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모든 좋은 일은 세상의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

 

혜진이 눈을 떴을 때 이불 위에는 이미 영혼이 몇 알 굴러다니고 있었다. 혜진은 그것들을 조심조심 주워 모으고,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본다. 등교하려면 한 시간은 더 남아 있었다. 혜진은 영혼이 열리는 철이면 깊이 잠에 들지 못하는 편이었다(엄마 말에 따르면 아주 갓난아기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혜진은 정적에 잠긴 부엌 식탁 밑에서도 하나, 세탁기 옆에서도 하나, 영혼을 주워든다. 부엌 쓰레기통 옆에는 가져다 버릴 영혼을 모으는 빨래 바구니가 따로 있었지만, 바구니는 넘치기 직전이었다. 바구니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것들은 엄마가 임시로 꺼내둔 듯한 욕실 대야에 담겨 있었다.

아파트 사이 공터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은 파란 추위에 잠겨 있었다. 쓰레기장은 2동 비상계단 밑 오래된 은행나무들 사이에 있었고, 영혼철을 맞아 특별 설치된 영혼 분리수거함에는 코팅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이용 후 반드시 뚜껑을 닫아 주세요. 영혼이 유실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거함 뚜껑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쓰레기장 구석에는 길 잃은 영혼 몇 알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중 하나는 혼자 달에 있는 것처럼 천천히 튀어서 쓰레기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혜진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잡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에 손을 대는 것은(늘 그렇듯) 이상한 기분을 준다. 이미 날이 밝고 있어 영혼의 빛은 보일락말락 옅고, 온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쓰레기장을 떠돌고 있던 영혼들과 집에서 가져온 영혼들을 한데 모아 수거함에 비운 뒤, 다시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뚜껑을 닫는다.

잠든 차들로 가득 찬 단지를 가로질러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희미하게 빛나는, 영혼으로 추정되는것들을 여럿 발견한다. 혜진은 망설이지만. 이 계절에 길에서 영혼을 줍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단지 미화에 어려움이 있으니, 10월 셋째주에서 넷째주 사이에는 환기할 때 영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부탁드린다는 공지문이 붙어 있다. 영혼이 보기에는 예뻐도 청소 하시는 분들 생각하면 큰 일이라고, 혜진의 엄마는 이 시기만 되면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조심해도 앞으로 두 주간 투명한 풍선 같은 영혼들은 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길을 메우고,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어느 잘못 열린 창문으로 둥둥 떠내려 올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풍선과 영혼의 다른 점이었다. 풍선은 손에서 놓치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올라가서 사라졌지만, 영혼은 조금씩 조금씩 땅으로 내려와, 결국 사람들 손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나고 있었고, 엄마가 서 있었다. “또 못 잔 거야? 너는 어린애가 참 노인네처럼..” “영혼 좀 버리고 왔어.” 혜진은 말한다. “아이 참, 그걸 버렸어?” 엄마는 바쁜 손을 멈추고 혜진을 쳐다본다. 그 바구니는 아무래도 엄마가 일부러 영혼을 모으고 있는 바구니였던 모양이었다. “그거 동훈이 아줌마 갖다주기로 한 건데. 이번에 영혼차 만든다고 그래서.” 식탁 위에는 지난 일요일 선물로 도착했던, 말린 꽃잎이 든 유리병들이 빛을 받고 있었다. 달여먹으면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는 그 꽃들은 가을이 되면 우울한 기분에 시달리는 그녀의 엄마를 위한 동훈 엄마의 선물이었다. 혜진은 그제서야 같은 단지에 사는 엄마의 단짝 친구 동훈 엄마가 이번 가을부터 문화센터에서 꽃차 소믈리에 클래스를 듣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한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지난 주말 그 선물을 전해주러 심부름 왔던 동훈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것도 그녀였다. 아직 공기에 여름이 많이 남아 있던 아침이었다. 그런 신기한 얘기는 처음 들어봤지만, 다음주 클래스는 꽃잎 대신 영혼을 말린다는 모양이었다.

“그게 숙면에 그렇게 좋대. 그래서 너도 먹으라고 준다고 했는데, 참 이걸 어쩌지. 그 집도 아픈 사람 생긴 다음에 영혼이 많이 나오질 않아.” 엄마는 주전자에 물을 데우면서 말한다.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 “많을수록 좋다지, 그야.” 혜진은 결국 책임을 지고 영혼을 최대한 다시 모아서, 다음주 토요일 클래스 전에 직접 동훈의 집에 전달하고 오기로 한다. 다행히 대야에 들어 있던 영혼들은 그녀가 가지고 나가지 못했던 터라, 얼마 안 되지만 그거라도 먼저 전해주고 오라고 엄마는 말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다. 가는 중에 날아가기라도 할까 영혼을 비닐 봉지에 넣어서 잘 묶고, 그것을 다시 쇼핑백에 넣어 등교 길 7동 우편함 아래에 고이 두고 왔던 것이다. 7동 우편함은 현관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 있어, 이상하게 다른 곳들보다 서늘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길 가다 주운 영혼 하나와 아이스크림 바 두 개를 들고 독서실에서 돌아온 혜진은 영혼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동훈이 학교에서 돌아와 찾으러 갔을 때는 우편함 앞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누가 자기 걸로 착각하고 가지고 올라갔거나, 아파트 관리하시는 분들이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린 것 같아.” 다음에는 꼭 올라가서 그 집 현관 앞에 두고 오라고 엄마는 말한다. “쓸데 없는 것 좀 그만 가지고 들어오고.” 혜진의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덧붙이지만, 손을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받는다.

정말로, 혜진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집에 가지고 들어오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어떻게 할지도 모르면서. 심지어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을 집어든 것은 공기가 그토록 달콤한`10월 저녁에 빈 손으로 들어오고 싶지는 않아서였고, 영혼은 2동 사잇길에서 너무 동그랗고 예쁘게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녀는 손에 든 것들을 보면서 부엌 식탁에 한참을 앉아 있지만, 결국 영혼은 빨래 바구니에 올려두고,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은 냉장고에 넣을 수 밖에 없다.

*

그 다음 주 금요일 저녁, 7동 엘리베이터를 탄 혜진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쇼핑백이다. 예상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원래 영혼은 처음 사나흘간 집중적으로 열리고, 그 다음에는 점점 열리는 양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것보다는 많이 생겼던 것 같은데,’  그녀는 11층에 내려 반도 차지 않은 쇼핑백을 내려다보면서 망설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때는 집에 아빠와 오빠도 같이 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적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동훈 엄마의 꽃차 클래스는 토요일이라고 했으므로 영혼이 더 모이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동훈의 집은 11층 복도 끝, 문 앞에 유난히 화분이 많이 나와 있는 집이었다. 현관 왼쪽 작은 방에는 불이 켜져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복도에는 아직 어둠이 깊지 않고, 창문 안에는 책과 식물과 정체 모를 잡동사니들이 너무 쌓여 있어, 사람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다정한 사람들의 집은 어째서인지 늘 그런 식이었다. 물건이 많고, 정리는 잘 되어 있지 않고, 항상 조금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녀는 현관 앞의 화분들 사이에(잘 보이지만 너무 잘 보이지는 않게) 쇼핑백을 두고 돌아선다.

빈 손으로 7동을 나온 혜진이 마주한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밝은 어둠 속이다. 하늘은 의심의 여지 없이 검은 색이었지만, 지상은 정말로 어둠에 잠겼다고는 할 수 없었다. 구석구석마다 영혼들이 있었다. 주차된 차들 바퀴 사이에도, 개수대 안에도, 봄 밤이면 고양이들이 사라지던 오래된 덤불 발치에도. 6동 앞 벤치에는 세 알의 영혼이 얌전히 놓여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저녁에 들어가다가 말고 친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무의미한 친절이었다. 어디서 밤을 보내든 모든 영혼은 아침이면 어차피 쓰레기 수거함으로 향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 앞 놀이터에서 혜진은 더 많은 쓸모 없는 다정함의 흔적을 발견한다. 놀이터 벤치에는 열 알이 넘는 영혼이 줄을 맞춰 삼층으로 쌓여 있었고, 남는 것들은 벤치 밑에 역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영혼은 그네에도 한 대당 한 알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영혼을 일부러 밟아서 터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미관 문제로 아예 아파트 주민회 차원에서 물을 부어서 녹여버리는 동네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없는 것은 아니었다. 뉴스에는 꼭 그런 얘기들만 나왔지만, 혜진의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적어도 영혼에 대해서는) 나쁘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사실 골목마다 나와 있는 그 많은 영혼을 전부 구해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갖고 들어간 다음도 곤란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혼은 일주일이면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져버리고, 떨어진 목련잎 같은 지저분한 껍질만을 남겼다. 그 껍질로 차 같은 걸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었다. 혜진에게 좋은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필요 없다고 하면 다시 가지고 오면 되니까,’ 영혼을 한아름 안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혜진은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차 만들기를 연습하는 사람으로서도 재료가 부족한 것보다는 너무 많은 편이 낫고, 영혼들로서도 가을밤 추위를 견디고 분리수거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말린 찻잎이 되어 두번째 삶을 얻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누구 것인지 모를 영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 연습용으로라도 쓸 수 있을지 몰랐다. 처음에는 놀이터에 있는 것들 중 유난히 따뜻하게 빛나던 서너 알만 들고 가서, 동훈의 현관 앞에 살짝 두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번 줍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길에 있는 영혼들이 다 온기로 가득한 것 같아서, 결국 영혼은 손에 들고 갈 수 없을 만큼이 된다. 혜진은 고심하다가 가을 카디건을 벗어서 영혼 더미를 감싼다. 영혼 하나하나의 빛은 대단하지 않고 고작 그 자신을 밝힐 정도였지만, 여러 알이 함께 있으니 마치 거대한 빛 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

작은 아파트 단지였지만 영혼이란 영혼은 다 주우면서 빙 돌아온 터라, 혜진이 7동 11층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정말로 밤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집집마다 불이 밝혀져 있었고, 화분이 많은 그 집의 현관 왼쪽 창문에서도 작은 노란 불이(확실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대로 문 앞에 내려놓고 가자니 영혼들이 복도 아무 데로나 굴러가버릴 것 같았다. 혜진은 화분 사이에 숨겨두었던 쇼핑백을 찾지만, 그것은 이미 치워져 있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른다. 혜진은 동훈의 엄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작고, 웃기만 하고, (혜진의 엄마와 함께 와줬던 혜진의 중학교 졸업식 날 그랬듯) 사람들 속에서 쉽게 안 보이게 되는 사람이었다. 동훈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일단 세상에 그만큼 함부로 웃어주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동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S 고등학교에 다니고, 그녀만큼이나 열심히 엄마의 심부름을 하고, 그녀보다도 이른 시간에 일어나며, 혼자 집에 있을 때는 현관 왼쪽 방에만 작은 불을 켜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들고 온 것이 영혼임을 바로 알아보고 말한다. “고마워.” “가방이나 비닐 봉지 같은 것 있어?” 그녀는 묻는다.

집 안은 현관 옆 방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빼고는 불 없는 어둠 속이다. 불 켜진 방문 바로 안쪽에는 그녀가 아까 두고 갔던 작은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혜진은 현관에 앉아, 카디건에 감싸여 있던 영혼들을 하나씩 그가 가져온 커다란 파리바게트 봉투에 옮겨담는다. “진짜 많다.” 그는 물끄러미 보다가 말한다. 그녀는 문득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그녀는 길가에 있는 영혼들을 종종 집에 가지고 들어가곤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엄마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영혼들을 만지고 싶어하지 않았고 지저분하다고 싫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훈의 엄마도, 그녀 엄마와의 그 모든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생각인지 몰랐다. “이건 그런데, 우리집 게 아니야. 길에 너무 많고, 혹시 차 만드는 데 쓸 수 있을까 해서.. 어때?” 혜진은 동훈을 올려다본다. “우리 엄마 말이지.” 그는 곰곰히 생각하지만 고개를 젓는다. 그녀는 예상했던 것보다 큰 실망을 느낀다. “그렇지. 안되겠지? 혹시나 하고.” 혜진은 한숨을 쉰다. “그냥 너희 집에서 가져온 거라고 말해도 돼.” 동훈은 제안한다. “아니야, 괜찮아.”

“버리려고?” 혜진이 쇼핑백을 부스럭거리기 시작하자 동훈은 묻는다. 그녀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써도 돼?”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영혼이 든 봉투를 가져간다. 그는 마치 어떤 계획이 있는 사람처럼, 잡동사니들이 산처럼 쌓인 작은 방으로 봉투를 들고 사라진다.

가벼워진 카디건을 안고 돌아오면서 혜진은 그 대화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하지만, 영혼을 쓸 데가 있다는 그의 말은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다. 영혼은 여기 안 쓰면 다른 데 쓸 수 있는 도구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혼을 인테리어에 쓰는 사람들이라면 있었다. 영혼을 풍선 다발처럼 묶어서 집안 구석구석에 걸거나 여러가지 모양 유리병에 담아 식탁에 장식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나왔고, 십년전만 해도 혜진의 엄마 역시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것 같은 정성으로 가을마다 그런 사람들을 따라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예쁜 것은 너무 잠깐이었고, 그 다음에 영혼이 처치 곤란한 짐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은 똑같았다. 어쩌면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마음 착한 사람들은 거절하는 것도 좀처럼 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그들 집은 결국 어떻게도 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 물건들로 가득해지고 마는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

10월 말은 순식간에 지났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혼이 단 번,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11월 중순까지도 영혼은 아파트 진입로에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거나 옆 동 계단 밑에서 말 없이 빛나고 있어, 혜진을 망설이게 한다. “어차피 내일이면 쓰레기가 될 걸 왜 자꾸 가지고 들어오는 거야?” 엄마는 묻고, 그녀는 대답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몇 번 더 영혼을 가지고 들어와서 질 때까지 창가에 놓아둔다. 혜진의 엄마는 세상에 이미 쓸데 없는 물건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주의였고,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두 사람 사는 집에서 일주일에 나오는게 이만큼인데, 이걸 다 어떻게 해.” 엄마는 분리수거를 하러 내려갈 때마다 답답한 듯 말한다. 토요일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영혼이 친환경적이라는 것도 옛말로, 요즘은 영혼도(너무 많아서) 심각한 토양 오염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영혼을 주워올 수도 없고 동네를 목적 없이 서성일 수도 없는 겨울이 왔을 때 그녀는 남몰래 조금 안도한다. 예쁜 것들이 모두 우리 손을 떠나,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런 계절만의 평화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해서 혜진의 엄마는 동훈의 집에서 말린 영혼을 두 병 받아온다. “너한테도 고맙다고, 공부하다가 많이 먹으라더라고.” 엄마는 혜진에게 전한다. 영혼차는 숙면에 좋고 눈에도 좋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좋다는 것 같았다. 혜진은 평소에 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연말의 고요한 밤,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부엌으로 나와 물을 끓인다. 겨울 밤은 길었고, (다음 해면 수능이었으므로 하려고) 한다면 할 일은 많았지만,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 생각에는 그랬다. 차를 마신 밤이면 예외 없이 깊은 잠을 잤지만, 차 덕분인지 겨울 밤이 원래 그렇기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혼차를 마신 밤마다 그녀는 좋은 꿈을 꾼다. 빛 없이도 환한 가을 밤, 7동 11층 마루에 앉아 밤새 영혼 잎이 말려지는 것을 지켜보는 꿈이었다. 마루에는 그녀 혼자였던 것 같기도 했고, 동훈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혜진은 영혼 차의 효능 중에 좋은 꿈이 있는지 검색해보지만 그런 말은 없고, 네이버 카페에 그녀가 올린 질문 글에도 겨울 내내 답변이 달리지 않는다.

엄마도 혜진도 차를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라, 영혼은 2월까지도(두 병 모두) 남아 있었다. 부엌에 나가서 찬장을 열면 언제든 영혼을 보거나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겨울 그녀를 무척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혜진은 생각하게 된다. 영혼철마다 마음이 아팠던 것은 예쁜 것들을 영원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는지 몰랐다. 사람들이 부적을 사고 액운을 쫓아달라고 기도할 때, 영원히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혜진은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이따금 그 모든 나쁜 일들과 댈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일이 있기를, 가능하다면 그런 때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러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필요로 했던 것도 영원이 아니라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투명한 풍선 같은 영혼들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걸 며칠만 더 보고, 조금만 더 함께 벤치에 앉아있고 싶었다.

*

그러므로 그 다음해 가을 영혼철이 왔을 때 혜진은 또 동훈의 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기를 기대한다. 얼마 안 되는 영혼들이 두 집 사이를 오가고, 보관되고, 말려져서 또 한 겨울 그녀 곁에 머물러 주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영혼이 한 차례 동네를 점령하고 물러간 10월 셋째 주 주말까지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여름 끝 무렵부터 동훈 엄마 얘기를 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같은 주 일요일에 그녀는 그 집 아빠 몸이 다시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평촌에 혼자 계신 할머니 치매 기운도 심해져서, 이 동네 집을 팔고 평촌으로 내려가려는 생각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이 동네도 곧 재개발 들어갈 거고, 우리도 이사갈 곳을 알아봐야 할 텐데.” 엄마는 말한다.

그것은 기쁜 소식은 아니었지만 놀랄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시기는 달라도 모든 가족에게는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같은 아파트 1층에 살던 혜선의 가족에게 그 일은 혜선 엄마 디스크 수술이 잘못 되었을 때 일어났고, 그녀의 외삼촌네의 경우에는 명예 퇴직 이후 삼촌이 우울증 진단을 받으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어쩌면 좋은 시간이란 세상의 어떤 숨겨진 구석들에서 아주 잠깐만 허용된 것으로, 한번 그런 곳을 떠나게 되면 가족들은 금세 어둠으로 빠져들고, 그 다음에 그런 곳들에서 있었던 것 만큼 좋은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지 몰랐다.

그래서 혜진은 그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시간을 내어 시내 교보문고에 들른다. 엄마는 동훈네가 이사를 갈지 안 갈지는 결정이 되지 않은 일이라고 했지만, 경험상 그것은 이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런 식으로 사라지면, 그 이후로는 아무리 친했던 사람들도 일 년에 한 번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혜진의 처음 계획은 지난 겨울 영혼차가 담겨 왔던 리본 달린 유리병들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는 부엌 찬장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았고, 남은 한 병에는 아무리 꾹꾹 눌러담아도 세 알 정도 밖에 영혼이 들어가지 않았다. 혜진은 자신의 선물이 그보다는 컸으면 했고, 조금 더 예뻤으면 했다. 그녀는 교보문고의 가정 생활 섹션에 한참을 서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영혼 꾸미기”와 “영혼 인테리어 101” 두 권을 번갈아 뒤적이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서점의 한쪽 구석에는 쓸모 없는 예쁜 것들을 두는 진열대가 있기 마련이었고, 혜진은 그곳에서 완전한 구형에 하얀 리본까지 달린 인테리어용 꽃병을 발견한다. 쓸데 없는 선물로서가 아니면 그 어떤 용도도 없을 것 같은 물건으로, 그녀가 막연히 마음에 그렸던 모양과 아주 닮아 있었다.

오후의 빛이 물러가기 시작한 거실에서 혜진은 꽃병의 포장을 풀고,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영혼들을 꺼내 온다. 꽃병은 생각보다 커서 그녀가 가진 모든 영혼들을 담고도 자리가 남았다. 남은 자리에 들어갈 만한 영혼을 찾아 동네를 도는 길에, 그녀는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 있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친다. 2동 앞에서는 분홍색 코트의 할머니가 은행을 줍고 있었고, 7동으로 가는 한적한 길에서는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두꺼운 장갑을 끼고, 영혼을 이글루처럼 쌓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1층에서는 익숙한 작은 방에서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열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복도 쪽 하늘은 아직 파란 색에 잠겨 있었지만 안쪽은 어두워, 그녀에게는 문 안에 서 있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동훈은 아무래도 자고 있던 것 같았다. “미안, 오늘 오는 줄 몰랐는데..” 그는 조금 멍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는 설명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문다. 거기까지 영혼으로 가득 찬 꽃병을 가지고 오게 된 이유나 과정 따위가 문득 그곳에 서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느껴져서였다. “이거, 이틀은 갈 거야.” 영혼들은 어스름 속에서 말 없이 빛난다. 무언가를 비추기에는 너무 어둡고, 단순한 반사광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밝은 그 특유의 색으로.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찬찬히 그 빛을 살핀다. 혜진은 턱을 괴고 마주 앉는다. 더 하고 싶은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훈에 대해 여전히 거의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영혼이 굴러다니는 계절이 기쁨만을 주는 것은 아니듯,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도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도 할 줄 모르게 되는 일에 가까웠다. 혜진이 동훈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지난 몇 년간 그들은 더 많이 말하고 친해질 수 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것 아닐까? 혜진은 생각한다. 얼마간 있던 좋은 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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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 단편 파랑새 거우리 2020.01.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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