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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식후경

2020.02.22 11:0202.22

오늘의 뉴스입니다.

무한 청정에너지! 꿈의 시대가 비로소 도래했습니다. 달 개발 및 생태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름에 따라 막대한 양의 헬륨-3의 채굴이 곧 시작될 전망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달에 묻힌 헬륨-3의 양은 인류 전체가 수천 년을 쓰고도 남을 정도라고 합니다. 최근 지속적으로 공급 가능한 에너지원을 구하지 못해 답보 상태에 빠져있던 핵융합 산업은 덕분에 한 숨 돌리게 되었지요. 더불어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러한 변화가 최근 무르익은 무선 전력 송신 기술과 결합될 경우 발휘할 더할 나위 없는 시너지입니다. 사실상 무한하고 또 깨끗한 에너지를, 원거리 송신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나 즉각적으로 공급받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삶. 시청자 여러분, 지구의 에너지 위기는, 그에 따른 환경오염의 위험은 이로서 영영 해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징계요청서

달기지 에너지 연구부서, 헬륨 가공 전처리 연구원 고다드입니다. 달 생태화 부서 농작물 생장 연구원인 마틴에 대한 징계를 요청합니다. 마틴은 최근 기지의 주요 자산으로 분류되는 헬륨-3가 다량 포함된 월면토를 무단으로 반출하였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갖고 이런저런 개인 실험에 유용하는 와중 텃밭을 가꾸어 옥수수를 길러 먹는 이해할 수 없는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귀중한 자원의 낭비일뿐더러 연구원으로서 본인의 몸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책임감 없는 행위이므로, 기존의 징계 처리에 더해 신경정신과적 치료 또한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생물량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달기지에 어떻게 살아있는 종자를 갖고 들어왔는지

 

*

 

「당연히, 전엔 아무도 몰랐죠. 왜냐하면 헬륨-3가 풍부하게 든 토양에서 옥수수를 길러본 적이 없으니까요!」

스크린은 깨끗한 화질로 그의 모습을 송출했다. 전문가는 안락의자에 앉아 말을 이었다. 학구적인 풍의 뿔테 안경에 터틀넥, 장작 타는 소리가 나는 고즈넉한 벽난로를 배경으로 한 그 모습만 봐도 어쩐지 신뢰가 샘솟았다.

「옥수수 특유의 생장 기작과 그것이 포함된 화합물과의 작용을 통해, 이제 헬륨-3가 포함된 토양은 옥수수를 좀 더 빠르게, 크게 자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탁월하도록 맛있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다신 잊을 수 없는 맛이었어요. 혀 위에서 천국이 벌어지는 느낌이었죠. 빼빼 마른 여자.

그런 건 난생 처음이었수. 왜 이런 걸 이제야 먹을 수 있는 거지! 난 외쳤소. 꼬부랑 노인.

더 없어요? 더 주세요. 그걸 먹은 기분이요?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빨리요! 앳된 소녀.

놀랍군요.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만, 아주 즐거운 방향으로 그래요! 혀가 다 얼얼하군요. 음식이라기보다 행복한 경험이나,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약속이 떠오르는 살집이 있는 남자. 자료화면이 넘어갔다. 신뢰의 터틀넥이 직업적인 미소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했다.

「더불어 최근 이렇게 생산된 옥수수, 소위 ‘달옥수수’라는 상품명으로 등록된 작물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지요.」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넘어가더니 드럼통처럼 굵은 글씨체로 자막이 떠올랐다. 다시 나타난 전문가는 꼭 그 스스로도 편집을 엿본 것처럼 살짝 얼떨떨해했다. 화면 한쪽에 이런저런 사진자료들이 떠올랐다.

「헬륨-3를 흡수하여 자란 옥수수 알갱이들이 발하는 …와 …에 의하여, …라고 이름 붙여진…. 또한 … 작용도 간과할 수 없지요. 그런즉슨 …에 따라….」

어느 컨퍼런스 룸에서 똑똑한 사람들끼리 정한 무슨 이름을 하나하나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전문가의 심각한 표정이 지금은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이지요? 자극의 역치 자체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에 의하여 미각 수용체의 구조 자체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매번 새롭고 짜릿한 맛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학자들은 이것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서, 인체의 생리적 중독을 불러일으키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의식적 측면에서의 중독이라면 어떨까요?」

화면이 또 넘어갔다. 다만 전문가의 목소리는 남았다. 대신 나오는 것은 어떤 음식을 씹고 삼키고, 마시고 핥고 빨아들이는 누군가의 입이었다. 식욕을 돋울 만큼 활기차되 모양 빠지도록 부산스럽진 않게. 과연 광고 모델다운 숙련도였다.

「매번 최고로 새롭고 또 맛있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짜릿한 맛. 그런 것에 맛을 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달옥수수의 원형뿐이 아닌 크림, 아이스, 주스 등 각종 가공식품에까지 미친다면 또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달옥수수의 맛에 길들여진 우리가 과연 만족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가 돌아왔다. 양손으로 뭔가 들고 있었다. 방석보다 살짝 작은 크기에, 매끈한 코팅 포장이 된 즉석식품이었다. 겉면엔 초승달 모양의 옥수수 캐릭터가 엄지를 든 채 애교스럽게 웃었다. 혀를 빼물고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 대중예술의 훌륭한 첨병이었다.

「그래서 전, 매일아침―달옥수수 패키지를 삽니다!」

다시 입들이 나왔다. 천천히 클로즈 아웃. 사실 전부 터틀넥을 입은 전문가 본인의 입이었습니다! 잘라먹고 떠먹고 찍어 먹고 집어먹고 꺼내먹고 빨아먹고… 배고플 때 보면 당장 창자가 요동을 칠 만큼 그는 복스럽게 달옥수수를 섭취했다. 내레이션이 오디오를 차지했다.

온갖 형태의 달옥수수 가공식품이 매일 아침 당신의 집 문 앞에! 부분 결제를 통한 3650종 이상의 메뉴와 총 46000가지 이상의 레시피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추천인 코드와 함께 구독하시면 2개월간 무료, 12개월 단위로 구독할 경우 마지막 1개월은 공짜! 지금 당장 구독하세요. 매일아침달옥수수 패키지! 제공된패키지에대한단순변심을포함각종교환및환불사유는사전협의되지않은위약금징수의대상이됩니다계약시별도의의사진행이없는경우구독요금징수및계약연장은월말마다자동으로

채널이 바뀌었다.

 

‘라핀 계곡의 일곱 가지 모험’ 편성표에 적힌 내용과 달리 그 이름은 화면 오른쪽 위편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처박혀 있었다. 앞으로 XX초 후 끝납니다 그동안 나머지를 메우는 것은 광고였다.

빨간 맛, 파란 맛, 초록 맛. 다종다양한 아이스크림, 개중에서도 딱딱하게 굳혀 흔히 하드바 혹은 팝시클popsicle로 불리는 것들이 지나갔다. 아이는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한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극적인 한숨을 뱉었다.

「왜 그러니, 얘야?」 「이런 것들은 지루해요! 난 새로운 맛을 원해요, 지금 당장!」

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도리질했다. 그러면서도 사람 좋은 미소는 잃지 않았다. 옆구리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어떠니?」

「우아! 신제품 달옥수수 핫콘이다!」

맛있다! 상쾌하다! 새롭다! 아이는 코믹하게 가속되어 눈앞의 달옥수수 핫콘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점점 팔다리가 부풀고 배가 튀어나왔다. 피부는 옥수수처럼 깊은 노란빛을 띠었다. 마침내 아이는 한 떨기 보름달이 되어 두둥실 떠올랐다. 아빠, 이것 좀 봐요!

「나 원, 누가 누굴 먹는 건지!」

눈썹을 찡긋거리며 애 아빠가 던진 회심의 대사를 끝으로 광고는 막을 내렸다―누군가는 그러니까 그 문장을 고안하는 거로 정말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하여튼 하나의 광고가 지나갔다. 또 채널을 돌릴 것인가? 이번에도 리모컨을 쥔 자는 기대에 부응하는 선택을 했다.

 

「한 문장으로요? 너무 어려운걸요!」 「할 수 있어야죠, 낸시! 아무렴 우리가 최고의 카피라이터들을 이 자리에 모신 게 공짜 달옥수수 시식을 위해서는 아니니까요!」

방청객들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카메라 앵글 안쪽으로 살짝 바람잡이의 팔이 들어왔다. 풍선 인형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음, 마치 이건. 마치…. 꽁꽁 언 땅처럼 거칠면서도, 아기의 뺨처럼 보드라운….」

「그렇군요… 그런데 시청자, 여러분, 께서, 쉼표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아시죠, 낸시?」

왁자지껄한 웃음이 스튜디오를 메웠다. 낸시라고 불린 사람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한 문장입니다, 낸시. 한 문장. 그렇기에 더 값어치가 있지요. 달옥수수의 그 오묘하기 그지없는 맛을 단 한 문장에 오롯이….」 「알겠어요, 제대로 할 테니 보채지 말아요.」

볼멘소리와 함께 긴박한 음악이 깔렸다. 그 심각한 표정을 카메라가 한껏 확대하여 잡았다. 심사숙고한 끝에, 천천히 낸시는 입을 열었다.

「이건 마치, (―) 같아요.」 저속한 말을 검열하는 기계음이었다. 「그래요. 혀에서 시작해서 턱을 감싸고 자르르 (―)….」

말이 끊어졌다. 촬영장이 걷잡을 수 없이 떠들썩해졌다.

「왜? 왜?」 「왜는 왜야? 지금 새벽 방송 아니라고!」 「입 열자마자 편집점 찍어주네. 레전드야 정말.」 「아니아니 난 몰랐어요. 그냥 이런 것까지 안 되는지 몰랐지!」 소란을 틈타 한참 뒷 순서의 사람이 끼어들었다.

「왜 어려운지 알아요? 이 맛은 딱 그겁니다. 형언할 수 없음. 난 그걸로 먼저 내겠어요.」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이 스튜디오에 수십 명은 더 있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 대답은 저희가 반려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진행자가 익살스러운 몸짓과 함께 큐카드를 휘저었다. 그리고 화면이 돌아갔다. 그러나 채널이 바뀌는 대신 ‘퍽’ 소리와 함께 빛을 잃었다. 동시에 집안이 캄캄해졌다. 흐리멍덩한 눈빛만 두 쌍 껌뻑였다.

“아이, 제기랄. 벌써 졌나? 어쩐지 오늘은 저녁달이 빨리 뜨더라니!”

안락의자에 고랑이 파이도록 깊게 앉은 사람이 신음을 뱉었다. 협탁에 찍힌 담배자국은 영혼만큼 진했다. 발치를 뒹구는 캔에는 초승달 모양의 옥수수 캐릭터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야, 야, 완전히 끊기기 전에 송신 잡아 봐!” “젠장, 왜 항상 나야?”

그러면서도 터벅터벅, 다른 사람은 거실을 떠났다. 창문을 열었다. 무릎부터 창턱에 걸쳐 몸을 위태하게 내밀었다. 벌써 유독한 공기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손발이 저릿저릿했다. 처마를 붙잡고 고개를 쭉 뺐다.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 . 그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콧속이 따가웠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속을 수세미로 박박 긁어내는 것 같았다.

 

“뭐 보여?” 집안에서 우렁찬 질문이 날아왔다.

“안테나는 멀쩡해!” 그의 눈이 농익은 과일처럼 부풀어 올랐다. 실핏줄이 터져 벌써 선홍자위에 가까워진 흰자위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냥 잠깐 고장 났나 봐. 오늘은 먼지 폭풍 안 온다고 했지!”

“야 이 머저리야!” 그 기세에 밀려 수염뿌리가 뽑힐 것처럼 거세게 입이 여닫혔다.

“먼지 폭풍 왔으면 니가 거기서 그러고 있겠냐?” “그건 그렇네!”

빠른 수긍. 어쩐지 찝찝한 표정으로, 앉은 사람은 턱을 쓰다듬었다. 나무 밑동처럼 불쑥불쑥 잘린 수염이 손바닥을 할퀴었다. 커피색의 굳은살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저기, 달 아직 있….” “야 그러게, 니 말이 맞나보다, 티비 다시 나와. 들어와 멍청아!”

그러게 달 지나갈 시간인데, 전력이 끊기긴 왜 끊겨. 궁시렁거리며 그는 몸을 창틀에 구겨 넣었다. 다음엔 꼭 부탁받기 전에는 궁둥이를 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엔 내가 함량 높은 거 먹을 거야!”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 새끼야!”

한편 그런 그들의 위편으로 달이 세상을 가로질렀다. 달은 컸다. 빨랐다. 그리고 푸르렀다. 미세입자가 빛을 산란시켜 온통 시든 잿빛이 된 하늘보다도 더 푸른빛이었다.

달에는 더 이상 어떤 언덕도 골짜기도 크레이터도 없었다.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뿐이었다. 생태화된 달의 표면을 따라 바람이 불 때면 밭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궤적의 뒤편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흩뿌리며 아래편 지구에 열과 전기와 그에 실린 온갖 소원과 욕망을 가져다주는, 눈 뜬 이들 모두의 삶을 이끌고 매일의 생활을 감독하는 거대한 천체. 이제는 달이야말로 새로운 태양이었다.

“저거 한 뙈기만 내 거면 얼마나 좋을까?” 달옥수수향 첨가 기능성 슬러지를 허덕허덕 퍼먹으며 그가 물었다.

“한 뙈기, 장난해? 난 저 중에 한… 그, 그루? 뭐라고 하지? 한 대만 내 거였음 바랄 게 없겠다. 그럼 달옥수수 크림이랑, 달옥수수 죽이랑, 달옥수수 찜이랑….”

숟가락이 포장 용기 내부를 사정없이 긁고 후비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넙죽넙죽 머금고 삼키고 베어 물고 또 삼켰다. 달착지근한 냄새와 비릿한 침 냄새, 배부른 몸에서 내뿜는 텁텁한 단내가 뒤섞였다. 이를 부딪칠 필요도 없었다. 그만큼 감미롭고 또 빠르게 달옥수수의 맛은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두 쌍의 눈길은 내내 그러나 자기들이 먹는 음식에도 스크린에도 향하지 않았다. 천천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진한 녹색의 성채. 지구의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이 집중된 별세계의 신전으로 그의 시선이, 그들의 시선이, 모두의 시선이 간원하듯 쏘아졌다.

 

 

“머리가 빙빙 도는군.” 창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나 말이요.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아.” 동료가 시니컬하게 동조했다.

“정말 떨어질지 몰라요. 이곳의 중력장을 벗어나는 순간.” 다른 동료가 초연하게 덧붙였다.

셋이 바라보는 것은 지구의 표면이었다. 온갖 화학약과 플라스틱, 안정한 단백질, 분해할 수 없는 고분자 산화물로 뒤덮였음에도 아직 유언처럼 푸른빛을 반사하고 있는, 지구의 마지막 남은 바다였다.

“아무렴. 이민 오기 쉽다는 이유로 궤도까지 억지로 좁혔으니. 구역질 날 정도로 많은 돈을 들여서, 그러니 정말”

떨어질지도 몰라. 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갔다.

인정하는 순간, 새삼 의식하는 순간 정말 중력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건물 속 정비 로봇용의 통로에 옴짝달싹 못 하고 처박혀 있음에도 정말 떨어질 것만 같았다. 발을 헛디딘 것처럼, 머리 위편의 지구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셋은 억지로 시선을 내렸다. 창밖 달의 세상을 살폈다. 누가 멱살을 붙잡고 알려주지 않는다면 지구, 그것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던 시절의 어느 평범한 도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물샐틈없이 깔린 판석과 갓돌을, 잘 정돈된 도로와 널찍한 거리를 보았다. 펑펑 섬광을 뿌리는 가로등과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 가판대를 가득 메운 물건과 음식, 맑은 물이 무제한으로 쏟아지는 급수대, 초고속의 무선 네트워크. 무엇 하나 지상에서는 목숨을 걸더라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평선 너머로는 거대한 초록색 손아귀처럼 보이는 것이 일렁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밭이었다.

“그래도 잘 되었지 뭐요. 덕분에 이렇게 침투도 쉽게 했으니. …다 되었습니다!”

그들은 창문에서 눈을 떼었다. 벽이 진동하며 감춰져 있던 통로를 뱉어냈다. 더 정확히는 출구에 가까웠다. 밖으로 언뜻 보이는 곳은 로봇용의 그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셋은 내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확실한 거지요, 보스?” 셋 중 하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물론. 이곳을 나가 곧장 우회전, 왼쪽에서 네 번째에 있는 문이 이들의 사령부다.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달 전체의 통신을 관장하는 허브가 있고.”

“그럼, 여기만 치면….” 동료는 말끝을 흐렸다. 대신 꿀꺽 침 삼키는 소리만 났다.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지. 헬륨-3가 언제나 부족한 것도, 저 아래 처박혀 달이 뜨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일도 없어진다.”

셋은 제각기 머릿속에 작전의 성공과 그것이 불러올 미래를 그렸다. 머지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 어쩌면 방아쇠를 당기는 한 번의 손짓. 한마디의 말로 역사의 추가 넘어갈 수 있다.

“일자, 네가 먼저 들어가라. 그다음은 이본 너다.”

“옛!” “네, 알겠습니다.”

결연하게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곤 동시에 경례했다. 좁은 복도가 허락하는 한 가장 정중하고 또 비장하게. ‘보스’라고 불린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일자와 이본이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물감이 지워지듯 보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깍지를 낀 손을 뒷덜미에 받쳤다. 그리고선 쭉 몸을 펴 누웠다. 그 상태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1, 2, 3 입술까지 달싹거리며 딱 1분을 넘기자 그만두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내밀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로봇이 지나다니는 곳과 일반 통로 사이에는 전하를 띤 입자들의 망이 쳐져 있었다. 방범용 열분해 망 따위의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저 악취나 불쾌한 소음 등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덕분에 남자는 코앞에 있으면서도 두 동료가 육편으로 짓이겨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아코디언처럼 주름지고 녹아내린 인간의 잔해를 그는 자세히 살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이와 잇몸까지 그대로 붙은 턱뼈가 나뒹굴었다. 꼭 하모니카처럼 생겼다고 보스는 생각했다.

「지상 침입자를 또 찾았습니다.」 순찰 로봇의 사무적인 보고가 울려 퍼졌다. 채 분열기의 작동이 끝나지도 않았다. 초고열의 이온이 창백한 푸른빛으로 번쩍였다.

「즉시 제거하….」 “항복합니다.”

그는 크게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몸을 일부러 크게 펴면서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로봇이 무감정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부 메인프레임을 향해 분명 후속 조치를 묻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 이 장면을 인간 오퍼레이터들이 실시간으로 관측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 눈을 맞추었다.

“항복합니다.” 재차 힘주어 말했다.

 

 

“정숙! 정숙하시오! 휴정은 아직 멀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이 대부분 그렇듯이, 회의실은 전혀 정숙하지도 보다 정숙해지지도 못했다. 방사형의 의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제각기 하고 싶은 말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한편 머리 위편 운석에도 끄떡없도록 지어진 유리 돔 너머에는 지구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이건 양심의, 그리고 도덕의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충격입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누군가가 읍소했다.

“벌써 지구 일부 지역에선 황산화물이 대기 중 세 번째로 많은 성분이 되었습니다. 오존 구멍으로 떨어져 내린 자외선이 수천만의 유전자를 흙 놀이하듯 헤집으며, 혈뇌장벽과 태반마저 걸러낼 수 없는 각종 위험천만한 오염물질이 남은 이들의 삶을 대대손손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금 육십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직 저곳에 있습니다. 한때 융성했던 도시와 나라의 이름을 빌린 폐허에서, 우리의 잉여 무선 에너지에 기생하며 아직 무너지지 않은 집에서 아직 부러지지 않은 기둥을 붙잡고 먹을 수 없는 음식과 마실 수 없는 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단 말입니다.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견디고 있단 말입니다! 이런데 어떻게 지구로의 물자 공여량을 지금보다 줄이자는 결의안이 채택될 수가 있지요?”

,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마이크를 잡지도 않았는데 목소리는 뚜렷했다. 그는 마이크를 넘겨받자마자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다.

“우리 모두가 그 논쟁을 기억할 겁니다. ‘자연이 더 이상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지 않음에도 그것을 보존해야 하는가?’ 아시다시피 우리의 과학 기술은 언제부턴가 인간을 먹이사슬의 꼭대기가 아니라 생태계의 어느 구석에도 매이지 않는 초월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험실에서 태어나지 않는 자연의 생명이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 하에 지중해와 대서양이 매립되었고, 아마존이 불살라졌고 갖가지 국립공원은 재처리 공장으로 전환되었죠. 구 러시아의 땅 대부분은 향후 오십만 년은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이 되었고요. 그 과정을 거쳐 우리는 유일한 포유류가 되었으며 그밖에도 동식물을 합쳐 약 백오십만 종에 달하는 이름들이 영영 역사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누구 들으라고 설명하는 거야?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살짝 자각적인 힐난을 누군가 던졌다. 그러게. 빨리 휴정이나 하라고 하지.

몇이 무의식적으로 고갤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지구는 그렇게 황무지와 쓰레기장과 잿더미가 모자이크처럼 뒤엉킨 땅이 되었지요. 고작 몇 세기, 아니 몇십 년 전만 해도 이는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요. 왜냐하면 합의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지 않다면, 자연을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이되 훨씬 잔인하고, 그래서 더 시급한 물음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의 일부, 즉 인류의 일부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지 않다면, 과연 그들을 보존해야 하는가?’”

그 답은 물론 나와 있지요!

아무래도 마이크 순서는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느냐에 따라 넘어가는 것 같았다.

“뭘 고민하는 겁니까? 이건 시대의 변화입니다. 이런저런 고전 소설의 잔혹한 묘사처럼, 사람이 사람을 먹고 마시는 것도 분명 환경에 적응하는 나름의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저 아래 남은 이들이 저렇게라도 번식하고 자손을 낳아 수를 유지한다면, 그건 퇴화도 몰락도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일 뿐이지요. 혹시 고리타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따위의 경구를 들고 올 셈이라면 말도 마십시오!”

그는 목이 타는지 근처를 얼쩡대던 로봇 웨이터에게 손짓했다. 그것이 한 손을 펼쳤다. 허공에서 컵과 물이 나타났다. 얼음처럼 깨끗한 그 표면에, 깊은 샘처럼 투명한 그 내용물에 곧 펑퍼짐한 입술과 혀가 닿았다. 씹어 삼키듯 게걸스레 물을 빨아들인 남자는 다시 로봇에게 손짓했다. 잔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술처럼 사라졌다.

“과거 특수한 상황에서 지배 계급의 희생이 요구된 것은 첫째, 그들이 평소 하위 계급의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러한 관계는 앞서 하위 계급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통제와 피통제의 관계가 아닌 실은 미묘한 작용―반작용의 항으로 둘은 묶여 있던 겁니다. 그래서 귀족의 희생이라는 맥락이 등장한 거고요.”

휴정은 언제 하는 겁니까? 누군가 부지불식간에 물었다. 아니 되뇌었다. 하필 타이밍이 안 좋은 까닭에 그것을 회의실 전원이 듣게 되었다. 머쓱하게 그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머지 모두의 눈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번씩 시계를 핥고 지나간 것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자동화와 전산화, 비약적으로 발달한 정밀 기계의 수혜 덕분에 인간 노동의 가치는 전에 없이 떨어졌습니다. 아니 사라졌습니다. 덕분에 지상의 저들은 우리의 성공에 어느 것도 기여하지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저들을 하위 계급에 둠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온갖 재화를 우리는 훨씬 쉽고 간편하게 우리의 자동인형들로부터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저들을 지배하지도, 이런저런 기준을 강요하며 군림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로 ‘노블레스’도 ‘오블리주’도 이곳에는 없지요. 우리는 오히려 잉여 무선 에너지를 지구에 흩뿌리고 그도 모자라 몇몇 지점에 물자를 공여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달옥수수까지요! 원래 우리가 제공하던 것을 좀 더 줄이겠다는데 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단 말입니까?”

그 기세를 몰아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가 있었다. 이전 발언자와 동일한 맥락으로,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으로 안건을 분석했다.

“조금 전 혈뇌장벽도 거르지 못하는 화학오염물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당하십니다. 그들의 뇌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변하고 있습니다. 대대손손, 지구에 남은 인간들은 달라집니다. 멍청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 결과 지상의 인간 대부분의 뇌에서 프리프론탈 로브와 림빅 시스템의 현격한 수축이 보고되었습니다.”

각각 ‘전전두엽’과 ‘변연계’로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을 굳이 혀를 꼬아가며 담는 것은 나름의 뽐냄인가, 아니면 짐짓 어려운 말로 반대파를 겁박하기 위함인가. 어느 쪽이건 얄팍했다.

“이는 그들의 뇌가 영장류는 고사하고 포유류도 못 되는, 차라리 악어 같은 파충류의 그것과 유사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구구단을 못 외거나 거스름돈을 잘못 받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나아가 영혼을, 정신을, 인간이 인간이어야 하는 모든 이유를 그들은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로의 물자를 늘리자는 결정은 도리어 일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말하다가 갑자기 혀가 꼬였는지 발언자는 멋대로 논평 비슷한 마무리를 해버렸다. 흐름이 잠시 엉켰다. 딱히 치고 들어와 마이크를 잡을 사람이 없는 가운데, 이쯤에서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고 누군가는 결정했다.

“그럼 슬슬 휴정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누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귓가에 통신기를 낀 남자였다. 어딘가로부터 줄곧 신호가 들어오는 듯 파란불이 번쩍번쩍 점등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빗발치는 야유를 뚫고 용케 질문은 그의 귀에 닿았다.

“증인을 요청합니다.”

야유가 한층 커졌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누구인데 이 지경이 되어서야 신청하는 거요?”

“우리가 줄곧 이야기하던 주제의 장본인. 지구의 저들 모두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입니다.”

또박또박, 힘 있게 그는 밝혔다.

“작금의 지구중력권 체제 전체에 대항하여 조직된, 이곳 달까지 침투한 지상 반란조직의 수장입니다.”

몇몇이 혼란스러워했다. 과연 ‘지상 반란조직이 이곳 달까지 침투한’ 것인지, 아니면 ‘지상 반란조직의 수장만 침투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의법의 마법이었다.

 

그가, 일자와 이본으로부터 ‘보스’라고 불린 사람이 불려왔다. 증인석에 앉혀졌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길로 여기저기를 훑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보았다. 회의실 천장에 이국적인 장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박제된 지구의 모습.

턱을 든 채 생각에 잠긴 그 모양은 사뭇 지적이고 또 극적으로 느껴졌다. 증인이 꼼지락거리며 구속된 팔과 어깨를 뻗었다. 이어 등을 곧게 펴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일순 저도 모르게 제가 숨을 참았거나 의식적으로 억누르던 것을 나머지는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회의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증인의 이름과 직책을 밝히시오.” “레민, 지상 반란군의 수장이오.”

이런 자리였다. 위축될 법도 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것이 적진에 침투하여 혈혈단신 남겨진 이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레민이라고 선뜻 본명을 밝힌 남자는 도리어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당당해 보였다.

“반란군이라함은….” “달의 당신들, 나머지 지구에 구더기처럼 남겨진 이들. 이 구조를 개혁하는 게 조직의 목표요.”

사무적인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사무적’이라는 것은 왠지 이 시점에서 한 번쯤 동요해야만 할 것 같다고 다들 생각한 까닭이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안건에 찬성하는 쪽은 그대로, 반대하는 쪽은 또 그대로 동요할 이유가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자가 정말 반란조직의 수장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요?” 지상의 저들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면 도와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 발언자였다.

“그래요, 달에 사는 아무나를 데려와 적당히 연기하는 게 아닙니까?” 지상의 인간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주장한 발언자였다.

“믿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순찰 로봇은 정비 통로에 숨어든 무고한 민간인 둘을 토막 낸 거니까.” ‘양심의 무게’ 운운하던 사람이 대거리했다.

“우리 중 누가 저런 역할을 맡겠어요? 못 믿겠다면 가까이 가십시오. 그 냄새를 직접 맡고 몸을 만지십시오. 이곳의 청결히 관리되는 어느 공원에서도 나지 않는 불탄 흙냄새를, 방사선이 두들겨 눅진눅진하게 구부러진 뼈의 촉감을 직접 만져 알면 될 것 아닙니까?”

레민은 흥미롭다는 듯 이 소모적인 말다툼을 바라보았다. 로봇에게 기꺼이 두 팔을 들 때처럼 점차 얼굴에 웃음이 차올랐다.

“모르겠습니까? 이 증인이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지? 우리가 어떤 숫자와 퍼센트포인트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동안 이들에게 정말 닥친 일이 무엇인지, 그것이 이들을, 뜨거운 피와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이들을 어디까지 몰아세웠는지. 생생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는…!”

“1기지는 지하 두바이 폐허에 있소. 비상발전이 잘 되었으니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거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레민이 던진 말이었다. 거기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굴었다. 조금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귀를 후비거나 눈을 끔뻑대며 몸을 틀었다. 환풍기 웽웽거리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렸다.

“뭐라고요?” 누군가 물었다.

“2기지는 우리끼리는 쓰레기장이라고 부르는데, 당신네가 기억하는 이름으론 아마 말라카 협곡이겠지. 아니, 바다였나? 이곳은 통신 설비가 집적된 곳이니까 가급적 빨리 확보하는 게 좋을 거요.”

“저게 지금 뭘 하는 거야?”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기지부터는 고정지점이 아니라 무선통신을 이용해 그때그때 붙고 흩어지는 임무 중심 점조직이요. 사실 이게 가장 어려운 거라고 할 수 있지. 때가 되면 암호통신에 사용되는 복호화 엔진과 주파수 카드를 넘겨줄 테니….”

, 잠깐, 잠깐! 잠깐! 마이크를 쥔 사람이 온몸을 펼쳐 흔들었다. 열병에 걸린 듯한 그 몸짓으로 간신히 주도권을 가져왔다. 레민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반란군의 모든 수를 파악한 뒤 손쉽게 격멸할 수 있도록 당신들을 돕고 있소. 물론 보상이 주어지는 대로 좀 더 자세한 정보도 풀도록 하지.”

? 물음은 중구난방으로 던져졌다. “왜 이제야? 가 더 맞지 않나?”

레민은 능청스럽게 어깨까지 으쓱거리곤 말을 이었다.

“반란군의 수장이 되면서까지 내가 당신들에게 유용하다는 걸 입증할 기회만을 노렸소. 오늘에서야 겨우 기지에 침투해서 항복할 수 있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생긴 것 같아 아주 기뻐. 이게 지금 공청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의문은 해결되기는커녕 더 첩첩산중으로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우리에게 대항해서 달을 뒤엎고, 이곳의 일부 계급에게만 집중된 자원을 지구에 남겨진 이들에게 분배하려고 떨쳐 일어난 게 아니오?” “처음엔 그랬나 보지. 난 모르겠소. 반란군을 키운 건 나지만 만든 건 내가 아니거든.”

그리고 거기에 무슨 메리트가 있담? 물을 엎지르듯 감흥 없이 레민은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지구의 모두와 이걸 나눠? 말이야 쉽지. 당신들은 항상 이렇게 살잖아. 그래서 이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거야. 내가 그래 체제를 뒤엎는다고 생각해봐. 너희야 많아봤자 일만을 안 넘겠지. 아무리 차고 넘친다고 해도 그동안 너희가 누리던 걸 지구의 수십억과 함께 나눈다고? 지금보다 조금 덜 배고프고 덜 춥고 덜 부대끼는 그런 시시한 걸 하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아나? 아냐. 난 모든 게 확 달라지길 원해. ‘내’가 말이야. ‘우리’가 아니라! 이 압도적인 부, 권력. 혼자 다 쓸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그렇기에 결코 나누지 않을 만큼의 자원! 전기와 물과 에너지 그리고 달옥수수!”

그리고 아주 이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조금 뒤 그것이 레민의 흥건해진 입 안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래. 달옥수수! 기지까지 침투하면서 만사 다 내팽개치고 달옥수수 밭에서 미친 듯이 구르고 뜀박질하고 얼싸안고 먹어 치우고 싶어서 얼마나 혼났는데! 한 가지 칭찬하자면, 너희가 그걸 극소량만 풀면서 지구를 통제하는 건 아주 잘 되고 있어. 덕분에 진짜 달옥수수 반쪽, 아니 씹다 뱉은 알갱이 껍질이라도 얻기 위해 기꺼이 제 팔다리를 부러뜨릴 놈들이 넘쳐나니까! 첨가물로는 그 오묘한 맛을 도저히 재현할 수가 없단 말이야.”

“다, 달옥수수? 그걸 위해 지금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건가?”

발언자는 잔뜩 고인 군침을 잽싸게 삼키고 입을 열어야 했다.

“당연한 것 아냐? 식감, 목 넘김, 향, 다 달라. 너희가 저 밑에 걸 못 먹어봐서 그러지!”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저쪽이 너무 당당하니 도리어 질문한 쪽이 처음부터 무얼 바랐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게 아니라, 도덕과 양심의 문제로서…. 핍박받는 사람들이.” “뭘 기대한 거야?”

레민은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내가 부도덕하다, 이 말이 하고 싶어? 달옥수수보다 더 위대한 명분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한 줄 알았어? 그것도 생존의 침해가 없어야지 이 사람들아. 양심? 당장 배 아프고 목 따가운데 뭔가 한 움큼 먹어야지 어떻게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거에다 대고 머리를 숙여?” “그래도 너무 당당한 것 아냐?”

힘 빠진 삿대질이 말꽁무니에 붙었다. 회의실까지 덩달아 그에게 물든 것 같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양심 지키는 사람이야 있지.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전부 다 나 같을 거라고 떠벌릴 생각은 없어. 근데 그런 사람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더 잘하는 거지, 굳이 내가 욕먹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장내를 돌아보았다. 크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달옥수수 줄 거야 안 줄 거야?”

‘말문이 막혔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아무튼, 나 아직 알고 있는 거 많거든? 이다음부터는 달옥수수 한 파렛트마다 한 마디씩 말해주지. , 아이스는 빼고. 빈속에 찬 거 먹으면 부대껴서.

로봇이 회의실 바깥으로 레민을 데려간 뒤에도 그의 넋두리는 남았다. 그의 자신만만한 선언이 환청처럼 방을 떠돌았다. 한편 그들의 마음속에는 훨씬 깊은 앙금이 끼었다.

“인간적이네요.”

누군가 툭 던진 말에 힘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요. 저거야말로 동물은 못 하는 거죠.”

갑자기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다들 한 번씩 확인해야 했다. 침묵.

“저 자를 심문할 겁니까?” “심문할 것도 없겠지요. 본인이 나서서 술술 털어놓으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얻은 정보를… 이용할 건가요?”

어디에? 물론 반란조직의 격멸이었다. 그 지도자가 알아서 굴러들어온 탓에 달은 이제 토끼굴에 연기를 불어넣듯 지상인들을 몰아넣고 구제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누구는 헛기침하고 누구는 손을 쓰다듬었다. 미끄러운 눈짓을 타고 무언의 의사가 번졌다.

“유치한 말이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지요? 정말 왠지, 그냥 말입니다.”

딱히 나서서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안건은 어쩐담?”

무심코 나온 혼잣말이지만 결국 모두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새삼 그렇게 생각이 되는군요. 어쩌면 우리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건 정말 도덕이나 양심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용성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런 당위가 아니라, 어쩌면… 가능성의 문제일지 몰라요.”

불완전한 설명이었다. 입을 연 사람도 그것을 알았다. 목을 가다듬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필요하지 않아도 돕는 것, 설사 그럴 자격이 없는 이들이라도 손길을 거두지 않는 것.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저 아래편에 없을 겁니다. 저 자의 말마따나 아주 고결하고 그래서 틀림없이 희귀하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런 논의라도 할 수 있는 집단은 우리가 유일할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마저 오로지 일의 잇속을 따져 결정을 내리는 순간, 단순히 우리와 저들이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종으로서의 인간의 어떤 가능성이 영영 사라지는 것입니다.”

당장 깊게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지만 몇몇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수철이 통통 튀듯 그들 틈으로 보이지 않는 물결이 퍼질 무렵 뭔가 문을 두들겼다.

로봇이 커다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휴정이다!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각자의 식성에 맞춰 적절한 형태, 방식으로 조리된 달옥수수가 제공되었다. 누군가는 수저가 파묻힐 만큼 꾸덕한 덩어리를 받았고 누구는 훌훌 잘 넘어가는 액체를, 누구는 단단한 알갱이를 조금씩 깎아 먹는 것을 받았다. 어느 접시는 혀를 델 것처럼 뜨거웠고 다른 접시는 또 이가 시리도록 찼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오로지 먹는 이의 즐거움만을 위해 철저히 안배된 것이었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위허위 음식을 삼키는 소리가 유일한 기척이 되었다.

 

“지상인들은 참 신기하군.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레민뿐일까?” 달옥수수껌을 짝짝 씹으며 누군가가 읊조렸다. 어금니가 맞닿고 떨어질 때마다 입 안이 온통 춤추듯 울렸다.

“뭐가?” 덥게 데운 달옥수수 수프를 한 술 떠먹으며 누군가가 물었다.

“우리가 달옥수수로 지구의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거. 별로 혼자 하는 생각은 아닐 거야. 나도 여러 번 봤으니.”

제삼자는 너무 말을 길게 하는 바람에 잔뜩 고인 침부터 삼켜야 했다. 쓸데없이 길어진 혓바닥을 자책하며, 발언자는 제 몫의 달옥수수 튀김을 깨물었다. 덥석덥석 턱이 움직일 때마다 고소한 냄새와 더불어 악마처럼 바삭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게 말이야. 그냥 우리가 다 먹을 만큼 먹은 다음에 주니까 그렇지.”

사치스럽게도, 달옥수수풍 양념을 곁들인 달옥수수 구이를 먹으며 누군가 대답했다. 잉걸불처럼 은근히 끼치는 잔열이 그 풍미를 더욱 돋궈주었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그 알갱이를 감쌀 때마다 혀는 열기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견딜 수 없이 즐거워했다.

누가 얼마나 더 게걸스럽게, 걸신들린 듯 먹을 수 있나 경쟁하는 것처럼 그들은 보였다. 의식적으로 오래, 조금씩 먹으려고 해도 정작 손이 넙죽넙죽 음식을 잡아 뜯고 있었다. 손톱에 낀 것도, 입가에 묻은 것도, 심지어는 책상과 바지춤에 후두둑 흩어진 부스러기까지 깨끗하게 그들은 먹어 치웠다. 눈길도, 손끝도, 혀도 잇몸도 전부 그것에 매달렸다. 수챗구멍이 물을 삼키듯 달라붙었다. 그들은 달옥수수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식사는 그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아으, 잘 먹었다. 다음부턴 간식 시간의 텀을 더 줄이지요.”

그럽시다. 만장일치로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할까요? 마지막으로 누가 하고 있었지요?”

“접니다. 말하던 게….”

 

인간의 가능성. 필요하지 않아도 돕는 것. 지구에 더 많은 물자를 보내는 것, 더 많은 식량과 연료를 나누는 것. 그리고 달옥수수까지! 앞다투어 달려 나간 생각들이 각자 벽을 만나 멈춰 섰다. 아직 혀에 남은 그 감촉이 맛이 생생한데, 갑자기 멀어지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었다. 금방 하던 생각들이, 입에 담던 말들이 백만 광년은 더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우두커니 지금에 남겨졌다.

“어….” 발언자가 어색한 신음을 내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나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눈을 피했다.

“더 보내자고 했지요? 달옥수수를?” 침묵.

“음, 굳이 그게 아니라도 다른 것을 좀 더 얹어줄 수 있겠지요. 이곳에서 필요 없더라도 저 아래에선 쓸모가….” “그것만 문제가 아니죠.”

결연하게 누군가 선언했다.

“결국 그 말이 맞습니다. 무언가 충족되면 그보다 더 원하게 되어 있어요. 음식을 주면 마실 것을 원합니다. 마실 것까지 주면 보관할 장소를 원합니다. 그 모든 게 갖춰지면 이제 우리가 먹는 것을 똑같이 원할 겁니다. 우리의 달옥수수를, 설령 그렇게 되어 각자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달옥수수 단 하나의 알갱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은 손을 뻗을 거라구요! 어쨌든 잃을 것은 저들에게는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자지러졌다. 돌풍에 휩싸인 옥수수밭처럼. 푸르러진 달의 표면처럼.

“하지만, 우린 이미 도덕적으로 자극받았단 말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는 운을 뗐다.

“그런 말을 듣고 보았는데 어떻게 우리까지 그럴 수가 있어요! 아아 하지만, 달옥수수!”

그는 목 놓아 외쳤다. 닿을 수 없는 연가(戀歌)처럼 애타게 부르짖었다.

“걱정 마십시오. 내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는 발언권을 얻기도 전 제 ‘해결책’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는 저들을 돕고 싶어요.” 그런가? 하는 낯으로 일동은 경악했다.

“우리는 또 저들을 돕고 싶지 않고요.” 모두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이상할 것 없습니다. 우린 이런 스스로를 또한 이해하며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이런 것을 고대의 성현께서는 ‘양가감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할 수 없는 두 가지 생각을 그럼에도 동시에 하는 것. 이것을 해소할 길은 반드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마이크를 쥔 사람이 작게 물었다. 이제는 공식 발언보다 누군가 한두 마디 던지는 말들이 더 파괴력이 있었다.

“우리는 둘 중 하나의 동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을 원하는 우리 스스로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그걸 버린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나아가 우리가 그걸 사실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조차 모른 채로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뒷말은 그러나 더욱 아리송했다.

“여러분, 우리는 공익광고를 만들 겁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기가 전혀 모르던 안건 혹은 의사 진행이 있었는가.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금세 또 다른 휴정이 선고될 것처럼 보였다.

“아주 반복적으로 나오게 할 겁니다.” “아!” 이것은 이해하기 쉬웠다. 노인도 어린이도 남자도 여자도 부자도 빈자도 텔레비전의 광고만큼은 보기 싫어했기에.

“그리고 아주 길게, 적어도 삼 분!” “아!” 방송 포맷의 맥락에서 그것은 사실상 영원이었다.

“배우는 아주 도식적인 연기를 잔뜩 과장된 방향으로 펼칠 겁니다.” “아!”

“화면의 질감, 색상, 분위기와 배경음… 그것들은 전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슬프되 결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는, 한 번 더 곱씹을 필요가 없도록 지극히 상투적인 동정을 유지할 겁니다.” “아!”

이 ‘아!’들이 왜 나왔는지 정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뭘 하려는 거죠?”

“우리는 지구에 남은 사람들 모두를, 그들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고통받는다는 관념 자체를 하나의 스크립트로, 지루하고 진부한 방송용의 장치로 돌려버릴 겁니다.”

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보기 싫어질 것 같긴 한데….”

“아닙니다, 단순히 지구로부터 눈길을 돌리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구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지구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 싫어하는 것조차 아니지요. 단지 그걸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지는 겁니다. 광고를 보면 볼수록, 거기에 지겨워하면 지겨워할수록, 저곳 어딘가에서 뜨거운 가슴과 쿵쿵 뛰는 피를 가진….” “뭐라고요?”

“그냥 넘어갑시다. 현실의 재현이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그것을 빈번히 목도하면 목도할수록 우리는 스크린의 표상이 현실 어디에서 정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아요! 그리고 마침내는 그것이 전달하는 사실 자체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감각해지지요.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가 그렇게 변하는 것도 모른 채 좀 더 자기중심적이게 변할 것이고, 나중에는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애당초 들으려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양가감정도 뭣도 없이 달옥수수도 헬륨-3도 전부 자연스레 우리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그냥 우리 것이 되는 겁니다!”

 

*

 

“또 그 광고네.” “그거? 삼 분짜리.” “응. 근데 달옥수수는 언제 오는 거야?” “네가 시켰어?” “아니, 멍청아. 광고에서 하는 말 말이야!”

잿빛 하늘을 등진 채 주거니 받거니 고성이 오갔다. 불안정한 전압에 시달리느라 알전구는 노르스름한 빛을 안개처럼 천천히 뿜어냈다. 그럼에도 스크린만은 잔금 하나 없이 멀끔했다.

「이 달옥수수의 맛을 과연 저들이 알까요?」

꼬질꼬질하고 후줄근한 이미지가 연신 나열되었다. 구정물이 흐르는 와중 궁둥이를 까놓곤 똥을 싸는 사람, 위태하게 기울어진 폐허와 그곳에 종기처럼 오돌토돌 돋은 판잣집들, 윙윙거리는 파리 떼, 무슨 동물의 뼈인지도 모를 것이 군데군데 널브러진 화학 늪, 흙탕물을 뒤지다가 무언갈 꺼내 입으로 가져가는 꾀죄죄한 아이…. 어딜 가나 사람이 들끓었고 그들을 따라 기아와 빈곤과 결핍이 도사렸다. 마구 몰려들어 화면을 응시하는 그 대집단은 꼭 하나의 거대한 염증처럼도 보였다. 우울한 곡조의 배경음이 생각 없는 눈물을 더욱 자극했다.

“저기 우리 옆에 옆에 동네 아냐?” “어라, 그러게. 살다 보니 티비에도 다 나와 보네.”

「달옥수수를 나누는 것이 저들에게는 큰 기쁨이 됩니다.」

화면은 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을 비추었다. 뭐든지 크고 똑바르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드러나는 것은 안전한 벽과 지붕이 사시사철 비바람을 막아주는 모습이었다. 쾌적한 하늘과 널따랗게 뻗은 길, 분수대의 물이 새하얗게 부서지며 만드는 무지개. 앞선 표상과 병렬하는 생활의 공간이 아닌 순전히 대조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써 그곳은 활용되었다. 조금 전 발밑에 내깔겨진 게 똥인지 진흙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동네의 불쾌한 잔상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웩. 저런 곳에 살면 우리도 달옥수수를 먹을 수 있겠지?” “바보 아냐? 가만히 있으면 이제 줄 텐데 뭐 하러 저런 델 찾아다녀.”

「달옥수수를 저들에게 나눕시다. 달옥수수를 저들에게 나눕시다.」

더럽고 꼬질꼬질한 동네가 다시 배경으로 나왔다. 둘은 예전 어느 전설의 되살아난 시체처럼 뻣뻣하게 팔을 뻗었다. 포도색 멍이 곳곳에 박여 있었다. 지우개 똥만 한 각질과 부스럼이 우수수 떨어졌다. 병변을 따라 역청처럼 진한 자줏빛 피가 느릿느릿 흘렀다.

「저들에게 달옥수수를.」 화면 속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카메라를 향해 팔을 뻗었다.

“우리에게 달옥수수를.” 둘은 시시덕거리던 것을 그치고 주문처럼 외었다. 팔을 내밀었다.

「저들에게 달옥수수를.」 부르튼 손바닥들이 일제히 벌어졌다.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달옥수수를.” 둘은 달옥수수 팩을 쭉쭉 빨았다. 입 안에 동그란 자국이 남았다.

「저들에게 달옥수수를.」 효과음으로 삽입된 웃음은 행복하다기보다 정확하게 들렸다.

“우리에게 달옥수수를.” 둘은 언제쯤 달옥수수가 올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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