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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되불러요

2020.02.27 21:5902.27

날씨가 좋아요. 하늘이 예뻐요. 꽃이 예뻐요. 바람이 불어요. 소풍을 나왔어요. 서로 손을 잡고 웃었어요. 날씨가 좋아요. 행복해요. 그런데 우주선이 왔어요. 긴 사람들이 내렸어요. 눈도 코도 없는 사람들이 우릴 잡아가요.

 

*

 

“다음, 109호!”

크고 무서운 문 너머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곰돌이’는 긴장한 눈으로 발을 옮겼다. 곰을 의인화했다거나 귀엽게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속에는 솜을 채우고 겉은 털로 북슬북슬하고, 코와 눈은 까맣게 반질거리는 진짜 곰 인형이었다. 그런 것이 상처 입고 겁먹은 채, 쇠고랑을 차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자신을 부른 자들을 마주했다.

“아악!”

곰돌이는 참을 수 없었다. 같이 끌려 올라온 친구들과 이미 이야기했다. 그리고 먼저 그들을 만난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 아니 눈은 없었다. 창백한 그 얼굴에는 코도 없었다. 어떤 구멍도 없었다. 오직 입, 입, 그리고 입이었다. 낮고 넙데데한 얼굴 대부분을 잡아먹다시피 달라붙은 입. 커다란 입! 그들이 씩 웃었다.

“109호는 채집 당시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는군.” 그것 중 하나가 서류철을 훑었다. “유용하겠어.”

유용이라니? 무슨 소리야? 곰돌이는 엉엉 울고 싶어졌다.

“소풍이라, 더할 나위 없지.” “이 행성은 마음에 드는군. 대부분의 주민이 활동적인 것 같아.” “그러게 말야. 회색 빌딩 안에 각자 옥수수 낟알처럼 처박혀있는 대신.” “그만. 109호부터 처리하고 계속하지.” 잠시 고요해졌다.

“109호,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지?”

곰돌이는 벌벌 떨면서도 조금 전 떠올린 것을 말해주었다. 커다란 얼굴과 거기에 달린 커다란 입. 푸하하. 떠들썩한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 안 되지. 전혀 묘사되는 게 없잖아. 어떻게 창백한지, 얼마나 입이 큰지, 이빨은 그 모양이 어떻고 크기가 어떤지, 혀는 또 얼마나 독살스러우리만치 붉은지 자세히 생각해야지.” “뭐,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구태여 채집할 까닭이 없잖아.”

그건 그래. 그들은 조금 작게 웃었다. 벌어진 입을 따라 절취선처럼 머리를 도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인칭으로 먼저 해볼까?” “격 부여는 너무 이르지 않아?” “일단 소풍의 환경을 알아내 보자고.” “그래. 어차피 109호 수준부터 알아야 해.”

수수께끼 같은 말만 이어졌다. 곰돌이는 내내 두려움에 떨며 그들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자, 설명해 봐.”

그 간단한 말이 갑자기 어떤 마법적인 연유로, 곰돌이의 말문을 트이게 만들었다. 더듬더듬 당시의 기억을 곰돌이는 불러왔다.

“날씨가 좋았어요. 바람이 불었고요. 같이 소풍을 갔고요.” “그만!”

그들 중 하나가 팔을 바짝 세워 말을 막았다.

 

“날씨가 좋았다라, 어떻게 좋았지?” “하, 하늘이 맑았어요.” “어떻게 맑았는데, 꼭 무엇처럼 맑았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그들 중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손가락에 침을 찍어가며 서류를 넘겼다. 그들의 몸은 앙상하다 못해 칼끝처럼 곤두세워진 채였다. 손끝을 핥을 때마다 혀가 낭창낭창 난도질당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날씨가 좋았다, 라고 했는데 그 바로 뒷말은 바람이 분다는 말이었어. 이 진술은 무형의 힘이나 생명력과 같은 추상적 관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부정적 기상징후를 나타내는 예표야.” “산들바람, 같은 용어로 교정하는 건 어때?” “너무 포괄적이야. 차라리 거기에도 대유물을 하나 더 넣어. ‘아가의 살결처럼 보드라운’은 어때? 문장 생장점 잘 체크하고!”

“같이 소풍을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행복했는데.”

곰돌이는 그만 왈칵 울어버렸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긴 사람들이 그것을 살폈다.

“그래, 그 이야기도 안 했군. 타인과의 관계 설정.” “배경은 일단 보류하자고. 그와, 아니 그녀인가? 너 본인은 그야 그녀야?” “상관없어. 고작 도입 아닌가? 적당히 포근한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타인이야 알아서들 우상화하면 돼.”

같이 있던 개체는 너와 어떤 사이이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것으로 일축하여 입들은 곰돌이에게 물었다.

“몰라요!” “그런 걸 어떻게 모를 수 있어!”

뒷말은 고삐를 죄듯 바짝 따라붙었다. “소중한 사이였을 텐데?”

“그래서 더 몰라요!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해요?”

“아, 하지만 표현해야 해. 그래야 이해가 되거든.” “누가요? 당신들이?”

곰돌이는 콧물을 쏟아가며 꺽꺽거렸다. 그래서 입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을 놓쳤다.

“아니, ‘저들’이. 그 이야기는 하지 말지. 더 중요한 건….” 저들은 항상 봐야 해. 이해해야 해. 납득이 되어야 해. 입 중 하나가 제 머리통을 끌어안고 되뇌기 시작했다. 입술 주름보다도 얇은 팔꿈치가 그만 똑 부러질까 걱정되었다.

사실 나도 알아. 대부분은 거짓말이야. 한 문장으로 어구로 실은 이 세상의 무엇도 제대로 요약할 수 없어. 그렇지만 어쩔수없어저들이보고만족하고이해하려면그럴싸한척모든걸덜복잡하게

“당장 끌어내! 슬럼프가 더 번지기 전에!”

곰돌이는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난리를 잠자코 보았다. 눈물 자국이 아직 화끈거렸다. 새로운 긴 사람이 끌려나간 이의 자리를 대신했다. 소란은 가라앉았다.

 

“‘저들’이 대체 누군데 그래요?” 울먹이며 곰돌이가 물었다.

“당신들보다 무서운 사람들인가요?”

“대답하지 않겠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래.” 두 번째였다. “이제 거기까지만 하자고, 안 그래? 우리 걱정은 우리가 하지.”

“저들이 왜 이해해야 하는데요?” “저들은 항상 이해해야 해! 그냥 그럴 뿐이야!”

발칵 자리를 박차고 긴 사람 중 하나가 일어났다. 입술과 혀와 잇몸에 피가 몰렸다. 울컥울컥 온몸을 비틀었다.

“‘그들은 사귀는 사이였다’라 이야기하면 저들은 알지 못해. ‘책을 두고 와 우연히 옆자리 학생의 것을 함께 보다가 관계가 싹튼 사이였다’라거나 ‘오래전 절판된 책을 헌책방에서 찾던 중 서로 같은 책을 찾고 있었음을 알게 되며 눈짓을 교환하였다. 둘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같은 식으로 말해줘야만 저들은 비로소 만족할 수 있어!”

다른 입도 가슴을 두드리며 읍소했다. 등뼈 부러지는 소리가 민들레 씨앗처럼 튀어나왔다.

“‘그날은 날씨가 좋았다’라 이야기하면 저들은 성을 내기 시작해. 그리고 탈수하듯 우릴 쥐어뜯고 닦달하지. 그들은 멈추지 않아. 그날이 여느 다른 날이 아닌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고즈넉한 구름이 새하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가는 와중 마을 아이들이 떼로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 짓는 냄새를 품은 따스한 바람이 들꽃과 잡초를 간질이는 어느 날이었다.’가 되기 전까지!”

곰돌이는 기가 죽었다. “하지만, 하지만 난 지금이 좋아요. 이해하지 못해도 좋잖아요.”

“좋지 않아. 네가 얼마나 어떻게 왜 좋은지 저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든. ‘무엇만큼’ 좋은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좋은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왜’ 좋은지 넌 이해받아야 해. 심지어 네가 이해받지 않아서 좋다는 것조차 얼마나 어떻게 좋은지 넌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해!”

“하지만….” “도돌이표는 그만해! 이젠 109호 개인의 격 부여로 넘어간다.”

곰돌이를 부추기던 보이지 않는 힘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나 열심히 소풍 이야기를 했는지 얼떨떨했다. 그런 곰돌이를 앞에 두고 입들은 일제히 서류를 뒤적였다. 침을 짜내느라 내는 역겨운 ‘쯥쯥’ 소리, 서류를 팔랑이는 소리가 한동안 방을 메웠다.

 

“무릎을 다치는 걸 무서워하는군. 왜 그렇지?” 첫 질문부터 곰돌이는 움찔했다.

“마, 말하지 않을래요.” “말해야 해! 단서가 던져진 이상. 그것이 이곳의 법칙이다.”

과연,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힘이 곰돌이의 입과 혀를 대신 움직였다.

“어릴 때 동산을 뛰어놀다가 무릎을 돌부리에 찍혔어요. 걷지 못할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아직 흉터가 남았어요.”

“좋은 알레고리가 되겠는걸. 격 부여 단계에서 할 일은 아니지만.” 입 중 하나가 환호했다.

“일단 첨부해놓고 진행하지. 다들 불만 없지?” “그래. 아무튼 그런 상황이 있었다면, 앞으론 반드시 네 무릎을 희생해야만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격을 부여해야겠어.”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 무릎을? 소중한 사람? 곰돌이는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잔인한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왜 그러는 거예요?” “질문은 우리가 한다. 다음으론…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면 꼭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성격이로군. 맞나?”

, 맞아요. 곰돌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힘겹게 끄덕였다. “좋아. 넌 어떤 물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려다가 예상치 못한 곤경에 휘말리게 될 거야. 그리고 수도 없이 되뇌겠지.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갈걸!’”

“네? 왜, 왜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잘못은 하지 않았어. 그게 묘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연달아 곰돌이를 몰아세웠다.

“또 여기엔 네가 평소 성격이 둥글어서 대체로 관계가 원만하고, 딱히 원한을 산 사람도 품은 사람도 없다고 되어 있어. 무엇보다 사리사욕이 적어 제 것을 곧잘 나누는 성격이라고도. 마을의 분위기 자체가 이런 식인가? 전개에 따라 대조적 격을 부여해야겠군. 조만간 이곳은 아무도 누군가에게 뭔가 선뜻 나눌 수 없는 곳이 될 거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곰돌이의 눈과 코와 귀로 솜이 줄줄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나오지 않아. 이렇게 괴로운데. 이렇게 아픈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일이야 많지. 재해재난은 어때? 폭설, 홍수…. 네가 기르던 귀여운 토끼를 죽이고 그 살을 발라 먹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 죽게 만들 거야. 마지막 통조림을 두고 어제까지 하하호호 웃던 이웃의 모가지를 비틀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겠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진실도 좋지. 넌 조만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짓을 한 사람으로 저들에게 받아들여질 거야. 작은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지. 널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있다 한들 마을에서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이들일 거다. 오해가 풀리는 건 네가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몰아 붙여진 뒤이다.”

“나한테,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대체 왜!”

 

이제까지 흘린 울음은 그에 비하면 이슬 한 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곰돌이는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펑펑 울었다.

“우린 당신들이 누군지도 몰라요! 당신들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그래서 더 좋아. 새로운 환경과 대상은 언제나 길들이는 맛이 있거든.”

“우리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우린 행복했어요, 제발, 아무한테도 이해 안 되어도 좋으니 예전대로만 살게 해 주세요!”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우린 멈추지 않는다. 절대로.”

“뭐든지 드릴게요. 제발 우릴 가만히 놔둬 주세요. 우릴 괴롭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우리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다. 네 괴로움이다. 너희 모두의 결핍이고 콤플렉스고 아이러니이고 죄책감이야. 일어날 법하지만 결코 명쾌한 해답이란 존재할 수 없는 문제를 너희 모두에게 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린 사소한 생채기를 영혼의 고통으로 평범한 일상을 피 말리는 고난으로 순수한 사랑을 추악한 욕망과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의 집합으로 뒤바꾼다.”

대체 그럼 당신들은 누구예요! 누군데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느냐고요! 마지막 말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절반이었다.

“우린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그건 좋은 것이다.”

곰돌이는 입만 벙긋거렸다. 가슴이 텅 비어 숨은 쉬더라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못 믿겠나?” 그들은 서로를 곁눈질했다. 그러는 내내 그 거대한 입을 나불거렸다.

“이야기꾼만큼이나 잔혹한 이가 또 있을까?” “우리는 모두가 멸망한 뒤 도서관에 홀로 남은 남자의 안경을 부러뜨렸다.” “소원 하나를 바란 이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을 주었다, 세 개를 바란 이들은 항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미래를 보는 이들은 오직 스스로의 파멸만을 보도록 만들었다.” “앞선 자는 거꾸러지도록, 뒤처진 자는 처벌받도록 만들었다.” “쥔 것은 놓치도록,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순수한 악이 선의로 둔갑하고, 순수한 선의는 항상 부작용을 불러오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규칙이다. 이야기꾼의 율법이다. 이야기란 지금과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이다. 달라지고 싶은, 벗어나고 싶은 지금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너희의 오늘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자, 격 부여가 얼추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시술을 시작한다.”

곰돌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좀 들어요?” 곰 인형 특유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09호는 눈을 떴다. 몇몇 곰돌이들이 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몇 년도죠? 대통령이 누구예요?”

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곰돌이는 어리둥절하여 머리를 매만졌다. 단단하고 길쭉한, 무엇이든 거기 있어선 안 될 어떤 인공의 물체가 박혀 있었다. 어깨에도, 가슴에도, 팔에도 다리에도, 촘촘히 긴 사람들의 기계가 박혀 있었다. 머릿속으로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의 지식이 분별없이 흘러들어 왔다. 독한 약물이 도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독한 약을 맞아본 적도 없는데!

“문장을 꾸미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격 조사의 목록―처럼, 듯, 같이, 인 양, 마냥, 아아!”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저들이 불어넣은 지식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아요!”

그래, 난 어떤 사람이지? 109호 곰돌이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긴 사람들은 그러나 그에 대한 답 또한 예비해 두었다. 그들이 툭툭 휘갈긴, 109호가 가장 갈등하고 고뇌하고 자책하고 마침내 자신을 잃고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온갖 극단적인 상황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수백 번 구르고 수천 번 넘어지면서 거듭거듭 후회하고 울부짖는 제 모습이 떠올랐다.

깨닫고 보니 맨손으로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재봉선이 구불구불 제자리를 빠져나왔다. 벌어진 상처에서 솜이 눈물처럼 퐁퐁 솟았다.

“내가,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그렇지 않아, 될 수도 있는 너일 뿐이야! 전부 저들이 불어넣은 거니까!”

“하지만 난 나쁜 사람이에요….” “누가? 무엇에 대해? 주변을 둘러봐! 설령 정말 그렇다 한들, 저들보다 사악하기라도 하겠나? 그걸 기억하라고!”

생각의 탐침이 갈팡질팡 돌아다녔다. 억지로 주입 당한 온갖 비유와 상징들. 제가 갇힌 곳. 축축한 지하 감옥. 진녹색 물이끼가 핀 미끄러운 돌 위로 젖은 흙냄새가 풍기는 곳. 오래된 내장처럼 좁고 말라비틀어진 복도를 따라 녹슨 쇠의 냄새와 수감자들의 단말마가 메아리치는… 109호 곰돌이는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이 온갖 표현들. 이건 저들처럼 생각하는 거야! 원래의 나처럼 세상을 봐야 해!

“그래, 잘하고 있어!” “우리 머릿속의 기억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봐야 해. 저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가면이고, 보석의 변채(變彩)처럼 외따로 떨어진 무수히 많은 현실의 어떤 가능성… 젠장! 벌써 다시 도지고 있잖아. 빨리 다시 빠져나가자고!”

“빠져나간다고요? 다시?” 109호 곰돌이는 찬찬히 제 앞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래, 우린 여기 갇힌 사람들을 빼내러 온 거야.” “왜 그렇게 놀라지?”

“다, 당연히, 이곳에 저보다 먼저 갇힌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자넨 눈을 뜨자마자 우리의 얼굴을, 걸친 옷을, 갖고 들어온 장비들을 모두 보았을 텐데. 잘못 보기엔 너무 분명한 것들이지. 어째서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진술하기 전까지 우릴 그저 동료 수감자로 착각한 거야?”

불현듯 109호 곰돌이의 뇌리를 스치는 광경이 있었다. 그들. 긴 사람들. 입뿐이 달리지 않은 그 얼굴. 무엇도 직접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오직 말함으로써 느낄 수밖에 없는 진술의 노예들. 온몸의 보푸라기가 오소소 일어났다.

“나도, 이제 저들처럼 변하는 건가요? 내 눈도, 코도….” “절대로 그렇지 않아!”

리더로 보이는 곰돌이가 강하게 부정했다.

“우리가 한때 이곳에 갇혀있던 건 맞아. 하지만 우린 일찌감치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네. 그리고 바깥에서 저항군을 만들었지.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여기 새로 갇힌 이들을 빼돌리는 거라네. 지금의 자네처럼 말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찌나 놀라운 사실이었는지 곰돌이는 그만 벌떡 일어나 버렸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여전히 놀란 것이 더 컸다.

“그래요, 서서히 저들이 날 이리로 집어넣던 게 떠올라요. 하지만 그 삼엄한 경비와 함정들. 아아, 지옥이라도 이곳보다는 탈출하기 쉬울 거예요!”

“그렇지 않아, 우리에겐 방법이 있네!”

그 방법이란 게 뭔가요? 라고 물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들은 굴었다. 그래서 109호 곰돌이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물었다.

“음, 그건….”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곧이곧대로 하자고. 어차피 이걸 못 하면, 우리와 한 배에 탈 자격도 없어.”

배에 탄다니? 불필요한 비유법 주의하도록 해. 긴 사람들이 찾아오는 수가 있어. 소소한 지적을 받은 뒤 저항군 곰돌이가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방법이 있다네.” “네, 그게 뭔지 좀 알려줘요. 나도 같이 여길 빠져나가려면 알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우린 그 방법을 진술하지 않을 거야.”

머리가 백짓장처럼, 아니 아무 처럼도 아니야. 그냥 하얘졌어. 109호 곰돌이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왜요?” “왜가 아니야, 한번 생각해보게. 우리에겐, 우리 모두에겐 계획이 있고 방법이 다 있어. 하지만 우린 그걸 진술하지 않는 거야. 자, 따라 해보게, 얼른!”

머리가 지끈거렸다. 솜이 쭈그러들어 설익은 면발처럼….

“아냐, 아니라고! 난 설익은 면발을 제대로 본 적도 없어! 이런 말도 안 되는 표현은 하지 않겠어!” “그래, 바로 그거야!” 저항 곰돌이들이 일제히 한두 마디를 던졌다.

“머리가 아픈 건, 자네가 지금 저들로서는 버틸 수 없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야!” “좀 더 노력하게, 맞서 싸워!” “우리에겐 계획이 있지만 결코 진술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계획은 거기 있어! 따라 해보게, 그리고 이해해야 해. 이게 저들에게 있어 행사하는 힘을!”

그리고 109호 곰돌이는 깨달았다. “알아냈어요! 아, 알아낸 것 같아요, 아마도.”

나머지 곰돌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역시 탈출하기 힘든 곳이에요, 이곳은. 이제 분명히 다 기억이 났어요. 썩은 시체가 떠다니는 늪, 상어 수조, 레이저망, 발판을 누르면 굴러오는 바위, 독침 발사기, 전기 울타리, 식인 식물, 외눈박이 거인 로봇, 면도날이 달린 철조망,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압력 감지 바닥, 산성액을 가득 채운 구덩이, 거기에 요소요소 어김없이 배치된 긴 사람들의 경비. 더해 지문, 홍채, 걸음걸이, 음성인식 등 온갖 종류의 보안 관문을 어떻게 통과하지요?”

 

 

긴 사람들의 기지에 설치된 수없이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109호 곰돌이와 그의 동료들은 한적한 들판을 걷고 있었다.

“놈들의 본거지에 중요한 단서가 있어.”

저항 곰돌이는 분명 일찌감치 했어야 할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놓고 있었다. 109호 곰돌이는 중간중간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이로써 저항 곰돌이의 대사가 너무 길어질 일도 없을뿐더러 이 대담이 정보전달의 측면에서 보다 완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이곳으로 불러낼 수 있는 열쇠야.” “그들이 말한 ‘저들’ 말인가요? 항상 보고 또 납득해야 하는 존재들?”

“그건 아니야.” 저항 곰돌이는 단 한 마디로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조사에 따르면 그 ‘저들’은 결코 이곳으론 올 수 없대. 그렇기에 긴 사람들은 저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피부에 와 닿는 위협으론 느끼지 않아. 숭배의 대상에 가깝지. 하지만 긴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면서도 실제로 이곳에 올 수 있는 존재들이 또 있다고 해.”

“알면 알수록 더 놀랍군요… 우리 머리 위에 이런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니.” “발 조심해!”

낭떠러지로 돌멩이들이 후두둑 굴러떨어졌다. 떨어지는 소리는 한참이 더 지나서야 들렸다. 109호 곰돌이는 동료들의 손을 붙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주의하도록 해. 놈들의 우주선을 벗어난 지 어언 3년, 그동안 우리 모두가 함께 한 노력을 헛되이 해선 안 되지.” “그 3년 동안 이런 대화를 우리는 이제 처음 하는 건가요?”

“다 왔다. 저 다리만 지나가면 금방이야.”

깎아지른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점선이 하나 있었다. 군데군데 발판이 빠진 나무다리였다. 손잡이가 되는 줄은 다 삭고 낡았으며 널빤지마다 박은 징은 얼마 있지도 않은 것마저 검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한편으로 그렇게 금세 무너질 것처럼 늙을 동안 줄곧 같은 자리를 지켰다는 것부터가 그것의 유용성을 입증하는 사실이었다. 곰돌이들은 조심스레 접근했다.

 

“멈춰라!”

긴 사람이 한 명, 성큼 걸어 나왔다. 머리가 송두리째 찢어질 것처럼 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가려는 자는 세 가지 이야기를 내게 바쳐야 한다!”

“이, 이야기라고요?” 안 그래도 혼비백산한 곰돌이들이었다. 그나마 알기 쉬운 말을 듣자 혼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너희가 우리에게 억지로 준 걸 이제 와서 다시 가져가겠단 거냐?” “그럴 리가.”

긴 사람은 껄껄껄 웃었다. “그것들은 전혀 새롭지 않잖아. 이곳의 내게 바쳐야 할 것은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것으로 세 개를 답한다면 이곳을 지나가게 해 주지.”

해보죠. 기나긴 논의 끝에 곰돌이들은 결정했다. 주인공과 가장 연이 깊은 리더 저항 곰돌이부터 앞으로 나섰다.

“세 가지 이야기를 하여라!” “새, 새롭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렇다!” 긴 사람은 젓가락만큼 가느다란 목을 용케 주억거렸다. 좋아, 좋아. 아주 특이하고 이상한 걸 말하면 돼. 그거면 되는 거야. 리더 곰돌이는 흉터를 어루만졌다. 109호 곰돌이와 함께 치른, 젖소 평원 대전투의 흔적이었다.

“좋아, 이건 어때!” 리더 곰돌이가 입을 열었다.

“과학자들이 누구를 납치하는데, 그 이유는… 실험을 하는 건데, 그렇게 되어서 그 납치된 사람이… 자기가 외계인이 된다. 세계평화를 불러오는….” “1980.”

“뭐? 뭐라구?” “1980이라고.” 긴 사람은 짤막하게 되풀이했다.

“그게 뭔데?” “됐으니 다음 걸 이어서 해 봐.”

“…좋아.” 미심쩍어하면서도 리더 곰돌이는 다음 이야기를 준비했다.

“정전이 자주 일어났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유는 지하에서, 전기 에너지를, 어, 외계인! 그래 이번에도 외계인인데, 어, 아까랑은 다른 외계인이야. 눈이 탁구공만큼 크지. 그런 것들이 전기를 빼돌리는데, 어, 커다란 도마뱀이랑….” “1954.”

“숫자가 작아졌잖아. 점수인가? 그 숫자랑 내가 지나갈 수 있는지가 관련이 있나?”

“결정하는 건 나야.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해 봐.”

좋아, 시원찮다는 거지. 리더 곰돌이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109호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수없이 많은 암살 시도의 기억을 곱씹었다.

 

“그래, 네 반응이 영 미적지근한데, 이거야말로 반드시 천구백보다 훨씬 높은 점수가 나오도록 하겠어!”

긴 사람은 잠자코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주인공이 어느… 어, 골짜기에 가. 이런 곳처럼! 그런데 그 골짜기엔 박사가 살고 있어. 어… 눈이 하나밖에 없는 박사야! 그리고 옷은 거의 헐벗었고, 엄청나게 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주인공은 사실 거인이랑 아는 사이였어. 그래, 주인공의 아빠….” “1940!”

으아아아

그 비명의 끝조차 곰돌이들은 듣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그 최후가 똑똑히 기억되지 못한 채, 리더 곰돌이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심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긴 사람은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리곤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저 자식이!” 행동대장 곰돌이가 분기탱천하여 튀어 나갔다. 109호 곰돌이는 아직도 달이 없는 밤의 일이 떠올라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내게 세 개의 이야기를….” “새로운 거라고, 응? 오냐 여기 받아라! 죽은 칠면조가 마법으로 다시 살아나 걷고 말하고 총을 쏘는 이야기다!”

“2008.” 더 해보시죠. 하고 말하듯 긴 사람은 손짓했다. 국수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늘하늘 춤추었다.

“이, 이번에도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바퀴야! 혼자서 굴러가는 바퀴가 쳐다보기만 하면 뭐든지 펑펑 죽는…!” “2011.”

올랐잖아! 저만치서 일을 지켜보던 곰돌이들이 수군거렸다. 작지만 점수가 올랐어. 리더와는 달라!

“마지막, 마지막은, 어… 그, 그래. 작은 사람들과 개가 나와. 그런데 걔네는 인형은 아닌데, 인형처럼 원래 작아진 거야. 뇌는 사라졌지. 그리고 다른 큰 사람들은 원래대로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게 물감처럼 번지면서 그대로 따라해. 그래서 이 작은 사람들은….” “1936!”

행동대장의 비명은 그나마 짧고 간결했다. 다만 메아리는 남았다. 아아, 또 줄어들었잖아. 도저히 모르겠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바, 반대로 된 낚시야! 물에서 갈고리가 나와 사람들을 낚아 가!” “1986.” 으아아아

“벽을 미는데 다른 벽 대신 문이 있고, 소뼈가 검은 망토를 입고, 미친 도둑들이 신혼부부를 습격하는데….” “1981.” 으아아아

“립스틱을 바르고 새장에 갇혔다가 같은 사람들이 일제히 춤을 추는데 모든 게 흔들려서 똑바로 설 수가 없어서 결국 립스틱 광고가 되는….” “1963.” 으아아아

“로봇을 만드는 게 유언이었어. 근데 그 유언은 자기랑 똑같은 로봇을 만드는 거야!” “1963.” “제, 젠장. 그럼 이건 어때? 착륙하는 비행기가 땅에서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하는데, 그게 바로 자기들 비행기인 거야!” “1963.” “아침이 되었는데 해가 뜨지 않아, 아니, 해는 떴어. 그런데 여전히 깜깜한 거야. 그리고 알고 보니 전 세계에서 우리 마을만 딱 그렇게 어두운 채로 있는 거야!” “1963, 아니 4.”

“아까부터 계속 같은 숫자만 말하고 있잖아! 내 말을 듣긴 하는 거야?”

어쨌든 유언으로 삼기엔 형편없는 말이었다. 긴 사람은 다른 곰돌이들에게 손짓했다.

“보, 복화술 인형….” “1945, 1962, 1964, 1978, 1990, 1996, 2004, 2007!” 으아아아

“젠장, 우린 다 끝났어!” 동료 곰돌이가 울부짖었다.

“점수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어.” “안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거야!” 곰돌이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우린 어떻게 해도 저 다리를 건널 수 없어!”

공황에 휩싸인 동료들을 109호 곰돌이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울고 절규하고 비명 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어디선가 아련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의 눈빛이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졌다.

“…내가 해볼게.”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지만 109호 곰돌이는 선언했다. 긴 사람의 앞에 섰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세 가지 새로운 이야기, 그래. 알았어.”

긴장한 기색으로 109호 곰돌이는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어디선가 모래 섞인 바람이 한 줄기 불었다. 잡초 둥글게 뭉쳐진 것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긴 사람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다가 말을 절었다. “어, 어? 뭐라구?”

“빨갛고 노란 소리와 오지 않는 냄새. 시간이 흐르지 않고 시계는 껌뻑껌뻑 있다.” “뭐, 뭐야 그게, 뭐야?”

“열어야 열리지 않는다. 한 적 없는 반역의 계획을 망원경으로 이동해 다시 눈뜰 때마다 지니는 것을 믿는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가…!”

말끝이 확 올라가다가 끊어졌다. 긴 사람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109호 곰돌이는 결과를 기다렸다. 절망에 빠져 있던 곰돌이들도 가만히 상황을 살폈다.

“후… 훌륭해!”

팝콘 튀기는 소리가 났다. 긴 사람이 제 가냘픈 손바닥을 필사적으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관절이 나가고 뼈가 자근자근, 근육이 퍽퍽 뭉개졌다. 그 커다란 입은 지진에 휘말린 초승달처럼 파르르 떨렸다.

“좋아, 좋아. 훌륭하지, 물론! 독창적이고 새로운 이야기야, 음음. 분명히 알아보겠는걸! 지나가도 좋아!” 만신창이가 된 팔로 긴 사람은 크게 몸짓했다.

“뭐야, 저게 이야기야?” 다른 곰돌이들이 수군거렸다. 호저가 가시를 뻗듯, 긴 사람이 움찔거렸다.

“그럼, 당연하지! 아주 훌륭한 이야기라고.”

“무슨 이야기인데?” 곰돌이들이 갸웃거렸다.

“음, 어, 그건 상징이야. 시대정신이라고도 하지. 시의적절한, 이 시대의 어떤 그런 정신을 담은… 포스트모더니…. 설명하기 힘들어. 안 그래? 좋으니까 뭔지 모르는, 아냐! 그게 아니야, 난 이해했어! 그 반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다 잊어!”

후닥닥 그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꽁무니에 불이 붙은 토끼처럼 겅중겅중 긴 사람의 모습은 멀어져 갔다. 이런 표현이 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지만, 미처 그런 것을 유념하지 못할 만큼 곰돌이들은 경황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곰돌이들은 생각했다.

 

“자, 이 다리 앞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요.” 109호 곰돌이가 물꼬를 텄다.

“그래요. 미처 생각을 가다듬을 여력도 없었네요. 긴 사람들이 벌써 우리 문장의 냄새를 맡았을 거예요.” 33호 곰돌이가 수긍했다. 그는 아직도 109호 곰돌이와 함께 수행한 만연의 성채 작전을 잊지 못했다.

“이제 들어가요. 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를 불러내야죠!” 놀랍게도, 75호 곰돌이의 목소리였다. “아니!” “세상에,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곰돌이들이 일제히 눈을 비볐다. 물론 제일 반가운 것은 다른 누가 아닌 109호 곰돌이였다.

“하, 하지만 어떻게…. 넌 그때…!” 말허리를 자르며 75호 곰돌이가 손바닥을 들었다. 듬성듬성 짧게 솜이 부풀어 있었다. 그가 겪었을 끔찍한 고초를 떠올린 탓에 모두 눈을 돌렸다.

“그래. 그 말대로야, 지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109호 곰돌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그, 그런 사소한 말까지 기억하다니….” “당연하지.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될 거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못 차리던 곰돌이들도 어느새 사기가 충만해졌다. 109호 곰돌이와 75호 곰돌이가 선봉에 섰다. 모두 그 뒤를 따라 씩씩하게 일어섰다.

“가자, 긴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위하여!!

말은 여럿이되 목소리는 단 하나였다.

 

 

“하하, 너무 늦기 전에 왔군!” 긴 사람의 대장이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다리를 지나가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우리의 술책이었음을 몰랐나?”

긴 사람들은 무기를 앞세워 포위망을 둘렀다. 창날은 독살스럽도록 길었고 중앙을 따라 얕은 홈이 파여 있었다. 그 고랑을 따라 칠흑색의 독액이 뚝뚝 떨어졌다.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어설플지언정 독창적인 소재와 흥미로운 전개를 고민하는 사이… 그런 것들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우리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제기랄. 어느새 차기 리더 비슷한 게 된 109호 곰돌이가 독백했다. 슬그머니 뒷걸음질했다.

“움직이지 마! 제자리에 섯!” 병졸들이 으르렁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놈도 남겨두지 말고 이 자리에서 포획하거나, 죽이도록. 쓸 만한 격들은 모조리 전사(轉寫)가 끝났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109호 곰돌이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모든 희생이, 고통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야 모두를 진정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고작 아주 조금의 시간이 모자라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니다!” 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뭐가 아니지?”

“한 마디를 나누었습니다.” 대장 옆에 선 책사가 나직하게 조언했다.

“아직 경계 레벨은 높지 않습니다. 상황이 뒤집힐 확률이 낮다는 뜻입니다. 허나 자칫 다섯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눈다면….” “알았네, 알았어. 내가 그렇게 순진해 보이나?”

대장의 손이 실없이 나부꼈다.

“네 말은 듣지 않을 거다. 우리는 이야기꾼이야. 이런 순간은, 이런 이야기는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미 눌렀다.”

사실을 분명히 아는 동료 곰돌이들보다 먼저, 긴 사람들이 질겁하여 물러났다. 그만큼의 위력이 이 방에 있는 까닭이다.

“두 마디입니다, 각하!” “뭐라고?” “그들을 부르는 버튼을 이미 눌렀다, 너희가 오기 전에!”

“세 마디입니다, 서서히 경계를….” “조용히 해, 뭐라고? 눌렀어? 어떻게?” “어떻게든. 눌렀다. 너희가 오기 전에. 왜냐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박이라기에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것뿐이다. 109호 곰돌이는 75호를 곁눈질했다. 그 간절한 표정을 보고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누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누른 것이다!” “뭔가 했더니 고작 그런 말장난이냐?”

“네 마디입니다, 각하! 위험합니다!” 대장은 책사를 밀쳐내며 109호 곰돌이에게 다가갔다.

“그까짓 얄팍한 수가 통할 줄 아느냐? 진술이 나오지 않아? 네깟 것들이 진술에 대해 뭘 아느냐? 잘 들어라, 우린 바보가 아니다. 모든 이야기란 우리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다. 철저히 우리에게 예속된 꼭두각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아직 누르지 못했다. 감히 날더러…!”

 

109호 곰돌이의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천장에서 두꺼운 섬광이 세 줄기 쏟아졌다. 개중 하나가 긴 사람의 대장을 후려쳤다. 짓뭉갰다. 신발 밑창이 흙을 고르듯 무정하고 무가치하게, 바닥의 얼룩조차 되지 못한 채 그렇게 긴 사람들의 통솔자가 떠나갔다.

“안 돼! 정말 온다!” 긴 사람 중 하나가 울부짖었다. 대장기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당황하지 마라! 자리를 지켜!” 책사가 옷섶을 펄럭이며 명령하기 시작했다. 왕을 대리하여 일정한 통제력을 행사하기도 전에 그러나, 빛은 순식간에 저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 내려온 세 명의 존재자가 있었다.

하나는 구부정한 노인, 새하얀 머리는 그나마도 거의 없었으며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있었다. 밤색 재킷과 베이지색 칠부바지 등 어둡고 차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에서는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났다. 둘은 명랑한 아이, 파스텔톤의 밝고 가벼운 옷차림에 커다란 막대사탕을 들고 있었다. 또한 누구나가 그게 있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쓰지 않는, 헬리콥터 캡을 쓰고 있었다. 셋은 애완동물과 그것의 목줄을 쥔 주인이었다. 동물은 네발짐승으로 사람의 정강이쯤 오는 크기에, 그 모습은….

“저걸 묘사해도 되는 거야?” 병졸들이 뒷걸음쳤다.

“진술하지 마라! 그냥 넘겨! 진형을 흩뜨리지 말고!” 책사가 바삐 지시했다.

목줄을 쥔 사람은 젊은 신사였다. 드높은 중절모, 흰 가죽 장갑, 한껏 멋을 부린 야회(夜會)용의 연미복까지는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자 칩 마스코트처럼 기른 꼬부랑 콧수염과 우아한 마호가니 지팡이, 외알 안경에 이르면 아무리 봐도 실용의 목적이라기보다는 가장(假裝) 행사에 참석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곰돌이들만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가운데, 긴 사람들은 침을 넘기며 바짝 마른 목을 축였다. 살얼음을 걷듯 야금야금 낯선 이들에게 접근했다.

“틈을 보이지 마라! 철저히 진형을 통제해!” 책사는 신경질적으로 딱딱거렸다. “고작 셋일 뿐이야! 충분히 제압할 수….”

“이해할 수가 없군. 지나치게 본인 경험에 매몰된 이야기가 아닌가?”

노인이었다. 몇몇 병졸이 반사적으로 무기를 놓쳤다. 쨍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독액이 바닥을 더럽혔다.

 

“다, 당황하지 마라!”

“진부하기 그지없는 공감을 억지로 유도하면서, 그것을 마법적인 문체로 포장해봤자 읽는 사람은 아무도 공감할 수 없지. 거기엔 저자 본인의 옐로 저널리즘풍 취향도 한몫 하는데, 안타깝게도 전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어. 전형적인 경험 부족이로군.”

책사의 닦달에도 불구하고 긴 사람들은 동요했다. 아예 싸울 의지를 잃고 바닥을 나뒹구는 이들도 벌써 생겼다.

“고작 툭툭 던지는 말일 뿐이야! 자리를 지켜!…” “더, 더 쩔게, 더 크게! 간지나게!”

아이는 천방지축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병사 중 한 명을 붙잡았다.

“뭐가 나와? 공룡? 레이저? 로봇?” “아, 아무것도, 가벼운 로맨스 코미디란 말입니다!”

긴 사람의 앞에 선 곰돌이가 그랬듯이, 낯선 이들 앞에 선 긴 사람도 비슷한 마법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게 뭐야? 재미도 없겠네. 왜 보는 거지? 폭발, 사건, 충돌, 전쟁. 전투씬, 더 많은 전투씬! 액션, 스릴, 설정과 제원! 그래, 우주야! 우주를 넣는 거야! 플라즈마 광선포! 시간축 역굉 미사일! 플라크리트 열공천기! 양자분해 파동확률의 비동기적 특이점 인과엔진!”

, 그게 뭔데요! 아악! 흙을 파먹는 벌레처럼 맨바닥을 기는 병졸들을 책사는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정강이가 돌연 축축했다. 보니 흰 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작은 동물이 울컥울컥 입질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가슴! 가슴! 큰 가슴! 작은 가슴! 넓은 가슴! 처진 가슴! 그것이 침을 질질 흘리며 짖었다.

“으아악! 저리 가!” 책사는 그만 체통도 잃고 마구 발길질을 했다. 동물이 캥캥거리며 물러났다. 빳빳하게 세운 고개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통석의 염을 표하는 바이오. 보아하니 이 어린 것이 그만 민폐를 끼친 것 같군요.” 신사는 걸을 때마다 건반을 두들기듯 지팡이를 짚었다. 뚜벅, 탁. 뚜벅, 탁탁. 탁탁탁탁탁.

X! X! X!

“어허,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거늘, 그만두려무나. 어린 것아.”

신사는 풍성한 콧수염을 가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당신은 무얼 만들지?” “도, 동화입니다. 별일도 없고 큰 사건도 없는, 주인공이 아이인 그냥 동화예요!”

X! X! ? X? X? X! X! 합체! 합체에에에에!

“어허, 가만히 있으라고 했거늘. 그런데 가만, 설령 어린아이라고 하여도 공통되는 생명의 분모가, 가령 욕구가 있기 마련이 아닌가?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고견을 묻고 싶네만?”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사는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 굴지 말게.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하는 것 같잖은가. 그저 어떤… 어린아이의 생리적 특질과 그 발달단계를 둘러싼 학문적 가능성이 아닌가? 가령 익기 전의 과실처럼, 여물기 전의 이삭처럼. 미숙하고 알지 못하기에 더욱 이뤄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 그것을 곁에서 알려주고 새로운 즐거움을 또 가르쳐줄 손길 말이야. 부드럽고, 은밀하게…. 아아, 첫눈의 순결을 짓밟는 쾌감이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책사는 그곳을 벗어나려 애를 썼다.

 

“미, 미쳤어.”

누가? 75호 곰돌이의 넋두리에 109호 곰돌이는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다, 전부, 우리까지 전부 다! 그런 대답이 돌아올 성싶었다.

“어쩔 수 없어.” 109호 곰돌이가 75호 곰돌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쫓기고 붙잡히고 처절한 꼴로 죽어가는 긴 사람들의 모양은 흡사 한 폭의 지옥도 같았다. “우린 너무 먼 길을 온 거야. 되돌아가려면, 때로 고통스러운 방법일지언정 써야 해.”

그렇게 일찍 자리를 뜨지도, 더 다가가지도 못한 채 곰돌이들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저희의 모든 것을 빼앗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빼앗기는 긴 사람들의 모습을. 그렇게나 사악하고 위대하던 그들의 힘이 한 줌 티끌처럼 없어지는 광경을.

그다지 길지 않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 정도인가?” 노인이 재킷 단추를 여몄다. “독자적으로는 어떤 주제 의식도 창발적 사고도 갖지 못했어. 스스로 담론을 만드는 대신 기성의 것을 소모적으로 답습할 뿐이로군.”

“우주전함이야, 그래! 양자파동포를 장착한 최종결전병기!” 아이가 긴 사람의 시신을 쥐어짜며 외쳤다. “전장은 오백 미터, 아니 팔백 미터야! 동력원은 중력장이론엔진인데, 보조동력으로는 이전에 멸망한 우주제국의 폐허에서 발굴한 마이너스형 인과진뢰추진기로서…!”

허벅지! 허벅지! 두꺼운 허벅지! 가느다란 허벅지! 탄탄한 허벅지! 말랑한 허벅지!

신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날 창피하게 만들 셈이냐? 가만, 허벅다리라. 그래, 좋은 생각이 났어. 누군가에게 사랑 이상의 정서가 깃든다면 그것이 곧 천륜의 예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모든 게 명백해졌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피까지 이미 섞은 사이이거늘 설령 금단의 과실이라 한들 어찌 손을 뻗지 않으랴? 서로의 마음을, 은혜를 나눈 사이로서 이제는 몸의 안팎까지 속속들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저, 정말 고맙습니다.”

109호 곰돌이는 궁금했다. 자신이 방금 말을 더듬은 것인지, 아니면 말을 붙이기 위해 저― 라는 감탄사를 쓴 것인지. 아냐. 그는 되뇌었다. 이제 이런 걸 궁금해해선 안 돼. 우린 벗어났잖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긴 사람들의 진술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

“자네들은 누구인가?” “폭탄 공룡 있어?”

! ! 가녀린 목! 튼튼한 목! 선이 예쁜 목! 땀에 젖은 목! 키스 자국이 남은 목!

“쉿, 조용히… 아, 털이 북슬북슬한 친구들이로군! 그대들의 그 체모를 통해 가능한 것들이 참 많다네! 그대를 만나 내가 얼마나 기쁜지 가히 짐작도 못 할….”

“정말 고맙습니다!”

 

물론 그만큼 고맙기도 했다. 긴 사람들의 압제를 끝내준 것은 무엇으로도 보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역할을 다 해준 이상 빨리 입을 다물게 하고 또 떠나보내고 싶었다.

“저들이 우릴 고문했어요. 우리를 인물로서 길들이려고 했죠!” “75호 곰돌이가 끼어들었다.

“정말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몰라요. 여러분 덕분에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요. 다시 한번 고맙습니.” “인물이라고? 자네들이?”

노인이었다. 잔물결처럼, 그의 말이 불러온 침묵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 그랬죠. 하지만 여러분 덕분에….” “그런 것치곤 어떤 상징도 찾아볼 수 없군.”

“사, 상징이요?” “분명 대유하는 것은 있지만, 도식적이리만치 판에 박힌 유형뿐이야. 게다가 이건 또 뭔가? 사회적 현안과는 아무런 관계도 문제의식도 공유하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잡설이 아닌가!”

109호 곰돌이의 몸 곳곳을 노인이 건드렸다. 긴 사람들이 저를 수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훨씬 깊고 예리한 통증이 곳곳으로 퍼졌다. 아악!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소재에 경도되어버린 사건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유형화된 보편성을 개별의 요소로써 드러내는 것, 현실의 누구도 명확히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 고통에 대한 번뇌, 끊임없는 반성적 성찰!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이다!”

109호 곰돌이는 독백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길고 장황하게 하고 싶어졌다.

12월의 삭풍이 쓰레기를 밀어내듯 거리의 모두를 채근하고 있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어떤 꿈 혹은 원망이 그리도 모두의 발걸음을 지치게 만드는가. 어느 것이 어느 것에 대항하여 더 잘못되었는가. 무덤이어요, 이건. 여자가 뇌까렸다. 입술이 붉으스름하였다. 쥐를 잡아먹은 것처럼. 모든 사상과 시위 피케트와 턴테이블, 그런 나날들의 무덤공동묘지! 명징한 악의 축이 몰락하며 어떤 관점도 기준도 들어맞지 않는 혼돈의 자유가 찾아왔다. 아이엠에프(IMF) 사태의 원흉으로서 지목된 이들은 이제 저성장의 굴레로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답을 아는 이들은 적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도 퍽 적었다. 온갖 천변지이에 익숙한 까닭에 정작 이곳의 문제를 알지 못하는 세태와 스스로에 대하여 쓴 뒷맛이 감돌았다….

“그만! 그만해요! 우리한테까지 왜 그러는 거예요!”

75호 곰돌이를 막아선 것은 헬리콥터 캡을 쓴 아이였다.

“곰? 발톱! 레이저 발톱! 플라즈마! 미사일! 전투씬, 전투씬, 더 많은 전투씬! 액션!”

모래사장에 말뚝을 꽂듯, 아이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온갖 기기를 쑤셔 박았다. 그 지지대도 동력부도 부품끼리의 접속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조악한 모사물들. 전해액과 갖가지 화학약품에 젖은 솜이 펑펑 눌어붙는 가운데 75호 곰돌이의 몸뚱어리는 점차 전자 시그널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출력할 뿐인 노드, 그 더도 덜도 아닌 것으로 격하되었다. 꺼져가는 신음마저 휘황찬란한 기계음으로 점철되었다.

이윽고 근처의 다른 곰돌이들에게 노인과 아이가 달려들었다. 그들의 섬뜩한 비명이 차례차례 귓전을 메우는 와중, 작고 뜨겁고 딱딱하고 헐떡거리는 동물이 둘에게 다가왔다.

엉덩이! 엉덩이! 펑퍼짐한 엉덩이! 뾰족한 엉덩이! 날씬한 엉덩이! 두툼한 엉덩이!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엉덩이!

“아, 언제까지 이 어린 것을 데리고 다녀야 할지.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그것과는 별개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대들은 털 위에 옷을 따로 입지 않는다면 털을 깎는 순간 우리의 벌거숭이와 비슷한 감각의 고양을 겪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국부에서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털을 발가벗고 임한다면, 땀에 젖은 살결과 살결이 그 쾌감을 더욱 몰아붙이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예시를 혹 보여줄 수 있겠나?”

손짓으로, 109호 곰돌이와 75호 곰돌이를 그는 각각 가리켰다.

“오빠, 안 돼! 대답하지 마!” “우린 남매야! 이 더러운 자식아!”

신사가 턱을 기울였다. 외알 안경의 이음줄이 찰랑거렸다. “한쪽이 입양되었나?”

“아니!” 좋아!”

손뼉을 치며 신사는 반색했다. “쓸데없이 걱정했군. 자 이제, 힘을 빼고, 가만히 있게. 둘의 이끌림부터 가파른 변곡과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내 부드럽게 리드할 테니.”

지옥도가 다시 펼쳐지려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 무엇을 감히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정신적 측면의 무력감이 그를 감싸 안았다. 109호 곰돌이는 하나하나 제가 현재 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늠했다.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팔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낯선 이들을 공격하기엔 기운이 없었다. 고작 바닥에 널브러진 걸 제 배 위로 올릴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올렸다. 오랜 흉터가 벌어져 있었다. 솜이 자글자글 튀어나와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제 몸을 이루는 그것을 그는 북북 뜯었다. 꺼내 제 옆에 펼쳐놓았다.

○○○

너무 컸다. 그는 최대한 잘게 덩이를 나누었다.

그는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 솜을 치웠다. 제일 작고 하잘것없는 것으로. 흰색이 아니라 마치 모래처럼, 한 점처럼 끝없이 졸아들도록. 그래. 그것은 이제 형상을 갖춘 물질이 아니라 어떤 지점이요 선언이었다. 109호 곰돌이가 마지막으로 찍은 점이었다. 그것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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