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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황월영전(黃月英傳) (SF)

2020.05.02 03:1105.02

0. 프롤로그

서기 1370년의 어느 여름날. 대한제국(大漢帝國)의 좌부총리(左副總理) 유기(劉基)는 전국 순시 중에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에 들르게 되었다. 주원장(朱元璋) 총리대신은 일찌감치 휴가를 떠나버렸고 우부총리(右副總理) 이선장(李善長)도 내일부터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촉한(蜀漢)의 창업 군주였던 유비의 능묘 혜릉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바로 그 근처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그마한 사당을 우연히 보게 된 유기는 질문을 던졌다.

저 사당은 뭔가?”

유기를 수행하던 성도시 관광과장은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소열제(昭㤠帝) 폐하의 참모였던 제갈량이라는 인물의 사당입니다.”

제갈량? 아아... 촉한의 삼국통일 이후에 역모를 꾀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그 제갈량 말이지? 왜 그런 인물을 모시는 사당이 여기 성도에 있는 것인가?”

과장은 계속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그게 ... 여기 성도에는 제갈량이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숙청당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통일 과정에서 제갈량이 사천 지방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워낙 커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인기가 제법 높습니다.”

유기는 고개를 저었다.

한실을 모반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다가 숙청당한 인물을 사당에 모셔놓고 기리다니 참 별일이로군. 우리 한나라가 고조 황제, 광무 황제, 소열 황제 이래 오늘날까지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유씨(劉氏)의 천하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갈량 같은 반역자들을 엄히 처벌했기 때문인데...”

유기는 역사의 패배자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고, 다가올 여름휴가 계획으로 대화의 주제를 옮겼다.

자네는 여름휴가 계획 잡았나?”

한족(漢族) 중국인과 전혀 다르게 노란 머리카락에 흑인처럼 새카만 피부를 가진 관광국장은 살짝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렇게 답했다.

오랜만에 고향인 바누아투(Vanuatu)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부모님께 아이들 자란 모습도 좀 보여드리려고요. 저궤도 우주항공선을 타고 가면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유기는 더위에 목이 말랐는지 뒤따르던 수행로봇이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서 국장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거 괜찮겠네. 바누아투는 남태평양 바다 한복판에 있으니 시원하겠는걸. 즐겁게 다녀오게. 주원장 총리님이나 이선장 부총리가 얼른 돌아와야 나도 이 더위를 피해 휴가를 갈 텐데 말이야 ... ”

 

1.

아직 여기저기 잔설(殘雪)이 남아있는 초봄이었다. 제갈량(諸葛亮)은 황승언(黃承彦)의 집 대문 앞에 방금 전 막 도착한 참이었다. 황승언이 제갈량에게 방문해 주기를 청하여 미리 악조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그의 집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갈량은 황승언이 왜 그를 불렀는지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듣기로 황승언에게는 얼굴이 박색인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을 제갈량에게 떠맡기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었다.

조조의 횡포를 피해 제갈 가문이 서주(徐洲)를 떠나 이 곳 형주(荊洲) 땅에 터를 잡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서주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에 대접받는 지역 유지 가문이었지만 토지를 모두 잃고 멀리 타향에 피난 온 이후로는 가문의 지체와 학식만을 인정받았을 뿐 경제 사정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부모님 대신 형주에서 제갈량을 돌보아 주시던 숙부마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후로 제갈량은 여전히 학문에 힘쓰고 있기는 했지만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돌보며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잇는 처지였다.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양양(襄陽) 지방의 명사 황승언이 누구에게도 맡기기 곤란한 박색의 딸을 시집보낼 수 있을지 떠보려고 제갈량을 부른 것이었다. 비록 그 자신도 이미 적령기를 훌쩍 넘은 나이였고 가진 재산도 없는 처지였지만 제갈량은 황승언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정중히 거절하기로 미리 마음먹고 있었다.

제갈량이 대문 앞에서 사람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좌우로 문이 활짝 저절로 열렸다. -하는 약간의 소음만 울렸을 뿐이었다. 제갈량은 당황하여 누군가 문 뒤에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집 안에 들어서니 개 두 마리가 달려와 제갈량을 보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사나운 개들 때문에 멈칫 하는 사이 황씨 집안의 여종이 달려와 개들의 혀를 살짝 눌러 넣자 짖어대던 개들이 금방 얌전해졌다. 제갈량이 유심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무로 만들어진 개 모양의 인형들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옛날 주목왕(周穆王) 시절에 언사(偃師)라는 인물이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움직이는 동물 인형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 어느 날 공명(孔明)이 황승언의 집을 방문하여 문을 열었다가 두 마리의 개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어 놀라는 일이 있었다. 여종이 급히 와서 개를 만져주자 금방 온순해졌는데 공명이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개 모양의 인형이었다고 전한다.

-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

 

여종은 당혹해 하는 제갈량을 집안으로 안내했고 황승언이 그를 맞이하였다. 두 사람이 예의를 차려 사소한 한담(閑談)을 적당히 주고받은 후에 황승언은 이렇게 말머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날에 우리 식솔들과 멀리 떨어진 호수가로 피서를 갔던 적이 있소. 보름달이 높이 뜬 밤하늘을 보면서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소리가 들리더니 달빛에 그림자가 지고 무엇인가 커다란 쇳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에 빠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오. 물가로 달려가 보니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겨우 헤엄쳐 나와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쇳덩어리는 호수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버렸소. 겨우 살아난 소녀를 데려와 보살피다가 오갈 곳 없는 처지가 안타까워 우리 부부는 그 아이를 수양딸로 삼았지.

이제 그 아이가 자라 과년한 나이가 되었소. 비록 생김새는 기이하지만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어 가히 천하영웅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와룡선생(臥龍先生)이 사람을 벗 삼는데 있어 재산과 신분을 개의치 않고 재능만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연분이 아닐까 싶어 이렇게 오시라 했소.”

제갈량은 뭔가 거절하는 반론을 하고 싶었지만 그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훤칠하게 키 큰 처녀가 나타나 황승언의 옆에 앉아 눈을 내리 깔았고 제갈량은 하려던 말을 꿀꺽 도로 삼켜버렸다. 소문대로 샛노란 머리카락에 칠흑처럼 새까만 피부를 가진 무시무시한 외모였다.

달꽃이라 하옵니다.”

처녀가 자리에 앉아 자신을 소개하자 황승언이 수양딸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이 아이를 만났을 때의 사연 때문에 달에서 튀어나온 꽃 같은 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달꽃부리(月英), 달꽃이라 이름 지었소이다.”

제갈량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월영을 계속 쳐다보았고 마음이 다급해진 황승언은 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들어오실 때 저절로 열리는 문이나 스스로 움직이고 짖어대는 강아지 나무 인형들을 보셨을 것이오. 수양딸일지라도 자식 자랑 같아서 내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그 기이한 물건들은 모두 달꽃이가 만든 물건이라오. 이 아이가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기이한 재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소.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소문난 와룡선생에게 잘 어울리는 배필이 아닐까 생각하오.”

계속하여 꼼짝하지 않고 월영을 바라보던 제갈량은 황승언의 말이 끝나고서도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저 자동문과 나무 개들이 모두 따님의 작품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열심히 나무공예를 하고 쇠를 다듬더니 얼마 전부터는 저절로 움직이는 인형들을 만들기 시작합디다.”

제갈량은 잠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황승언과 월영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제갈량이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황승언은 놀라 기쁨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월영 또한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쁘면서도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제갈량과 월영은 정식으로 혼례를 올렸고 형주 일대의 남자들은 모두 제갈량이 황승언의 재산과 영향력을 노리고 결혼했다고 비웃으며 술자리에 모일 때마다 이런 노래들을 불러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내 고르는 것만큼은 공명을 배우지 마라. 황승언의 못생긴 딸을 얻게 되리라~~.’

-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양양기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註釋 襄陽記)>

 

2.

혼례가 끝나고 처음으로 둘만이 함께 있게 된 초야(初夜)에 제갈량은 월영에게 가장 궁금하던 것부터 먼저 물어보았다.

부인,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왔소? 나처럼 중원(中原)에서 이주해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월영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소저(小姐)는 저 멀리 남쪽 바다에 있는 바누아투라는 작은 섬나라에서 왔습니다.”

바누아투? 그렇게 먼 나라에서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오?”

말씀드려도 아마 믿지 못하실 것입니다. 양부모님들께도 말씀드렸던 적이 있지만 저를 이상한 아이 취급 하셨지요. 저는 1200년 즈음 뒤의 세상에서 왔습니다. 1200년 뒤에는 기술이 발달하고 천하가 더욱 커져서 제가 태어난 바누아투까지 중원의 문명이 전해져 있습니다. 저의 친부모님께서는 바누아투에서 이민 오신 분들이었답니다.”

미래에서 왔다는 월영의 이야기를 듣고 제갈량은 아연해했다.

천년 뒤의 세상에서 왔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단 말이오?”

월영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 저희 가족은 고향 바누아투를 잠시 방문하러 가기 위해 저궤도 우주항공선을 타고 있었는데 양양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운석과 충돌하는 사고가 나면서 그만 시공간이 뒤틀려 버렸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 시대의 하늘로 튀어나오게 됐고 호수에 우주선이 추락하면서 저만 운 좋게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은 우주선이니 시공간이니 하는 월영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월영을 바라보니 그녀는 양부모처럼 남편에게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걱정하며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 부인의 그 놀라운 재주들은 천년 뒤의 세상에서 배운 것이오?”

그렇습니다. 서기 1370년의 세상에는 로봇이라는 기술이 발달해서 보셨던 바와 같이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불과 13살 때 이 시대로 와서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로봇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지식이 좀 있습니다. 원래는 주로 금속으로 만들지만 여기서는 구하기 쉽지 않아 부득이 나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월영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제갈량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웃으며 그녀를 안기 시작했다. 제갈량을 받아들이며 월영은 이렇게 덧붙였다.

박색인 저를 아내로 삼으신 이유가 다름 아니라 저의 보잘 것 없는 재주에 있음을 소저도 잘 압니다. 미래에서 배운 재주를 잘 활용해서 큰 뜻을 펴실 수 있도록 평생토록 돕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것은 싱그러운 봄기운이 완연하던 음력 3월의 어느 따스한 밤이었다.

 

3.

()나라 대도독 주유(周瑜)가 화살이 부족하다면서 열흘 안에 10만 발의 화살을 제조해내라고 처음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제갈량은 상대의 속셈을 익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감당하기 벅찬 임무를 부여하고 기한에 맞추지 못하면 그걸 빌미로 자신을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해서 이익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조군이 코앞에 닥쳤는데 열흘이나 시간을 끌 여유가 있겠습니까. 단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열흘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주유는 제갈량이 스스로 3일 기한을 설정하자 상대가 계략에 걸려들었다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사흘이면 된다고요? 와룡선생은 방금하신 그 말씀에 책임을 지실 수 있으십니까?”

.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재료가 없으면 화살을 만들 수 없으니 사흘이라는 기간은 화살 10만발 분량의 재료가 모두 도착한 그 순간부터 계산해서 사흘로 하겠습니다.”

애초에 주유는 재료도 늦게 제공하고 화살 만드는 장인(匠人)들에게도 태업을 시킬 심산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갈량은 시간제한을 불가능할 정도로 줄이는 대신 재료는 확실하게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유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역제안이었다. 장판파에서 대패하고 쫓겨 온 유비군에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있을 리 없으니 결국 화살은 오나라 기술자들이 만들어야할 터였다. 그들에게 적당히 태업하며 시간을 지체하도록 지시를 내려놓으면 제갈량이 아무리 재주를 피워도 3일 기한에는 절대로 댈 수 없을 것이었다.

좋소. 재료는 오늘 밤까지 모두 제공해 주겠소. 그 대신 3일이 지나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내 앞에 화살 10만발이 당도하지 않으면 그대는 군령을 어긴 죄로 참수당할 것이오. 확실히 하기 위해 군령장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옆 자리에 배석해 있던, 제갈량의 영원한 호구(?) 노숙(魯肅)은 터무니없는 호언장담에 너무 기가 막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나라 기술자들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하루 1만발 제작하기가 빠듯할 텐데 아무리 재료가 충분하다한들 어떻게 사흘 만에 화살 10만발을 만들어 낸다는 말인가.

그날 저녁 화살 만들 재료들이 도착하자 제갈량은 내용을 알 수 없는 편지와 함께 재료의 9할을 배에 실어 어딘가로 보내버렸고 남은 1할만을 오나라 기술자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사흘 내내 밤마다 노숙을 불러 술판만 벌였다. 주유의 은밀한 지시대로 오나라 기술자들의 작업 속도는 아주 더디었고 하루 1만발은커녕 사흘 동안 1만발이 간신히 제작됐을 정도였다.

안개가 자욱했던 3일째 밤이 지나고 기한인 4일째 아침이 밝았을 때 전날 밤에도 제갈량과 부어라 마셔라 술독에 빠졌다가 간신히 깨어난 노숙은 화살을 산처럼 실은 채 강가에 정박해 있는 유비군의 군선(軍船)들을 본 순간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제갈량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주유 또한 기겁해 버렸다고 전해진다.

주유와 노숙의 반응을 본 제갈량은 의기양양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비군 진영으로 돌아왔고 며칠 만에 월영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수일 만에 다시 만난 월영은 피곤한 모습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사흘 사이에 화살 10만발을 제조하라는 힘든 임무를 갑자기 맡기시면 어찌 하옵니까.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겨우 기한에 대었습니다.”

부인, 고생 많았소. 그렇지만 얼마 전에 전에 자동공작기계라는 것을 내게 보여주며 화살을 하루에 4만발까지 제조할 수 있다고 자랑한 사람은 바로 부인이잖소?”

월영은 더욱 입술이 앞으로 튀어 나온 귀여운 모습으로 불평을 계속 했다.

하루 4만발은 저의 공작기계가 최고의 상태로 하루 종일 동작할 때 만들 수 있는 숫자이고요, 작업에 들어가면 기계가 멈추기도 하고 부품을 교체해야하기도 하고 기계를 돌리는 하인들이 지쳐버리기도 해서 실제로는 4만발씩 만들려면 밤낮없이 꼬박 일해야 겨우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월영에게 사과했다.

그랬다면 미안하오. 나는 하루 4만발씩 사흘이면 12만발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문관(文官)이 기술을 이해 못하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가 밤낮없이 일하는 동안 어찌 지내셨나요?”

“3일 내내 노숙과 술 마셨소.”

이 말을 듣자 월영은 더더욱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쩜... 문과 출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납기(納期)로 멋대로 계약해 놓고 엔지니어들이 죽어라 고생하는 동안 그네들은 접대 핑계로 부어라 마셔라 놀자판을 벌인다고 제 삼촌께서 푸념하셨던 적이 있는데, 이 시대도 똑같다니요!”

엔지...니어가 뭐요?”

몰라욧! 그런 게 있어욧.”

제갈량은 되도록 월영을 달래보려고 애썼다.

그래도 내가 목숨 걸고 재료를 구해왔잖소. 달꽃 당신이 그 자동공작기계 완성해 놓고도 재료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기에 내 딴에는 목숨 걸고 9만발 분량의 재료를 구해온 거요. 당신이 말하기를 자동공작기계는 재료의 낭비가 적어서 화살 1대를 만들 재료로 2대를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오나라에 10만발 화살을 보내고도 우리에게 재료가 절반 가까이 남았을 것 아니오. 그 남은 재료로 만들 화살은 우리 군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니 그만 너그러이 화 푸시오....”

그러나 사흘 밤낮으로 철야작업에 시달린 월영은 토라진 기색을 풀지 않은 채 돌아누워 잠들어 버렸고 그날 밤만큼은 제갈량도 자신의 부인 근처에조차 가지 못했다.

 

... 주유가 제갈량에게 사흘 안에 화살 10만발을 만들어 올 것을 요구하자 제갈량은 흔쾌히 응낙하였고 3일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3일째 밤에 조조군의 진영 앞에 짚단을 잔뜩 쌓은 군선들을 몰고 가서 크게 북을 울렸다. 안개 속에서 기습을 두려워한 조조군은 화살만 계속 쏘아 댔고 다음날 아침 안개가 걷혔을 때 제갈량의 군선들에는 10만발이 넘는 화살이 꽂혀있었다고 전한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4.

제갈량이 갑작스레 한 떼거지의 손님들을 데리고 집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형주에 있을 때도 해마다 몇 번 정도는 그런 일이 있었다. 월영과 혼인한지 얼마 후 제갈량은 삼고초려의 예를 통해 유비에게 출사했고 그 뒤부터 다수의 손님들을 갑자기 집에서 대접해야 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제갈량은 월영의 사정을 도무지 생각도 하지 않고 기분이 내킨다 싶으면 수십 명의 손님을 몰아오면서 미리 언질조차 없이 집에 들이닥치는 그런 남편이었다. 월영을 형주에 남겨두고 유비의 파촉(巴蜀) 공략을 돕던 지난 수년간은 그럴 일이 별로 없었지만, 이제 익주(益洲)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고 형주에 있던 식솔들이 성도로 옮겨오자 그 버릇이 다시 도진 것이었다.

20여명의 손님들이 집 안을 차지하고 앉은 모습을 보고 제갈량은 아내를 생각해 준다는 듯이 괜찮겠소?’라고 빈말로 물었지만 월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오래지 않아 식사와 술상을 내어왔다.

사실 제갈량에게 이런 버릇이 생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신혼 초에는 어쩌다 보니 예고 없이 손님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그 때마다 월영이 너무도 침착하고 신속하게 식사를 준비해서 오히려 손님들에게 칭찬을 듣곤 했었다. 사고를 쳤는데도 아무 탈 없이 잘 수습되니까 그만 버릇이 되어버려서 제갈량에게 내가 아무리 급하게 손님을 데리고 가도 월영은 감당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역시 부부 사이는 초장에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

월영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게걸스럽게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웬만큼 배가 불러오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갈량에게 물었다.

와룡선생, 형주에 있을 때부터 부인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갑자기 나타나도 언제나 훌륭한 상차림을 내어오셨소. 당시에는 하녀가 유능하고 손놀림이 빠른가 싶었는데 이제 익주로 옮겨와서 아랫사람들이 모두 바뀌었을 텐데도 부인의 빠르고 훌륭한 음식솜씨는 여전하신 듯하오.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갈량은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혼한 지 이미 10년이 됐지만 월영이 어떻게 늘 이처럼 신속하게 손님들을 응대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원래 남편들은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궁금증이 발동한 제갈량과 몇몇 손님들은 부엌으로 가서 월영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그들이 부엌문을 열자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참으로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부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들이 여럿 있었는데 동작은 인간보다 조금 뻣뻣했지만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몸놀림으로 신속하게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칼잡이 인형의 칼질 소리는 마치 날랜 말의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하면서도 빨랐고, 불 앞에서 조리하고 있는 인형의 팔놀림은 조자룡의 창술(槍術)만큼이나 박력 있었으며, 식재료를 씻고 다듬는 인형의 동작은 잘 훈련된 정예 병사가 움직이듯이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신속하게 절도 있었다. 부엌 안에 사람은 월영과 하녀 1명만 있었는데 그나마 월영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 채였고 하녀가 바퀴를 돌려 인형들이 움직이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부엌문을 열어젖히자 월영은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인형들을 감추고자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자동인형들의 재주를 보면서 제갈량과 동료들은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월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벌써 다들 드셨나요? 지금 두 번째 술상이 거의 다 준비되었으니 곧 다음 안주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제갈량의 부인 황씨는 아무리 많은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쳐도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으며 매우 빨리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비결을 궁금해 하는 손님들이 부엌을 들여다보면 나무인형들이 황부인을 돕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

 

5.

주군인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의 자리에 오르고 형주 서부와 파 · · 한중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그의 일급참모이며 오른팔인 제갈량 또한 나날이 권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런 제갈량에게도 한 가지 근심이 있었으니 월영과 혼인한지 햇수로 15년이 되도록 아직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비의 한중왕 등극을 축하하는 잔치가 며칠 동안 연이어 계속되던 219년 어느 초가을날 밤에 월영은 갑자기 제갈량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결혼한 지 벌써 15년이 되었건만 우리 내외간에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첩실(妾室)을 들여 후사를 보실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연회에서 마신 술의 취기가 아직 남아있던 제갈량은 월영의 이야기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혼인한 직후에 내가 한중왕 전하께 출사하였고 그 이후 적벽대전부터 한중공방전까지 쉴 틈 없이 내달려 왔소. 당신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지 않으니 아이가 생기기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오. 그리고 주군(主君)을 따르는 우리 동료들은 언제 죽음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처지들이기도 하고. 실제로 장판파에서 주군의 부인이시던 미부인께서 목숨을 잃으셨기도 하고, 당신 또한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을 넘기지 않았소? 이런 난세에는 차라리 자식 없는 것이 어쩌면 홀가분하고 더 나을 수도 있소.”

하지만 전하께서는 형주를 차지하신 후에 손부인을 다시 얻으셨고 또 감부인께서 낳으신 아들인 아두(阿斗)도 이미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주와 익주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신 보람이 있어 한중왕위에 오르실 만큼 정세도 안정되었고요. 이제라도 첩을 보셔서 집안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심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첩을 얻지 않을 생각이오. 내게 아내는 달꽃 당신 하나만으로 충분하다오. 나는 차남이라 제사를 이어야할 부담도 없소. 제갈근(諸葛瑾) 형님께서 동오(東吳)에서 벼슬하고 계시고 아들이 셋이나 있으시니 집안의 대를 잇는 일은 형님께 맡기면 될 것이오.”

남편의 마음에 감복한 월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움을 표하면서 다시 말했다.

그래도 자식 하나 없이 어찌 ...”

월영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려하자 제갈량은 결혼 생활 중에 처음으로 부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내 평생 부인은 당신 하나뿐이오. 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비록 전하께서 이곳 촉 땅에 자리를 잡으셨다 하나 아직 한실(漢室)을 부흥시키고 조조를 몰아내어 천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거대한 과업이 남아 있소. 장부가 큰 뜻을 이루기도 전에 여색부터 탐닉하다니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오.”

월영은 눈물어린 눈으로 새삼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며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말이 끊긴 후 제갈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히 장래가 걱정된다면 양자를 들이는 방법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형님의 차남인 제갈교(諸葛喬)가 영특하다고 하니 양자로 보내 주십사 한 번 청해보도록 합시다. 듬직한 양자가 있으면 당신이 걱정하는 문제들은 모두 해결될 것이오.”

 

... 그 시대에는 정말로 보기 드물게 제갈량은 자신의 공언대로 평생 동안 첩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 중국 민간전승 (中國 民間傳承)>

 

6.

월영을 처음 만났을 때 포원(蒲元)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다.

듣던 대로 정말 기괴하게 생겼네. 도깨비처럼 샛노란 머리카락에, 마귀처럼 새까만 피부에, 키는 또 왜 저렇게 큰 거야,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겠는데? 승상(丞相)처럼 높은 벼슬아치의 아내라면 응당 당대의 미녀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직접 접해보니 영 아니구먼. 일개 대장장이 기술자의 마누라인 우리 부인이 차라리 더 예쁘겠다. 아니면 박색의 부인은 정략결혼이고 예쁜 첩을 따로 두고 있나?

승상 제갈량으로부터 부인인 황월영의 지시에 따라 나무소 목우(木牛)와 나무말 유마(流馬)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처음 받았을 때 촉나라의 군사기술 총책임자인 포원은 정말 당황했다. 아무리 포원은 천한 대장장이이고 상대는 촉한의 승상 부인이라지만 당최 아녀자가 기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녀의 명을 따르라는 것일까.

하지만 막상 월영과 직접 만나 일을 해보니 애초의 우려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여기가 구동축이고 저기가 캠(cam)이에요. 축의 회전운동을 캠을 이용해 왕복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죠....”

월영은 듣도 보도 못했던 신기한 기술들을 포원에게 끊임없이 전수했다. 월영이 그려준 그림대로 나무를 깎고 쇠를 담금질하여 조립하면 기계들은 월영이 예언한 그대로 움직였다. 그것도 사람이 같은 일을 할 때와 비교해서 몇 배나 힘은 덜 들고 훨씬 더 정확하게. 함께 일하는 장인들은 월영이 귀신을 부린다며 무서워했지만 기술자로서 포원은 알 수 있었다. 승상 부인은 진짜배기라는 것을. 제갈 승상이 포원에게 월영과 일하라고 명령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1년 가까이 월영과 함께 제작한 나무소 목우를 시험하는 날이었다. 월영의 설계대로 만들어진 나무소의 혓바닥을 당기자 목우는 진짜 소처럼 느리지만 성큼성큼 걸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빈 몸이 아니라 곡식 10여 가마를 등에 짊어진 채로. 목우는 걸어가는데 흔들림도 없었고 걸음의 좌우 폭도 아주 좁아서 검각(劍閣)의 좁은 잔도(棧道)에서 운송수단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우와~ 됐다, 됐어. 제대로 작동한다아~”

자신이 설계한 기계가 작동한다고 저렇게 소녀처럼 팔짝팔짝 뛰는 귀부인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라고 포원은 속말로 중얼거렸다.

포원 대감, 이제 됐어요. 나무소 목우가 성공했으니 이번에는 나무말 유마도 만듭시다.”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월영의 눈이 의욕에 넘쳐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며 포원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갈 승상은 저 부인이 정말로 좋아서 혼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 목우는 배가 방형이고 머리는 둥글다. 다리 하나에 발이 4개이고 ... (중략) ... 유마의 치수는 다음과 같다. 갈빗대는 길이 35, 넓이 3... (하략) ...

  1. 제갈량집(諸葛亮集)>

 

7.

생산된 목우유마들의 성능을 보고 났을 때 제갈량은 정녕 흡족한 표정이었다. 월영이 설계하고 포원이 제작한 목우유마들은 얼마 전에 한중(漢中)의 험한 길과 좁은 잔도에서 실시된 시험을 예상대로 가볍게 통과했고 수량도 충분히 생산되고 있었다. 위나라를 북벌(北伐)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난제였던 보급수단의 문제가 드디어 해결된 것이었다. 이제 촉군은 보급 걱정 없이 한중을 통해 위나라의 농서(籠西)지방과 관중(關中)지방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포원에게 큰 상금을 내리고 공로를 치하한 다음 제갈량은 월영과 함께 목우유마 제작 공방을 떠나 승상부(丞相部)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로봇 가마를 탔고 뒤에는 호위하는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평소 늘 입고 지내던 옷이 아닌, 대장장이 기술자들이 입는 작업복을 착용하고 있던 월영은 여느 때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부인, 정말 고맙소. 위나라를 북벌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보급수송 문제를 부인과 포원이 이렇게 속 시원히 해결해 주다니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월영은 자신의 로봇들을 남편이 칭찬해 주자 기분이 좋아져서 두 눈을 반짝이며 즐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승상. 소저의 보잘 것 없는 재주가 승상의 큰 뜻을 이루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하니 진실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월영의 대답을 고맙게 여기며 40살 가까이 되어도 여전히 그녀의 총기 넘치는 눈빛을 바라보던 제갈량은 오래 전부터 궁금해 오던 질문을 갑자기 던졌다.

그런데 부인은 왜 나와 혼인할 생각을 했소? 그 당시 나는 중원에서 집안 재산을 다 잃고 형주로 피난 와서 스스로 농사지어 겨우 먹고 살던 처지였던 데다가 나이조차 많은 노총각 아니었소. 반면에 비록 수양딸일지라도 당신은 양양에서 손꼽히시던 황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내게 흔쾌히 시집 온 까닭이 궁금하오. 혹시 내가 당신의 로봇 재능을 알아 줄 것 같아서?”

제갈량의 갑작스런 질문에 월영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검은 얼굴이 두드러지도록 상기되면서 이렇게 답했다.

승상, 사실 저는 승상께서 양아버님 댁을 찾아오신 그날 승상을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젊은 날의 승상께서는 듣던 소문대로 8척 신장이 훤칠하시고 어쩌면 그리 용모가 수려하신지 과년한 처녀의 마음을 한 순간에 빼앗고도 남을 정도셨지요. 승상께서 단번에 저와의 혼인을 응낙해 주신 그날 밤 어린 소녀는 마음이 설레어 한숨도 잠들지 못했었답니다. 재산 같은 것은 그 당시 저에게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대화가 오고 갔을 때 마침 일행이 제갈량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말을 다 마친 월영은 상기된 표정으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로봇 가마에서 내려 손자를 보러 가야하겠다 인사하고 종종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자 제갈교가 작년에 아들 제갈반을 얻어 제갈량과 월영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제갈량의 집 대문은 20여년 전에 형주의 황씨 집안 대문이 그랬던 것처럼 월영이 지나감에 따라 징-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여닫혔다.

 

8.

다음 해 제갈량과 월영은 성도 근교의 어느 큰 절에 며칠간 묵으며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절기는 음력 3월초의 봄날이었고 사찰 경내는 물오른 수목들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녁나절 대웅전 뒤쪽의 숲 속을 함께 거닐면서 제갈량은 몇 발짝 앞서가는 월영의 자태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을 느꼈는지 아내가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더니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귀여운 미소와 함께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저와 같은 박색의 추녀와 혼인하시기로 마음먹으셨던 것입니까? 사실은 승상께서 그 때 단번에 응낙해주셔서 양아버님께서 엄청 놀라셨습니다. 양아버님 말씀대로 저의 작은 재주를 높이 평가해주셨던 것인가요?”

제갈량은 호탕하게 껄껄 웃더니 월영이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를 알려주었다.

우리가 혼인했을 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숙덕거리곤 했었지. 공명은 황승언 집안의 배경을 보고 결혼한 것이라고 말이오. 그리고 장인어른께서는 내가 부인의 재주에 반해 혼인하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내가 금방 혼인 제안에 응하니까 바람이 맞아 들어갔다고 기뻐하신 듯하오.

그건 전혀 그렇지 않소.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순전히 당신의 매력에 끌렸기 때문에 단번에 승낙했던 것이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총각 시절에 내 취향이 좀 유별나고 이국적(異國的)이었던 것 같소. 다른 친구들은 다들 한 품에 들어오게 자그마하고 통통한 여인을 좋아했는데 나는 늘상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여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남들은 눈매가 누에처럼 가늘고 길며 얼굴이 하얀 여인을 미인이라고 했는데 나만 눈이 둥글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처자들을 더 좋아했으니 말이오. 월영 당신이 눈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 깜짝 놀랐소. 내가 늘 바라왔던 여인의 모습이어서 말이오. 물론 나도 피부가 까맣고 머리카락이 샛노란 여인까지는 상상하지 못했었지만 막상 당신을 보니 그 이국적인 자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 그래서 거리낌 없이 혼인을 승낙했던 것이오.

항간에 말이 많았던 것은 알았지만, 나야 뭐 당신이 좋았기 때문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던 터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개의치 않았을 뿐 ...”

제갈량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월영은 예의 그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을 웃은 다음 그녀가 말했다.

뭐에요. 그럼 알고 봤더니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 반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잖아요. 저는 당신이 양아버님의 배경과 저의 재주를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해 왔고 당신은 제가 남편이 로봇 만들게 도와줄 것 같아서 결혼했다고 생각해왔는데 말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게 되네?”

그나저나 승상께서는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공부 많이 하는 남자들 중에 여자 취향이 희한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후후~”

? 그런 말이 있소? 나는 처음 듣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쳔년 뒤의 미래 세계에 떠도는 이야기랍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월영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쁩니다. 정말 고마워요. 배경이나 재주 때문이 아니라 여자로서 황월영 그 자체를 좋아해 주셔서요....”

제갈량은 다시 웃으며 답했다.

내가 배경이나 재주만 노리고 당신과 혼인했다면 벌써 예전에 첩을 들였겠지. 아니 그렇소...?”

그날 밤 제갈량과 월영은 양양에서 혼인하던 첫날밤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9.

어제의 대화 덕분에 행복한 기분에 흠뻑 젖은 월영은 그 다음 날부터 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로봇 닭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휴가 와서까지 로봇 제작에 열을 올리는 월영을 보고 제갈량은 아연해 하며 말을 걸었다.

부인, 우리는 휴가를 온 것이잖소. 일은 좀 쉬고 휴식을 취합시다.”

그러나 월영은 제갈량에게 웃음을 건네며 명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니아나 오타쿠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쉬는 방법입니다.”

마니아? 오타쿠? 그게 무슨 말이오?”

미래 세계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승상께서는 모르셔도 되옵니다.”

혀를 끌끌 차며 제갈량은 산책을 나가 버렸고 월영은 하루 종일 낑낑댄 끝에 저녁 무렵 근사한 로봇 닭을 한 마리 완성했다. 저녁이 되어 숙소로 돌아온 제갈량이 어디에 쓰는 로봇인지 물었지만 월영은 두고 보라는 말만 할 뿐 가르쳐 주지 않았고, 피곤 때문인지 초저녁부터 일찌감치 곯아떨어진 월영 옆에 누워 제갈량도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게 되자 제갈량은 몹시 당황했다.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교리 때문에 원래 절간에는 동물을 하나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수탉의 꼬끼오 소리에 잠이 깨었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물론 평생 여러 번에 걸쳐 월영의 재주를 체험해 왔던 제갈량은 저 닭 울음소리가 어제 만든 월영의 로봇 닭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연상할 수 있었다.

로봇은 진짜 닭처럼 매일 새벽 똑같은 시간에 울어댔고 스님들은 신기해하며 승상 부인의 기이한 재주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제갈량과 월영 부부는 두 사람이 함께한 행복한 휴가의 기념으로 로봇 닭을 절간에 기부하고 며칠 후 성도로 돌아왔다.

 

10.

그로부터 열 달 후에 월영은 아들을 낳았다. 자신의 나이 마흔 일곱, 월영의 나이 마흔 살에 첫 아이를 얻은 제갈량은 뛸 듯이 기뻐했고 초산에 노산인지라 온갖 고생 끝에 어렵사리 아이를 출산한 월영이 겨우 몸을 추스르자 한달음에 아이와 아내를 보러 달려왔다. 난산에 지친 월영은 몸을 일으키기도 버거운 듯 했지만 제갈량은 아이를 어르며 월영에게 고마움과 경이로움을 담아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정작 월영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인, 왜 그러시오. 이렇게 늦게나마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는데 부인은 그다지 기쁘지 않고 오히려 슬퍼하는 것 같소.”

아닙니다.... 단지 걱정이 되어서.....”

월영은 자신의 걱정이 무엇 때문인지 까지는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갈량은 그녀의 속마음을 이리저리 미루어 짐작해 보다가 생각나는 이유 하나를 넌지시 던져 보았다.

나도 걱정이기는 하오. 며칠 있으면 선제(先帝)께서 붕어(崩御)하신 후 5년간 절치부심하며 준비했던 북벌이 시작될 예정이니까. 워낙 큰 싸움이기 때문에 이번에 출정하면 언제 다시 성도로 돌아올지, 아니 돌아올 수는 있을지조차 모르겠소. 이렇게 나이 오십이 다 되어 첫 아들을 얻었는데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하고 목숨을 건 전장에 나가려니 나도 정말 걱정이구려.”

월영은 마지못해 그 때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고 당황한 제갈량은 울고 있는 월영과 엄마 따라 덩달아 울음을 터뜨린 아가를 동시에 달래느라 쩔쩔 매는 상황이 되었다.

 

... 그 해 촉나라의 1차 북벌은 실패했고 종군했던 제갈량의 양자 제갈교도 병사(病死)하였다. 제갈량이 성도로 돌아왔을 때 부부는 외동아들의 이름을 제갈첨(諸葛瞻)이라고 지었다.

 

- <속후한서 제갈첨전 (續後漢書 諸葛瞻傳)>

 

11.

그 뒤로 6년간 제갈량은 수차에 걸쳐 북벌 길에 올랐지만 번번이 위나라의 방어에 막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월영과 포원의 목우유마는 갈수록 더 성능이 좋아졌지만 보급의 개선과 제갈량의 전략만으로는 촉과 위의 본질적인 국력 차이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북벌이 계속 좌절되자 제갈량은 노심초사가 지나쳐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기침이 점점 잦아지다가 간혹 각혈(咯血)까지 하곤 했다.

지난 번 5차 북벌마저 실패한 후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어 최후의 북벌을 준비해온 제갈량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출정 전야에 월영과 밤을 함께 했다.

부인, 이번에도 역적 조위(曺衛)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지 못하면 한중에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오. 우리 외아들 첨과 양손자 반을 부디 잘 부탁하오.”

눈가의 주름은 늘어난 월영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승상,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가 확신컨대 이번 북벌에서는 틀림없이 오랜 숙원을 달성하셔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장안을 점령하시게 될 것입니다.”

월영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고 제갈량은 아내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 당신은 미래를 알 수 있지?”

월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1200년 후의 세계에서 왔습니다.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대략 압니다. 승상께서는 결국 위나라를 격멸하시고 중원을 회복하시어 한실을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날 미래까지 유씨(劉氏) 천하가 만세일계(萬世一界)로 이어지며 촉나라에서 시작된 로봇 기술이 극도로 발전해서 한()나라의 권세는 끝없이 뻗어나갈 것입니다.”

고맙소, 부인.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여 한실을 부흥시키겠소.”

월영의 예언에 고무되어 제갈량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말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미래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오?”

첫 번째 이유는, 제가 어린 시절에 이 시대로 왔기 때문에 자세한 역사는 기억하지 못하고 어렴풋하게만 떠오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희미한 기억이 맞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도 했고요. 승상과 우리 촉나라가 최후에 승리하는 역사는 확실히 배웠지만 적벽대전 때조차 우리 편이 승리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개개의 사건에 대해서는 예언하기를 삼가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월영은 머뭇거리더니 말하기를 그쳐 버렸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오?”

아니옵니다. 그저 제 생각이 짧아서 그러하였사옵니다.”

한실의 부흥에 성공할 것이라는 월영의 예언에 기분이 좋았던 제갈량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제갈량은 아끼는 자식의 장래를 물어 보고 싶어졌다. 외아들 제갈첨은 이제 7살이 되어 한창 아버지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잦은 북벌로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오십이 넘은 제갈량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자식이었다.

우리 첨()은 얼마나 큰 인물이 될까? 혹시 사서(史書)에서 배운 바 있소?”

그런데 제갈량의 질문을 들은 월영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울음은 제갈첨을 처음 낳았을 때 이해할 수 없던 그 울음과 똑같았다. 월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지난 후 겨우 울음을 추스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한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승상께서는 당파 싸움에 휘말려 역모를 꾀했다는 모략을 받으셔서 목숨을 잃으시게 되고 우리 집안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

갑작스런 월영의 이야기가 너무나 충격적이고 믿기지 않아 제갈량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고? 그럼 제갈첨도? 월영도?

내가... 내가... 역적으로 몰려 멸족 당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선제(先帝)와 한실을 향한 나의 충성심은 온 천하가 다 아는데... 그 기억 정말 확실한 것이오?”

제갈량은 당황하여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부정하려 애썼지만 월영은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한실에 대한 승상의 충성은 그 누구보다도 평생을 함께 해온 제가 더 잘 압니다. 하지만 삼국이 통일되고 평화가 오면 조정에는 다시 간신배와 환관들이 발호하게 될 것이고 승상뿐만이 아니라 촉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많은 충신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월영의 눈물을 보며 제갈량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월영이 주저하면서 심각한 제안을 꺼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승상, 북벌을 그만 중지하시면 아니 되실까요. 이번에 오장원(五丈原)으로 나아가시면 필승하실 것이옵니다만, 그 길은 결국 승상과 첨()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월영의 갑작스런 제안은 제갈량이 따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북벌을 중지할 수는 없소. 비록 나중에 내 한 몸이 희생되더라도 한실과 선제에 대한 나의 충성은 변함없을 것이오. 나중에 정치의 희생양이 되더라도 나는 내 필생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계속 정진하려 하오.”

말을 마칠 무렵 제갈량은 심한 기침을 했고 또다시 각혈을 토했다. 월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을 거둔 후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실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승상은 그런 분이시지요. 제 기억이 확실히 맞는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은 운명이오니 승상의 큰 뜻을 꺾지 말아 주십시오.”

부부는 심난한 기분으로 그날 밤을 뒤척이며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월영은 북벌 길에 오르는 제갈량을 착잡한 심정으로 배웅하였다.

제갈량과 월영이 함께한 시간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2.

오장원 주둔지의 장막 안에서 제갈량은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방금 전 또다시 심한 기침이 찾아왔고 그의 손바닥에는 이번에도 각혈이 남았다. 이대로 가면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장막 안에는 7개의 커다란 등불이 놓여 있었다. 임박한 죽음을 감지한 제갈량이 도교를 수련하던 젊은 시절에 배웠던 기양지법(氣養之法)을 구사하여 자신의 수명을 늘려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장막 밖에는 장군 강유(姜維)49명의 정예 병사가 호위를 섰고 제갈량은 장막 안에서 북두칠성에게 신명을 바쳐 수명 연장을 계속 빌고 있었다. 첫날인 오늘부터 7일 동안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제갈량의 수명은 12년 더 연장될 것이었다. 조금 전 북두칠성에게 기원하기를 마친 제갈량은 7개의 등불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양지법에 성공하여 자신의 수명이 늘어나면 아마 앞으로 12년 동안 월영의 예언대로 위나라를 정벌하여 한실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년 후에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내가 과연 여기서 더 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가?

그러다가 제갈량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붓을 들어 급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아주 간결한 서찰이었다. 편지를 봉한 제갈량은 수하를 불러 이번에 함께 종군한 아우 제갈균을 오라 일렀다. 잠시 후 제갈균은 등불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서 장막 안으로 들어왔고 제갈량은 동생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너는 되도록 서둘러 성도로 가서 네 형수에게 이 서찰을 전하고 답장을 받아 오너라.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가능한 한 빨리 이곳 오장원으로 돌아와 주면 좋겠다.”

형의 지시를 받은 제갈균은 심야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성도를 향해 출발했고 제갈량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3.

7일째 마지막 날 밤 자시(子時)에도 등불은 모두 꺼지지 않은 채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기양지법이 성공하여 자신의 생명을 12년 더 연장할 가망이 높아지자 제갈량은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제갈균에게 들려 보낸 서신에 대한 월영의 답장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애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소규모의 위나라 군대가 함성을 내지르며 야간 기습을 걸어왔고 촉나라 군사들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우왕좌왕 혼란에 빠졌다. 장막 근처에 있던 촉군의 장수 위연(魏延) 또한 당황하여 큰 소리로 총사령관인 제갈량을 부르며 달려왔다.

승상~, 위군이 야습(夜襲)해 왔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황망한 표정으로 위연이 소리를 지르며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제갈량은 큰 소리로 외쳐 그에게 주의를 주려는 참이었다. 발밑을 조심해서 등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그런데 위연에게 말을 해야 할 그 찰나에 제갈량은 머릿속에 월영과 자신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멈칫해 버리고 말았다.

 

... 승상께서는 역모를 꾀했다는 모략을 받으시고 목숨을 잃으실 것입니다 ...

... 우리 집안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대가 끊어지게 되옵니다 ...

 

참으로, 참으로 짧은 시간 동안 주저했을 뿐이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한쪽을 선택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잠시 망설이고 멈칫했던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주저함이 운명을 가르고 역사를 바꾸게 되었다.

제갈량이 늦게나마 위연에게 소리를 지르며 주의하라고 외쳤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박자 늦은 대응이었다.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오던 위연은 실수로 등불을, 그것도 가장 중요한 주등(主燈)을 걷어차 버렸고 제갈량의 기양지법은 마지막 7일차 밤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등이 허무하게 꺼져버리는 것을 본 순간 제갈량은 당황스러움과 실망감에 극심한 기침을 시작했고 다시 한 번 엄청난 분량의 각혈을 토한 끝에 그만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제갈량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위연은 온 몸을 떨며 그의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고 있었고 강유는 위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칼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기양지법이 실패한 이유는 위연 탓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며 이렇게 한탄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린 일이니 어찌 빈다고 수명을 얻을 수 있겠는가.”

 

- <천극 오장원 (川劇 五丈原)>

 

14.

제갈균이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음 날 아침 일찍 형수를 만났겠지만 제갈량이 한시라도 빠른 답장을 원했기 때문에 서둘러 월영의 방으로 향했다.

들어오라 답하는 소리를 듣고 형수의 방문을 열었던 제갈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월영의 모습이 약간 희미하고 반투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촛불 빛이 어두운 탓에 뭔가 잘못 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수십 년간 계속 보아온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샛노란 머리카락에 까만 피부의 형수가 어두운 촛불 아래 반투명해진 채로 앉아 있으니 마치 귀신의 형상처럼 무섭게 보였다.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월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먼 길을 달려온 시동생이 건네주는 남편의 편지를 받아들고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승상께서 무슨 연유로 이렇게 급히 도련님을 보내셨는지 저는 짐작이 갑니다. 제 몸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승상께서 큰 결심을 하시고 이미 실행해 버리신 모양이네요.”

자신이 보고 있는 반투명한 월영의 모습이 착각이 아니라는 말에 제갈균은 더더욱 놀랐다. 월영은 제갈량의 아주 짧은 편지를 읽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승상께서 이미 역사를 바꾸신 것 같으니 아마 저의 답장은 더 이상 필요하시지 않을 듯합니다. 돌아가셔서 도련님이 보신 그대로 전하시면 되실 것입니다. 대신에 이 말씀을 승상께 전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역사가 바뀌면 혹시 제가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워 그 동안 승상께 미래를 알려드리지 못했노라고, 이것이 마지막 날 밤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라고요.”

이제는 거의 완전히 투명해져서 사라지기 일보직전인 월영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면서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는 남은 수명이 길지 않으실 것이니 도련님께 우리 어린 아들 첨과 양손자 반을 부탁드려야 하겠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잃게 된 조카를... 잘 좀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승상께 이 말씀도 꼭 좀 전하여 주십시오. 저는 승상과 함께한 길지 않은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였...”

마지막 말을 미처 다 끝맺지 못한 채 월영은 완전히 투명하게 되어 사라져 버렸고 그녀가 들고 있던 서찰이 팔랑거리며 날아와 제갈균 앞에 떨어졌다. 제갈량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한 간단한 질문이었다.

내가 만약 역사를 바꾼다면 미래에서 온 부인은 어찌 되는 것이오?’

 

...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명을 다할 그 무렵에 황부인 또한 마치 남편의 뒤를 따르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15. 에필로그

서기 1370년의 어느 여름날.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을 도와 몽골족 원나라의 오랜 압제를 분쇄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건국공신 유기가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고 유유히 천하를 유람하다가 우연히 촉()나라의 옛 수도 성도에 이르렀다. 유기는 평소 제갈량이 천하를 삼분(三分)하는데 그쳤으나 자신은 천하를 통일하는데 성공했으니 제갈량보다 자신이 더 재주 있다고 자만하던 인물이었다. 벼슬하던 시절에는 우연히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제갈량 직계 후손들의 집성촌 제갈팔괘촌(諸葛八卦村)에 들렀다가 이런 속내를 드러내는 바람에 크게 원성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저녁나절 성도에 도착한 유기와 그의 수행원들은 근교의 어느 큰 절에서 묵게 되었다. 새벽이 되자 느닷없이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렸고 유기는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 다음 날 아침 주지스님에게 어찌된 일인지 이유를 물었다. 원래 사찰에서는 육식을 일절 금지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동물도 키우지 않기 때문이었다.

“1200년 즈음 전의 옛날에 제갈 승상 부부께서 우연히 우리 절에서 며칠 밤 묵으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 기념으로 닭 모양 인형을 남기셨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답니다. 이 닭 인형이 어찌나 신묘한지 들으신 바와 같이 오늘날까지도 진짜 닭처럼 때맞춰 울어서 스님들에게 새벽을 알려줍니다. 역시 제갈 승상은 대단하신 분이시지요.”

과거 촉나라에 목우유마와 같은 엄청난 자동인형 기술이 있었다는 전설은 유기도 익히 들었던 바가 있었다. 하지만 촉한의 멸망과 함께 그 자동인형 기술들은 모두 실전(失傳)되어 버렸다고 전한다. 사천 지방의 인물인 제갈량의 위대함을 은근히 찬양하는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평소 제갈량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도 여겨 오던 유기는 갑자기 오기가 발동했다.

, 그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소. 별 것 아닌 재주요.”

그러나 유기가 며칠 동안 공을 들여 만든 닭 모양 인형은 홰치는 소리를 내기는 냈지만 시간대를 전혀 맞추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대낮이나 저녁에도 울어대는 실패작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제갈량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유기는 옹졸한 마음을 먹고 신경질을 내며 제갈량의 닭 인형을 집어던져 부수어 버렸다.

톱니와 나사와 태엽과 스프링과 수정진동자 같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신기한 부품들이 수없이 흩어진 모습을 보며 다들 놀라워했고 월영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었던 유기는 닭 인형 내부의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엉뚱하게 제갈량을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제갈 승상처럼 위대한 인물은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

  1. 중국 민간전승 (中國 民間傳承)>

 

김달영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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