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 초단편(엽편)SF의 고전인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톰 고드윈(by Tom Godwin), 1954)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차가운 방정식>의 한글 번역본을 읽을 수 있는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반드시 원전을 먼저 일독하신 후에 속편인 저의 작품을 감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www.sciencepeople.co.kr/board/?mod=document&uid=1323&kboard_id=1

 

“... 나는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난 안했어요 ...”

 

바튼은 방금 전에 자신이 에어록 밖으로 몰아내 죽인 소녀의 환청을 떨쳐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규칙에 따른 것이었고 그 자신과 우덴 제 1기지 개척자 6명의 생명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그토록 가녀리고 청초한 소녀가 맞이한 비참한 운명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 때 갑자기 둔중한 기계음이 들렸다.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긴급연락선의 조종사로서 그는 선내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의 의미를 구분하고 파악할 줄을 알았다. 그 묵직한 기계음은 바로 에어록 내부 문이 열릴 때 나는 소리였다.

춥고 어두운 우주 한복판을 홀로 항해하고 있을 때 그 자신이 조작하지도 않은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만 해도 충분히 으스스한 일인데 하물며 에어록은 불과 몇 분 전 가슴에 한을 품고 죽은 소녀가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곳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에어록 쪽을 보았을 때 그곳에는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길지 않았던 인생동안 그토록 심장이 멈출 만큼 놀랬던 적은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에어록 입구 앞에 우주복을 입은 채로 서있는 사람은 섬뜩한 상상 그대로 아까의 그 소녀, 마릴린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돌아 앉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지?”

소녀는 헬멧을 살짝 개방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어록의 바깥문이 열렸을 때 밖으로 쓸려나가다가 무엇인가에 걸렸어요.”

아까 뭔가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그 때문이었나 보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진공인데 내장이 파열되지도 않고 입으로 폐가 튀어나오지도 않더군요.”

물론 그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간의 잘못된 상식과 달리 인체는 진공에 노출되어도 금방 터져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소녀가 신파조로 온몸이 터져서 죽을 거라고 흐느꼈을 때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호흡만 참을 수 있다면 1분 정도까지는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에어록 안에 고정되어 있던 우주복에 걸렸어요.”

긴급연락선도 우주선이므로 당연히 우주복이 비치되어 있다. 질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닐 섬유와 플라스틱 헬멧으로 만들어진 초경량 우주복이다. 우주선에는 대개 우주복을 착용하는 드레싱 룸이 별도로 있고 거기서 우주복을 먼저 입은 다음 에어록으로 들어가지만, 긴급연락선에는 그럴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예 에어록 안에 우주복을 걸어 두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빨리 우주복을 입고 산소 봄베를 틀었어요. 숨이 막혀 거의 죽을 뻔 했죠.”

정말... 정말이지 운이 좋았군?”

에어록을 개방해서 사람을 날려 보냈는데 이런 식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에어록을 열고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도 운이 좋았지요. 레버를 당겨보니까 내부 쪽 문이 열리더라고요.”

보통 우주선은 내부에서 열어줘야 에어록을 열 수 있지만 긴급연락선은 1인용이기 때문에 에어록 쪽에서도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 나갔던 탑승자가 다시 에어록으로 돌아왔을 때 안에서 열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지금 1910분이 지났나요?”

그래. 이미 1920분이 넘었어. 그런데도 아가씨가 계속 이 연락선에 타고 있으니 우리와 우덴 제 1기지의 개척자들은 모두 다함께 죽게 생겼고!”

소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내뱉듯이 말했다.

꼭 모두 다 죽지는 않아도 돼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저씨 몸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죠? 저보다는 확실히 더 무거우시죠?”

소녀의 엉뚱한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곧 소녀가 말하려는 의미를 눈치 채었다. 그는 체구가 건장해서 80 킬로그램이 넘었다.

아가씨가 하려는 말은.....?!!!”

그래요. 1910분은 아저씨가 이 긴급연락선에 타고 있을 때 감속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었죠. 하지만 몸무게가 훨씬 가벼운 저만 이 우주선에 타고 있다면 필요한 연료가 훨씬 적어지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소녀는 자기 대신 그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 죽으면 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로서는 당혹스럽고, 어이가 없으며, 분노가 치미는 이야기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이런 상황이 된 것은 순전히 아가씨가 이 우주선으로 밀항을 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나더러 죽으라고?”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는지 소녀는 잠시 답이 없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의 억울한 심정은 저도 알 것 같아요. 하지만요 ... 지금 문제는 우리 둘 가운데 누가 죽어야 하느냐가 아니에요. 제가 지금 곧바로 죽으러 다시 나간다 해도 어차피 연료가 부족해서 아저씨는 우덴에 착륙하다가 죽게 되실 거에요. 1기지의 여섯 개척자들도 함께요. 하지만 저 혼자 이 우주선에 남게 되면 제 질량은 아저씨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연료 부족 없이 착륙할 수 있어요. 우덴 제 1기지의 개척자들도 살아날 거고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사실이었다. 1910분이 넘어서까지 소녀가 이 우주선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는 살아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차가운 우주의 방정식이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아까 했던 말을 따라해 보자면 나 혼자 죽느냐, 아니면 나와 아가씨와 우덴의 여섯 명이 함께 죽느냐의 문제라는 말이지?”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이 이미 죽을 뻔했던 경험을 해봤으니 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상황인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만 따져 보자면 백번 옳은 이야기였다. 당장 총으로 저 소녀를 죽이고 에어록 밖으로 던져버린다 해도 그가 살아날 방법은 전혀 없었다. 긴급연락선은 우덴 상공에서 연료 부족으로 추락해 버릴 것이다. 치료약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우덴 제 1기지의 개척자들도 모두 죽은 목숨이고. 반대로 그가 지금 에어록 바깥으로 나가 죽어준다면 (정확히 몇 시 몇 분까지 시간 여유가 있을지는 계산해봐야 알겠지만) 소녀의 몸무게는 그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착륙까지 연료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논리보다 더 완강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왜 내가 죽어야 하는데. ? 아가씨의 철딱서니 없는 밀항 때문에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고.”

아저씨에게는 정말 미안해요. 그래요,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어떻게 하더라도 아저씨가 살아날 길은 이제 없다고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냉혹한 현실을 잘 알았다.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주선 조종은 어떻게 할 건데? 착륙은 어떻게 할 거고?”

“1910분에 우주선 조종을 마쳐놓지 않으셨어요? 우주선은 자동 유도로 착륙한다고 들었어요.”

대부분은 미리 세팅된 대로 자동으로 착륙하지. 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숙련된 조종사가 수동으로 조종해야해. 그 때문에 긴급연락선에 사람이 탑승하는 거고!”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돌발 상황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겠죠. 운명일 따름이에요. 저는 자동으로 착륙하는데 운을 걸어보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차피 모두 죽을 거니까요.”

그는 말문이 막혔다. 소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운 좋게 수동 조종 없이 자동으로 착륙하기를 바란다면 소녀와 우덴 기지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그가 계속 연락선에 타고 있으면 100% 모두 죽음 뿐이었다.

논리가 막다른 곳에 다다른 순간 우주사나이는 감정을 모두 터뜨리며 폭주해 버렸다.

그렇게는 못하겠어! 어차피 죽을 입장이지만 억울해서 나 혼자는 못 죽겠어! 난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죽더라도 지옥으로 너를 함께 데리고 갈 거야!”

소녀는 슬픈 듯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갑자기 헬멧을 도로 닫고 입고 있던 우주복의 안전케이블을 난간에 걸어 잠근 다음 손을 들어 벽에 있는 레버를 움켜쥐었다. 그 레버는 에어록을 개폐하는 조종간이었다. 소녀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왜 아까부터 에어록 바로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주복을 계속 착용한 채로 이야기했는지 이유를 그는 깨달았다.

에어록을 개방해서 나를 우주로 날려 보낼 셈이로군?”

아저씨는 아까 저처럼 스스로 에어록에 들어가실 것 같지 않아요.”

지금 무방비 상태로 에어록을 열면 기압차 때문에 그는 순식간에 우주선 밖으로 빨려나갈 것이다. 우주복도 입지 않았으니 그 상태로 진공에서 1~2분 후면 죽음이었다. 소녀는 우주복을 입고 있고 안전케이블도 우주선에 묶어 놨으니 그가 날려가 버린 뒤에 천천히 조처를 하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살아나도 아가씨는 지구에서 체포되어 사형감이야. 그 에어록을 여는 순간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긴급연락선 조종사를 살해하게 되는 거라고!”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칼데아네스의 판자 이야기 아시지요? 아마 저는 처벌받지 않을 거에요.”

비록 진짜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우주선 승무원일지라도 뱃사람이라면 칼데아네스의 판자 이야기는 누구나 다들 안다. 해상의 긴급 상황에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다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아마 저 소녀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길고 지루한 재판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사형당하거나 오랜 동안 징역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배심원들은 저 청순하고 가녀린 소녀를 동정할 테고 연약한 소녀에게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빼앗긴 건장한 우주사나이는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저씨 정말 미안해요. 저는 지금 시간여유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어요. 어쩌면 바로 지금 제 몸무게로도 연료가 부족해지는 시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더 기다릴 수 없네요.”

소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플라즈마 총을 꺼내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늦어버렸다. 에어록 양쪽 문이 동시에 열리며 엄청난 힘으로 공기가 빨려 나갔고 미처 총을 겨냥하기도 전에 그는 우주공간으로 튕겨나갔다. 우주공간으로 쓸려나가며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전히 가녀린 소녀의 천사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우주는 생각대로 추웠고, 차가왔고, 냉혹했다. 진공의 공포 속에서 숨이 다해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 사탄은 원래 천사였다지? ...’

 

김달영

land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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