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ON THE STARS I STAND ON

 

1화

문제 떠맡기기.

 

 

지금의 그녀는 백 아흔 세 번째의 그녀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알비야 브란제니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 작고 흰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자신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긴 했지만.

 

“알비아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 의식이 돌아왔으면 베드에서 일어나주세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허드슨 부인은 언제나 그녀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듣는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이 초공간도약 단말실의 관리자였다.

 

“깨워주셔서 고마워요, 허드슨 부인.”

“거기 누워있을수록 이 은하에서 내가 가장 가치있다 여기는 당신의 센타-클리피 항성 색깔 머리카락이 상할 테니까요.”

 

센타-클리피 항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수없이 많은 발광체 중에서 가장 순수한 흰색의 가시광선 파장을 내뿜는다. 알비야는 어깨를 으쓱이며 베드에서 일어났다.

 

“아쿠수파 항성계에서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나요,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

“그럼요. 그러니 무사히 돌아왔지요.”

“그럼 가서 그렇게 좋아하는 샌드위치라도 좀 먹어요.”

 

사마이라-딘 정리에 의하면 초공간도약을 이용하는 사람의 존재론적 연속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쪽의 육체를 분자 단위로 분해하며 기록하고, 데이터를 양자 얽힘을 통해 실시간으로 받는 쪽에서 다시 분자 단위로 재조립한다.

 

이 경우 정보의 전달 속도는 동시간적이며, 빛의 속도는 커녕 송수신의 딜레이 자체가 완벽하게 0이다. 물론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빛의 속도를 초과하는 인과의 전달은 있을 수 없지만, 이미 알비야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이 살고 있는 우주는 지구가 개박살난지 천 년은 지난 다음이었다.

 

허드슨 단말관리관이 사마이라-딘 정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알비야보다 더 잘 알면 더 잘 알았지.

 

“그, 있잖아요, 허드슨?”

“오, 설마. 알비야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 혹시 이곳을 거쳐갔던 수없이 많은 2급 사무관들이 나에게 했던 질문을 하려는 거에요?”

 

분해된 육신과 재조립된 육신은 기억도, 의식도, 육신도, 하다못해 부츠 끝에 묻은 먼지의 물리적 특성까지도 모두 일치한다. 하지만 분명히 그 자신은 저쪽에서 죽고, 이쪽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

 

알비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요?”

 

허드슨 단말관리관의 한숨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단말실에 퍼졌다.

 

“당신은 불연속적인데 왜 내가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연속적인지에 대한 질문이요.”

“어….”

 

너무 정곡이라서, 알비야는 할 말이 없었다. 알비야 브란제니스는 제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 질문은 왜 당신의 키가 5인치 1피트(*약 154cm)밖에 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과 똑같은 가치를 지녔어요.”

 

알비야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질문이란 뜻이에요.”

 

허드슨 부인은 언제나 머리가 좋았다. 아마 그녀가 2급 사무관이라면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일을 빠르고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비야 브란제니스는 확신했다.

 

“아마…허드슨 부인이 2급 사무관이었다면 저보다 두 배는 더 나았을거에요.”

“뭐가요. 세상이요?”

“…아마도?”

 

다시 그녀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렸다.

 

“내가 설령 당신보다 일을 두 배 아니라 스무 배 잘했다고 하더라도, 2급 사무관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알비야.”

“…나도 알아요.”

 

알비야 브란제니스는 옆의 실린더를 열고, 그 안에서 자신의 검 한 자루와 리볼버 권총 한 정을 꺼내어 찼다.

 

“그보다 당신은 왜 광선검이나 펄스 권총을 쓰지 않나요?”

 

알비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 질문은 왜 내 키가 5인치 1피트밖에 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과 똑같은 가치를 지녔어요, 허드슨 부인.”

 

단말실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스피커가 찢어질 것만 같은 웃음소리로 메워졌다.

 

“하긴, 그렇겠죠. 멋진 반격이었어요, 알비야.”

“고마워요.”

 

알비야는 제 칼과 권총을 허리에 차고 까만 망토를 여몄다.

 

"아, 그리고 아쿠수파 항성계가 아니에요. 아쿱-수브-하 항성계라고요."

 

 

-

 

 

신분 태그의 홀로그램 화면이 잘 뜨지 않아 몇 번을 더 두드려야 했다. 아쿱-수브-하 항성계의 분쟁에 개입할 때 급진주의 민족파 남성체 의원 하나가 그녀의 가슴팍을 그 네 개의 주먹 중 하나로 후려갈겼는데, 그 때 충격을 받아 맛이 간 모양이았다.

 

"재발급을 받아야 하나...."

 

물론 범우주적 영향력을 확립한 오스프레이 문명연맹의 2급 사무관을 폭행한 댓가는 그 한 쪽 팔의 일시적 소실과 그로 인해 남을 영구적인 고통의 기억이었다. 잘려나간 팔은 재생할 수 있지만 겪은 고통을 잊기는 어렵다.

 

건설규정의 통제가 덜 된 애매한 수준의 기술발전을 이룬 문명사회들과 달리, 오스프레이 문명연맹의 중심지인 캐피탈 오르도는 눈아프고 사이버펑키한 전광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비야는 그게 좋았다.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당연히, 사이버펑키한 해결사들이나 온갖 지하 범죄 집단 같은 곳도 없었다. 이곳은 딛고 설 땅이 서버용 워크스테이션의 하우징으로 되어 있고, 그 천문학적 거리의 밑에는 조그마한 블랙홀이 에너지원 취급을 받으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문명연맹의 수도였다.

 

“그게…2급 사무관 알비야 브란제니스입니다.”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무광 마감이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되어 있는 보안 안드로이드들은 ‘왜 신분 태그의 홀로그램을 제시하지 않느냐.’라는 뜻을 귀찮음과 언짢음의 표정을 담은 동어 반복으로 전달했다.

 

“저는 2급 사무관 알비야 브란제니스이고, 아쿱-수브-하 항성계의 문명연맹 편입을 위한 사무적 조율을 위한 출장 건으로 파견되었을 때의 일로 인해 신분 태그의 기능이 소실되었…아악.”

 

보안 안드로이드 R-37E의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짧고 가는 주사기가 알비야의 손등 살갗을 뚫고 피를 채취했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신분 태그는 보안과에서 재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보안과에서 신분 태그를 재발급받은 이후에는 중앙연산처리실로 가십시오. 캐시드라 제로(Cathedra 0)가 당신을 호출했었습니다.”

 

알비야 브란제니스가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 캐시드라 제로라면 문명연맹의 판단중추 역할을 도맡은 고기능 인공지능을 말했다. 인공지능인 그녀와 — 우리는 모두 상투적으로 캐시드라 제로를 ‘그녀’라고 불렀다. 애칭은 캐시였다. — 열 한 명의 문명사회 대표가 문명연맹을 이끌어왔다.

 

“캐시드라 제로가, 저를요?”

“그렇습니다, 알비야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

“남겨진 메모는 없나요?”

 

아무래도 R-37E는 알비야 브란제니스를 별로 좋지 못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남겨진 메모가 있었는데 일부러 물어볼 때까지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했다.

 

“있습니다. ⌜미아 보호⌟라고 적혀 있군요.”

“아…네….”

 

아무래도 보안과에 가야 할 모양이었다. 중앙연산처리실도.

 

 

-

 

 

“알비야!”

 

보안과의 그룰탄 그랄라그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이름에 ‘그’가 세 번이나 들어가는 그는 ‘니아그’ 종족의 일원이었는데, 생물 공학 기반의 높은 문명 수준을 쌓아올린 그 종족의 사지는 마음 먹은 대로 갈라지는 지렁이 비슷한 생김새를 갖추고 있었다.

 

“아, 그룰탄. 그…신분 태그가 박살나서요. 재발급받으러 왔어요.”

 

니아그들은 눈이 하나였고, 팔은 두 개, 다리는 여섯 개였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그 사지의 끝이 마음 먹은 대로 갈라지기에 세는 의미가 없었다.

 

“출장을 나가실 때마다 하나씩 박살내는 것 같은데요?”

“어…제가 그랬던가요?”

 

지금 그 하나뿐인 눈을 알비야에게 윙크하는 데에 쓰고 있는 그룰탄 그룰라그의 손가락은 왼쪽에 여섯 개, 오른쪽에 일곱 개였는데 방금 하나씩 더 늘었다.

 

“확실히.”

“그…그런 걸로 할게요.”

 

그는 확실히 ‘인간’ 종족의 카테고리에 포함된 지적 생명체인 알비야 브란제니스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알비야 브란제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데스크 위에 새 신분 태그를 올려둔 그룰탄 그랄라그는 다시 한 쪽…아니 하나뿐인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보다 알비야, 저녁에 시간 남아요?”

“저녁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니아그들은 머리카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부색은 대부분 검다.

 

“지금 제가 캐시드라 제로를 만나러 가는 중이긴 한데,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라면 남을 거에요.”

“밥이라도 한 끼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문명연맹의 수도 캐피탈 오르도는 조그마한 블랙홀인 ‘윈터바텀’ 위에 떠 있었고, 그 주변을 도는 행성계들은 죄다 이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수준의 도시화를 이룬 곳들이었다. 비싼 만큼 그 값을 하는 음식점은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한 시간 후 쯤에 문자할게요.”

 

그는 기쁜 눈치였다. 눈이 하나였어도 표정은 다양해서, 알비야는 그가 기뻐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보다 캐시드라 제로를 만나러 간다고요?”

“저를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따 봬요?”

 

그룰탄 그랄라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그룰탄.”

“네?”

“어디에서 볼 거에요?”

 

그의 입꼬리가 미소로 싱긋 올라갔다. 가지런한 치아는 더없이 하얬다.

 

“가장 가까운 궤도의 납트 행성에서 뵙죠. 초공간도약 단말실의 입구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공간도약을 그녀가 정말, 정말로 싫어한다는 것을 그룰탄 그랄라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

 

 

중앙연산처리실은 지하로 조금 더 내려가야 했다. 랙 마운트로 온사방에 고정된 연산용 컴퓨터의 미로 한가운데에 캐시드라 제로가 있었다.

 

“왔나요, 알비야 브란제니스 2급 사무관?”

 

그건 하다못해 그녀의 손등에 핏방울을 낸 그 보안 안드로이드보다도 더 허접하고 전근대적인 디자인으로 조형된 로봇의 상반신이었다. 캐시드라 제로의 얼굴은 도넛을 삼등분한 조각 중 하나와 같았고, 인간의 것을 본떠 디자인한 안구 대신 서보 모터를 이용해 움직이는 두 개의 카메라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를 불렀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캐시드라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팔은 반쯤 부서져선 소실된 상태였는데, 알비야는 수리를 위해 전원 스위치를 내리고 활동을 정지해야 하는 구세대 안드로이드의 특성상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캐시드라 제로는 늙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솔라 항성계에서 기묘한 현상이 관측되었어요.”

“…기묘한, 이요?”

 

캐시드라 제로가 사용하는 어휘 중에 이토록 기묘한 어휘가 또 있을까. 그녀의 음성을 송출하는 스피커 시스템에서 ‘기묘한’이라는 어휘가 나오는 것 자체가 ‘기묘한’ 일이었다. 문명연맹의 열 하나 주권문명의 자원을 있는대로 때려박아서 하나의 작은 행성만한 연산 전용의 하드웨어 시스템을 갖춘 캐시드라 제로가 ‘기묘’하다고 여길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캐시드라 제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캐피탈 오르도 전체가 당신의 연산용 하드웨어로 구성된 게 아니었나요?”

“모두 양자컴퓨터죠. 맞아요.”

 

알비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기묘한’ 현상이라뇨? 이 우주에서 당신이 계산해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그 누가 당신보다 더 현명한 답을 들려줄 수 있나요? 일단 저는 아닌 것 같은데.”

“답을 들려달라고 부른 게 아니에요. 문제를 떠맡기려고 부른 거지.”

“…네?”

W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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