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게 그 악명 높은 태양탄인가?”

장군이 턱을 들며 물었다. 빳빳한 옷에는 온갖 훈장과 견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갑옷을 연상시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검은 물방울이 모로 누운 것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꽁무니 쪽의 작고 투박한 꼬리날개가 눈에 띄었다. 낙하 방향을 조종하는 물건이었다. 한편 그 커다란 대가리 속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 잠들어 있었다.

“별칭은 그렇습니다만, 연구소에서 붙인 정식 명칭은 ‘핵자 분열형 굉탄’으로….”

장군이 매섭게 연구원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기가 죽어있던 그는 동강 난 문어 다리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무, 물론 총통께서 붙이신 명칭으론 태양탄이 맞겠지요. 맞을 겁니다. 아니 맞습니다.”

“태양의 힘을 적국에 퍼붓는 폭탄이라…!”

장군은 그 이름을 고안한 것이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양 들떠있었다. 둘은 나아갔다.

“이건 하우네부로군! 연료 없이 무한정으로 비행하는 무적의 전투기!”

연구원은 제가 해야 할 말을 빼앗긴 탓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앞에 있는 것은 접시를 여럿 겹친 것처럼 생긴 비행체였다. 한 쌍의 날개도 엔진 흡기구도 심지어 관측창조차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전통에 좀 부합하는 것이라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전투 도색뿐이었다.

“연합군 조종사 놈들이 이걸 보고 지을 표정이 상상이 안 가는군!”

“그, 그렇습니다.” 연구원은 간신히 끼어들 구석을 찾아냈다.

“초공식 재현은 아직 어렵지만, 자체 관성을 상쇄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해석기관이 내놓은 결과로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좋아. 누가 봐도 제대로 듣지 않았음이 명백한 투로 장군은 고갤 주억거렸다. 둘은 재차 나아갔다.

“이건 우주 거울이지. 내 말이 맞는가?”

장군이 가리킨 물건은 그런데, 우주는커녕 거울처럼도 생기지 않았다. 온통 쭈글쭈글하고 작게 오그라진 것이 무언가의 포자처럼 보이는 데다가 그 표면도 전혀 매끄럽지 않은, 우둘투둘한 숯 빛을 띠었다.

“그렇습니다. 보시기에 조금 부족하지만, 일단 궤도탈출선을 타고 올라가면 펴지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크기의 오십 배는 족히 늘어나지요. 그렇게 받아들인 태양 복사선을 지상의 한 점에 선택적으로 조사(照射)하면….”

장군이 제 주먹을 내리찍었다. 얼얼한 소리가 났다. “적의 도시에 죽음의 심판이 내리겠지.”

 

연구원은 떨떠름한 빛으로 입맛을 다셨다. 혹시 그 무기에 ‘죽음의 심판’ 따위의 촌스러운 별칭이 붙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지상전함전단 편성은 잘 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

시원스레 답하며 연구원은 머리를 굴렸다.

전쟁해군―크릭스마리네의 꽃이 불침의 잠수항모라면, 국방군―베어마흐트 반격 작전의 알파이자 오메가야말로 지상전함이었다. 전장 수백 미터의 쇳덩이와 그를 움직이는 불멸의 엔진, 최신의 레이더를 장착하고 수백 문의 중포와 수천 기의 고속미사일로 지형을 송두리째 도려내는 그 위력. 호위로 붙는 기갑전력만 하더라도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그러한 진행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높은 분께 제시할 수 있는 언변이 안타깝게도, 연구원에겐 없었다.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흐음. 미심쩍은 눈빛으로 장군이 입꼬릴 씰룩였다. 해석기관이 시시각각 쏟아내는 전산 기록지의 소음이 방을 메웠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그래서 반격 작전은 언제 시행됩니까?” 연구원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했다.

“거의 다 되었네. 총통께서 선언하셨다.”

장군은 연설이라도 하듯 어투를 바꾸었다. 양팔을 쳐올리곤 불끈 주먹을 쥐었다.

“연합군이 그 만들어진 승리에 도취되어 다른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될 때, 그야말로 승리의 여신이 그네들에게 미소 지었다고 더 이상 의심치 않을 즈음, 이 모든 기적병기―분더바페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전선을 지배할 것이다!”

 

압도적인 힘과 지배라.

연구원은 새삼 제가 24시간 머물며 먹고 자고 일하던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가 나간 부엌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결에 닦고 두들기던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분더바페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곳곳에 널브러진 최신예의 기계장치와 그 밖 물리화학의 온갖 경이들. 언젠가부터 그에겐 그런 것들이 일체의 세간이나 여느 정물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 원래 있었고 앞으로도 영영 먼지를 벗 삼아 멀거니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다. 장군의 말이 그를 일깨웠다. 그들은 그냥 물건이 아니었다. 아니 물건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있었고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맹수요 독사요 합금과 전기로 빚어진 인공의 사신이었다. 인류가 이때까지 본 적 없는 피와 재와 그을음이 전선을 물들일 것이다. 철저한 죽음과 파괴가 그 뒤를 잇고 공포가 그 전령으로써 온 대륙과 나라를 휩쌀 것이다. 역사상 가장 쉽게 그리고 또 무가치하게 분더바페들은 인간의 생명을 거둘 것이다. 최후의 부대가 본격적으로 투입된다면 이 땅의 어떤 힘도 이름도 그에 맞서 일어날 수 없으리라.

연구원이 몽상에 푹 잠겨있을 무렵, 장군의 수행원이 다가왔다.

“글로케Glocke의 파일럿이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장군이 눈을 빛냈다. 연구원이 안 그래도 없는 침을 또 삼켰다.

 

 

“설명은 다 들으셨겠지요?”

연구원의 물음에 파일럿은 시원스레 웃음 지었다. 사람이 비좁은 곳에 짐짝처럼 쭈그리고 있는데도, 역시 고르고 골라 뽑은 아리아 민족의 자랑은 달랐다. 풍성한 금발, 깊고 뚜렷한 이목구비, 훤칠한 키, 오뚝한 콧날, 게다가 호탕한 미소와 함께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열. 그야말로 어디 갖다 놔도 아우라를 풍길 수밖에 없는 인상이었다. 조금 뒤에선 대체 무슨 공을 세워 장군씩이나 되었는지 모를 긴 돼지가 글로케의 자태를 입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훌륭해! 탁월해! 그야말로 기적의 기적이로다! 모든 기술, 아니 인간, 아니 어느 인간이 아닌 오직 아리아의 탁월한 두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삼라만상의 경이야!”

글로케란 것은, 쉽게 말해 두들겨 소리를 내는 종(鐘)이었다. 모양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글로케 자체가 ‘종’이라는 일반명사였다. 말마따나 분명 그 외양에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위보다 아래가 좀 더 두껍고 뚱뚱한 그 모양새와 물결처럼 날렵하게 내려오는 윤곽. 기름을 칠한 듯 반들거리지만 무엇도 비치지 않는 칠흑색 표면. 다만 그 내부에선 알려진 어떤 동력기관과도 닮지 않은 기이한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군. 종을 닮았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그런 힘이, 근본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단 말이야. 어렸을 때도 이런 걸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언제였던가….”

연구원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위대한 임무를 그야말로 목전에 두고 있었다. 잡념이 끼어들어선 안 되었다. 파일럿과 알음알음 눈을 맞추며 연구원은 필요한 말을 했다.

“반―시간 역장이나 그 원리에 대해선 말을 삼가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걸 다룰 수 있느냐고, 그런 방면에서도 기본적인 조종법은 다 파악하신 거로 압니다. 오히려 관측 임무 관련해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장군은 연구원의 어깨를 끝장낼 기세로 손을 내리찍었다. 잇새로 웅크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최후의 최후가 되면, 제3제국은 반드시 승리한다! 반드시! 사실상 이미 정해진 그 미래를 엿보고 오는 것이 어려울 리 있나?” “그렇습니다. 어려울 리 없습니다.”

눈앞의 이 장교마저 실은 장군과 마찬가지의 부류인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나 비위를 잘 맞춘 까닭에 파일럿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떠안은 것인가. 연구원은 헷갈렸다.

“승리한 제3제국의 미래를 목도할 것. 그 위업과 전략을, 무엇보다 우리 아리아인의 사명으로서 운명 지워진 그 유일한 미래를, 역사적 필연성을 똑똑히 기록하여 현재로 돌아올 것. 제 임무는 명확합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어쩌면 혹시 아나, 미래인들이 자네가 도착할 걸 이미 알고서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줄지! 총통께서 설계하신 게르마니아의 웅장한 그 모습이 어떨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가고 싶군 그래!곧이곧대로 다 듣다간 뇌가 쪼그라들 것만 같아, 연구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를 흘렸다.

 

“그럼,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파일럿이 물었다. 짙은 눈썹과 빨려들 것처럼 깊은 시선. 날카로운 턱선, 목을 따라 비스듬히 솟은 건강한 빗근.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렇게까지 알랑방귀만 뀌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 연구원은 모든 일이 끝나면 잠을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뒤집히는 것이 제가 보아도 너무 빨랐다.

연료가 주입되었다. 최종 단계였다. 이후 요식 행위에 불과한 절차들이 좀 지나고, 장군과 연구원을 위시한 다른 이들은 모두 안전선 너머로 물러났다. 글로케의 뚜껑이 닫히고 투명하되 엄청나게 두꺼운 합성수지로 된 관측창만이 내외부의 눈길을 이어주었다. 파일럿은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앉은 자리에서 경례를 붙였다.

“글로케 가동 시작합니다!” 연구원이 안전지대의 난간을 꽉 붙잡으며 외쳤다.

파도처럼, 보이지 않는 힘의 물결이 몇 차례인가 일었다.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종류는 아니었다. 굳이 꼽자면 소름이 돋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그보다 훨씬 강력했다. 얼마 안 가 서류나 자잘한 집기 따위가 나뒹굴고 글로케를 받치던 지지대에서 쇠가 우는 소리가 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솜털이 쭈뼛 솟고 등허리가 허전해졌다. 주위에 모인 이들이 더듬거리며 눈과 입을 가렸다. 순전히 무심결에 하는 행동이었다. 무언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맞닥뜨린 이들의 반응이었다. 이윽고 차차 소란이 잦아들었다.

글로케는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맑고 깊은, 흑단처럼 고급스러운 검은빛이던 그 표면은 녹과 같은 더러운 적갈색으로 변했다. 얽은 피부같이 일어난 부분들은 마치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얼기설기 그 감염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 악취. 전쟁통에 매캐한 화약 냄새야 특이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도가 있었다. 글로케에 들러붙은 냄새는 코가 아니라 눈과 입과 귀를 먼저 틀어막아야 했다. 더러운 축사에 들어가면 암모니아 탓에 눈의 핏줄이 상하는 것처럼, 얼굴의 일곱 구멍이 온통 바늘로 들끓는 기분이었다. 발악하듯 뱉는 기침 소리만 한동안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실, 패했어?” “아뇨, 성공, 했, 습니다. 켁!”

둘은 눈물 콧물을 신나게 흘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다행히 환기 시스템이 작동하며 유해한 공기를 차츰 희석시켰다. 시야도 점점 분명해졌다.

“무슨 소리야? 이동에 실패해서 기계가 망가진 게 아냐?” “아닙니다. 이걸 보시면….”

봐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렇게 말하듯 연구원은 손에 든 뭉치를 내던졌다. 테이프처럼 늘어진 전산 기록지가 하늘하늘 가라앉았다.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다만 도착 순간을 출발 순간과 정확히 겹쳐서, 저희가 보기에만 아무 데도 못 간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안에… 어라?”

씨근덕대는 숨을 고르며 연구원은 다가갔다. 관측창은 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얼룩과 찌꺼기로 덮여 있었다. 무턱대고 손을 댔다간 평생 한 팔을 못 쓰게 될 성싶어, 발만 동동 구르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고 어둡고 얼룩덜룩한 구멍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잘못 보았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살짝 음 이탈이 일어나는 통에, 장군은 열두 살의 앳된 소녀처럼 말했다.

“꼭 저기….” 연구원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훤칠한 미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배경과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하고 작고 뭉개진 무언가가 조종석에 놓여있었다. 인간의 모양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앉을’ 수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문어 따위의 연체류를 닮았지만 훨씬 역했다. 농포처럼 돌출하여 끔뻑거리는 두 눈. 호흡공의 움직임에 맞춰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커다란 몸통. 그 주변으로는 채찍처럼 얇고 나긋나긋한 말단이 뻗어나갔다. 조종석 내벽과 아예 들러붙은 것도 있었고 어떤 설비를 친친 감고 몸을 고정하는 것도 있었다. 몸에는 어떤 축도 균형도 비례도 없었다.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마구 헝클어졌다. 피와 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무질서하고 추한 것이었다.

나는글로케의 파일럿이었다.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핥았다. 뒷머리가 찌르듯 아프고 이가 부딪혔다. 무거운 물체를 끌 때처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네라고? 하지만 조금 전에만 해도….” “반―시간 역장의 부작용입니다. 신체 변이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여전히 글로케가 뭐 하는 물건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구는 장군을 제치고, 연구원이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내내 휘둘리던 눈빛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배경복사선은 허용 범위 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기기 고장인가요?”

나는 임무 이상의 것을 그곳들에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다.

누군가와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것처럼 그것은 소리를 냈다. 어쩌면 글로케 전체가 울리며 말을 만들어내는지 몰랐다. 그와 같은 꼴이 된 지금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된 거야?” “임무 허용량 이상의 시간 이동을 반복한 것 같습니다.”

장군의 힐난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연구원은 눈길만 힐끔거리며 글로케의 파일럿을 주시했다. 한편 장군이 성큼 다가오자 그것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 같다고, 내심 생각했다.

“반―시간 역장의 영향을 아예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웬만큼 넘지 않으면 안전할 텐데. 이, 일단.”

“일단이고 뭐고 이게 지금 무슨 꼴인가!” 장군이 분노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총통께서 뭐라고 하시겠어, 게다가 이 머저리 같으니라고! 순혈 아리아인으로써 자네의 몸은 개인 이전에 제3제국의 귀중한 자산임을 모르나! 어쩌자고 그런 꼴이 될 때까지 기기를 몰았지?”

 

그것이 눈을 빙글빙글 돌렸다.

3제국총통, 아리아.

시선이 아니라 알이 송두리째 앞뒤로 돌았다. 뒤편에 연결된 일련의 관과 신경이 눈두덩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짝을 잃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그에 휘감긴 눈알이 똑 절반으로 나뉘었다. 꼭 올챙이알을 보는 것 같았다. 곧 쪼개진 두 덩이 모두에 각각의 동공과 홍채가 생겼다. 세 개의 눈이 그 자리의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나는 임무 이상의 것을 보았다. 알아야 했다. 그래서 알았다.

무엇을? 하고 물으려 했다. 그리고 글로케가 빛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으로.

연구원은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그런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무릎이 더 이상 없었다. 손을 짚었지만 물에 몸을 담그듯 자세가 쑥 내려갔다. 팔뚝 아래가 전부 연기처럼 흩어진 까닭이었다. 어깨가 길게 늘어나더니 바깥쪽부터 낭창낭창 끊어졌다. 폐가 주륵주륵 녹아내리며 끔찍한 고통이 가슴팍을 후볐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연구원의 비명은 제 몸뚱이에 갇혀 나가지 못했다.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부엌칼 이상으로 복잡한 모든 도구가 해체되었다. 나사와 기어와 벨트와 못과 벽돌이 하나하나 포슬포슬 제자리를 벗어났다. 연결된 것들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전기가 끊기고 폭발이 일어나고 벽과 천장이 부스러기로 줄어들었다. 격납고에서 떨어져 내린 고고도 폭격기가 글로케를 후려쳤다. 모래 튀기는 소리와 함께 알루미늄 합금으로 된 날개가 그대로 녹아 없어졌다. 동체에 아로새겨진 오렌지색 절단면은 아이가 자른 종이처럼 삐뚤빼뚤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켜켜이 내리는 죽음의 한가운데, 너덜너덜한 꼴이 된 검은 종만이 고고히 빛났다. 조종석에 앉은 그것은 눈길을 사방으로 희번덕거렸다.

나는 임무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위협이 아니다. 그래서 말소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추었다. 글로케는 온데간데없었고, 반격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

 

Dear Diary,

오늘은 오랜만에 방공호에서 나올 수 있었어! 게다가 엄마 말로는 앞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된대. 다 끝났다는 거야. 더 이상 축축한 곰팡이들이랑 콩 통조림을 안 나눠 먹어도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나오자마자 우리가 제일 먼저 한 건 라디오를 듣는 거였어. 엄마는 중요한 말이 있을 거라고 말해줬지. 우리 집에 폭탄이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텔레비전으로 그 중요한 사람의 말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젠 새집에 들어가서 새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겠지. 다 끝났으니 말이야.

라디오는 루즈벨트라는 늙고 지친 아저씨가 계속 떠드는 것밖에 나오지 않았어. ‘무조건 행복’이니 뭐니 하는 말을 했던 것 같지만, 난 너무 졸려서 꾸벅꾸벅하느라 잘 듣지 못했어. 오늘따라 햇살도 너무 좋지 뭐야. 데이비스 오빠가 먼 곳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예전처럼 들을 쏘다니며 놀았을 텐데. 엄마가 여자가 그리 왈가닥이면 어쩌냐고 핀잔을 주지만, 데이비스 오빠를 오히려 내가 놀아주는 건데 뭐.

모든 게 다 끝나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게 참 바보 같아. 어른들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 아무거나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바보 같은 소리들은 전부 어른들한테서 나온걸. 도시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폭탄에, 구름처럼 움직이고 앞도 뒤도 없는 유령 비행기에, 산만큼 거대한 괴물자동차라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른들은 내가 아직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 나이인 줄로 아나 봐. 모든 산타가 진짜는 아니란 걸 난 벌써 안다구.

그런데 이상한 거 있지. 늙은 아저씨가 혼자 별 내용도 없이 떠드는 걸 듣고 엄마는 조금씩 울기 시작했어. 멋쩍어져서 바깥에 나가니 웬걸, 어딜 가나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였는데 모두 그러고 있는 거 있지! 난 뭐라고 말을 걸기도 겸연쩍어서 아주 외진 곳을 찾아 돌아다녔어. 도서관이 있던 곳, 데이비스 오빠랑 자전거 연습을 하던 언덕, 참. 너 공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아주 엉망이야. 엄마 말로는 비가 오면 거기가 그대로 호수가 될 것 같대! 하하, 정말 웃기지? 왜 엄마는 웃지 않은 걸까. 아빠가 돌아오면 다시 웃겠지?

 

아 맞다, 그리고 제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그렇게 사람이 없는 곳만 돌아다니다 보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깨끗한 옷을 입은 아저씨가 거기 있는 거 있지. 난 나도 모르게 코를 막았어―엄마가 봤으면 꼼짝없이 혼났겠지. 얼마나 예의 없는 행동이니!―냄새가 나서가 아니라, 아무 냄새도 안 났거든! 우리 집이 폭탄을 맞을 때 나던 연기, 데이비스 오빠가 딱 하룻밤 우리 방공호에서 묵을 때 구석으로 숨겨놨던 눅눅한 옷, 까맣게 타버린 벽돌을 건드리다가 반으로 깨졌을 때 훅 퍼지던 흙먼지도, 아무것도!

아저씨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뭔가 알아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어. 입이 살짝 웃었는데, 그게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인가 봐, 아마. 그러더니 이렇게 묻는 거 있지.

“우리가 이겼어?”

난 잘 모르겠어서, 그리고 또 엄마가 모르는 사람하고는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고개만 휘저었어.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진 몰라도 별로 이긴 것 같진 않았거든. 그렇다고 딱 잘라서 졌다고 말하기엔 또 헷갈려서.

“그런가?”

내가 전혀 모르는 말로 말했지만, 아마 그런 거였을 거야. 이상한 아저씨는 그러더니 훌쩍 멀어졌어.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엄마가 정말 화를 낼까 봐 참았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지. 아저씨가 가던 쪽에는 마을 교회에서 떨어진 종 같은데, 그것보다 훨씬 큰 게 덩그러니 있었어. 신기한 건 나중에 가니까 거기엔 불탄 들꽃 말곤 아무것도 없는 거 있지. 내가 잘못 봤나 봐.

저녁을 먹으니까 바다 냄새가 나는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있지. 꼭 아빠가 몰던 자동차 천 대가 한꺼번에 짖는 것 같았어. 그게 점점 커지면서 우리 집 쪽으로 다가왔지. 군인들의 행진이었어. 우린 모두 집밖에 서서 그걸 지켜봤어. 트랜트 씨네도 길모어 씨네도, 그런데 카마이클 아줌마는 혼자 있던 거 있지. 에일린은 그새 어디로 간 걸까.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 날 때까지 밖에 있던 걸까. 아무튼 그 소리를 내던 건 군인들이었어. 근데 옷이 우리 아빠가 구경시켜준 거랑 달랐어. 좀 더 검고 무뚝뚝하고, 어깨에 이상한 무늬를 매달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가는 거 있지. 그러니까 낮에 라디오를 들을 때처럼 어른들은 또 펑펑 울고, 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오늘은 왜 이리 다들 눈물보가 되는 걸까. 힘들어 죽겠어.

저 군인들도 어딘가로 돌아가는 거겠지. 데이비스 오빠랑 마지막으로 논 게 너무 오래전 일 같아. 또 같이 아이스크림선디 먹고 싶어.

 

*

 

Dear Diary,

시발, 차등민족 좋아하네, 실제론 노란 원숭이들이나 검둥이들 다음으로 낮은 곳에 우릴 처박아놓고선! 지금 이걸 쓰는 지금까지 아직도 배가 쑤신다. 아리아화(化) 시술이라나 뭐라나?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면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쥐새끼같이 생긴 군바리가 찍찍거리던 게 아직도 선하다. 여자인 나한테도 흠씬 두들겨 맞을 것처럼 생긴 게, 총 걸친 따까리들 몇 끼고 돌아다니니까 아주 기세등등한 모양이다. 우리끼리 모였을 땐 그놈 핏줄에 아마 아리아 혈통보다 시궁창에서 똥 주워 먹던 돼지 핏줄이 더 많이 섞였을 거라고 낄낄거린다.

시발, 가만히 앉는 것도 못하겠다. 허리를 숙이고 펼 때마다 등 안쪽이 불로 지져진 것처럼 찌릿거린다. 옆구리가 결릴 때처럼 조금씩만 움직이려고 해도 온몸이 욱신거려. 그 미친 의사들이 녹슨 칼이랑 전기봉으로 내 다리 사이에 무슨 짓을 했는진 알고 싶지도 않아. 확실한 건 그게 뭐든 좋은 건 아니라는 거다. 소문은 들어봤자 내 기분만 나빠지고 또 밤잠만 설치지만, 확실한 건 이 아리아화 시술을 훨씬 먼저 받은 여자들을 두고 도는 이야기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게.

정말 눈으로 확인한 사람은 없지만 이 도이칠란트 머저리들이 자기들도 잘 모르는 기술로 그놈의 아리아화 시술을 했다는 말이 있어서, 그걸 받은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괴물이 된다고들 하는 거다. 근데 정작 고급 정복 차려입은 윗대가리 노친네들한테도 그런 부작용이 나타나서, 피둥피둥 살찐 도이칠란트 돼지들도 겉만 멀쩡하지 방귀도 제대로 못 뀌는 배냇병신뿐이라는 말도 허벌나다. 시발, 아파!

이렇지 않았는데, 아픈 게 아니라 이런 소문 같은 걸 안 들어도 됐는데. 지금은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아무것도 안 말해준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있던 게 떠오른다.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눈이 썩어서 뇌가 그 사이로 흘러내리도록 실컷 봐둘걸! 요즘 방송은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질 안 말해준다. 대신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질 말해준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그거다. 뭐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

근데 그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실이길 바란다. 뭐냐면, 왜 그거. 숲속에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거. 적어도 제대로 정신머리가 박힌 사람들. 아리아니 뭐니 하는 돼지 새끼들을 몰아내고 다시 내가 어릴 때처럼 모든 걸 돌려놓으려는 사람들.

시발, 이따위 거나 쓰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너무 아파서 횡설수설했다. 오늘은 이상한 일이 있었다. 좀 다른 생각을 하려고 철책 안쪽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남자를 오늘 만났다. 옷은 도이칠란트 병신들이 입는 거랑 비슷한데, 훨씬 깔끔하고 빳빳했다. 내가 그런 옷을 입은 남자를 보면서도 간부라고 생각 안 한 건 근데 냄새 때문이었다. 거즈 밖으로 질질 흘러내리는 썩은 피의 냄새도 검게 타들어 간 흙냄새도 나질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랫동안 어딜 돌아다닌 사람처럼 바람 냄새가 났다. 아주 깨끗하고 얕은 거. 꼭 산들바람처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퍽이나 그렇겠다. 난 그 미친놈이 어눌하게 입을 열 때까지 허둥대고 있었다. 거기엔 그놈이 이상하게 낯이 익어서 혹시 만나도 좋은 얼굴인가 판단이 안 돼서 그러던 것도 있다.

 

우리가 이겼는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내 대답은, 그렇겠지? 시발놈아. 정말 소리 내 뱉진 않았다. 오히려 웃어버릴 뻔했다. 세상에 아리아화 시술이 아무리 쪼다같아도 그렇지 수용소에서 멍청하게 돌아다니면서 얼빠진 질문이나 던지는 병신을 간부랍시고 채용하다니. 수행원도 안 보이고 마침 큰 종 같은 게 벽처럼 있어서 우리 볼 사람도 없겠다, 콱 돌멩이로 대가리나 찍어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누가 시체를 발견할 거고 그럼 이 일대가 발칵 뒤집힐 테지. 다만 난 이왕 멍청이를 붙잡은 거 좀 갖고 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위에 쓴 내 나름의 소문을 환상적으로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대충 숲속에 괴물들이 있는데 걔네가 금세 뛰쳐나와 모든 걸 파괴할 거라고.

괴물이라고?”

그 새끼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슬쩍 던지고 말려고 했는데, 그 새끼가 생각보다 너무 잘 믿어서 솔직히 내가 더 놀랐다. 이왕 그렇게 된 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 주었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괴물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도이칠란트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땅을 파고 돌아다니면서 부리부리한 눈에 굴착기처럼 커다란 앞발을 단 두더지 인간들이라고. 신나게 떠들다가 하마터면 그것들이 숲에 산다는 이야기를 할 뻔했다. 왜냐면, . 숲에 실제로 괴물은 없어도 정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난 더 떠들다가 정말 하면 안 되는 말까지 할까봐 그 병신을 남겨놓고 잽싸게 도망갔다. 내내 꺼림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새끼가 똑같이 어눌한 말로 날 불렀지만, 제깟 게 어쩔 건데? 천치니까 분명 내가 누군지 찾지도 못할 거다. , 그렇겠지? 갑자기 걱정이 된다. 하필 이럴 때 또 시술을 받아서, 시발! 혹시 그놈이 따까리들 막 다그쳐서 날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건 생각해봤자 내 손해다. 그냥 빨리 자자. 곤로 때문에 또 코밑에 다 시커메지겠다. 이럴 때 걸리면 더 큰일이다. 요즘 따라 특별히 말을 안 듣거나 들을 수 없는 사람들한테, 악마의 발톱이니 뭐니 하는 물건을 박아 넣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내가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되기는 싫어.

엄마,

 

*

 

Dear Diary,

눈도 침침해졌고, 계단을 한숨에 올라갈 수도 없다. 무릎에선 돌 깨지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툭하면 숨이 차서 어딜 돌아다닐 수도 없는데, 반대로 이제야 똑바로 보인다. 이제야 알겠어. 그 이상한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세 번 다 같은 사람이었어. 내가 이렇게 될 동안 그 남자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증오스러운 아리아인들이 시간마저 거슬러 지배를 퍼뜨리는 법을 찾아낸 걸까? 우리의 미래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과거마저 빼앗고 싶은 걸까? 오늘 긴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궁금한 게 너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답을 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이 차등민족용 거주소라고 이름 붙여진 돼지우리 안에서는. 또 특히 그 돼지우리의 가녀린 문짝이 금세라도 뜯겨 나갈 것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말이다. 안에 있는 걸 다 안다면서 참 빨리도 수선들이람. 아무리 누더기와 건초로 틈을 꽁꽁 막아도 외풍은 잘도 밀고 들어오던데. 저놈들은 뭐 이리 느려 터졌는지 원. 그래도 자물쇠 하나는 튼튼한 거로 했지. 이 도시에 마지막 남은 아리아 은행이 무너질 때 챙긴 잠금쇠걸랑.

나를 잡으러 온 거다. 당연히 다시 수용소로 보내겠다는 건 아니다. 이 쭈글쭈글한 손등과 흘러내리는 주름 좀 보라지. 벽돌을 쌓느니 차라리 벽돌이 날 실어 나르는 게 더 빠를 나이다. 영광스러운 아리아인의 씨앗을 몇 번이나 낳지 못하게 만들고 또 빼돌렸다는 혐의. 그게 지금 나한테 걸려 있다.

 

날아온 종이 길이를 보면서 한번 놀라고, 거기에 빼곡하게 적힌 내 추정-자손들의 한 번도 쓰이지 못한 이름을 보고 다시 놀랐다. 그러니까 윗동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 것들에게 멋들어진 도이칠란트식 이름을 지으면서 정작 내가 아주 잘 아는, 아니 아리아화 시술을 받은 모든 여자들이 임신한 즉시 알아챈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악마의 발톱이 그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게 분명하다.

분명 뱃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어버린 것도 미처 다 빚어지지 못하고 떨어져 내린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젊을 적 돌던 소문이 맞았다. 시술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기껏 낳은 아이들도 숲에 남겨두고 와야 했다. 그것들은 잘생긴 금발의 미청년과 미소녀를 만들어내는 대신 뜨겁고 축축하고 꿈틀대고 할퀴고 물어뜯고 목말라하는 무언가를 우리 뱃속에 처넣었다. 난 그걸 매일 밤 느꼈는데. 그것이 내 생살을 헤집는 고통에 이가 다 상하고 머릿가죽이 벗겨질 만큼 그걸 참았는데. 내 뱃속의 무언가가 결코 이 세상의 빛을 봐선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분 매초 느꼈는데.

오늘따라 손이 아프다. 관절도 욱신거린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쓴 건 오랜만이다. 그 남자 덕분일까? 내가 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어딜 가나 이런 것밖에 볼 수 없냐니, 나는 그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쏘아붙였는데, 그는 도리어 이 시대가 길을 잃었다고 했다. 자기가 돌아가면 다시 바로잡을 거라고. 위대한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을 아.

그들이 왔다. 날 잡아

 

남자가 일기장을 닫았다.

찢어지고 태워지고 얼룩진 내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뜯어진 표지는 그조차도 버려진 신문이나 전단 따위를 겹쳐 조악하게 때운 것이었다. 남자는 문득 자기가 입은 것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 수 시간만큼의 수십 년을 거쳐 지금으로 왔다. 사포질한 것처럼 깔끔하게 연마된 제복에선 아직도 연구실의 시멘트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탁 트인 하늘은 변색된 종이처럼 쾌쾌한 오줌색을 띠었다. 그 와중 흘러가는 구름은 병소에서 흘러나온 고름처럼 보였다. 지평선 너머 곳곳에서 매캐한 연무가 치솟아 시야를 더럽혔다. 나무나 풀은커녕 낙엽조차 볼 수 없는 황무지에는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화학약품의 오염이 스며 있었다. 본디 도시였던 것인지, 혹은 지어지지 못한 청사진인지 인간의 손길이 닿은 석재나 판재 따위가 여기저기를 나뒹굴었다.

“자,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여 모인 여러분을 위해, 곧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더분하게 떠드는 치는 무시하고, 남자는 모여든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들 모두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칼이었다. 찬란한 빨간색에 샛말간 노란색에 산뜻한 푸른색 등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무지개를 방불케 했다. 허리까지 오는 것이 기본이고 거기에 화려한 꼬임을 넣거나 각양각색으로 땋고 잇는 등 엄청난 공을 들인 것 같았다. 다만 나머지 옷차림은 좀 수수한 편이라, 대체로 얼굴까지를 덮는 꼬질꼬질한 넝마주이가 걸친 것의 전부였다. 남자는 자신이 눈에 띌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단상을 살폈다. 진행자는 자신이 왔던 시간에서라면 불임시술의 대상이 되었을 신체장애인―등이 굽고 작달만 한 난쟁이―이었다.

곧 가림막이 걷히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한 장의 그림이었다.

 

그림의 내력에 대한 이런저런 소개나 서로들 주고받는 말은 거의 듣지 않았다. 남자에게 그것은 어차피 원본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유화일 뿐이었다. 새까맣게 그슬린 캔버스는 아무리 봐도 쓰레기에 가까웠고, 그나마 구석에 작게 남은 징검다리와 물레방아의 끄트머리를 보아 본디 풍경화였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120자 5000해(120,500,000,000,000,000,000,000,000) 에르스마르크!”

“120.5 나왔습니다.”

“125자 에르스마르크!”

“125 나왔습니다.”

“155자 5000해 에르스마르크!” “155.5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군. 남자는 곱씹었다. 분명 탁 트인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있는데, 도리어 글로케의 좁아터진 조종석이 더 쾌적하게 느껴졌다. 조금 깊게 숨을 쉴라치면 가슴이 턱 막혔다.

“어떻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힐끔. 하고 남자는 눈길을 돌렸다. 넝마주이를 걸친 이들 중 하나였다. 숨결을 타고 썩은 고기의 악취가 풍겼다. 벌린 입속엔 모양도 크기도 제각기 다른 이가 울퉁불퉁 돋아 있었다. 꼭 해바라기 씨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요 근처에선 못 보신 분 같은데… 말끔하신 걸 보니 성에서 오셨나?”

당연히 못 보았겠지, 얼간이 같은 것. 남자는 저주를 퍼부었다. 성에서 왔다는 말은 아마 권력기관을 뜻하는 은어일 테다. 그나마 이 시대의 지배층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아직 건강한 지덕체를 갖춘 아리아인들과 그들의 조직 체계가 적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 터였다.

“지금 무얼 하는 거지?” “경매입죠, 물론. 보시기에 안 좋은가?”

“실망스럽군.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어디까지 이들이 알고 있을지, 알고 있다 해도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아리아의 정신을 고양하는 건강한, 창조적인 예술이야말로 총통께서 아끼시던 것들 중 하나였지. 그런데 아직도 이따위 부스러기나 다름없는 역사의 파편을 감싸고도는 꼴이라니. 제3제국 전쟁 이후의 새로운 문예사를 전연 만들지 못할 만큼, 작금의 예술가들은 뒤떨어졌단 말인가?”

어차피 진지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바로잡는다면 결코 오지 않을 미래니까. 그래서 넋두리하듯, 수면에 돌을 던지듯 남자는 그런 물음을 내려놓고 떠나가려 했다. 누더기를 걸친 무지렁이들이 그따위 말에 크게 신경 쓰리라 믿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경매가 멈추었다.

모든 말소리가 멎었다. 제각기 팔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던 이들이 가만히 섰다. 물끄러미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자신이 물음을 던지고 사라지는 대신, 어느새 자신 스스로가 물음으로서 이들 한복판에 던져진 것을 알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서 씨근덕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굴을 감싼 누더기가 비웃듯 떨렸다.

“지금 무얼 하는 거지.”

“당신께서는 성에서 왔지요. 당신께서 우릴 이렇게 만들었지요!”

기묘했다. 화가 난 것처럼 씩씩거렸지만 정작 어투는 평온했다.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면서도 또박또박 예의 바른 억양을 지켰다.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활짝 벌어진 입술. 누군가 그들의 목구멍과 표정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을 두고 소용돌이의 모양으로 그들이 늘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더기들이 정신없이 떨리고 치솟고 들썩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리아인입니다! 만세!”

박제된 벌레처럼 뻣뻣한 동작으로 그는 경례했다. 남자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나 다른 이의 손길과 부딪혔다.

“우리는 당신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만세!”

경례를 위해 치켜드는 손이 남자의 등에 걸렸다. 살을 파고드는 아픔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동작은 그들의 행동 양식 가장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팔에 걸리는 것이 바위나 나무라도, 그들은 팔뼈를 부러뜨려서라도 경례를 해낼 것이었다. 해내야만 했다.

“우리는 육각별의 사람들 위에 흙을 덮었습니다! 만세!” “차등민족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줬습니다. 만세!” “눈이 째진 원숭이들을 죽였습니다. 만세!” “검둥이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불을 댕겼습니다. 만세!” “아리아의 정신이 아닌 것은 모조리 부수었습니다. 도시를 숲으로, 숲을 사막으로, 사막을 다시 이 폐허로 바꾸었습니다. 만세!” “당신께서는 파괴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익혔습니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잊었습니다! 만세!”

 

그들이 일제히 걸친 것을 벗었다. 거적때기가 비누 거품처럼 흘러내렸다. 동시에 쓰고 있던 가발도 벗겨졌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전부 인조의 것이었다. 악마의 발톱. 남자는 여자의 일기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를 떠올렸다. 모여든 이들은 모두 머리가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다. 어느 곳은 부어오르고 어느 곳은 쪼그라들고, 상한 빵처럼 변색되거나 닳아 없어진 곳도 심심찮게 보였다. 절개 부위를 엮어 고정하는 것은 담배만큼이나 굵은 금속침들이었다. 단면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싯누렇게 뜬 살과 새까만 딱지를 오글오글 뱉어내고, 그 양쪽마다 두개(頭蓋) 내로 단단히 뻗은 침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이어졌다. 그런 것이 모두의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파고들었다, 붙잡았다. 꼭 무언가의 발톱처럼.

“너희는 진정한 영도자를 잃었을 뿐이다, 그것뿐이야!” 남자는 안간힘을 썼다.

“두려워 마라. 너희의 과거를, 나의 미래를 바로잡아주겠다. 나는 과거에서 왔다. 아리아인이 진정 건강하고 균형 잡혀있던 시대에서! 다시 돌아가면 너희의 이런 세상이 결코 생기지 않게 만들어주마. 이로써 교훈을 얻어, 결코 쇠하지 않는 게르마니아가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가 진정 균형 잡힌 아리아인입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시키시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만세!” “이곳이 게르마니아입니다. 우리는 아리아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세!”

그때야 남자는 그들의 몸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 눈을 스스로 뽑아버리고 싶어졌다. 숲을 사막으로, 사막을 폐허로. 숲속의 괴물. 여자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말이 또 떠올랐다. 기묘한 방향으로 그 얼토당토않은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안팎이 뒤집힌 고기 주머니들. 창자와 염통이 바깥으로 드러나 흙바닥을 디디며 긁히고 찢어지고 손발은 되레 신체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 개똥 냄새를 풍기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생명의 공식. 그것이 괴물이 아니라면 어느 것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 그가 헐떡였다. “너희는 총통께서 이루고자 하던 모든 것을 위배한다!”

 

이것 봐, 무슨 일이야. 국가 경찰이다, 당장 비켜!

괴물들 틈에서 질책이 들려왔다. 분명한 사람의 말이 들려왔다. 남자는 저를 둘러싼 살의 소용돌이가 조금씩 길을 터주는 것을 느꼈다. 뚜벅, 뚜벅. 발소리였다. 미끌리고 휘젓고 비비적대고 철퍽대는 이 괴물들의 기척 대신 또렷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당장 해산하지 못해! 엇, 그 옷은…!”

“성에서 오신 분이야! 영광입니다! 장교 각하!”

한 쌍의 멀쩡한, 두 팔 두 다리 제대로 된 이목구비를 갖춘 경관들을 보자 그는 눈물이 나도록 반가워졌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게서 일제히 비열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다. 여전히 행복하게 즐겁게 그들은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들은 아리아의 혈통을 부정했습니다, 만세!” “아리아화의 은혜입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가 됩니다, 만세!” “열등한 것. 속된 것. 아리아로써 우리는 은혜롭습니다, 만세!”

“아리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차등민족은 복종하라!”

둘은 즉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멋진 모자가 스르륵 떨어졌다. 차이점이라면 가발을 쓰지 않은 것뿐이었다. 반들반들한 머리통을 갈가리 붙잡은 것은 역시 악마의 발톱이었다. 짚 인형같이 뻣뻣하게 선 그들을 둘러싸고 재차 비열한 웃음이 번졌다.

“차등민족의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라!”

남자가 무언가 해볼 틈도 없었다. 제각기 권총을 뽑아든 경관들이 턱의 가운데, 살이 움푹 들어간 곳으로 총구를 디밀었다. 펜의 획을 긋듯 아주 간단하게 방아쇠가 당겨졌다. 피가 부채꼴로 흩뿌려졌다. 뼈와 부딪힌 총알이 두개골을 박살내는 소리가 났다. 머리통이 씹던 껌처럼 온통 늘어나 덜렁거렸다. “만세! 만세! 만세!”

자신들도 영문을 모르는 찬양을 괴물들은 연신 뇌까렸다.

 

이건 미쳤어, 이건 미쳤어. 전부 미친 것들 뿐이야. 어느 것 하나도 제3제국이 아니다! 혼잣말을 되뇌는 것은 그도 매한가지였다. 폐허를 헤치며 정신없이 글로케로 향하는 내내 남자는 중얼거렸다.

 

*

 

“여긴 또 언제지?”

파일럿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시간을 장소처럼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다.

“훨씬 더 먼 미래인가?”

남자는 가장 마지막으로 본 풍경을 떠올렸다. 그와도 한참은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태양도 보이지 않았다. 온 사방이 종잇장처럼 균질하게 밝았다.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땅은 부연 회색이었다.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가 먼지만큼 작은 입자로 가득했다. 아니 그것이 곧 먼지였다. 모래조차 늙어 없어진 뒤에 만들어진, 고운 먼지로 된 사막. 지형마저 시들어 사라진 듯 작은 둔덕도 보이질 않았다. 그 한복판에서 그나마 형상과 색이 있는 것이라곤 제가 타고 온 글로케가, 그나마 마음이 있는 것이라곤 제 스스로가 유일했다.

“이제 어찌한단 말인가. 미래가 이토록 길을 잃은 탓에….”

그는 걷는 것 같지도 않게 걸어 다녔다. 발이 빠지지만 않으면 모래는 감촉도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지표로 삼을 해나 달도, 점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언덕도 없으므로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도 고프지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글로케는? 퍼뜩 그런 생각과 함께 남자의 신발코가 무언가를 걷어찼다.

기계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육면체 형상에 넓적한 사각유리가 전면에 있고, 위에는 안테나처럼 보이는 은색 막대기가 하나 달려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이내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팽팽한 쇠줄이 우는 것처럼 기이한 소리와 함께 그것에 불이 들어왔다. 무질서한 흑백의 노이즈가 사각의 유리를 한가득 채웠다. 동시에 뭐라 형용키 힘든 난잡하고 부산스러운 메아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남자는 뒤로 물러났다.

「게르마니아정보통신단말기_천오백회선. 인접아리아인_감지했습니다. 차등민족의단말기이용_3회미만배급권몰수….」

정보와 통신의 단말기라. 그렇다면 미래에 쓰던 라디오 같은 물건이로구나. 좀 더 빠르고 정확하고, 편하게 쓸 수 있는.

남자는 제멋대로 납득했다. 그때까지 보고 들은 것들에 비하면 그까짓 기계야 놀랄 축에도 못 들어갔다.

“그렇다. 나는 아리아인이다. 단말기는 반응하라.” 「의문_신원확인합니다?」

“나는 글로케의 파일럿이다.”

남자는 문득 제가 이 단어를, 이 주제를 그동안 의식적으로 피해 왔는지 자문했다. 미래인들에게 자기 자신 혹은 이 작전에 대해 묻는 것. 어쩌면 답을 얻을지 모른다.

「글로케검색결과_0건? 의문_신원확인합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3제국이 이미 승리한 세계에서라면 글로케가 뭔지도, 그게 자신을 태우고 도착한다는 사실도 응당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검색 결과가 0건이라니? 글로케가 뭔지 모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분명 기록이 소실된 것일 테다. 남자는 얕게 신음했다. 새삼 이곳이 얼마나 멀고, 또 그릇된 곳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그가 바라는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던 시절의 제3제국인 것이다. 아리아화 시술이니 악마의 발톱이니 하는 병변들이 나타나기 전의, 진정한 게르마니아.

“그런 경우라면 내 이름도 모르겠지. 나는 무장친위대의 일원이다. 그건 아나?”

「무장친위대검색결과_1건. 의문_1차피해집단종자유전자_100%_유실되었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같이 쓰였다는 것.

“피해집단이라니? 무슨 피해를 말하는 거지? 그게 제3제국 무장친위대를 두고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너의 기능에 장애가 있는가?”

「무장친위대포함제3제국전체_피해집단입니다. 추가정보제공위해_손_올리시오.」

유리에 활짝 편 손의 윤곽이 나타났다. 남자는 가타부타 따져볼 틈도 없이 장갑을 벗었다. 팔을 내밀었다.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모른다고 찰나의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손끝이 따끔했다. 곧이어 토막토막 끊어진 기억의 형태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라디오의 전파를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못하는 것처럼, 이러한 전달 또한 기존의 감각으론 감히 묘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몇 정보의 경우 가본 적도 없는 장소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연합군을 이기고 동양과의 전쟁을 위해 또다시 만들어진 비밀병기들 따위가 그랬다. 허나 몇은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그의 현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시대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사실 또한 담고 있었다.

「정보전달_끝났습니다. 손을떼지않을경우_동일주제에대한구술기록_추가전달합니다.」

더 듣고 싶어서는 결단코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떼지 못했다. 충분히 알고 그만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가 된 그의 현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이율배반적이고 치졸한 비밀들을 많이 감추고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난 총통께서 아직 총통이 아닐 때부터 그들을 지켜봤어. 그들은 민족을 위해 진정 진실된 말과 행동을 했다.”

구술기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에는 국가도, 사회주의도, 노동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신념도 뚜렷한 가치관도 없었습니다. 그때그때 표심을 얻기 위해 밀어붙인 극단적인 포용 혹은 공격의 두 가지 기제밖에는.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았고 또 원한 것은 오직 당(黨)이라는 존재형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이익집단이었습니다.」

“우리는 해충들을 죽였다. 그뿐이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기준은 한 번도 명확하게 유지된 적이 없었습니다. 절멸 수용소의 문은 단 한 차례도 억울하게 끌려온 이들을 되돌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위층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경우 명확히 제거 대상에 포함됨에도 어물쩍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는 일 또한 있었습니다.」

“그건 사소한 부작용이다!” 남자는 어느샌가 눈앞의 쇳덩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꼈다.

“대의를 위해서 일하다 보면 사소한 병소는 생길 수밖에 없다. 아리아 민족을 위하여 골몰한 탓이야!”

「그들이 내건 아리아 우월주의의 기준에 따르면, 제3제국 당시 수뇌부의 대다수는 차등민족으로 분류됩니다. 개중엔 신체장애인 또한 있습니다.」

 

어지러웠다. 그는 허우적대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믿음의 대상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초점은 특정 대상으로 모이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국가에서 한 당파로, 당파에서 그 수뇌부로, 그리고 지금은 단 한 명의 인간에게로. 그가 아는 가치 체계의 정점에 선 사람.

“총통 각하의 뜻은 확고했다. 그래, 이 모든 게 그가 조직을 꾸렸기 때문이야! 처음의 순수한 뜻이 차츰 집단이 되고, 나라가 되면서 관료제 특유의 병폐가 쌓인 탓이다! 이 시대가 이렇게 병든 것도 그래서다. 영도자를, 최초의 대의로부터 멀어져서. 내가 돌아가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이성적인 결정은 종종 한 부대, 전장, 전선의 운명을 경각에 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안목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만하고 충동적이었으며 종종 마약성 진통제에 취하여 헛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습니다. 제3제국이 반격 작전에 성공한 것은 순전히 분더바페와 최후의 부대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 때문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그 이름을 똑똑히 되새기는 것만으로 아찔해졌다. 더해 인간으로서의 그에 대해 방금 받아들인 정보들이 남자를 몰아세웠다. 자신의 머릿속 성채 한가운데 틀어박혀 있던 가장 밝은 별. 위대한 총통으로서 그가 거느린 온갖 권위와 책임의 무게가 낱낱이 벗겨졌다. 남은 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니와 뻐근한 어깨와 똥구멍과 핏발선 흰자위를 가진, 완벽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은 오히려 기울고 비틀리고 독선적이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오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남자는 귀를 막았다.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의 거짓말에 모두가 속았고, 깨달았을 땐 너무 늦어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신념은 회피되었고 가치관은 손바닥 뒤집듯 수정되었습니다.」

“제 얼굴에 침이라도 뱉는 거냐? 전쟁에서 이겼잖아? 안 그래? 이긴 미래가 아니냐!”

「전쟁의 승리는 우리 스스로의 파괴를 전 세계의 그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토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세상에는 이미 수백 곳의 게르마니아와 수천 곳의 절멸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을 어떤 다른 얼굴도 목소리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거대한 결점이 된 우리는 스스로가 빚은 거대한 오물더미 위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어갔습니다. 한 이익집단의 정치이념을 위해 만들어진 임의적 인종 분류의 이름으로.」

악몽이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글로케를 왜 모르지? 내 현재는 너희들의 과거잖아. 나타나기로 이미 되어있는 물건을 왜 아무도 모르나? 왜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거야?”

「동력_부족합니다. 게르마니아정보통신단말기_휴면합니다.」

참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귓구멍을 울리던 유일한 목소리가 사라지자―그게 가짜라고 할지언정―남자는 이제 자기가 이 죽어버린 세상의 유일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온 세상을 한 바퀴 돌도록 골짜기도 산도 없이 멍청하도록 편평한 먼지의 행성. 허위허위 땅을 파 내려가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낡은 기계들. 어긋나고 잘못되고 그릇된 것들. 도덕률의 문제가 아닌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목표와 지켜진 적도 없는 신념을 위해 만들어진 허깨비들. 이대로 글로케를 몰고 누차 백 년, 천 년을 건너뛴대도 끊임없이 어디에서나 반복될 풍경.

남자는 어느샌가 걷고 있었다.

 

“왜 아무도 너를, 나를 모르는 거냐?”

사막을 떠돌다 그는 글로케를 다시 만났다. 구불구불 남았을 제 흔적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의 모래는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살짝 거칠어진 검은 종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거스러미처럼 불쾌한 요철이 이따금 맨살을 잡아당겼다. 손가락을 접고 구부리고 이리저리 비볐다. 왠지 사이사이에 이물감이 들었다. 손의 분명한 형체가 흐려지는 것처럼.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했지.”

그는 시간 이동 장치의 파일럿으로 선발된 뒤 귀가 부르트도록 교육을 받았다. 미래를 보고 돌아올 것. 그러나 정작 그 미래에는 조종사 본인도 기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돌아갈 지점은 그의 현재. 이곳은 그의 미래이다. 그렇다면 임무가 실패할 것이 이미 정해진 것인가? 아니면 애초 그 미래에 그들의 자리가 없기 때문일까? 글로케를 탄 파일럿과 지금의 미래. 어쩌면 상호배타적 관계가 그 둘 사이엔 성립하는지 몰랐다. 남자는 단말기가 꾸역꾸역 밀어 넣어준 정보를 다시금 곱씹었다. 제3제국의 승리는 이루어졌다. 그리고 덕분에 다른 모든 것이 패배했다. 그가 알고 살아왔던 모든 것이 패배했다. 남은 것은 이 먼지 구덩이 뿐이다.

먼지의 사막에서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흐르지 않았다. 시간을 잴 지표가 전연 없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언제까지나 맑았고 구름은 언제까지나 흘러갔다. 남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몸을 일으켰다. 기계의 문이 여닫혔다.

머지않아 글로케가 모습을 감추었다.

 

***

 

“아가씨, 스마트폰 집어넣으세요. 입구에서 내지 않았습니까?”

군인이 험상궂게 말했다. 총 한 자루 꼬나 쥔 자율방범대원이 아니라, 군복에 방탄모에 각종 장구류까지 충실하게 갖춘 진짜배기 정규군이었다. 애초 총부리만 들이대지 않을 뿐 실탄이 든 돌격소총을 들고 경비를 서는 모습만 해도 살벌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것도 민간인들이 출입하는 곳에서. 젊은 여자는 발랄하게 웃으며 몸을 움츠렸다.

“에이, 왜 그러세요. 스타디움 전체에다 대고 그럴 거예요? 어차피 좀 있으면 연설 다 SNS에도 풀리고….” “아가씨, 다시 말합니다. 스마트폰 집어넣으세요.”

웃음은 금세 지워졌다. 분명히 그러나 내키지 않는다는 듯 느리게 여자는 폰을 파우치에 넣었다. 그 주변 관중석 거의 모든 곳에서 비슷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에 꾸려진 연단에는 아직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만큼이나 사람들은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궁금해했고, 그런 시민들로 가득한 장내를 군이 직접 통제할 만큼 사안은 엄중했다. 관중과 연단 사이에는 역시 중계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바삐 장비를 점검하고 리포터가 입을 푸는 동안, 스튜디오에서는 친절하게도 이 일의 맥락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설명해주었다.

「수많은 헌법학자들의 비난에 직면한 조치….」

「…는 미 대통령 행정 명령 13936호입니다. 논란의 중심이….」

「“이미 수백 명의 미국인 사망자가,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무언가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확하지요. 다만 그것이 이 조치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는….”」

「…제한됩니다. 더불어 예외적 상황에 한해라는 단서가 붙지만, 사실상 초법적 권한을….」

「“…로서, 이 법은 모욕적입니다. 그래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체계가 전체주의이자 군국주의로의 위대한 한 걸음을…”」

「“…결코 의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없는 폭거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동북아시아 위기는 변명일 뿐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행정부의 사실상 독재선언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재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서고 있습니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모든 방송사가 자료화면을, 요약을, 논평을 삼가고 즉각 대통령을 향해 카메라를 돌렸다. 사실상 거의 똑같은 구도의 똑같은 장면이 각국의 스크린을 메웠다. 그만큼의 위력과 함의가 그 연설에는 있었다. 행정 명령 13936호에 대한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놀랍도록 평온한 말투로 그렇게 연설은 이어졌다.

절대 정치적 이익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지정학적으로는 이렇다, 국제 역학을 따져 보면 또 이렇다, 아무리 골몰해도 현실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부디 감안해달라. 국민을 위해, 국가의 위대한 정신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설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적어도 준비한 말을 다 했다면 그렇게 되었다.

「어, 잘 모르겠습니다. -화면에 잡을 수 있나요? 분명히 보이질 않습니다. 저거 보여? 추측건대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연설이 중단되었습니다. 부정확한 어떤 물체로 인해 대통령이….」

「…가 허공에서 나타났습니다. 마술처럼. -연설의 일환으로서 연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나요?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현장에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자세한 소식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꼭 검은 종처럼 생겼는데요.

「경호원들이 그것을 포위했습니다. -그것이라고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난데없이….」

「열리고 있습니다, 문, 아니 창문입니다. 안이 비어있습니다. 안에는….」

중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보았다.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너희는 위협이다. 그래서 말소를 시작한다.

글로케가 빛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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