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꿈속의 숲-5. 이별 2

2020.04.26 18:3404.26

 한참을 놀다 보니 점심은 훌쩍 지나버렸다. 아쉬운 대로 간단히 차려 먹고 다시 책을 팔러 나설 준비를 했다. 언니가 책을 나눠 들어주어 몇 군데를 더 돌며 책을 빌려주거나 팔고 돌아와 같이 저녁준비를 하였다.

 요리 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언니도 나도 말을 하는 것을 잊었다. 좁은 부엌에 요리 도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때, 언니가 문득 말을 걸었다.

”새삼스레 이상하지만, 나에 대해 궁금한 적 없었어?“

”많죠. 꽤 오래 같이 지냈잖아요. 게다가 언니는 처음에 저한테 협박 비슷한 말도 하고.“

”그랬나?“

”그랬어요! 그때 무서웠는데. 지내다 보니 같이 있는 것도 재밌고 그 말도 허세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허세?“

 언니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장난스럽게 노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언니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물어보는 걸 잊어버렸어요.“

 혹시 이런 말을 꺼내는 건 뭔가 말해줄 마음이 있다는 건가? 나는 고기를 손질하면서 장난스럽게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언니가 채소를 손질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고향은 여기서 한참 떨어진 베단 이라는 나라야. 처음 들어보지?“

 탁탁,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와 언니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섞이자 신기하게 그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고백을 듣는 것 같은. 또, 다가오는 언니와의 이별을 실감하게 되었다.

”거기서 대대로 왕의 호위무사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도 호위무사가 되었어. 태어나자마자 정해진 일이었지. 물론 내 형제들도. 다들 잘 적응하고 사는 것 같은데 나는 계속 의문이 들더라. 내가 뭘 하는 건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느껴졌어. 그러다 어쩌다 보니 이 나라로 오게 되어서.“ 

 언니는 이 대목에서 살짝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언니의 변화를 알아채고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는 건지 얼마 안 남은 채소의 손질을 다 마치고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내 등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너를 만났어. 너랑 지내는 동안 진짜로 사는 기분을 느꼈어.“

”제가 뭘 했다고요.“

 언니의 말에 민망해 칭찬에 감사하는 말도 못 하고 괜히 솥을 쳐다보았다. 내 앞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오르며 불이 지펴지고 고기를 삶기 위해 물을 채운 솥 안에서는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나도 민망한데,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솥 안에 고기를 담고 다듬어진 채소로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라고는 재료를 다듬고 무언갈 데우는 재주밖에 없는 언니는 요리를 끝내고 같이 마실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왕 털어놓은 김에 몇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요?“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물어볼 것이 있는 거야?“

 언니는 장난이라고 덧붙이며 말해줄 수 있는 선에서 말해주기로 했다. 나는 언니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본명이 뭐예요?“

”클로에 윌슨.“

 너무 낯선 어감과 이름이 서넉 자가 넘어가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최대한 발음을 해보려고 입을 떼보았다.
 
”크, 크? 다시 한번만요.“

”하하, 생소하지? 클로에 윌슨이야. 이름이 클로에고 성이 윌슨이야.“

”성이 뒤에 붙어요?“

”우리나라는 그래.“

”클로에 윌슨.“

”맞아.“

 언니는 내가 자신의 이름 발음하기를 어려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게 몇 번씩 반복하고 나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 저한테 해석을 부탁했던 쪽지는 뭐에 대한 거예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것이었는지 언니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뜸을 들였다. 어려운 이야기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던 찰나에 언니는 입을 열었다.

”내 병에 대한 거야.“

”병이요? 언니, 어디 아파요?“

 나는 예상외의 말에 너무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언니가 아픈 줄도 모르고 여러 가지 궂은일을 시켰던 지난날이 머리를 스치며 미안함과 어딘가 울컥하는 온갖 마음이 뒤섞였다.

”별거 아니야. 괜찮아. 괜히 걱정시킬 말을 했나?“
 
 언니는 내 심각한 표정을 보며 애써 웃었다. 쪽지 같은 작은 단서라도 붙들고 답을 찾아다니는 병이 별거 아닐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있는 언니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 앞으로 무리하지 말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언니는 허허 웃으며 알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어느새 요리가 끝나고 언니가 준비한 차를 마셨다. 저녁이 되어 살짝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잔에서 올라오는 신선한 차향을 맡으니 마음이 풀어졌다. 이런 여유도 언니가 온 후로 처음 누렸다. 혼자서는 집안일도 대충 하고서 뻗어 자기만 했는데, 앞으로는 집안일이 끝나면 종종 차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언니의 고백 이후로는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마음이 편했다. 그저 재밌는 언니로 끝나지 않는 전보다 끈끈한 정이 생긴 것이다. 이제, 언니와 헤어지더라도 언니의 길을 응원해줄 용기도 생겼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홀가분했다.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공기도 한층 시원하고 가벼워졌다. 어르신의 귀가가 늦어져서 저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 어르신이 곧 돌아오셨다. 어르신뿐만 아니라 어르신을 마중 나온 사람도 등에 무언갈 한가득 들고서 왔다.

”어르신, 오셨어요? 저, 실례지만 뒤에 분은 누구신가요?“
 
”아, 내 일을 돕는 김 우현이라고 하네. 굳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온 거야.“

”어르신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대녀분을 많이 생각하시더군요.“

 우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목례를 했다. 나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윤 도이 입니다. 짐 무거우실 텐데 저 마루 위에 두세요.“

”무겁진 않습니다. 어르신 배웅차 들고 온 거라서요.“ 

 우현은 내 말에 따라 짐보따리를 마루 위에 올려두고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다. 그래도 어르신을 도와 짐을 들고 집까지 오신 분을 그냥 돌려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저녁 드시고 가세요.“

”아뇨, 저는 따로 묵는 곳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저녁 시간도 늦었는데, 드시고 가시지요. 오늘 도이가 힘 좀 써서 고기반찬입니다.“
 
 뒤에서 연이 언니가 빙긋 웃으며 거들었다. 나는 언니를 소개하는 걸 잊었다는 걸 잊고 얼른 언니를 소개했다. 둘은 서로 인사를 하고 우현은 나의 호의와 언니의 설득을 감사히 받아들여 식사에 함께 하기로 했다.

 어르신은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시고 우현은 밥을 얻어먹는 데 일이라도 돕겠다며 부엌으로 와 상을 옮겼다. 언니와 나도 각각 상을 하나씩 들고 들어가는데 언니가 문득 마루 앞에서 멈춰섰다.

”어, 도이야.“

”네?“

”손님도 오셨는데 술이 빠졌네. 내가 얼른 가서 술만 사서 올게. 먼저 들고들 있어.“

 언니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마루 위에 상만 올려놓고 부리나케 술을 사러 갔다. 나는 상을 안으로 들이고 마루 위에 짐이 거치적거려 부엌으로 옮겼다.

 곧 언니는 술을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언니가 두 손 가득히 들고 온 술병을 보고 나는 기가 질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르신과 우현은 술을 즐기는 편인지 언니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오늘만큼은 언니의 기세에 넘어가 과음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술과 고기가 있으니 웃음소리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우현도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섞인 자리인데도 어색해하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본인의 온화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술 때문인 것 같았다. 어르신과 언니와 달리 우현은 이미 온몸이 시뻘게져 앉은 자세도 흐트러져 있었다.

”오늘 떠난다고.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언니가 술을 사러 간 사이에 상을 거하게 차린 까닭을 어르신께 말씀드렸다. 언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정이 많이 밀려 힘들 것 같습니다.“

”도이가 많이 심심하겠구나.“


 어르신은 나를 보며 웃으며 말씀하셨다. 말씀하신 그대로지만,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이 제일 적당할 것 같아 괜찮다고 말했다. 

 곧 화제는 바뀌어 어르신과 우현이 뱃길을 거쳐 이 마을에 들어오기까지 겪은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잠자코 있던 우현이 입을 열자 쉼 없이 이야기가 쏟아져나왔고 어르신은 그 틈에 조금 쉬고 계셨다.

 문제는 우현이 제정신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술에 취해, 했던 말을 반복하다 보니 재밌을 것 같은 일화인데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점점 지루해져 삐져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언니는 그저 술잔을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했다. 어르신은 우현의 주정이 익숙하신지 우현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계셨다.

 어르신은 지루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입 모양을 벙긋거리고 손으로 우현을 가리키면서 ‘아무래도 여기서 재워야겠다’ 하셨다. 나는 자포자기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느껴졌던 식사는 끝이 나고 차를 마시기 위해 준비하려고 일어났다. 우현과 언니가 자신이 하겠다면서 일어나려는데 우현이 비틀대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언니는 내 한숨을 듣고 작게 웃더니 우현을 앉히며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부엌으로 가 옛날에 어르신이 주신 다기를 꺼내어 차를 우렸다. 문득 어르신이 가져오신 짐이 무엇인가 궁금해 힐끗 보았는데 보따리에서 말린 꽃가지가 한 송이 튀어나와 있었다. 무슨 꽃이 이렇게나 필요하셨을까 생각하던 찰나.

”네 이놈!“

”어르신! 조심하십시오!“

 방에서 어르신과 우현의 고함과 벽과 바닥이 무너지는 듯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너무 놀라 얼른 방을 향해 달려갔다. 우현과 언니는 이미 마당까지 나와 있었고 어르신은 부엌 앞에서 놀라 서 있는 나를 보시고 얼른 나에게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서셨다.

 우현은 방금까지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눈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곧고 매서운 자세로 연이 언니에게 칼을 겨눴다. 언니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방에 있던 자신의 검을 쥐고 우현의 검을 막았다.
 
”이게 무슨!“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어르신과 우현이 언니와 검을 들고 싸울 만한 상황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르신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저자는 괴물이다.“

”괴물이요?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언니에게 괴물이라 하십니까!“

”이거다,“

 어르신은 손에 쥐고 계신 작은 향낭을 내미셨다.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고작 이 작은 향낭으로 사람을 괴물 취급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다들 미신에 홀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항변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어르신이 말을 이어가셨다.

”이 향낭에는 괴물이 싫어하는 꽃이 담겨있다. 저자는 이 향낭에 강한 반응을 보였어. 괴물임이 틀림없다는 증표다.“
 
”그까짓 꽃이 뭐라고 사람에게 검을 겨눕니까!“
 
 나는 어르신을 뒤로하고 얼른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내 활을 꺼냈다. 활을 들고 마루에 서서 시위를 당겨 우현의 등을 겨누었다가 서서히 위치를 옮겨 어깨를 겨누었다. 어르신은 내 옆으로 와 자신을 믿으라며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잡으셔도 소용없다고 소리치며 어르신의 손을 밀쳐냈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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