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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퍼즐조각들

2020.05.06 11:1605.06

퍼즐 조각들

 

사흘 전,「진실」이 날 찾아왔다. 한창 꿈을 꾸는 중에 아주 가는, 실금 같은 삐이이익- 소리가 나고,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무튼 그의 목소리는 불륨을 조금씩 올리는 것처럼 서서히 커졌다. 어느새, 그는 내 귀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처럼 바로 옆에 와 있었다. 꿈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년은 죽어야 마땅했어. 더러운 년.

난 모델처럼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몸을 배배 꼬듯 걷는 그녀의 특유한 걸음걸이 떠올리며,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십 번, 수백 번은 더 봤을 그녀의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눈, 코, 귀, 입술이 대체 어떤 식으로 얼굴에 붙어 있었던가? 기억하려고 애쓸수록 그녀의 얼굴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처럼 텅 비어있기만 했다. 더러운 년이라는 말을 곱씹던 난 어느 순간「진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음을 깨닫고 눈을 떴다. 내 옆엔 사람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둡고 찬 공기만이 둥둥 떠 있었다. 그는 공중으로 증발이라도 한 걸까? 어쩌면 생각에 푹 잠겨 있는 바람에, 그가 문을 열고 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도 몰라. 난 다시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진실」이 그저 꿈 속의 인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최근 들어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 만큼 현실감이 뚜렷한 순간도 별로 없으니까. 난 요즘 꿈 속에 사는 것만 같다.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만 같은 느낌. 나른함과 몽롱함은 인식의 경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뭐,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진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내가 자고 있는 중에만 날 찾아오는 건지도 몰랐다. 자신의 존재가 목소리와 함께 꿈 속에 묻히길 바랐던 거지. 하지만 왜? 그는 정체가 탄로나서는 안되는, 그런 비밀스런 존재인 걸까? 그래, 그건 뭐 그렇다 치고. 그는 그녀를 대체 어떻게, 또 얼마나 깊이 알기에 더러운 년이라는 말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걸까? 그는 한때 그녀와 연인 사이었거나, 아니면 모든 걸 공유하는 친구였을까?

사실,「진실」은 남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니 목소리로 성별을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처음 딱 들었을 땐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여자의 성대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 특유한 울림 또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그라는 남성 지칭 명사를 쓰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거기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단지, 그게 편하다는 것 밖에.

 

「진실」이 날 다시 찾아오는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변함없이 삐이이익- 소리와 함께 등장한 그의 목소리는 꿈의 한쪽 구석에서 서서히 볼륨을 높이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을 배경삼아 그녀는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었지. 무기력하게.

난 기억을 더듬었다. 신기한 건지 아니면 당연한 건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지직- 소리를 내며 꺼져버릴 듯 빠르게 점멸하는 가로등의 주홍색 빛을 받으며 얌전히 누워 있었다.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 퍽하고 터진 홍시처럼 머리에서 꾸덕한 피를 흘리며. 그리고? 그렇지.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하게.「진실」은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다 안다는 듯 곧장 말을 이어갔다.

난 사건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어. 너가 범인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피해자라는 것도. 얼굴의 흉터, 그게 바로 증거잖아? 그렇지?

난「진실」의 말이 옳다고, 아무도 몰라주는 나의 억울한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더 주절대던 그는 저번처럼 내가 생각에 빠져든 틈을 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난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엔 그저 어둠만이 가득 차 있단 걸 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그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 둔 질문들, 그러니까 그가 그녀와 어떤 사이었는지, 사건이 일어났던 그 시각 그 장소엔 대체 왜 있었는지, 그리고 날 어떻게, 왜 찾아왔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꺼내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대체 중요한 거란 뭘까?

 

「물고기」가 뜬금없이 내 앞에 나타난 건「진실」이 나에게 넌 오히려 피해자야, 하고 말한 그 다음날이었다. 사실, 비어있는 침대는 많았기에,「물고기」가 나타나면 안될 건 없었다. 오히려 이제까지 여섯 개의 철제 침대가 좌우로 도열해 있는 이 커다란 방을 나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밤에만, 그것도 꼭 내가 깊은 잠에 들었을 때만 나타나는「진실」과는 달리,「물고기」는 따가운 햇빛이 알루미늄 창살을 내리쬐는 한낮에나, 실내에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을 때에도 내 시야의 한 쪽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내 앞에서 뚜렷한 형상을 띠고 있는「물고기」보단 되려 목소리 밖에 들어보지 못한「진실」이 더 현실감이 있게 느껴졌다.

난「물고기」에게 무슨 이유로 여기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려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뒀다. 만약, 그 또한 나처럼 어떤 심각한 오해를 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면, 남들이 말하는 이유 따위는 몰라도 그만이었다.

「물고기」에게 내가 제대론 된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생김새가 생선과 무척 닮아서였다. 정확히 어떤 물고기와 닮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눈과 약간 벌려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치아, 그리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 부분 벗겨진 머리라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조합은 분명 저런 괴상한 모습의 물고기가 한 두 마리 정도는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깊고 깊은 바다 속에 살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신기하게도「물고기」는 나와 마찬가지로 왼손잡이였다. 전체 인구 중 단 9프로 정도만이 왼손잡이란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물고기」와 지금 이 곳에서 단 둘이 만날 확률은 1프로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정말 신기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틱 장애를, 구체적으로는 10초에 한번씩 왼손을 빠르게 아래 위로 흔들어대는 그런 기이한 틱 장애를 갖고 있었다. 그럼 그것까지 더해진 확률은 또 얼마나 적을까? 0.01%? 아니면 0.001%?

 

「물고기」가 여기서 하는 일은 딱 두가지였다. 녹화된 방송만 나오는 (9시 정각 뉴스를 제외하곤) TV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과 퍼즐을 맞추는 것, 그 딱 두가지. 그는 TV 보는 것이 지겨워질 때 쯤이면 침대 옆의 작은 선반 위에 올려 둔 퍼즐 통을 들곤 침대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퍼즐 통 겉면엔 완성되었을 때의 그림이 아닌, 그저 흰색 바탕에 까만 글씨로 <퍼즐>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침대 위에 올라선「물고기」는 작은 퍼즐 조각들을 누런 이불보 위에 모두 쏟아 놓은 다음, 그걸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다. 난 종종 창 밖을 보는 척 하면서「물고기」가 앉은 침대를 힐끔거리곤 했다. 완성된 그림이 어떨지 도통 예상이 가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 창가 바로 옆의 침대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중 몇 개는 침대 가에 붙어 바닥으로 떨어질랑말랑하는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다.「물고기」는 자기가 최대한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눈썹을 일자로 모은 채 인상을 잔뜩 썼다. 그는 규칙적으로 떨리는 왼손에 퍼즐 조각 하나를 들고 거의 10분 가까이 고심한 뒤에 백년만의 묘수라도 두는 듯한 단호한 몸짓으로 어느 한 지점에 그걸 탁, 하고(사실, 침대보 위였기에 탁,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내려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일부 완성한 퍼즐을 보면, 열댓개의 퍼즐 조각들은 서로 접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이어져 있었다. 난 그가 저런 엉터리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고심했나, 하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쩌면「물고기」가 이곳에 온 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누명을 쓰고 온 나와는 달리.

 

「물고기」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난 오늘만큼은 잠에 들지 않고「진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고자 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아니면 잠금 장치를 걸어놓지 않은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지. 하지만 문을 따고 온다면 열쇠는 어떻게 구했고, 창문으로 들어온다면 8층이나 되는 곳을 어떻게 기어올라 온 걸까? 초침 가는 소리와 창문 밖의 바람 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로 흘러들며 점점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정신을 차린 건 초침가는 소리도, 바람 소리도 아닌, 삐이이이-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난 눈을 뜨려했지만, 가위에라도 눌린 듯 눈꺼풀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난 하는 수 없이 눈을 감고는 점점 커져가는「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더러운 년, 진실, 그 시각 그 장소…… 잠시 후, 난 가까스로 입을 움직여 말했다.

항소심때, 너가 증인으로 좀 나와줘.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목격자가 나온다면, 판결은 충분히 뒤바뀔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 이야기를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체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실제로 말을 꺼낸 적이 없는지, 그는 그저 자기 할 만만 계속할 뿐이었다.

 

「물고기」가 입을 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서였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소등 시간 전까지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난 무슨 이유에서인지 퍼즐을 제대로 맞춰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왼손에 최대한 힘을 준 다음, 그가 엉망으로 맞춰 놓은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다가 끼워 넣었다.「물고기」는 그런 나를 꿈을 꾸는 듯한 멍한 눈빛으로 봤다. 내가 맞춘 퍼즐의 일부는 완성될 시에 어떤 그림이 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아직도 적지 않은 퍼즐 조각들이 누런 침대보 위에 널부러져 있었기에), 그래도 대충 예상을 해본다면, 두 사람이 코를 맞댄 옆 모습 같기도 했고, 피어오르는 연기 같기도 했고, 트로피 같기도 했고, 혹은 그 중 그 무엇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내가 맞춰 놓은 퍼즐 조각을 내려다 봤다. 무심한, 아니 졸리기까지 한 듯한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또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자기 눈썹을 일자로 모으며, 신경질적으로 내가 맞춰놓은 퍼즐 조각들을 흩트려 놓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걸 다시 엉뚱한 곳에 재배치하며 이렇게 말했다.

틀렸어. 바로 여기지.

「물고기」는 지금껏 말 한번 섞어보지 않은 내게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같이 쓸 수 있는 형용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건 갑작스러웠지만 또 동시에 자연스럽기도 했다. 만약 그가 존대를 했다면, 오히려 어색하고 이상하고, 심지어 불쾌할 거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비웃는 듯한, 혹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리 봐도 퍼즐 조각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좀 더 과장해본다면 있으면 안 될 자리에 서로의 몸을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 몸에 생선 머리를 갖다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퍼즐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물고기」의 입을 열게 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물고기」가 내뱉은 두 마디는 그가 이곳에 온 지 삼일만에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고(어쩌면 혼잣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후로 난 그와 정말 오랜만에 대화란 걸 할 수 있었다. 진실된 감정이 담긴 대화 말이다. 어쩌면, 난 그동안 말을 주고 받을 대상이 절실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자폐성을 더해만 가는 초침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정적과 어둠과 수 많은 생각들이 두려웠는지도.「물고기」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를 일이고.

 

「물고기」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건 그가 틀렸어. 바로 여기지, 라는 말을 한 다음날 밤이었다. 그날 밤에도 난 캄캄한 어둠 속에 둥둥 뜬 채로 최근 며칠 동안 날 찾아오지 않은「진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둠의 어느 한 지점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처음에 난 내가 꿈 속에 있고, 그 틈 사이를 뚫고「진실」이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물고기」의 목소리는 뜬금없었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유가.

「물고기」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유? 무슨 이유?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 아니면, 자기가 여기 오게 된 이유?

이유?

그래, 이유. 무슨 이유를 대면서 널 잡았냐고.

난 퍼즐 조각을 들고 있는 그의 졸린 듯한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처럼 말하는 그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난 기억을 되감아, 그들이 무슨 이유로 나에게 누명을 씌웠는지 생각했다. 다시금 난 점멸하는 가로등 아래에서, 퍽하고 터진 무기력한 모습의 홍시를 보는데…… 그리고 그 옆엔? 그 옆엔 내 지문이 잔뜩 묻어 있는 둔기가.

30cm의 손망치에 내 왼손 지문이 묻어 있었어. 아마 그거 때문이겠지.

네 지문이?

그래. 내 지문이. 근데 그럴 수 밖에 없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난 가만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난「물고기」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누구라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누구라도는 아니고. 진실을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만.

범인은 장갑을 끼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의 지문은 하나도 남지 않고, 내 지문만 잔뜩 찍혀 있었던 거지. 범인은 치밀했어.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으로 범행을 계획했던 거야. 그러니, 범행 장소를 cctv가 한 대 없는, 그리고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 아래로 선택한 거겠지.

「물고기」는 대답이 없었다.

난 잠깐의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물었다.

혹시 어제나 그제, 아니 며칠 전에 말이야. 한밤중에 어떤 남자 목소리 들은 적 있어? 사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왜 그러냐 하면,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거든. 다시 말해,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

다시 한번 대답이 없었다. 응인지 아니인지 모를 대답이 어렴풋하게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물고기」는 진작에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듣고 있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진실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닐까?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물었을 뿐인데, 나 혼자 신이 나서 그에 관해 떠벌거린 거고. 똑딱거리는 시침 소리와 창 밖의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어둠, 정적, 수 많은 생각들이 차례차례 이어지고……

 

근데, 왜 가만히 있었지?

왜 가만히 있었냐고? 그러게 말이야. 난 왜 가만히 있었을까? 근데,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물고기」는 어젯밤 안 듣고 있는 척 하면서 내 말을 다 듣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는「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냐는 내 질문엔 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갑작스러웠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물고기」는 대답이 없었다. 난 그런 그의 반응이 부족한 내 답변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 같아, 당시 난 왜 가만히 있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점멸하는 가로등을 등지고 좌우로 두리번 거리던 나. 잠시 후에 퍽, 하는 홍시 터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고.

망을 봐줬던 것 같아. 망을.

왜?

그건, 그러니까, 내가 범인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고. 망을 봐주지 않으면, 해를 당할 것 같았어. 손망치가 내 머리도 깨부술 것 같아 겁이 났거든. 그래서 그가 내 지문을 남기기 위해 둔기를 잡으라고 할 때도 그 말을 순순히 들었던 거야.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 그러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렇게 입을 열고 있지도 못할 테니까. 원하는 대로 다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얼굴에 온통 흉터를 낸 걸 보면, 그놈은 내 머리통을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놈임에 틀림없어.

흉터?

응. 얼굴에 난 손톱 자국.

남자가? 왜?

범인은 손톱이 길었어. 그리고 그 이유야 나도 모르지.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내가 피해자와 다투다가 그렇게 된 것처럼 만들려고 했을 수도 있고.

 음…… 근데, 넌 그 시간대에 거긴 왜 있었지?

 순간 난 사면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독방에서 취조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건 내가「진실」에게 하고자 했던 질문들 같아,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편의점에 가기 위해 잠시 집에서 나온 길이었을 거야. 혹은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왔는지도 모르고. 어쨌뜬, 우리 집 대문을 나와서 옆으로 조금 가다보면 깜빡거리는 가로등 하나가 서 있는 골목이 있는데, 웃긴 건 말이야, 누구도 그걸 고쳐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 생각해 보면, 그 골목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럴만도 하지. 거긴 그저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지 모를 쓰레기를 파먹는 길고양이나 가끔 지나다니는 그런 골목이었거든. 아무튼, 난 거기서 아주 약하게 울려 퍼지는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었던 거야. 그러곤 뭔가에 홀린 듯이, 거기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던 거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큰 실수였지.

「물고기」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가 제대로 알고, 또 기억하는 건 대체 뭐냐고. 그런 게 있긴 하냐고.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꾸며 말할 순 없었다. 언제나 진실이 중요했다.

범인에게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후로,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리에 가해진 큰 충격 때문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지. 여긴 순 엉터리라니까. 내 기억을 온전히 되살려내 진실을 밝혀 낼 생각을 해야지, 효과도 없는 약이나 주사, 그리고 심리 상담이랍시고 되지도 않는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

범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고기」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 말허리를 잘랐다. 다행히 그는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

그야 나도 모르지. 아마 자기 대신에 죗값을 치루는 나를 생각하며 낄낄거리고 있지 않을까. 그날, 홍시를 터뜨릴 때의 쾌감을 되살리면서 말이야. 다시 한번 그 손맛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며.

「물고기」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대답을 잠시 기다리던 난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누명도 곧 벗겨질 거야.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아주 길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에 들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길게. 그런 그의 퇴장은 독특했다. 괴상한 물고기를 닮은 그의 생김새만큼이나. 그는 어쩌면, 어젯밤처럼 자고 있는 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 난 고요하지만 광활한 어둠의 폭력성을 몸소 느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괴상한 물고기가 한 두 마리는 있을 법한 그런 심해 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물고기」와 난 며칠동안 매일 밤마다 짧은 대화를 나눴다. 주로 내가 이야기하는 쪽이긴 했지만. 한가지 이상한 점은, 그는 햇빛이나 불빛에 의해 얼굴이 드러났을 땐 통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그런 기이한 모습 때문에 그가 더욱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표정으로 그저 TV를 보거나 퍼즐을 맞추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퍼즐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또 엉망일 예정이었다.

 

꿈에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점멸하는 가로등 하나가 외롭게 서 있는 골목길에 주저앉아 내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그 어떠한 것도 달려있지 않은, 새하얗기만 한 얼굴을 보고 난 어떻게 바로 그녀임을 알 수 있었을까? 아무튼, 그런 그녀 앞엔 지문이 잔뜩 묻은 커다란 손망치가 둥둥 떠 있고……

난 잔뜩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다른 남자들이 다 나처럼 순하진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어? 그러니까, 그냥 헤어지자는 말로 끝내지는 않는다, 이 말이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즉시 집에 굴러다니는 손망치나 야구 방망이, 하여튼 뭐가 됐든 머리통을 깨부술 수 있을 만한 둔기를 들고 뛰어나올 거야. 범인을 감싸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그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몰라.

순간 삐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진실」만의 특유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현실과 꿈이란 얇디 얇은 경계선에 한발한발 내딛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더러운 년. 그렇게 몸을 함부로 굴리더니.

그러자 한창 꾸던 꿈과「진실」의 목소리가 한데 뒤엉켰고, 그 말은 겁에 잔뜩 질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점멸하는 가로등은 줄곧 지직-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표정의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유혹하는 듯한 그 걸음걸이…… 그래,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내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뭔가가 휙하고 바람을 갈랐다. 지직-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어느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캄캄해졌다. 그리고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저편에서「진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러운 년. 넌 오히려 피해자야. 얼굴의 흉터, 그게 바로 증거잖아? 더러운 년. 얼굴의 흉터, 그게 바로 증거잖아? 넌 오히려 피해자야. 더러운. 흉터. 피해자. 더러운, 피해자, 흉터. 더러운 피해자의 흉터.

 

「물고기」와 내가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게 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날 밤이었을까. 난 이제껏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넌 여기 왜 오게 된 거야?  

대답이 없었다. 마치 이 곳에 오게 된 이유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라도 되는 듯. 그는 말해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내가 뭔가를 물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죽였어. 날 줄곧 무시하던 여자를.

너무나 담담한 어투였다. 마치 밥 먹었어, 잠 잘 잤어, 와 같은 가볍디 가벼운 문장이라도 되는 듯. 그는 누명을 쓴 거라든지, 순전히 실수였다든지, 아니면 자기를 조금이라도 감쌀 수 있는 그 어떠한 변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서. 몸의 경련이 멈출 때까지 열댓번은 넘게 내리찍었지. 무기력하게 변해 버릴 때까지.

「물고기」는 그저 이 말만 남긴 뒤에 깊은 수면 아래로 헤엄쳐 들어갔다.

정적이 흘렀다. 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이런 분위기를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지고 또 심각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성대 끝부분이 굵은 줄에 꽉 묶이기라도 한 듯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그의 날카로운 이빨이 떠올랐다. 먹이의 살갗을 집요하게 물어뜯은 뒤 너덜너덜해진 살점을 삼키는, 심해에 사는 괴상한 물고기의 이빨이.「물고기」는 내가 한창 꿈 속에 있을 때, 조용히 내 침대 옆으로 걸어와 심장이나 급소 정중앙에다 그 날카로운 이빨을 찔러넣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명을 쓰고 이 곳에 온 것이 아니었고, 자기가 저지른 일 또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정신 상태는 나처럼 온전한지도 몰랐다. 온몸에 소름이 아주 작은 물방울처럼 몽글몽글 솟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된 때가.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 우리 사이엔 그저 초침 가는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정적과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린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각자의 생각 속에서 서로가 잠에 들었는지조차 확신이 없는 채로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물고기」의 일과는 여전히 똑같았다. TV를 보고, 발작적으로 떨리는 왼손을 들어 퍼즐을 엉망으로 맞추는 일의 연속. 하지만 난 더 이상 그의 왼쪽 손가락에 걸쳐져 있는 퍼즐 조각을 빼앗아 제대로 맞춰주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그저 침대 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퍼즐 조각들과, 엉터리로 맞춰진 퍼즐의 일부분, 그리고 그걸 내려다보며 고심하고 있는「물고기」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며칠이 지났다. 아니, 몇 주가 지났을 수도 있었다. 똑같은 일상의 며칠은 몇 주와 차이가 없으므로 그 어느 쪽이 되었든 내겐 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물고기」가 어느 날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난 왜 그가 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짐을 챙기고 문을 여닫는 소음을 듣지 못할 만큼 내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단 말일까? 그래, 그건 뭐 그렇다 치고. 그는 대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이 방을 나설 수 있었을까? 정신적인 문제가 없는 걸로 판정이 난 걸까, 아니면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걸까? 그렇다면 그가 전에 했던 이야기들은 대체 뭐란 말일까? 난「물고기」의 빈자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침대 위엔 누런 침대보가 벗겨진 채로 청록색의 매트리스만 덜렁 올려져 있었고, 침대 옆 옷걸이에 걸어둔 옷이라든가, 작은 탁상을 차지하고 있던 그의 잡다한 물건들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물고기」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퍼즐 통마저 없었더라면,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길고 긴 악몽에서나 보았던 인물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기억하려고 애쓸수록 인식의 손아귀에서 모두 빠져나가 버릴 만큼 휘발성이 강했다.「물고기」는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다.

난 퍼즐 조각들을 침대보 위에 모두 쏟은 뒤, 그가 늘 취하던 자세와 표정으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도무지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의 옆 모습인지, 연기인지, 트로피인지 모를 크고 작은 곡선의 조합들은 날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뜨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난 아래 위로 빠르게 떨리는 퍼즐 조각을 내려놓으며,「물고기」는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는 왜 이 퍼즐만을 남기고 갔는지와 같은, 중요하지도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질문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렸다.

 

「물고기」가 사라진 다음 날, 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차트에 뭔가를 끄적이러 방으로 들어온 단발머리 간호사에게 물었다. 진실된 감정이라곤 말살된 이들에게 뭔가를 물어본다는 것이 영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물고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 아니, 이 방에 있던 남자, 그러니까 대머리의 돌출된 눈을 한 남자 있잖아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나요?

그러자 차트에 눈을 박고 있던 간호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이 사람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냐는 듯한, 아니면 자기 권한으로는 그런 중대한 비밀을 알려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복잡하고도 미묘한 눈빛으로 날 잠깐 바라보던 간호사는 다시 차트에 고개를 박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난 간호사의 말이 모른다는 건지, 아니면 상부의 지시로 인해 알려줄 수 없다는 건지 확실치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으로 봤을 때 더 물어봐도 내가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난「물고기」가 자기 고향인, 한 점의 빛도 새어들어오지 않는 심해 속으로 들어갔다고 믿기로 했다. 먹이들의 급소에 날카로운 이빨을 꽂아넣으며 이렇게 말할 그를 상상하며. 틀렸어, 바로 여기지.

 

난「물고기」의 일상을 따라, 매일 소등 시간 전까진 녹화 방송 보기와 퍼즐 맞추기만을 반복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이 길고 긴 하루를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면,「물고기」가 오기 전까진 내가 대체 뭘 하면서 시간의 무게를 견뎌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먹는 약과 맞는 주사들은 어쩌면 내 기억을 조금씩 소멸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순간, 난 몇 억번의 초침 소리가 들리기 훨씬 전부터 이 단순하고도 지루한 일상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9시 정각 뉴스가 생방송으로 흘러나왔다. 화면 하단에 [골목 살인범의 판결에 대해 국민 청원이 빗발쳐……] 라는 하얀색 자막이 크게 떠 있었다.

앵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 년간 짝사랑하던 여성의 머리를 둔기로 수십번이나 내리쳐 살해한 한 남성에 대한 판결을 두고 국민들의 청원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현재 범인은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은 뒤, 정신 질환의 이유로 치료 감호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로……

형사들에게 양쪽 어깨를 꽉 붙들린 한 남자가 화면에 떴다. 상당 부분 벗겨진 머리 아래로 얼굴 전체를 가로지르는 손톱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딱지가 그 기다란 상처 위로 두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멍한 눈빛은 어딘가 낯설면서도 또 익숙했다. 난 천천히 왼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떨어질랑말랑 하는 딱지의 한쪽 끝부분 찾아내 과감하게 떼어냈다.

 

삐이이익-. 그날 밤「진실」이 날 찾아왔다.

더러운 년이 아닐지도 몰라. 난 무겁기만한 눈꺼풀을 들어올리려고 애쓰며 말했다.

왜?

뉴스에선 범인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격분해 둔기를 휘둘렀다고 했거든.

넌 그들이 하는 말을 믿어? 그들은 사실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그저 알고 싶은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을 뿐이지.

……

더러운 년이야. 너도 알잖아. 그리고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잠깐의 침묵 흐른 뒤에 내가 물었다.

혹시 범인은「물고기」였을까?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꽉 조여진 것이 스르르 풀어지듯 눈이 떠졌다. 주위엔 시계 초침 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켜 흐물거리는 어둠의 물질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의식은 그 높은 밀도 속에서 점점 또렷해져 갔다. 난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다음번에「진실」이 날 찾아오면,「물고기」에 관해 이야기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난 그동안 내 얼굴을 할퀸, 무시무시한 살인범과 한 방을 썼던 건지도 몰라. 얼굴의 흉터, 그게 바로 증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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