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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꿈속의 숲 -2. 만남

2020.04.05 22:5604.05


 수십 일을 시커먼 동굴 속에 있다가 겨우 입구를 찾아 서서히 빛을 받는 것 같았다. 해방감과 피곤함이 동시에 몰아닥쳤다. 그사이 해는 부지런히 제 일을 하러 기울어갔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 한구석에 초가 하나 켜져 있었다. 누가 초를 켰나 돌아봤는데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우왁!“

”어이구, 뭘 그리 놀래나.“

 한순간에 ‘언니’가 된 자는 태평하게 앉아 있다가 내 모습을 보더니 실소를 터트렸다. 나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제 집에...?“
”동생이 자고 가라고 청하던데?“

 언니의 대답은 단순명쾌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뭐, 하루 정도는, 하지만 그 외에 혹시 다른 약조도 한 게 있는지 조심스러워졌다.

”기억이 안나 그러는데 혹 제가 실수한 것이 있나요?“

”실수? 실수는 없었는데. 하지만 기억이 안난다니까 몇 가지는 다시 물어야겠네.“ 

 나는 그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별안간 배에서 정적을 가로질러 우렁찬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소리에 언니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할까?“

”혹시 주변에 유명한 숲이 있나? 큰 꽃나무도 있고.“

 언니는 한창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잠깐 정적이 흘렀을 때 숲에 대해 물었다. 이 말을 들으니 얼핏 술김에 숲에 대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저희 마을은 벚꽃 나무가 많아 봄에는 숲에 꽃이 많이 피어요.“

”봄까지 기다려야 하는구나.“

”꽃구경하러 예까지 오신건가요?“

”여기 꽃이 꿈처럼 아름답다고 들어서.“

 언니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않고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왠지 더 캐묻기가 어려워 밥상을 내려다보며 밥 한술 떴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고 하루도 저물었다.

 그 이후로 언니는 계속 가게에 자꾸 나타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랑 시간을 보냈다. 밖으로 책을 홍보하고 대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다가도, 서툴게나마 성실히 일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언니와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일이 재밌었다. 벌써 수십 일이 지나고 결국은 모든 일이 일상이 되어 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언니, 근데 처음 우리 만났던 날 그 쪽지는 무엇입니까?“

 내 말에 언니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 해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도깨비의 주문이 적힌 것이네.“

 언니의 실없는 장난을 듣고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언니는 옆에서 실실 웃었다.

”그럼 제 책은 도깨비 전설이 담긴 책이란 말입니까? 장난치지 좀 마세요.“

”어? 이젠 날 훈계하려 드네. 많이 컸어, 동생.“

 언니는 내 어깨를 툭툭치며 나지막이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이젠 무섭지 않다는 표시로 어깨를 한번 들썩이곤 다시 서책을 필사했다.

 반짝 밀려온 손님을 상대하고 나니 순식간에 한가해졌다. 슬슬 배도 고프기 시작해 언니가 식사를 준비하러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도이야.“

 문을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백발의 머리를 하고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몇 년간 뵙지 못한 나의 대부였다.

”어르신! 어찌 이렇게 먼 길을 오셨어요.“

 나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서 황급히 달려갔다. 언니는 내 뒤에 가만히 서서 나와 어르신의 관계를 추측하는 듯했다.

”아, 이분은 저와 함께 살며 지내는 최 연이라고 합니다.“

”최 연입니다. 도이의 친절에 얹혀 지내고 있습니다.“

 언니는 특유의 부드러운 저음으로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는 곧 어르신 쪽으로 몸을 돌려 언니에게 어르신을 소개했다.

”이 분은 김 석자 우자이십니다. 옆 운경국에서 상단을 운영하시고 부모님때부터 많이 도움을 주셨던 분이예요.“

”아, 고선국 분이 아니셨군요. 워낙 능수능란하셔서 꼭 고선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이분이 자네보다 말솜씨가 유려하시구먼. 어떠냐, 네 세책방을 이분께 넘기는 것은?“

”어르신이 도와만 주신다면 고선 최고의 세책방으로 키워보겠습니다.“

 어르신과 연이 언니는 첫 대면인데도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르신도 능청스럽게 말을 받는 언니가 마음에 드신 듯했다. 우리는 간단히 안부 인사를 마치고 어르신을 모셔 근처 주막에 가서 밥을 먹기로 하였다.
 
 언니와 자주 가는 주막에 도착해 국밥 세 그릇을 시키자 금방 음식이 나왔다. 그동안 못 뵌 오랜 세월이 무색하게 그동안 여러 각국을 들썩이게 한 책이나 작가 이야기, 세상사를 나누며 이야기꽃이 피었다.

”고선까지 오셔서 구할 책이 있으신 겁니까?“

 예전과 달리 상단이 고선에 오더라도 어르신이 직접 오는 경우는 요즘은 별로 없었다. 평소 서책에 관심이 많으신 어르신이 직접 넘어와 구할만한 서책이 나왔는지, 저명한 작가가 몰래 어르신과만 서신을 주고받으며 나눈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흠.“

 예상외로 어르신은 이 이야기가 나오자 어두운 낯빛을 하고 목을 가다듬으셨다. 보통은 쉴새없이 나에게 자랑하곤 하셨다. 나의 부러워하는 반응을 보면 이야기할 맛이 나신다나.

”일 때문은 아니고, 좀 알아볼 것이 있어 온 것이네.“

 어르신은 어두운 낯빛을 금새 바꾸어 허허 웃으며 얼른 밥이나 들자고 하셨다. 잠깐 주춤해진 분위기는 곧 어르신과 언니 특유의 재치로 밝아졌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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