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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리얼리티 체크

2020.04.24 21:1104.24

햇살 부스러기가 강물의 주름 위로 흩뿌려져 있었다. 들여다보다 눈이 멀 듯한 반짝임이었다. 널찍이 드러누운 한강 곁을 버스는 날아가듯 달리고 있었다. 재훈의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햇살의 광채에 눈이 부신 탓인지 찬란한 환희에 복받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저 아연한 밝음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왜 울어. 새삼스럽게.”

혜은의 음성은 귓속에 포개어지듯 건너왔다. 재훈은 눈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에 합쳤다. 눈맞춤. 촉촉한 눈가에 눈맞춤의 살가움이 벌꿀처럼 돌았다.

“그냥.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그는 꾹꾹 누르듯 음절마다 진심을 실어 아내에게 발신했다. 깍지를 꼭 끼듯 둘의 마음이 하나로 옭혔다.

‘나도.’ 그녀는 입만 움직여 말한다. 소리가 닿지 않아도 들린다. 음성보다 더 묵직한 진동으로 재훈의 뼛속에 울렸다. 맑은 눈물 한 자락이 굴러 내렸다. 함께인 게 정말 다행이야. 한 생에서 그에게 허락된 가장 값지고, 가장 또렷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함께 있음.

“요 녀석도.” 그가 검지 끝을 살포시 아이의 콧등에 얹는다. 축 내려앉아 눈동자를 덮고 있는 눈꺼풀은 천사의 것이다. 천사의 육화. 천국의 증거. 철없는 아빠의 성가신 손가락이 젖살 오른 코끝을 눌러도 아이의 평온한 잠은 걷히지 않는다. 혜은도 나긋이 웃음을 털며 자신의 검지를 재훈의 손톱 위에 얹었다. 칭칭 보자기에 싸인 아기는 그녀 품에 안기고, 이제 재훈이 팔을 둘러 둘을 가슴에 끌어당긴다. 세 몸뚱이가 엉겨 붙어 둥지를 틀었다. 강변도로를 내달리는 좌석버스의 한 구석에 애틋한 세 식구의 둥지가 움텄다. 햇살의 은총이 그 위에 군불을 피워냈다.

차량이 잠시 멈췄다. 재훈은 속도의 변화를 느끼며 헤픈 미소를 머금은 채 눈감고 있었다. 세 쌍의 눈이 모두 감겨 한 데 모인 평온. 달콤한 고요를 이불처럼 덮고 그대로 잠들 수도 있었다.

‘사랑해’ 재훈은 입을 움직였지만 음성이 나오지는 않았다. 말에 낭비할 기력까지 행복을 소화하는 데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아. 그는 생각 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같은 모양을 반복해 만들었다.

터벅거리는 발소리들이 그의 귀를 비집었다. 둔탁한 소리들과 부산한 기척이 계속 이어졌다. 재훈은 깨어나듯 정신을 떨치고 눈을 떴다.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 나가고 있었다. 도로 복판에서 차가 정지해 앞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부부는 황급히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사람들은 괴상한 무심함으로 거침없이 하차하고 있었다.

재훈은 당혹감에 퉁겨지듯 일어나 내릴 채비를 했다. 차량 고장인가. 혜은과 아이를 챙기며 보챘다. 아이는 안온히 잠들어 있고 혜은은 황급히 물건들을 챙겼다. ‘내리자. 내려야 돼. 고장 났나 봐.’ 재훈이 아내를 일으키며 가쁘게 말했다. 승객들은 배수되듯 말끔히 빠져나가고 셋만이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리자. 내려야 돼.’ 재훈은 말을 이었다.

그 순간 그는 계속 입만 벙긋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리가 나질 않았다. 섬뜩한 충격이 혈관에 번졌다. 몸을 부딪혀 어딘가의 뼈가 으스러지는 순간 무언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직감하는 그 찰나의 절망 같은 기분이었다.

버스가 발작하듯 출발했다. 부부는 꺾어지듯 앞좌석 등받이에 부닥치고 팽개쳐졌다. 혜은은 아이를 부둥킨 채 웅크렸다. 재훈도 모두를 끌어안고 황망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차가 광란의 속도로 질주했다. 엔진은 흉측한 굉음을 토하고 거대한 차체가 귀신 들린 듯 앞을 뚫고 달렸다.

시꺼먼 밤바다의 파도처럼 공포와 혼란이 울렁거렸다. 재훈은 이를 악물고 욕지거리를 해대며 기사 쪽으로 시선을 쏘았다. 좌석 앞쪽에서 기사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에 눈길을 꽂았다.

기사의 얼굴이 민무늬였다. 눈 코 입 어느 것도 없이 헐벗은 맨 낯이었다.

재훈은 넋 빠진 표정으로 잠시 멈췄다. 현실의 가닥을 놓친 듯 얼얼했다.

입을 벌려 말을 뱉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벙벙한 시선을 옮겨 품 안의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혜은도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 애처로운 얼굴엔 절망이 잠식한 일그러진 표정만 걸렸다.

'자기야, 도망가야-'

소리가 탈색된 말을 그녀에게 건네려는 순간 기사가 핸들을 홱 젖혀 차체를 꺾었다. 둔중한 버스의 몸집이 가드레일을 뚫고 오른편의 허공으로 솟았다. 차체는 거친 곡선을 그렸다. 이내 강물로 달려들었다. 앞머리가 고꾸라지며 수면을 향해 쏘아 나갔다.

모든 것이 앞으로 쏠렸다. 재훈도, 아내도, 품 안의 아기도, 중력도, 시간도.

희망도. 사랑도. 삶도.

버스의 낯이 검푸른 수면에 닿는 그 때,

 

 

 

두 눈이 치켜 떠졌다.

눈동자에 달려드는 광선에 움찔해 고개를 파묻었다. 거실의 고동색 가죽 소파 위였다. 햇살은 베란다 창을 통과해 그가 머리를 누인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재훈은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햇살은 그의 머리가 놓였던 소파 끝에 네모난 무늬로 드리워 있었다.

눈물이 물풀처럼 눌어붙었다. 두 손을 가져다 문질렀다. 오랜만이었다. 꿈 깬 직후의 격정이 가슴을 절이는 일은.  

“깼어?” 혜은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재훈은 두 손바닥을 가면처럼 쓴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을 흘렸다. 마음을 잠시 가누고 아내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얼굴을 파묻고 숨을 세 번 골랐다. 이내 손을 내려 넋이 흐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건너다봤다. 부엌에서 그릇을 만지는 그녀. 태연하고 무탈하게 서 있는 그녀.

“죽는 꿈 꿨어.” 그의 목소리엔 아직도 신음이 섞여 있다. 혜은은 김 빠지는 소리처럼 옅은 웃음을 흘렸다.

강아지가 금빛 털을 살랑이며 재훈에게 다가왔다. 그가 아는 가장 사랑스럽고 완벽한 것들 중 하나인 리트리버의 해맑은 표정을 달고 찬찬히 기어왔다. 혜은을 보고 애완견의 고운 얼굴을 보고 나자 때처럼 낀 그늘을 벗겨 현실의 구석들을 밝혀내는 기분이었다. 확인해야 할 것들을 확인하는 느낌. 비로소 묵직하게 엉켜 있던 내장들이 슬며시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입에 걸었다. 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끔찍했어… 대청소 하다 진 빠졌나 봐. 토요일 청소는 좀 면제해줘.”

“핑계는.” 혜은은 머리 위 찬장과 아래의 싱크대로 번갈아 손을 놀리며 설거지를 했다. “무슨 꿈인데?”

“몰라, 최악이었어…. 버스가 강길 달리고… 햇살이 너무 밝은데, 내가 햇빛을 뒤집어쓰고 자서 그랬나 봐. 난 막 울고 그러다가….” 두려움이 목구멍에 가래처럼 결려 말꼬리를 흘렸다. 꿈속의 강렬했던 순간들이 카메라 섬광처럼 팔딱거렸다. 공포의 뒷맛과 현재의 안도감이 섞인 기묘한 감정이 피었다. 강아지가 그의 오른손을 핥는 동안 재훈은 초점을 놓고 시선을 바닥에 흘겼다.

결국엔 이렇게 안전했다. 현실에 닻을 내리고 돌아와야 할 곳에 안착할 수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잠 깸 직후의 고마움이었다. 이제야 다행스러운 만족이 물살처럼 유입됨을 느꼈다. 질식하도록 숨을 참다 공기를 맛볼 때처럼 축 늘어졌다.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애 있었다?” 우습게 뻗친 머리칼 아래로 실없는 웃음을 지어 혜은을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치키더니 맑은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다 다시 시선을 돌리길 반복했다.

“그러셨어?”

“응.” 재훈은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가슴 벅차 하던 기억을 음미했다. 아기를 만졌던 것 같은데 어디를 만졌는지 기억이 흐렸다. 볼을 쓰다듬었던가. “아들이었어. 갓난 애. 너무 이쁘더라.”

우리도 이제 가질까. 아이. 어쩌면 그러라는 계시일지 몰라. 그 끔찍한 꿈이. 그는 소리 없이 마음의 서판에 생각을 새기며 그녀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멋대로 떠오른 그 생각에 흐뭇하기까지 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단맛처럼 덧발라 방금 전의 쓰린 것들을 묻고 싶었다. 그러다 돌연 묵언의 공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입을 우물거려도 소리가 지워지는 그 비릿한 공포. 그 생각이 다시 속을 간질이듯 침침한 감정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잠재울 수 있었다. 불안은 묻고 다시 밝게 집중할 현실이 앞에 있었다. 두 손으로 개의 몸통을 쓰다듬었다. 청소를 끝낸 바닥 위로 털이 또 성가시게 쌓일 터였다.

“그랬어.”

“응.” 재훈이 답했다.

혜은은 뭉툭하게 꼬리가 내려간 물음을 했다. 물음인지 대답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어조였다. 시선은 이제 재훈에게 돌아오지 않고 바지런히 닦고 있는 접시들 위로 떨군 채였다.

“니 놈이 딸을 죽이더니 아들이나 가져 보려고.”

총탄이 뇌수를 뚫은 듯 재훈의 정신에 구멍이 났다. 휑하게 뚫린 데서 핏물이 비어지듯 충격이 꿀렁이며 그의 속을 채워갔다. 혜은의 말이 꽂혀 들어오며 그녀를 무심히 쳐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퀭하게 커졌다. 핏기가 씻기고 입이 헤벌어졌다. 그는 느릿하게 몸을 기울이며 일어나려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재훈은 넋이 나가 침을 흘리듯 말을 흘렸다.

그녀의 시선은 내리깔려 있었다. 옆모습은 이제 시퍼렇게 식어 보였다.

“아들이라며. 우리 딸을 죽였으니까 아들 본 거 아니야, 꿈에서?”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재훈은 주춤대며 일어서 발을 옮겼다. 풀렸던 내장들이 끔찍하게 뒤척이며 다시 엉키고 덧붙었다. 물러갔던 공포가 홍수로 되돌아와 뱃속에 난입했다.

햇살이 등뒤에서 어스름으로 탁해졌다.

“딸이라니… 무슨 소리야. 자기야….”

그의 말은 추위 속의 떨림이 되었다.

혜은이 수돗물을 잠그고 걸어 나왔다. 왼손에 접시를 들었다. 게슴츠레 뜬 눈을 치켜 재훈을 노려보았다. 싸늘하게 굳은 낯에선 좀 전까지의 모든 온기와 웃음이 도려져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니놈이 썩은 아비라서 우리 딸을 버려 죽이고. 너는 시치미를 떼고 꿈이나 쳐 꾸고 있어? 아들이 뭐? 내가 아들 놓아주면 걔까지 죽여버리게!”

그녀가 팔을 휘둘러 손에 든 것을 내던졌다. 그녀와 재훈의 발치 사이에서 접시가 창백한 비명을 지르며 터졌다.

수백 개의 파편들이 솟았다. 그 광경이 느닷없이 굼뜬 동작으로 이어졌다. 새하얀 부스러기들이 희묽은 물방울로 변했다. 깨진 접시는 피어오르는 물장구가 되어 있었다. 물의 파편들이 크게 널뛰며 재훈의 눈앞에서 찬찬히 상승했다.

마음을 좀먹은 공포와 절망 위에 아득한 어지러움이 칠해졌다. 느리게 솟는 물방울들 너머로 정지된 혜은의 싸늘한 얼굴을 흘끗 보았다. 시공이 뒤틀려 재훈의 주위를 움막처럼 감쌌다. 그는 늦춰진 시간의 숨결 안에서 한 가닥씩 실을 매만지듯 상황을 헤아리려 했다.

“우리 개가… 리트리버였나?”

그는 물속에서 움직일 때처럼 둔하게 몸을 가눠 뒤를 돌아봤다.

덩치 큰 이리 한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자세를 낮춘 채 비열한 미소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노려봤다.

놈이 도약해 그의 얼굴에 달려들었다.

 

 

 

눈을 뜨니 어둠 속이었다. 재훈은 눈을 굴려 주위를 더듬었다.

천장에는 창 밖의 나른한 빛이 몇 자락의 줄무늬를 그려 놓았다. 숨이 거칠었다. 질주하던 심장의 박동이 잔기침처럼 이어졌다. 입술을 다문 채 콧김으로 숨을 쉬며 어지럽게 눈동자만 까딱였다.

시간의 목구멍이 그를 삼켰다 울컥 토해낸 듯했다. 까마득한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침대로 다시 던져진 기분이었다. 잠들기 전의 순간들이 기억났다. 물론 의식을 잃고 수면에 진입하는 기억은 지워져 있었다. 꿈의 땅은 늘 입국세처럼 그 기억을 거두어 갔다.

희미한 달빛만 안으로 스미는 고요한 호텔 방 안이었다.

재훈은 병상에 누워 몸의 곳곳에 힘을 줘보는 환자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더 살폈다. 곧 왼 어깨에 살포시 놓인 무게를 의식했다.

그녀가 미약한 기척으로 곁에서 꿈틀댄다.

그 작은 코끝에서 새는 숨 자락이 실바람으로 재훈의 살결을 쓸었다.

잠들기 전의 기억들은 깊이 잠겨 있던 것들이 물 위로 뜨듯 슬그머니 떠올랐다. 두 사람은 시간의 끝이 임박한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다. 그는 달아나는 시간을 붙잡아야 하는 듯 가쁘고 강렬하게 그녀를 안았었다. 육신은 억세게 엉키고 둘의 숨결이 품 안에서 한 덩이로 녹아 붙을 듯 더웠다. 체온이 서로의 핏속에 스몄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던 그 몇 시간 전 기억이 아연히 먼 추억처럼 변색되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옆으로 비켰다. 윗몸을 일으켜 가만히 방안을 보았다.

“…왜 깼어….”

혜은은 잠이 짙은 웅얼거림을 흘렸다.

그 고운 음성이 재훈의 가슴에 동이 트듯 번져 왔다.

“꿈 꿨어.” 잠이 씻겼지만 힘이 빠져 옅게 흩어지는 목소리. 맞아. 꿈을 꿨지.

그녀의 손가락이 슬며시 그의 왼 손등에 미끄러졌다. 흰 솜으로 살갗을 쓸어내듯 간질이는 감촉이었다. 피부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혼탁해진 그의 뇌리에 성냥불로 켜졌다. 자욱한 어둠 속의 밝은 불씨. 위안. 기대.

“다시 자.”

“잠시만. 좀 이따.”

“…떨어?”

혜은이 짧게 놀라 토막 난 숨을 삼켰다. 그녀도 몸을 일으켜 재훈과 눈높이를 맞췄다.

“왜 떨고 있어….”

“아니야, 나쁜 꿈 좀 꿨어.”

그녀의 오른팔이 그의 등을 쓸어 올라와 어깨에 도착했다. 널찍이 팔을 벌려 그를 망토처럼 감쌌다. 윤기 나는 뺨이 그의 목덜미에 닿는다. 재훈의 것보다 두터운 온기가 맞댄 살을 투과해 넘어왔다. 그는 그대로 잠들어 그 온기를 당분처럼 빨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또 꿈을 꿀 지 몰랐다. 다시 악몽을 마주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오른 눈의 물은 얌전히 멍울졌지만 왼 눈의 것은 느리게 기어 내려갔다.

혜은이 어느새 알아채고 그의 고개를 감싸 쥐었다. 어둠을 뚫고 둘의 눈이 만났다. 손가락으로 그의 눈가를 닦았다. 두 엄지가 와이퍼처럼 호를 그리며 광대뼈와 뺨을 쓸었다.

“엉뚱하게 악몽이야. 신혼여행 와서.”

엷은 미소를 입에 건 채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둘은 윗몸만 일으켜 앉아 달라붙은 채였다. 뱀이 튼 똬리처럼 침대 위에 꽁꽁 옭혔다. 달빛만이 날숨을 건네 방안에 희미한 은색의 막을 입혔다.

“무슨 꿈인데?” 혜은은 묻는다.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거. 너무 내용이 많아. 너무 버겁고.”

“장편 영화야?”

그녀에겐 여전히 엷은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익살이었고, 내밀히 기댈 수 있는 밝음과 생기였다.

“연작상영이랄까.”

“심지어 두 편?”

재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림은 미열처럼 남아 있었다.

“꿈이 두 개였어. 아니, 겹으로 싸여 있었어. 꿈 안에서 또 꿈 꾸는 그런 거. 다 우리가 나왔어. 우리가 같이 있는데. 행복하게… 있고. 개도 있고 아기도….”

“우리 애 봤어?”

그를 걱정하던 조심스런 기색을 뚫고 그녀의 맑은 천진함이 쏙 튀었다.

“처음 꿈에 애가 있었는데… 다 얘기 못해. 기억하기도 싫고.”

그는 선으로 잇듯 혜은의 두 눈에 시선을 붙였다. 구애하고 갈구하듯 뚫어지게 보았다. 넋을 놓아 꿈의 잔영들을 언뜻 떠올렸다. 섬뜩한 광경. 그를 몰아붙이던 그녀. 휘몰아대던 다른 잔상들도 짤막한 비명처럼 스쳤다. 사나운 곡괭이질로 가슴의 땅을 쩍쩍 파듯 아팠다.

잊길 바랐다. 다른 모든 꿈들처럼 기억이 흩어지고 달아나길 바랐다. 이런 꿈만 선명하게 남음은 불공평했다. 어서 꿈답게, 제 멋대로 뭉그러져 사라지길. 지독한 장난처럼 꾸며진 허상들은 걷히고 진실의 선명한 윤곽만 만질 수 있길. 그에게 진실은 눈앞에 있었다. 눈앞의 얼굴이 모든 기만과 착란을 내몰아줄 답이었다. 그도 두 손을 그녀 뺨에 둘렀다. 칭칭 엉킨 육신 사이로 둘의 시선이 녹아 합쳐졌다. 어둠도 뚫고. 총총히.

“뭔가 잘못된 걸 알고 꿈이란 걸 알았어. 그때마다 죽음이 훅 끼쳤어. 나는 현실이란 걸 믿었는데. 현실에 있단 걸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현실에 딛고 안심했다고. 우리 같이 있었으니까.”

그의 음성은 속삭임으로 죽어갔다. 혜은의 다문 입술엔 틈이 돋고, 조용히 넓어진 눈동자는 더욱 또렷하게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게 현실이어야 됐는데. 그걸로 완벽했는데….”

“현실이야. 지금 같이 있잖아.”

“자꾸 다 망가졌어. 꿈이 고약하게 앗아 갔어. 전부 무너지고…. 우리가 행복했는데도. 있던 아기가 없게 되고. 하나씩 뒤로 가고. 한 겹씩 벗겨지고….”

“쉿, 그만. 지금 같이 있어. 여기.”

혜은의 이마가 재훈의 것을 눌렀다. 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코끝을 맞댄 채 가빠진 호흡을 섞었다. 거친 숨에 그의 몸이 너울처럼 들썩였다. 감싸 안긴 그녀의 몸도 덩달아 오르내렸다. 그의 말은 멎고 호흡의 박자만이 어둠 속에서 기척을 냈다. 혜은도 기다려주듯 그 적막에 녹아들었다.

고요했다. 새까맣게 고요했다. 재훈은 새벽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아 만든 또 한 겹의 어둠에 파묻혔다. 의식을 곤두세웠다. 차례로 더듬었다. 숨결의 리듬. 그녀의 체온. 두 몸을 휘감은 깜깜한 공기. 밤의 감촉. 하나씩을 더듬고 확인했다. 의식의 좌표가 존재하는 현실의 차원이었다.

그리고 악몽에 대해 생각했다. 악몽이 있던 밤들을 떠올렸다. 현실로의 귀환이 고마운 밤들이었다. 깨어남과 함께 공포를 면제 받음에 감사했다. 이내 이번 악몽을 떠올렸다. 반복된 파국에 앞선 완연한 행복들을 생각했다. 그 귀한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그토록 생생했음에도 왜 현실이 아니게 되었는지. 왜 꿈임을 알아차려 그것을 잃어야 했는지. 그렇게 그것들을 생각했다. 외줄을 타듯 생각의 선을 그어가고, 주위의 적막에는 느긋한 물소리가 스며들었다. 물살의 뒤척임. 널찍이 깔린 물의 출렁임이 평온한 박자로 반복되고 있었다. 철썩거리며 부딪히고, 파랑의 결들끼리 서로 뒤섞이며….

재훈은 듣고 있었다. 감각의 손끝이 그 물소리에 닿은 채로 정지했다. 나부끼듯 술렁이는 물살의 박자가 분명히 들려왔다. 그의 곁에서. 침대의 곁에서. 소리가 줄기차게 움직여 그의 귓속으로 흘렀다. 기척을 키우며 흘러들어왔다. 

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대로 꿋꿋이 어둠을 붙들었다. 어둠의 맛이 느껴졌다. 그 맛엔 달콤함이 없었다. 그저 잿빛의 망연함. 망연함과 무력함이 텁텁한 맛으로 어렸다. 절망이 멍들듯 검푸르게 번져오고, 물소리의 뒤척임이 또렷이 커지며 멍빛의 절망도 넓게 퍼져갔다. 재훈은 붙인 눈을 동여맸다. 떼선 안 됐다. 이제 그 눈을 떼어선 안 됨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혜은아."

"…응?"

그는 두 엄지를 그녀의 눈꺼풀에 얹었다.

이미 눈동자를 덮고 있는 그 얇은 살갗을 살포시 눌러 잠재웠다.

"뜨지 말고 있어."

침묵만큼 엷은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음성도, 숨결도 희미하게 숨어들었다. 두쌍의 감은 눈만이 맞닿을 듯 가까이서 암흑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둠 속으로 건너가고 싶었다. 눈꺼풀의 다리를 건너가 그녀의 어둠 안에 함께하고 싶었다. 그 어둠을 헤집어 그녀의 초롱한 눈동자를 불러 깨우고 싶었다. 

물소리는 뒤척이고, 적막을 덮어왔다.

달아날 수 없는 걸까. 불러들인 적 없어도, 물결은 이렇게 그들의 주위를 에웠다. 해변을 찾아온 기억이 없어도 수면은 어느새 곁에 엄습해 태연히 넘실대고 있었다. 

시트가 젖어들었다. 축축함이 꽃 피듯 번져 두 사람의 다리를 만져왔다. 

다가옴을 느꼈다. 그 익숙한 그늘이 바깥으로부터 뻗쳐왔다. 곧 닿을 것임을 알았다. 기다리듯 앉아 있으면 그 손길이 몸에 닿아 의식을 적셔올 것임을 알았다. 눈을 뜨는 순간, 언제라도 들이닥쳐 그들을 집어삼키고 지워버릴 것임을 알았다.

이 꿈의 땅끝으로 도망칠 수 없는 걸까.

모든 토굴을 빠져나와 진실의 차원에 도착해도, 이 꿈의 세관은 기어이 찾아와 시간을 징수하는 법일까. 발밑을 허물어내는 것일까.

우리 현실을 거두어가는 걸까.

재훈이 그녀의 얼굴을 오른 어깨에 파묻었다. 옥죄듯 억세게 그녀의 몸을 끌어 안았다. 

"계속 감고 있자. 감고 있어야 돼."

봐선 안 돼. 꿈의 뱃속에서 게워져 나오는 이 착란을 봐선 안 돼.

그게 우리를 기만하고 이 현실을 앗게 둬선 안 돼.

이게 현실이지. 같이 있는 지금이 현실이지.

눈을 뜨면 닥쳐오겠지. 이 가지런히 출렁이는 물결이. 험악한 파도로 솟아 덮쳐 오겠지.

거부하자. 도망하자. 더는 깨질 수 없고, 헤어질 수 없으니. 이게 현실이지. 지금이 현실이지.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꿈의 땅끝까지 달아나야지. 

떠오르자. 꿈이라면 떠오르자. 속박을 잊고 중력을 벗고 위로, 위로.

 

우리 발밑을 잠가오는 음험한 꿈의 늪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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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8 단편 타차라와 늙은 개 양윤영 2020.04.18 2
2577 장편 꿈속의 숲- 3. 십년 전 ilo 2020.04.11 0
2576 단편 마지막 공포 니그라토 2020.04.11 1
2575 단편 트랜스 게임 휴머니즘 니그라토 2020.04.11 0
2574 단편 요나가 온 니느웨 니그라토 2020.04.11 0
2573 단편 취기 어린 사랑 김성호 2020.04.10 0
2572 단편 꽃다발 (SF 초단편) 김달영 2020.04.09 1
2571 단편 최초의 인형 아나킨 2020.04.08 0
2570 단편 무두부 거우리 2020.04.06 0
2569 장편 꿈속의 숲 -2. 만남 ilo 2020.04.05 0
2568 단편 단비 거우리 2020.04.02 0
2567 단편 우리에게 균열이 필요한 이유 최의택 2020.04.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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