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원 히트 원더

2020.03.25 17:4803.25

 

익명의 한 과학자가 배란통, 생리전증후군, 생리통을 모두 잡을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냈다. 부작용도 중독성도 없는 완벽한 상품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먹기만 하면 복통, 허리통증, 밑이 빠질 것 같은 통증, 어지럼증, 설사, 몸살, 구토, 실신, 우울감, 자살충동 등 생리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했다. 생리를 하지 않아 생기는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잡아, 그저 생리를 하지 않는 하루가 계속되는 것뿐이라고 했다. 과학자는 빠르게 SNS를 통해 자신의 성취를 알렸고, 그걸 본 사람들은 열광했다. 울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람도,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해 끙끙거리는 사람도, 진통제를 다섯 알째 먹으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이 또한 지나가리다 자살사고를 묵묵히 견디는 사람도.

과학자는 이 약을 시작으로 원하지 않는 생리를 건강에 이상 없이 정지시킬 수 있는 약을 현재 개발 중이며, 머지않아 생리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피임약은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먹어야 한다. 피임약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맞는 피임약을 찾아 먹는다. 주체적인 나를 위해 피임약을 먹어야 한다는 광고를 비웃으며, 상대방이 콘돔을 착용하지 않거나 혹시나 콘돔이 불량이라 원하지 않은 일에 절망하고 싶지 않아 한 알, 한 알, 챙겨 먹는다. 몇 달, 몇 년 동안 먹는다면 몸에 무리가 온다. 계속 먹는다면 생리는 뒤로, 뒤로 미룰 수 있지만 몸은 망가진다.

저 과학자는 그런 부작용도, 걱정도, 불안도 모두 다 접어두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작용? 있을 수도 있지. 저 말이 거짓말이고 허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원하지 않으면 그만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지?

세상이 뒤집힐 정도로 놀라운 말이었다. 아직도 생리를, 초경을 하는 여자아이를 집밖에 격리하는 사람들이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고통뿐이 아니라 생리 자체를 정지시킬 수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헛소리는 아닌지, 생리를 볼모로 새로운 회사나 이상한 종교를 설립하려는 건 아닌지, 투자를 받은 후 어딘가로 사라지려는 사기꾼은 아닌지, 그저 인터넷상에서 펼쳐지는 사소한 해프닝인지 매의 눈으로 지켜보려 했다.

현재 생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학자의 말이 사실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과학자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되는 건 아니더라도, 반의 반만이라도 사실이기를 바랐다. 이 모든 고통에서 해방 시켜주기를,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반응 아래

-여자들 바보냐? 저런 걸 믿게 ㅉㅉ

-여자-생리=0 군대나 가라

남자-군대=0 군무새 ㄲㅈ

-이 약 나오면 자기 사줄게 사랑해♥♥♥♥♥

응 니 자기 안 태어남~ 이런 약 없음 수고~

-이 과학자 누구임? 이름도 안 나오고 얼굴도 모름 백퍼사기임.

-여기에 속는 흑우없제? 여자들 정신차리시오~~

-페미코인은 돈이 되지여~~ 성님 탑승합니다~~

하는 빈정거림, 무시, 욕설, 신상털기, 비웃음 등의 반응이 있었지만 했지만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그 약이 나오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내 삶이 달라질 텐데.

매달마다, 혹은 비정기적으로 겪는 이 고통에서 해방될 텐데!

간절한 마음으로 과학자가 한 말이 진실이기를, 어서 약이 상용화되기를, 그 다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힘 있는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진통제, 피임약 등을 만드는 제약회사를 비롯해 해마다 가격을 올리는 생리대 회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여자가 고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부정하는 의학계, 출산으로 인구를 채워야 하는 국가까지. 다들 펄쩍 뛰며 과학자를 비난하고 무시하고 경멸하고 난도질했다.

생리는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신의 거룩한 뜻의 증거입니다. 스스로를 거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런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불법적인 연구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익명의 과학자는 정체를 밝히고 연구기록을 공개하길 바랍니다.”

여자는 엄마가 되는 게 최고의 행복이에요. 그런 약이 시중에 풀리면 호기심에 어린 애들이 먹다가 불임이라도 되면 어떻게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 같아요. 통증이야 완화 시킬 수 있다고 쳐요, 그런데 생리를 멈추는 게 가능해요? 분명 한탕 하고 뜨려는 사기꾼일 거예요.”

과학자의 말이 인터넷을 타고 공중파 뉴스까지 도달했다. 저런 삿된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예배가 전국각지에서 예배가 이뤄지고 과학자의 연구를 파헤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러한 약이 나온다는 말 자체에 우려를 표한다는 시민들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알았다. 저건 진짜다. 저 과학자가 한 말은 진실이다. 그렇지 않고서 연일 그 약에 대해 다룰 리가 없다. 우리는 생리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생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과학자를 지키려 했다. 과학자를 보호해달라는 청원,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기사 조회수 올리기, 악의적인 기사, 악플이 많이 달린 기사에 선플달기, 과학자가 한 말과 국내에서의 반응을 갖가지 외국어로 번역해 알리는 등. 생리를 그만하고 싶다는 열망을 간절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고, 남자는 생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밖에서 생리가 터지면 참았다가 집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판을 치는 세상에 그깟 생리가 뭐라고.

어떤 이들은 이게 세상의 반을 상대로 돈놀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과학자에게 은밀히 접촉하려고 했다. 한국, 일본, 미국, 중국 등. 어디에나 생리하는 사람은 존재하니까.

그러나 모두 다 허망한 짓이었다. 과학자는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여자, 남자, 노동자, 기업가, 국민, 국회의원 할 것 없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으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 기록, 핸드폰 이용 내역, 계좌 이용 내역 등 탈탈 털고 뒤졌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과학자의 부모는 일찍 죽었고 친척도 없었으며 교류하는 친구도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달시키는 택배기사가 과학자와 교류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이마저도 택배는 문밖에 두고 가라는 말에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인가? AI는 아닌가? 누군가의 장난이 아닌가? 경제나 정치쪽에서 무언가 터졌고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이슈는 아니었을까? 약의 존재 자체가 거짓인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온나라가, 온세상이 불타오르고 있는 거지?

한동안 과학자 찾기가 들불처럼 번져 온나라를 시끄럽게 했으나, 사건사고는 매일매일 터졌다. 음주운전, 교통사고, 마약, 연예인 스캔들, 빌보드 차드 1, 유명한 가수의 내한공연, 가정폭력, 더 달고 맛있는 개량복숭아 판매 개시, 옥상으로 올라가 바닥으로 내려오며 날갯짓을 하는 닭 등.

과학자에 관한 건 한때의 해프닝으로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어느 날, 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에 휩싸여 입이 벌어지게 하는 미모의 소유자가 등장했다.

유명 유투버가 파도를 타듯 동영상과 동영상을 넘나들고 있었다. 썸네일에서 보이는 손은 가늘고 고왔다. 나뭇잎 그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아래 우윳빛 피부가 빛났다. 그 손에 홀려 동영상을 클릭한 후 시선을 뗄 수 없고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떤 언어라도 그의 아름다움을 다 설명할 수 없을 거라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뇌가 울리며 미의 재정립을 강요받는 듯한, 폭력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유튜버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언어를 잃어버린 듯 어, 그 등의 추임새와 침묵만으로 시간을 보내다 꼭 보라는 말과 함께 링크주소를 남겼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러냐, 요즘에는 홍보를 저딴 식으로 하냐 비웃으며 링크를 타고 동영상을, 아름다움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래도 굳이 표현을 하자면 눈동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반짝거려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올려다보게 하는 밤하늘처럼 맑고 깊었으며, 얼굴 정중앙에 오똑 솟은 코의 각도는 완벽했고, 입술은 키스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하트 모양이었다.

이목구비의 조화가 완벽하면서도, 눈빛과 표정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졌다. 완벽한 조각미남 같다가도,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의 청순함이 느껴져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빛 아래 있을 때는 천진난만했고,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처연함에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쁠 때 얼굴을 보면 배 이상 기뻐졌고, 슬플 때 얼굴을 보면 눈물이 주룩주룩 나와 개운해졌다.

한 번의 우연한 클릭에서 시작한, 전세계를 영원토록 뒤흔들 대스타의 탄생이었다.

 

 

계정주가 본인인지 소속사인지 알 수도 없었다. 가입일은 유투버가 동영상을 발견하기 하루 전, 올린 동영상은 <자유>이라는 제목의 뮤직비디오 하나뿐이었다. 노래는 배경음악일 뿐, 마치 화보영상을 찍은 것 같았다. 빛 아래, 어둠 위로, 피 웅덩이 속에서 오른쪽왼쪽위아래 가리지 않고 미모를 찍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없이 오로지 혼자만 나오는 게 자유를 주제로 한 화보 영상이 분명했다.

본인이 부른 건지, 그저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건지, 이름은 뭔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성별은 뭔지, 솔로인지 그룹인지, 아니 가수는 맞는지, 이 뮤직비디오만 찍고 사라지는지, 제일 놀라운 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 인터넷에 한 번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지! 산속에 살아도 TV에 나오는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람이 일반인이라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사는 걸까? 댓글에는 수많은 사람이 앓는 소리를 남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들여다보았다. 133초 부분에서 턱선이 얼마나 섹시한지, 25초 부분에서 흐르는 눈물을 얼마나 닦아주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동영상은 어딘가 갇혀 있는 듯한 주인공이 탈출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피 웅덩이 속에서 발버둥을 치고, 하얀 벽에 빨간 페인트볼을 마구잡이로 던지고, 온몸을 시뻘겋게 물들이다 망치를 들어 벽을 때려 부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이 모든 사람을 홀리는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저 가만히 고뇌하고 있는 장면에도, 빛이 들어오는 창문 아래 서서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있는 장면에도 감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은유와 함의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공이 그저 카메라를 지그시 응시하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고 이 세상에 주인공과 자신 둘만 남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주인공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희미하게 웃으면, 그 미소를 정면에서 온전히 보고 싶다가도, 정면으로 보면 너무 설레어 심장이 터질까 봐 고개를 돌린 게 분명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한가득 담긴 주인공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담긴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많은 사람이 노래는 뒷전이고 주인공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또 돌려봤다. 그저 바라만 봐도 온갖 고통과 시름과 통증을 잊는 것만 같았다.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생겨서,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화가 나도 가라앉게 하고 기쁜 일에 더 환하게 웃게 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잘생긴 건 맞는데 코가 너무 크다, 눈꼬리가 너무 내려가서 개 같다, 입술이 너무 빨간데 화장이 너무 진한 거 아니냐, 어깨가 너무 좁다, 키도 작다, 거기도 분명 작을 것이다, 툭 치면 부러지게 생겼다, 내가 이긴다……. 다양한 품평의 말이 나왔다. 물론 그들 또한 크나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거울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초의 반응이라고 박제되어 인터넷을 떠돌며 주제파악도 못한다고 온갖 비웃음을 사도, 비하의 말이 계속 나왔다. 팬들은 PDF를 따도, 어디에 보내야 하는지 몰라 팬카페 게시판에 차곡차곡 쌓아둘 수밖에 없었다.

뮤직비디오 댓글창에는 한글을 비롯해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있었다. 이 사람 누구냐, 이름이 뭐냐, English plz:), oppa, 얼른 데뷔해주세요, 공식 팬클럽 만들어주세요, 가수인가요 배우인가요, 사랑해요, 결혼하자, 잘생기면 다 오빠, 남자 맞아? 너무 곱상하게 생기고 어깨도 좁고 목젖도 없는 것 같은데……, 거울이나 보고 말해라,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요? 어이없네. 네가 뭔데? 하는 싸움까지 벌어졌다.

<자유>라는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은 순식간에 대스타가 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오르내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이 행복해졌다. 특히 신기하게도 배란통, 생리통을 앓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 많이 완화되었다.

그거 봤어? 진짜 잘생겼어…….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더라. 너무 행복해서 눈물 나는 거 있지.”

너도냐? 나도다. 둘째 날인데다가 진통제도 안 들어서 속으로 시발시발 욕만 했는데, 그 얼굴 보니까 통증이 안 느껴지더라. 국보급 미모다. 이건 나라에서 지켜줘야 해.”

너 생리통 엄청 심하지 않아? 그게 안 느껴질 정도라고?”

안 아픈 건 아닌데, 정말 정신이 홀리니까 참을 만하더라고. 그래서 나 바로 컴퓨터랑 핸드폰 배경화면 바꾸고 아플 때마다 들여다봤다. 강력추천한다. 가수면 내가 CD 몇 백장을 사서라도 팬사인회 갈 거고, 배우면, 배우면영화 찍으면 좋겠다. 시사회에 가게. 제발, 제발!”

미쳤네 미쳤어. 같이 미치자! 제발, 활동 많이 해주세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활동이 아니기를, 제발!”

이런 건 널리 알려야 해. 간증글 쓸 거야!”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리던 한 사람은 얼굴에 홀려 통증 완화 효과를 몸으로 체감하고 인터넷에 올렸다. 댓글로 너도냐 나도다, 얼굴이 약이다, 이 사람을 국보로 지정해달라는 주접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반응이 너무 뜨거운 나머지 카폐에서 저 카페로, 인기게시글로, 트위터로, 페이스북으로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생리통에 효과가 엄청 좋다, 얼굴이 진통제라는 반응과 여자들이 얼굴만 보고 헛소리한다, 과학적으로 저게 말이 되냐 그러면 진통제는 왜 있냐는 남자들의 빈정거림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알콩달콩 예쁘게 사귀던 커플마저 헤어질 정도였다.

자기는 애인이 앞에 있는데 자꾸 핸드폰만 들여다볼 거예요? 도대체 핸드폰으로 뭘 보길래……. , 이놈 얼굴 말고 나를 봐야죠.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 이런 놈이 뭐가 잘생겼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생리 시작했다고 나중에 보자 했는데 자기가 나오라면서요. 아프고 힘들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중이니까 잠깐이라도 그냥 두세요.”

그게 약이에요? 아프면 진통제를 먹어요. 혹시 자기도 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리를 믿는 거 아니죠?”

언제는 진통제 먹으면 내성 생긴다고 먹지 말라면서요? 난 정말로 안정을 찾고 있어요. 자기가 갑자기 식당 예약했다는 말 안 했으면 집에서 쉬고 있었을 거예요.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스케줄을 짜는 거예요? 너무하지 않아요? 왜 내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해요?”

자기가 지나가듯 그 레스토랑 맛있겠다고 해서 내가 겨우겨우 예약한 거예요. 왜 내 마음은 알아주지 않아요? 이상한 소문 믿지 말고 차라리 약을 먹어요. 약 없으면 내가 가서 사올게요. 초콜렛도 같이 사오면 되죠?”

됐어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집에 갈게요. 정말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예약 다 했다니까요. 자기가 화났으니까 내가 자기 화 풀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조금만 참았다가 호텔 가서 쉬면 안 돼요?”

누가 예약하라고 했어? 네 생각만 하면 다야? 내가 컨디션 안 좋다고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지? 그런데 네가 보고 싶으니까 잠깐만 보면 안 되냐고 그래서 우리집 근처에서 잠깐 보자고 했지. 그랬더니 또 네가 여기까지 오면 안 되냐고 그래서 내가 컨디션 바닥인데 여기까지 왔잖아. 그랬더니 뭐?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나 좀 쉬자, ?”

, 왜 반말해요? 우리 말 예쁘게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아파서 그런 거죠? 얼른 가서 약 사올게요.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예요.”

지금 이 상황에서 예쁘게 말이 나오겠냐? 내 화를 풀어준다면서 내 생각은 안 해?”

, 약 얼른 사올게요. 진정해요. 다 그, 그날이라 그런 거죠? 괜찮아요. 다 이해해요.”

생리도 안 하는 새끼가 입 털지 말라고 시발!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좆같이 아프니까 집에 간다고!”

남자가 욕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여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식칼에서 도끼로 변해 장기를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얼른 눕고 싶었다. 전기장판 온도를 한껏 올리고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몸을 웅크린 채 울고 싶었다. 약을 한 번에 두 개 털어놓고 약기운이 돌기만은 간절히 바라고 싶었다. ,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무한재생해 두면, 그 얼굴을 보면 괜찮아진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듣기만 해도 어떤 부분인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재생이 된다. 통증이 사라지면 노트북 화면 가득 얼굴이 나오게 해두고 책을 보고, 배가 아파질 것 같으면 얼굴을 보면 된다. 지난 생리를 이렇게 버텼으니 이미 검증된 방법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욱해서 짜증을 냈지만 이러고 싶지 않았다. 예쁘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고 싶었다. 생리 때문에 감정적이 되어 짜증 내고 신경질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면 어떡해요? 돈 다 냈단 말이에요.”

그러나 괜찮냐고, 그렇게 힘들었냐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돈을 생각하는 남자의 말에 진절머리가 났다.

문자로 계좌번호랑 금액 보내요. 됐죠? 그리고 우리 헤어져요.”

? 자기야, 그러지 말고, 자기야, 진심이에요? 가지 마요, 우리 대화해요. 자기야!”

여자는 도끼로 쑤시고 헤집는 것 같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이어폰을 끼고 <자유>를 재생한 채 엉거주춤 걸었다. 애타게 부르든 말든, 동영상에 집중했다. 밑이 빠질 것 같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허리를 펴고 싶었지만 도저히 펴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고 티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체가 살짝 앞으로 쏠려 있었다. 그러나 동영상이 재생될수록, 대스타의 얼굴을 눈에 담을 수록 고통이 점점 완화되는 것 같았다. 기운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세도 아까보다 바르게 되었고 아랫배도 약간 불편한 정도였으며 무엇보다 걷는 게 괜찮았다. 앞으로 자신만 생각하고 돈만 생각하는 애인을 볼 일이 없다고 하니까 더 괜찮은 건지도 모른다.

여자는 허리를 곧게 편 채 편안하고 아늑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영상의 조회수는 계속해서 치솟았다. 한 사람의 생리가 끝나도 다른 사람이 생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리 중이 아니어도 그저 얼굴을 보고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되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집에서 각종 증상으로 일생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이들이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동영상 속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또 다른 동영상이 나오지 않을까 새로고침을 반복하고 한숨을 쉬는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새로운 동영상 떴다!”

? 어디 봐!”

새로운 동영상 제목은 <안녕하세요>였다. 노래 제목인 건지, 정말 인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공간 속에 가만히 웃고 있는 썸네일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어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옆에서 먼저 정신 차린 친구가 재생하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쳐다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딘지 모르는 숲속을 배경으로 흰 티와 청바지만 입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정면으로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희고 고운 손을 들어 흔들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자유>를 부른 자유입니다. 제 노래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 몰랐어요. 정말 놀랐습니다.”

꺄아! 사랑해요!”

근데 여자야 남자야?”

여자 아니야? 선이 고운데?”

남자 같은데? 잘생겼잖아.”

조용히 해, 자유님 말씀이 안 들리잖아!”

많은 분이 저를 직접 보는 걸 원하셔서, 가볍게 만날 수 있도록 장소와 시간을 정해봤어요. 이렇게 갑자기 약속을 잡아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서너 분이라도 좋으니까 만나서 얼굴 보고 웃으면서 대화했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팬미팅한다고? 나 꼭 간다. 평일이면 학교 빠져서라도 간다. 실물 영접할 거야!”

학교,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조퇴나 휴가 등의 방법을 생각하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은 날짜를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비행기편을 알아보았다. 정말로 현실세계에 있는 사람인지, 완벽한 그래픽으로 만든 영상 속 사람은 아닌지 궁금했었는데,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영상만 봐도 아픔이 덜하거나 사라졌는데 실제로 보면 어떤 충격에 휩싸일지 기대도 되었다.

곧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수험생분들 힘내시고요.”

해맑게 웃으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 스트레스가 풀리고 입가에 웃음이 따라 걸렸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학생들의 긴장감이 녹아내리고 머리가 맑아지며 집중도가 올랐다. 동영상을 다시 재생하면서 자유라고 이름을 밝힌 인물을 핥듯이 바라보고 머릿속에 저장했다. 팬미팅은 수능 이후였다. 자유 언니 혹은 자유 언니가 힘내라고 하니까 힘이 저절로 났다. 우리를 위해서 수능 이후로 날을 잡은 게 분명해. 팬미팅 가서 자유님 덕분에 수능을 잘 봤어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생리통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창백하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리던 아이도 피부가 보송보송해지고 얼굴에 혈색까지 돌아 생기있게 보였다.

오늘부터 열공한다.”

나도. 수능 잘 보고 자유 오빠 보러 간다.”

자유 언니 사랑해요.”

생리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는 소용이 없으니, 여자 수험생만 공부에 대한 집중도와 열정이 치솟아 학부모들의 걱정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법적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동영상에 여자에게만 좋은 어떠한 파장을 담고 있는 건 아니냐 등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그 어떠한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동영상을 보지 말라고 제재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남학생들이 학교 가고 학원 가고 자습하고 과외를 해도, 자유의 <자유>를 본 후에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남학생이 더 잘한다는 수학, 과학계열에서도 여학생이 9월 모의고사 1등을 차지했다. 다른 과목은 두말할 것 없었다.

그놈의 자유인지 뭔지 울부짖는 딸을 보며 좋은 대학에 붙고 나서 자유를 찾아! 라고 했던 부모들은 자유가 주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며 수능만 잘 보면 타지역에서 하는 팬미팅을 위해 숙소까지 지원해준다고 약속했다.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도 다 화이팅입니다! 우리 모두 지지 말아요.”

지지 말자고 말하는 얼굴은 단단했다. 다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확 타올랐다. 그동안 있었던 억울한 일, 부당한 일, 서글픈 일, 대항하지 못한 일이 떠올랐다. 나약하고 작아졌던 자기 자신을 보듬고 응원할 힘이 생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동영상을 보면 생리통이 사라지고 들쭉날쭉한 기분이 가라앉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안 져. 김 대리 개새끼 내가 한 걸 자기가 한 것처럼 말하다니 가만 안 둘 거야.”

남자들이 근무시간에 담배를 피우려 몰려다니고 퇴근 후 술자리를 따라가고 2차를 따라가며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인맥을 끈끈하게 다져도, 근무시간에 하는 회의에서 조리 있게 말하는 여자 사원의 기세에 눌려 입술만 벙긋거렸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자리에 따라나서지 않은 채 악착같이 준비한 회의였다. 절대 내 것을 뺏기지 않을 거야.

자유의 동영상을 보다가 어제 밤늦게 상사가 보낸 의미심장한 문자를 떠올린 여자도 결심했다.

이상한 연락 그만 보내라고 말할 거야.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괜히 피곤한 여자 사원을 응원한다며 어깨나 목을 주물럭거리던 남자 과장에게 이런 행동은 불쾌하니까 앞으로 하지 말아 달라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 과장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분한 건지 얼굴이 벌게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사람을 매도할 수 있냐, 꽃뱀이냐 갖은 욕을 해도 여자는 눈물을 흘릴지언정 어깨를 펴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 채 당당하게 있었다. 부들거리는 손안에는 자유의 동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결국 과장은 난동을 부리다가 용기를 낸 피해자가 한 명이 아닌 까닭에 감사위원회에 소집되었다.

무언가가 조금씩 혹은 갑자기 바뀌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자유가 있었다.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유가 어떠한 세력의 중심이 될까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가 무언가를 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뤄주려고 할 테고, 학교, 회사, 나아가 나라까지 전복되길 원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나라의 반은 여자였으니까.

이 사태를 보고 다양한 사람들이 입을 열거나 작당 모의를 했다.

불확실한 것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얼굴을 보고 노래를 듣기만 해도 생리통이 완화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저 마음에 드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좋은 노래를 들으니 몸과 마음이 릴렉스 되면서 통증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자 보라, 주께서 원죄를 내린 여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메시아를 내려보내셨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겁니다. 어머니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자유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 초콜렛을 먹으면 완화가 아니라 생리통이 아예 사라져요. 좋은 노래와 달콤한 초콜렛의 조화는 완벽하죠. 여자의 소중한 그날을 위해, 마음을 담아 만들었습니다.”

자유가 도대체 누구인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나? ? 예전에 사라진 그 과학자의 흔적과 비슷하다고? 그 과학자는 약을 만들려고 했고 자유는 사람인데 무슨 소리야! 제대로 다시 조사해 와!”

자유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계속 컨택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우선 자유만 있으면 돼.”

 

팬미팅 당일. 전날, 전전날, 혹은 일주일 전부터 그 지역 숙소를 잡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유를 보기 위해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정확히는 팬미팅도 아니었다. 그저 모월 모일 모시에 공원을 산책할 예정인데 시간이 맞는 분들을 만나서 같이 걷자는 식이었다. 자유는 자신을 보기 위해 사람이 얼마만큼 모일지 몰랐던 게 분명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고 너무 놀라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도 그걸 걱정했다. 혹은 안전문제 때문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들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초조하게 자유를 기다렸다. 시에서도 공원을 중심으로 경찰과 구급대원을 자발적으로 지원했으며 넓은 공원 곳곳에 사람을 배치해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유 아니야?”

자유다!”

저기, 저쪽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갔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밟히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어 안전요원이 필사적으로 천천히 조심히 안전사고에 유의해달라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땅이 울렸다. 한 명이 넘어지면 줄줄이 넘어져서 대참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발을 제어하지 못하고 떠밀려서 자유를 향해 달려갔다.

모두 멈춰주세요.”

이상한 일이었다. 후광이 비추는 것 같아 누가 봐도 자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은 공원 초입에 서 있었는데, 그가 말하는 게 소란스러운 공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렸다. 마치 소리가 아니라 뇌에 바로 전달되는 듯한 느낌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유를, 정확히는 자유가 분명한 형상을 보자 빠르게 진정되었다. 둥둥 울리던 발걸음도 천천히 느려지더니 멈췄다. 어떠한 소음도 없었다. 그 누구 하나 달려들지 않았고 그 누구 하나 소리를 내어 부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한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시선들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자유는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살랑거리고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가고자 하는 방향만 바라보았다. 시선을 앞으로 유지한 채 발걸음을 옮기면 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열어줬다. 자유가 나아갈 방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자유가 채웠다. 발이 꼬이지도 않았고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하는 말소리도 없었다. 호수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파동이 생기듯, 당연하게 자유를 중심으로 동그란 공간이 생겼다. 기이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으나 자유의 얼굴로 인해 성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었다.

공원 중심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자유가 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동영상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가 아니라 커다란 화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람들은 열기 어린 눈동자로 자유만 바라보았다.

다들 안녕하세요. 이렇게 많은 분이 오시는 줄 몰랐어요. 그렇지만 우리 다들 안전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이왕 이렇게 오셨으니까 한 분 한 분 악수하고 포옹하기로 해요. 줄을 서서 차례대로 기다려주세요.”

자유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홀린듯이 천천히 줄을 섰다. 일직선으로 줄을 만들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복잡해 자유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렸다. 그러면 자유의 뒷모습부터 앞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 , 안녕, 하세요! ! 이름은 이지수입니다! 자유님 동영상 보고 공부했더니 수능 대박났어요! 사랑해요!”

생리통과 배란통 때문에 한 달에 3주는 책상 위에 엎드려있던 이지수는 자유의 동영상을 본 뒤부터 엎드려있던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니, 수능 당일이 생리 둘째 날인데도 아무런 통증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원하던 대학, 원하는 과에 원서를 넣고도 남을 정도라 담임은 상향해서 넣으라고 했지만, 꿈이 있었기에 소신대로 넣고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지수님 정말 축하해요! 앞으로도 잘 되기를 바랄게요.”

자유가 손을 내밀었다.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었다. 이지수는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유의 손끝을 잡았다. 자유가 하하 웃더니 손 전체를 잡고 살짝 위아래로 흔들더니 살짝 잡아당겨 이지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모든 고통과 시름이 천천히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원하는 장소에 자유롭게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샘솟는 것 같았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이지수는 볼을 붉힌 채 애써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들어 자유를 따라 해맑게 웃었다.

그건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생리 때문에, 아니 전애인의 본인만 아는 생각과 행동 때문에 헤어진 이후, 오 일 뒤에 연락이 왔었다. 그때는 네가 그날이라 예민했던 거 알아. 이제 얼추 끝났을 테니까 우리 대화로 풀어보자. 그 문자를 보자마자 다시 열이 올라 한바탕하고 싶었지만 바로 차단을 하고 자유의 동영상을 감상했다. 다음날에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대화는 잘 했냐는 연락도 왔었다. 전애인, 아니 개 같은 놈이 무슨 말을 해서 헤어졌는지 이유를 밝히자 분개하면서 잘 헤어졌다고 이기적인 놈이라고 같이 욕도 했다. 존댓말만 하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거냐고. 때때로 눈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대체로 이제 날아오를 거야, 어디든 갈 수 있어, 라며 자유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그 노래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공원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생리가 터졌지만, 노래를 듣고 동영상을 보면서 오니 몸상태는 괜찮았다. 생리 때문에 떠오른 전애인도 빠르게 지워졌다. 시간마다 생리대를 가는 일만 아니면 생리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다 자유 덕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안녕하세요. 장세아입니다. 정말 너무 팬이에요. 자유님 동영상 보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그러면 하루종일 힘이 나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서 실수도 줄어들고 칭찬도 받아요. 다 자유님 덕분이에요!”

하하, 제가 뭘요. 악수할까요?”

!”

장세아는 자유의 손을 두 손으로 덥썩 잡고 신나게 흔들었다. 자유의 품에 안기자 기분이 더욱 더 좋아져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도 잘 될 것만 같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지고, 다시는 올라갈 수 없을 거라 울다 못해 땅을 파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았다. 매일매일이 괜찮을 것 같았다. 행복할 거라고, 원치 않는 휘둘림은 없을 거라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지수, 장세아를 비롯해 박수연, 김세희, 장아람, 박보람, 마리아, 이지연, 레이첼, 강소희……. 많은 사람이 본인의 이름을 밝히고 자유에게서 이름을 불리고 악수를 했다. 자유는 그 사람들 이름 하나하나 정갈하고 반듯하게 두 눈을 마주 보며 불렀다. 이름을 불리는 이지수 장세아 박수연 김세희 장아람 박보람 마리아 이지연 레이첼 강소희 등은 기뻐하거나 행복해하거나 이유 모를 해방감에 눈물을 애써 참거나 결국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적지 않은 수의 남자도 애인을 따라, 가족을 따라 왔다. 따라온 남자 대부분은 원치 않았는데 억지로 따라왔다는 티를 냈다. 무례할 정도라 일행이 눈치를 줘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남자에게도 자유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악수를 청했다. 떨떠름해 하거나 거부하는 남자의 손을 언제 잡았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잡고 손을 뗐다. 좋지 않은 것은 만지는 듯한 태도에 욱해 욕을 하려다가도 주위에 사람이 많아 눈만 부라리는 남자1, 남자2, 남자3 등은 빠르게 사라졌다. 간혹 있는 예의 바르고 일행을 잘 챙기는, 김민우, 조현우, 미카엘, 장연석 등의 이름을 묻고 가볍게 위아래로 흔드는 악수를 했다. 누가 봐도 차별적인 행동이었지만 남자1, 2, 3 등을 빼고는 상관없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인터넷에 욕이 올라오는 족족 싸우거나 신고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간은 가고 인파는 줄어들지 않았다. 해가 머리 위에 있을 때 시작해서 해가 지고나서야 사람들이 말려 악수회가 종료되었다.

더 많은 분과 인사하고 싶은데 미안해요. 지나가면서 하이파이브라도 할까요?”

좋아요!”

해주세요!”

원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안쪽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좋아요 원해요 소리에 덩달아 목청껏 소리쳤다. 사람들은 자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짧고 얇은 손가락,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 근사하게 익은 빵 같은 손가락, 우유에 담갔다 뺀 것 같은 손가락, 쪼글쪼글한 손가락, 어린 단풍잎 같은 손가락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한들거렸다. 추위에 손가락 끝이 빨갛게 되었어도 손을 거둬들이거나 장갑을 끼는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들도 일행의 성화에 못 이겨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자유는 바람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두드리고 살짝 잡았다 떼고 꽃잎을 어루만지듯 보드랍게 스쳤다. 애정이 어린 손길에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며 콩닥거리는 가슴 위로 자유와 닿은 손을 올렸다.

서로 밀치거나 잡아당기지 않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감탄하는 소리가 파동처럼 안에서 밖으로 점점 번져나갔다. 이윽고 모든 사람과 손이 닿은 자유가 맨 마지막에 서 있던 꼬마 아이, 김지유를 부모와 아이의 허락을 받고 껴안았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지우 6살입니다!”

지우. 제 소중한 사람과 똑같은 이름이네요. 지우 어린이는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내가 김대한을 때리고 싶다고 해도요?”

김대한? 왜 때리고 싶은데요?”

자꾸만 나를 괴롭혀요. 머리를 잡아당기고 뒤에서 밀어요! 너무 싫은데 선생님은 김대한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래요.”

그렇군요.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되는데. 지우 어린이가 아는 걸 선생님이나 김대한은 왜 모를까요? 지우의 미래에 아프고 힘든 일은 이제 다 사라질 거예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길 바랄게요.”

빨갛게 얼어붙은 작은 코끝에 다정하고 기이할 정도로 따뜻한 코끝이 맞닿았다. 김지우는 자유와 닿자마자 마음속 가득 용기가 샘솟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놀리는 나쁜 김대한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은 김대한이 자신을 좋아해서, 제대로 표현을 못해서 심술 부리는 거라고 하지만 김지우는 알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다. 노래도, 동영상도 좋았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좋았다. 예쁘고 잘생긴 것도 좋았지만, 눈을 마주 보고 따뜻하게 말해준다는 게 제일 좋았다. 엄마도 자신에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만 했는데언니? 오빠? 뭐지?

근데 언니에요 오빠에요?”

난 그저 자유일 뿐이에요.”

자유는 김지우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랄게요. 돌아가서 다른 분들과도 반갑게 악수하고 포옹해주세요. 행복은 전염된다고 하잖아요. 그럼 안녕!”

자유는 동영상에서 인사를 했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양손을 흔들었다. 너무 맑고 깨끗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미소에 눈이 멀 것만 같아 모든 사람이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환한 빛이 폭죽처럼 터져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불꽃놀이를 봐도 이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라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초? 몇 십초? 몇 분? 어떤 사람은 1초도 안 됐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10분은 지난 것 같다고 느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유는 없었다.

? 방금까지 앞에 있었는데?”

찾아! 인터뷰 따야 해!”

너무 행복했어. 돌아가서 엄마아빠 꼭 안아줘야지.”

팬서비스가 엉망이네.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난리인 건지.”

사람들이 아무리 찾아도 자유는 보이지 않았다. 기자나 연예계 관계자들, 시에서 나온 사람들 등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뛰어다녔으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이면 100m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필요에 의해 찾는 사람들을 제외한 남은 사람들은 침묵 속에 서 있다가, 일제히 꿈에서 깬 것처럼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고요한 소란스러움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운에 취해 같이 온 일행과 괜히 포옹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에게 전화해 맛있는 걸 먹자며 행복하게 웃었다.

긴 기다림 끝에 맛본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고 넘칠 만큼 행복했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게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 끝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었을 때, 장세아는 문득 자신이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란통도 없고 생리전증후군도 없었다. 혹시 임신인가? 뒷통수를 때리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 퇴근할 때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버스를 타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에 가 약국 세 군데에 들어가 임신테스트기를 각각 샀다. 임신테스트기를 달라고 하는 게 죄지은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다행히 군말 없이 내어준 덕분에 장세아는 열 시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행히 임신은 아니었다. 안도의 눈물을 닦고 임신테스트기를 휴지에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면 왜 생리를 하지 않는 거지? 몸에 이상이 있는 건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장세아는 큰맘 먹고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냥, 건강검진이잖아. 위내시경 하는 것처럼 자궁을 검사하는 것뿐이야.

예비 대학생인 이지수도 생리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별 생각이 없었다. 생리를 안 하니까 너무 편할 뿐이었다. 생리통이 없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는데 아예 하지 않는 건 더 좋았다. 앞으로도 생리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로 엄마 나 생리를 한 3개월 안 한 것 같아, 라고 하자 엄마는 크게 걱정하며 바로 산부인과 예약을 잡았다.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무섭고 겁이 났지만 엄마가 그냥 감기 걸리면 병원 가는 것과 똑같다고 말해줘서 마음이 놓였다. 엄마랑 병원 갔다 오는 길에 떡볶이 먹자고 해야지.

생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처음에는 본인만 마음을 끙끙 앓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친구에게 털어놓고, 친구도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하고 의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지? 임신인가? 스트레스인가? 플라스틱 통에 든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 불안과 공포로 산부인과의 문턱이 닳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고 또 모였다.

그러나 그들 중 이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혹 자궁에서 혹을 발견해 떼어내는 수술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기에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정부는 비상이었다. 기껏 가임기지도를 만들었는데 생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뭔지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지 않았다. 인구가 멸망하는 것인가? 그런 절망감이 스물스물 깔리고 있을 때였다.

어떤 남자는 게임을 하다가 게임 캐릭터가 죽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친구들이 미쳤냐고 경악을 했으나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내 캐릭터가 죽은 거지? 난 혜지도 아닌데? 자신의 못남이 경멸스러웠다. 죽고만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일주일 내내 방에 처박혀서 게임 상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괜찮아져서 지랄염병 별별 욕을 다 섞어가며 다시 게임을 했다. 갑자기 눈물을 보여서 그런지 더 더럽고 강한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축 처져서 상대방이 부모 욕을 하면 부모님께 죄송해서 눈물을 글썽이고, 게임 엿같이 한다고 욕을 먹으면 자괴감이 들어서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다시 방에 처박혀 이 감정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남자는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레모네이드, 매운 떡볶이, 매운 닭발, 깔라만시 원액까지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주변 사람이 아내가 임신했냐며,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대리입덧 하는 게 아니냐고 낄낄거렸다.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임신은 아니었다. 부부는 결혼하기 전부터 서로만을 아끼고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아내가 루프를 삽입했다. 하혈이나 어지럼증, 체중 증가 등의 부작용이 있었기는 하지만 임신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참고 견뎌냈다. 그랬는데 임신이라니? 낮은 확률을 뚫고 임신을 한 건가? 그럼 섹스는 못 하나? 하지만 섹스를 하고 싶어도 움직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서 뭘 할 수가 없었다. 보약이라도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푸념에 아내의 얼굴이 굳어져 한숨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가장이 열심히 돈을 보는데 먼저 보약 먹자고 하지는 못해도 정색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작년에도 보약 지었다가 술 마시느라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몸이 좋지 않은 거니까 잘 먹을 수 있었다. 오늘 아내가 야근이라고 했나? 퇴근해서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도 해야 하는데 몸이 이러니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한숨을 쉬고 레모네이드를 사기 위해 지갑을 챙겼다.

어떤 남자는 일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쓰러졌다.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맹장이 터진 것도 아니고 위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랫부분이었다. 작년 건강검진 내역을 살펴봐도 대장도 깨끗했다. 그러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빨리 치료하라고 난리를 쳤다. 각종 검사를 해도 술담배 줄이시고요, 일주일에 세 번은 운동하셔야 해요, 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남자의 아내도 검사 결과를 확인했으나 이상이 없어서 퇴원을 시켰다. 집에 와서 남자는 네가 나를 죽이려고 그러는 거냐고 물건을 집어 던지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또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여자는 옷 아래 피멍이 든 팔을 쓰다듬으며 잘 죽었다고 울면서 웃고 말았다.

어차피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은 많으니까, 뉴스에 나오지도 않았다. 뉴스에 나오지도 못하는 죽음이 점점 증가하자 사람들은 이상을 느꼈다. 도대체 왜 죽는 것인가. 날씨가 추워져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그런데 왜 남자들만 심장마비, 복통, 우울증, 어지럼증, 구토, 요통 등을 느끼다 죽는 것인가. 전염병이라고 하기에는 어떻게 남자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발생하였으나, 단연 한국이 사망자 수 1위였다. 사망하지 않더라도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달려가거나 방안에서 나오지 않는 남자들이 많았다.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회사나 공장 등에 갑작스러운 결원이 생겨 여성들을 대규모 채용해야 나라가 굴러갈 정도였다.

어느 날 남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고용된 여성 연구원, 박이연이 말했다.

그거, 생리통 아니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생리도 안 하는데 어떻게 생리통이 옵니까?”

그렇지만 증상들이 그런걸요.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들도 있는데 생리 안 하고 생리통 느끼는 남자가 있을 수도 있죠!”

경쾌하고 발랄하기까지 한 어조에 선임 연구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생리하는 게 억울해서 저런 개소리를 하는 건가? 가뜩이나 여자가 생리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들들 볶고, 수많은 사람이 왜 유사한 증상을 가지고 고통을 호소하는지 알아보라고 난리 치고 있는데 헛소리나 하다니. 이래서 아무리 급해도 여자를 연구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과자가 먹고 싶었다. 혹은 달콤한 것, 혹은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매콤한 양념치킨, 치즈를 듬뿍 올린 나초, 식도를 얼릴 것처럼 차가운 맥주…….

박이연은 구체적인 메뉴를 입 밖으로 중얼거리는 남자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렇게 일상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인 걸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허기짐을 아주 심하게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박이연도 생리를 할 때는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초콜렛, 쿠키 같은 걸 늘 가까이에 두기는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생리통보다 불알 까이는 게 더 고통스럽다는 주장을 보며 코웃음을 쳤는데, 더 아프고 덜 아픈 차이가 아니라 그냥 남자들이 나약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계시를 받은 것처럼 어떤 과학자가 생리통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앞으로는 생리 자체를 그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선언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유의 동영상을 보며 통증이 감소하고, 사라지고, 그러다가 자유를 만나고부터 생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유가 그 과학자인 걸까? 그렇지만 손을 잡고 포옹하기만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팬미팅 자리에 있었던 박이연은 마지막에 자유가 한 말을 떠올렸다. 분명히 행복은 전염된다고 했었다. 그날 피부접촉을 통해 무언가를 주입했고 그로 인해 생리가 멈추고, 남자들은 생리와 관련된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걸까?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박이연처럼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난 일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상사가, 동료가, 후배가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침묵했다. 처음에는 안타깝고 안쓰러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예민해, 그날이야? 생리는 금요일에만 터져? 주말 껴서 어디 놀러 가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이래서 여자들이란. 생리 그거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사회생활에 집중해야죠. 그렇게 비웃고 무시하고 아는 척하는 이들이 자신보다 못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며 애써 웃으며 넘겨야만 했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남자들이 그토록 비웃던 생리, 생리통 때문에 하나둘씩 토해놓고 있었다.

나라가 난리 통이었다. 남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진통제를 지급해도 소용없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을 방문하면 고통 때문에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는 것도 수두룩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혼자 사는 남자의 지도를 만들고 순찰대를 구성해 순찰을 돌게 했다. 물론 순찰을 돌다가도 나자빠지는 남자가 있어 제대로 순찰이 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정부는 남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아예 특별히 편성된 추척 다큐멘터리 <사라진 과학자를 기억하십니까?>가 황금시간대인 주말 저녁에 방송되고 있었다. 이 일이 처음 발생한 시기를 추측하는 것부터 유튜브에 혜성처럼 등장한 자유에 관한 이야기, 추적, 시민, 의사, 과학자, 관련 공무원 등의 인터뷰 등 다양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남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이클이 있습니까? 우선 그걸 파악하면 생활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남자들의 설 자리가 없습니다. 유급휴가나 무급휴가를 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으니 가장의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원인은 모르더라도 증상은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경제가 무너질 겁니다.”

남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국회의원, 시민의 인터뷰와

회사에 나오지 못한 남자들이 많아 새로 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원자의 비율을 보니 성비가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아마 여자를 주로 뽑지 않을까요? 남자도 성적이 좋으면 뽑겠지만, 언제 아프다고 안 나올지 모르니……. 그것에 따른 패널티는 어쩔 수 없죠. 회사도 돌아가야 하니까요.”

익명에 음성변조까지 한 회사의 인사담당자와의 인터뷰와

여기, 자유의 노래를 듣고 있는 여자의 뇌파입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뇌파의 파동이 이러한 형태를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남자의 뇌파 또한 이러한 파동을 유지합니다. 이쪽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남자의 뇌파입니다. 노래를 들어도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자유의 노래에서 어떠한 파장을 쏘아 보내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분하는지는 더 연구해봐야 합니다.”

인구증가위원회의 활동위원장이라고 소개한 과학자의 자료들

역학조사를 한 끝에 자유와의 팬미팅을 한 이후에 여성들의 생리가 멈췄으며 남성들의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자유가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혹은 대화를 통해 비말 분사를 통해 어떠한 특정 바이러스가 분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체접촉을 하지 않으면 무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증상이 없는 남성들은 손을 수시로 닦으며 하루에 한 번 꼭 샤워를 하길 바랍니다. 정부에서는 백신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한국질병본부 대변인의 발언도 나왔다. 방송이 끝날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결론은 원인이 무엇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 호스트는 모든 영상을 본 다음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예전에 사라진 과학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과학자가 자신있게 말하던 것과 자유가 나타난 뒤에 벌어진 일들이 유사합니다. 어쩌면 자유의 뒤에 그 과학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과학자의 말을 헛소리라고 취급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연구를 통해 그런 성과를 얻었는지 배우고 연구했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생화학테러를 멈춰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백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이후에 정부에서는 그 어떠한 죄로 묻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지식과 행동력을 높이 사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약을 개발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합니다.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꼬박꼬박 잘 씻는 남자도 있었지만, 매우 적은 수였다. 손을 깨끗이 닦고 볼일을 보고 화장실을 나가면, 그게 손을 잘 씻은 것인가? 남자가 고통에 허덕여 제대로 일하지 못하니 점점 여성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진통제를 먹고 참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구두를 신고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힘겹게 학교로, 일터로 나갔었는데, 그걸 못 견디고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결석하고 결근하고 휴학하고 자퇴하고 사표내고 있었다. 통쾌하다 못해 우스웠다.

 

특히 장세아는 전 남자친구가 너무 웃겼다. 헤어진 지 몇 개월이 됐는데 갑자기 꽃다발을 들고 집 앞으로 찾아오다니, 소름이 돋아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인가? 어디로 가지? 돈이 얼마 있더라? 머릿속으로 계산기가 팽팽 돌았으나 한숨만 나왔다.

세아씨, 다시, 다시 생각해주면 안 돼요?”

. 안 돼요.”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줘요. 내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그, 그날에는 만나자고 조르지 않을게요.”

이만 돌아가세요. 갑자기 찾아오지 마시고요. 또 이러면 신고할 거예요.”

신고해봤자 사랑싸움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을 듣겠지만. 숨을 깊게 내쉬고 몸을 돌려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 , 너무 아, , 살려줘, 살려주세요!”

얼굴이 창백하던 게 긴장해서가 몸이 아파서였나? 장세아는 그래도 전애인이 아파서 길거리를 뒹굴며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보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남자는 가방에서 허겁지겁 무언가를 꺼내 까더니 입안에 넣었다. 진통제는 구하기 어렵다는데 뭐지? 가까이 가보니 바닥에 흰 상자가 뒹굴고 있었다.

처음 겪는 증상에 당황하지 마세요. 당신이 남자라는 증거입니다. 이 초콜렛을 먹으며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남자만을 위한 초콜렛?”

세희는 한숨을 쉬며 전애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생리통 증상이었다. 두 사람을 알게 모르게 힐끗거리던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하나둘 모여들어 119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 골목이니까 누가 차에 태워 가는 게 더 빠르지 않냐, 총각 괜찮냐 등의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 불알이 빠질 거 같아. 너무, 너무 아파요, 엉엉…….”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모여든 사람들도 생리통 증상이라는 걸 알았다. 여자들은 밑이 빠질 것 같다고 하는데 남자라서 불알이 빠지는 거 같나 보지. , 불알 차서 아픈 거랑 빠질 거 같은 거랑 뭐가 더 아프냐? 내가 거기 차여서 아무 말도 못하는 놈은 봤는데 저렇게 떼굴떼굴 구르면서 아프다고 하는 놈은 본 적이 없어. 아저씨 진통제나 드세요. 저러다 죽으면 어떡해? 저런 걸로 죽었으면 난 벌써 죽었겠다. , 가서 자유님 노래나 봐야지.

세아씨 살려주세요, 살려줘요, , 너무, 이게, , , 나 죽어요?”

붉은 장미꽃잎이 전 남자친구 밑에서 처참하게 깔려 짓뭉개지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니 장세아 본인이 다 부끄러웠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된 채 전 남자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주 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 가득 측은지심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 잘 헤어졌어.”

장세아는 등을 토닥거리고 간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꼭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일말의 정으로 119여기 불알이 빠질 것 같다고 길바닥을 구르는 사람이 있다신고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불알, 불알이! 하며 외치는 소리가 골목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 꼭 이사를 가야겠다.

 

 

무례하고 찌질하며 폭력적이던 남자들은 한 달에 3주를 배란기, 생리전증후군, 생리통을 앓느라 집안에 박혀 있거나 죽어 없어졌다. 그러니까, 남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고, 반의반 정도는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여자들이 자유의 노래를 들으며 빈자리를 빠르게 메우다 못해 더 활발하게 활동했다.

사람들은 자유를 찾고 싶어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유와 익명의 과학자의 관계를 묻고 파헤칠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자유가 동영상을 지울까봐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자유를 찾는 것을 멈추었다. 동영상을 복사하거나 저장하면 효과가 없다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자유가 나오는 동영상을 보고, 자유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었다. 노래가 발매된 게 아니라 음원차트에 올라와 있지는 않지만, 전무후무할 인기였다.

원 히트 원더. 자유는 인간이 멸종될 때까지 영원한, 세상에 다시 없을 대스타로 남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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