을 보이며 터진다. 그런 순간의 신선함에 압도되어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템을 섭취하고 스피드 모드로 들어선 수퍼마리오처럼. 페페로니 피자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파파존스를 지나,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노스맨을 거쳐 템플 바 광장까지. 보도블록은 비교적 고른 편이지만 거의 신발이 젖지 않을 만큼 물웅덩이도 생겨나있다. 펌프나 디디알을 할 때처럼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디뎌본다. 스텝은 텝댄스 리듬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됀다. 힐-브러시-스텝-힐. 춤을 출 때는 전기가 됀 것 같다던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버스는 우리를 위해 서지 않는다… 우유통의 행렬… 목장 속에서 죽어간다!… 적대감이라고 불리는 도시’ 빌리는 분노하고 감전됀 물고기처럼 두 팔을 퍼덕이며 스핀을 돈다. 여기서 그 장면을 재연해도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어링구스는 2억 km나 돼는 창공에 비행운을 드리우며 날아왔던 것이다.

 

광장 표지판 앞에서 운동화끈을 고쳐매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갈매기 한 마리가 푸르르 체머리를 떨며 물방울을 떨구어내었다. 이때만 해도 더블린의 가장 번화한 거리 어디에서건 갈매기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새들은 숨은그림찾기처럼 천연덕스럽게 거리의 풍경 속에 녹아들어가 있곤 했다. 어떤 때는 빗방울이 만들어낸 동그란 파문이 마법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안에 쏙 들어가 있었다. 옷에 다는 배지나 콜라 병뚜껑 같이 생긴 둥근 간판들-니나스 로쉐라거나 펍이라거나 고담 같은-에 잠시 붙어있기도 했고 쓰레기통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할 때도 있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이키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리의 우산들 하나하나가 더욱 더 새의 날개를 닮은 것만 같았다. 이곳의 낯선 이방인들은 정말로 우산을 붙들고 그대로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 외국인이라서 그런 상상이 드는 것일까? 나는 고심해 본다. 내 추측이 맞다면 사람은 원래 다 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춤을 출 때면 잠시나마 중력을 잊곤 하니까. 새장 창살 틈, 혹은 우산 뼈대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버둥버둥대다가 마침내 비닐을 찢고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간다. 니체라면 이 대목에서 영원 회귀라는 단어를 썼을지 모른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거리 중심부에는 아인슈타인의 흑백 사진이 프린트됀 현수막이 걸려있다. 현수막에는 티비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것 같은 노이즈 효과가 들어가 있고 Think Different 라는 혁신적인 문구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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