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검었다.

주변이 온통 검은데, 아래로 뚫린 그 안은 더욱 검었다.

 모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살짝 벌리자 잠든 잔딧불이가 보인다. 동그랗게 말린 꼬리가 부풀어 올라 끝에서 그을음과 함께 노란 빛이 새어 나왔다. 손안에서 시작한 빛은 동그랗게 퍼져 내 어깨와 얼굴을 환히 밝혔다.

 멍하니 구경하듯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을음이 일어나는 곳에서 작게 불길이 일었다. 불덩어리는 이내 잔딧불이로 옮겨붙어 전체로 퍼지더니 갑작스레 홧 하고 커져 나를 놀래켰다. 놀란 나는 그만 손에 벌려 구덩이 안으로 던지듯 그것을 놓아버렸다.

 그것을 본 것은 그때였다. 타오르는 불덩이의 모습을 머금고 반짝이던 검은 짐승의 두 눈동자. 짙고도 짙은 깊은 구덩이 안에서 웅크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것이 환히 타오르는 잔딧불이의 화려한 몸부림으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약하게 그르렁대던 숨을 더는 숨기지 않고 날카롭게 번쩍이는 이를 벌리며 화염과 나를 동시에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구덩이에서 뛰어올라 단숨에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애비, 피곤해 보여. 왜, 잠 잘 못 잤어?”

레아, 샘과 동산에 오른 나는 샘이 잔디 위에 앉자 그 애 다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맞아. 아침에도 안색이 안 좋던데”

“괜찮아. 좀 못 잤을 뿐이야. 오늘 많이 자면 돼.”

샘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봐. 왔어.”

레아가 일어나 몸을 틀자 잔디가 스스스 쓸렸다.

“우연이네. 쟤도 우리처럼 오전 수업만 받고 땡땡인가 봐.”

“레아. 속 보이는 소리 집어치우시지. 쟤 보려고 일부러 이 시간에 우리 데리고 온 거잖아.”

“내가 언제!”

레아는 화들짝 놀라며 비명 지르듯 외쳤다.

“말 수 적고 분위기가 어둡긴 한데, 쟤한테 관심 두는 애들이 여럿 있긴 하더라.”

샘의 말에 레아는 작게 “잘 생겼잖아. 그렇지 않나?”라며 조금 더 본심을 드러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으쓱해진 느낌이다.

잔디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포근해 고단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설풋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친구들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다시 깬 것은 샘이 또 한 번 내 이마를 톡톡 건드렸을 때였다.

“애비, 그만 눈 떠. 네 왕자님 왕림하셨어.”

왕자님이라는 말에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일렌이 보였다. 일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어쩜 이렇게 시간을 잘도 맞추냐. 분명 한참 전부터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왔겠지.”

“애비는 좋겠다. 저렇게 근사하고 든든한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달라붙은 잔디를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 말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일 뿐, 우린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다.

가방을 챙겨 일렌이 있는 곳으로 걷는데, 길옆으로 난 내리막길에 등을 보이며 앉은 그 녀석이 우리 쪽으로 슬쩍 고개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포착한 나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일렌에게 향했다.

“고든 일렌! 하여간 지극정성이다. 너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놀 수가 없잖아.”

“내가 너무 맞춰서 왔나? 미안. 사만다. 다음엔 조금 늦게 나타날게.”

일렌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내 친구들에게 사과하며 금세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에 가자. 바래다줄게.”

레아와 샘이 뒤에서 우우하고 놀리자, 일렌이 수줍어하며 환하게 웃었다.

 

일렌은 숲을 지나 개울가에 다다를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신 놓고 걷다 작은 웅덩이를 밟을 때 정도에만 머뭇거리며 팔을 뻗는다든가, 조심하라고 말해줄 뿐. 나란히 걸어도 일정한 거리는 언제나 유지했다.

“물이 불어났네. 지난주 내내 비가 내려서 그런가.”

혼잣말처럼 들려 대꾸하기도 뭐하고 모른 척하기도 뭐하다. 동의라도 해야 하나 싶어 얼굴을 바라보자 일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애비. 미안한데.”

일렌이 주저하며 손을 내밀었다.

“잡을래? 손.”

오해할까 싶었는지, 변명을 얼른 이었다.

“개울에 물이 많아져서 넘어질까 봐.”

잡은 손을 개울 지나서도 놓지 않는다면, 그대로 집까지 걸어도 상관없었다. 그랬다면 우리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었다. 매일 학교 앞에서 등교를 기다려주고, 늘 이 먼 곳까지 바래다준다면, 그 정도 생각은 당연한 순서지 않을까. 하지만 개울을 건너자마자 일렌은 잡은 손을 수줍게 놓아주었다. 그리고 목장에 닿을 때까지 다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무판자로 대충 잘라 세워둔 푯말을 지나 울타리 문을 열어 나만 안쪽으로 들어왔다. 데려다준 데 대한 인사를 하려고 몸을 돌리자 일렌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사만다가 그러던데, 요즘 잘 못 잔다면서. 악몽 같은 거에 시달리는 거야?”

또 이런다. 무심해 보이지만, 나에 대해 들은 정보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단 말이다.

하굣길 한 번 데려다주는 중에도 사람 마음을 이렇게나 여러 번 헷갈리게 할 수 있다니.

“목장 일 하느라 피곤했는지 잠을 좀 설쳤거든. 별거 아니야.”

“애비, 나는 네가 편히 지냈으면 좋겠어. 악몽이나 과거 같은 거에 고생하지 않고.”

“과거? 무슨 과거?”

일렌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다 이내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러니까 뭐든 너를 괴롭히는 게 있다면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다고.”

울타리 기둥에 올려놓은 일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늘 조심하고.”

순간 그 녀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일렌도 그 앨 떠올리며 말한 것일까. 아까 언덕에서 일렌의 시선이 슬쩍슬쩍 그 애에게 향했다는 생각은 어쩌면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이 살짝 잠겨있을 때, 일렌에게서 그답지 않은 말이 들렸다.

“내가 지켜볼게. 나만 믿으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밤이 되자, 뚜르라미 우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들려왔다. 창틀에 팔꿈치를 받히고 어둠 내린 너른 초원을 내다보았다. 바람이 불어 든다. 변함없는 내음과 벌레들 지저귐 속에 머물자니 농담을 주고받다 터진 엄마의 웃음소리가 언제라도 다시 들려올 것만 같았다. 일렌은 잊으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떠올려야 할 것들이 많다. 그중에는 엄마의 일도 있고, 아빠의 일도 있고, 또……. 모르겠다. 뭘 기억해내야 하는지. 하지만 분명 검게 꽉 막힌 한 가지가 늘 마음을 갑갑하게 한다. 내게는 내가 모르는 과거가 있다. 일렌이 뭘 염려하는지 알지만, 내게도 나만의 사정이란 것이 있으니.

“그나저나 ‘지켜볼게’는 또 뭐야. ‘지켜 줄게’도 아니고.”

혼잣말로 구시렁대는데, 울타리 가까운 데 자리한 귀리 창고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궁금하거나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시각 창고에 들락거릴만한 사람이 있었다. 딱 한 사람. 잔딧불이를 위한 포리지용 곡물을 저장해 두는 창고. 가득 쟁인 귀리 더미에 기대고 자리 잡은 녀석의 쭉 뻗은 다리 한쪽이 보였다. 내 그림자 실루엣이 그 다리 위를 가로지르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왔어. 내 할 일 하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

나는 머뭇거리다 녀석에게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뒤로 물러섰다.

“아비게일.”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생각이 바뀌었는지 나를 불러세운다.

“혹시 고든 일렌에게 꿈 얘기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든 자세하게 털어놓지 말라고 한 거 잊지 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고 말했던 거나 잊지 마.”

창고를 나가려고 반쯤 열린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높다란 그림자가 덮치듯 다가왔다. 뒤를 돌자, 그가 문을 닫으며 동시에 내 어깨를 밀었다. 덕분에 문에 등을 기댄 채 벽과 녀석 사이에 끼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녀석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위협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애를 잘 알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누구한테도. 과거에 대한 거, 꿈에 대한 거. 뭐든 간에.”

“무슨 소리야. 나도 잘 모르겠는 꿈이나 과거에 대해서 뭘 어떻게 누구한테 말해.”

짜증 난 투로 말했지만, 녀석의 표정은 계속 강경했다.

“고든 일렌에게 말했어? 꿈 내용 같은 거?”

그런 말 한 적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고든 일렌과 나의 관계는 보이는 것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 눈앞의 이 녀석과의 관계보다도 더 멀지 모른다.

“알 거 없잖아.”

팔꿈치를 굽히며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조명처럼 쏘아보는 눈동자로 최면이라도 걸려는지 본래부터 가진 위압감을 십분 발휘하며 천천히 또박또박 협박하듯 말했다.

“했어 안 했어.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상체를 뒤로 빼더니 바로 앞에서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려 나를 내려다보듯 바라봤다.

“그만 저리 좀 떨어질래.”

“아비게일, 했어 안 했어?”

“테렌스, 그만…….”

이름을 부르자, 내가 기대고 있는 창고 문을 주먹으로 툭툭 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휙 멀어졌다. 눈앞을 높게 가리던 그가 비켜나자 순간적으로 전등불에 눈이 부셨다.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모르겠지만, 너에게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나에게 중요한 일. 나조차 영문을 알 수 없는, 어쨌거나 중요한 일.

“안 했어. 일렌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안 했어.”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같은 확인은 없다. 테렌스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나의 대답을 늘 철석같이 믿고는 했다. 그래서 저 애에게는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답을 수정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

테렌스는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서자 생긴 틈만큼 창고 문을 잡아당겨 열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옆으로 돌려 창고 밖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그만 들어가서 자. 여기는 내가 계속 있을 거야.”

묘하게도 그 말은 오후에 일렌이 했던 말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지켜볼게. 나만 믿으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래서 물어보고 말았다.

“나 자는 동안 지켜볼 거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우스갯소리였지만, 테렌스는 웃지 않았다. ‘아무 일’이란 것을 두고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이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진한 눈동자가 더욱 짙게 보였다.

“아비게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 나한테 달린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너나 아니면……. 어쨌든 지금은 이런 얘기 아무 소용 없어. 그만하자.”

뭐래. 뭔 소리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약속했어. 단지 내가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만 알아 둬. 그러면 돼.”

“테렌스…….”

“그만 가. 어서.”

테렌스의 단호한 명령에 튕겨 나가듯 뒷걸음질 쳤다.

“아, 그리고 네 친구 말인데. 키 작고 머리카락 긴 애.”

“내 친구? 레아?”

“그래. 그런 이름인 것 같다. 그 애한테 내 사물함에 뭐 넣는 것 좀 그만하라고 해 줘.”

대답하는 것도 잊고 나는 자리에 멍하니 서버렸다. 문을 잡고 선 테렌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밖으로 걸어 나와 내 몸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장난처럼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너는 왜 시도 때도 없이 눈 뜬 채 바보가 되는 거야. 다리 떼고 걸어. 내 말 들려?”

결국, 테렌스는 나를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창고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방문 앞에서 그대로 밤새울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최대한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 동안 테렌스는 언제나 그렇게 해 주었으니까. 주변을 감싸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내 뒤로 따라붙는 그림자처럼, 돌아보면, 찾으려고만 하면 그곳에 언제나 이 녀석이 있었다.

 

2.

검다.

어떤 검은 곳보다도 검었다.

 모은 손을 살며시 벌렸다. 쭈그러든 잔딧불이들이 엉켜있다. 변한 몸뚱이는 잿빛이 될 테고, 버석거리던 날개가 가장 먼저 결을 이루며 변할 것이다. 질긴 실이 되기 전, 구덩이 안에 묻어야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무렵, 등 뒤로 기척을 느꼈다.

 악의.

다가오는 이의 악의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아래를 보니 잔딧불이에게서 빛이 퍼졌다. 온기에 용기를 얻은 나는 몸을 돌려 방패처럼 팔을 쭉 앞으로 뻗었다. 오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상대는 날카로운 검은 이와 새카만 눈동자를 번쩍이며 와락 달려들었다. 놀라 뒷걸음질 치다 심장이 아래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찔함을 느끼며 떨어지는데 나를 내려다보던 검은 눈이 카하학 소리를 내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이었다. 짙은 어둠의 뒤편에서 불길을 일더니 삽시간에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시뻘겋게 집어삼켰다. 타닥타닥타닥. 그때부터 들려오는 타는 소리. 눈앞의 모든 게 희게 사라진 후에도 이 소리만큼은 귓가에서 사라질 줄 몰랐다.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일렌?”

밤사이 내린 비에 난간과 계단이 젖었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는 덕분에 초록이 풍성하다. 습한 기운 때문인지 띵한 머리를 두드리며 나오자, 부연 시야 속 울타리 너머로 일렌이 보였다.

세상에,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다니!

나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달려오지 않아도 되는데.”

가방끈을 대충 쥐어 잡고 헐레벌떡 달려가자 일렌은 오히려 미안해한다.

“언제부터 기다렸어?”

웃을 뿐 대답이 없다. 분위기, 기분이 묘하다. 일렌이 내 가방을 잡더니 자기 어깨로 옮겨 맸다. 자연스러운 행동을 멍하니 보다 가방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무거운 건 내가 들어 줄게. 잘 쉬었어?”

일렌이 하루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 밤 새 어떤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일렌이 가방끈을 매만지는 사이, 나는 눈으로 빠르게 창고를 확인했다.

언제 갔지. 설마 계속 복도에 있진 않았겠지. 비 오면 엄청 추워지는데.

테렌스가 복도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가.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나뭇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는 없었던 것 같다. 대신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만 떠오른다. 꿈결에 들었던 소리.

“갈까?”

일렌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렌에게 내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 어려, 나는 딴청 부리며 시선을 피했다. 일렌을 지나쳐 먼저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다가온 손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쥐었다. 처음으로 허락 없이 잡은 손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껌벅이며 어색한 얼굴을 바보처럼 유지했다. 일렌은 손에 힘을 주더니 자기 곁으로 나를 당겼다.

“마을 사람 모두가 지금 우리를 봤으면 좋겠어.”

와, 이 애 진짜 작정했나 보다.

고든 일렌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교실 앞에 들어서는 내게 달려든 샘이 큰 소리로 말하는 통에 반 애들 전체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고 말았다.

“일렌하고 손 잡고 등교했다는 거 진짜야? 소문 쫙 났어!”

내 시선은 절로 창가 맨 끝자리로 향했다. 텅 빈 의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는데, 앞에 선 레아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하며 표정이 변했다. 뒤를 돌자 테렌스가 걸음을 멈추고 바닥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샘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레아가 계속 보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옆으로 비켜서며 의도적으로 테렌스의 눈을 피했다.

“목장까지 가서 기다린 거야? 학교에서 너네 집 엄청 멀잖아. 세상에, 꼭두새벽에 일어났겠네! 고든 일렌에게 이렇게 순정적인 데가 있다니.”

샘은 고든 일렌과 사귀는 게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했다.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찌나 대견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그때 교실 앞쪽에 있던 한 남자애가 목소리를 던지듯 우리에게 말했다.

“그 근처에 고든 네 별장 있지 않아? 쟤네 원래 어릴 때부터 몰려다닌 거로 알고 있는데.”

“몰려다녀? 누가?”

샘이 ‘그런 말 한 적 없잖아?’하는 눈으로 나를 봤지만, 나 역시 처음 듣는 말이다.

“쇼어가 알 텐데. 쇼어 목장이 마을에서 잔딧불이를 가장 많이 키웠었잖아. 그래서……”

녀석이 말을 멈추었다. 어느샌가 테렌스가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 것이다. 녀석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테렌스와 같이 앞문을 통해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옆에서 샘이 작게 “아, 뭐야.” 하며 툴툴댔다.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자리를 찾아 앉으며 분위기는 일단락되었다.

테렌스는 나간 후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애가 말했던 ‘잔딧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어두운 구덩이를 기억에서 소환하려 애썼다.

 

“애비?”

우리는 벌써 개울가에 도착해 있었다. 일렌이 멍해 있는 나를 불러 세웠다.

“부탁이 있는데, 해도 될까?”

질문하며 일렌은 어느새 잡은 손을 꾹 쥐었다.

“개울 건너고 나면, 그때부터는 나를 예전처럼 불러 줄래?”

“예전?”

“어릴 적엔 너희 둘 다 날 고도라고 불렀어. 성이 아니라 이름을 불렀었다고.”

일렌은 내게 질문하면서 동시에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허락을 받으려는 것보다는 질문을 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하지만 난 무엇부터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어릴 적이라니, 너희 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울타리 문을 닫는데, 바람에 날리던 풀잎 몇 가닥이 머리에 달라붙는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일렌이 한 말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잡아채 끌어안을 것처럼 해놓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물러나 내일 보자며 손을 놓아 주었다. 멀어지는 일렌을 바라보면서 일렌과 나의 관계에 아직 그 어떤 확신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일렌의 행동을 허락하고 있다.

일렌이 가까이 다가오면 꼼짝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생각에 빠진 채 무심결에 손에 잡힌 풀잎을 떼어내려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풀잎이 이제 막 색을 발하기 시작한 잔딧불이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반 녀석이 지나가듯 한 말이 마음에 남았었던가 보다.

머리를 흔들었다. 쇼어 목장에서 잔딧불이를 키우던 것은 과거의 일. 그래. 모두 과거의 일이다.

 

창고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마른 냄새만 가득할 뿐,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전등불을 끄고 문을 닫으려는데 창고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걸어오던 테렌스가 내 손목을 덥석 잡고 무서운 얼굴을 해서는 창고 뒤쪽으로 끌었다.

생각보다 한참을 걸었다. 걸음을 빨라 뒤따르는 내 걸음은 거의 뛰다시피 할 정도였다. 창고를 지나 울타리를 넘어 이름이 뭐였는지 잊어버린 나무들을 헤치고 숲으로 들어갔다.

목장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와서야 테렌스는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팔을 놓아주겠구나 생각하려는데,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테렌스는 내 팔을 자기 쪽으로 휙 잡아당기더니 내가 그에게 끌려가는 힘을 양팔로 받아 방향을 틀어 덩치 큰 나무로 밀어붙였다. 내가 움찔하자 날 잡은 팔에 힘을 줘 나무에 닿지 않도록 멈춰 세워 주었다. 하지만 배려는 여기까지. 내 어깨를 움켜쥐더니 어제와 같은 태도로 나를 몰아세웠다.

“너, 아까 그거 뭐야?”

“뭐가?”

“내가 한 말 잊었어? 고든 일렌하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테렌스는 화나 있었다. 짜증이 난 것도 같다. 답답해하고도 있다. 그런 얼굴을 보자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라고 응수해야 할지 분하게도 생각나는 게 없다.

“이유를 말해. 왜 그렇게 고든 일렌을 싫어하는지.”

“내가 싫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왜 내가 고도랑 만나는 게 싫은 건데?”

테렌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눈 안으로 두려움이 스며든 것을 본 것 같다면 내 상상력이 지나쳤던 걸까.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 듯, 그래서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른 말투로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아비게일.”

이상하다. 어떤 순간이라도 테렌스가 날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어딘가 묘해지는 것이.

“언제부터 고든 일렌을 그렇게 불렀어? 그 녀석 앞에서도 그렇게 불러? 언제부터?”

“아직. 어릴 때 내가 그렇게 불렀다는데, 다시 그렇게 불러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표정을 살피면 알 수 있다. 걱정거리가 있지만, 애써 티 안 내려는 얼굴. 지금이 딱 그런 얼굴이다. 테렌스는 남은 손까지 가세해 내 얼굴을 감싸듯 잡았다.

“내 말 들어. 같이 다니지 말고, 예전 일에 대해선 언급도 하지 마.”

“왜 피하느냐고 물을 텐데, 뭐라고 해. 일렌이 나한테 고백하겠다고 했단 말이야.”

테렌스가 시선을 떨구더니 뒤로 멀어질 듯하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에서 떨어진 양손이 뒤로 빠지더니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뭐라고 대답할지는 네가 잘 알고 있어. 그냥 네 마음을 말하면 돼.”

귀가 팔에 눌린 탓이었을까. 테렌스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네가 목장을 버린다면, 여길 떠나겠다고 한다면, 그땐 말해줄 수도 있어. 하지만 머무는 동안엔 안 돼. 제발 내 말만 믿어.”

“나랑 부모님 말고 목장에 누가 또 있었어?”

내 순진한 질문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테렌스의 팔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테렌스는 팔을 풀더니 아까보다 더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누가 그래?”

“일렌이. 우리 둘 다 일렌을 고도라고 불렀대. 그 ‘둘’의 뉘앙스가 너는 아닌 것 같았어.”

테렌스의 울대가 출렁였다. 시선을 잠시 헤매더니 돌연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바보냐? 방금 말한 것도 기억 못 해? 예전 일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하지 마라니까.”

“뭐야. 누구더러 바보래. 저리 가!”

나는 냉정하게 돌변한 테렌스의 태도에 울컥해 그를 밀쳐내려 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원하면 일렌하고 얼마든지 사귈 수도 있다고!”

“그럴 리가 없어! 넌 일렌을 좋아하지 않아!”

테렌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나를 놓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평소 테렌스에게서 듣기 힘든 목소리다. 격양되고 흥분한 거친 음성. 방금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이내 평소 말투로 돌아와 조용히 이어 말했다.

“넌 갤 안 좋아해.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돼. 괜히 그런 척도 하지 마.”

“좋아. 그럼 이건 물어도 되겠지? 아까 교실에서 우리 목장에서 잔딧불이 키웠다는 얘기할 때, 왜 일부러 그 앨 불러냈어?”

테렌스가 자기 앞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댔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을 내쉰다.

왜 내 일에 이 애는 이토록 고민이 깊은 것일까. 왜, 도대체 왜.

“나 요새 계속 잔딧불이 꿈을 꿔. 어두운 구덩이도 나오고 이미 까맣게 죽어버린 잔딧불이 몸에서 다시 빛이 나다가 불이 번지기도 하고. 까만 눈에 날카로운 이를 가진 이가 나타나서 위협하기도 하고. 기억 못 하는 어떤 걸 무의식이 자꾸 깨우려고 드는 기분이야. 내가 요새 잠도 잘 못 자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구덩이?”

아까와는 다르게 테렌스가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뭔지 아는 게 분명하다. 그는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상체를 숙여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본인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익숙한 테렌스 냄새가 풍겨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익숙하다고.

“꿈에서 뭘 보든지, 기억이 나는 게 있더라도 절대 일렌에게 말해서는 안 돼. 그런 게 있다면 나한테 말해. 너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거야. 이 말 절대 잊지 마, 아비게일.”

“테렌스…….”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비명처럼 들려왔다. 소름이 끼쳐 팔을 매만지자, 테렌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방 앞까지 바래다줄게. 가자.”

 

 3.

짙푸르렀다.

달빛에 닿은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홀로 짙푸르렀다.

 그는 머리맡에서 서서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내가 눈을 뜨자 매트리스 위로 앉아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잡아 문지르다 팔꿈치로, 다시 좀 더 위로 미끄러졌다.

 대담하다. 어깨를 타고 올라간 손을 내려 손가락만으로 쇄골을 따라 움직이더니 움푹 들어간 지점에서 원을 그리며 시선을 내게로 올렸다. 벌어진 손가락이 천천히 가슴 무덤 쪽으로 내려와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돌렸다.

 짙푸른 어둠은 기다리지 않고 곧장 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구덩이?”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 방 안으로 생경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있을 리 없지. 한쪽으로 내친 이불을 잡아끌어 뒤집어쓰고는 연신 발로 차대며 몸부림쳤다.

“웬일이야. 나 미쳤나 봐.”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아비게일 쇼어! 정신 안 차릴래!”

테렌스가 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바람에, 나는 경직된 자세에 쓸데없이 숨까지 참았다. 평소답지 않게 뻗대는 내가 이상한 듯 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몸 안 좋아?”

한 손으로 내 턱을 잡더니 눈 아래를 한쪽씩 내리며 상태를 확인하려 든다. 손이 닿자 지난밤 꿈이 여지없이 떠올랐다. 그래서였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구덩이.”

“뭐?”

“구, 구덩이 말이야. 구덩이. 네가 그랬잖아. 구덩이라고.”

“무슨 소리야. 이거 다 태울 건데. 구덩이가 아니라 화장터로 가야지.”

테렌스가 한 곳으로 모은 쓰레기 더미를 가리켰다.

“혼자 할 테니까 저기 앉아서 정신 좀 차려.”

휴일을 맞아 밀린 목장 일을 하기로 했다. 순전히 테렌스 혼자 결정한 일정이다. 일꾼 아저씨들이 건초더미를 옮기고 난 뒷정리를 하자며 신이 난 상태다.

한참 후, 테렌스가 돌아보더니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쪽으로 오라는 것 같다.

“연기. 몸에 안 좋아.”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려댄다. 바람에 연기 날리는 방향이 바뀌자 테렌스가 다가와 옷을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그 힘을 따라 뒷걸음질 치면서도 나는 드럼통 안의 쓰레기 더미가 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아, 안 돼. 불꽃 집중해서 보면 안 됐는데.’

또 시작됐다. 형체가 흐릿하게 사라진 주변에 붉은 기운만이 또렷하게 시야에 박힌다. 그것이 나를 알아보더니 시뻘겋게 타오르며 흉포한 혓바닥으로 비명을 질러댄다. 그 뱉어낸 독이 불꽃 끝 검은 그을음을 타고 뻗어 나와 나의 폐부로 단숨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불꽃이 질러대는 폭격과도 같은 비명에 나는 귀를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방비한 몸이 멋대로 몸서리를 쳐댔다. 아니 상체 흔들림은 거의 몸부림이 되어 주먹 쥔 양손이 허벅지 여기저기를 사정없이 때려댔다. 내가 나를 때리며 아픈 것을 느끼면서도 최면 걸린 듯 불꽃에 고정된 시선을 조금도 돌릴 수 없었다. 차디찬 땀이 몸 밖으로 한꺼번에 배출되자 기분이 나빠지더니 갑자기 느껴지는 강력한 중력에 버티질 못하고 무릎이 구부러지려 했다.

그때 테렌스의 커다란 손이 방패처럼 내 눈앞을 가로막으며 쓰러지려는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정신을 놓으려고 할 때쯤 내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그때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며 잊었던 기억이 밀려들었다.

‘아비게일! 어디 있어? 이리 나와!’

‘애비! 나오지 마! 숨어!’

‘애비! 그곳으로 가지 마! 위험해!’

사방을 둘러싼 붉은 화염과 짙은 그을음이 어지럽다. 그들이 불꽃 건너편 너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따닥거리는 소리와 불길 따라 부는 뜨거운 바람, 공중으로 날리는 타다 남은 잔디들과 검게 변한 잔딧불이들.

제자리를 돌며 어떤 목소리를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커다란 두 손이 내 양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챈다. 겁에 질려 힘껏 소리 질러 보지만, 사방을 삼키며 커지는 따닥 소리를 이길 수 없다. 나는 나를 찾아대는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대로 떠올리며 그대로 의식을 내려놓았다.

“나았다고 했잖아. 아무렇지 않다고 했잖아! 사람 놀라서 기절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평소 테렌스 치고는 언성이 높다. 눈을 뜨니 내 방이다. 테렌스는 목장에서 일할 때 신는 신발을 여전히 착용한 채 방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얼마나 같은 자리를 돌았는지 바닥에 신발 바닥 모양의 흙이 이어져 기찻길이라고 만들 기세였다. 내가 눈을 뜨고 자기를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야 비로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뭘 본 거야?”

질문에 내가 본 걸 떠올렸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오히려 묻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불은 피하는 게 좋겠어. 혼자 있을 땐 성냥도 켜지 마.”

테렌스는 내 어깨를 살짝 밀어 다시 누우라고 시늉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누운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며 아주 잠시 꿈속에서 본 테렌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부끄러운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예전에 여기 불났었어?”

돌아서던 테렌스가 부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돌아봤다.

“네가 불만 보면 까무러치는 이유가 알고 싶은 거야?”

“아니. 목장이 불타는 게 자꾸 보이는 이유를 찾고 싶어서 그래.”

테렌스가 완전하게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본 게 뭔데?”

아직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테렌스의 눈자위가 검게 변하는 것처럼 보여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손을 꼭 쥐었다.

“왜 너는 나한테 자꾸 나오라고 했어? 두 사람은 나더러 숨으라고 했는데, 너만 나를 나오라고 했어. 나왔더라면 내가 위험해졌을 것 같은데, 왜 자꾸 나오랬어?”

내 꿈 따위보다 중요한 것은 내게 진짜 일어났던 일이다. 테렌스는 알고 있는 것.

“뭐?”

“분명히 너였어. 네가 나더러 나오랬어. 내가 숨지 못하게 했다고.”

그런데 왜 테렌스는 내가 뭘 아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아는 사람 중 나를 ‘아비게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테렌스는 침대로 다가와 내 가까운 곳에 앉았다.

“더 말해. 네가 본 거 더 말해 봐.”

“왜? 언제는 기억하지 말라며. 모르고 넘어가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라며.”

침대에 걸터앉은 무릎 위로 주먹이 모였다 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할지 궁리하는 얼굴이다.

“아비게일 쇼어.”

“그래. 말해.”

“과거를 기억할 필요 없다고 한 건 널 위해 한 말이야.”

테렌스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다 말해주고 싶기도 해. 네가 나를 이렇게 의심하는 눈으로 볼 때면……”

무릎 위에 올려진 테렌스의 손이 내 쪽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밀어내겠다고 생각하는데, 허공에서 멈추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커다란 손은 다시 주먹을 쥔다.

“나만 편하자고 말해줄 수는 없어. 여길 머무는 동안은 안 돼.”

“뭐야, 전에 했던 말 그대로잖아. 좋을 대로 해. 고도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테렌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렌 이야길 꺼내서일까, 고도라고 불러서일까.

“우리 중 이 문제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나지, 네가 아니야. 네가 선택권 있는 것처럼 멋대로 구는 것도 내가 널 지키고 있어서라고. 제발 멍청하게 굴지 좀 마.”

어금니를 꽉 물고 겨우 입술만 떼어 짓이기는 발음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순간, 검은자위가 되는 것을 보게 될까 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 녀석이 더 화를 낸다면, 꿈속의 남자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나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스프링 튀듯 위로 벌떡 일어났다. 침대의 출렁임에 테렌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평소와 같은 눈이 살짝 동그래졌을 뿐, 검은자위 같은 건 기색도 없다.

‘속지 마!’

마음속 어떤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뒤로는 창문과 벽이 있고, 녀석의 뒤로 나가는 문이 있다. 그렇다.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나는 테렌스에게 막혀 구석에 몰려 있는 것이다. 검은 구덩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막으며 나타난 자의 검은 형체가 떠오른다. 심장이 점점 달음박질을 시작하자 스멀스멀 몸이 데워지고 있다.

맙소사. 그제야 깨달았다. 어느샌가 나는 테렌스를 믿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넘어지니까 어서 다시 앉아.”

늘 하던 말과 말투지만, 여기에 그의 걱정은 담겨 있지 않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식의 말로 나를 통제하려 든 것이. 다시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릎에 힘이 풀리며 휘청하려는데, 귓가에 ‘애비!’하고 외치는 단말마가 회오리 끝자락처럼 휙 쓸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에 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닌지 고민하게 돼. 내가 흔들리면 안 되는데.”

어느새 테렌스가 침대 위로 뛰어올라 쓰러지려는 나를 잡아 주었다. 익숙한 냄새. 간밤 꿈에서도 난 이 냄새를 맡았다. 멋대로 구는 녀석의 손을 그대로 두며 내심 로맨틱한 말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구덩이 같은 게 아니라. 구덩이.

정신이 든 나는 팔로 테렌스를 밀어내며 얼굴을 올려다봤다. 마주치는 순간, 완전하게 잊고 있던 어린 날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는 지금보다 더 아래에서 상체를 숙여 내려다보는 테렌스를 올려보며 팔을 뻗었다. 테렌스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해 나도 따라 구덩이를 바라봤다. 잔딧불이가 내는 불빛이 서로 엉겨 붙어 타닥거리더니 덩치를 불리며 타올랐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뜨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어 보았다. 손바닥에 달라붙은 잔딧불이 시체들에서도 불길이 일어났다. 손을 비벼 털어내고 다시 팔을 뻗으려 했다. 없다. 테렌스가 없어졌다. 뻥 뚫린 잿빛 하늘만 온통 동그랗게 머리 위로 떠 있을 뿐, 나를 불구덩이에서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화르르 불 소리에 겁이 나 이름을 불러댔다. 그래, 나는 그때 분명 이름을 불렀다. 고도.

“아비게일? 왜 그래.”

눈을 끔벅이며 뒷걸음질 치자 테렌스는 내 허리에 두른 팔을 쉽게 풀어주었다.

“내가 찾은 사람은 일렌이었어. 세상에. 네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언제?”

“그랬는데 네가 다시 나타났어. 그러더니 내 입을 꽉 틀어막았어. 아주 세게.”

절로 시선이 테렌스의 커다란 손으로 향했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나는 그것이 절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잔딧불이가 타들어 가며 불길이 번지는 구덩이 안에 빠진 나를 테렌스는 구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까지 들어와 몸으로 결박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타닥타닥 소리 사이로 바람을 타고 나를 찾는 일렌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조여 안는 테렌스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쳐야 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문을 슬쩍 봤지만, 아마 그를 지나치기도 전에 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가 아픈 것처럼 몸을 숙이자 테렌스가 “괜찮아?”라며 같이 고개를 숙여 나를 보려 했다. 나보다 더 숙인 자세로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테렌스 어깨를 양팔로 힘차게 밀어버렸다. 불안정한 자세로 물컹이는 침대 위에 있던 터라 녀석은 제대로 균형을 잡아보지도 못하고, 바닥 아래로 나가떨어졌다. 부딪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몸을 돌려 침대 머리맡 커다란 창틀을 밟고 창문을 열어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느덧 해가 많이 내려 나무들 아래로 검은 그림자들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뒤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떨쳐내듯 팔을 열심히 저어대며 정돈된 잔디를 힘껏 밟아 내달렸다. 손질이 덜 된 버려진 창고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낮은 울타리를 넘었다. 평소 주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사유지로 진입했다. 이상하게도 처음 온 곳인데 들어오자마자 가야 할 곳을 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상한 곳에 정확히 기억하는 건물이 보인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더니 이어 옆구리가 쿡쿡 쑤셔왔다.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해가 숨어버린 탓에 검게 변한 세상의 실루엣에 공기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조금이라도 멈췄다간 땀 내 가득한 공기의 찐덕임에 옭매일 것만 같다. 이제 정말 믿을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졌다.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달리는데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저택 문 앞으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때 하지 못했던 도움을 이제야 다시 요청하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도…….”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달려오는 일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날카롭게 젖은 잔디 위로 풀썩 꼬꾸라졌다.

 

4.

새하얀 피부에 도톰한 손끝이 나와 닮았다.

말아쥔 손을 펴자 잔딧불이 한 마리가 잠들어 있다. 우리는 좋다고 깔깔댔다.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른 잔딧불이를 꺼내 엉덩이끼리 비벼댔다. 반복되는 마찰에 불씨가 생기더니 비빌수록 비늘이 꼬실러졌다. 열기에 잔딧불이가 몸통을 비틀었다.

 나는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신기한 걸 보여주지 못했다고 대답할 뿐이다. 나와 닮은 두 손 사이에서 불길이 일었다. 놀라는 내 반응을 만족해하며 과자 먹듯 불덩이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피부가 투명해져 붉고 푸른 혈관을 그려내는가 싶더니 볼 안에서 현란하게 넘실대는 불꽃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것은 이내 핏발 선 눈동자로까지 퍼져 흰자와 검은자가 촛농처럼 한데 뭉쳐 녹아나게 했다. 비명을 지르자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성대가 눌어붙은 목구멍에서 나는 웃음 소리는 욕지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지만, 그 끔찍한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애비 쇼어! 정신 차려!”

어깨와 등이 축축하고 차다. 주저앉고 싶은데 뭔가 나를 꽉 붙들어 그럴 수가 없다.

“애비, 눈 좀 떠봐.”

정신을 되찾은 것은 그때였다. 눈을 뜨고 어디인지 확인했다. 화단 울타리 아래로 가파르게 깎인 배수로 안. 익숙한 곳이다. 웬일인지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일렌…….”

일렌은 나를 그늘진 흙벽 안으로 밀어 자기 몸으로 가두었다. 흙이 머리 위로 떨어질까 봐 손으로 앞머리 위를 가려주며 시선은 계속 정원으로 향했다.

“애비, 잠깐만. 아직 있는 것 같아.”

“테렌스가 여기까지 따라 왔어?”

내 말에 일렌이 나를 말똥말똥 바라봤다.

“테렌스? 얼굴이 백짓장이 돼서 도망친 게 그 녀석 때문이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일렌의 얼굴이 누구와는 다르게 결백해 보인다.

“난 또. 죽을 듯이 달려오길래 강도라도 만날 줄 알고 얼른 데리고 숨었네.”

“전에 불 난 적 있지? 거기서 네가 날 찾으려고 한 적이 있지? 그렇지? 기억나?”

“뭐? 무슨…….”

일렌에게만큼은 절대 꺼내선 안 되는 말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랬는데 일렌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먼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내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너를 부르고 싶었어. 그랬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일렌은 그제야 뭘 말하는지 깨달았는지 태도를 바꿔 온 정신을 내게 집중했다. 내 머리와 팔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왜, 애비. 왜 그럴 수가 없었는데.”

“테렌스 때문에. 그 애가 나를 잡고 안 놔줬거든. 입을 틀어막아서 숨도 못 쉴 정도였어.”

진지하게 듣던 일렌의 미간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하며 평평하게 주름이 펴진다. 일렌은 그때의 일을 더듬었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와 나에게 시선을 옮길 때 느낌이 오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애비.”

전에 없이 다정하게 부르며 내 손을 잡아 손 등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게 있었는데, 그걸 방금 네가 해결해 줬어.”

“내가?”

일렌이 가까이 다가왔다. 뺨을 내 관자놀이 부근에 가져다 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때 널 꼭 찾고 싶었었는데.”

일렌이, 일렌이 아닌 것 같다. 얘가 이런 말을 아무렇게나 할 줄 알던 애였나.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일렌은 다시 고개를 빼 들어 정원 쪽을 바라봤다.

“고도.”

나의 부름에 고든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난다. 숨김없는 웃음엔 치아가 드러나는 법이라고 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분명히 들었던 말인데.

“그렇게 불러주니까 좋다. 옛날 생각도 나고.”

내리깐 눈가에 어린 분위기가 근사하다. 우쭐한 마음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인다.

“고도. 인제 그만 숨어도 되지 않을까. 기껏해야 테렌스잖아.”

“네가 어떤 얼굴로 달렸는지 봤단 말이야.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나가자.”

다정하다. 줄곧 곁에 있던 사람은 나를 염려할 때마다 엄격해지고 표정이 무서워지곤 했는데, 고든은 어째 점점 상냥해져 이대로 가다간 말이 녹아날 것만 같다.

“왜 겁에 질렸던 거야. 위협이라도 당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래?”

“별일 없어. 기억이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떠오르다 보니 겁이 났었나 봐.”

고든의 눈빛이 반짝였다. 표정을 숨기려 했지만, 피부 속으로 퍼지는 솔직한 감정까지 지켜내진 못했다. 하지만 그게 반가운 건지, 놀라는 건지 아리송하다.

“기억나? 우리 어릴 적 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 낸 건 어릴 적 테렌스 뿐.

“저기, 고도. 그 사람은 누구야? 전에 말했던 우리가 친하게 지냈다던 사람.”

“기억 안 나? 전혀?”

내 씁쓸한 미소에 고든 표정이 나와 닮게 변한다.

“에버렛이 들으면 꽤 서운해하겠다.”

“에버렛? 그 사람은 뭐 해? 어디 있는데?”

고든이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가슴팍에 살짝 내 손등을 가져다 대더니 “에버렛은 여기 있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대로 자기 손등을 내 목 언저리에 댔다.

“그리고 여기에도 있을 거야.”

마음속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 사람 누구야?”

“네가 기억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물어보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에버렛은……….”

“아비게일!”

테렌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놨다. 가까운 곳이다. 몸을 흙벽 가까이 붙자 고든이 등과 머리 위를 다시 손으로 받혀주었다.

“애비, 왜 이렇게 떨어.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고든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고도, 나 저 애가 무서워.”

머리 위로 즐비하게 자란 수풀이 일제히 한쪽으로 쓸렸다. 스스스 소리에 어깨가 움찔했다.

“아비게일, 숨어 있다면 그만하고 나와.”

낮고 신경질적이다. 온갖 짜증과 불만을 참으면서 기껏 달랜다는 게 저 정도다.

내가 저런 녀석을 믿고 의지했었다니.

한참을 들쑤시더니 풀 밟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갔어. 이제 괜찮아.”

고든이 쭈그려 앉은 내 앞으로 마주 앉으며 말했다.

“근처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밤새워서라도 기다릴 거야. 그러고도 남을 애야, 쟤.”

“내가 보낼게.”

고든이 일어나 나가려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고든 손을 잡았다. 고든은 고개를 돌리며 묻는 표정을 하면서도 내 손을 꼭 쥐었다.

“화 나게 하지 마. 그 애 화나면 무섭거든.”

“알았어. 쌀쌀하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고든은 내가 모든 걸 기억하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 생각을 믿게 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곳에 발을 들이고 나면, 다음 향해야 할 곳을 자연스레 알았다. 배수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서 달라지는 주변 냄새마저 반가웠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직 당도하지 않은 과거와의 재회를 기대했다.

돌문을 밀자 문에 연결된 바퀴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이윽고 철컥하며 무언가와 제대로 맞물리는 소리가 지하 실내를 울린다. 오돌토돌한 표면 덕분에 손바닥에 남는 까끌까끌하고 화끈거리는 여운이 어딘가 익숙하다. 익숙함은 안으로 들어가 둘러본 실내 역시 그랬다. 전등을 켜자 환한 불빛이 강하게 조명처럼 비쳤다. 그 조명에 음영을 강하게 드러내는 기둥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표면에 낙서가 많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얇은 가로 선들이 여러 번 겹쳐진 주변으로 이름이 적혀있다. 일렌, 쇼어, 쇼어. 누가 얼마나 자랐나 키를 재어보던 흔적. 글자에 손을 대자 파인 두께만큼의 투박함이 손끝에 느껴진다. 나는 어쩌다 이런 걸 다 잊은 걸까.

“이게 언제야. 날짜도 새겼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땐 당장 키 재는 것만이 재미있었을 때니까.”

뒤로 돌자, 그늘진 돌문 옆으로 고든이 있었다. 한 걸음 들어오니 얼굴이 훤히 드러난다.

“추억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

새삼스레 낯설다. 내가 알았던, 하지만 지금은 잊어버린 고든 일렌의 진짜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두근댔다. 간밤까지만 해도 테렌스를 꿈에까지 소환하지 않았던가.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하기도 하나.

“테렌스는?”

“투덜거리긴 했는데, 더 찾을 생각은 안 하고 곧장 목장 쪽으로 나가더라고.”

나도 모르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곧장 가 버렸다고? 그럴 리가.

고든이 잘 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쪽이 더 믿을 만하다.

의심이 얼마나 많은 앤데. 얼마나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고든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내 머리카락을 길게 손으로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렇게 있으니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에버렛도 우리를 더 응원했을 거야. 확신할 수 있어.”

“맞다. 얘기하다 말았는데, 에버렛이 누구야?”

테렌스, 그 악당 같은 녀석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지금은 고든을 위해 미뤄두자. 찾는 걸 쉽게 포기한 서운함을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토로하는 건 의미가 없지. 게다가 에버렛이란 사람이 궁금하기도 하니. 고든이 몸을 떼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아, 방금 나왔다. 평소 나를 관찰하듯 보던 이 눈빛.

“어렸을 적 우리는 늘 같이 놀았어. 여기 찾아보면 그때 가지고 놀던 것들이 많을 거야.”

천천히 이해시키듯 말하는 것이 어째 소녀 취급받는 기분이다. 내 어깨를 잡더니 방향을 틀어 나를 뒤로 돌렸다. 아까 본 기둥이 눈앞에 있다.

“그중 이 키재기 놀이도 빼놓을 수 없지.”

나는 다시 기둥에 새겨진 선을 손으로 따라 그렸다.

“진짜 꼬맹이였을 때였나 봐.”라고 말하자, 고든이 턱을 뒤에서 내 어깨 위로 올리더니 “응”하고 대답했다. 재미있다는 듯 웃길래 나도 따라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기둥에 대고 있는 내 손 등을 덮어 잡았다. 순간. 고든이 내 뒤에서 몸을 밀착해 둘이 하나로 붙은 모양새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일렌도 지금 우리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까. 조금 전까지 울리던 지하실 공간에 웃음소리가 멈추고, 말소리가 멈추고, 나는 숨까지 멈추었다. 그의 턱이 움직여 눌리는 바람에 어깨가 살짝 아팠다.

“애비.”

아, 안 돼. 진도가 너무 빨라.

아까부터 느낀 두근거림이 설렘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깨닫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기 고도, 여기 봐. 이거 좀 이상하다.”

그때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일렌 이름 위로 그어진 여러 가닥의 선, 새겨진 이름 ‘쇼어’.

“이상하지 않아? 봐 봐. 일렌 위에 쇼어가 있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어?”

약간 부자연스럽게 동의를 구하듯 웃으며 말했다. 할 말이 생겨 대화 주제를 다른 데 옮길 수 있게 된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일렌은 웃지 않았다.

“이거 맞아. 쇼어는 언제나 나보다 컸거든.”

나는 몸을 앞으로 빼 일렌에게서 벗어나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릴 때 내가 그렇게나 키가 컸어?”

일렌이 내 말을 재미있어햇다.

“너 말고 또 다른 쇼어. 에버렛 쇼어.”

“에버렛… 쇼어…….”

이름을 듣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양팔을 감싸 안았다. 고든 일렌이 정리하듯 말했다.

“그래. 에버렛 쇼어. 네 오빠 말이야.”

 

 5.

에버렛은 장난이 심했다.

부모님은 못된 장난을 그만두라고 거듭 야단쳤지만, 아들 행실을 바로잡기엔 그들에게 남은 삶이 그리 길지 못했다. 장례식 후 에버렛은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충족시킬만한 놀이를 찾았다. 일전에도 그는 잔딧불이를 비벼 종이나 풀잎을 태우고는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다친다고 걱정할 때면, 다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플 것이란 걱정에는 그것도 다 살아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본 적 있어? 생명이 생기를 잃다가 어느 순간 뚝 사라지는 거. 그렇게 되면 세상에 더는 없는 게 되는 거야.’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한동안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오빠가 있었다고. 나한테.”

대답을 기대하는 대신 기둥을 내려다봤다. 투박하게 파인 줄 몇 가닥만으로는 어떤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나와는 상관없는 가상의 인물 같기만 하다.

“애비, 천천히 하자. 내가 도와줄게.”

꿈이라도 이렇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내게 현실이란 지하실 내부의 차분하고 습한 먼지 냄새 정도일까. 그나마 진짜 같았던 일렌과의 묘한 감정의 기류마저 사라져 버렸다. 작은 충격만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겨우 그런 스쳐 가는 분위기일 뿐이었나 보다.

“가야겠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손이라도 잡으면 어째야 할지 당장은 그것만이 새로운 고민이었다.

“애비.”

고맙게도 그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말했다.

“좀 돌아야겠지만, 울타리 말고 문으로 나갈까. 너랑 같이 걷고 싶어서 그래.”

지하실을 나오려는데 벽 너머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일렌에게도 들렸는지 의식하는 듯했지만, 이내 내게 말을 걸며 문으로 인도했다.

 

“진짜 이럴래! 어떻게 나한테 오빠가 있었단 말까지 숨길 수가 있어!”

창고 문을 벌컥 밀며 소리를 질렀다.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일렌과 걷는 동안 침을 몇 번이나 의식적으로 삼켜댔는지 모른다.

“테렌스?”

너른 공간이 울렸다. 소리가 울림을 다하자 목소리 사이로 켜켜이 담겨있던 초조가 눈치 없이 곁으로 되돌아온다. 창고 밖으로 고개를 뒤로 빼 멀리 내 방 창문을 확인했다. 불은 모두 꺼져 있다. 후회됐다. 그에게서 도망친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잠시나마 구덩이 속 짐승을 테렌스라고 믿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가. 그는 그저 말을 조화롭게 할 줄 모르고, 행동이 앞서는 잔소리쟁이일 뿐이란 말이다.

집안을 울리던 발소리가 심장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규칙적으로 박동한다. 불안감이 상승한다. 조짐이 좋지 않다. 기어이 대책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테렌스를 찾아야만 했다.

계단이 보였다. 올라가서 좋을 것 없다는 테렌스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붉은 등을 켜며 돌았지만, 소리를 듣는다면 나를 꾸짖으러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더욱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다섯 계단 정도 밟았을 때 한심하게도 난간과 벽에 바짝 달라붙어야만 했다. 층계참 위로 도사리는 암흑 속으로 전진할 자신이 없었다. 옆으로 난 창문에 얼굴을 기댔다.

나 지금 뭐 하니.

관자놀이를 유리창에 대고 곁눈으로 창에 비친 쭈글쭈글한 색조합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일렌네 건물이 조명에 반사되어 비쳐들었다. 넋을 놓고 일그러진 형체를 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얼굴을 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고 높다란 숲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일렌네 창고가 보인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뒷걸음질 쳤다. 창고 안이 불타고 있었다.

 

휘날리는 열기가 다가오는 모든 것을 삼킬 기세로 넘실댔다. 주변으로는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일렌이 창고 안에 있는 것이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무릎이 떨려왔다. 문으로 돌아 나오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일찍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숲길을 오래 걸었더라면, 적어도 그의 안전을 걱정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 마나 한 생각을 거듭하며 일렌을 불렀다. 눈앞이 흐릿하게 색을 바라며 몽롱해지려는 것에서 애써 벗어나려 할 때였다.

“아비게일! 나와!”

우렁찬 테렌스 목소리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테렌스? 테렌스야?”

사위를 살폈지만, 후끈한 공기에 붉어진 어둠만이 상황에 관여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뿐. 테렌스는 보이지 않는다.

“애비! 숨어!”

일렌이 외쳤다. 다시 몸을 돌렸다. 창고 내부의 기둥 하나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일렌은 없다. 목소리는 하나같이 과거에 속한 것들이었다.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나타나. 테렌스!”

눈 감은 채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외쳤다.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 녀석은 여기 못 올 거야.”

나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불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목소리며, 말투며, 나는 그를 안다.

“오늘 테렌스는 우리하고 같이 놀 거거든.”

“왜? 너희 별로 안 친하잖아.”

지나간 말들인 걸 알면서도 그때 했던 말 그대로 대답했다.

“그랬지. 그런데 재미있게 놀려면 장난감이 필요하잖아. 이해하지, 애비?”

형체가 선명해지며 얼굴이 뚜렷해지려는 찰나 훅 불어오는 바람에 힘없이 흩어진다. 몸을 뒤로 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의 장면이 현재 화면과 겹쳐 눈앞이 아른아른했다. 흔들리는 시야에 정신 팔린 사이 다리가 제멋대로 달리고 있었다. 지하실로 향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곳 내부에 불타는 창고와 연결된 통로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철컥 소리에 이어 육중한 돌이 맞물려 돌아갔다. 내부는 이미 퀴퀴했다. 실내로 들어가 곧장 깊숙한 안쪽의 다른 돌문으로 향했다. 구석에 숨은 지렛대를 들어 올리자 벽처럼 보였던 문이 쿠쿵거리며 열린다. 이상한 냄새에 팔꿈치로 코를 막았다. 안에서 탕탕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것 같다.

“고든!”


목소리가 벽면에 맞고 튕겨져 사방으로 던져진다. 부딪히는 소리가 빨라졌다. 누군가 일부러 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팔로 입을 가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

“고도! 있어? 들리면 대답해!”

이미 스며든 연기에 실내 등이 아른거려 정체 모를 그림자가 공중으로 빼곡히 들어찬 느낌이다. 기침이 자꾸 나와 무릎을 꿇고 팔로 더듬어 움직였다. 눈을 뜨는 것보다 감는 시간이 더 길어지자 아예 눈을 감고 숨을 최대한 참으며 소리에 집중했다. 앞으로 기어 주변을 더듬는 식으로 전진하기를 몇 번, 뻗은 손가락에 옷깃이 만져졌다.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발목과 손목은 테이프로, 입과 눈은 두꺼운 천으로 둘둘 말린 상태로 발아래 파이프 관을 계속 차고 있었다.

“테렌스!”

떨리는 손으로 묶인 것들을 풀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 동안 여기서 이러고 있던 거야.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뒷골이 서늘하게 당겨왔다. 서둘러 둘린 것들을 풀렀다. 숨쉬기가 더욱 괴로워졌다. 테렌스가 윗도리 하나를 벗더니 나를 당겨 안아 얼굴에 옷을 덮어주었다. 손을 맞잡고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이제껏 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세게 손을 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생각이 전해졌는지 테렌스의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 눈이 메워 눈물이 멈추지 않는 데다 숨도 막혀와 문으로 나올 때쯤 해서는 거의 매달려 안긴 상태가 되었다. 이래저래 괴로웠다. 고든 일렌의 거짓말과 테렌스에게 한 악의적인 행동. 자기 집에 불을 지르면서까지 테렌스를 괴롭히려 했다는 것을 그 순간에도 믿기 어려웠다.

지렛대를 내려 문을 닫는 순간, 펑 소리가 연이어 들리며 전구가 터졌다. 뒤이어 가까운 곳에서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테렌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몸통에 팔을 두르고 있던 터라 나도 함께 넘어졌다. 테렌스에게 움직임이 없어 겁이 더럭 났다. 뭐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눈앞은 마냥 까맸다. 꿈에 나오는 화면과 똑같이 까맸다. 꿈과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건너편에 붉은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것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정신 차려. 아비게일 쇼어.

짐승은 상체를 낮추고 가볍게 앞발을 바닥에 터치하듯 내디디며 여유 있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목을 늘여 빼듯 들어 올렸다. 몸이 위로 쑥 자라면서 길어난 앞발이 팔로 변하더니 자연스럽게 관절을 움직였다. 실루엣이 완전한 남자 형상으로 바뀌고 붉은 눈동자가 익숙한 사람의 것으로 변해갔다.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펴자 잔딧불이 한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잔딧불이가 발하는 빛에 그의 얼굴이 보인다. 놀란 나를 보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버렛.”

그는 주변으로 날아다니는 잔딧불이를 손으로 잡아채 힘주어 비빈 후 바닥으로 털어냈다. 이제 다시 보이는 건 없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버렛이라니, 애비. 그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테렌스를 꽉 끌어안았다.

“에버렛 쇼어 불타 죽은 지가 언젠데. 조금 전까진 있었는지도 몰랐잖아.”

“왜, 일렌. 왜?”

길게 묻고 싶지도 않다. 그저 왜 그랬는지만 알고 싶었다.

“아쉽다. 저 녀석 잡아둔 것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너에겐 언제까지나 친절한 고든 일렌으로 있으려고 했는데.”

내가 아는 고든 일렌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껏 내가 알던 사람은 누구란 말이야.

“내가 너희 둘을 지켜보면서 알아내려고 한 건 딱 한 가지였어.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일을 방해하고, 에버렛까지 불구덩이에 던져 넣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일렌은 기분이 격해졌는지 못마땅한 말투로 혀를 차기 시작했다.

“이해 못 했어? 애비, 네가 알려줬잖아. 구덩이에 빠졌을 때, 테렌스가 널 잡고 안 놔줬다고. 그게 내가 알고 싶던 거였어. 그때 일을 망쳐놓은 게 저 자식이 한 짓이라는 거.”

이해되었다. 전체가 한 번에 기억나고 말았다.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까지. 다만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에버렛의 잔인한 성향을 부추기며 함께 즐기던 동료가 있는 줄은. 그 사람이 성실하고 다정하고 잘 생긴 고든 일렌이었는 줄은.

“테렌스를 괴롭히려던 너희가 나빴지. 이 애는 그냥 성실한 일꾼이었다고.”

“에버렛 생각이었어. 토끼며 고양이며 우리에 가둬놨었거든. 기분 내킬 때마다 태우면서 놀려고. 근데 언제부턴가 동물이 사라지는 거야. 저 자식이 풀어준 거지. 계속해서. 에버렛이 혼 내주겠다고 벼르는 줄도 모르고.”

일렌은 에버렛과 저지른 소행을 자랑스럽게 떠벌여댔다. 저렇게 말하고 싶은 걸 이제껏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다. 테렌스에게 손에 가져가 대자,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내 손 전체를 감싸 잡았다. 얼마나 안도가 되던지. 일렌이 떠드는 사이 살며시 일어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말이 많았나. 이런 건 알리고 싶은 심리 같은 게 있는 법이거든. 혼자만 알고 있기는 아깝잖아. 아무나 못 하는 대단한 걸 해냈는데 말이야.”

이렇게 역겨운 자식이었다니.

“그런데 그것도 마지막이네. 나만 나간 다음에는 이 문을 완벽하게 잠글 거거든.”

일렌이 지하실 돌문을 살짝 열었다. 화염 기운에 얼굴선이 붉은색으로 드리워졌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고든 일렌.”

“그래. 아비게일 쇼어. 마지막이니 할 말이 있다면, 들어 줄게.”

“네가 잘 못 알고 있는 게 있어서, 똑바로 알려주려고.”

“오, 그래. 그게 뭔데? 이왕이면 놀라운 사실이라면 좋겠는데.”

일렌의 비아냥 어린 얼굴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에버렛을 불타는 구덩이에 빠뜨린 건, 테렌스가 아니야. 그건 나였어.”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렌스가 옆에 놓인 윗도리를 잡아 일렌 얼굴에 던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일렌이 옷을 잡아내던지는 동안 테렌스가 일렌에게 달려가 그를 잡아당겨 문 안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아비게일, 나가!”

동시에 나를 잡아끌어 열린 문밖으로 내보냈다.

 

6.

주변으로 반 토막 난 잔딧불이가 즐비하다.

 테렌스 때문에 신경질을 부려댄 결과였다. 고든은 널린 곤충 조각을 발끝으로 짓이기며 에버렛의 표정을 재미있어했다.

 “어제는 토끼 우리를 아예 고장 내놨더라고. 더는 가만둘 수 없겠어.”

“신중해야 할 거야, 쇼어. 사람은 동물하고 달라서 사라지면 누군가 눈치채기 마련이거든.”

고든의 비교적 냉정한 반응에 에버렛이 낄낄댔다.

“가끔 네놈의 재수 없는 말투를 주워다가 저 새끼 귓구녕에 처박아 버리고 싶어.”

연음을 늘여 빼는 발음 때문인지, 아니면 내용 때문인지, 고든은 에버렛의 말을 듣자마자 웃더니, 폭소를 멈추지 못해 배를 쥐어 잡기까지 했다.

“좋대네, 싸이코.”

“그래서. 어떻게 손 볼 건데, 싸이코.”

에버렛은 잔딧불이의 열 오른 부위를 손등에 대고 비볐다. 고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인다.

“토끼가 없어졌으니, 대신이 되어 줘야지.”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일렌이 괴성을 질렀다. 가면 뒤로 드러난 그의 진짜 얼굴이 소리가 되어 적나라하게 등 뒤로 울려 박힌다. 그에 관한 데이터는 이제 ‘거짓’이란 단어와 함께 새로 구축될 것이다. 테렌스는 배수로를 통과하고 한참을 벗어났을 때야 비로소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집에 가서 신고해. 방문 잠그고 나오지 마. 절대 나오면 안 돼.”

심각한 표정으로 주의를 시키던 그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울타리로 데려갔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자, 테렌스가 양팔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디든 한 군데 으스러뜨릴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안더니 이내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시선이 부딪혔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아비게일.”

테렌스가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걸 나도 모르게 잡아버렸다. 이제 겨우 다시 봤는데.

“같이 도망가면 안 돼?”

“내 생각인데, 구덩이에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만약 있다면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

잡은 손의 손가락 위치를 바꿔 깍지를 끼고는 꽉 잡았다 놓는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희미했지만, 웃기까지 했다.

“제발 가. 나중에 보자, 아비게일 쇼어.”

멀리 창고 옆으로 늘어선 나무에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장관이다. 이미 한참 멀어진 테렌스의 달리는 뒷모습을 한 번 보고는 나 역시 몸을 돌려 집으로 달렸다.

“아! 진짜!”

격양된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확실히 고든 일렌에겐 치밀한 데가 있다. 사악한 자식. 잠시나마 마음을 열려고 했던 게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새까맣게 탄 재들이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들어 사방 군데를 부유했다. 내디딘 다리는 자연스레 구덩이로 향했다.

과거 에버렛은 테렌스를 좋아한다고 소문난 여자애를 테렌스와 만나게 해 주겠다고 꼬여 목장으로 오게 했다. 놀라게 해주자며 구덩이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 잔딧불이가 열을 발할 때 뚜껑 덮고 태우는 데 사용하는 구덩이었다. 여자애는 그 어둡고 지저분한 곳에서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봐. 또 말 안 듣고 나왔네. 언제나 돼야 착해질래?”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내가 무슨 어린 애야? 착해지고 말고 하게.”

에버렛과 내가 했던 말이다. 이 근처, 구덩이가 있는 곳에서.

눈앞의 영상과 화면이 좀처럼 겹쳐지질 않아 계속 자리를 옮겨 다녔다.

“어느 정도 말대꾸는 귀엽지만, 일을 방해하는 정도라면 동생이라도 곤란해.”

얼마나 선명하게 들리는지 바로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불장난을 그만두면 될 일이야. 부모님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걱정하셨다고.”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두 화면이 겹치며 한 장면이 된다. 다른 게 있다면, 과거의 화면엔 에버렛이, 현재 눈앞엔 테렌스가 있다는 것이다. 테렌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숨어 있으라고 한다고 숨어 있을 네가 아닐 거란 생각은 했어.”

표정이 밝은 것을 보아하니 구덩이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비게일?”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달려와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지만, 나도 그 손을 쥐었는지는 모르겠다. 과거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온 정신이 그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버렛이 보여. 그 장면이 보여.”

테렌스가 나를 안더니 “떨지 마. 다 끝난 일이야.”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내가 떠는 것도 알지 못했다. 테렌스 등 뒤로 보이는 에버렛이 빈정대기 시작한다.

“이런 식이지. 그렇게 남 일에 참견하면서 명을 재촉하고들 싶을까. 적당히 듣는 척할 때 그만했어야지. 하여간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쇼어가 인간들 문제 있어.”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곧 이다. 에버렛이 하게 될 말. 다시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팔을 흔들며 말하는 테렌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눈앞으로 에버렛의 희번덕이는 웃음만이 시야에 가득 찼다.

“내가 너 아끼는 건 알지? 엄마 아빠 때보다는 힘들겠지만, 그렇더라도 날 방해한다면, 장담하건대 반드시 혼 내줄 거야. 내 말은 믿는 게 좋아, 애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한 말과 그때의 말이 화음처럼 겹쳤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에버렛이 나를 구덩이로 데리고 간다. 나는 순진하게도 고개를 빼 들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때의 장면이 고스란히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각오해야 할 판이다.

에버렛이 똑똑히 보라면서 내 뒷목을 잡아 고정하고 구덩이 뚜껑을 들어 올렸다. 산소와 만난 불이 위로 치솟았다. 놀란 내 눈에 까맣게 타 막대기처럼 굳어버린 사람 사체가 들어왔다. 그제야 목소리가 터진 듯 고함을 있는 대로 지르며 눈을 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전신으로 퍼지는 소름에 머지않아 정신을 놓게 될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듣고 싶던 테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 괜찮아. 아비게일, 괜찮아. 쉬.”

그제야 연신 머리와 등을 쓰다듬는 테렌스의 손길이 느껴진다. 팔을 뻗어 테렌스 허리를 둘러 안았다. 인식 못 하는 사이에도 나는 안전한 상태였다는 걸 피부로 확인하고 싶었다.

“기억나는 것뿐이야. 어떤 기억도 너를 해칠 수 있는 건 없어.”

테렌스가 땀에 절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의 뒤로 누군가가 보였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한 오 초 정도는 그랬다. 오 초.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할 수 있는 시간. 일렌이 열린 구덩이 안으로 횃불을 던져 넣자 그 소리에 테렌스가 뒤를 돌며 끝이 났다.

일렌은 태연한 얼굴로 구덩이 옆 덤불을 들어 올렸다. 구덩이 하나가 더 있었다니. 테렌스도 몰랐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뚜껑을 열자 자루에 담긴 누군가가 심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일렌은 우리를 바라봤다. 웃고 있지만, 눈 주변에 화상을 입어 찡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는 잘 생겨 보이지 않는다. 테렌스가 나를 자기 뒤쪽으로 당겼다. 그 모습에 일렌이 혀를 찼다.

“뭐라도 되는 사이처럼 딱 붙어가지고 웃겨. 나를 주시하는 눈빛부터 맘에 안 들더라니.”

말투가 히스테리컬하다. 고든 일렌에게서 처음 접하는 낯선 느낌이었다.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우리 셋은 동시에 같은 곳을 보았다.

“내가 신고했거든. 애비네 전화선 끊기 전에. 테렌스가 애비를 죽이겠다고 데려간 후 사라졌다고.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쇼어 일가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정신 나간 짓이다. 나는 놀랐지만, 테렌스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뒤로 잡은 손만 더 꽉 잡아주었다. 일렌은 한가롭게 구덩이 안으로 나뭇가지를 계속 던져 넣었다.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옆의 구덩이로 자리를 옮겼다. 양팔로 자루를 잡고 끌어 올리려 했다. 이대로 두면 자루 속의 사람은 불타는 곳으로 던져질 것이다.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테렌스 손을 놓고 일렌을 향해 뛰었다. 일렌이 자루를 힘겹게 빼 들다 달려드는 나를 보고는 자루를 그대로 내게 돌려쳤다. 무게로 인해 놓친 자루를 다시 잡으려고 했지만, 뒤이어 달려드는 테렌스의 주먹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자루 끈을 풀렀다.

푸석한 자루가 열린 틈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에 여자 얼굴이 보인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근한 얼굴, 레아다.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따져보려는데 레아 역시 나를 보고 놀라다가 이내 주먹다짐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렌이 일방적으로 테렌스에게 얻어터지고 있다. 연신 소리를 내면서 필사적으로 테렌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레아가 내 팔을 손톱이 꽂히도록 세게 움켜잡았다.

“애비. 못 믿겠지만, 네 남자친구가 날 죽이려고 했어. 그러더니 이제 테렌스까지!”

“레아. 여기서 도망쳐. 사람들한테 가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도 알려 주고.”

레아는 정신을 전부 테렌스에게 집중하고 있어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주먹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에 힘을 줘 손톱에 찍힌 팔이 심하게 아파왔다.

“레아!”

레아는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나를 밀쳐내고 일어나 테렌스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외치는 소리에 일렌을 흠씬 손 보던 테렌스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보며 달려오는 레아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일렌이 구덩이 쪽으로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가 잡아챈 것은 끝에 불이 붙은 기다란 나뭇가지였다.

테렌스가 몸을 일으켜 일렌을 향해 레아를 등으로 막으며 섰다. 일렌은 나뭇가지 하나를 더 들어 불을 크게 만들고는 좋다고 웃어댔다. 터진 입술에서 샌 피가 치아 사이사이를 붉게 물들여 히죽대는 표정이 가관이다. 꼭 에버렛 같았다. 횃불을 쥐고 서서 눈알을 희번덕이며 자신만만해하던 에버렛. 그와 일렌이 하나로 겹쳐진다. 그들은 같은 눈을 해서는 테렌스를 바라보고 있다.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봐. 웃을 여유가 있어?”

테렌스의 비꼬는 말에 일렌 표정이 일순 사라진다. 방금 건 내 생각에도 좋은 발언 같지 않다. 도발을 말리고자 천천히 테렌스 쪽으로 다가갔다. 내 움직임을 본 레아가 내게서 테렌스를 지키려는 듯 사이를 막고 선다. 아마도 내가 일렌 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 남자친구 안 말리고 뭐 해. 쟤 저렇게 미친 애였던 거, 넌 알고 있었지?”

레아가 낮춰 말했지만, 테렌스가 듣기엔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그가 레아에게 할 말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려 했다. 동시에 내 시야 안으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테렌스를 향해 달려드는 고든 일렌과 에버렛 쇼어가 보였다. 다급한 나는 내 목소리라 믿기 어려울 발성으로 이름을 외쳤다.

내가 그를 공격한다고 생각했는지 레아가 나와 테렌스 사이를 막으며 내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기다란 손톱이 또다시 살을 파고들었다. 양팔 동시에 오는 통증이 말도 못 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레아를 떼어내려 잡힌 팔을 좌우로 흔들어봤지만, 몸집도 작은 애가 여간 힘이 센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팔을 포기한 채 나를 바라보는 테렌스를 향해 소리 질렀다.

“뒤!”

그제야 테렌스가 얼굴 앞까지 들이밀어 진 횃불을 가까스로 피하며 잔디 위로 넘어졌다. 넘어질 때 발로 차인 일렌이 얼떨결에 횃불을 놓쳤다. 잔디 위로 떨어진 불이 주변으로 옮겨붙었다. 테렌스가 다리를 밀어대며 불붙은 곳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자, 일렌은 반대로 그를 향해 걸었다. 짙어진 어둠으로 일렌의 표정이 가려져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젠 알아보기 어렵다. 그가 횃불을 집어 들더니 테렌스 쪽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소리를 지른 것은 레아였다. 일렌이 테렌스에게 불을 던지려 하자 세운 손톱을 긁어내리 듯 내 팔목으로 쭉 가져가더니 양 손목을 움켜잡고는 투포환 선수처럼 나를 일렌 쪽으로 내던졌다. 레아의 외침에 일렌이 몸을 내 쪽으로 틀고, 테렌스는 벌떡 일어나 우리 사이에서 번져가는 불길 쪽으로 달려들었다.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는 내 몸이 그대로 일렌의 가슴팍으로 쳐 같이 그의 뒤, 구덩이 위로 밀려났다.

열기가 느껴지기 무섭게 시야 아래로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가 보인다. 이글대는 화염을 배경으로 일렌의 얼굴이 붉은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 어둠과 붉은 유령으로 점철된 그의 눈동자에선 실수에 대한 자책과 후회, 자신에게 닥칠 두려움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요동쳤다. 나 역시 그 공포에 전염될 것을 각오하려는데, 내게 세차게 부딪히는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둔탁함이 움직임의 방향을 바꾸어 구덩이에게서 벗어나게 했다.

나를 꽉 끌어안아 시야를 온통 까맣게 만들어버린 테렌스의 상체가 느껴졌다. 불을 넘어오며 꼬슬라진 탄 내를 희미하게 느끼며 안도하려는 순간, 경기가 일도록 온 정신을 찔러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야 말았다. 화염 속으로 사라지며 외치는 소리. 에버렛 쇼어의 것이었고, 고든 일렌의 것인 단말마. 불구덩이로 떨어지며 내지른 마지막 비명에 내 피부 곳곳에 얼음송곳이 들고 일어나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연쇄적인 소름을 만들어냈다.

눈을 감은 검은 화면에서조차 친오빠가 타들어 가며 경악하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렌의 소리는 에버렛의 소리를 일깨우고, 나는 그때 그랬던 것처럼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7.

“에버렛을 구하지 못했어.”

눈을 떴을 때, 테렌스가 한 말이다. 뒤늦게 에버렛을 위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건 아니다. 다만 나와 내 가족에게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더 최선을 다할 수 있었을까.

에버렛을 구덩이로 밀어넣은 건 나였으니, 그가 후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내 행동을 두고 하는 것이란 말이다. 위급한 상황.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던 순간, 불현 듯 머릿 속에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자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테렌스를 끌어 잡고서 망설임 없이 에버렛의 얼굴을 구둣발로 강타했다. 그의 바로 뒤, 시뻘겋게 입을 벌린 구덩이를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계산도 없었는지에 대해선 크게 확신이 없다. 어쨌거나 나는 테렌스를 택했고, 내 부모를 죽인 살인자를 우리 곁에서 영원히 떨궈냈다.

그 후, 악마였던 에버렛은 내 이름으로 이루어진 절규로 부활하여 밤마다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테렌스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침에 방문을 나서면 같은 자리에 테렌스가 있었다. 나의 안녕을 확인하고 나서야 테렌스는 안도했고,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세상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꼈다.

“네가 무사한 게 무엇보다도 기뻐. 그러니까 다른 건 됐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랬는데, 테렌스에게 전해 듣기로 나는 그 애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고 했다.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

 

매끄러운 선의 모서리나 오목 새김 안으로 그늘진 경계에 시선을 던졌다. 뜸을 한참 들인 후 글자 전체를 시야에 담는다. 그리고나서도 비석에 새겨진 엄마, 아빠 이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는 것에 낯설어 한다. 익숙해지는 날은 오지 않겠지.

테렌스가 어깨를 도닥여주자 그제야 무덤과 비석 주변으로 관심을 돌렸다. 언제나 말끔하고 정갈하게 손질된 자리. 나와 부모님을 향한 테렌스의 마음을 찾는 것은 이렇게나 쉬웠다.

“엄마, 아빠. 나 떠나. 테렌스랑 같이 가.”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부모님께 처음으로 생긴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지만, 기쁜 마음과 부모님도 좋아하시리라는 기대감이 그것보다 컸다.

“쇼어 아저씨.”

테렌스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절 거둬주시고 목장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보답해 드리고 싶었는데, 중요할 때 지켜드리지 못 해서 죄송해요. 은혜 갚을 기회를 놓쳐버려 마음 한 구석이 늘 무겁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꾼 아저씨들 따라 왔다가, 혼자만 목장에 남은 거 아니었어?”

“아저씨들과 함께 목장으로 오시던 중에 곤란에 빠진 날 우연히 도와주시게 되면서 알게 됐어. 내 사정을 아시고는 목장으로 데려와 주신 거야.”

일하던 중 간식을 먹다가도 멀리서 아빠가 지나가면, 벌떡 일어나 빵쪼가리 묻은 입을 해서는 큰 소리로 인사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눈앞에 보일 때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는 뭐라도 필요해 하는 눈치면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던 것도 생각난다. 싹싹하지도 않고, 말수도 없는 애가 부모님만 보면 그러는 것이 내게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너희 아버지는 내게 생명의 은인이셔. 이건 과장이 아니야, 아비게일.”

진짜 테렌스에 대해 이제야 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일이긴 한데, 어릴 적에는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굴지 않았었나?”

테렌스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바람에 내 질문이 순진한 것처럼 느껴졌다.

“못 되게 굴었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었을 걸. 너는 너희끼리 어울리는 데 바빴거든.”

너희. 에버렛과 고든과 나. 실제적으로는 에버렛과 고든, 그리고 나 였겠지.

“그땐 오히려 에버렛이 친절했어. 내게 친절했던 이유를 알게 되면서 내 쪽에서 멀어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아.”

나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엄마 이름 마지막 모서리로 고정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양심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단지 즐거우려고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다. 그의 손에 내 또 다른 가족이 희생되었을 때는 말 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고보니 그 역시 가족인 나로 인해.

“아비게일, 너한테 줄곧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테렌스가 몸을 내 쪽으로 틀었다.

“너한테 했던 것 중에 마음에 걸려서 넘어갈 수 없는 게 있어. 지금 사과하게 해 줄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과할 만한 게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에버렛은 자주 내 반응을 살폈어. 아는 게 있는지, 얼마나 아는지 알아내려고. 그럴수록 난 철저하게 아는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어. 내가 속인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걸 실험하려고 너를 이용할 게 분명했으니까.”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슬펐다.

“일렌도 그랬어. 에버렛과 같은 눈으로 나를 살폈어. 과거 일을 아는지 궁금했을 거야.”

일렌이 테렌스에 대해 물을 때가 있었다. 서로 연적으로 여겨 질투하는 거라고 혼자 우쭐했던 마음이 부끄러움으로 변해 마음 한 켠에 묻어난다.

“그 앤 너도 살폈어. 관심 있어하는 남자애처럼 굴면서 뭐든 알아내려고 했지. 내겐 자신이 유리한 지점에 있는 사람인냥 우쭐대면서.”

고든 일렌이 나를 관찰하듯 볼 때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나도 있다. 헷갈리던 눈빛. 그건 역시 애정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그게 왜 후회하는 거야? 네가 알고 있던 덕분에, 내가 이렇게 무사한데.”

“일렌하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너는 아예 그 녀석 손을 잡고 등교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나는 정말…….”

테렌스를 올려다 봤을 때, 그는 염려하고 있었다. 원망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미안함에 온 몸이 따꼼따꼼거렸다.

“네가 기억나는 게 생길 때마다 신 나서 했던 말들을 일렌에게도 말 할까 봐 조마조마했어. 그 애가 알면 안 되는, 네가 위험해질 수 있는 말까지 해 버릴까 봐. 그렇다고 이유를 묻는 네게 에버렛 이야길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미쳐버리겠는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를 심하게 다그치고 말았어.”

“테렌스.”

“지켜주기로 한 내가 오히려 너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고.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 ”

숲으로 데리고 들어가 나무에 밀쳤던 때를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창고에서 벽에 밀어붙이며 대답을 강요했던 때거나.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테렌스, 그거 별 거 아니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진짜 괜찮아.”

“그런 식으로 취급했던 거 미안해. 불안해서 어째야 할지 몰랐어. 내 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너여서 언제든 일렌에게 말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되면 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어.”

덩치가 크고 어른스러워도 테렌스 역시 나와 다를 것 없는 소년이다. 나는 그동안 이 책임감 강한 소년이 나로 인해 생긴 무거운 짐을 혼자 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나는 즐겼던 것 같아. 네가 화 내는 거 질투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 기분에 빠져서, 네가 얼마나 간절하게 나를 걱정하는지 눈치채지 못했어.”

“네 생각이 완전하게 틀린 건 아니야. 일렌이랑 같이 있을 때마다 심하게 질투했거든.”

하마터면 방금 전까지 나누었던 대화의 흐름을 깡그리 잊어버릴 뻔 했다. 방금 무슨 얘길 들었나 생각하다, 테렌스가 여전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백 받을 때의 분위기는 로맨틱하길 바랐는데, 나는 맹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다. 게다가 이 바보 같은 두 가지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테렌스는 내가 예쁜 걸까. 어떻게 저런 눈으로 볼 수 있지.

“내 마음은 너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적어도 울타리에서, 그랬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이라도 분위기 있게 하고 싶었지만, 망했다. 입이 자꾸만 가로로 늘어난다. 갑자기 테렌스가 나를 심하게 다그쳤던 날 밤, 이 애를 상대로 어른스러운 꿈을 꿨던 게 떠올랐다. 웃음이 샐까봐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다시피 가렸다.

“왜. 왜 웃어. 뭔데 그래?”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테렌스는 더 묻지 않고 아까의 그 맘에 쏙 드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때다. 나도 뭔가를 말해주자. 솔직하게.

“테렌스.”

진심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자, 그제야 쓸 데 없는 생각들이 사그라든다.

“네 사과에 대해 말하자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 너를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너를 믿었어야 했어. 네 마음을 알았어야 했어. 말 안 듣고 불안하게 만든 나를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워. 미안하고 고마워.”

우리는 적어도 묻는 말에 거짓을 말한 적은 없다. 그렇기에 말미에 ‘진짜야’ 라든가, ‘진심이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사이다.

“그리고 일렌이 멋지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게 다야. 진심이었던 적은 없어.”

내 말에 갑자기 테렌스 얼굴에 장난끼가 감돈다.

“고든 일렌이야말로 널 정말 좋아한 적이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데, 나는.”

바람이 우웅 하고 아래쪽에서부터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약속한 듯 동시에 일렌네 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르고 아름답던 장소가 몇 시간만에 흉물스럽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댔나?”

“아직까지는 감염의 위험이 남아 있다던데.”

일렌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테렌스는 나를 내려 놓고, 곧바로 흙을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걸로 불을 끄기엔 턱 없이 부족했는데, 때마침 몰려 온 일꾼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일렌은 전신 화상으로 한 때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초한 일이려니 하면서도, 남은 나날이 참으로 애석하다. 이런 것을 두고 인과응보라고 하던가.

이것들은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다. 이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까무라친 이래 줄곧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나중에 날 찾아 온 레아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랬다는 것이다.

“레아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 감이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야. 고마워, 테렌스.”

테렌스가 내 팔뚝을 내려다 봤다. 레아 손톱에 파였던 자국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레아는 나와 테렌스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몸을 바닥으로 엎드리기까지 했다. 얼마나 울어대는지 레아를 부둥켜 안고 같이 울다가, 나중에는 같이 웃었다.

“우리 다 운 좋게 무사했지. 행운이 우리 편이었던 것 같아.”

공기가 순환하는 시간. 이때의 울림은 언제나 설렘을 준다. 테렌스의 목소리가 그 울림을 타고 맑고 청명하게 들려왔다.

“아비게일, 이제 가야겠는데.”

잔디에 놓아 둔 가방을 짊어맸다.

“엄마, 아빠. 나 이제 가요.”

테렌스가 바르게 무덤 앞에 서더니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아비게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서 잘 보살피겠습니다.”

언덕을 내려가자, 약속 시간에 맞춰 온 마차 한 대가 울타리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발견한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봤다. 손을 마주 잡았다. 맞잡은 손은 뜨겁고 용기 있고 희망 찼다.

“잘 부탁해. 아비게일 쇼어.”

“나야 말로. 테렌스.”

마차에 올라 탄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안에서도 잡은 손은 놓을 줄 몰랐다.

“출발합니다!”

마부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퀴 구르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마차가 덜컹하는 바람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 의자에 부딪히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출발이다. 이제 우리는 도시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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