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남자는 생각했다. 맞은편에 보이는 29인치 모니터 화면이 너무 깨끗하다고.

 

기획안을 작성하기 위해 피티용 프로그램을 열면, 하얀 바탕이 모니터를 채웠다. 그 흰색의 화면을 볼 때 마다 남자는 흰 바탕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게다가 흰색 모니터에 반사되어 드러나는 자신의 실루엣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까치집처럼 피어오른 더벅머리가 그대로 비쳤고, 한때는 성형외과를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뾰족한 광대와 세모난 턱도 서슴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문제는 흰 화면 뿐만이 아니었다. 매끈하게 디자인된 모니터의 형태도 남자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떨어진 외관과 여린 곡선의 모서리, 얇은 책 한권도 되지 않을 정도의 두께, 마지막으로 약한 힘만줘도 부서질 듯한 가느다란 받침이 그랬다. 남자는 자신이 제품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형태를 사람들이 깔끔하다고 생각한다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모니터와 모니터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매번 불편한 마음을 감춘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옆자리에 앉은 김대리가 책상을 두드렸다. 인기척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면 김대리는 대게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시자거나, 담배를 피우자거나,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줬다. 대게 남자는 김대리의 제안에 응했다. 김대리와의 시간을 즐겼다기 보다 잠시 모니터 앞을 떠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김대리와는 커피를 마실 때면, 주말 예능 프로와 소액으로 넣은 주식과 헤어진 여자친구와 얼마전 만나기 시작한 다른 여자친구와 청첩장을 주기 위해 몇년만에 연락이 온 친구와 집에서 자기 몰래 들어 놓은 보험과 새로나온 신차와 출퇴근길의 고역과 자영업자들의 평균 수익과 내릴기미 없는 아파트 가격과 엊그제 있었던 야구 경기를 이야기하곤 했다. 김대리는 모르는 것 없는 것 마냥 입을 열었고, 남자는 관심이 있는 듯 그 말에 맞장구 쳤다. 

 그리고 요상하게도 김대리는 믹스커피를 즐겼기에, 저 많은 이야기를 내뱉을 때마다 입에선 믹스커피향이 섞인 짠내가 풍겼다. 남자는 생각했다. 김대리 같은 젊은 사람이 왜 흔한 말로 ‘아재’ 취향의 믹스커피를 즐겨마실까 하고. 하지만 남자는 김대리의 여자친구도, 응원하는 야구 구단도, 소액을 투자한 주식의 종목도, 커피 취향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물어볼 겨를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묻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남자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던 것은 김대리의 머리 모양이었다. 앞머리를 말아 이마를 적당히 보여주는 애즈펌이 김대리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럽기까지했다. 남자는 김대리의 머리 모양을 보면, 한번쯤은 어디 미용실을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적인 질문을 피한 것처럼, 남자는 끝내 미용실에 관한 궁금증도 묻지 않았다. 단지 혼자 화장실을 들어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이리만지고 저리만져보기만 했다. 그러다 청소아주머니가 들어오면, 소변을 볼 때보다 더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김대리의 수다 한바탕 들어주고 자신의 머리를 두어번 매만져 본뒤 자리로 돌아온 남자를 반기는 것은 변함없는 모니터였다. 환한 모니터 화면, 깔끔하다 못해 날카로운 디자인,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더벅머리 원숭이가 말이다. 남자는 그 모습이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고, 그 덕에 쓸데 없는 상념들이 남자를 사로 잡곤 했다. 불필요한 상념을 지우기 위해 딜리트 키를 정신 없이 눌러대다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팀장이 남자를 불렀다. 새로 작성한 기획안을 확인하고 싶다며.

 

팀장의 말이 떨어지면 남자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팀장의 급한 성격덕에 매번 팀장이 옆으로 다가온 뒤였다. 그렇게 남자는 아직 시작도 못한 기획안의 흰 바탕 화면을 팀장에게 들키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사실 팀장 역시 새로운 기획안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끼니를 챙기는 것 마냥 비슷한 시간과 비슷한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기획안의 공유라는 행위는 매번 반복되었다. 결국 남자는 옆자리로 온 팀장과 고작해야 한두문장으로 된 거칠다 못해, 사포같은 아이디어를 공유할 뿐이었다.

있지도 않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나면 팀장은 눈을 흘겼다. 남자가 무엇도 없는 흰 화면을 들킬 때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요약해 중언부언 할 때도, 죄송스러운 눈빛을 팀장에게 흘러보낼때도 팀장은 그저 눈을 흘기기만 했다. 날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인사고과가 반영되는 시즌에도, 남자의 부족한 기획안에 대한 피드백은 눈을 흘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다음에 봅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화를 내지도 타박을 하지도 않았다.

눈을 흘겨대서 그런지 아니면 눈을 흘기라고 그렇게 생긴 것이인지, 선후관계를 알 수 없었지만 팀장은 족제비 눈을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늘고 긴 눈꼬리를 가졌다.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흰자위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칼로 벤 종이가 바람이 불때 발견 할수 있는, 딱 그정도의 틈새로 된 눈이었다.

 팀장을 처음 봤을 때 남자는 작은 저 눈으로 볼 수 있는게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자의 우려과 달리 팀장이 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팀장의 눈을 벗어난 것은 오직 팀장이 보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도 팀장의 의지에 따라 보고도 못본척하는 것에 가까웠다. 누군가 지갑을 잊었다면 어디에 있다고 알려줬고, 깜빡한 거래처의 연락처를 기억에서 꺼내곤 했다. 진급 명단이 공표되기 전에도, 마치 다 알고 있는 듯 당사자에게 축하를 하러 찾아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번은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은 남자에게 팀장에 다가와 이쑤시개를 건냈는데, 그 덕분에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는 것을 남자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소하고 볼품 없는 것 부터, 굵직한 회사의 사건 까지 놓치는 것 없는 눈이었다.

 

팀장은 그 눈으로 남자를 흘기기만 했다. 그저 흘기기만. 남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눈흘김이 팀장이 벌하는 가장 큰 고문의 형태가 아닐까 하고.

 

팀장과의 미팅이 끝이나면, 남자는 모니터를 다시 바라봤다. 아니 볼 수 밖에 없었다. 흰 화면에 비치는 많은 것을 애써 지워내며, 겨우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고 억지스럽게 새로운-그래서 전혀 새롭지 않은 기획안의 제목을 작성했다. OO년 OO분기 제품 판매량 확대 기획안. 여기까지 작성을 한 남자는 기획안의 제목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키보드 위로 올려 논 손은 마치 동상처럼 굳어 버렸고, 지우려 애썼던 모니터 화면은 어느새 보기싫은 것들을 다시 반사했다. 이미 한차례 기운이 쏙 빠진 남자는 더이상 모니터를 바라볼 수 없었다. 이쯤되면 남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눈을 감기 일수였다. 눈을 감아도 번져오는 하얀 빛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기획실 복도에서 또각 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인사과 과장이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인사과장은 종종 두손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 왔기에 인사과장의 등장은 준비 된 듯, 준비되지 않은 듯한 다과시간의 알림이었다. 또각하는 그 알람에 맞춰 김대리의 펌이 한층 꼬불해졌고 팀장의 눈이 더 길게 늘어났고 남자는 감을 눈을 떠야했다.

 남자는 꾸벅 인사만 하고는 연회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기획안을 써야한다는 좋은 핑계가 있었고, 인사과장도 남자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눈치였기에 서로의 이해가 충분했다. 어쩌면 남자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생각했다. 차라리 모니터 앞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작고 짧은 연회 중엔 기획실은 기괴한 웃음으로 가득 차기 일수였다. 달디 단 케이크의 향과 고소한 커피향이 풍겼다. 거기에 맞춰 김대리의 앞머리가 점점 굽어갔고, 가는 팀장의 눈은 실처럼 늘어났고, 인사과장의 구두소리도 요란스럽게 울리곤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인사과장의 구두소리가 왜 그렇게 울리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구두소리와 웃음소리로 만드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어떨까 하고. 케이크만큼 달콤할지, 믹스커피향이 섞인 입냄새 만큼 시큼할지, 김치찌개 같이 맵싹할지 하고 말이다.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남자는 ‘OO년 OO분기 제품 판매량 확대 기획안’ 이란 기획 제목을 지워야했다.

 십여분의 소란의 끝을 알리는건 점점 멀어지는 인사과장의 구두소리였다. 그때가 되면 옆자리로 김대리가 어느새 와 앉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은 김대리는 곧장 핸드폰을 열어 급하게 문자를 보내기 일수였고, 그 너머 자리로 돌아간 팀장은 눈을 길게 늘어뜨리고 사무실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슬슬 요란이 가실 때가 되면, 김대리는 앞머리를 조금씩 폈고, 기획팀장은 늘어난 자신의 눈꼬리에 담긴 새로운 사실들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남자는 생각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기획안을 쓰는 것이 힘들다고.

그리고 모니터가 너무 깔끔하다고.

 

 그날도 볌함 없는 정해진 일과가 끝이났다. 어김없이 새로운 기획안을 구상하지 못하고 남자는 퇴근길에 올랐다.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를 잡은채로 네온사인이 흐르는 모습을 보며 김대리와 기획팀장과 인사과장과 모니터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떠올렸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잘못 된 것이 없는 것 아닐까?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일까? 남자는 많은 질문을 버스의 창 너머로 던졌다. 돌아오는 것은 하차벨 소리와 버스카드 찍는 소리 뿐이었다. 환승입니다. 하차입니다. 그 소리에 문뜩 남자는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날 남자는 인트라넷으로 사무실 부품에 관한 문의를 올렸다. 29인치 모니터는 눈이 너무 아프니 바꿔달라고. 바로 회신이 왔고 내용은 이러했다.

‘회사의 구성원이 모두 같은 모니터를 쓰고 있으니, 불편하시더라도 바꿔드릴 수 없습니다. 차후 다른 방안을 강구해보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메일을 보냈다. 따로 모니터를 주문해서 써도 되는지 물어봤다. 그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었다.

남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을 옮겼다. 인터넷을 뒤져 수많은 모니터 모델을 검색했다. 일과시간에 쇼핑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팀장의 눈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모니터를 바꾸면 쓰지못하던 기획안이 나올 것만 같았고, 그렇다면 이것도 업무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어진 팀장의 눈을 신경쓰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남자는 계속 모니터를 검색했고, 다양한 모니터를 찾았지만, 끝내 자신이 마음에 드는 모니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허탈했다. 회사에서 쓰는 모니터와 세세한 기능이 다른 모델은 많았지만, 크게 보자면 회사의 것과 다른 형태의 모니터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기대가 물건너 가자 화면 안 더벅머리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춤까지 추는 그 꼴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는 허탈한 와중에도 착실히 그날의 일과를 지켰다. 김대리와 커피를 마셨고, 팀장의 눈흘김을 받고, 인사과장이 만든 이유모를 연회를 구경했다.

남자는 고민했다. 지금 이 모니터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하고. 퇴근시간이 된다고 해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남자는 그 어느때보다 머리를 굴렸다. ‘OO년 기획팀 모니터 변경 계획’ 이라는 기획안 제목도 떠올렸다. 물론 딱 거기까지였다. 결국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눈을 감을 뿐이었다.

습관같은 눈감기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때아닌 인기척에 남자는 눈을 떴다. 기획실의 불이 전부 소등 되었고, 다만 남자의 자리에만 형광등과 모니터 불빛이 새어나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경비 아저씨였다. 턱밑으로 멋지게 수엄을 정리한 중년, 어쩌면 노년에 더 가까워보이는 경비아저씨는 후레쉬를 든 손을 떨군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남자는 의식하지 못한 채 시계를 바라봤다. 밤 열두시가 십분정도 남아 있었다. 꽤 오래, 아니 너무 많은 시간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남자를 남겨두고 모두가 퇴근 한 것 같았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경비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야근하는거여?”

“아뇨.”

“그럼 무슨 일인데 아직 남아있어?”

 

신선같은 말투가 남자를 붙잡았다.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을 말했다.

 

“모니터가 마음에 안들어서요.”

 

남자의 답변이 썩 친절하지 않음에도, 경비 아저씨는 남자쪽으로 걸어왔다. 경비 아저씨는 남자 뒤쪽으로 자리해 남자의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간결한 행동이었다.

 

“경비실 창고에 비슷한 것 하나 봐둔게 있는데, 내키면 확인 해볼텨?”

 

경비 아저씨가 말을 할 때마나 볼을 감싼 수염이 움찔거렸다. 남자는 그 수염의 묘한 아름다움에 취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따라간 경비실은 단조롭게 구성되어 있었다. 입구 옆으로 철제 테이블이 놓여있고, 주변에 경비 업무를 위한 물품들이 늘어져 있었다. 입구 맞은편에 세워진 플라스틱 칸막이 커튼이 보였고, 경비 아저씨가 남자를 그쪽으로 안내했다. 칸막이 뒤로 걸어가자, 오래된 책상과 책장, 그리고 잡동사니가 보였다. 경비 아저씨는 책상을 덮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고장난 후레쉬, 파리채, 먼지 낀 유리컵, 작동이 되는지 의심스러운 라디오, 말라버린 화분 따위이었다. 남자도 경비를 돕기 시작했다. 책상은 마치 화수분 같았다. 내려야 할 물건이 점점 쏟아져 나왔고, 남자와 경비는 손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분이 넘게 손을 움직이던 경비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남자의 눈에 브라운관 모니터의 낡고 색바랜 외곽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라는 단어가 남자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비는 나머지 짐들을 계속 내려놓았다. 정리된 책상 위에는 뚱뚱하게 배를 내민 브라운관 티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뚱뚱한 브라운관을 보는 순간, 남자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경비 아저씨의 말대로 ‘비슷한 것’ 이 전혀 아니었다. 사용이 가능할까 싶은 수준으로 오래된 브라운관 티비였다. 심지어 티비였다. 남자는 경비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러자 경비 아저씨는 남자의 의문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눈은 안 아플겨."

 

경비 아저씨의 말 한마디가 남자는 이상하게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흰 화면, 채워질 수 없는 흰 화면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사무용 컴퓨터에 티비를 연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뒤로 한채 덥석 브라운관을 들어올렸다. 뚱뚱하게 튀어나온 티비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생각했다. 들어올리기에 너무 알맞은 무게라고. 남자는 브라운관 티비를 사무실로 옮겼다. 29인치 모니터 옆을 브라운관 티비가 자리 잡았다. 남자는 흐뭇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음날 출근을 한 김대리와 팀장은 책상 한쪽을 채우고 있는 브라운관 티비를 궁금한 듯 살폈지만 남자에게 별다른 내색은 하지는 않았다. 달라진건 브라운관 티비 하나였다. 하루가 여전했다. 남자는 김대리와 커피를 마시고, 팀장과 짧은 미팅을 하고, 인사과장과 다과 시간을 가지는 직원들을 살폈다.

그리고 여전하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29인치 모니터를 한쪽으로 치우고, 브라운관을 책상의 한가운데로 옮겼다. 남자는 브라운관 티비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하지만 브라운관은 컴퓨터 화면을 출력하지 못했다. 단지 회색의 노이즈 화면만 송출할 뿐이었다. 브라운관 화면 위로 흰점과 검은점이 시시때때로 움직였다. 남자는 브라운관을 바라봤다. 시시때때로 움직이는 점들을 바라봤다.

하얀 모니터 화면보다는 훨씬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채색 노이즈는 마치 클래식 협주곡처럼 남자에게 다가왔다. 생각치 못한 안정감을 느꼈다. 브라운관 화면은 변화무쌍했고, 가늘고 길게 늘어난 모서리의 세련된 디자인도 없었다. 자신의 모습이 비쳤지만 마치 브라운관의 윤곽처럼, 은근하게 정체를 숨긴 뭉퉁하고 두리뭉실한 형태였다. 뾰죡한 턱과 튀어나온 광대와 더벅머리는 경계를 흐린채, 시시때때로 변하는 노이즈 화면에 짧고 경쾌한 춤을 추고 있었다.

남자는 브라운관 티비가 좋았다. 정보 송신이 채 되지 않은채 흘러 나오는 노이즈 화면이 좋았다. 뚱뚱한 그 형태가 좋았다. 그 안에 춤추는 자신의 얼굴이 좋았다. 그게 남자를 다르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없이 브라운관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는 뭔가 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심지어 착각만이 아니었다. 김대리에게 믹스커피는 몸에 좋지않다는 말을 건넸고, 입사 후 세번째로 완성된 기획안을-바로 폐기가 되긴했지만-제출했으며, 의아한 인사과장의 표정을 뒤로 하고 식은 도넛을 집어먹었다. 

 

남자 뿐이 아니었다. 김대리와 팀장과 과장 역시 변한 남자의 모습을 느꼈다. 김대리는 남자의 모습에서 약간의 걱정이 들었고, 기획팀장은 생전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지 분간을 하지 못했다. 인사과장은 남자의 인적사항을 궁금해 했다.

브라운관의 등장과 함께 바람이 부는 듯 했다. 하지만 네 사람의 우려 섞인 바람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자는 변화에서 오는 자극이 아니라, 그저 브라운관 티비 화면이 너무 좋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사랑이란 수식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남자는 마치 어린 동물들이 새로운 경험을 맞이했을 때 느끼는 신비로운 기분처럼, 브라운관에 빠져버렸다. 남들보다 두시간이나 일찍 출근해서 남들보다 네시간 늦게 퇴근했다. 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브라운관 노이즈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브라운관 티비와의 관계 덕에 남자는 김대리와의 커피 타임을 거절하기 일수였고, 팀장에게는 서면으로만 완성되지 않은 기획안을 제출했다. 당연히 대면으로 했던 미팅을 피하기 일수였다. 인사과장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귀마개를 사무실로 가지고왔다. 남자가 일으킨 바람은 팀장과 김대리가 기대한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인사과장도 마찬가지였다. 귀마개를 한채 인사를 건네는 직원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남자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시간은 대수였다. 새벽까지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날이 점차 늘었다. 결국 퇴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건너 하루. 하루 건너 이틀을 사무실에 앉은 채 밤을 새기 일수였다. 그런 날은 점점 늘어갔다. 어느새 남자는 나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브라운관의 노이즈 화면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팀장과 김대리는 남자에게 가졌던 기대감에 실망을 지울 수 없다가도, 나흘 동안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는 남자를 보고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흘이 되는 날, 둘은 구급요원를 불러야 할지, 경찰을 불러야 할지, 병원을 안내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저러다 죽지나 않았으면 하고 안절부절 할 뿐이었다. 둘은 각자 남자에게 은근히 다가가, 커피를 하자고 말을 걸기도하고 기획안을 제출하라는 압박을 주기도 했지만 남자는 그저 고개를 한번 돌려 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대답도 행동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브라운관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다과 시간의 인사과장에게 역시 남자는 불쾌한 존재였기에, 나흘 동안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어떻게 하면 남자를 문제되지 않게 회사에서 자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런 고민들 사이로 잠깐동안 남자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이내 귀마개를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연민과 호기심을 떨치기 일수였다.

그런 중에 남자는 아주 이성적인 생각을 했다.

하얀 바탕으로 도배된 29인치 모니터와 노이즈 화면으로 가득찬 브라운관 티비가 무엇이 다른가 하고. 인간이 생명이 없는 기계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자신은 사회화가 덜된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이 아닐까 하고.

김대리와 기획팀장의 입장에서 자신을 재어보려 했고, 인사과장의 불쾌한 기분에 동감을 얻으려 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바로 앞에 있는 브라운관의 춤추는 점들을 보면 모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머리속에서 지워졌다. 브라운관 티비는 29인치 모니터와 분명 달랐고, 사람이 티비를 사랑할 수도 있었다. 티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검증해줬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미친 것이라면 두번이고 세번이고 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늠할 수 없는 사랑 앞에 이성과 주변의 반응은 쓸모없었다.

 

결국 나흘이 되는 밤 많은 생각과 반성 끝에 남자는 저 브라운관과 하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브라운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심정… 그 비슷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결심이 선 순간, 남자는 나흘간의 허기와 묶은 때의 불쾌감을 느꼈다. 닷새로 넘어가는 새벽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새벽까지 운영하는 근처 목욕탕을 들러 몸을 씻었고, 가까운 분식점에서 김밥 몇줄로 허기를 달랬다. 남자는 조금 더 인간다운 모습을 하고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시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남자는 브라운관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어린왕자의 보아뱀이었다. 남자는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이라는 넌센스 퀴즈였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라는 해답이 존재했다. 해답이 남자는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 이었다. 3차원의 세계가 2차원으로 압축 되었을 때 등장 캐릭터들이 변화하는 장면이었다. 남자는 브라운관을 보며, 점과 선으로 자신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라운관의 틈을 만들어 들어간 틈을 다시 닫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예상보다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생각을 멈추고, 열린 가능성을 실행에 옮겼다. 우선 자신의 앞머리를 압축했다. 손벽치듯 두 손으로 머리칼을 잡았다. 그리고는 여기저기로 뻗는 머리칼이 선으로 변하기를 기도했다. 두 손을 떼어내자, 남자의 기대는 실현이 되었다. 나머지 머리칼에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남자의 머리는 만화 속 캐릭터처럼 바뀌었다.

브라운관 화면으로 비치는 3차원의 얼굴과 평면적인 머리카락이 이질적이었지만, 썩 잘 어울리는 듯 했다. 남자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손벽치듯, 얼굴을 눌렀고, 손벽치듯 허벅지를 눌렀다. 가슴도, 종아리도 발가락도, 겨드랑이털도. 두 손이 부딪히는 남자의 신체는 하나 둘 종이처럼 변해갔다. 그러자 몸이 펄럭이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끝으로 두 팔과 손이 아직도 3차원 세계에 존재했다. 펄럭이는 종이 옆으로 둥근 원통의 팔이 뻗어있었다. 그 모습이 기이했다. 하지만 남자는 걱정하지 않았다. 머리 속으로 보아뱀을 떠올렸고, 보아뱀 안의 코끼리를 떠올렸고. 냉장고 문을 열었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남자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었고, 마치 사물함에 놓인 자신의 물건을 가져오 듯, 자신의 손과 팔이 변화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곧장 이루어졌다. 힘을 가하지 않아도, 두 팔은 면으로 바뀌었다. 바람으로도 남자는 온전히 점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되었다.

원했던 모습이 되자 남자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배를 채웠고, 몸을 씻었고 이어 면이 되었다. 여태껏 겪었던 새벽 중 가장 상쾌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다음으로 브라운관을 살폈다. 틈새, 자신의 몸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작은 틈새가 필요했다. 브라운관을 살피던 남자는 그 정도 틈은 하고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라운관의 휘어진 유리화면과 검은 플라스틱 외형이 맞물린 곳이 가장 적당해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아래쪽 틈새로 자신의 머리를 우선 밀어 넣었다. 두께없는 남자의 몸이 안으로 들어가기에 브라운관의 틈은 충분해 보였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리에 힘을 주어 밀어넣었다. 하지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브라운관 안이 남자를 거부 하는 듯, 밀어내는 힘이 느껴졌다. 잠시 머리를 들었다, 더 강한 힘으로 다시금 머리를 밀어 넣어봤지만 역시 그에 걸맞는 힘이 남자의 머리를 밀어냈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뺐다. 고개를 들었다. 브라운관은 검은 점과 흰 점이 여전히 수시로 움직이며, 많은 잔상을 만들고 있었다. 온화하고 평화로운 화면 그대로였다. 그걸 침범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잠시 들었지만, 브라운관이 남자를 거절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화면 속 춤추는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잘 어울렸다. ‘왜’ 라는 물음이 머리에 멤돌았다.

머리를 빳빳이 세운채 고민에 다시 빠졌다. 자신이 잠시 미쳐있던 것이 아닐까? 어린 왕자의 보아뱀도, 냉장고의 코끼리도 모두 동화일 뿐인가? 그렇다면 왜 자신의 몸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었을까? 결국 모든 것이 망상일까? 그도 아니라면 꿈을 꾸는 걸까?

꿈. 그것이 가장 논리적인 판단 같았다. 꿈이라면 참 좋은 꿈이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깨어나기 싫었다. 정말 꿈이라면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평면인간이 되어, 브라운관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꿈에서 깨기로 결심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믿기로 했다.

남자는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얼굴을 씻으면 모든 것이 원래도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김대리와 실장과 인사과장과 흰 모니터화면이. 그래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꿈 속이었지만 김대리에게 믹스커피가 나쁘다고 전했고, 바로 폐기되긴 했지만 기획안도 완성했고 인사과장의 도넛도 먹었으니까. 돌아간다고 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 도착한 남자는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상쾌한 물소리가 들렸다. 세면대로 손을 뻗기 전,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여전히 평면인간이었다. 동시에  아시아인의 피부색, 붉은 계통의 캐쥬얼 체트 남방, 그 위를 덮은 카키색 베스트, 마지막으로 회색의 바지. 평면이 되자 훨씬 다채로워 보이는 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브라운관의 흑백 화면을 떠올렸다.

문뜩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을 빼야 했다. 더 단순해져야 했다. 브라운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남자는 난생처음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평면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남자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색을 빼기 위해 남자는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그리고 물이 채워지기까지 기다렸다. 따뜻한 물이 아니어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게의치 않기로 했다. 물이 세면대를 다 채우자, 남자는 자신을 몸을 말았다. 그리고 세면대 위로 힘을 주어 올라갔다. 말아올린 몸이 중간 크기의 세면대에도 쉽게 들어갔다. 조금 꽉 끼인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남자는 물을 빨아들이며 자연스레 퍼져가는 자신의 몸을 순간순간 당겼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몸을 칠하고 있던 색도 천천히 빠져나갔다. 남자는 번져가는 색조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면 색이 빠지듯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서 빠져 갈 것이라고. 잠시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의외의 다채로운 색보다, 브라운관의 희고 검은 점들이 더 좋았다. 비교의 대상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는 확신을 머금은채 다시 물속을 바라봤다. 다채로운 색이 서서히 엉키고 있었다. 남자는그 엉킴이 참 아름답다 생각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남자는 자신의 몸에서 온전히 색이 빠져나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세워 세면대를 내려왔다. 물을 머금은 몸이 꽤 무거웠다. 부피가 줄어 세면대를 채운 물이 절반 수준으로 내려왔다. 남자는 세면대 개수대를 열어 물을 흘려 보냈다. 물이 점차 빠지며 ‘꾸륵’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몸을 털었다. 최소한의 물기를 우선 제거하고 나서, 자신의 신체 부위를 하나씩 쥐어짰다. 머리를 짜고, 가슴을 짜고, 다리를 짰다. 양팔은 각각 반대편 팔을 사용했다. 평면적인 손에서 전달되는 힘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형체만 변했다는 사실에 남자는 다시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생텍쥐페리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남자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 몸을 쥐어 짠 뒤 , 화장실을 나왔다. 곧장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물자국이 화장실과 남자의 자리를 이었다. 돌아와 바라본 브라운관은 여전했다. 화면은 춤을 추며 남자를 유혹했다. 그 모습에 냉큼 브라운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몸을 더 말려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드라이기도, 다리미도 사무실에는 없었다.

남자는 경비실을 떠올렸다. 칸막이 너머의 잡동사니 무덤. 무엇이 되었든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도구 하나는 있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혹 그것이 아니어도 경비 아저씨라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변한 모습에 작은 이해도 구할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두르니 않았지만 기획실 문을 여는데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미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이라, 경비실로 가는 길에 다른 직원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른 직원과 마주한다고 해서 두려울 건 없지만,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다행스러웠다.

복도를 밝히는 불은 드문드문 꺼져있어, 경비실에 도달했을 때 안에서 세어 나오는 불빛이 꽤나 반가웠다. 남자는 육안으로 경비실 안을 볼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갔고, 조심스레 경비실 유리문 너머를 살펴봤다. 남자의 눈길이 경비실 안으로 향하자, 경비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남자를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다’ 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경비실 문을 열었다. 경비실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예상치 못한 온기를 느꼈다. 경비실 가운데를 차지한 온풍기가 내뿜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경비 아저씨를 바라봤지만, 아저씨는 표정변화 없이 그저 눈을 내리깔고 수염을 비비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경비아저씨는 남자의 모습에 어떤 궁금증도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작은 허리받침이 있는 의자를 내어 남자가 온풍기 앞으로 앉게 도울 뿐이었다. 그덕에 남자도 자신의 시선과 말을 거두어 자리에 앉았다. 온기로 찬 경비실에서 둘은 미술관에 설치된 동상마냥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몸을 말렸다. 온풍기는 따뜻했고 경비실 안은 고요했다. 평온 속에서 졸음이 몰려드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경비 아저씨 너머로 전에는 보지 못한 몇개의 화면을 발견했다. 건물 복도와 외곽에 설치된 CCTV 화면이었다. ‘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하지만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평온이 깨질 것 같은 노파심이 들었기에. 온풍기의 작은 신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자신의 몸이 점점 굳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머금고 있던 수분이 거의 빠졌다는 신호였다.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비실 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경비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혹여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경비 아저씨는 손을 저으며 남자를 마중했다. 그 손짓에 겨우 남자도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왔던 복도를 돌아갈 때, 바닥에는 반쯤 지워진 물자국이 남아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많은 흔적을 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작은 흔적을 살피고 있으니, 경비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먼저 하는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사무실로 들어오자, 밀린 숙제를 검사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브라운관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브라운관의 화면이 전보다 더 변화무쌍하게 변하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브라운관이 남자를 반기고 있었다.

남자는 약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몸이 다 마른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브라운관의 화면 틈으로 재어 보었다. 충분한 틈에 이번에는 확실히 브라운관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밀어넣었다. 처음은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뼘 정도의 머리가 들어갔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브라운관이 자신을 허락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마저 느껴졌다. 남자는, 아니 브라운관은 뱀이 먹이를 삼키듯,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남자를 삼키고 있었다.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혹여 색을 지운 모습마저 거절 당했으면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에.

머리가 거의 들어간 상태로, 남자는 평면의 몸과 채도가 없는 자신을 다시금 떠올리자, 저쪽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이 들었다. 흑백의 수묵화. 여백이 아름답다고 배운 그런 수묵화. 그런 세계를 상상했다. 그럼 자신은 그 수묵화를 넘나드는, 신선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너무 전형적인 것도 같았다.

남자는 다시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는 것에 집중했다. 브라운관도 자심을 삼키는데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둘의 느릿했던 움직임에 탄력이 붙었고, 남자의 발끝까지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광고 속에서 라면 면발이 후루룩 하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 처럼, 남자의 마지막 발끝이 유연하게 브라운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브라운관으로 들어간 남자는, 머리부터 잘게 분해되었다. 정확히는 남자의 형태가 잘게 분해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치 파쇄기에 들어간 종이처럼. 하지만 고통은 느끼지 않았다. 의식은 변함 없었고 자신이 분해되었다는 것 조차 인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남자의 의식은 유령처럼 부유하듯 떠다니고 있었다. 눈을 뜬다는 개념도 없이, 소리를 듣는다는 의식도 없이, 남자는 브라운관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점과 흰점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고, 그 끝은 짐작키 어려웠다. ‘공간이 존재한다’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남자는 브라운관 안이 무한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자유롭기까지 했다. 의식의 주변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점들, 그 점과 같이 자신의 의식도 이곳 저곳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상상했던 수묵화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했다. 여백은 끝이 없고, 수묵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으니까. 신선, 어쩌면 그 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것이 아닐까 하고 남자는 미소지었다.

남자는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생택쥐페리가 옳았고, 넌센스 퀴즈는 상식적이었고, 픽사는 좋은 회사였다. 더 이상 남자는 생각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행복했다.

 

——————————————

출근 시간이 되었고 김대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사무실은 변함 없었다.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남자 역시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김대리는, 빈 책상 위에 브라운관만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려다가, 책상 위에 남자의 휴대전화를 발견하고는 그것마저 그만 두었다. 김대리는 별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획실장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대리는 칸막이 너머로 기획실장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획실장도 김대리의 그 모습을 보고는 걸음을 빨리해 남자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비어있는 남자의 의자와 여전한 브라운관을 바라봤다. 이어 자연스럽게 김대리에게로 눈길을 주었지만, 김대리의 표정은 기획실장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실장은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자 김대리는 책상에 놓인 남자의 휴대전화를 가르켰다. 실장은 자신의 행동을 멈췄다. 둘은 서로와 남자의 자리를 여러번 번갈아 보기만 했다.

실장은 자신의 자리로 갔고, 김대리 역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책상 앞에 놓인 각자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남자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고. 그럼에도 별다른 대책도, 방안도 찾지 못했고 그런 의지도 없었다.

오후가 되었지만, 기획실장과 김대리는 점심을 건너뛰었다. 둘다 입맛이 없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김대리는 믹스커피도 걸렀다. 둘을 번갈아가며 남자의 브라운관을 바라봤다. 그러기만 했다. 때가되자 넋을 놓은 둘과 달리, 인사과장은 훨씬 활기찬 모양으로 기획실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두손이 비어있다는 것이었다. 기획실장과 김대리는 인사과장의 그 방문이 너무 반가웠다. 얼른 자리에 일어나 인사과장을 반겼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다과를 먹던 자리가 아니라, 남자의 자리라는 것이었다.

인사과장도 비어있는 남자의 자리를 보고는 사뭇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셋은 남자의 자리 옆에 둘러서서 남자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남자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었고, 남자의 행방을 찾는 방안 역시 알 수 없었다. 셋의 머리 위로 공통되게 비극적인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설마’ 라는 단어도 함께 떠올랐다.

세개의 걱정이 뭉쳐 브라운관 앞을 가로 막고 있을 때, 브라운관 안의 남자가 그 셋을 발견했다. 남자는 순진하게도 저 셋도 브라운관의 매력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들어오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남자는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라운관의 등장 전에도, 안으로 들어온 지금도 자신이 자기 중심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더해져, 남자는 자신이 브라운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자신의 의식을 브라운관 화면 위로 띄워보냈다. 검은 점과 흰점의 노이즈들이 요동칠 수 있게. 그러자 브라운관의 노이즈가 점점 심해졌다.

 

머리를 맞대고 있던 셋은 브라운관의 변화를 감지했다. 예전에 봐왔던 노이즈 화면과는 달랐다. 아니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노이즈의 점들이 마치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 같았다. 신호 지시등 같은 그런 형태로. 그 변화를 처음 인지한 인사과장이 브라운관으로 다가왔다. 이어 팀장과 김대리 역시 고개를 내밀었다.

 

브라운관 화면에 자신의 행방을 알리려한 남자는, 다가온 셋의 모습을 좀 더 주의깊게 살폈다. ‘저 여기 있어요.’ 라고 말했지만, 밖의 셋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의식을 흘려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고개를 내민 셋의 모습에 의식을 빼앗겼다.

셋의 모습을 유심히 본 것이 어쩌면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던 모습들이 아니었다. 셋 모두 너무 달랐다.

김대리는 애즈펌 너머로, 앞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흔히 말하는 M자 모양. 탈모가 온 것일까? 게다가 얼굴빛이 밝지 않았다. 잠을 못잔 탓일까? 믹스커피를 많이 마신 탓일까? 칙칙한 얼굴색과 드러난 이마의 김대리가 안쓰러웠다.

눈을 동글랗게 뜬 기획팀장의 모습도 보였다. 기획팀장은 눈동자가 매우 검었다. 마치 서클렌즈라도 낀 것 처럼. 검은 눈동자는 너무 순하고 깊었다. 남자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의 그것이 떠올랐다. 그 정도로 순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런 팀장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혹감마저 들기까지 했다. 왜 알지 못한 것일까? 눈이 너무 작아서 알지 못한게 아닐까? 그렇게 위안하고 있었지만, 실상 남자는 자신의 부족한 눈썰미가 못내 한심했다.

그 옆으로 인사과장의 굽은 허리가 보였다. 왼쪽 골반이 앞으로 튀어나와 보였고, 그 덕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삐뚤었다. 짝다리를 짚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각’ 하는 소리가 브라운관 안에 울렸다. 힐을 신은 탓일까? 그게 아니면 직장에서의 모든 스트레스를 왼쪽 골반으로 받은 탓일까? 남자는 힐을 신어본 적도 인사과장의 스트레스를 감당한 적도 없었지만, 삐뚤게 버티고 선 모습에서 인사과장의 고된 일과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또각’ 하는 소리는 인사과장의 비명이었을지도 몰랐다. 귀마개를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남자는 생각했다.

많은 것을 오해 하고 있었다고.

모두 열심히 버티고 있었다고.

여간 수고가 많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셋이 바라보던 브라운관의 노이즈가 강하게 흔들렸다. 이후 화면이 잠시 끊어졌다.

브라운관 화면이 검게 변했다. 하얀 점들이 나타났다.

 

남자가 말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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