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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주로 보내는 향기

2020.03.25 17:5303.25

빛은 소리보다 빠르잖아. 그 정도는 번개가 먼저 번쩍 치고 천둥소리가 귀를 때리는 걸 생각하면 알 수 있어. 내가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니까, 번개로 인해 하늘이 밝아지면 네가 일하다 말고 달려와서 나를 꼭 끌어 안아줬잖아. 실은 나이를 먹으면서 천둥소리가 덜 무서워졌는데, 네가 나를 안아주는 게 좋아서 계속 무서운 척 했었어. 몰랐지?

 

오늘은 천둥번개가 심하게 치고 비가 쏟아져서 하늘에 구멍이 났나 싶을 정도야. 이런 날이면 원두와 그라인더, 드리퍼, 주전자, 전기포트, 티, 찻잔을 바리바리 챙겨 베란다 앞에 자리를 잡아. 타다닥거리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수동 그라인더에 와르르 원두를 붓지. 다르르륵 원두가 갈리는 소리 사이로 시야가 번쩍하고, 고소하면서고 향긋한 커피 향기가 집안에 퍼지면 천둥이 쳐.

 

커피도 못 마시면서 왜 원두를 갈고 있냐고? 너 때문이잖아. 네가 우주로 간 이후로, 난 마시지도 않는 원두를 사. 꽃향기가 난다고요? 이건 카라멜향이 나나요? 꼼꼼하게 물어보지. 그러고는 집에 와서, 이렇게 하늘에 구멍이 날 때마다 소원을 빌면서 그라인더를 빙글빙글 돌려.

 

하늘님, 하늘님, 숨을 쉴 때마다 몸이 이완되는 향긋한 커피 향기를 우주로 보내주세요.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못 자지만, 커피 향기를 맡으면 잠을 잘 자는 애니까, 잘 좀 부탁드려요.

 

이게 무슨 미신이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번개와 천둥은 아래로 꽂히는 이미지인데 어떻게 올려보내냐고 깔깔거리며 웃지는 마. 그냥 구멍 뚫렸으니까 향기가 솔솔 위로 가지 않을까 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니까.

 

너는 왜 그렇게 우주를 좋아했어? 우주는 광활하고 무섭고…그래 맞아, 신비롭지. 우주의 향은 어떨까, 궁금해했잖아. 지구에 있는 향기로는 너의 호기심을 채울 수 없던 걸까? 매년 새로운 향수가 쏟아져나오고, 너는 시향 하러 달려가서 한두 개씩 사오곤 했잖아. 때로는 향수공방에 가서 직접 만들기도 하고. 계절 따라, 날씨 따라, 기분 따라, 옷차림에 따라 바꿔가며 향수를 뿌리던 네가 후각이 둔해져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없다는 우주에 갔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지구에서 우주를 떠올리면서 향수를 만들지 그랬어. 하긴, 절 향기가 궁금하다며 템플스테이를 하던 너인데, 우주도 갈 수 있었겠지?

 

우주선에 있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서 우주복을 입고 있느라 우주의 향기는 맡지 못할 텐데 말이야. 왜 우주까지 나가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호기심을 어떻게 말리겠어.

 

오늘도 너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너를 기다리면서 차를 마셔. 은하수 중심에는 포름산에틸이 있는데, 이게 파인애플의 향을 이루는 물질이래. 거기서 착안해 만든 티가 있다고 해서 샀는데, 향이 새콤달콤하니 맛도 좋아. 네가 이 차를 마시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와, 우주의 향기다! 이렇게 말을 할까? 아니면 이건 우주의 향기가 아니야. 내가 우주에 갔다 온 사람으로 말하는데 하면서 재잘재잘 말을 할까.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와. 내게 우주의 향기를 알려줘야지. 그동안 나는 네가 푹 잠들 수 있는 향기를 찾아 우주로 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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