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A3008-2036-5-3-confused

2020.04.30 15:2204.30

모처럼 편집회의가 없는 날 그가 커피 한 잔을 기울이며 몸을 뒤로 푹 젖힌 채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동안, 그의 앞에는 리콜의 파란색 윈도가 떠 있다. 리콜이란, 얼마 전에 출시된 디지털 소프트웨어인데, 일종의 전자 아카이브같은 프로그램이자 개인 비서 소프트웨어이다. 아니, 리콜을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리콜은 하나의 지능, 또 다른 인공체였다. 인간이 드디어 인간의 지능을 대체할 수단을 찾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니, 그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뭐가 어찌되었든, 이제 리콜은 출판사의 한 식구였다는 것이다.

 

그의 출판사는 일반적인 출판사가 아니다. 리콜의 지평선을 더 넓히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리콜이 기록 아카이브를 넘어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을 스스로 선택했다. 말하자면, 2의 로버트 코난 도일 혹은 제2의 카프카를 만드는 셈이다. 하지만 아직 리콜은 그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해결하지 못한 딱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하고서는 리콜의 윈도우에 말한다.

 

기록 B-6075, 기타 기록물 섹션

 

그가 이렇게 말하자, 리콜의 윈도에 한 문장이 올라온다.

 

Baby shoes, for sale, never worn.

 

그는 그 문장을 계속해서 쳐다본다. 헤밍웨이가 썼다는, 그 유명한 여섯 단어로 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다. 물론, 헤밍웨이가 그 문장을 내기에서 썼다는 말은 후대 작가들이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가 모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도 문학이 아닌 기타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문학 강의 때 이 대단히 함축적인 문장을 처음 접한 그는 그 순간 거기에 경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리콜이 즉각 해당 영상을 화면에 띄운다. 윈도우에 청바지에 양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교수와 의욕 넘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해당 기록의 일련번호를 쳐다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A3008-2024-3-5-touched

 

그는 고개를 젖고 표정을 찡그린다. 리콜의 기록이 이상한 것일까? 그는 이 화면을 수업이 봤다. 하지만 전에 봤던 것과 기록이 달랐다. 정확히는, 저번 영상의 기록 속 교수는 말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히 검은색 자켓을 그는 기억했다.

 

그의 얼굴 표정의 변화가 일자, 리콜이 또 다른 윈도우를 듸운다. 푸른색 홀로그램으로 된 인간의 얼굴 위아래로 레이저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리콜이 자신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리콜은 가족을 넘어섰다.

 

“A3008 고객님, 우울하신가요?”

 

리콜이 영상을 잠깐 멈추고 그에게 말한다. 그는 리콜에게는 A3008이다. 리콜은 인간에게도 번호를 부여한다. 이름을 인식하려는 시도는 리콜이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에 늘 실패했다.

 

아니, 사색 중이야.”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고서는 얼굴 표정을 바꿔본다. 다시 미소를 띄어보는 그의 모습에 리콜은 다시 검사 윈도우를 띄워 그의 얼굴 모형에 레이저를 쏴댄다. 이번에는 레이저 선이 조금 오래 머무는 것을 눈치챈다. 리콜은 사람의 감정을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의 신체적 특징과 감정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조금 오래 걸리는 것이었다.

 

고객님, 심리학적으로 우울할 때 인간은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합니다. 고객님처럼 감정을 속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리콜은 그 특유의 기계적인 목소리로 정신과 의사라도 되는 양 조언을 한다. 그는 한숨을 쉰다. 리콜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리콜에게 사색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뭐가 어찌되었든, 이제 리콜의 윈도우에 있는 것은 그의 긴 연락처이다.

 

물론, 연락 상대가 리콜 유저라면 리콜에게 부탁하면 되지만 말이다.

 

사색도 우울의 증상이야?”

 

-검색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리콜의 윈도우에 잠시 검색 중이라는 창이 뜬다. 아마 인터넷에서 그의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찾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검색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리콜은 역시나 그 특유의 기계음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읊는다.

 

사색은 직접적인 증후는 아닙니다.”

 

이제 리콜은 그의 표정을 우울이라는 카테고리가 아닌 다른 카테고리로 등록하고는 서버로 전송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짖는 사람들은 우울한 것이 아니라 사색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우울증 치료가 아니라 잔잔한 음악을 찾아서 틀어줄 것이다.

 

-사색

 

그는 리콜의 검색 윈도우를 강제로 종료시킨다. - 하는 경고음과 함께 파란 화면이 사라지고, 리콜의 화면 프로젝터인 파란색의 작은 달걀 같은 물체가 잠시 빛나다 꺼진다. 그는 리콜이 꺼졌는지를 몇 번이고는 다시 확인한다. 리콜은 수면 모드로 전환되어 있다. 이 상태의 리콜은 데이터 수집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아예 리콜의 전력을 잠깐 뽑아두기로 결정하고, 전선을 코드에서 뺀다.

 

그리고는 골동품점에서 구매한 구식 휴대전화를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다이알을 누르는 그의 손놀림이 어색하다. 리콜은 이런 번거로운 과정조차 필요하지 않다. 상대가 리콜 유저라면 그 또는 그녀의 번호는 리콜에 저장될 것이다. 전화번호 역시 기본 제공 개인정보였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시도 끝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몇 번이나 시도했잖아. 왜 안받아?”

 

그는 여자에게 따지듯이 질문한다. 그의 목소리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충분히 신경질적으로 느낄만할 정도로 높은 톤으로 튀어나왔다. 자신의 반응에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어쨌든, 그 여자는 A3008과의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했다.

 

, 리콜 쓰다 보니 나도 핸드폰 쓰는 법을 까먹었어. 버벅거리게 되더라고.”

 

그녀의 말에 둘은 모두 웃었다. 당연하게도, 리콜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겪는 일이었다. 아니, 보통의 경우는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전화가 뭔지도 잘 몰랐다. 안그랬으면 그가 골동품점까지 가서 구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왜 이런 수고까지 했어?”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평소 군더더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그로서도 조금은 당황했다.

 

, , 그때 그 강연 생각나? 문학과 인공지능?”

 

그의 말에 여자는 선뜻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이 잠시 머뭇거린다. 전화기 건너 리콜이 해당 기억을 불러오는 소리가 들리고, 둘은 웃음을 터트린다.

 

언제였지?”

 

리콜에 타임스탬프 있지 않아?”

 

그녀는 잠깐 조용해진다. 아무 말이 건너오지 않자, 그는 살짝 불안해진다. 정말로 리콜의 오류일까? 혹은... 그는 다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황급하게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냈다. 도저히 생각하기 싫은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 없었다.

 

없는데?”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다시 리콜을 실행했다. 침을 삼키고는, 그 파란색 검색창에 대고 말했다.

 

“H-4053, 문학 이론 세션.”

 

그러자 방금 전의 화면이 뜬다. 분명히 ‘A3008-2024-3-5-touched’라는 제목의 파일이다. 그는 그 화면을 확인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여자의 리콜로 전송한다. 이제 그는 다시금 기다렸다. 의자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여자의 답장이 오기를.

 

이상한데?”

 

그녀의 답변이 돌아온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지만, 그래도 낙담하는 것은 방지할 수 없다. 리콜의 아카이브된 기록에 공식적인 타임스탬프가 붙지 않는 경우는 딱 한 가지다. 유저의 망상. 리콜은 꿈까지도 기록할 정도로 유저와의 긴밀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망상이라고 생각할 경우는 기록하지 않는다.

 

근데 망상일 수가 없잖아. 네 리콜에도 있는데.”

 

이제 그의 목소리에서는 불안하다는 티가 확 난다. 당황한 듯이 그는 재빨리 리콜의 기록을 훑어본다. 해당 년도의 기록이다. 분명히 그 기록들에는 타임스탬프가 찍혀 있다. 2024.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 공유된 망상인가?”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불가능에 가까운 추측을 내놓는다. 그는 피식 코웃음을 친다. 그의 반응을 들은 여자도 자신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망상은 망상이고, 두 명의 서로 다른 객체가 망상까지 기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케이스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상이 매우 변칙적이었다. 그의 리콜에 알람음이 뜨고, 메시지가 보였다.

 

내 리콜에 있는 기록 보냈어. 한번 봐.”

 

그는 리콜의 화면을 클릭해서 두 개의 창을 띄우고, 각각의 화면에 하나는 자신의 영상을, 다른 하나에는 그녀가 보낸 영상을 띄우고 뚫어져라 지켜본다. 어느 것이 진짜 기록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아니면, 혹시... 그는 자신의 머리를 탁탁 쳐서 그 생각만은 밀어내려고 하지만 안된다. 혹시, 기록 B-6075 자체가 망상 아닐까? 이미 리콜이 소설가가 된 것이 아닐까?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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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리내 20.05.04 18:28 댓글

    처음 써본 단편이라 지금 보니 뭔가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한번 올려봤습니다. 봐주셔서감사합니다.

  • 빌린 20.05.04 23:37 댓글

    이유는 특정해내지는 못했는데 '공유된 망상'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남네요.

    제가 느낀대로 말씀드리자면 제목은 처음 보았을 때 물음표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내용 자체가 하나의 기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기록도 리콜이 만들어낸 건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이 다음부터는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을 적어보았습니다.

    혹시 이 내용이 기록이어서 생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리콜이 리콜만의 방식으로 소설을 작성한다는 걸 나타낸 건가요?)

    혹시 내용이 칼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이나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과 관계되어 있나요?

    리콜이 얼마 전에 출시되었다고 하는데 그 얼마 전에서 지금까지의 시간이 휴대폰 사용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긴가요?

    리콜에 저장된 기억이 변조되었거나 없던 기억이 만들어졌다면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된 건가요?

    B-6075가 헤밍웨이의 문장만을 포함하는 데이터가 아니라 그 문장을 배웠던 때의 데이터인 건가요?

    리콜이 소설가가 되는 게 출판사의 목표인데 왜 주인공은 그 생각을 밀어내려 하나요?(보고하면 성과급 받을텐데)

    리콜이 가진 한 가지 문제는 무엇인가요? 이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인가요?

    리콜은 개인에게 종속된 존재인가요 아니면 단체에 종속된 존재인가요?('출판사의 한 식구', '리콜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회사의 소유이자 개인의 소유인 건가요?

    리콜은 왜 A-3008을 고객이라고 칭하나요?

    흥미롭게 읽었지만 제 문해력이 그리 좋지 못해서 질문만 가득 남깁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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