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밥노을

2020.03.12 22:1303.12

규아는 그 책을 어느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사서를 제외하면 천장에 살림을 꾸린 거미들이나 가끔 곁눈질할 만큼 고루한 실용 서적 코너. 개중에서도 최신의 자격‧면허 시험 참고서 따위가 아닌 가장 낡고 뒤떨어진 분류의 것들만 유배지처럼 모여든 곳이었다. 풀컬러 한국 전도를 내세운 지도책과 함께 엎치락뒤치락 그곳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것은 빛바랜 사진과 함께 스러져 가는, 인기 없는 요리책이었다. 그런 서가에서 아무 글도 그림도 없이 그저 새까만 비닐로 싸인 책을 규아는 발견했다.

안에 있는 것은 물론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이었다.

“생각해보면, 있어야 할 곳에 잘 있던 것 같아.” 규아는 책을 발견하던 순간을 곱씹었다.

바로 옆에는 아마 그녀보다 더 나이를 먹은 요리책이 있었다. 얼굴엔 강력분을 입술엔 닭 피를 칠한 것 같은 여성 모델이 냄비와 뒤집개를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두부로 만들어보는 256가지 우리집 저녁 밥상’이라니, 두부가 척을 진 출판사라도 되는 것인가. 두부로 만들어진 256가지 저녁을 256일 내리 먹으면 어느 순간 내가 두부를 먹는 건지 싸는 건지도 헷갈리지 않을까.

“둘 다 뭔가 하는 과정을 알려주고, 비숙련자가 따라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도 규아는 연신 책을 흘끔거렸다. 소환진을 정확히 따라그리기 위해서였다.

 

제 방바닥에 립스틱으로 죽죽 그은 복제본은, 책의 그림과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화질이 구린 ‘직찍’ 정도로는 보일 만큼 똑같았다. 문득 립스틱에 번뜩번뜩한 펄이 섞여 있었더라면 이게 진지한 소환마법 대신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처럼 보였을까 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념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무늬가 조금 빈 것을 두고 그녀의 미숙함을 질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부러 화룡점정의 느낌으로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의 신경을 정말 거스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규아는 소환진 중앙에 다소곳이 놓아둔 생리대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안쪽이 드러나도록 벌렁 펼쳐둔 그것은 순리대로라면 이미 폐기되었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선전에 흔히 사용되는 산뜻한 에메랄드빛 대신 우중충하니 검붉은 색으로, 잔뜩 곤두선 호르몬의 색으로 그것은 이미 물들여진 것이다. 규아는 어느 때부터인가 맡지 못하게 된 쾌쾌한 냄새를 떠올렸다. 역시 먼저 물건을 꺼낸 뒤 소환진을 그린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뭐, 괜찮겠지. 피잖아 일단. 안 되면 주의사항에 뭐라고 있겠지. 주의: 팔뚝에서 뽑은 피만 쓰시오.” 빈정거리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규아는 고개를 양옆으로 꺼떡거렸다.

주의사항을 안 읽은 것 같긴 하지만. 쩨쩨하게 덧붙이고 그녀는 나머지 획을 그었다.

“그래도 생살 찢는 것보단 낫잖아.” 기어이 덧붙이고야 만 두 번째 쩨쩨한 말이었다.

물론 직후 악마는 튀어나왔다.

 

스멀스멀, 그것은 생리대를 뚫고 고개를 내밀었다. 공물 같은 느낌인가? 규아는 감탄하면서도 소소하게 할 생각을 했다. 처음엔 뭉개진 사과 같은 머리만 살짝, 이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몸이 딸려 나왔다. 키는 휴대전화보다 약간 작았고, 팔다리는 붉게 염색한 순대처럼 몸통은 특별히 두껍게 만 붉게 염색한 순대처럼 보였다. 윤곽이 어찌나 통통한지 겉을 슬쩍 뜯으면 홍수처럼 국숫발이 밀려나올 것 같았다.

영차. 정직하기 짝이 없는 감탄사와 함께 그것이 하반신을 끌어올렸다. 어디로부터? 규아는 자기 다리 사이에 있던 물건이 지금 지옥의 천장과 연결되었다고 상상해보았다. 묘했다.

“으엑, 퉷, 퉤!” 악마의 첫마디였다. 앙증맞은 입으로 타르처럼 검은 침이 흩뿌려졌다.

“더럽게 이게 뭐야! 이런 거로 소환 의식을 치르다니!”

두 번째 말이었다. 규아는 만화처럼 제 이마 귀퉁이에 힘줄이 작게 솟는 상상을 했다.

“더럽다뇨!” 그녀가 한 첫 번째 대꾸였다. “이게 뭐가 더러워요, 그냥 생리현상인데!”

두 번째 대꾸였고, 의도하든 그러지 않았든 그녀는 ‘생리’와 ‘생리현상’이라는 소리의 묘한 중첩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유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마치 교과서에서 ‘시발택시’와 ‘시발점’을 볼 때마다 킥킥거리는 꼬맹이들처럼. 왜 이런 순간까지 좀 진지한, 상황에 걸맞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걸까. 규아는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어지러워질 때까지 숨을 참고 싶었지만, 대화 도중엔 안 될 일이었다.

“생리고 뭐고를 떠나서, 정순한 피라고 거기 조건에 안 쓰여 있든?”

“나 아직….” 규아는 잠깐 말을 절었다. 갑자기 몇 발짝 물러나, 이 말과 상황을 천천히 되새김하고 싶어졌다. 마음속으로 그는 악마의 말을 낱낱이 풀어헤쳐 저장했다. “아!”

깨달음의 탄성이 아니라 아랫배에서부터 용솟음친 분노의 함성이었다.

“미친, 나 아직 정순하거든요? 아니 아직이 아니라, 안 정순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엉뚱한 생각이나 하는군. 보건 말고 화학 시간에 좀 깨어있지 그랬어?”

악마는 제가 튀어나온 생리대를 툭툭 두드렸다. 매끈한 순대 표면이 고통스럽게 울었다.

“패드에 온갖 화학 물질이랑 엉망으로 섞인 걸, 지금 ‘정순한’ 피랍시고 소환에 쓴 거야?”

 

.

규아는 아주 먼 곳으로 잠시 갔다 왔다. 혀와 입술과 눈과 귀와 머리가, 각각 백 킬로미터만큼은 멀찍이 떨어졌다가 서서히 지속적인 카운슬링과 조정 기간을 거쳐 재결합하는 기분이었다. 되돌아온 그녀의 방에선 작고 귀여운 순대 악마가 두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 그거요.” “맙소사, 내가 본 것 중에 두 번째로 멍청한 방법이야 이건!”

그게 뭔진 물어보지 말자. 그냥 물어보지 말자. 규아가 다짐했다.

“그놈은 양치질하다 나온 피를 썼어, 그것도 소환 의식을 하려고 이를 닦은 게 아니라 마침 닦을 때 나온 걸, 알뜰하게 칫솔모로 찔끔찔끔 찍어서 모았더군, 혈액보다 걔 침이랑 치약이 더 많았어!”

아직 머릿속이 헝클어진 채임에도, 그게 꽤 멍청하게 들리는 것을 규아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일 만 하네. 그러나 시험 성적으로 우리 반에서 내 밑에 딱 한 명이 더 있을 때 느껴버리고야 마는 그 기묘한, 스스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내심 갖게 되어버리는 치사한 우월감. 더럽기까지 한 자기기만의 안도감. 규아는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스스로에게 그만 정을 떼고 싶어졌다.

“그때 내가 어땠는지 알아? 거의 치약 마스코트 같은 꼴로 나왔지. 상상이 가? 치약 마스코트라니! 요즘 그런 게 있기나 한가?”

그러고 보니 정말 없는 것 같네. 나 어릴 때는 있었나?

규아는 불쾌한 기억을 곱씹었다. 무슨 인터넷 기사였는데, 예전에 사라진 휴대전화 브랜드를 소개해주는 내용이었다. 신기해서 별생각 없이 댓글을 달았는데 나중에 보니 답글이 잔뜩 달려 있었다. 사실 답은 아니고 주로 푸념과 은근한 조롱투의 글들이 좀 있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느냐, 급식충이라고 해도 그렇지 대체 몇 살이냐 등등 인생의 업적이라곤 그녀보다 먼저 숨을 쉰 것밖에 없는 이들의 넋두리였다. 태어나니 스마트폰이 어디에나 있었는데 ‘애니콜’이 뭔지 그녀가 알 게 뭔가?

제발, 딴 생각 좀 하지 말자. 지옥의 심부름꾼과 대면한 사람치곤 꽤 자주 규아는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야? 대뜸 심장을 푹푹 쑤시라는 게 아냐, 하다못해 손톱의 거스러미라도 뜯으란 말이야! 내가 아무리 급이 낮아도 그렇지 이런, 이런 걸 갖고 피라고오…!”

“아, 알았어요. 그만 좀 해요.”

규아가 손사래치며 말을 끊었다. “다음부턴 신경 써서 부를게요.”

 

돌연 흐르는 이 어색한 기류. 한발 늦게 그녀도 눈치챘다.

“뭐. 꼭 다음이 또 있을 거라는 건 아닌데요. 그게 없는 게 제일 낫겠죠.”

“좋은 생각이야. 나도 28일에 한 번씩 흡습제 맛을 보면서 눈뜨긴 싫거든.”

“아, 미안하다고요, 아무튼….” “너 아까 미안하다고 안 했는데.”

‘안 했는뒈.’에 가까운, 까불대는 대사 처리. 악마의 묘하게 실룩이는 입술. 되록되록 방정맞게 굴러다니는 검은자위. 확실했다. 규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기분을 꺾진 않을망정 확실히 거스르긴 하겠다는 의지. 대뜸 멈춰 세우지는 못하겠지만 그 발목만은 걸고넘어지겠다는 속셈. 속을 뒤집어놓진 못하지만 살살 긁고야 말겠다는 의사 표현.

이 팽팽한 긴장은 흡사 줄다리기의 그것과도 같았다. 다만 양쪽의 합력이 0이 된 것이 아니라, 줄다리기를 시작했지만 양쪽 선수가 모두 오지 않아서 제자리를 지키는 줄. 시작부터 누구도 이기거나 질 수 없이 지속되는 그야말로 운명적인 대치 상태. 그딴 걸 긴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말이 되는 생각이 얼마나 있을까.

규아는 자기 머릿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 맞는 생각을 하는 주자와 그렇지 못한 주자가 있고 그 둘이 언제나 줄다리기를 펼치지 않는가 가끔 생각했다. 얼마나 가끔이냐면 그런 망상을 떠올릴 때마다 무심결에 참 새로운 생각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어버릴 만큼 가끔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끔보다 훨씬 더 가끔, 승률의 천칭이 거의 수직으로 솟아버릴 만큼 가끔, 상식적이고 적정한 생각을 하는 쪽의 주자가 간신히 목불인견의 승리를 거두곤 했다.

“잠깐, 잠깐만요. 정리 좀 하고 갈게요.”

양손을 펼쳐 세차게 내젓는 강한 몸짓. 덕분에 악마는 입을 다물고 주변도 조용해졌지만 규아의 머릿속은 더 엉망이 되었다. 원래 뭘 해야 하고 지금은 또 뭘 하고 있었는지 일의 순서가 온통 꼬여, 제가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일단 나오는 대로 말해본 거라는 서글픈 사실만 재확인하는 꼴이었다.

“그러렴.”

“그러렴이 아니라, 그럼 일단 당신이 그냥 좀 해볼래요? 이런 일 많이 해봤을 테니까.”

순대 악마가 쩝쩝거리며 자기 턱을 갉아 먹었다. 순대가 순대를 먹는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도 자기 각질이나 가래를 먹지 않는가. 권장되진 않지만.

 

악마가 입을 열었다.

“좋아. 날 왜 불렀는지는 확실히 정했겠지? 어떤 일에 날 불러야 하는진 책에 다 적혀 있을 거고.” “맞아요.”

활자로 굳어진 말. 그거야말로 기억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규아도 자신 있게 끼어들 수 있었다.

“아주 치사하고 쩨쩨한 일에만 부를 수 있다고….” 내뱉고 보니 썩 좋은 말이 아니었다. 어라. 분명 적힌 대로 읽은 건데. 그녀는 소소하게 악마의 눈치를 보았다.

“제대로 봤다. 난 원래 그런 악마야.”

오동통한 손끝, 아니 면발의 끝을 늘어뜨리며 악마가 말을 이었다.

“나는 특별히 쩨쩨하고 때로는 졸렬하기까지 한 원한에만 반응하는 악마다.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계약의 대가도 작고 무엇보다 일의 진행이 빠르지.”

소액계산대다. 소액계산대의 악마가 지금 내 앞에 있어. 규아는 제가 방금 떠올린 것을 농담이라고 불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확인받고 싶었지만 혹시 마음이 상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규아는 평소에도 소액계산대의 악마가 정말 존재한다고 내심 믿고 있었다. 그것의 주된 장난질은 다른 줄에선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계산이 끝날 동안 내 앞사람은 우유 한 팩과 감자 칩 한 봉지를 갖고 그 결제 방법으로 내내 캐셔와 실랑이를 벌이게 만드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시험해보지. 네가 정말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시험이라니. 결코 좋은 어감이 될 수 없는 단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다가올수록 유독 뛰어난 관찰력이 발휘되어 더러운 책상과 바닥의 머리칼과 단정치 못한 서랍을 뉘우치게 만들듯, 규아의 머릿속에 번뜩 엉뚱한 물음이 샘솟았다.

“갑자기 뭐 궁금한데, 물어볼게요?”

떨떠름하게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비닐이에요?”

 

규아는 소환서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비닐 재질의~ 같은 표현이 아니라 진짜 그냥 비닐. 동네 작은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검고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였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휙 족히 전봇대만큼은 치솟아 비둘기들에게 있어 그들의 되찾을 수 없는 영광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보통 뭐, 가죽이라든가… 아님….” 괜히 말을 늘였네. 그녀는 생각했다. 딱히 다른 예시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가죽이라든가….” “비닐이 좀 더 우리 성정에 알맞기 때문이다.”

제 손끝을 핥는 아이의 손에 쓴 약을 바르듯, 의무적이면서도 자애롭게 악마는 설명했다.

“가죽은 생분해성이지. 버려지면 금세 잊히고 썩는다. 금실을 박아 장정해? 누군가는 그 금실을 만들 것이고 운반하여 판매하겠지. 내수시장의 활성화는 불필요한 행복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것은, 비닐은 족히 오백 년은 썩지 않는다. 잘게 부스러져… 모래와 섞이고, 흙이 되고, 결국은 동물의 몸속으로 섞여 들어가 암이나 소화 장애를 일으키지.”

그럼 비닐을 만들고 옮기고 판매하는 일은 인간이 아니라 다 악마가 하는 건가요? 실없는 질문이었고 규아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 그냥 크고 멋진 기계들이 그런 과정을 언제부턴가 인간에게서 빼앗아갔다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행복을 금실에 비해 창출할 거라고 멋대로 이해해버렸다.

“다시 우리 계약으로 돌아가자. 아니 시험이었지.”

기억력도 좋아라. 조개가 뻐끔뻐금 해감을 하듯 그녀는 머릿속에 투정을 풀어놓았다.

 

“부모의 원수에게 위력을 행사하려고 날 부른 사람이 셋 있다.”

세 명이라. 1번, 2번, 3번. 그러나 가짓수가 적은 것만 보고 대뜸 좋아하는 것은 풋내기의 자세라는 것을 규아는 얼마 전 절절히 느꼈다. 1번부터 끝까지 4개짜리 보기로 990점. 분명 5번까지 있는 것보단 낫다. 연습할 땐 그래도 어느 정도 되었는데, 시험장에 가 보니 듣기 파트는 영어를 배운 외계인들이 대신 읽어주는 것 같았고 읽기 파트는 본문이 벌집처럼 될 때까지 시선을 푹푹 내리꽂으면서도 답이 안 보여 허겁지겁 넘어간 것이 반타작이었다. 나중에 대학도 끝나고 취업할 때나 필요한 걸 그러게 왜 지금 보라고. 거기다가 시험 시작하기 전에 처음 응시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 당당히 들었는데, 시험장에서 딱 한 명 규아만이, 심지어 어디 중학교 교복 입은 남자애랑 아무리 잘 쳐줘도 초등학교 다니는 발랄한 소녀마저 태연자약하게 팔을 내린 꼴을 보고 경악하였다. 나중에 괜히 열이 뻗쳐 포털에 ‘초등학생 토익’을 검색했더니 오백팔십 점을 넘어야 아빠가 쌍수를 시켜주기로 했다는 한 질문이….

, 이번엔 좀 멀리 갔다. 규아는 가까스로 생각을 다잡았다.

“…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원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해달라고 날 부른 사람이 있어. 이 세 개 중 어떤 소망이 가장 나한테 알맞을까?” “돌부리요.”

좀 더 턱을 붙잡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적인 .’을 해볼 걸 그랬나? 규아는 승부수를 곧잘 던지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룰 만큼은 미뤄보고 싶었다.

“틀렸어! 전부 다 안 돼!”

틀린 것을 모두 고르시오.’ 였단 말인가. 그래도 다행이었다. 악마의 시험은 전교 석차 십오 등까지 끊어서 복도에 걸어놓거나 엑셀로 짠 표에 무정한 두 자리 숫자―가끔, 진짜 아주 가끔은 심지어 한 자리―를 단두대처럼 퍽퍽 박아 넣어 집으로 발송하진 않을 테니까.

“왜요?” “‘부모의 원수’가 잘못된 거야. 그건 심각하잖아. 시시하지도 쩨쩨하지도 않아.”

생리대가 아니라 좀 큰 그릇을 썼으면 악마의 체구도 커졌을까. 규아는 그것의 표정을 좀 똑바로 보고 싶었다. 그것이 말하는 내내 얼마나 진심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면 단지 농담 따먹듯 펑펑 말을 터뜨리는 것이거나.

“그런 것들은 내가 다룰 수 없어. 지옥에 떨어뜨리고 싶은 원한, 부모를 죽인 사람, 불타오르는 사랑….” “알았어요. 그런 거 대신 되게 작고 쩨쩨한 것만 맡으니까 더 싸고 빠르다.”

“아까 다 말했잖아.” “그러니까요! 나도 다 이해했다고요.”

“그래? 알았어. 그럼 이제―” 드디어, 규아는 손을 비비고 싶어졌지만 수더분한 아저씨처럼 보일까 봐 그만두었다.

“네 이야기나 들어보자. 뭘 어쩌려고 날 불렀는지.”

첫 삽을 뜨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후, 일단… 오늘 아침 일이거든요. 돼지꿈을 꿨어요. 꾸다가 막 일어났죠. 내가 돼지를 쫓고 있었는데 사실 내가 쫓기는 돼지 옆에 있다가 그 돼지가 된 거 있죠. 아무튼 돼지꿈 꾸고 일어난 거죠, 뭐. 개꿈이긴 해도 개는 안 나왔으니까.”

“돼지꿈? 개가 뭐?”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대 악마는 그러고 보니 따지자면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걸까, 아니면? 규아는 그것이 무엇을 공물로 삼아 걸어 나왔는지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네. 돼지꿈이요. 아, 돼지가 나오는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게 있어요. 미신이에요 그냥. 경은이는 어렸을 때부터 욕만 먹었는데 반에서 키 제일 크거든요. 칭찬해주면 크게 자란다더니.” “아니 그건 아는데. 그 꿈이 네 이야기랑 상관이 있는 거야?”

악마는 뒤의 키 운운하는 부분은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 같았다. 사실 그게 옳은 거 같았다.

“그게 징조였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아, 그래요 그리고 기분 좋게 일어나서 생각해보니까 난 ‘미자’라서 로또 못 사잖아요. 그래서 일단 빡쳤어요.” “징조? 무슨 징조?”

“내가 오늘 하루 끔찍한 일이 나한테 생길 거라는 징조요.”

악마는 할 수만 있다면 말소리를 처음으로 되돌려 문장 구성을 뜯어고치고야 말겠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래서 말은 못 주워 담는다고 하는구나. 글이면 수정부호라도 넣을 텐데. 규아는 부질없이 후회했다. 하지만 그게 재량활동 시간에 배운 것 전부인데 어쩌란 말인가? 가장 중요한 걸 처음에 때려넣기.

가장 기계적인 방법으로 창의적이게 되는 방법을 그 시간에는 배웠다. 글을 쓸 때는 언제나 두괄식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핵심적인 것을 서두에 박을 것. 규아는 장래 희망 설계를 하며 ‘나는 꿈이 없습니다.’를 제목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반에서 나대는 아이 하나가 총대를 멜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아이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35살까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깔끔하게 죽기’를 주제로 발표했다가 재량활동 시간을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규아가 마지막에 결국 결정한 두괄식 구성의 내용은….

“그게 정말 끔찍한 운명이라면, 나보다 다른 크고 심각한 악마를 부르는 게 나을 텐데.”

“끝까지 들어요.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악마가 꼬물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귀여웠다.

 

“아무튼, 그래서. 토요일이잖아요. 아직 토요일인데 낭비하기 싫어서 일단 밥부터 빨리 먹고 쉬려고 했죠. 아빠는 어디 동호회였나 갔고 엄마는 자고 나 혼자 일어나서 불 올리고 삼겹살 숭덩숭덩 구웠단 말이에요. 생각해보니까 자를 때 날이 좀 안 들더라니 그게 또 복선, 아니 불길한 징조였어요.” “숭덩숭덩이라고?”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규아는 악마를 굽어보다가, 확실히 자주 쓰는 말은 아니라고 알아서 납득했다. “좋아하는 표현이거든요. 자주 읽었더니 다 외웠어요. 「운수 좋은 날」인데, 4교시 국어 시간마다 거기 나오는 고깃집 장면이랑 아욱국 글 보면서 버텼거든요. 떡이랑 너비아니랑….” “풀죽이랑 쉰밥 나오는 걸 갖고? 아욱국 글 제목은 아마 「석류」일 거다.”

“오, 맞아요. 아 갑자기 배고파지네. 가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하는데. 아무튼 아 근데 저번 주에 또 국어 4교시 걸려서 진짜 오늘 점심 다 진짜 뒤졌다 하다가 먹으러 갔더니 꽃빵인데―꽃빵 알아요? 꽃빵인데 꽃처럼은 안 생기고 돌돌 말린 휴지처럼 생긴 거 있는데―전날 먹은 고추 잡채만 빠지고 그 빵만 덜렁 나온 거 있죠? 후식으로 하나씩 받은 건데 고추 잡채 없이 그것만 먹으니까 진짜 노맛에 목만 막히는 거예요. 애들 아무도 안 먹고 우리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다 먹기로 했는데, 객기 부려서 한꺼번에 다 넣었다가 목 막혀서 죽을 뻔했어요 진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 뒤의 말은 은은한 눈짓으로 대체되었다. 근데 왜 정작 필요한 이야기는 하질 않니.

“아, 음. 알았어요. 어디까지 했지. 삼겹살이었나? 그래서 잘 차려서 먹고 있는데 거기서 뼈가, 아 지금 생각해도 빡치네 진짜. 뼈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또 모르고 씹었어 병신 같이!”

“뼈? 오돌뼈 말하는 건가? 네 나이에 그게 문제는 안 될 텐데.”

“오돌뼈면 차라리 딱 봐서 안 먹고 바르면 되죠! 그게 아니라 진짜 이, 뭐라고 하지. 진짜 딱딱한 진짜 뼈 있잖아요. 그런 게 나오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때는 그냥 입 안에서 갑자기 뭐 부러지는 소리 나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막 눈앞이 하얘지고 막. 뭐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뱉었죠. 무슨 뼈 도려낸 것처럼 납작하고 긴 게 있는 거예요 삼겹살에!”

“그것 참 이상하군.” 악마는 처음으로 규아의 이야기에 흥미 붙일 구석을 찾았다.

 

“삼겹살에 웬 뼈가 들어가지? 뼈처럼 생긴 이물질 아냐?” “그러니까요! 그리고 뭐 기계 같은 건 아닌 게 나중에 보니까 고기 자르다 보면 갈비뼈 끝부분이 뭐 어떻게 돼서 섞일 수 있대요.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진짜 그때 너무 아파서 잘 자던 엄마까지 비명으로 깨우고 바로 병원 갔단 말이에요, 폰으로 토요일 문 여는 치과 검색해서!”

토요일 아침에 맞기엔 분명 끔찍한 일이었다. 사실 평일이라고 더 잘 버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그냥, 끔찍한 일이었다.

“치과 갔는데, 아 거기서부터는 진짜 생각만 해도 아직도 열 뻗쳐 가지고 진짜….”

 

*

 

“아니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냥 금만 살짝 간 건데요!

음 이탈로 마무리된 탄원이 진료실을 메웠다. 얼마 없는, 사실 주말 아침부터 왜 있는지 모를 대기 손님들이 제각기 쥔 스마트폰에서 잠시 눈길을 떼었다. 금세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원장은 몸의 질병, 특히 충치와 치주질환 앞에서 인간의 역법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 소리인즉슨 들쭉날쭉 찾아온 치아의 통증에 턱을 부여잡은 채 병원을 찾지만, 하필 그날이 주말이라는 운명의 장난에 고통받는 환자가 적잖게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니 뭇 어중이떠중이 치과 사이에서 자기 병원만 토요일에 문을 엶으로써 그 잠재 수요를 순조롭게 흡수하리라 믿었다. 그걸 병원 방침으로 정해두고 홍보의 핵으로 삼은 탓에 쉽사리 무를 수도 없게 된 아이덴티티는 원장에게 단순한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말이 되었다고 난데없이 잇몸이 붓거나 이가 부러질 리 없는 편안한 삶을 산다는 것.

물론, 언제나 뜻밖의 선물은 있기 마련이다.

“신경까지 금이 번져서요, 일단 신경치료부터 해야 합니다.” “일단? 일단이요? 그 다음은 뭔데요?”

규아의 엄마는 하나뿐인 딸이 다쳤다는 사실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자기는 지금 일이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마음엔 들지 않는단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만 탄식했다.

“다 큰 애가 왜 이러니, 병원 다 내려앉겠네 정말.”

“내 입 안이 지금 내려앉게 생겼다고, 지금!”

규아는 머리가 두 개라도 그렇겐 못할 만큼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가만히 있으면 의사가 맞아요. 신경치료를 안 하면 바로 그렇게 될 거예요. 따위의 몹쓸 추임새를 넣을까 두려워서.

 

“뭐, 때우는 건 없어요, 간단하게 그냥? 네? 뭐 납땜하듯이 그냥 막 부어서 굳는 거 있잖아요?” “레진은 작은 거로만 돼요. 이건 지금 신경까지 금이 내려가서 크라운 해야 돼요. 물론 그 전에 신경치료도 하고. 잠깐 또 볼까요?”

싫어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외우면서 내리 몇 날 며칠의 밤을 새워서 의사 면허까지 땄다면, 부디 양심적으로 또 덜 아프게 끝내주길 바라며 일단은 맡기는 수밖에.

. 입안에서 반사경이 굼질거리는 기척과 함께 의사의 지적인 신음이 진료실에 울려 퍼졌다. 분명 사지를 쭉 뻗은 채 검사당하는 처지임에도 꽤나 그럴싸하게 들려서, 할 수 있으면 자기도 그런 설득력 있는 신음 뱉는 법을 전수받고 싶어졌다. 얼핏 느껴지는 반사경의 움직임이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불온하리만치 엉뚱한 방향으로 눕기 전까지는.

“어? 여기 사랑니도 있네요. 아이고 완전 누웠네. 안 뽑았어요 이때까지?”

“너 왜 말을 안 했어? 어쩐지 어제 야식 갖다 줘도 안 먹더라니!”

 

득달같은, 사실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반응이지만 원래 모든 엄마는 그렇다. 가장 우발적인 단서와 차마 무엇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순간만 갖고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크고 성근 그물처럼, 엄마의 시선은 온갖 자질구레한 행동거지와 변곡을 갖고 단 하나의 운명적인 사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길을 만든다. 아니 그날이라서 그냥 빨리 자고 싶었다고! 규아는 하마터면 치과가 있는 상가건물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외칠 뻔했다.

“뭘 말을 안 해? 안 물어봤잖아.” 아 씨발, 이런 식으로 말하면 더 숨기던 것 같잖아! 규아의 임기응변은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말을 앞으로 다 할 것에 대해 미리 후회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만을 깨우쳐줄 뿐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녀는 두괄식 구성과 더불어 배운, 설득에 있어 효과적인 ABCD 대화법을 떠올렸다. A는 일단…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나긴 났는데, 누워서 그냥 그 자리에 있고 혀로 만져도 괜찮길래 그냥 뒀어요. 뭐 아프고, 염증 나는 것도 없어서요.”

규아는 지적인 신음은 못 할지언정 호소력 짙은 눈길은 어느 정도 써먹을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이 순간에는 자기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는 최대한 조리 있게, 흥분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했다. “멀쩡하잖아요, 그쵸?”

엄마는 한발 물러섰다. 이제 양상이 환자와 그 의사의 일대일 대화가 된 까닭이었다. 의사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다시 반사경부터 들이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질겅질겅 씹어서 쇳물이 나올 때까지 뭉개버리고 싶어졌다. 흐음. 또 그 지적인 신음이다. 규아는 몸서리쳤다.

“빼는 데 이십 분이면 되는데, 그리고 옆 어금니랑 간격이 지금 되게 좁거든요. 사이가 좁으면 음식물이 잘 끼어서 관리하기 힘들어요. 지금도 보면 뭐 하나 끼어있거든요….”

규아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아니 모든 것이 제 잘못이라고 읊조렸다. 하필 주말 아침에 이가 부러져서 허겁지겁 치과를 찾기 전에 다소곳하게 칫솔질부터 할 걸 그랬씨발! 씨발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당연히 지금 끼어있을 거 아냐 지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당장 이빨이 나갔는데 거기에 양치부터 하고 올 순 없잖아!!

 

“여기서 시원하게 빼면 될 텐데 웬 고집이야. 어차피 맨날 저녁도 밖에서 먹는데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지금 온 김에 치료받고 가야지.”

“아 엄마는 조용히 좀 해 봐. 따지고 보면 이것도 엄마 때문 아냐? 아빤 턱도 크고 이 작은데 엄마 턱 좁은 거 때문에 나 이빨 날 자리가 없잖아!”

“사랑니는 원래 흔하게 삐뚤어져서 나요. 진짜 심한 건 잇몸에 파묻혀서 썩는데, 저희는 그런 것도 잘 핸들하거든요. 최근에 개원하고 나서 천 번째 사랑니를 뽑았죠.”

이 상황에 홍보냐고! 규아는 신이 있다면 방금 마음속으로 내지른 절규를 반드시 들었으리라 확신했다. 아니, 역시 신은 없는 게 확실했다. 없는 게 나았다. 그걸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

 

“점점 이야기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걸.” “아직 다 말도 안 했는데요.”

문득 규아는, 신은 몰라도 악마가 여기 있는 것은 확인했는데 실은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신과 악마와 때로는 요정과 도깨비와 지니의 가면을 줄곧 바꿔 쓰며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조금은 닳고 닳은 초자연적 음모론을 저도 모르게 망상하였다.

“이미 다 들었어. 너 사랑니 안 뽑았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악마는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듯 국숫발을 씰룩거렸다.

“뽑았으면 굳이 생리대 써서 날 불렀겠어?”

사랑니랑 피랑 뭔 상관이지? 규아는 여전히 그것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는 규아가 제 말을 이해 못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시선을 맞추되 정작 생각은 평행으로 달려 나갔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악마는 사랑니를 뽑으면 으레 출혈이 일어나기 때문에 최대 두 시간가량은 입에 거즈를 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피 칠갑한 순대처럼 생긴 악마가 인간에게 보통 전해줄 법한 지식은 아니었다.

“아 그래서! 내가 수술했으면 입에 거즈 물고 있었을 거니까!” “뭐 하는 수술인지도 모르면서 왜 무서워하는 거야?”

“누가 뭘 무서워해요? 가만둬도 불편한 거 없으니까 안 받으려는 거예요.”

펄럭펄럭 악마는 순대로 된 팔을 내저었다. 자꾸 순대라고 내심 생각하니 정말 순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규아는 언젠가 학원 끝나고 돌아오던 길 갑자기 야들야들한 게 확 당기던 날을 떠올렸다. 마침 가게를 닫기 직전이라 특별히 더 인심 좋아진 아주머니한테 덤 좀 얹어달라고 살갑게 구는 것까진 좋았는데, 하필 폐 좀 많이 달라고 해야 할 것을 그만 간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집에 와 포장을 벗겨보니 순대야 원래 있어야 할 만큼 있으나 그밖엔 간 쪼가리만 잔뜩 쏟아질 뿐 눈 씻고 찾아봐도 야들야들 탱글탱글한 허파는 보이지 않았다. 양념 소금의 맛으로 윤색된, 뻑뻑하고 메마른 밤이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네.”

규아도 이제 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치과의사한테 시련을 내리고 싶은 거야? 옆에서 자꾸 되도 않는 맞장구나 치고, 병원 홍보한 게 싫어서?”

“그건 아니에요.” 그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치졸하지 않으냐는 듯, 규아가 피식 웃었다. 반대로 악마의 표정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네 엄마를 벌하고 싶은 건 아니지?”

“반댈걸요? 엄마가 나한테 벌 받고 있는 거겠죠.”

규아는 괜히 입맛을 다시듯 대수롭잖게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누가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지만, 악마가 그렇게 행동했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아니에요. 그냥, 그렇지 않아요? 똑똑한 애도 많고 끼 부리는 애도 많은데 난 둘 다 아니라서. 우리 반 1등은 학원 아무 데도 안 다니고 그렇게 한대요. 거의 미쳤어요 진짜. 전에 보니까 문제집 거의 기름종이 될 때까지 풀던데. 그럴 만한 것 같아요.”

평소엔 혼자 하는 잡념에 그치는 것을 규아는 어쭙잖게 입 밖으로 풀어냈다. 악마는 달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벌하고 싶은 건 정육업자예요. 아님 발골사인가? 아무튼 삼겹살 가공한 사람이요.”

악마의 얼굴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누누이 강조했듯 그 몸은 너무 작고 낮았다. 아무리 제대로 된 표정을 짓더라도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거.” “네?”

“이야기가 너무 길고 장황해서. 이게 전부 다 삼겹살에서 시작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

 

사실 그것은 규아도 마찬가지로, 그 모든 일의 장본인으로 초점이 돌아가자 재차 신선한 분노가 야금야금, 머리끝부터 스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요! 삼겹살에 뼈 같은 거 넣으니까 멀쩡한 이가 부러지죠! 그거 때문에 이제 사랑니도 뽑아야 되고, 솔직히 이 정도면 나한테 부모의 원수 다음인데, 객관적으로 봐서 엄청 쪼잔하게 빡친 거 아니까 당신 부른 거거든요? 이러면 조건 맞죠?”

“난 쩨쩨한 계약을 맺지만 쪼잔한 계약은 맺지 않아. 근데 그 전에 좀 그냥 못 넘어가겠는 부분이 있는데….”

그 둘이 달라요? 하고 하마터면 규아는 말을 끊을 뻔했다. 하지만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다고 한데 묶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

중학생 때 제게 붙은 별명 중 하나인 ‘와규’라는 괴상망측한 이름을 규아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창안자는 “규아니까 와규지!”라는 빈약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원래 그때 애들끼리 짓고 지음당하는 별칭 중 엄밀히 말이 되는 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예를 들어 1학년 때인가, 특수학급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항상 흰 옷만 입고 흰 장갑을 끼고, 한 번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선생님이 침을 튀긴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며 바동거렸다. 그 애의 별명은―

“아직 뽑지도 않은 이의 원한까지 정육업자한테? 아, 치과에서 예약을 잡고 왔나 보지?”

“그건 아니에요. 깨진 이만 치료하고 왔어요.” “뭐, 뽑고 싶은 거야 그럼? 맘이 바뀌었어?”

그럴 리가 있나. 거센 콧김과 더불어 팍 찌그러진 표정이 그보다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이 잘 닦으면 지금도 괜찮은 걸 뭐 하러 들쑤셔요? 필요 없다니까요.”

악마는 더욱 일을 종잡을 수 없다는 듯 목을 흔들거렸다.

“무슨 말이야 그게? 좀 알아듣게 좀 말해봐. 사랑니를 안 뺄 건데 뺄 거라고?”

“그건 그냥―” 말이 도중 뚝 끊겨 나뒹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지, 아니면 여태 그게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끼는지. 규아는 기울어진 바닥을 걷는 것처럼 혼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요. 아마 그냥, 가다 보면 빼게 되겠죠. 이십 분밖에 안 걸린다고 하고. 수능 보기 전엔 빼지 않을까요.”

“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는 해 봤어? 지금 나한테 하듯이?”

악마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까 뭘 들었어요? 치과에서 그렇게 얘길 했는데.” “그걸 이야기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때 말한 건….”

악마는 방을 둘러보았다. 사실 맨 처음, 곧장 발을 딛자마자 해야 할 일이었다. 특별할 게 없었다. 바닥과 천장 사이 으레 있는 책상과 의자와 침대와 책꽂이와 스탠드등과 시간표와 알람시계와 참고서와 필통, 그 안에는 다시 형광펜, 지우개, 샤프펜슬, 컴퓨터 사인펜…. 학생이면 으레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눈을 붙이겠구나 싶은 곳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무튼 됐다.” “됐어요? 발골사 이제 길 가다가 돌 걸려서 넘어지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예 됐다고. 못 받아들이겠어.”

의심의 눈초리. 의심이라기보다 얼마 못 가 속사포처럼 비난을 쏟아낼 성싶은 눈초리. 악마는 짤막한 팔다리를 퍼덕이며 뒷말을 이었다.

“사랑니의 원수는 내가 맡을 수가 없어. 그건 쩨쩨한 일이 아니거든.”

눈초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정말이야. 나도 얼마 안 가서 빼야 돼. 상상만 해도, 으윽. 이게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한 일인데.”

정말 신경이 욱신거린다는 듯 제 턱까지 부여잡는 순대 악마였다. 가증스럽게도 뺨 언저리의 당면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진짜 순대로 된 게 아니잖아. 저것도 당면이 아니란 말야. 규아가 소소한 착각을 바로잡았다.

“그럼 뭐, 다른 진지한 악마 부르라는.” “너 뭐… 오늘도, 오늘 토요일이라고 했지? 토요일도 뭐 어디 다니냐?”

인제 보니 의사의 지적인 신음과 마찬가지로 악마에게도 자신만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곤란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것의 팔이 펴졌다가 접히고 팔짱을 꼈다가 풀리고 괜히 옆구리에 얹히거나 톡톡 두드리기도 하였다. 시선은 규아를 벗어나 어느 구석, 벽, 천장을 고루 훑으며 변죽을 울렸다.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떼고, 입술을 우물거리고, 콧속으로 나지막하게 신음하고… 악마는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돌연 너무나도 곤란해 보였고,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큼 곤란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악마가 이제 필요 없어진 규아에게까지 그 마력은 끼쳤다.

“이따가 5시부터 7시 반까지 특강, 아! 씨발! 내 토요일 씨발, 아 삼십 분도 안 남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악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뭐한 거예요?”

“…손가락을 튕겼지.”

지금까지 둘이 나눈 대화 중 가장 멍청해 보였다. 규아도 그걸 알았고, 그래서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걸 튕김으로써 뭐가 된 거냐고요?”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발랄한 메신저 알림이 불쑥 끼어들었다. 규아는 어린아이를 혼내다가 잠깐 다른 일이 손에 잡힌 엄마처럼, 어쩐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제 휴대전화를 쥐었다. 잠금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았다.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번호는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학원이고 과외고 더 이상 선생님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XX쌤’으로 저장하기 귀찮아진 규아의 방침이었다. 혹은 방임이거나.

메시지는 삿갓 기호 한 쌍(^^)을 곁들인 세미콜론(;)과 그에 따르는 사과로 끝났다. 그 밖에도 전체적으로 ‘정말’, ‘진짜’처럼 진정성을 강조하는 부사어나 독립적으로 쓰인 세미콜론(;) 등 작성자가 무언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음을 넌지시 암시했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오타와 띄어쓰기 오류가 그 절박함을 더했다.

“무슨 짓 했어요?”

악마는 손가락을 튕겨서 ‘떴다 떴다 비행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늘땀만 한 손가락으로 치기엔 꽤 빠른 곡조였다.

“아무 짓도? 너희 어머니는 어디 나가실 데 있니?” “아, 지금도 집에 없어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는 것은 사실 너무 무거운 표현이었다. 규아의 경우에는, 땅은 아니라도 작은 언덕 정도는 꺼질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저번 달부터 규현이 바이올린인가 뭔가 배운다고, 이제 엄마도 공인중개사 면허 있던 거로 어디 부동산 나간다고 했어요. 주말에도 집 보여 달라고 전화 오면 바로 나가니까 아예 사무실에….” “그럴 일 없어.”

또 손가락이 튕겨졌다. 규아는 악마의 손아귀가 유독 붉어진 것을 보고 혹 염증이라도 일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지금 거실 소파에서 노을 맞으면서 늘어지게 자고 있을걸?”

여전히 아까 하던 대화의 연장선에 있지만, 당장 더 궁금한 게 생겼다.

“…왜요?” “왜냐니? 주말 오후에 소파에 꾸벅꾸벅 늘어져서 마침 해도 딱 좋게 내려왔겠다, 따뜻하게 햇빛 쫴면서 팔다리 쭉 뻗고 잠깐 눈 붙이는 데 이유가 굳이 필요한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그리고 우리 엄마 그런 거 극혐해요. 아빠 소파에서 자는 것도 어떻게든 깨워서 방에 넣는데.”

 

악마가 써먹은 곤란한 몸짓의 효과가 서서히 약해졌다. 규아는 자신이 슬그머니 정말 중요한 주제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소 뻔할지언정,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팔짱을 낌으로서 더 이상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뭐에요 지금? 악마가 부리는 속임수?”

“계약이 아직 열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속임수?” “그럼 손가락 튕긴 건 뭔데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만 빼면 바짝 따라붙은 심문이었다.

“뭔가 이뤄졌으면 얼렁뚱땅 나한테 또 뭔가 받을 거 아녜요? 설마 벌써 영혼 뺏은 거?”

“일단, 쩨쩨한 계약의 장점은 대가도 쩨쩨하다는 거다. 나한테 한 사람분 영혼이 온전히 떨어진다는 건 에어프라이어로 기린을 튀기는 거랑 비슷한 일이야.”

악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족을 덧붙였다.

“…예시가 너무 자세하지? 내가 받아들인 소망 중에 세 번째로 멍청한 거였어.”

사실 정말 따지려거든 악마가 무언가에 대해 진실을 말한다는 것부터가 코미디이다. 그것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의혹하는 게 더 이치에 맞았다. 허나 세상에는 언제나 최소한의 합리라는 게 있다고 규아는 믿었다. 그리고 설마 자기가 그런 걸 믿는 유일한 어떤 존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영혼이든 뭐든 받는 건 계약이 성립되었을 때뿐이야. 너하고는 그게 안 되었고. 사실 넌 처음부터 나랑 계약하는 걸 원하지도 않았어.”

갈수록 태산이었다. 규아는 조언과 잔소리의 차이점이 딱 하나라고 믿었다. 하나는 한자고 하나는 순우리말이라는 것. 그래서 모조리 다 듣거나, 아예 듣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악마와 주고받는 말은 안타깝게도 첫 번째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로 고개를 꺾고 있었다.

“그럼 내가 왜 불렀게요? 심심해서?” “이야기하려고.”

“무슨 이야기?” “그냥, 아무 이야기. 네 이야기겠지 아마. 네가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떻게 느꼈는지, 왜 어떤 것이 그렇고 왜 또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지 같은 것들.”

“저희 학교 상담쌤이세요? 성격 검사라도 해주시게요?” “그것도 재밌겠네. 근데 시간이 별로 없어.”

규아는 블라인드 너머 한창 농익은 오후를 노려보았다. 악마에게도 근무시간이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오히려 해가 진 뒤, 모두가 잠들 밤이 아닐까?

“아니, 밥 먹을 시간.”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것이 말했다.

사방이 꽁꽁 막힌 방안에서 난데없이 바람이 불었다. 대뜸 놀랄 만큼은 아니지만 옷자락 펄럭이는 것을 의식할 정도는 되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순대 악마가 있던 곳을 보았다. “밥은 무슨 밥, 아직 저녁때도 안 됐는….”

진부하게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표지가 비닐로 감싸인 말도 안 되는 악마 소환서와 역시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한 번 재활용(?)된 생리대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규아는 공격적으로 화장지를 뽑기 시작했다. 한 움쿰 모인 그것을 들곤 역시 공격적으로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립스틱이 번지며 소환진이 차츰 흐려졌다. 그러나 그것을 깨끗이 지우는 것은 다른 문제였고 갈수록 애꿎은 장판만 뻑뻑 비명을 질렀다. 물을 묻혀? 아님 비누? 아세톤?

문득 제가 매일 얼굴에 처바르는 물질이 다른 곳에 묻으면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스스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고 딱히 그럴 계기도 없었다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악마와의 짧은 교류도 그런 순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소리였다. 규아는 방밖의 두루뭉술한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후닥닥 몸을 일으킨 엄마가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이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훤히 떠올랐다. 블라인드에 깨물린 한 줄기 햇살이 규아를 핥아 내렸다. 그것이 재채기 따위의 작용보단 좀 더 복잡한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위장이 뒤틀리며 우렁찬 소리를 냈다.

“너 아직 갈 시간 안 됐니?” “수업 취소됐어.”

규아가 제 방문을 열며 인기척을 냈다. 그 뒤로 처음 주고받은 말이었다.

“무슨 사정 생겼대.” “그래?… 엄마 자고 있을 때 뭐 전화 온 거 있었어?”

“…아니?”

규아는 자기가 그 말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실은 정말 그랬다. 엄마는 이미 자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그 질문을 던졌다. 게다가 방에 있는 규아가 들을 정도라면 그 당사자가 먼저 잠에서 깨어나 받았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반대편에서 봐도 의미 없는 모양으로 손가락을 조금 놀리더니 ‘뒤로’ 버튼을 잇달아 두들겼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안 왔네.

그녀가 조용조용 뱉은 혼잣말을 끝으로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마주보았다.

 

일부러 무언가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색해서 입을 못 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뚝, 둘 다 지금 이곳에서 나갈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 이상의 생각이든 말이든 멈춰버렸다. 마치 이 순간, 토요일 저녁 내가 집에 있는 것, 눈앞의 상대―엄마에게는 규아, 규아에게는 그 반대로 엄마―가 여기 있는 것, 더해 둘이 같이 주말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경우를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둘 다 어쩔 줄 모른 채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배고프다. 좀 일찍 먹자. 집에 밥 있어?”

또 배가 시끄럽게 굴기 전, 선수를 친 것은 규아였다.

“벌써 뭐 먹으려고? 너 한 것도 있는데….” “반대쪽으로 씹으면 괜찮다고 그랬잖아. 어차피 나중에 또 씌울 텐데 뭐.”

규아는 성큼성큼 부엌으로 다가갔다. 뭐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냄비를 열었다.

“이거 오뎅탕 아직도 있었네? 안 상했어?” “상하긴 다 새로 한 건데….”

아직 괜찮아. 뒤따라 냄새를 맡은 엄마가 자신 없게 말했다. 뚜껑을 덮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근데 밥이 없을 텐데. 이제 하면 50분은 걸리고.” “그럼 뭐 시켜 먹을까? 아니다 엄마 오랜만에 나가서 먹을래? 나 전에 인스타에서…”

유독 해가 빨리 저무는 날이었다. 노릇노릇한 하늘이 힐끔 비쳤다. 흐뭇한 빛깔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550 단편 원 히트 원더 김청귤 2020.03.25 0
2549 장편 내가 딛고 선 별 위에서는 : 1화 / 문제 떠맡기기. WATERS 2020.03.24 0
2548 중편 달에서 온 32번째 메시지 마음의풍경 2020.03.23 0
2547 단편 잘 먹겠습니다 거우리 2020.03.19 0
2546 단편 어느 화물선에서 일어난 일 이비스 2020.03.19 0
2545 단편 개이비 한때는나도 2020.03.16 1
단편 밥노을 거우리 2020.03.12 0
2543 단편 달의 바다 여현 2020.03.08 0
2542 단편 별의 기억2 강엄고아 2020.03.07 0
2541 단편 좋은 꿈 거우리 2020.03.03 0
2540 단편 말실수 이비스 2020.03.03 0
2539 단편 숨은 시간 여행자들을 위하여2 임채성 2020.02.28 3
2538 단편 되불러요 거우리 2020.02.27 1
2537 단편 황금 왕좌 이비스 2020.02.26 0
2536 단편 모든 좋은 일은 세상의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 임채성 2020.02.25 1
2535 단편 식후경 거우리 2020.02.22 0
2534 단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빛나나 거우리 2020.02.13 0
2533 단편 변신 이야기 : 노이즈가 된 남자 박레보 2020.02.13 0
2532 단편 신이여 나에게 죽음을 내려주소서 절망의호른 2020.02.11 0
2531 단편 주아 니오사 거우리 2020.02.06 2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