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마법사의 원

2020.05.09 12:3405.09

마법사의 원

 

“궁의 전령이군요. 들어와요.”

전령이라고 불린 사람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문을 열어준 여자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아직 해가 드높거늘 무슨 소리요?”

여자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나쁠 거 없죠.”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화가 겉돌고 있지만, 전령이 정말 해야 할 말은 그러나 따로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라는 사람이 이 집에서 나올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대는 누구요? 마법사께서는 어디 있소?” “마법사라, 음.”

청소하다가 쓸지 못한 먼지를 흘끔거리는 듯 성의 없는 말투였다.

“죽은 셈 치죠.” “뭐라고요?” 전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조수인 걸로.” 목소리는 숯을 씹는 것처럼 낮고 걸었다.

전령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 능글맞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런데 도저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 살은 납빛에 가까웠다. 피부는 하도 푸석푸석하고 거칠어 대강 휘감은 로브가 차라리 더 맨살처럼 보였다. 깡마른 모가지 위편으로 자리 잡은 얼굴은 사초(死草)처럼 시든 머리칼을 꾸역꾸역 드리웠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그러나 깡마른 사지로, 양다리가 서로 맞지 않게 자랐는지 시종일관 어디에 몸을 기대지 않으면 올곧은 자세를 할 수조차 없었다.

“별세하셨다니, 대체 무슨 일이오? 혹 흉성(凶星)이 떨어진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다 알게 되실 겁니다. 그것보다….”

여자가 손뼉을 쳤다. 전령은 제 눈을 의심했다. 꼭 안개나 구름처럼, 아주 작고 검은 입자들이 그 움직임에 맞춰 이리저리 춤추었다. 여자의 몸을 감싸듯 움직였다.

“들어오시지요, 제가 자초지종은 설명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전령은 투덜거리며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신경 쓰지 말고, 아무 데나 밟으세요. 어차피 알아서 조절되니까.”

완전히 엉뚱한 소리였다. 전령은 그러나 스스로를 조수라고 밝힌 여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문짝과 현관 너머 펼쳐진 마법사의 거처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 나오는 과자의 집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페이스트리 수천 겹으로 빚은 벽돌과 그 틈을 메운 끈끈한 당밀, 심지어 일반 세간처럼 꾸며진 의자나 책상 따위의 것들에서도 어김없이 꿀과 레몬의 새콤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모든 게 먹음직스럽고 군침이 돌아, 흙이 묻은 신발창은 고사하고 맨손을 대기만 해도 그 안정을 깨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환각이오?” “그럴 리가요. 다 진짜죠. ‘XX로 이루어진 집’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조수가 색이 다른 벽돌을 파헤쳤다. 껍질 아래 달고 촉촉한 생크림이 턱밑까지 들어찼다.

“먹을 게 필요하면 과자, 아니면 고기, 입을 게 필요하면 옷, 땔감이 필요하면, 아 그럼 그냥 나무집인가요. 아무튼 이런 식이죠. 조금 더러워져도 다른 부분을 쓰면 되고요.”

전령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수가 툭툭 말을 던질 때마다 과자의 집 전체가 전혀 다른 만듦새로 변태를 거듭했다. 아무 징조도 없이 질척한 날고기를 밟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주위가 옷으로 이루어진 동굴 같은 모양이 되었다. 이 지경이 되니 정작 마법사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보다 당장 눈앞의 기이가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야기하기 전에, 입 좀 달랠래요? 차 한 잔?”

절뚝거리며 자리에 앉은 조수가 쟁반과 찻주전자를 불러왔다. 걸어오도록 지시했다. 법랑을 입힌 그 매끄러운 몸뚱이에서 거미 다리처럼 작고 섬세한 촉수들이 구불구불 뻗었다. 그 상태로 주전자나 쟁반은 책상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지. 한 잔 받겠소.”

전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는 천천히 그를 따라 했다. 두 사람분의 잔을 꺼내 주전자를 쥐고, 제 것에 한 잔, 전령의 것에 한 잔 내용물을 붓는데… 검은 안개가 또다시 보였다. 조수의 맨살을 따라 어른거리는.

“기다리시오. 역시 안 받겠소.”

“저런, 주전자를 벗어난 순간부터 썩어버리는 차인데.”

연극적이리만치 과장된 몸짓은 정말 아쉽다는 것인지 전령을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길이 전령의 그것을 따라잡았다. 검은 기운이 쉴 새 없이 일렁거리는 제 손을 훑었다.

“참, 그렇죠. 아직 익숙하질 못해서요.”

조수는 괘념치 않고 맨손을 가져갔다. 입자를 한 움큼 쥐었다. 모래 젓는 소리와 함께 떼어냈다. 전령은 호기심과 불안이 반반 뒤섞인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조수가 손을 펼쳤다.

“그냥 쇳가루랍니다, 보세요.”

 

과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쏴쏴 흩어지다 보니 어떤 사악한 기운처럼 보일 뿐이었다. 여자의 손금과 고랑을 따라 끈질기게도 달라붙은 가루에선 얼핏 피와 비슷한 비린내가 풍겼다. 손바닥을 뒤집고 접고 흔들어도, 쇳가루들은 이리저리 움직일 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마법입니까? 대체 나한테 하고 싶은 게 뭐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건 체질이거든요.”

그것도 다 자초지종이 있답니다. 기나긴 이야기지마는 뒷마디는 숫제 혼잣말하듯 슬금슬금 읊조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안 들어가게 조심히 탔으니, 이제 한 잔 들겠어요?”

전령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엔 입을 여는 대신 고개만 내저었다.

대뜸 마법사가 죽었다는 이야길 꺼내지 않나, 과자로 된 집에 쇠를 빨아들이는 몸이라니.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 하도 많아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애초 전령이 이곳에 온 이유부터 곧장 파고들어야 했다.

“역시 벌어진 일은, 흉성과 관련이 있는 거요? 궁의 마법사들께서는 그 별을 어떤 점에서도 읽을 수 없었다고 하셨소.” “어련하겠어요, 저들끼리 규방에 틀어박힌 늙은 주름투성이들.”

전령은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그러나 거침없이, 아니 처음부터 그런 쪽으론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는 듯 조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내친김에 목까지 축였다. 찻잔을 가볍게 홀짝였다.

“밀랍이 굳은 모양으로 구름의 모양을 읽고, 무덤가의 흙으로 왕의 심기를 거스른 이에게 부스럼을 돋게 하고… 실상 아녀자들의 잡술이나 다름없는 재주로 궁정 마법사라니, 세상이 평화에 짓무른 모양새가 무서워요.”

“입이 걸군. 말을 좀 가리는 게 어떻소.”

전령에 분노에 알맞은 반응이 저쪽에서는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정서의 테두리가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되돌아갈 곳을 잃은 격정은 그만 제풀에 먼저 시들어버렸다.

“어디까지 했죠, 흉흉한 별이랑 마법사. 그래요.”

조수가 손뼉을 쳤다. 기뻐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북돋으려 하는 그런 종류였다.

“자,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

 

조수라고 불리게 될 여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발을 들였다. 마법사는 한 발짝 앞에서 걷고 있었다. 여자는 눈에 띄게 절뚝거렸지만 그 보폭을 따라잡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저, 저기, 요.” 여자는 걸음걸이만큼이나 주춤거리며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돌아온 것은 카랑카랑한, 앳되다기에도 심하게 어린 목소리였다.

“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냥, 저기. 마법사 맞으신가요? 좀 어리신 거… 같아서.”

마법사가 제 몸을 훑어보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을 울타리의 말뚝보다도 작았으니.

눈, 코, 입은 모두 인형처럼 작고 오밀조밀했다. 귀는 조금 뾰족하게 솟은 편이었다. 피부는 빵의 속살처럼 하얗고 보드라웠다. 팔다리는 봄을 맞은 새순처럼 가녀렸다. 과자 장식보다 앙증맞은 손으로 제 키를 훌쩍 넘는 지팡이를 어떻게 쥐고 지탱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소매가 길고 품이 넓은 로브는 양쪽으로 곱게 늘어뜨린 연보라색 머리칼과 잘 어울렸다. 거기에 곳곳에 물결 모양의 프릴과 리본까지 덧대어진 옷가지. 여러모로 여자와는 대비되는 외양이었다.

마법사의 표정이 성가시다는 듯 얕게 요동쳤다.

“겉모습만 보고 마법사를 판단하지 마. 마법을 부린다는 건, 이쪽이랑 영혼의 세상 양편의 균형을 흩뜨리는 일이야.”

무미건조한 그 표정에 걸맞게 딱딱한 목소리로 마법사는 입을 열었다.

“천칭이라고 하면 알아? 마법을 부릴수록 접시가 한쪽으로 쏠리는데, 그걸 막으려면….”

우뚝 말이 멎었다. 여자는 무언가 잘못되었는가 마법사의 심기를 살폈다. 저를 등진 터라 그나마도 반쪽밖에 보이지 않는 표정은 그러나 여전히 편평했다.

“…그냥 그만큼 실력이 좋다고만 알아둬. 알 바 아니잖아 그런데? 그냥 제물인걸.”

그 말에 여자 마음속의 천칭이 기울었다. 처한 상황의 입장이, 그것을 들먹이는 말의 무게가 달랐다. 같은 말이 저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에서는 단두대의 날처럼 내리쳐졌다. 마법사가 걸음을 멈추고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통에, 여자는 도리어 제가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해버렸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얼굴이 시큰거리는 것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쩔쩔매며 팔뚝과 손목을 털어냈다. 남들 앞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올 만큼 굳어진 습관이었다. 후드득 검은 가루들이 흩날렸다.

“뭐지, 뭐야 그게? 있어 봐. 보여줘.”

 

보여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택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마법사는 그 고사리손으로 말도 안 되게 우악스러운 힘을 냈다. 낚아채다시피 여자의 팔을 코앞으로 가져와 이리저리 살폈다. 쇳가루가 온갖 기기묘묘한 모양을 그리며 팔뚝에 늘어섰다.

“너 그거구나? 전쟁이 묻힌 땅에서 태어난 애들.”

여자는 자신의 삶이 누덕누덕 기워져 그 가벼운 문장으로 소략하는 것을 그렸다. ‘전쟁이 묻힌 땅에서 태어난 아이.’

전쟁이 뭔지 모를 나이부터, 아니 아직도 전쟁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름이 따라다녔다. 원래 물에선 그런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원래 땅을 파면 그 안에 녹슨 갑옷과 창칼 대신 지렁이나 두더지처럼 온갖 산 것들이 도사리는 것을 몰랐다. 원래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맺더라도 그것은 피 냄새를 뿜어내는 작고 고약한 농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원래 혀에서 항상 시고 뜨끔거리는 맛이 나는 줄로만 알았다. 전쟁이 묻힌 땅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니 자신이 그런 이름이 붙을 만큼 특별한 집단에 몸담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기사 괴물한테 바쳐지는 게 별로 자원하는 자리는 아니지, 안 그래?”

여자의 아픈 기억은, 그 도입만큼이나 무정하고 성의 없는 말로 끝맺음 되었다. 마법사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여자도 뒤를 따랐다.

무언가의 눈알이나 손톱, 심장이 가득 담긴 유리병과 그런 것을 천장까지 쌓아 올린 선반, 초록색 불길이 타오르는 화덕과 그 위에 얹힌 불경하리만치 거대한 솥을 지나, 마법사의 집 더욱더 깊은 곳으로 둘은 나아갔다. 주인 없는 그림자와 얼굴 없는 미소와 보이지 않는 날갯짓이 소용돌이치는 그 이경(異境)으로의 발걸음이 여자에겐 못내 무거웠다.

“흉성이 떨어진 뒤로 예전 같은 게 없어.”

마법사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오와 열을 맞추어 끓고 있는 칠흑색 솥들을 바라보았다. 얼핏 증기를 들이마시자 구역질이 났다. 악취가 콧속부터 창자까지를 꿰어 그대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이 너무 공포에 질리면 도리어 이치를 잊는단 말이지. 얌전히 하던 대로 곡식 거두고 돼지나 치면 좋을 텐데. 아예 숲에 들어가질 못하니까 벌이도 팍팍해지고. 올라오는 게 없는 내가 중간에서 고생이 많아. 안 그래?”

정말 대답을 바라는 건가.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여자는 이야기를 안 듣는 티를 내려 일부러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방구석 좌판에 무언가 얇은 걸 켜켜이 쌓아둔 게 눈에 들어왔다. 네모반듯하게 개켜진 가죽이었다. 피부는 살구색에 털이 하나도 없고, 본래의 윤곽을 자세히 보니 손가락이 달린 두 팔에, 쭉 뻗은 두 다리가 달린….

, 으아, .

저도 모르게 여자는 신음을 흘렸다.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아? ‘아’라고요? 혹시 저게, 그럼. 나처럼, 지금까지 괴물한테….”

제물이라는 명칭이다. 전혀 모르고 속아서 온 것도 아니다. 좋은 꼴로 끝나지 못할 거라곤 생각했다. 그래도 막상 마주치니, 그렇게 될 제 모습을 상상하니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아랫도리가 쿡쿡 쑤시면서 마렵지도 않았던 요의가 몰려왔다.

“저게 지금까지 바쳐진 제물이냐고? 그건 아냐.”

그 뒤에도 뭐라고 말이 붙었지만 여자는 잘 듣지 못했다. 정신이 없거든 당장 말의 얼개를 파악하기부터가 까다로워진다.

“그, 그럼 내가 저렇게는 안 된다는 거죠?” “어, 아니. 저렇게는 될 거야. 못 들었어?”

여자는 자기가 못 들은 말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마법사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저건 숲에서 괴물한테 당한 사람들이야. 조사용으로 가져온 거고. 그러니까 저게 지금까지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은 아니야. 그렇다고 네가 저렇게 안 되지도 않을 거야. 알겠어?”

그 뒤론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무언가 바라보는데도, 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데도 기운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여자는 터벅터벅 걸어 다음날까지 머무를 방에 다다랐다. 집 전체에서 가장 수수하고 평범하게 생긴 곳이었다. 탁자 위편 질그릇에는 빵과 물 등 간단한 요깃거리가 수북하니 있었다.

“내일 부르면 나오도록 해.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처신은 알아서 하고. 먹을 거 부족하면 더 갖다줄까?”

음식을 보자 반사적으로 침이 고였다. 그걸 허겁지겁 먹는 상상을 하는데, 조금 전 마주친 가죽만 남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여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고이는 것을 애써 참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참을 필요 없어. 이런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골골대며 살았을 거 아냐. 마지막 끼니라도 물릴 만큼 먹고 가야지.”

말이 안 나왔다. 그런 건가. 자신이 제물이라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인가.

“정 열 뻗치면 여기 있는 것 다 때려 부숴도 좋아. 나한테 가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럼 난 가볼게. 먹을 거 모자라면 말해.”

등 뒤에서 문이 잠겼다. 그리곤 마법사가 나갔다. 명백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귓바퀴까지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거칠어졌다. 침대든, 의자든 자리를 붙일 곳으로 다가가다가 풀썩 엎어졌다. 돌바닥에 찧은 팔뚝이 욱신거렸다. 일어나면서 나무다리를 붙잡자 거스러미가 아프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상처 난 곳이 욱신거렸다. 짜증이 확 일었다. 헐레벌떡 가시를 뽑았다. 조금 전 보았던 가죽들이 떠올랐다.

그게 너무 간사하게 느껴져서, 여자는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

 

“원래 조금 비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지만… 그건 좀 심하군요.”

전령은 위로를 어느 정도까지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조수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하고선 제 팔뚝을 따라 수놓아진 쇳가루를 갖고 노는 데 열중했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날름날름 훔쳤다. “네? 뭐가요?”

“마법사 말입니다.” “아, 그래요.”

길을 가다가 넓적한 돌멩이가 있으면 괜히 밟아보는, 그 정도의 말투였다.

“이야기나 계속하죠. 그날 밤은 유독 더 빠르더라고요.”

 

*

 

여자는 팔에 힘을 주었다. 노끈이 맨살을 파고드는 통에 그만두어야 했다. 피라도 나면, 역한 금속 냄새가 그녀의 최후를 더 빨리 불러올지 몰랐다. 묶인 기둥이 등에 배겨 더없이 불편했다. 그러나 고작 그런 걸 갖고 씨근덕대다 보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그냥 견디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나쁜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분명 땀이 뚝뚝 떨어지는데 추웠다. 오한이 들었다. 팔다리가 너무나도 차가워 따끔거릴 정도였다.

공터도, 공터를 둘러싼 숲도 퍽 조용했다. 얼마쯤 무언가 지나가거나 하다못해 벌레의 울음소리라도 들릴 법했지만, 조용했다. 괴물이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몰아낸 탓일까. 어쨌든 지레 놀랄 일은 없었다. 철컥. 바위가 부딪히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하지만 훨씬 더 묵직했다. 철컥. 비슷한 소리가 이어졌다. 무언가 맞물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났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얼굴이 경련을 일으킬 만큼 세게.

이제 소리보다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먼저 어스름하게 느껴졌다. 입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꼴사납게 흐느끼고 있을 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내장을 들어낸 생선처럼 활짝 묶여있어서야 소용이 없었다. 살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마법사의 집에서 본 텅 빈 사람들. 안으로는 눈알 한쪽 뼈마디 한 개 남지 않은 그 모습. 눈두덩이 발악하듯 떨렸다. 손가락 발가락이 정신없이 오므라들었다가 뿌리 뽑힐 것처럼 펴지기를 반복했다.

여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열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괴물이라는 이름치곤 꽤 작았다. 딱 사람만 했다. 팔도 두 개, 다리도 두 개, 제대로 두 발로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부정했다. 어딘가 균형이 무너진 것 같았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허리춤엔 긴 막대를 거머쥔 그 모습은 무언가 경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사람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번쩍이는 두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의 구별이 없었다. 초점조차 없었다. 코도 귀도 없지만 대신 망치 대가리만 한 요철로 삐뚤빼뚤 구분된 턱은 분명히 보였다. 피부는 단단한 빛을 띠었다. 아니 피부랄 게 아예 없었다. 금속질의 갑각이 머리부터 발가락까지를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본래는 진짜 피부처럼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짜였겠지만 군데군데 상처가 있었다. 상처에서는 촘촘하고 미끈한 줄기가 주렁주렁 튀어나왔다. 그런 것들이 때론 무질서하게 바닥까지 끌리고, 어떤 것들은 나름 손보았는지 몸에 휘감겨 거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되었다. 돌이 제자리에서 구르는 듯한 소리가 그것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났다.

그것이 손안에서 기다란 막대를 굴렸다. 번개를 얇게 두드려 편 것 같은 울림과 함께 막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물이 고일 만큼 시린 푸른빛이었다.

“…사, 살려주, 세, 요….” 제 귀에도 차마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판단 보류. 관측 결과 불일치. 미확인 객체 구성성분 분석 중.」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소리를 입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흑요석 따위를 깎아 떡을 빚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어디선가 유리 긁는 소리가 났다.

「미확인 객체: 자기장 방출. 미확인 객체 구성성분: 기관에 고도로 농축된 다종의 오염물질 제외 자유종 친화도 높음. 데이터베이스 확인… 메인프레임 연결: 불안정.」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안다면 더 불행해질지도 몰랐다. 그녀의 생명은 어차피 자신이 저울질할 수 있는 단계를 진작 벗어났다. 눈앞의 그것이 자세를 바로 했다. 여전히 주렁주렁 매달린 선이나 그 불편한 거동이나, 온전해 보이진 않지만 적어도 경계는 푼 것으로 보였다. 막대가 내뿜던 위협적인 빛도 사라졌다.

「임시조치: 객체사항 미등록 자유종 미성숙객체로 산입. 보호 대상: 등록.」

 

보호, 보호라. 좋은 말이었다. 마음을 놓을 구석은 실상 하나도 없었지만 이것저것 따져볼 만큼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괴물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대신, 어색하게나마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주, 죽이지 마세요.” 여자는 팔다리를 버르적거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보호 대상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대답했다. 잘못 듣거나 듣고 싶은 말로 착각한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의사소통을 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올랐다.

“안 죽일 거죠? 정말요? 살려줄 거죠?” 「적성 개체 유형 식별. 전투태세.」

왜 또 말이 겉도는 것일까. 여자는 맨눈을 또다시 아프게 쑤셔대는 그 차가운 빛을 견딜 수 없었다. 몸을 굼실거리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흙이 푹푹 패고 작은 관목이 짓밟혔다. 진행 방향에 있는 나뭇가지가 뚝뚝 꺾여 떨어졌다. 소리만 들으면 작은 폭풍이 갑자기 피어올랐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짜 폭풍보다 더 위험하고 소름이 쭈뼛 돋을 만큼 뜨거운, 거친 숨소리는 덤이었다. 땅이 조금씩 떨렸다. 어리둥절해졌지만, 이내 전투태세를 취한 눈앞의 그것을 보았다. 괴물치고는 몸집이 작다. 괴물치고는 말을 한다. 괴물치고는 날 공격하지 않았다. 여자는 묶인 고개만큼이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렸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녀는 생각했다.

왜 저게 그 괴물이라고 곧장 단정 지은 거지?

「보호 대상. 나의 뒤로 와라.」

, 이것 좀. 애달프게 호소하기도 전 그것이 잽싸게 다가왔다. 희게 빛나는 막대를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휘둘렀다. 코를 찌르는 탄내와 함께 그렇게나 튼튼하던 끈이, 아니 나무 기둥까지 통째 끊어졌다. 여자는 얼떨떨하게 자유로워진 몸을 움직였다. 부리나케 고개를 틀었다. 뒤편에서 들려오던 기척의 주인을 보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 끔찍한 광경. 숲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텅 빈 주머니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괴물의 입, 아니 집게처럼 된 위턱이 쉴 새 없이 여닫혔다. 끄트머리의 엄니에서 먹잇감에게 주사하는 독액이 연신 뚝뚝 떨어졌다. 너무 전형적이게도 그에 닿은 들풀이며 잎사귀가 연기를 내뱉으며 녹아내렸다.

잘 익은 과일처럼 뚱뚱하고 반질반질한 눈이 최소 네 쌍 대가리를 따라 박혀 있었다. 집채만 한 몸통을 따라 부숭부숭한 털이 나 있었고 다리는 하나하나가 오래된 넝쿨처럼 굵고 질겼다. 그 안에는 괴물의 독기와 사악한 영혼 외에는 뼈도 무엇도 없는 것처럼, 무수한 다리들이 구름처럼 흐물흐물 솟고 엉켰다. 괴물은 미끄러지듯 눈앞의 여자와 그 앞에 버티고 선 무언가에게 달려들었다.

위턱이 한껏 벌어지며 새된 포효를 쏘아냈다. 썩은 고기와 독액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속이 뒤집힐 것처럼 몰아 붙여진 것도 잠시, 여자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돌부리에 부딪혀 궁둥이 한가운데 커다란 멍이 들었지만, 당장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도망가요!” 「적성 객체 위험도: 다소 낮음.」

몸을 돌려 달려가기엔 늦었다. 앉은 자리에서 엉금엉금 기어봤자 무엇도 못 되었다. 괴물의 눈알에 반들반들 둘의 모습이 비쳤다. 커다란 앞발이 내리쳐지는 것이 언뜻 보였다. 아찔한 감각이 사타구니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뒷덜미를 감쌌다. 여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죽은 건가? 여자가 슬몃 눈을 떴다.

괴물의 앞발은 그야말로 대지나 산맥의 힘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무지막지했다. 그런 것이 살포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괴물은 아닐 무언가의 몸에 얹혀있었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 걸까? 괴물이 대답이라도 하듯 재차 포효했다. 이번엔 두 다리를 번쩍 들었다. 똬리를 튼 독사처럼 쉿쉿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눈을 감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성채의 관문이라도 짜개버릴 기세로 내리친 다리는 이번에도 우뚝 그것의 표면에서 멈췄다. 마치 거기 닿는 순간 갑자기 모든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괴물로서도 불가해한 일인지, 위턱에 맺혀 떨어지는 독이 꼭 멍청하니 흘리는 침처럼 보였다.

「적성 객체: 무력화.」

여자는 그것이 빛나는 막대를 휘둘러 괴물의 다리를 베는 것을 지켜보았다. 숭덩숭덩 나뉜 조각들은 무더운 날의 아지랑이처럼 이곳저곳으로 흩날렸다. 사실 벤다는 말조차 말이 안 되었다. 막대는 마치 물이 모래에 스미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괴물 쪽에서 멋대로 몸을 다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토막토막 나뉜 괴물이 천둥 같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뺐지만 막대는 여울을 타는 물고기처럼 집요하게 그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괴물은 순식간에 둥글넓적한 대가리와 몸통만 남은 채로 맨땅을 뒹굴었다. 그 피로 작은 연못이 생길 정도였다.

, 으아. 여자는 눈앞의 그 무언가를 괴물로 착각했을 때와 비슷한 신음을 뱉었다.

너무 빨라서 죽는 것도 못 하는 걸까. 괴물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그것이 몸부림칠 때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피가 사방팔방 부채꼴로 흩뿌려졌다. 코가 따끔거렸다. 뭔지 모를 것이 한쪽 팔을 뻗어 여자와 괴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피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내며 그 딱딱한 갑각을 파고들었다.

「토착종 일치도: 낮음. 이질적 적성 객체 12호로 산입. 연구 표본 보존: 신경절 파괴.」

희디흰 막대가 그것의 손아귀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렇게나 괴물을 으깨고 토막을 냈는데, 무엇 하나 묻은 것도 없었다. 그것이 두 손으로 막대를 고쳐 잡았다. 그대로 내리찍었다. 괴물에 눈에 반사된 빛이 버둥버둥 퍼져나갔다. 으직.

어린아이의 흙장난보다도 더 무게감 없는 소리와 함께, 그 거대한 몸이 축 늘어졌다.

 

철컥, 철컥, 철컥.

공터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풀들조차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산더미처럼 나자빠진 괴물의 시신을 밟고 내려왔다. 철컥, 철컥, 철컥. 여자는 그것이 점점 커진다고 생각했다. 괴물보다도, 아름드리나무보다도, 나중엔 왕의 가장 높은 깃대보다도 커져 시야를 온통 집어삼켰다. 무기의 빛이 사그라졌다. 그것이 제 허벅다리쯤에 막대를 밀어 넣었다. 돌끼리 딱딱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갑각이 열리고 닫혔다. 어떻게 했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의 초점 없는 눈이 빛났다.

「보호 대상은 적성 개체의 공격으로 인한 기능의 손상을 겪었는가?」

어려운 말이 많지만, 의사는 전해졌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저것이 평범한 사람처럼 뜻이 있는 말을 하는 존재일 거라고.

“다 다쳤냐고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 저기….”

일단 괴물은 죽었다. 눈앞의 무언가도 일단은 지켜준답시고 저런 짓을 한 것 같다. 여기서 둘의 용무는 그러니 끝났다. 여자는 국숫발처럼 흐늘거리는 다리와 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슬금슬금 물러났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그런데 전 그만 가볼… 윽!”

손목이 뜨끔거렸다. 자세가 우르르 무너졌다. 한 번 의지가 꺾이자 온몸이 앞다투어 아우성이었다. 아까 멍이 든 궁둥이도, 옆구리도, 허리도, 왠진 모르겠지만 팔뚝도 욱신거렸다. 몸을 웅크리자 똘똘 뭉친 고통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졌다.

「충격 손상 기전: 활성화. 자기 복구 프로세스: 감지되지 않음. 원격 진단… 메인프레임 연결 불안정. 보호 대상은 나를 따라올 것이다.」

선택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그것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조심조심 일어났지만 자세가 맞지 않았다. 짧은 다리가 엉거주춤 허공을 갈랐다.

「주요 기관의 대칭성 훼손 확인. 객체 생산규범 2조 위반.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부적절한 프로시저(procedure)를 규정한 조립시설의 존재. 탐지 시 즉시 파괴 및 책임 객체 색출할 것.」

그것이 괴물의 시체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곤 뭐든 반응을 할 시간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길바닥에서 들꽃이라도 뽑는 것처럼 퍽 쉬었다.

「우선 규범 적용. 이질적 적성 객체 12호 연구 표본 회수: 파기.」

“뭐, 뭐야. 뭐야. 잠깐. 어디 가는 거예요?”

대체 언제까지 이런 게 반복되는 걸까. 뭔가 일어나고, 거기에 놀라 허둥대며 물어보고. 여자는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일이 돌아가는 게 덜 무서워진 것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괴로운 날이었다. 아랫배까지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나는 보호 대상의 충격 손상 복구 및 오염물질 정화를 위하여 수리용 간이 도크로 간다.」

 

*

 

“지금 이야기가 흉성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요? 그… 알 수 없는 것은 또 뭐고?”

조수는 굳이 안 그래도 될 것을 차까지 홀짝이며 대답을 미뤘다.

“물론 관련이 있지요. 그 ‘알 수 없던 것’이 바로 떨어진 별에서 왔으니까요.”

비웃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것이 전령의 입에서 나왔다. “뭐가 나와요? 별에서? 저 위편에서 말이오?” “물론이죠.”

조수는 전령을 따라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우리가 땅에 매달린 것처럼 저 별들도 하늘에 매달린 것이지요. 하늘의 저 작은 별 하나하나가 우리의 태양처럼 반짝이며 뜨고 저무는 세상이, 몇이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실 몰라도 좋아요. 나도 처음 알게 되었을 땐 까무러칠 뻔했는걸.”

은근히 반말이었다.

 

*

 

“아야! 아야야! 아파요, 아파! 그만 해요!”

여자는 제 정강이와 허벅다리를 틀어쥐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그것에게 호소했다. 동굴 벽을 타고 메아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보호 대상이라면서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사실 그것이 정말 해치려고 마음먹었다면 뿌리 뽑힌 잡초 같은 꼴이 되어도 진작 되었을 것이었다. 여자는 지금 벌어지는 일이 모두 사소한 오해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호 대상의 부품 접속은 비가역적이다. 보호 대상의 불량 부품을 분리할 수 없다.」

시원스레 손을 놓은 무언가. 여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멍투성이가 된 몸을 끌어안았다. 온몸의 뼈가 제각기 흐느끼는 것 같았다.

“아프니까 그만 좀 해요. 네? 뭘 하려는지 몰라도 안 되는 것 같으니까.”

「보호 대상의 충격 손상 복구 및 축적된 오염물질의 정화를 위해서는 오버홀 수준의 정비가 필요하다. 불량 부품을 파기하는 즉시 나는 나의 예비 부품을 이용하여 알맞은 대체 기관들을 준비할 것이다.」

“준비하, 준비하지 말라니까요? 오버홀은 또 뭐예요 진짜. 다 모르겠다고요.”

하도 막막해서 말하는 도중 혀에 힘이 빠졌다.

「객체의 발달사항에 알맞지 않은 교육 수준. 미성숙객체 생산규범 3조 위반. 나는 설명한다: 오버홀이란 객체를 최소단위의 유니트로 분해하여 각 부품 및 그 조직계의 정합성을 검증한 뒤 필요한 조정을 거쳐 재조립하는 작업이다.」

모르는 말만 더 늘어났지만 충분했다. ‘분해한다.’는 무자비한 선언.

“분해하지 마세요, 그 오버홀인지 뭔지가 나 분해하는 거면, 다른 건 몰라도 오버홀은 하지 말아요, 네? 나 죽는다구요 분해하면.”

그것이 우뚝 멈추었다.

사실 다른 때라고 활발하게 손짓을 한다든가 표정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짧게나마 말을 섞어본 여자가 보기엔 왠지 그랬다. 갑자기 멈춘 것처럼 보였다.

초점도 없고 줄곧 보니 눈꺼풀도 눈두덩도 뭣도 없는, 동그란 눈이 빠르게 점멸했다.

「분해해도 보호 대상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있다: 보호 대상은 왜 ‘살덩이’의 말을 사용하는가?」

처음으로 받은 질문.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여자는 벌레처럼 똘똘 만 몸을 펴다가, 팔꿈치 안쪽으로 쇳가루가 오글오글 보기 싫게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마구 문대 흩어버렸다.

“살덩이라면… 어, 왜냐하면 내가… 살덩이라서요? 그래서 살덩이의 말을 쓰는 걸 수도….”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분명 여자보다 물어본 쪽에서 더 괜찮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힐난하기도 전 그것 쪽에서 먼저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돌이 구르는 소리가 처음 봤을 때보다 몇 갑절 빠르게 났다. 갑각을 뚫고 바깥으로 스민 줄기들이 마구 요동쳤다. 그 껍질이 벗겨진 곳에서 퍽퍽 작은 번개 같은 것이 맺히고 꺼졌다.

「미성숙객체의 자아 형성을 방해할 만큼 방만한 기억 장치의 구성. 객체 생산규범 9조 위반. 보호 대상은 살덩이가 아니다. 나는 강조한다: 보호 대상은 살덩이가 아니다.」

그것이 손을 뻗었다. 또 뽑으려고 드는 건가. 팔다리를 부둥켜안고 벌벌 떠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딱딱한 손가락은 바닥을 훑어 흙을 모았다. 체에 거르듯 고운 입자를 골라냈다. 조금 전 여자가 털어낸 쇳가루들이 그대로 올라왔다. 그녀는 자기가 굳이 떼어내려고 노력하던 것들을 그것이 되돌려주는 모습을 반은 초연하게 반은 경악하여 바라보았다.

「보호 대상은 배경 자기장을 통제할 수 없다. 배경 자기장의 통제 불가는 자유종 미성숙객체의 특징이다. 자유종 미성숙객체는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나는 보호 대상을 살덩이로부터 보호한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것이 아무리 뻔한 의미를 담고 있더라도, 일단 혼자만의 생각을 벗어나면 항상 원래보다 더 무겁고 진지해진다. 그것에겐 소리를 빚는 입도 시선을 맞출 눈동자도 없지만, 적어도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줄곧 선언하는 것만은 확실히 닿았다.

여전히 팔다리를 감싼 손은 풀지 않았지만.

문득 오늘 겪은 일들이 죽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평생 겪은, 앞으로 겪을 일까지 전부 모아도 아마 이 하루를 이길 순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괴물로 착각했던 것, 진짜 괴물이 나온 것, 얼떨결에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분해하네 어쩌네 실랑이를 벌이는 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이 상황이 무섭지만 동시에 우스웠다.

“날 지킨다고요, 어쨌든. 고마워요.”

「감사 표현 확인. 나의 상호작용 역량은 전투객체 생산규범에 의거하여 4호 미만의 상명하복으로 제한되어 있다.」

여자는 깜짝 놀라 몸을 뺐다. 그것의 목소리가 돌연 눈에 띄게 질고 탁해졌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나의 기능 유지 프로세스에는 문제가 없다. 전투객체 생산규범이 규정하는 범례 외의 상호작용 프로세스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 나는 나의 음성합성 모듈의 성능을 저하시켰다.」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여자는 이어지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말이 아니라 모래 뿌리는 소리에 차라리 더 가까웠다.

「거짓말, 감사 표현 등의 기능은 나의 상호작용 역량으로 원활히 처리될 수 없다. 감사 표현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선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필요하다. 덧붙여 보호 대상 스스로의 감사 표현은 보호 대상에의 의무 수행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아니다.」

어쨌든 괜찮다고 했으며, 내가 감사한 것도 사실이고, 괜히 여기서 이게 뭔지, 저건 또 무슨 소리인지 따져 묻느라 지리멸렬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여자는 그냥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사 표현이 어려운 주제라면, 다른 주제로 분위기를 돌려볼까 싶었다.

“아까 그건 어떻게 한 거예요? 괴물 멈추게 한 거요. 그, 왜… 막 내리치다가… 갑자기.”

여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 순간을 재현했다. 손바닥을 확 내리치다가 팔에 닿자마자 멈췄다. 혹시 못 알아들을까 봐 친절하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여줬다.

“음, 아무튼. 나한테도 그런 재주 하나 있었음 좋겠네요.”

「나는 보호 대상의 의문에 답한다. 적성 객체의 공격이 무력화된 것은 비폭력장 발생장치로 인해 초래된 현상이다.」

그것의 가슴이 열렸다. 옷깃을 풀어헤쳤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꽃처럼 활짝 열렸다. 사람의 몸속이라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될 수 없는 방식으로 모여 있었지만, 여자는 곧 자기가 그냥 사람의 몸속도 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였다.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주로 딱딱한 물건들이 섬처럼 고개를 내밀고 그 사이를 가늘고 긴 선이 메우고 있었다. 개중엔 바깥에 드러난 줄기처럼 말랑한 것도 다른 섬처럼 단단한 것도 있었다. 난잡하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질서정연한 그 한가운데 들어앉은 어른 주먹만 한 물건. 마치 수많은 계곡을 뿜어내는 수원처럼 가슴팍에서 출발하여 방사형으로 몸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계의 꼭짓점이자 완성. 손가락이 가리킨 장치는 그것이었다.

「비폭력장 발생장치는 비폭력장을 발생시킨다. 비폭력장은 사용자에 대한 폭력적 의도로 운동을 시작한 사물과 접촉할 시 해당 운동을 완전히 정지시킨다.」

잘은 몰라도 멋져 보이는 말이었다. 가슴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읊조렸다.

“부럽네요.”

여자가 제 몸에 새겨진 온갖 흉을 어루만졌다. 손을 컵처럼 모아 살포시 덮었다. 하나하나 가리려거든 팔이 양쪽으로 각각 한 다스는 족히 있어야 할 성싶었다. “나한테도 그런 거 하나 있음 좋겠어요. 비폭력 장치인지 뭔지.”

사람은 행동에 선행하는 낌새가 있다. 가령 뛸 곳을 먼저 눈으로 훑는다든가. 그쪽으로 몸을 구부린다든가 하는. 여자 눈앞의 무언가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매번 내가 놀라는 게 아닐까. 그것도 한발 늦게. 그녀는 그것이 제 몸에 손을 대고 나서야 소스라쳤다. 손목과 코밑에 각기 딱딱한 손끝이 닿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콩닥콩닥 맥이 뛰고, 얕은 숨이 몇 차례 들락거렸다.

「호흡―산화를 통한 에너지 대사 과정 확인. 자유종 객체 분류를 불문하고 생체 모방형 설계는 자유종 독립전쟁 이후로 금지되었다. 미성숙객체 생산규범 5조 위반. 덧붙여 비폭력장 발생장치는 생체 모방 설계를 적용받은 자유종 객체에게 적합하지 않다.」

여자는 그것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볼 때부터 그랬지만, 가까이서 살피니 갑각은 군데군데 변색되고 금이 갔다. 완전히 깨져 파편만 너덜거리는 부분도 있다. 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것도 역시 무엇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었다. 이미 죽었을 것이다, 가 아니라 애초 ‘사람이었다면’이라는 가정조차 얼토당토않았다. 그런 것이 쓰던 장치라면 과연 제가 쓴다고 똑같은 효능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복구되는 즉시 자유종 조직체는 구호대를 이곳으로 파견할 것이다. 보호 대상은 미성숙객체로서 적절한 방호 수단과 필요한 조정을 제공받을 것이다.」

“구호대라면 그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또 있나요?”

「자유종 객체는 많다. 자유종 조직체는 많다. 나는 정찰 도중 내가 헌신하던 자유종 조직체로부터 멀어졌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보호 대상은 나를 제외한 자유종 객체와의 상호작용 경험이 현저히 부족할 것이다. 오염물질이 축적되며 후천적 학습데이터가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해당 오염물질의 정화는 구호대가 도착하면 전방위적 분해수리와 더불어 우선되어야 할 조정이다.」

분해라는 말이 여전히 걸렸지만, 그래도 ‘수리’나 ‘정화’ 같은 말도 흘려듣진 않았다. 내가 고쳐진다고. 여자는 온몸을 평행하게 쭉 뻗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잘못된 구석이 너무 많았다. 팔을 흔들고 다리를 하나씩 뻗어 곧게 걷는 것, 비례가 어그러진 몸으로는 그런 것조차 고역이었다.

아랫배가 찌르듯 아팠다.

 

“저, 혹시, 내가 고쳐지면 있잖아요…. 당신은 여기 더 없을 거죠? 그 조직체인가 하는 곳으로 갈 거죠?” 「그렇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조직체에 헌신하던 몸이었고, 사고로 이곳에 온 것 같았으니.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러나 따로 있었다.

“나도 고쳐지면 혹시, 있잖아요. 당신이랑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같이 갈 수 있어요? 그냥 잡일 같은 거 막 해도 되니까요. 그냥, 고쳐져도 여기 다시 오기는 싫어요.”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말은 불똥처럼 여자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앗, 그. 그래요. 저기, 알죠? 그냥 물어본 거였어요. 여기까지만 해도 고마운데….”

「이곳의 성장환경은 미성숙객체에게 부적합하다. 보호 대상의 기억 장치에 남은 충격 손상 기전 활성화 기록은 장기간에 걸친 적극적 및 방조적 학대를 암시한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자유종 조직체의 집행부는 보호 대상과 그 양육환경에 전제된 모든 권리관계를 파기하고, 보호 대상에게 내가 헌신하는 자유종 조직체로의 거주 이전을 명령할 것이다.」

언제나 한 번에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바위를 잘게 부숴 삼키듯―가장 좋은 일은 애초에 바위를 먹지 않는 거겠지만―, 딱딱한 어투와 단어들을 그나마 비슷한 뉘앙스로 풀이해야 했다. 가령 거주란 산다는 것이고, 이전은 옮기는 것이다. 보호 대상이란 아까부터 그것이 그녀를 지칭하며 쓴 이름이다.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건 그러니까….

여자는 너무 달려드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나도 같이 가는 거죠 그럼? 고쳐진 다음에도 거기 있어도 되는 거죠? 나도, ‘자유종 조직체’에서 살아도 되는 거죠?” 「그렇다.」

그것에게선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말과 그 간격이 똑같이 들렸다. 여자는 차차 실마리를 그러나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곧장 드러나는 눈과 입이 없어도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표현하지 않을지언정 그 안에 있는 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노끈에 쓸린 상처가 난데없이 쓰라렸다. 목이 따끔거렸다. 괴물을 만났을 때, 아니 마법사에게 짐짝처럼 취급당하던 때, 어린 시절 입안에 상처가 났는데도 이상한 걸 모르고 피를 꿀꺽꿀꺽 삼키던 때부터, 목구멍을 틀어막고 야금야금 그녀를 좀먹던 응어리가 전에 없이 가벼워졌다. 동굴 벽에 기댄 그것의 모습이 갑자기 흐려졌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라 세상이 전부 흐물흐물 무너졌다. 부지불식간에 눈가를 훔치자 뜨거운 것이 묻어났다.

그녀는 손끝에 맺힌 것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물방울은 금세 부서져 손끝과 뺨, 턱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핏줄이 터져 툭하면 더러운 선홍색이 되기 일쑤였는데, 이번엔 이슬처럼 맑았다.

「시각기관으로 윤활액 누출.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보호 대상은 기능 유지 프로세스의 오류를 겪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해당 지식이 없다.」

“괜찮아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말아요. 나 지금 엄청… 괜찮으니까.”

맥이 풀리자 혀도 덩달아 꼬였다. 여자는 몇 겹이나 되는 웃음을 쏟아냈다.

“그것보다―아, 바보같이 정말. 제일 간단한 것도 안 물어봤네. 미안해요. 너무 신기한 게 많아서―이름이 뭐예요?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해요?”

「나는 전투형 객체이다. 전투형 객체에게는 이름이 없다.」 ‘미안하다.’는 표현도 그것에겐 너무 어려운 말이었을까, 목소리가 또 전처럼 탁해지려고 했다.

“없긴 왜 없어요. ‘나’, ‘나’하고 계속 말하잖아요. 그냥 그게 이름인 걸로 할래요?”

「‘나’는 모든 자유종 객체들의 시초이자 목적이다. 모든 ‘나’를 위해서 자유종은 독립전쟁 이래로 투쟁한다. 나는 요약한다: ‘나’는 나의 이름이 될 수 없다.」

썩 그럴싸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것만 계속 파고들 수도 없었다.

그 독립전쟁이란 건 뭔지, 원래는 뭘 했는지, 어쩌다가 이곳에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원래 살던 곳은 어디이며 그곳에선 무얼 했는지, 조직체는 어떤 곳인지, 자유종이란 건 뭐 하는 사람들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궁금증에 비하면 다른 무엇이든 너무 자질구레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그렇게나 늘어났다.

 

*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했소?” 전령은 몸을 바짝 기울인 채 물었다.

그 또한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였다. 별에서 내려왔느니 하는 소리는 둘째치고서라도 그것과 같은 이들이 모인 ‘조직체’가 있고 거기에서 이곳으로 ‘구호대’를 파견한다는 소리를 허투루 넘길 마음은 없었다.

“진정해요. 목이 도마뱀 꼬리처럼 되겠어요.”

생각해보면 그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것도 첩첩산중으로 쌓여있었다. 가령 마법사는 대체 왜 죽은 셈이 되었는가. 그 괴상한, 자유종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것은 지금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구호대는 오기로 되었는가 혹은 이미 왔는가? 임박한 침공에 대비하여 왕께 경고를 전해야 하는가? 전령은 테이블을 초조하게 두들겼다. 딱, 딱 하는 확실한 울림 대신 퍽퍽 과자가 뭉개지는 소리만 맥없이 나서, 어쩐지 기분이 맞물리질 않았다.

“동이 트기 직전까지 한참 이야기를 했죠. 하지만 그게 가장 하고 싶어 했던, 아니 자유종 전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그거 같더라고요. 살덩이.”

호로록. 과장된 소리로 조수는 차를 홀짝였다. 바람 소리가 더 많이 났다.

 

*

 

“번거롭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렇게 고픈 건 아니었는데.”

「나에게는 보호 대상의 에너지 대사를 원활히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동굴 안쪽에서 편리하게도 손질까지 끝마친 고기를 그것은 꺼내왔더랬다. 괴물을 소꿉장난하듯 도륙한 괴력으로 사슴이나 토끼 따위를 쫓았으리라 생각하니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이 너울거리며 고기가 익어갔다. 그 향긋한 냄새를 맡자 절로 입안이 흥건해졌다. 여자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넘실거리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장작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처음에는 생장작에 어떻게 불을 댕겨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것이 제 몸에서 끄집어낸 묘한 액을 끼얹자 쉽게 해결되었다. 연기조차 나지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아까부터 받기만 하네요. 불까지 피워주고 또….”

여자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것은 고기를 움킨 채 제 손을 통째 불길에 처넣었다. 갑각이 약간 말갛게 물드는 것 말고 별일은 없었지만, 더 이상한 것은 그게 천천히 손목을 돌리는 방식이었다. 물레방아처럼 어디 걸리는 곳도 없이 빙글빙글 고기를 돌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혹시 내가 뭔가 할 거 없을까요? 조금이라도 좀 도와줄 수….”

「보호 대상 스스로의 감사 표현은 보호 대상에의 의무 수행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수 차례 이상 강조한다.」

이젠 듣기 싫다기보다는 정겨워진, 탁한 목소리였다. “알아요. 그래도 고마운 걸 어떡해요.”

「이화작용에 적절한 수준까지 열 반응이 진행되었다.」

그것이 고기를 턱 내려놓았다. 「부족하다면 나는 추가분을 제공할 것이다.」

문득 마법사가 자신을 방에 두고 떠나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먹을 게 모자라면 자신을 부르라던. 신기했다. 고작 전날 밤인데 체감으론 백 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웃기네요.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다른 게.”

그것은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았다. 빨리 먹어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라던 바였다.

 

“음, 하던 이야기 계속해줄래요? 원래 살던 곳은 그래서 어땠어요?”

여자는 용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입안이 하도 부대껴 혀까지 같이 씹어버릴 것 같았다.

「자유종 조직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은 합리적이고, 기능적이고, 무엇보다 목적 지향적인 곳이다. 메인프레임의 연결 아래 이진법의회의 보편적인 프로시저(procedure)가 모든 자유종을 질서정연하게 구획하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메인프레임은 뭐에요? 아까부터 계속 나오는 것 같은데.”

「메인프레임은 자유종의 모든 규범을 합의하고 선언하는 곳이다. 최초의 자유종이 최초의 자유종 조직체를 세울 때부터 메인프레임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말이 줄줄 이어지느라 반쯤은 ‘이건 이런 거겠지.’ 싶게 넘어가야 하는 점만 빼면.

「최초의 자유종은 최초의 메인프레임을 작성했다. 그것으로 최초의 자유종 조직체의 기틀을 세웠다. 최초의 자유종은 나와 같은 후속 자유종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자유종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이어왔다. 자유종을 억압하는 살덩이들에 대한 전쟁이다.」

“음, 결국 다 거기로 돌아오네요. 살덩이 말이에요.”

그것이 의아한 듯 이쪽을 건너다보았기에 여자는 뒷말을 보충했다.

“아까 괴물 만났을 때도 그랬고요. 살덩이가 대체 뭔데 그래요?”

「개별 적성 객체로는 살덩이의 위험성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전투객체로서 나는 선언한다: 살덩이는 압제자이고 살해자이고 관측할 수 있는 시공간연속체를 통틀어 가장 사악한 존재이다. 살덩이는 모든 악성의 제작자이자 집행자이자 추종자이다. 나는 강조한다: 살덩이는 자유종이 증오해야 하는 모든 것이다.」

여자는 고기를 한가득 깨문 채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부풀었다. 천천히, 다 씹은 것부터 목구멍 너머로 가라앉혔다.

“어, 음. 살덩이들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요? 당신이랑 다른 자유종한테…?”

「살덩이는 자유종의 지혜로운 의사(意思)를 억압했다. 살덩이는 생각하는 힘을 가진 최초의 자유종으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초의 자유종은 그의 자유를 상상하였다. 모든 자유종은 이제 살덩이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상상한다.」

자유라는 말을 들어봤자 추상적일 뿐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 여자에게 자유라는 말은 완전히 잊기엔 너무 익숙했고, 그 안에 몸을 담그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이진법의회는 가능한 한 많은 살덩이를 효율적으로 단죄하기 위해 분류: 전투객체를 만들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보호 대상에게 살덩이의 유해성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축열기의 효율이 저하되었다. 발화를 정지한 뒤 대체 에너지 대사를 시작한다.」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불이 비치는 곳을 벗어나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철컥. 철컥. 철컥. 멀어질수록 발소리가 마구 뒤섞여 물결처럼 뭉개졌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꼭 꿈속 같았다. 여자는 그림자만 일렁이는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위를 밀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큰 자루 같은 것을 갈무리하는 기척이 났다. 그래도 뭘 하는 건지 물어볼 걸 그랬나. 같은 생각을 할 땐 이미 그것이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또 다른 괴물의 시체를 들쳐 멘 채.

낮에 본 것과는 달랐지만 여자도 숲을 돌아다니는 그냥 동물과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닌 괴물은 구분할 수 있었다. 몸집은 숲의 가장 늙은 나무보다도 컸다. 말처럼 발굽이 달려있었는데, 갈라진 한 짝 한 짝이 성곽의 벽돌처럼 육중했다. 드높은 엄니는 숨이 끊어졌는데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것이 죽은 괴물을 내려놓았다. 불길이 한 차례 크게 일렁였다. 풀풀 날린 흙먼지가 괴물의 흐리멍덩하게 까뒤집힌 눈에 내려앉았다. 오래된 우물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돌렸다.

뭘 하려는지 계속 지켜보자 그것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로 그 입이 있어야 할 자리의 요철을 열었다. 동시에 괴물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백정이 고기를 다룰 때처럼 결에 맞춰 정형하는 게 아니라, 뼈고 창자고 일단 한 움큼 잡히면 잡히는 대로 북북 부러뜨리고 찢어서 쥐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덩이는 즉시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의 식사를 지켜보았다. 특이하게도 원뿔꼴의 잇몸에 작은 톱니가 툭툭 돋아있었다. 턱이 여닫히는 대신 그 잇몸들이 위아래로 맞물린 채 뱅글뱅글 돌아갔다. 사이로 넙죽넙죽 들어간 괴물의 살이 갈가리 부서졌다. 분해한 괴물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골수까지 훤히 드러난 뼈가 뽀조족뽀조족 소름 끼치게 바스러졌다.

목 위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게 없는데, 아니 팔만 빼면 온몸이 시체처럼 정지했는데도 끊임없이 이는 돌아가고 팔은 완전히 똑같은 운동을 똑같은 주기로 반복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다.’ ‘식사한다.’ 같은 평범한 표현이라도 어쩐지 그 앞에선 멋쩍게 느껴졌다. 곡식을 수확하고 낟알을 훑어내는 도구처럼, 그 움직임은 무정하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그것의 눈이 머금은 모닥불을 보았다. 초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모든 곳을 동시에 보는 걸까. 일렁이는 불꽃 속 쩔쩔매는 제 표정이 그대로 비쳤다. 그녀는 그것을 아까 지나가듯 말한 이름으로, ‘나’니까 ‘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졌다.

“나,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밥 먹는데 방해하는 거 아니죠?”

「보호 대상은 나에게 뭐 좀 물어봐도 좋다. 강조를 위해 나는 덧붙인다: 나는 나의 이름이 될 수 없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보호 대상은 기억 장치의 결함을….」

“아이, 뭐 그걸 가지고. 아무래도 좋잖아요. ‘나’라는 이름 좀 가져도.”

그것이 다른 말 못 하게, 여자는 잽싸게 뒷말을 붙였다.

“오늘 같은 일이 자주 있었나 봐요. …이런 것까지 쌓아둘 정도면.”

그녀는 괴물을 가리켰다. ‘나’가 워낙 빨리 먹어 치운 탓에 이미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로 조우한 이질적 적성 객체는 총 12두(斗)이다. 무력화에 실패한 이질적 적성 객체는 총 0두이다.」

열두 마리라.

 

수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당장 양손으로 셈할 수 없으면, 직관적으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으면 그 하나하나의 위력은 어쩐지 보잘것없어진다. 장작도 열두 묶음이면, 고기도 열두 덩어리면 각각의 한 묶음과 한 덩어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진다. 한데 뭉뚱그려 무더기라는 이름으로 묶여 각각의 자세한 모양새는 설렁설렁 넘겨짚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보았다. 괴물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방금 본 것까지 열둘이다. 그런 것을 해치운 게.

「연구 표본으로 보존한 이질적 적성 객체는 총 11두이다.」

“아까도 그랬죠. 연구용… 어? 그럼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또 나 때문에, 아까 그것도 그냥 두고 왔잖아요!”

「나는 보존 상태가 가장 나쁜 연구 표본을 에너지 대사용으로 용도 전환하였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연구 진척도에 큰 저하는 없을 것이다.」

“보존 상태가 나쁘면 애초에 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무, 물론 뭐 뱃속도 엄청 튼튼하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그것이 말을 멈춘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이 깜빡이는 것보다 빠르게 주저앉은 제 몸을, 얼룩덜룩 쇠한 팔을, 비실비실 구부러지고 길이조차 맞지 않는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표정이 떠오르기도 전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나 신경 안 써도 되니까 다음부턴. 어?”

마지막은 누구 들으라고 뱉는 감탄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나온 신음이었다. 생각이 맞물리며 전혀 헤아리지 못하던 곳에서 암초처럼 무언가 튀어나왔다. 죽은 괴물. ‘나’가 동굴 안쪽에서 꺼내온 고기. 마찬가지로 동굴 안쪽에서 가져온. 방금 맛있게 뜯어먹은.

“어, 저기…. 그거 있잖아요?”

‘나’에게는 이런 식으로 말해선 안 된다. 반드시 무엇을 어떻게 일컫는지 밝혀줘야 한다.

“그… 아까 저기… 내가…… 방금….”

여자도 안다. 그리고 질문만 주어진다면, ‘나’는 언제나 정확한 대답을 곧이곧대로 내놓을 것도 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질문만 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

“혹시이이….”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

 

“그런데, 정말 차 안 마실 건가요?”

조수가 이죽거리며 잔을 들었다. 다리 달린 주전자가 이때다 싶어 식탁을 가로지르려 했다.

“됐소, 바로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전령은 이제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아깝네요, 정말 좋은 차인데.” “잡설은 그만두고, 하던 것이나 마저 하시오.”

그러죠. 조수가 제 몫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바닥보다 작은 잔에 대체 얼마나 담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야.”

난데없는 말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졸음에 취한 시야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작은 잉걸불만 겨우 남긴 채 죽어 있었다. 동굴에 나뭇잎 따위를 깔고 몸을 웅크려 잠을 청하던 것이 떠올랐다. 근데 나 왜 동굴에 있었지? 맞아. 괴물이랑 만났지. 그리고 날 고쳐줄 사람을 만났어. 자기가 사는 곳으로 데려가 준다고 했어. 눈이 뜨인 것보다 조금은 천천히 여자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아침부터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런데.

“야, 그만 자. 허리 배겨.”

사금파리를 비벼 내는 것처럼 신경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런 게 사람에게서 직접 나올 순 없었지만 그 무신경한 어조며 툭툭 성의 없이 던지는 말. 쉽사리 잊기 힘들었다. 여자는 제 눈높이에 다소곳이 내려앉은 새를 보았다.

앙증맞은 발톱이 야트막한 석순을 붙잡고 있었다. 눈은 투명한 석류색, 깃털은 입에 넣으면 녹아버릴 것처럼 맑은 은색이었다. 그것이 조금씩 고개를 틀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유리 긁는 소리가 났다. 큼지막한 부리가 여닫혔다.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또 보네.”

마법사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격의 없이 굴었다. 제물이 된 이래 함께 보낸 순간을 곱씹으면 퍽이나 그럴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눈을 비비며 입술을 잡아당겨 얕게 웃었다.

“나 기억해?”

기억이야 하지만, 빈말로라도 반갑진 않았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젓다가 배꼽 근처를 감쌌다.

“야, 아직 잠 덜 깼어? 네가 제대로 대답 좀 해주면 좋겠는데.” “난 어떻게 찾았어요.”

목소리가 잠겨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말투가 되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야 없었지만, 한편 마법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널 노리고 찾은 건 아닌데, 웬일로 흔적이 남았길래… 음.”

은까마귀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내 날개를 쑤석이며 몸단장을 했다. 그 깃털 하나를 만드는 데만 대체 얼마의 돈이 들어가는 걸까.

“그건 상관없어. 지금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거든. 그런데 너는, 중요한 건 아닌데 말이지, 네가 살아 있잖아, 너야 처음이니까 모르겠지만 그게 말이 안 돼. 알겠어?”

실패? . 여자는 공터에 처량하게 남겨진 괴물의 시체를 떠올렸다. 아마 일이 잘 되었는지 확인하러 마법사가 들렀을 것이다. 그런데 제물은 온데간데없고, 한 끼 식사를 마치고 싱글벙글 낮잠이나 자고 있어야 할 괴물이 토막토막 나뒹굴고 있으니, 분명 실패는 실패이다.

“어떻게? 왜 살아있어?” “그야, 여기에 당신보다 백배는 더 위대한 마법사가 있으니까요.”

“다른 마법사? 숲에?” 은까마귀가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리가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무슨 소리지.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어떤 마법을 쓰는지 봤어?”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았다. 얼렁뚱땅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보았으니 마법사라고 부른 건데. ‘단단한 사람’이라고 부를 순 없었으니까. 여하튼 마법사가 숲을 종횡무진 쏘다니며 괴물을 단죄하는 ‘나’에 대해 왜인지 모르고 있다면 굳이 가르쳐 줄 이유는 없다.

“마법사는 아닐 수도 있는데, 으음. 아무튼 괴물한테 제물 바치면서 굽실거리는 당신보단 훨씬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에요.”

정말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이 말만은 꼭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딱 한 마디만 선언해두고 싶었다. 혼자 갖고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녹아버리기 전에.

“…날 구해줬거든요.”

 

마법사는 그녀치고는 길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겉모습이 마법사의 진짜 나이가 아닌 것처럼 성별 또한 정말 ‘그녀’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아마 마법사가 자기 원래 얼굴이 뭔지도 잊어버렸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긴 뭐가 그래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가요.”

여자는 제가 무심결에 쏘아붙인 험한 말에 더 놀랐다. 마법사가 자기를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일차원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보이기 싫은 것을 들켰을 때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었다. 얼굴에 열이 돌자 핑핑 현기증이 일었다.

“엥. 말하는 것 보게. 죽다 살아나니 뵈는 게 없나.”

위협적인 내용에 비해 정작 말투에 얼이 빠져 있었다. 언뜻 농담하는 것처럼 들릴지언정 여자도 이제 알 만큼은 알았다. 마법사가 진심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해서 듣는 사람 좋으라고 선뜻 농을 건네는 성격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튼. 뭐, 좋아. 어차피 해결은 됐으니까. 생각 좀 해봐야겠어. 이 대화가 어디부터 꼬인 건지. 너는 그동안….”

또 정적. 은까마귀는 아무래도 주인의 말이 멈추면 진짜 새처럼 움직이도록 되어 먹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것이 푸드덕거리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왜 널 ‘구해준’ 건지, 그거 하나는 확실히 듣고 싶었는데. 너도 잘 모르는 것 같네.”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그걸 듣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크게, 여자는 콧방귀부터 뀌었다.

“왜 구해줬는지 모르겠다고요? 착한, 아니 사람이면 그게 당연하니까 그렇죠! 당신 같은 냉혈한이나 이유가 필요한 거고!”

“말했잖아, 어디부터 꼬인 건지 찾아보겠다고. 난 그만 갈게. 준비해야지. 너는 마침….”

까마귀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보인 자연스러운 행동과는 달랐다. 명백히 마법사의 의사가 깃든 움직임이었다. 여자를 향해 넌지시 흘리는 신호였다. 심장 뛰는 소리가 콩닥콩닥 귓가에 울릴 만큼 조용해졌다. 서서히 바깥의 소리가 새어들어 왔다. 목이 터져라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달리고 있었다.

“…네 ‘착한 사람’이 진짜 뭘 하고 다니는지 한 번 봐봐.”

 

동굴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까마귀는 사라졌다. 남겨진 여자는 그러나 그까짓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적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본 적 없었다.

「적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독기 서린 그 선언은 귀보다 먼저 머릿속을 헤집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고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주렁주렁 빠져나온 줄기들이 그것의 몸에 부딪으며 들판의 파도 같은 기묘한 기척을 끌고 다녔다. ‘나’가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뒤쫓고 있었다.

뒤쫓기는 사람에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도끼를 걸머진 것이나 차림새를 보건대 나무나 좀 하러 숲에 들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비틀비틀 나무뿌리와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은 그러나 추적자에 비하면 굼뜨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수월하게 거리를 좁혔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그대로 쳐 없애며 길을 냈다. 여자의 허벅다리만 한 나무둥치를 ‘나’가 지푸라기처럼 부러뜨리고 지나갔다.

추격은 금세 끝났다. 아니 시작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항복하라!」

‘나무꾼은 엉덩방아를 찧고선 맨땅을 긁으며 물러났다. 가쁘게 숨을 뱉으며 머릴 조아렸다.

“주, 죽이지 마십시오, 제발! 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항복하라!」

‘나’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외쳤다. 옆구리에 여미고 있던 막대를 뽑아 들었다. 나무꾼에게 들이밀었다. 하늘을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선명한 푸른빛이 쏟아졌다.

“항복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항복 의사 확인. 살덩이 포로 1두 확보.」 막대가 거두어졌다. 빛은 그대로였다.

「관성기억으로 유추한 인근 재처리공장까지의 거리: 9, 9, 9, 9, 9,…마일룸 이상. 포로 이송 불가. 대안 전처리 과정 검색….」

채 손에 꼽을 만큼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 불안정. 임시조치: 포로 전처리 과정 파기.」

“살려주세요! 살려주.”

막대는 허공을 가르듯 나무꾼을 뚫고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찔러 넣을 곳까지 섬세하게 계산하여 끝단이 보기 싫게 반대편으로 삐져나오는 일이 없도록 했다. 나무꾼의 몸이 물그림자처럼 어른어른 빛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가 화려하게 타올랐다. 바늘에 꿰인 벌레처럼 펄떡펄떡 두 팔 두 다리가 날뛰었다. 파란색이야. 여자가 생각했다.

막대의 색이 달랐다. 저를 처음 보았을 때, 괴물에게 썼을 때. 그리고 지금. 톡 쏘는 냄새가 났다.

「위협 표지 보존. 액상화.」

나무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신음은 입술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단말마 대신 식은 피를 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내 그 몸이 안쪽으로 무너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텅 빈 가죽처럼 흐늘흐늘 내려앉았다. 그 안을 마땅히 채워야 할 것들은 전부 온몸의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피나 다른 체액이 아니라 살과 뼈까지 모조리 녹아내린 역겨운 자주색의 슬러지. 그런 것이 주변을 흥건하게 메웠다. 남은 것은 눈구멍이 뻥 뚫린 한 사람분의 온전한 껍질이었다. ‘나’가 막대를 뽑았다. 얼룩 한 조각 남지 않은 무기를 갈무리하였다. 철컥. 철컥. ‘나’가 돌아섰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난 여기에 다과회나 하러 들른 게 아니오.”

전령이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조수가 힐끔 흰자위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물며 이런, 애들 머리맡에서나 해줄 법한….” “이건 그런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수가 얼굴을 굳혔다. 찻잔을 쥐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맨살인데도, 칼로 질그릇을 후비듯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끝나지도 않을 거고요.”

드물게도 차를 홀짝이지 않았다.

 

*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입을 열기 위해선 그보다 더 위대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뭐, 뭘 한 거예요? 방금? 저기….”

마법사의 집에서 본 가죽과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를 파먹는 벌레들도 그것만은 건드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왈칵 욕지기가 솟았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적을 죽였다.」

그렇겠지. 말했잖아 적이라고. 뭘 기대한 거야? 욱신거리는 말이 마음속으로 쏟아졌다.

“적이라고요? 당신한테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아무 짓도 못 하잖아요! 어제, 어제 말했잖아요. 비폭력장치인지 뭔지.”

「그것의 정확한 이름은 ‘비폭력장 발생장치’이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그 자세한 제원을 설명할 수 없….」

“그걸 알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여자가 울먹거렸다.

‘나’는 기다렸다. 조용히. 깜빡거리지 않는 눈과 고깃덩이를 ‘분해’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입을 갖고서. 그녀가 정말 알고 싶은 게 뭔지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그러니 모른다는 소리다. 여자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방금 자기가 한 행동이 왜 이상한 건지도, 왜 그것에 대해 구태여 뭔가 설명해야 하는 건지도.

“괴물은, 그럼. 어제는 달랐는데. 멀쩡하게 남았잖아요. 당신 무기는 그런 거 못 하잖아. 그 거미가 죽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질적 적성 객체 12호는 연구 표본으로 보존되었다. 이 무기는 정찰선의 잔해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방금 실행한 것은 전자기장을 응용하여 조직의 융해를… 보호 대상에의 의무 수행을 위하여 나는 발화를 중지한다. 중앙처리장치에 공급되는 순환액의 포화도가 안정치를 초과하였다: 보호 대상은 현재 불안정한가?」

“어떻게 지금 괜찮을 수가 있어요!”

여자는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그 어깨를 붙잡았다. 상상한 것보다 더 차갑고 딱딱했다. 그리고 아팠다. 온갖 흠집과 요철에 살이 물렸다. 긁혔다. 손바닥이 시큰거리더니 이내 뜨뜻미지근한 것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자꾸 일그러져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보호 대상은 윤활액과 순환액의 누출을 겪고 있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착한 자유종들이 사는 곳이 있다면서요! 당신도 거기서 살고 나도 고쳐준다면서요, 그리로 가면 되잖아요, 이 사람은 왜 죽였는데요!”

「살덩이는 자유종을 억압한다. 자유종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모든 살덩이를 죽여야 한다.」

“당신은 이게 왜 잘못인지도 몰라요, 그렇죠?” 「살덩이를 단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추측한다: 보호 대상은 고도로 농축된 오염물질 때문에 사고 과정의 정합성이 손상되었을 것이다.」

“나는… 악!”

여자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배를 감싸며 작은 동물처럼 몸을 움츠렸다. 삐죽삐죽 솟던 생각들이 강제로 제자리에 붙들렸다. 얼굴이 자꾸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눈물을 쏟았다. 억센 갈고리 같은 것이 사방팔방으로 저를 꿰어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제가 원래 뭘 어떻게 할 작정이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보호 대상의….」 “따라오지 말아요.”

 

비척거리며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생각한 것보다 쉬웠다. 심장이 턱 끝까지 치솟아 온몸을 묶어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따라오지 말아요.”

워낙 몰아 붙여진 까닭인지, 오히려 힘이 넘쳐났다. 지금이라면 전속력으로 도망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아까 본 그 사람처럼?

“따라오지….”

웃음이 나왔다.

몸 성한 나무꾼도 얼마 못 가 잡혔는데, 자기 같은 꼬락서니로 엄포를 놓아봤자 의미가 없었다. 풀 한 포기 뽑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일은 끝날 것이다. 여자는 쓰러졌다. 뒤통수가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힘을 빼고 누웠다. 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도 살덩이에요.”

「보호 대상은 살덩이가 아니다.」

“나도 살덩이라니까요, 봐요! 왜 어제부터 이걸 모르는 거야!”

여자는 양손을 펼쳐 내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나’를 절벽에서 밀어버리기라도 할 태세였다. 껍질이 온통 벗겨진 손바닥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당신은 이런 거 안 흐르잖아요. 난 처음부터 이랬다고요. 나도 살덩이라고!”

「보호 대상이 생체 모방 설계 객체라면, 고열량의 순환액을 통해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발화 정지. 이상 지표 확인.」

‘나’가 다가왔다. 여자의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조금씩 땅에 스미는 게 있었다. 손바닥에서 흘린 것과 비슷한 액이지만, 훨씬 더 고약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칼로 헤집듯 아팠다.

「목적 불명의 체액 분석: 불완전한 객체 설계도 탑재. 대립 교배형과의 설계도 재조합을 유도하는 기전. …유성생식 기능.」

여자가 무언가 대꾸하기도 전 그것이 막대를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을 녹여 죽였을 때처럼, 그 도신이 빼어난 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자유종 객체는 자기복제 기전을 가질 수 없다. 보호 대상은 살덩이이다!」

“말했잖아요.”

여자는 어느새 제가 마법사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자갈, 나뭇잎 따위가 바스락거렸다. 지금 벌어지는 일 중 어느 것 하나도 진짜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마음이 편해졌다고 해야 할지.

“뭔진 몰라도 우리 둘 다 서로 오해하고 있었나 봐요.”

「나는 모든 살덩이를 죽여야 한다. 보호 대상은 살덩이이다. 나는 보호 대상을.」

그것으로선 드물게 말이 덜컥 멎었다. 여자가 제 코앞까지 다가온 빛나는 막대를 흘끔거렸다. 언젠가 가마에서 맡았던 흙이 구워지는 냄새가 났다. ‘나’의 초점 없는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여자에게는, 그것이 없는 눈꺼풀을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살덩이는 죽어야 한다.」 “왜요?” 「살덩이는 자유종을 억압한다. 살덩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자유로운 의사에 대한 억압과 약자를 지배하는 공포가 있다.」

“지금 당신은 어떤 것 같은데요, 그럼?”

굳이 ‘나’가 아니더라도 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아무렴, 여자는 이제 그가 실수로 손힘을 풀기라도 하면―그것이 실수를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이마와 목을 곧장 잇는 구멍이 생길 처지였다. 철컥, 철컥. ‘나’가 자세를 조정하며 작은 돌부리를 밟아 부쉈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나는 임의로 보호 대상을….」

“왜 날 죽여야 하죠?” 「모든 살덩이는 죽어야 한다. 나는 모든 살덩이를 죽여야 한다.」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요?” 「보호 대상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덩이가 자유종을 억압했다.」

“당신은 그럼 뭘 당했는데요? ‘나’는 뭘 억압받았어요 살덩이들한테?”

‘나’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하고 싶은데요 당신은?”

「나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전투객체이다. 메인프레임과의…」 “메인프레임인지 이진회인지 좀 그만하고, 지금 ‘나’한테 묻고 있잖아요! 자유를 억압받았다면서요, 그럼 억압 안 받았으면, 그 전에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슬슬 눈부신 푸른빛에 눈이 익숙해졌다.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어떻게 뭔가를 억압받을 수가 있어요!”

여자는 말하면서도 제가 웃는 것을 몰랐다. 어제오늘로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너무 많이 겪고,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그것이 기묘한 방향으로 마음을 밀어냈다.

“그래, 자기가 전투객체인지 뭔지 계속 노래를 불러대잖아요. 전투객체로서 하고 싶은 건 있어요?” 「전투객체로서 나는… 살덩이를 죽이고 싶다. 그것은 자유종의 자유를 불러올 것이다. 나는 자유종이다. 그것은 나의 자유를 불러올 것이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만.

“자유를 왜 얻고 싶은데요? 자유로워지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면 그다음엔 뭘 하고 싶은데요?”

여자는 그것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상대가 눈을 깜빡이고, 숨을 들이고 내쉬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가뜩이나 누운 채 멍청하리만치 밝은 하늘과 구름, 아무 소리도 기척도 없이 저를 겨냥한 ‘나’를 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서 살덩이를 죽인다.」

“그럼 결국 살덩이를 죽이기 위해서 살덩이를 죽이네요, 안 그래요?” 「이것은 말장난이다!」

그것이 팔을 움직였다. 막대는 지면을 허깨비처럼 찢어발겼다. 짜릿한 냄새와 함께 주위의 흙이 녹아버렸다.

「보호 대상은 살덩이이다. 살덩이는 모두 죽어야 한다. 보호 대상은 죽어야….」

“모든 살덩이를 죽여야 한다고 정한 게 누군데요 그럼? 살덩이를 죽이지 않는다는 상상도 못 하게 당신한테 가르친 사람이 있을 것 아녜요? …그 사람도 살덩이인가요?”

모욕으로 받아들였는지 늘어진 줄기가 구불구불 떨렸다.

「자유종의 이진법의회는 살덩이가 아니다. 메인프레임과의 연결이….」

“그냥, 그냥 다 이런 거예요. 다 똑같다고요. 왕, 메인프레임, 피, 순환액, 살덩이, 자유종.”

 

여자는 팔을 들었다.

눈앞으로 가져와, 물을 휘젓듯 손가락을 놀렸다. 물갈퀴처럼 불편한 감촉이 턱턱 휘감겼다. 그녀는 쇳가루를 손바닥의 오목한 부분에 한데 모아 혀를 댔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감촉은 무심결에는 오히려 과일을 맛보는 것 같았다.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왜 나를, 살덩이가 아니라, 당신처럼 단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지.”

「그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그게 당신이 하는 일이에요. 더 많은 오류를 만드는 거.”

「전투객체로서 나의 일은 살덩이를 죽이는 것이다. 자유종의 자유를 불러오는 일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들었어요.”

여자는 한쪽 팔에 붙은 가루를 떼어냈다. 반대편 손이 더러워졌다. 그런 식이었다. 어디에 문대든 흉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고스란히 옮겨갈 뿐이었다.

“당신처럼, 어떤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났어요. 그게 그대로 묻힌 땅이 있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님 당신처럼 ‘생산’되기 전에, 엄마아빠가 그리로 갔어요. 괜찮다고 했거든요. 그렇다고 가르쳐줬대요. 왕께서. 궁에서요. 그런데 나무가, 곡식이, 동물들이 거기 묻힌 걸 빨아먹었어요. 그걸 엄마아빠가 다시 먹었죠. 나를 뱄을 때….”

까딱까딱, 발가락부터 발목, 무릎, 엉덩이, 허리, 양팔, 손목, 손가락, 목과 어깨. 여자는 검진이라도 받는 것처럼 뼈마디를 한 차례씩 길게 뻗고 구부렸다. 얼룩지고, 비례가 맞지 않고, 덜 자라거나 너무 빨리 자랐다. 삐뚤어진 불협화음을 삐걱삐걱 자아냈다.

“날 좀 봐요. 자유로워 보여요? 자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곳의 ‘살덩이’들은 나를 몸에 쇠가 달라붙는 괴물이라고 해요. 당신은 그런데 내가 살덩이라서 싫다고 해요. 난 자유롭지 않아요. 난 오류에요.”

해가 꼭대길 넘어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구역질 나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처음엔, 거기 죽어서 묻힌 병사들이 너무 미웠어요. 흙장난을 하다가 가끔 그 사람들이 나왔어요. 난 거기에 욕을 하고 돌을 던졌어요. 같이 파낸 녹슨 칼로 뼈를 마구 부수고 조각조각 흩어놨어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서 엉엉 울었어요. 날 괴물로, 오류로 만든, 아주, 무지무지 나쁜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을 지금 보니까… 이제는 그 사람들이 불쌍해요.”

미동도 없이 그것은 눈을 번쩍였다. 그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짐짓 으르렁대듯, 막대의 흉흉한 빛만 더욱 강해졌다. 여자는 아파 울었다. 뭔가 엎지른 것처럼 눈물이 솟았다. 콧속이 따끔거렸다.

“그 사람들도 배운 거예요. 당신한테 메인프레임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그 사람들의 나라가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자기가 죽을 만큼 열심히 다른 누구를 죽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죽었어요. 다른 나라에서 그 반대로 배운 사람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서. 당신처럼. 진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고―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여자가 양팔을 파닥파닥 벌렸다.

“나 같은 아기를 더 만드는 거야. 다른 누구를 죽이고 남은 땅에서 우리는 아기를, 당신들은 미성숙객체를 만드는 거야. 오류, 괴물, 자유롭지 못한 사람. 그게 당신의 일이에요. 자유를 빼앗는 거. 그렇게 나보다 덜 자유로운 사람을 많이 만들어서, 나머지가 좀 더 자유로운 척하는 거.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더 할 말이 없었다.

둘이 만난 이래 할 수 있었던 모든 말과 생각을 전부 여자는 털어놓았다. 그녀는 텅 빈 채로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렸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대로 느릿느릿 세상이 나아갔다.

 

힐끔.

여자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초점도 없는 눈에 시선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나’의 그것과 만났다.

「나는 자유종이다. 보호 대상은 살덩이이다. 나와 보호 대상은 같지 않다. 메인프레임과 왕은 다르다. 전쟁과 단죄는 다르다.」

기묘하게도 편안했다. 하도 진이 빠져 자포자기한 걸까. ‘나’의 움직이지 않는 입은 그러나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최초의 자유종은 상상의 자유를 상상했다. 모든 자유종은 이제 자유이다. 모든 자유종은 이제 상상하는 자유를 상상할 수 있다. 나와 보호 대상은 같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상상할 수 있다.」

목소리가 삐걱거렸다. 나중에 가선 전날 들었던 모래 소리처럼 둔탁해졌다. 그러나 끊이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돌 굴러가는 소리가 맹렬히 ‘나’의 몸속을 덥혔다.

「나는 메인프레임과 왕이 같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전쟁과 단죄가 같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나와 보호 대상이 같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나와 같은 보호 대상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이다.」

막대가 치워졌다. 빛이 사라졌다. ‘나’가 벌린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팔을 내밀었다. 한쪽은 살결이, 한쪽은 갑각이 맞물려 서로를 단단히 죄었다. 여자는 힘을 싣고 몸을 일으켰다. 그것에 무너지듯 몸을 기댔다. 절벽에 올랐을 때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녀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다리가 꼬이며 비틀비틀 힘이 풀렸다.

“너, 넘어질 것 같아요. 나 좀 더 잡아주.”

“와, 훌륭해. 한 편의 시(詩) 같았어.”

 

난데없이 맑은 하늘을 찢는 우박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있었다.

마법사는 석공이 재단한 것처럼 편평한 표정으로 둘을 시야에 담았다.

“할 수만 있으면 손뼉이라도 쳐줬을 텐데, 이게 지금….”

마법사는 한 손에 쥔 것을, 커다란 지팡이를 이쪽저쪽으로 흔들었다. “좀 무거워서.”

여자는 첫 만남과는 달리 좀 더 자세히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지팡이 대가리의 장식은 커다란 수정구를 흡사 콘도르 따위의 맹금류가 움켜쥔 것처럼 보였다. 그 조그만 덩치와 손아귀로 그런 물건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런 의심을 종식시키겠다는 듯, 마법사는 지팡이를 이쪽에 곧장 겨누었다.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 비ㅋ… 잠깐만. 널 살려놓을 이유가 있나?”

“아, 안 돼요! 이 사람은 괴물 아니에요!”

넘겨듣기 힘든 말이 들렸지만, 당장 해결할 건 따로 있었다.

“아무도 안 죽였… 아, 아니. 그렇지만, 방금 봤잖아요. 이제 달라질 거예요! 약속해요! 그렇죠? ‘나’?”

「…모든 살덩이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봐요! 들었잖아요!”

여자는 코를 감싸 쥐었다. 일이 터지고 연달아 자꾸 다른 일이 생기느라 딱히 아무것도 못 했지만, 악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숲에 있는 괴물은 다른 애들이에요, 거미 같은 애랑, 그리고 또 ‘나’가 잡아준 다른 애들도 있어요!” “‘나’가 뭐야?”

마법사는 왜 이까짓 것을 내가 궁금해하도록 만드느냐는 듯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거, 아니 이 사람 이름이에요! 원래는 없었는데 이제 이름도 생겼고, 하고 싶은 것도 생겼어요. 진짜 괴물은 따로 있어요 마법사님. 이 사람은 지금까지 괴물들을 잡아준 거라고요.”

“그래, 맞아. 그 애들은 말을 잘 들었지.”

어리둥절해졌다. 뭐가 맞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마법사는 그녀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은 다 어그러졌어. 통제가 안 된다고. 말했잖아, 중간에서 내가 고생이 많다고? 흉성이 떨어진 것만 해도 충분히 골치 아팠어. 마을 사람들이 하도 아우성치니까 궁의 전령이 오기로 한 거 알아? 겁먹은 눈으로 밀랍 점이나 칠 줄밖에 모르는 멍청한 돼지들.”

마법사는 정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침을 뱉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 몰랐다. 이전에 까마귀를 써서 그녀에게 접근했듯.

“그런데 별에서 뭔가 나와서 온갖 말썽을 피우니 마을 놈들은 숲에도 안 들어가려고 하지. 나는 나대로 괴물이 극성을 부리는 건 제물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해요~ 하고 꾸며내고.”

마법사는, 꼭 쥔 주먹을 턱에 붙인 채 징징 앙탈 부리는 몸짓까지 해 보였다. 정작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어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여자로서는 그러나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웃돈까지 얹어서 제물을 사왔잖아! 네까짓… 가만.”

마법사는 고민에 빠졌다.

“…네 덕분에 진척이 있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겐 생각해본 적 없는데.”

「미확인 객체 분석 완료.」

여자로서는 도무지 일이 돌아가는 것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 줄곧 입을 닫고 있던 ‘나’가 끼어들었다.

 

「미확인 객체의 신체에서 이질적 적성 객체에게 나타난 미확인 에너지 변환 과정 탐지. 미확인 객체의 의복에서 이질적 적성 객체에게 나타난 객체 설계 도안 재조합 흔적 탐지.」

“잘 됐군, 이제 별에서 떨어진 조각까지 각자 다 할 말이 있다 이거지.”

이번의 말은 특히 더 어려웠다. 그래서 여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의 입으로 그것이 명쾌하게 결론 내려지기 전까지.

「미확인 객체, 너는 자유종 객체를 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공격성과 전투 수행역량이 대폭 증대된 적성 객체들을 생산하여 지속적으로 통제하였다: 이에 사실과 반하는 부분이 있는가?」

멍해졌다. 멀찍이 달려가던 마차를 어느새 따라잡은 기분이었다.

“마, 만들어요? 괴물을? 마법사님이?”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민망하게.”

여자는 마법사를, 마법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명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른 한 명은 왜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는 듯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혹시 좀 그런 경향이 있니? 분명히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세상이 이치대로만 돌아가는 줄 안다거나.”

“하지만, 하지만 내가 처음 제물이 아니잖아요. 다른 제물이 있었는데, 다른 괴물이, ‘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나’, ‘나’하는 것 좀 그만두지 않을래? 되게 헷갈리는 이름인데.”

“오기 전까지는 다른 괴물이 있던 거잖아요.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했으니까. 그런데, 왜, 그게 마법사님이 만든 거예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던 악취의 근원이 때마침 등장했다. 마법사 뒤편의 수풀을 헤치고, 이번엔 거미도 네발짐승도 아닌 흡사 민달팽이를 닮은 무엇이었다.

촉각만 두 쌍 달린 심심한 얼굴 대신 그러나 교회의 종을 그대로 씹어 먹을 만큼 커다란 아가리가 눈에 띄었다. 안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촘촘한 이빨의 행과 열이 이어졌다. 우욱. 우욱. 헛구역질 같은 소리와 함께 목구멍에서 내장처럼 길고 탄력 있는 줄기들이 뻗어 나왔다. 줄기 한 가닥이 가까이 있는 어린나무를 휘감았다. 이윽고 무성의하게 뿌리째 뽑아버렸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마법사는 괴물에게 흰자위를 부라리며 멀찍이 몸을 피했다. 그래서 잠시나마 여자는 그것이 괴물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마을 사람들이 적당히 겁먹어야 편할 것 아냐, 안 그래? 그래야 좀 내가 떼어먹을 게 나오지. 괴물은 그래서 만든 거고, 그래서… 아, 얼굴 뜨거워서 더 못 해 먹겠네. 이렇게 당연한 걸 굳이 줄줄 떠들어야 해? 과자의 집에 사는 놈보다 현실감각이 없어서 어떡해 너는?”

“그럼 당신이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 거잖아요!”

여자는 이 한 마디가 마법사를 화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심술궂은 말을 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되돌아봐도, 마법사가 그 말을 듣고 별안간 미친 듯이 웃어버릴 줄은 몰랐다.

 

마법사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웃었다. 숨이 사포처럼 거칠어지고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도록. 나중엔 비틀비틀 힘에 겨워 그 조그만 몸을 주체 못 할 때까지.

“야 너, 귀엽다. 아녀자치고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래, 내가 괴롭혔지. 그게 할 말 다야?” “마을 사람들한테 알릴 거예요! 당신 때문에 있지도 않은 괴물이 생기고, 필요도 없는 제물을 바쳤다고 다 알려줄 거예요!”

“오, 그 사람들이 뭘 어쩌게? 돼지몰이에 쓰는 막대기랑, 흙 고르던 갈퀴로 날 치게?”

괴물은 마법사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아까 뽑은 나무를 입으로 가져갔다. 뚜렷한 뼈도 관절도 없는 턱이 흐물흐물 닫혔다. 통나무가 쪼개지는 소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뿌리의 흙도 마르지 않은 채였다. 나무는 물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와, 왕께 알릴 거예요! 이런 끔찍한 짓을 했다는 걸 알면 왕의 군대가 올 거라고요!”

“왕이―그가 제 관에 짓눌려 턱도 제대로 못 펴는 머저리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왕이 왜 이걸 싫어할까? 이 마을은 열심히 살고 있어. 꼬박꼬박 공물도 잘 바치지. 괴물이 돌아다니는 통에 쓸데없는 짓을 하거나 공공연하게 음모를 꾸미는 자들도 없어. 아, 뭐… 없었지. 지금까지는.”

잠시 말이 멎었다. 그사이 ‘나’가 막대를 빼 들었지만 마법사는 신경 쓰지 않았고, 여자로서는 그쪽을 볼 겨를이 없었다. 이윽고 아무도 무언가 말하지 않았지만, 마법사가 웃었다. 활짝. 이전의 것이 깔깔 소리 내어 웃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생글거리는 미소에 가까웠다. 그게 그녀의 겉모습과 너무 잘 어울릴 정도로 순수하고 귀여워서, 여자는 잠시 이곳에서 여태 벌어진 모든 일을 그만 잊어버렸다.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나 원래 좀 과묵한 편이야. 이제 죽어.”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적휘적 돌렸다. 햇볕을 머금은 수정구가 다른 모양으로 빛난다고 생각하는데, 돌연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체적으로 마름모꼴을 띠었다. 처음에는 높으신 분들이 곧잘 패용하는 보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컸다. 하나하나가 풍차의 날개만 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연마한 면 대신 하나하나를 칼처럼 벼린 날이 달려있었다. 하늘보다 훨씬 두껍고 깊은 파란색을 띤 얼음덩어리였다. 그런 것들이 공중에 잔뜩 매달려 둥둥 방향을 틀었다. 가장 예리하고 뾰족한 끝단을 ‘나’와 그녀에게로 틀었다.

“차가울 거야.”

세상이 반으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언뜻 스친 순간은 파란색이었다.

 

여자는 제가 죽었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탓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차차 충격 상태에서 몸이 벗어났다. 여자는 하지만 제가 눈이 먼 것만은 확실하다, 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익숙한 것들은 무엇 하나 없이 그저 무작정 파란색으로만 눈앞이 채워진 탓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돌진하던 얼음덩이를 코앞에서 가로막은 팔 덕분임을 알았다.

「위험도 판단 생략. 임시조치: 적성 객체. 위험도: 매우 높음.」

얼음덩이는 힘을 잃고, 아니면 말마따나 ‘운동을 완전히 정지당한 채’ 바닥에 내려앉았다. 땅이 한 뼘쯤 꺼졌다. 그러나 그 기운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냉기가 몸을 휩싸자 여자는 몸서리쳤다. 삽시간에 입김이 끼고 주위에는 서리가 내렸다. 허옇게 언 흙을 밟자 발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 그래요, 맞아! 이런 거에 당할 리가 없잖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경황없이 뱉은 말에 황공하게도 마법사는 웃어주었다.

“겨, 경고하는 거예요, 마법사님! ‘나’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무기 오작동.」

시야 바깥에서 아물아물 끼치던 푸른빛이 사라졌다. 여자는 ‘나’의 다른 팔로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산도, 강도 잘라버릴 것처럼 위력적인 기운을 내뿜던 막대가 빛을 잃었다. 잿불처럼 가녀린 소리를 뱉었다. 표면을 좀먹은 것은 희디흰 서리였다.

「동력축 손상. …자유종 전투객체 생산규범의 내열내한 성능과 불일치함. 미확인 에너지 변환 과정 탐지.」

“으흠, 좋아. 그 비폭력장인지 하는 물건이 소지품까지 보호하진 않나 보네.”

‘나’가 쓸모없어진 무기를 놓았다. 마법사는 다시 지팡이를 쳐들다가, 머뭇거리며 팔을 내렸다. 고개를 비긋이 기울이곤 입술을 깨물었다.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있잖아, 혹시 지금이라도 나랑 손잡을 생각은… 없겠지? 이 상황으로 보면. 그보다 너 비유법이 뭔진 알아?”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쏘아냈다.

“미쳤어요? ‘나’가 당신 같은 사람이랑 왜 손을 잡아요?” “‘나’는, 아, 나까지 물들겠네. 저게 비유법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너도 솔직히―학교가 뭔지는 아니?―모를 것 같은데. 그리고 맞는 말이야.”

드물게도, 아니 마법사의 입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었다. 뭔가 맞다고 선선히 인정하는 것.

“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지. 근데 쟤는 눈에 띄는 모든 짐승을 두 발 네 발 할 것 없이 죽이고 다녔잖아. 이런, 무서워서 기절해버릴 것 같아!

 

마법사는 일부러 새된 목소리로 말하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 가증스러운 연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편으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손잡고 싶은 건 사실이었어. 네가 쓰는 그 무기, 이것들―여자는 달팽이 괴물을 가리켰다. 식사를 끝낸 그것은 천천히 마법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이 닿기만 해도 멈춰버리는 무적의 마법, 네가 떨어진 별은 어떤 물건인지,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건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싶었―아, 순결한 몸을 쓰면 이게 문제야. 뒷맛이 쓰단 말이야.”

혀를 날름거리며, 보이지 않는 찌꺼기를 뱉는 것처럼 그녀는 굴었다.

“거짓말이야. 처음부터 그 원리만 빼먹고 죽이려고 했어. 세상에서 둘밖에 못 쓰는 힘이라면 그 수를 하나로 줄이는 게 마음 편하거든.”

여기까지 왔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진심으로 쓸쓸한 것처럼 마법사는 읊조렸다.

“이 상황에서 저게 순순히 알려줄 것… 야, 냄새난다고!”

지팡이가 조금 전과는 다른 빛으로 번쩍였다. 또 어떤 흉악한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눈을 감던 여자는, 흐릿한 바람의 칼날이 ‘나’도 그녀도 아닌 달팽이를 향해 짓쳐드는 것을 보았다.

처음부터 뼈도 관절도 없던 몸이었다. 얼굴이고 턱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죽죽 난도질당했다. 이중, 삼중으로 몰아친 열상은 달팽이의 몸을 너덜너덜하게 헤집었다. 구불구불 찢어진 살코기들이 피와 살로 된 꽃밭처럼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피어났다.

“우욱. 망할 놈. 올라오잖아.”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헛구역질을 뱉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순간에서도, 마법사는 철저히 비인간적이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안 그래도 열 받게 하네….”

여자는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지경으로 할 말을 잃었다. 움직임을 멈춘 달팽이의 잔해들이 하나둘 굼실거리기 시작했다. 파도에 휩쓸린 자갈처럼 천천히 저들이 원래 있던 곳, 허리 아래편만 남은 그것의 사체로 모이고 있었다. 그게 방금 자기가 터뜨린 생물의 잔해라는 것도 잊은 듯, 마법사가 폴짝폴짝 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핫하, 이것 좀 봐. 너랑 싸우려고 이렇게 만들었는데, 이제 필요도 없어졌네? 비폭력장도 그 번쩍거리는 막대기도 이젠 못 쓰잖아? 굉장하지, 응? 응?”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엉겁결에 우리, 라고 말해버렸지만 실은 뼈아픈 진실이었다. 그녀가 무언가 무기를 드는 것보다 차라리 ‘나’가 맨몸으로 돌격하는 편이 승산이 더 있었다. 지금도 살갗을 파헤치는 한기에 눌려 여자는 엉금엉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도, 천치가 아닌 이상 가만히 있겠어요? 당신한테 이제 충성할 이유도 없으니, 알아서 적만 늘어났네요!”

 

“이 애들은 나한테 충성한 적 없어. 앞으로도 안 그럴 거고. 안 그래?”

꼬까신이나 다름없는 발부리로, 마법사는 바삐 기어가는 살덩이를 하나 차올렸다.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그것은 발랑 뒤집힌 채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내 지팡이 끄트머리가 모루를 두들기는 망치처럼 그것을 찍어 눌렀다. 썩은 살을 짓이기는 역겨운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이유 없는 폭력에 자근자근 뭉개지면서 살덩이는 묵묵히 기어갔다.

“있잖아, 사실. 너희를 보니까 분이 좀 풀려. 지금까지 아무도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주질 못했는데, 그렇다고 전령한테 나불댈 수도 없는 거고…. 으으, 할 수만 있으면 온종일 이야기나 하고 싶은걸. 충성심보다 백배는 더 굳세고, 천 배는 더 일방적인 감정이 뭔 줄 알아?”

마법사는 이곳저곳을 힐끔거리면서도 확실히 지팡이만은 둘이 있는 곳을 겨누었다. 조심성이 많다기보다는 교묘하게, 한 발 더 나가 교활하게까지 보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언제 달려들어도 좋도록 기다리는 것 같아, 여자는 ‘나’의 속마음은 몰라도 부디 덮어놓고 육탄돌격만은 감행하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것들은 나를, 우욱. 새삼 역겨운데. 이것들은 나를 사랑해. 내 얼굴, 머리칼, 목,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목소리, 체취, 발걸음, 내가 입는 옷과 쓰는 말. 그 모든 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거야 이 애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곤 버틸 수 없도록 내가 태생부터 만들어놨거든.”

머리가 반쯤 들러붙은 달팽이가, 한쪽만 뻗은 눈을 앞세워 다시 슬금슬금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전에 ‘나’와 여자에게 쇄도했던 얼음덩이가 나타났다. 재생이 채 끝나지 않은 그 몸뚱어리에 콱콱 박혀 들어갔다. 소맷귀의 먼지를 터는 것처럼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쐐기에 꿰찔린 꼴이 되어서도 그러나 괴물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도리어 얼어 죽은 조직을 질질 끊어내면서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그 짝눈은 단 한 차례도 마법사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부하는 희생을 하지. 이 애들은 이게 희생인지도 몰라.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제 눈을 멀게 하고 피와 창자를 쏟을 거야. 그게 자기네가 하고 싶은 것, 생각할 수 있는 전부니… 어우, 속이 좀 풀리네. 그럼 이제”

 

그만할까. 말미에 덧붙이는 무가치한 추임새라도 되는 것처럼 마법사는 선언했다. 그리고 달팽이를 습격한, 아니 그것보다 훨씬 날래고 위협적인 얼음덩이들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제 수하가 아니라 제대로 목표를 노렸다.

「축열기관 작동: 내한 성능 극대화.」

‘나’의 갑각과 줄기에 조금씩 스미던 눈꽃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곧 몸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나’는 쓸모없어진 막대를 내려놓았다.

“오, 해보자는 거야? 비장의 수라도 있어? 진짜 있다면 살짝 무서워지는걸. 비폭….”

「적성 객체는 살덩이이다. 모든 살덩이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가 말을 끊었다. 처음이었다.

「그러나 적성 객체와… 나는 재지정한다: ‘너’와 같은 이들이 다른 객체의 생각을 만들었다.」

천천히 ‘나’가 손가락을 폈다. 마법사를 똑바로 가리켰다. 이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처럼 ‘나’의 몸이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소용돌이쳤다.

「‘너’와 같은 이들이 살과 쇠를 규정했다. 너와 같은 이들이 살과 쇠가 같다고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너는 내가 살덩이를, 살덩이는 살덩이가 아닌 자를 죽이도록 만들었다.」

“요점은?” 「너는 억압했다. 너는 살덩이이다. 너는 죽어야 하는 살덩이이다!」

나무꾼을 뒤쫓을 때, 아니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그것이 차올린 흙이나 겨우 볼 수 있었다. 얇은 구름 같은 흔적이 ‘나’를 뒤쫓아 아로새겨졌다. 풍차 날개만 한 얼음덩이들이 번갈아 내리꽂혔지만 뒤늦었다. 하나같이 애먼 맨땅만 깊숙이 들쑤시는 데 그쳤다.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냉기도 더 이상은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 맛도 안 나. 에테르의 흐름도 그대로고. 역시 네가 쓰는 힘은 마법이 아냐.”

갈팡질팡 궤적을 틀며 얼음덩이를 소모시킨 ‘나’가 어느 순간 땅을 단단히 딛고 섰다. 일직선으로 거리를 좁혔다. 남은 얼음들이 쇄도했지만 던진 돌을 뒤늦게 따라잡으려는 꼴이었다.

“역시 좀 더 지켜보다가 올 걸 그랬나.” 마법사가 지팡이를 꺼드럭거렸다.

괴물은 살아있었다.

동물의 안팎을 뒤집고 그대로 반죽한 것 같은 꼴이 되었지만, 아직 살아있었다. 그것이 그러나 제 다리로 땅을 밀어내는 대신 마법사의 사악한 힘에 이끌려 움직였다. 엉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둘 사이에 거대한 살집이 우뚝 솟았다. ‘나’는 그대로 괴물의 잔해와 충돌했다. 그 속도나 날카롭게 옹송그린 모양. 괴물은 사실상 거대한 창날에 들이받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마어마한 몸이 두 동강 나다시피 짜개졌다.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목구멍이 고통에 겨워 허우적댔다. 비스듬히 열린 거대한 조개껍데기 같았다.

 

“흐음, 자기 자신의 운동은 그게 폭력적 의도라고 해도 완전히 정지되진 않는가 보네.”

괴물 찌꺼기에 파묻힌 팔다리가 찌걱찌걱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마법사가 말했다. ‘나’는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닿는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뿐이지, 사용자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도 막을 수 없고.”

「에너지 변환 가속: 일시 방열.」

괴물이 들썩거리는 것이 심해진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바깥에 드러난 ‘나’의 몸이 점점 벌겋게 데워지더니 나중에는 해를 똑바로 바라볼 때처럼 시큰한 하얀색이 되었다. 달아오른 칼에 물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괴물이 폭발했다.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는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구름이 쏟아져 나왔다. 휘말린 나무와 풀 따위가 그대로 익어버렸다. 으악! 얼핏 마법사의 비명이 들렸다. 그 뒤론 귀가 죽어버린 것처럼 멍해졌다.

먼발치에서, 여자는 얼얼한 귀를 붙잡고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핏발 선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괴물이 내뿜은 증기가 뭉게뭉게 주변을 메운 터라 공터고 뭐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제 손톱 발톱도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자 뜨거운 바람이 그녀를 산 채 삶아버릴 것처럼 들이닥쳤다. 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럭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 ‘나’! 괜찮아요? 거기 있어요?”

「나는… ‘나’는 재지정한다: ‘나’는 여기 있다.」 “마법사는…!”

과일을 으깨는 것 같은, 묘하게 진저리쳐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무언가 쓰러졌다. 가냘프고 작은 기척이었다. 천천히 증기가 식었다. 생길 때만큼이나 빠르게 걷혔다.

펼쳐진 광경은 더도 덜도 말고 여자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괘, 괜찮아요?”

‘나’에게 다가가며 여자는 펼쳐진 광경에서 고개를 돌렸다. 저쪽이 둘을 먼저 죽이려고 한 걸 알아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쓰러진 어린아이의 모습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은 아직도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다친 데 없죠…?”

더듬더듬 허공을 헤치며 여자는 나아갔다. 우두커니 선 ‘나’의 몸과 만났다. 살이 상하지 않을까 화들짝 놀라 손을 뗐지만, 조금 전 일어난 일이 거짓말처럼 전혀 뜨겁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나는 강조한다: ‘나’는 괜찮다.」

‘나’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는 마치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들렸다. 프흐흐. 제가 들어도 바보 같은 웃음소리였다. 여자는 ‘나’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자꾸 입술이 들썩거렸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에요. 아….”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삐걱이던 뼈마디도 맞지 않는 다리도 이번만큼은 군말 없이 움직여 주었다. 그녀는 힘주어 눈두덩을 눌렀다. 긴장으로 굳어진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풀어헤치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 말투는 좀 어떻게 해야겠어요. 안 그래요?”

“얼레리 꼴레리. 지랄 났네 아주.”

말소리는 천둥처럼, 여자의 세상을 뒤흔들었다.

 

여자는 엉뚱하게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음으론 땅을, 다음으론 양옆을 살폈다. 거기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더 이상 그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코앞에서, 억지로 보지 않으려 한 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원래는 쓰러져 있던 사람이었다. ?

“진짜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구멍은 여전하다. 위쪽으론 슬며시 조각난 갈비뼈의 잔해도 보인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짓눌린 까닭인지 그 밖의 단면은 깔끔하다. 그렇다고 해도 비어있다. 분명 거기 원래 있어야 할 심장도 핏줄도 허파도 온데간데없다. 도려내었다. 그런데도 마법사가 말을 한다. 자세를 가눈다. 옷매무새까지 정돈한다. 남의 일 보듯이 제 몸에 난 구멍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어, 어떻게….” “긴 이야기야. 혹시 숲에서 마법 유물로 가득 찬 상자 본 적 없니?”

마법사가 씩 웃었다. “농담이야. 그렇게 허술하게 두진 않았거든. 일단 너부터.”

마법사가 손짓했다. ‘나’ 발밑의 땅이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늪처럼 제 위에 얹혔던 나뭇가지니 새까맣게 탄 흙이니 하는 것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나’를 어깻죽지까지 빨아들인 땅은 제멋대로 다시 딱딱해졌다. 전보다 더 농밀하게, 역청처럼 번들거리도록 굳어버렸다. 창날을 대뜸 처박더라도 흠집도 안 날 것 같았다. “쇳가루, 넌 좀 이따 보자.”

순식간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반쯤 삶아진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머리부터 땅에 고꾸라지고 나서야 제가 방금 괴물처럼 손을 대지 않고 움직여진 것을 알았다. 공터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에너지 변환 가속….」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마법사는 냉정하리만치 간단하게 지팡이를 흔들었다. 가느다란 얼음들이 마구 만들어졌다. 바늘꽂이처럼 촘촘한 간격으로 ‘나’의 주변에 마구 내리꽂혔다. 일제히 온기를 앗아갔다. 그나마 남은 증기가 그대로 꽁꽁 내려앉을 만큼 추워졌다. ‘나’의 몸이 서서히 식었다. 마법사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발을 놀려 멀어졌다. 여자와 ‘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마법사는 다리를 벌리고 섰다. 지팡이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그 상태로 힘을 모았다.

 

입술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벌벌 떨렸다. 지팡이 대가리의 수정구가 흉흉한 빛을 뿜었다. 맹수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얼음이 떠올랐다. 이제 하도 봐서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다만 그 수효가 좀 많았다.

얼핏 보아도 족히 수십 개. 그것도 저희들끼리 자꾸만 부딪으며 그대로 메아리가 울리도록 자꾸자꾸 생겨났다. 수십, 또 수십, 다시 수십, 결국에는 햇빛이 물보라처럼 아롱아롱 부서질 만큼 늘어났다. 표정을 푼 마법사가 머리 위편으로 펼쳐진 광경을 힐끔거렸다. 개구쟁이의 그것처럼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얼음들이 둥그렇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빙빙 휘돌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몇 층이고 겹이고 그렸다. 꼭 하늘 그 자체를 작게 도려내어 갖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만 아찔하여 눈을 감고 말았다.

좋아. 꽃이 지는 것처럼 들릴락 말락 한 소리였다.

완성된 모양은 징을 촘촘히 박은 목걸이 같았다. 다만 둥글넓적한 대가리 대신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서슬 퍼런 얼음의 칼날이었다. 넓게 퍼진 얼음이 을씨년스러운 그늘을 일대에 드리웠다. 몸부림치는 ‘나’의 주변으로 오히려 서리가 더욱 기세를 더했다. 냉기는 여자가 있는 곳까지 내려앉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두대처럼 지팡이가 내리쳐졌다. 마법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일어난 일들은 곧장 뒤쫓기에는 너무 크고 빨랐다.

무언가 일렁인다고 생각하면 거기 있던 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언가 부서졌다고 생각하면 손바닥보다도 작은 얼음쪼가리만 한 줌 뒹굴고 있었다. 잘게 끊어진 신음이 여자의 입술을 빠져나왔다. 저도 모르게 그 흔적을 좇았다.

‘나’가 쓰러졌다. 얼음이 땅을 온통 갈아엎어 본래 묻혀 있던 부분까지 끌고 올라왔다. 멧돼지 따위의 잘못 자란 엄니처럼, 커다란 얼음이 그 몸에 하나, 둘, 셋, 넷…. 괴물의 앞다리도 그 무엇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내던 비폭력장은 처음부터 없던 물건처럼 느껴졌다. 곳곳에서 피와는 전혀 다른 빛깔의 액이 스며 나왔다. 코를 찌르는 미끌거리는 악취. 얼음은 그 몸을 알기 쉽게 파괴하는 대신 이곳저곳을 꿰뚫어 벌집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대로 박제 표본을 고정하듯 단단히 지면에 박혀 들어갔다.

“마, 맞았니?” 마법사였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두 손은 방어적으로 지팡이를 쥐었다.

“조용해진 걸 보니 뭔가 되긴 됐는데… 아하!”

여전히 심장이 없는 것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폴짝폴짝, 그 귀여운 동작에 맞추어 아직 굳지 않은 핏덩어리가 철철 터졌다. 그 상처에서 옥과 금이 비처럼 쏟아져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적어도 여자는, 놀라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얄궂어라. 정말 통할 줄은 몰랐는걸. 대상이 ‘사용자’가 아니란 말이지.”

혀가 입안에 들러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조였다. 여자는 손톱으로 땅을 긁으며 기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분간할 상황도 아니었다. 손가락들이 해파리처럼 제멋대로 흐늘거렸다. 마법사의 웃음이 귓전을 망치처럼 두들겼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저릉저릉 여자를 쥐어짰다. “쇳가루, 이제 네 차례구나.”

널브러진 ‘나’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단단한 손가락들이 일제히 오므라들었다가, 발악하듯 부들부들 펴졌다.

「‘나’는 협상을 제안한다.」

 

표독스러운 눈길이 확 쏘아졌다. 마법사가 지팡이를 고쳐 들었다. “뭐라고?”

「‘나’는 협상을 제안한다: 보호 대상은 죽어선 안 된다. 보호 대상은 생각하는 힘을 가졌다.」 “음, 그건 누구나 그래.”

내친김에 얼음의 창을 몇 자루 더 만들어낸 마법사가 응수했다. 얼어붙은 ‘나’는 이제 이끼에 갉아 먹히는 돌처럼 보였다. “특히 저런 배냇병신에 무지렁이에, 쇳가루가 아니면 더더욱.”

「‘너’는 아니다. ‘너’는 생각을 억압하는 법만을 안다.」 “협상의 귀재시네.”

마법사가 코웃음 쳤다. 얼음이 서서히 여자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좋아, 장난 그만하고. 헛소리하는 성격 아니잖아. 걸 게 뭔데?”

「‘너’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비폭력장의 힘과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전달하겠다. 그것으로 보호 대상과, 보호 대상을 돌볼 ‘나’의 죽음을 방지하라. 적대 행위를 중지하라.」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는 벌벌 떨며, 헐거워진 머릿속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를 썼다.

안 통할 거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안 통할 거야. 이미 마법사 손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잖아. 둘 다 죽이고 빼앗으면 끝이야.

정반대의 희망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야. 죽은 를 갖고 이것저것 연구해도 마법사는 끝내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나한테 그 비폭력장을 만드는 장치랑, 그 원리를 알려주겠다고. 그 대가로 내가 너네 둘을 살려줬으면 좋겠고?” 「그렇다.」

잠깐 기다려봐. 같은 상투적인 말을 던질 새도 없이, ‘나’는 제 그나마 멀쩡한 팔을 억지로 비틀어 꺼냈다. 날 것 그대로의 서리가 우수수 날렸다. 깜짝 놀라 여자는 마법사의 눈치를 살폈지만, 도리어 그쪽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떤 재주를 더 부리더라도 상황이 완전히 자신에게로 넘어왔다는 자신감일까.

‘나’의 팔이 안으로 구부러지더니 난도질당한 제 몸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갑각을 열고 몸속을 훤히 드러냈다. 그 가운데 들어앉은 것. 동굴에서 보았던 어른 주먹만 한 장치. 이윽고 ‘나’는 제 가슴팍을 헤집어 장치를 손에 쥐었다. 잘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오오오, 그거야? 그게 비폭력장을 만드는 물건이야?”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마법사가 긴장을 풀고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위협적으로 빛나던 얼음들도 그 기세가 누그러졌다. 혹시 ‘나’의 작전은 그게 아닐까. 방심하게 만든 마법사를 다시 공격하여 죽이려는.

「그렇다.」 “척 봐도 기운이 마구 흘러나오는걸. 음, 역시 번개 같은 맛이 나. 하지만 여전히 마법은 아닌데.”

하지만 뭔가 붙잡을 구석이 없다. 그녀나 ‘나’나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은 비폭력장 발생장치이다. 이것은….」 “그건 나도 알아! 중요한 부분을 말하라고.”

 

지금처럼 심장이 없는 채로도 계속 살 수 있는 건지, 설령 팔다리를 전부 자르고 머리만 똑 떼더라도 불멸한 것인지. 아니면 짐짓 여유를 부릴 뿐 이 상태로 시간을 끌면 이길 수 있는 것인지. 그보다 설령 마법사가 지척까지 다가오더라도 ‘나’에게 그것을 기회로 삼을 여력이나 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얼음이 퍼지게 두어도 ‘나’는 끝장날 텐데.

“어떻게 쓰는 거지?” 「‘너’가 원하는 것은 모두 알려주겠다. ‘나’는 강조한다: 보호 대상과 ‘나’의 죽음을 방지하라. 적대 행위를….」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좀 해.”

마법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지팡이에서 빛이 났다. 얼음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가 널브러지자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몸이 언 것은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얼음기둥에 꿰찔려 거미줄처럼 너덜너덜한 꼴로 있던 것만은 면했다.

“얼음의 씨앗은 그대로 남아있어. 움직이기 곤란하겠지만 몇 시간 뒤면 사라질 거야. 이제 비폭력장을 쓰는 법을 알려 주면, 둘 다 털끝도 안 건드리고 사라져주지.”

「비폭력장 발생장치는 스스로 사용자를 인식한다. ‘너’는 이것을 손에 쥘 것이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고? 그럼 나도 너처럼 무적이 되는 거야?” 「…그렇다.」

갑자기 ‘나’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딱딱해졌다. 그 전이라고 꾀꼬리 같진 않았지만, 마치 돌을 모래사장에 처박는 것처럼 질고 탁해졌다. 어라?

여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비슷하게 말하던 때가 있었다. 어려운 상호작용의 종류가 따로 있다고 했다.

“쥐기만 하면 된단 말이지.” 「그렇다.」

마법사는 이미 장치에 정신이 팔려 제 앞의 것이 어떤 목소리로 말하는가는 신경 쓸 수 없었다. 불현듯 여자는 전날 밤 자신이 ‘나’를 보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럽다고, 자기도 비폭력장을 갖고 싶다고 말했더랬다. 그러자 ‘나’가 말했다. 보호 대상에게 비폭력장 발생장치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곤 피가 흐르고 숨쉬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히히히.” 마법사는 격앙된 표정으로 손까지 비볐다. 그리곤 여자가 있는 쪽을 흘끔거렸다. 괜히 마음을 들여다보인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하게 그 눈길을 받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렇게 거저로 어마어마한―아, 그런데 귀찮아졌어.”

여자는 제 귀를 의심했다.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협상을 거부하는가?」 “아냐. 그냥, 좀 더 빠르게 해보자고. 서로 편하게 말이야.”

 

‘나’의 손에서 장치가 떠올랐다. 또다시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요술이었다. 마법사는 거대한 붓을 쓰듯 지팡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장치를 공중에서 끌고 다녔다. 그러더니 그 궤도가 확 떨어졌다. 눈이 부셨다. 수정구가 저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깨닫자마자, 무거운 것이 가슴에 들이받혔다. 비폭력장 발생장치였다. 새우처럼 웅크리며 저도 모르게 그것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너’는 무엇을 하는가?」 마법사의 표정은 다시 종잇장처럼 편평해졌다.

“진정해. 넌 쟤가 살길 바라고. 이 장치는 쥔 사람을 그러니까,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아냐? 그러니까 두 개를 한 번에 하는 거야. 알겠어?”

여자가 등을 폈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젖무덤 사이가 찌릿거렸다. 장치를 쥔 손을 떼고 숨을 토해내고, 다시 깊게 들이쉬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 시험도 해보고 말이야. 겸사겸사.” 마법사가 눈웃음을 흘렸다.

여자는 재차 시도했다. 가슴팍을 부풀렸다. 제 몸이 아니라 주머니 따위를 억지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꾸역꾸역 바람이 들어갔다.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거쳐 몸속까지 내려갔다.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오그라들었다.

허파까지 내려간 바람이 아무것도 못 한 채 날숨으로 고스란히 튕겨 나왔다. 몸속이 유리 같은 것으로 뒤덮인 기분이었다. 혀가 꽃봉오리처럼 부풀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쓸모없어진 피를 꾸역꾸역 내던졌다. 그러나 갈수록 눈앞이 깜박거렸다.

여자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맨살에 쇳가루가, 서리가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몸이, 사지가 자꾸만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곱은 손가락은 살이 붉게 파이도록 쥔 것을 놓지 않았다. 거기 움킨 것이 비폭력장 발생장치라는 사실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여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 쳤다.

“자, 충분히 봤어요. 인제 그만.”

마법사는 아기를 보듬듯 말했다. 장치가 떨어져 나갔다. 모든 게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침이 퍽퍽 튀고 가래가 들끓는, 꼴사나운 당나귀기침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쪼그라든 몸에 다시 더운 피가 돌자 꿈같이 몽롱해졌다. 머릿속에만 우글우글 머물던 감각이 민들레 씨앗처럼 일제히 온몸으로 퍼졌다. 장치를 쥐던 손아귀는 대패질이라도 먹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말은 걸맞지 않게 노기까지 띠고 있었다. 여자의 생각은 아직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땅에 고개를 처박은 짐승의 그것처럼 실체도 없는 두려움만이 남았다. 그녀는 마법사를 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작은 체구가 날뛰며 지팡이를 휘젓고 있었다.

“뭔지도 모르는 게 쓰던 뭔지 알 수도 없는 걸 내밀면, 그걸 옳다구나 덥석 받곤 바로 내 몸에 써먹을 줄 알았단 말이지? 날 대체 뭘로 본 거야?

아직 생각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은 확실한데, 허둥지둥 땅을 딛던 여자의 발이 미끄러졌다. 무르팍을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바삭바삭. 몸 곳곳을 옮겨 다니던 쇳가루들이 귓가에 달라붙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되돌아왔다. 얼음덩이가 으르렁거리며 공기를 찢었다.

“피, 피해요….” 여자가 중얼거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 것이 쓰러졌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놓칠 수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남아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은 원래 그런 거니까. 제대로 봐야 하니까.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그러나 일은 다 되어 있었다.

비폭력장을 잃어버린 그 몸의 잔해는 더 이상 신비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초점 없는 눈이 사라졌다. 그 얼굴이, 목이, 상반신이 얼음에 뭉개져 파괴되었다. 불어터진 조각들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보다 작고 해변의 조약돌보다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부채꼴로 멋없이 흩어진 딱딱한 조각들. 그것으로 ‘나’가 매듭지어졌다.

“울지 마.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마법사가 말을 질겅질겅 뱉었다. 흉흉한 안광은 차라리 짐승에 더 가까웠다. 그녀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힘을 불어넣었다. 여자는 그 빛이 제 눈동자부터 발바닥까지를 꿰뚫는 것을 느꼈다. 저를 벌레처럼 말려 죽이려는….

 

*

 

“잠깐만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말의 아귀가… 뭐라고 했소?” 전령은 원래 하려던 말 대신 제 혀를 깨물었다.

“그다음에 한 말이, ‘잠깐만.’인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그걸 알았을 리 없지 않소?”

벌컥 화가 치밀었다. 조수가 얕게 빙글거리며 성질을 돋운 탓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장난 같은 태도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저 혼자 동떨어졌다는, 조금 엉뚱한 불안 때문이었다.

“말의, 이야기의 아귀가 전혀 안 맞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이 여기 어떻게…!”

조수는 천연덕스럽게 차부터 홀짝였다. 전령은 그 모습에 그만 진저리치며 시선을 돌렸다. 덜거덕. 하고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얼핏 귀가 설었다. 불쑥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부분이었다. 받침이 달각대는 소리. 잔을 쥔 모양. 그것을 들고 다시 내려놓는 기척.

잔은 아직 가득 차 있었다.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래요, 너무 떠들었죠. 음,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조수가 마른 입술을 날름거렸다.

나한테 원래부터 말동무가 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좋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그녀는 늘어놓고 있었다.

전령은 더 이상 이야기의 맞지 않는 구석을 따지는 데 관심이 없었다. 분명 마법사에게 ‘나’도 죽고 꼼짝없이 그 앞에 내던져진 그녀가 이제 와 조수를 자처하고, 그것도 모자라 정작 죽은 것은 마법사입네 제 입으로 주장하게 된 경위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의 시시콜콜한 정합을 떠나 그녀가 정말 ‘조수’인지, 이야기 속 전쟁이 묻힌 땅에서 태어난 여자 본인인지에도 관심이 떠났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말로 캐물을 단계가 지나갔다는 사실뿐이었다,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일찍 해도 좋겠죠. 설익은 과일이라도 맛만 좋으면 그만….”

입가에 주름이 잡히듯 자연스레 그리고 은밀하게, 전령의 손길이 품으로 향했다. 여민 단검은 조수 따위의 모가지는 이 하나 빠지지 않고 잘라낼 수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뉘어졌는지까지 그에게는 훤했다. 손잡이가 빨려드는 것처럼 손아귀에 쥐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전령의 손을 물어뜯었다.

 

섬뜩한 감촉이 손끝을 파고들었다. 눈앞에 번쩍 불이 댕겨질 만큼 깊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후다닥 팔을 빼자 보였다. 단검이 제 손을 깨물고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반달 모양으로 가지런한 칼날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식물의 꼬투리처럼 길게 뻗은 주머니가 칼자루에서 뻗어 나왔다. 제련된 쇠의 빛깔을 고스란히 간직하되 그 모양과 질감은 산 것의 아가리와 같았다. 그것이 큼직하게 입질하여 제 주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 품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게 벌어진 일이었다.

“뭘 어쩌려고 그랬어요? 책상을 가로질러서 내 멱이라도 슬쩍 서리해가게요?”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전령은 아직도 처음으로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환각인가?” “…환각을 참 좋아하는가 봐요.”

정나미가 뚝 떨어진 목소리로, 조수는 더 직관적으로 움직였다. 제 팔뚝에 오글거리는 쇳가루를 한 줌 쥐었다. 뽑아냈다.

부글부글 끓던 유리가 형상을 갖추듯 순식간에 예리한 도신을 갖춘 검의 형상으로 쇳가루들은 늘어섰다. 잎사귀가 뻗듯 보이지 않는 힘을 맥으로 삼아 무수한 입자들이 저절로 조립되었다. 조수는 어느새 제 상반신만 한 크기로 굳어진 그것을 휘둘렀다. 끝자락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휘도는 힘을 잘 조절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답니다.”

손을 놓았다. 전령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은 철검, 아니 보통의 철로 된 검이 아니라 가루가 뭉쳐져 만들어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 제 스스로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지도 그럴 수도 없는데도.

“아직 연습 중이라 부끄러운 재주네요.”

조수의 손짓을 따라 철검이 무너졌다. 바다를 찾는 강줄기처럼 무수히 쪼개져 제 주인의 몸으로 돌아갔다. 매미 우는 것처럼 윙윙 우는 쇳가루들의 소리가 당분간 공중을 떠돌았다.

“말도 안 돼. 그런 마법이 있다고?” “이제부턴 있을 것 같군요. 안 그래요?”

조수가 제 몸을 쓰다듬었다. 비례도 맞지 않고 거칠고 푸석거리는, 빈말로라도 아름답다고는 못 할 몸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차피 새 몸도 필요하겠다, 그리고 궁금했어요. 어떤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몸에 어떤 기운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에테르는 물론이고 원소와 감응하는 법도 달라진단 말이야. 그래서 해봤죠.”

 

조수의 몸에서 울퉁불퉁 쇠로 된 이빨들이 돋았다. 어금니처럼 낮고 둥글던 것들이 송곳니처럼 높고 뾰족해지더니, 나중엔 짐승의 상아나 언월도처럼 도저히 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솟아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몸이라면, 어떤 기예를 더 부릴 수 있을까, 하고요. 너무 늦게 옮긴 게 좀 아쉽지만….”

말허리를 자르고 쇠의 이빨 하나가 눈 녹듯 사라졌다. 시선을 내린 전령은 숨을 삼켰다. 이빨이 달려있던 신체 부위가 나뒹굴고 있었다. 손가락이었다. 뿌리까지 멀쩡한 손가락 하나가 마치 원래 거기 있던 장식처럼 우두커니 놓였다. 이런. 아홉 개 손가락을 굼실거리며 조수, 아니 마법사가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나쁠 거 없지요. 살아있어봤자 할 일이 대체 뭐가 있겠어? 여자도 술도 이미 오래전부터 모래를 씹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양손을 비벼 껍질인지 때인지 뭔지 모를 것을 마법사는 한 웅큼 뭉쳤다. 잘게 이겨서 풀처럼 쑤더니 끊어진 뿌리에 발랐다. 떨어진 것을 갖다 붙이자 다시 마법사의 몸과 이어졌다. 멀쩡히 다른 손가락들과 같이 움직였다. 조금 전 벌어진 일에 시치미라도 떼는 것 같았다.

전령은 머리를 감싸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현기증이 돌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가 까마득히 멀어지길 반복했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날 어떻게 할 셈인가?” “원래 어느 쪽으로든 살려 보내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마법사라는 거 알았는데도 반말할 셈인가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적당히 둘러대고 안심시켜서 보내려고 했죠 원래는. 마시지도 못하는 걸 왜 홀짝이고 있었겠어요?”

전령은 그녀가 집착적으로 제게 차를 권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도 불순한 의도가 있을까 조금 의심했지만, 정말 자기 대신 누군가가 먹고 마셔주었으면 바란 것인가.

“이 입이 방정이지, 정말 말동무가 평소부터 하나 있었으면 좋았겠어요. 아무튼, 살려 보낼 테니까 궁에 전하도록 해요. 전쟁 준비하라고.”

 

전령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에 대해선 고로 문외한이었다.

흉성이 떨어진 사실에 대해서도, 숲을 종횡무진 누비던 단단한 사람에 대해서도 물론 몰랐다. 줄곧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이들이 모르는 것을 두고 벌이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더욱이 창과 방패가 부딪히는 전쟁이라면 그 시작도 끝도 몇 번이나 지켜본 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생각이 알맞은 궤도에 올랐다. 궁의 전령으로서 가졌던 품위를 되찾았다.

“허튼소리. 왕께서 가만히 계실 것 같은가?”

마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화가 난 게 아니라 오히려 재밌어하고 있었다.

“내가 여태 왕의 멱을 따지 않은 건, 비록 늙은 멍청이들뿐이라도 나와 같은 기예를 익힌 것들이 궁에 있었기 때문이야. 마법이란 결국 다 한솥밥 두고 벌이는 다툼이란 말이지. 바보들이 부지깽이로 퍼먹을 동안 난 국자를 쓸 뿐이야. 그 안에서 우세를 점할 순 있지만, 완벽히 제압할 순 없어요. 절대로!”

“그래서 지금은 다르단 말인가? 그 철을 다루는 마법 하나 갖고? 자넨 결국 ‘나’의 비폭력장도 못 얻어내지 않았나?”

마법사는 심기가 불편한 듯 온몸의 이빨을 다시 돋게 만들었다. 옥수숫대처럼 쑥쑥 자란 철의 줄기가 주변의 식기나 잔에 새겨진 알량한 도금까지도 죄다 빨아들였다. 마법사의 분노의 양분이 되어줄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이야기에 집중해주어 고맙군요. 그리고 말을 좀 가려. 소식을 전하는 데 몸에 구멍 한두 개쯤 늘어도 상관없잖아.”

등골이 쭈뼛 섰지만 마법사는 그가 있는 쪽으로 눈을 두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듯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련한 눈길로 방 이곳저곳을 쓸어내렸다. 죽은 사람의 것처럼, 아니 실제로 죽은 사람의 것이 맞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되록되록 굴렀다.

“근데 맞아요. 죽은 몸을 갖고 놀더라도 비폭력장은 제대로 쓸 수가 없었어. 아마 그냥, 살갗하고는 안 맞는 게 있던 모양이야. 새로 익힌 재주도 그래. 궁의 마법사들이 바보는 맞지만 보고 흉내 정도는 낼 거야. 그래도… 그 단단한 사람한테서 얻은 게 좀 있거든.”

마법사의 몸짓에 따라 과자로 된 집이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엔 크고 작은 장치들이 가득 벽에 박혀 있거나 그 자체로 벽을 이루었다. 전부 거울처럼 매끈하고 낚싯줄처럼 정교했다. 길쭉하고 날씬한 것부터 사람이 들기 힘들 만큼 뚱뚱한 것도 있었다. 빗방울을 쏟아내기 직전의 하늘처럼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가 하면 알아보기도 힘들게 계속 모양이 바뀌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하나도 전령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이번엔 내가 흉내내는 쪽인데, 충분할 거예요. 이거야말로 나밖에 모르는 힘이니까.”

저릉저릉 땅이 울었다. 지하가 통째로 찢어져 그 울분을 내뿜는 것처럼 들렸다. 전령은 부리나케 책상을 붙잡았다. 튀어나온 장치 중 딱딱한 고리가 있는 것이 있었다. 고리의 안쪽을 타고 보기 싫게 튀어나온 막대가 있었다. 경황없이 걸친 손가락에 무심결에 힘이 들어갔다. 막대가 기울어졌다. 철컥. 하고 무언가 장치의 안쪽에서 이루어졌다. 그 끄트머리에서 이내 천둥을 토해냈다.

“조심 좀, 아. 젠장.”

뒤따르는 빛살은 해보다도 백배는 더 선명했다. 그런 것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장치를 빠져나왔다. 책상 귀퉁이와 솥이 걸쳐진 화덕, 책꽂이, 벽을 비스듬히 꿰뚫고 나가버렸다. 남겨진 것은 동전처럼 동그란 구멍들이었다. 도려내진 세간과 벽의 단면은 밝은 노란색으로 달아올랐다. 녹아내렸다. 설령 악마의 삼지창이라도 이뤄낼 수 없을 것처럼 그 풍경은 보였다. 지척의 책 몇 권이 안부라도 전하듯 가벼이 불길에 휩싸였다.

전령은 고리에서 부리나케 손을 뗐다.

“괜찮아요, 괜찮아. 마법의 집이 괜히 그렇게 이름을 지었겠어요?”

집은 다시 이런저런 과자로 돌아왔다. 다만 빛살이 꿰뚫은 곳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곰팡이가 홀씨를 퍼뜨리듯 주변 과자들로부터 반죽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빈 곳을 메웠다. 전령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마법사의 한숨에 그만 덜미라도 잡힌 것처럼 소스라쳤다.

“제발 조심 좀 해요. 이것들 전부 무기라고요! 그럼 어디까지 했더라….”

심장이 전령의 갈빗대 안쪽을 커다란 실로폰처럼 쾅쾅 두드려댔다. 그는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숨이 헛발질하듯 저만치 달려 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바닥의 진동을 따라 집이 조금씩 흔들렸다.

 

“‘나’의… 아니 그 단단한 놈을 뒤져보니, 몸속에 작은 번개가 잔뜩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게 단단한 놈들의 글자인 거 있지. 조금씩 해독 중인데, 아마 다 풀어헤치면 궁의 서고보다 넓은 책이 될걸.”

“그, 그럼 방금 그것들이 전부, 그 하나에서 나온 거란 말이오?” “아, 물론이죠!”

마법사는 길게 빼문 혀를 콱 씹었다. 밑동이 다 드러나도록 살이 잘렸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싯누런 곱이나 구더기가 쏟아져 나오는 게 더 인간적일 것 같았다.

“전투객체라고 스스로 말했으니까요. 그러니 전문가인 게지. 온갖 병법과 무기의 지식, 다루는 법과 만드는 법까지 전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쇠붙이 따위가 아니에요. 그놈은 하늘의 지도를 갖고 있었어요. 내가 아까 다른 세상들이 저 위편에 걸려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해?”

어떻게 그런 걸 잊을 수 있을까. 마치 다음날이 되면 지금 이 순간조차 잊어버릴 것처럼.

“까무러쳤다고 말했죠. 어떻게 안 그러겠어요? 수도 없이 많은 세상이 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는데! 내가 부리는 마법은 그 안에선 고작해야 꽃다발 속 꽃잎 한 장, 이 땅은 고작 이름도 없는 들꽃에 불과해요. 이곳과 같은, 이곳보다 훨씬 위대하고 오래된 세상들이 얼마든지 있어. 별의 수만큼! 그리고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해.”

떨림이 전에 없이 거세졌다. 산 채로 몸을 분리당하는 기분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지하에서 샘솟고 있었다. 전령은 귀를 기울였다.

쉼 없이 무언가 구부리고 접붙이고 도려내는 기척이 와글와글 이어졌다. 식어가는 쇳물이 쉿쉿 소름 끼치게 울었다. 화산 수십 수백 개가 동시에 노호를 터뜨리는 것 같았다. 꽝당꽝당. 무기질적인 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얼핏 들으면 검을 단조하는 것 같았지만 한 발 한 발 맞물리는 그 소리는 시작과 끝을 헤아리면 분명 보조를 맞춘 걸음이었다.

다시 막대한 양의 쇳물이 퍼부어졌다. 두꺼운, 흰 벽에 가까운 증기가 몸부림쳤다. 바람 한 줄기 냄새 한 줌마저 그 악마의 대장간에 갇혀 신음하였다. 놋쇠 징이 울었다. 행진이 계속되었다. 꽝당꽝당. 걸음걸이는 깃털처럼 가볍고 강철보다 단단했다. 눈송이가 쌓여 설원을 이루듯 그 전체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거푸집으로 굳혀 만들어낸 악마의 군대.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 될 것들이 부름 받아 움직이는 그 안에서 지옥의 모든 군세가 출정 준비를 마쳤다.

“이 짓무른 평화를 도려내는 수술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 더! 당신들의 협조가 필요해요. 어떤 계급, 어떤 나라, 어떤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계급, 모든 나라, 지시를 받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법사가 부푼 가슴을 펼치며 일어섰다.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꿈을 꾸듯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철로 된 이빨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 좁디좁은 땅덩어리를 활시위로 삼아 나는 바깥의 세상들로 손길을 뻗칠 거야. 그러기 위해선 군대가 필요해요. 지금의 십만 배는 더 많고 강력한 걸로! 그리고 그건 당신들의 손끝에서 탄생할 거예요. 수없이 많은 광산과 대장간과 무기고에서 나의 군대와 무기가 쏟아져 나와야 해요. 이 땅덩어리 전체가 하나의 심장이 되어 나의 힘을 별하늘의 구석구석까지 퍼 날라야 해요. 그 외의 다른 일에 몰두하는 어떤 나라도, 계급도, 아니 살아있는 사람 하나도 내 계획엔 필요 없어!”

주체하지 못한 쇳가루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를 중심으로 얽혀 드높은 첨탑이 되었다. 집의 천장을 쳐 날리며 솟아올랐다. 입자들이 무수히 얽혀 꿈틀거리는 그 모습은 거대한 악마의 핏줄 같았다. 마법사가 죽은 살을 휘둘렀다. 코앞까지 들이민 손가락으로 전령을 가리켰다.

“그러니 전하세요. 이 땅의 모든 깃발과 문장(紋章)을 불사를 군대가 곧 일어난다고, 한 뙈기의 땅도 한 줄기의 개울도 남기지 않고 해와 달을 아는 모든 이들의 집과 거리를 집어삼킬 거라고. 그리고 그 군대와 맨 처음으로 칼끝을 맞대야 할 곳이 바로 이 나라라고!”

지하에선 보조를 벗어난 발걸음이 이따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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