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임여사의 수명 연장기

2020.02.09 14:5302.09

인황사자(人皇使者)는 곧 망자(亡者)가 될 여자의 뒤에 섰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극악무도하게 생긴 이빨이 성성한 집게핀으로 대충 끌어올려 집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으며, 배에 힘이 하나도 없는지 등은 구부정한 채 흐릿하게 탈색된 눈으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는 빈 커피 잔이 몇 개 있었다. 언제 마셨는지 잔 안에는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커피 잔해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떤 잔에는 구겨진 휴지가 담겨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잔들 주위에도 구겨진 휴지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그 중엔 유명 햄버거 상표가 찍힌 냅킨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 한쪽엔 햄버거세트에 딸려 온 작은 감자튀김 봉지가 누워 있고, 그 안엔 다 먹지 못한 감자 조각 몇 개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다 먹은 햄버거 포장지가 동그랗게 뭉쳐져 있었다.

 

책상 위를 대충 훑어보던 인황사자는 모니터 아래에 누워있는 휴대폰을 슬쩍 봤다. 사용하지 않을 땐 시계의 기능만 켜져 있는지, 휴대폰은 꺼지지도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현재 시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각을 확인한 인황사자가 열려있는 방문 너머 부엌 쪽을 보며 천황사자(天皇使者)에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천황사자는 인황사자의 손가락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조왕신(竈王神)과 실랑이를 했다.

 

삼사자(三使者 : 천황사자, 지황사자, 인황사자)가 혼을 거두러 망자의 집으로 갈 때마다 늘 있는 대거리였다. 요즘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는 일이 많아서 이런 대거리를 피할 수 있지만 오늘처럼 집에서 급사(急死)하는 경우엔 집을 지키는 여러 가신(家神)들과 한참 실랑이가 벌어진다. 가신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며칠 전부터 집 주변을 살펴 가신들에게 들키지 않을 장소를 찾았고, 마침내 여자가 일하는 방의 벽을 통과해 집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활짝 열린 방문으로 부엌이 보였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왕신이 큰소리로 호통 치자 가신의 우두머리인 성주신(城主神)까지 나타나 여자와 삼사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천황사자와 지황사자가 적배지(赤牌旨)에 적힌 여자의 사주와 이름을 보여주며 성주신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간 덕에 인황사자는 겨우 여자 뒤에 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비록 힘에 밀려 저승사자들에게 끌려 나왔지만, 성주신과 조왕신은 내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절대로 저승사자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아직 여자에게는 5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인황사자는 할 일도 없는 5분 동안 이 여자가 읽고 있는 걸 동무삼아 같이 읽어줄 요량으로 여자가 멍청하니 보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 명사는 우진의 판결문을 읽어내려 갔다.

일직사자 한우진은 저승사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

 

모니터에 올려져 있는 글을 두 줄도 채 읽지 않았지만 인황사자는 기시감을 느꼈다.

 

일직사자? 저승사자? 명사?’

 

소설인 듯 보이는 글에 저승사자라는 제 직업이 떡하니 박혀있어서가 아니었다. ‘일직사자 한우진이라는 글자가 너무나 친숙했다. 그 이름은 인황사자가 1년 넘게 푹 빠져서 읽고 있는 웹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일주일에 세 편씩 올라오던 소설이 서너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 편으로 줄어서 아쉬움을 삼키며 읽고 있는 글이었다.

 

처음엔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라는 유치한 제목에 별로 재미를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인간은 저승사자를 어떻게 묘사할까라는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저승사자인 남주와 인간인 여주가 만들어가는 아슬아슬하고 달달한 로맨스에 퐁당 빠져 이제는 다음 편 기다리는 낙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읽는 저승사자가 비단 이 인황사자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죽는 사람이 하루에 팔백여 명이다. 한 명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자 세 명이 움직인다. 죽음의 형태에 따라 별도로 필요한 사자가 또 여럿이다. 예를 들면, 객지에서 사고나 질병을 얻어 죽은 자를 데려가는 객사사자, 화재로 죽은 자를 데려가는 화덕사자,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한 자를 데려가는 무죄사자, 날아온 돌에 맞아 비명횡사한 자를 데려가는 탄석사자 등이 그들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저승길에 오른 망자를 사자들은 인간의 시간으로 49일간 일곱 지옥을 데리고 다니며 시왕으로부터 선악의 심판을 받도록 안내한다. 망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시왕을 보좌하는 사자가 또 여럿이다. 그러자니 저승사자의 수가 이 나라에만 십만에 이른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는 그 제목 덕에 저승사자에게 관심을 끌었고, 그 아슬아슬하고 달달한 스토리 덕에 그들 사이에서 흑사병처럼 강력한 전염력으로 빠르게 번져 이제는 안 읽는 사자는 대화에서 제외될 처지가 될 정도였다. 이 소설은 비록 코인을 주는 유료 독자는 아니었으나 저승에만 십만에 가까운 구독자를 가진 인기 소설이었다.

 

인황사자는 그런 재미난 소설을 죽음 직전까지 읽고 있는 이 여자를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하며 계속 읽어내려 갔다. 사흘 전 최신 편을 본 인황사자는 당연히 제가 읽었던 부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은 너무나 생소해 잠시 당황했다.

 

다음 편은 네 시간 후에나 올라올 텐데?’

 

이 글을 쓰는 작가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새벽 여섯 시에 글을 올렸다. 지금이 목요일 새벽 두 시에 가까웠으니 아직 다음 편이 올라올 시간이 못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보고 있는 내용은 월요일에 읽었던 글의 다음 편이 분명했다. 작가가 시간을 잘못 안 것인가? 인황사자는 의아해하며 계속 읽었다. 여자가 사망할 시각이 지났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하고 읽는 데만 집중했다.

 

갑자기 여자가 인터넷을 열더니 읽고 있던 글을 전부 복사해 한 웹소설 플랫폼으로 옮겼다. 예약 시간을 0600분으로 설정하고 등록하기버튼을 클릭했다. 인황사자의 눈과 입이 접시 만해졌다.

 

, , , !”

 

인황사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딸꾹질처럼 만 반복했다. 인황사자의 모습을 본 천황사자가 조왕신에게 잡힌 채 부엌에서 소리 쳤다.

 

이보게 인황사자! 그 여잔 이 씨가 아니라 임 씨일세. 이런! 이름과 생년월일을 못 외운 겐가? 지황사자! 그 적배지를 어서 인황사자에게 전해 주게.”

 

거실에서 성주신과 옥신각신하던 지황사자는 여자가 있는 큰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성주신이 냉큼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딜 얼렁뚱땅 가려고? 내가 호락호락 보내 줄 것 같으냐?”

 

지황사자는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성주신의 손을 잡고 살살 달래보려 했다.

 

어허! 이거 말로 해도 되실 걸 어찌 이리 힘으로 우격다짐을 하려 하십니까? 이런 추태는 고매한 성주신의 이름에 먹칠하는 행동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거 놓고 말로 하십시오. 저 미련한 우리 후배가 일머리가 모자라 오늘 모셔갈 고객님 이름도 못 왼다잖습니까?”

 

안 된다, 이놈아! 그 적배지를 넘겨주면 저 놈이 삼혼(三魂)을 할 것이 아니냐? 어림없다, 이놈!”

 

성주신이 사력을 다해 지황사자를 잡고 있으니 지황사자는 인황사자에게 적배지를 줄 방법이 없었다. 천황사자 또한 조왕신에게 팔을 붙들려 도와주러 갈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인황사자가 지황사자에게 와 적배지를 낚아챘다. 성주신은 놀라 지황사자의 멱살을 놓고 인황사자를 잡으려 했으나 이번에는 지황사자가 뒤에서 성주신을 끌어안았다.

 

인황사자! 어서 가서 사암…… 혼을……, 이름 세 번읍…….”

 

지황사자는 성주신과 몸싸움을 하며 인황사자에게 저승으로 데려갈 여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라고 안간힘을 써 말하려 했지만 성주신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끝내 맺지 못했다. 성주신은 허리를 지황사자에게 잡힌 채 한 손으로는 지황사자의 입을 막고 밀어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인황사자가 들고 있는 적배지를 뺏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인황사자는 딱 성주신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서 적배지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임영례!”

 

안 돼! 이 음험한 저승사자 놈들아 그 불쌍한 여인을 데려가지 마라. 바람나서 이혼한 남편놈을 아직도 사랑해서, 그 써글놈을 잊으려고 일중독에 빠져 제 몸 돌볼 생각도 못하고 저리도 힘들게 생을 버텨내는 저 가녀린 생명이 가엾지도 않느냐?”

 

조왕신이 천황사자의 팔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두 가신과 저승사자들의 소란 속에서도 인황사자는 다른 세상일인 양 너무나 평안하게 적배지를 보고 중얼거렸다.

 

작가님! 위대한 당신을 173회 만에 영접합니다. 당신의 성스러운 존함이 임영례였습니다.”

 

인황사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읊조렸다.

 

여보게 인황사자! 지금 뭐 하는 겐가? 어서 삼혼을 하지 않고 왜 그러고 서 있나? 우리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드네. 어서 이름을 부르게.”

 

천황사자가 소리쳤다. 지황사자도 막힌 입으로 인황사자를 향해 웅얼거렸다.

 

선배님들! 내 오늘 생일도 아닌데 더 이상 귀할 것 없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기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여인이 바로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쓰고 있는 임여사 작가님이시랍니다.”

 

인황사자의 말에 놀란 지황사자는 성주신의 허리를 잡고 뒤로 당기던 팔을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성주신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천황사자도 조왕신과의 힘겨루기를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조왕신과 함께 뒤로 자빠졌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아이고, 나 죽네!’하며 저승사자들에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얼른 인황사자 앞에 모였다.

 

자세히 말해 보게.”

저 분께서 임종하실 시간이 아직 5분 정도 남아 있어서 시간이나 때울 겸 모니터에 떠 있는 글을 읽었지요. 그런데 그게 오늘 올라올 저승사자와의 로맨스’ 173회의 내용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님이 일이 있어서 좀 일찍 올린 겐가? 하고 있었는데……. , 글쎄!”

 

인황사자는 이 부분에서 침을 한번 삼켰다.

 

, 글쎄 뭐란 말인가?”

 

지황사자가 침 한번 삼키는 찰나의 시간을 못 참고 재촉했다.

 

, 글쎄! 읽고 있던 글을 마우스로 쭈욱 드래그해서 복사를 하더니, 인터넷을 열고 웹소설 플랫폼에 들어가서 붙여넣기를 한 다음에 예약시간을 새벽 여섯 시로 설정하고 등록하기 버튼을 따악 누르더란 말이지요.”

 

따악에서 인황사자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시늉까지 했다. 지황사자는 으허허헉!’하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천황사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이런! 이 형님, 연식 오랜 된 티를 내시네. 후배님 말은 오늘 우리가 모셔가려던 고객님이 바로 저승사자와의 로맨스작가님이시란 말이오. 오늘 올라올 173편을 올렸단 말이잖소?”

 

지황사자가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천황사자는 이제 이해가 갔는지 입을 딱 벌렸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그 귀한 분을 저승으로 모셔갈 뻔했단 말인가?”

 

이제 이해가 가시오, 형님? 하마터면 우리 오늘 두 번 죽을 뻔했소.”

 

그렇지요, 선배님들. 임여사 작가님이 작품을 못 끝내고 돌아가셨는데, 그 분을 모신 사자가 우리라고 소문나면 다른 사자들이 우리를 가만 두겠습니까?”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나 죽는다며 악을 쓰던 성주신과 조왕신은 저승사자들의 대화에 그들을 향해 돌진하던 몸짓을 멈추고 조용히 관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적배지에 작가님의 존함이 있는데 안 모실 수도 없고, 모셔 가자니 향후 우리의 거취가 걱정이니 말일세.”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정말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인황사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둘에게 말했다.

 

절대 모셔갈 수 없지요.”

 

이보게 우리라고 모시고 싶겠는가? 우리도 뒷이야기가 몹시 궁금하단 말일세. 허나 이 분의 명이 다 한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의 본분을 잊어선 안 되네.”

 

천황사자가 인황사자를 타일렀다.

 

작가님을 모시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완결될 때까지만 모셔가는 걸 유예하자는 겁니다.”

 

어허, 이 사람! 천황 형님의 재량으로 유예할 수 있는 기간이 고작 3일 이란 걸 잊었는가?”

 

지황사자가 인황사자를 꾸짖었다.

 

3일을 최대한 활용해야지요.”

 

인황사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깟 3일 안에 완결이 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3일이면 다음편도 못 나오네.”

 

천황사자도 인황사자에게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고 했다.

 

선배님들! 우리는 그 3일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인황사자는 천황사자와 지황사자의 손을 잡고 호소했다.

 

“3일 동안 작가님이 계속 글을 쓰실 방안을 마련해야지요.”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인황사자를 바라보았다. 인황사자는 눈을 빛내며 둘을 마주보았다. 셋은 그렇게 몇 초간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자네……. 뭔가 있는 듯하이. 묘안이라도 있는 겐가?”

 

지황사자가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구독하는 사자들이 몇 만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언제나 다음 편이지요. 수만의 사자들의 그런 한결같은 마음을 모아 명부차사님께 전하면 명부차사님도 작가님의 수명 연장을 고려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명부차사님께 상소를 올리자는 말인가?”

 

천황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요즘 인간들이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올리듯이 우리도 명부차사님께 청원을 넣는 겁니다. 최대한 많은 사자들의 서명을 받아서요.”

 

그게 되겠는가?”

 

천황사자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속으로는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 인황 후배 말대로 서명을 받자고 들면 많은 사자들이 너도나도 붓을 들고 달려들 겁니다. 형님만 해도 당장 저 방으로 달려가 173화를 열어보고 싶으시지요?”

 

지황사자의 말에 천황사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거 보십쇼. 다음편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사자가 어디 형님뿐이겠습니까?”

 

천황사자는 이제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단계를 넘어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더 서명을 받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황사자와 인황사자는 천황사자의 입에서 ‘3일 유예하세.’라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삼사자들이 조용해지자 조왕신이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영례를 데려가지 않는 거지?”

 

이놈, 저놈하며 육두문자를 날리고 악을 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에 미소까지 띄우며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왕신이었다.

 

좋습니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천황사자가 말했다.

 

일단, 모셔가는 건 3일을 유예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하자마자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얼른 영례가 앉아있는 곳으로 달려가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례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멀거니 보고 있는 것은 낯설기만 한 글이었다. 당황한 천황사자가 거실의 인황사자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인황! 여기 보이는 것은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아닌 것 같네.”

 

인황사자는 방으로 들어와 모니터를 확인했다.

 

이것이 대관절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황사자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니터의 글을 읽던 영례는 앙상한 손을 움직여 화면 아래 빈 공간에 글을 채워 나갔다.

 

분명 작가님이 쓰고 계신 글인데……. 가신님들께선 이게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인황사자가 거실의 두 가신에게 물었다. 성주신과 조왕신은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

 

영례가 쓰고 있는 소설이 아니더냐?”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아닌데요?”

 

보면 모르겠느냐? 다른 소설이잖느냐? 쯧쯧!”

 

작가님이 다른 소설도 쓰십니까?”

 

사자들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느냐? 일중독이라고! 영례는 몇 달 전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후부터 일중독에 빠졌다. 그 염병할 놈을 아직도 사랑해서 그 놈을 잊으려고 자꾸 일을 벌이는구나. 너희가 좋아한다는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말고도 연재 중인 글이 두 편에 어느 웹 매거진이라는 곳에서 여러 작가들을 모아 단편집을 만든다는데 끼어서 단편 하나를 퇴고 중이고, 한 포털사이트에는 매주 에세이를 한 편씩 올리고 있다. 그러니 잠 잘 시간도 모자라 카페인과 패스트푸드에 절어서 몰골이 저렇게 되었단다.”

 

성주신은 말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좀 이상합니다? 제가 혹시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 있을까하고 작가님 필명으로 찾아봤는데 다른 작품은 없더란 말입니다.”

 

인황사자가 물었다.

 

영례가 장르마다 필명을 다르게 쓰느니라. 너희가 보는 연애소설은 임여사, 연재중인 두 편의 미스터리스릴러물은 A작가, 단편은 그때그여자, 에세이는 본명을 쓰고 있다. 모두 처음 글 올릴 때 머릿속에 막 떠오른 이름으로 대충 지었지.”

 

조왕신의 설명을 들은 삼사자는 아아!’를 합창했다.

 

어허! 이거 큰일입니다. 저리 몸을 혹사하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천황사자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영례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너희들이 여기 와 있는 거 아니냐?”

 

성주신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해졌다.

 

송구합니다.”

 

천황사자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으이그! 우리가 안 모셔가는 데 어떻게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지황사자가 천황사자를 핀잔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모셔가지 않아도 작가님은 곧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내장기관들이 다 파업하기 일보 직전일 것입니다.”

 

이거 참 큰일일세.”

 

인황사자의 진단에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한숨 섞인 탄식만 했다.

 

대책을 세워야지요.”

 

인황사자는 고심했다. 나머지 두 차사들과 가신들은 인황사자의 입에서 묘안이 나오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인황사자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너희도 핸드폰을 갖고 다니느냐?”

 

조왕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두 분 가신들께선 집 안에서 집안사람들만 돌보시니 이게 필요 없으시겠지만 저희처럼 외근을 주로 하는 사자들에겐 핸드폰이 참 요긴한 물건입니다. 쉬는 시간엔 이걸로 책도 읽고 게임도 할 수 있으니 이젠 이게 없으면 그렇게 무료하고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지황사자가 제 핸드폰을 보여주며 자랑하듯 말했다.

 

영례도 컴퓨터 아니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살던데, 그 조그만 것이 참으로 요물이구만. 그런데 인황사자 너는 지금 핸드폰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조왕신이 인황사자에게 물었지만 인황사자는 장문의 메시지를 쓰느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왕신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인황사자가 분명 영례를 살릴 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분 정도 메시지를 쓰던 인황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 단톡방에 이 상황을 알렸습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작가님이 돌아가시게 생겼다는 소식과 소설의 결말을 보려면 사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들을 적었습니다.”

 

인황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까똑!’이라고 말했다. 인황사자는 핸드폰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뭔가?”

 

천황사자가 궁금해 물었다.

 

작가님이 글을 완결지을 수 있도록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말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인황사자 단톡방이라 인원이 이만이나 되니 읽을 틈도 없이 메시지들이 죽죽 올라가고 있습니다.”

 

곧이어 천황사자와 지황사자의 핸드폰도 각자 메시지 알림음을 냈다.

 

누가 자네 글을 퍼 날랐군. 지황사자 단톡방도 난리라네.”

 

천황사자 단톡방도 정신없네.”

 

삼사자가 정신없이 올라가는 메시지를 읽느라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자 성주신이 냅다 소리 질렀다.

 

이 놈들아! 어서 영례를 살릴 방도를 강구해야지 그 요물에 정신 팔려서 이 아까운 시간을 버릴 참이냐? 그러니 너희가 하급 신인 게다.”

 

성주신의 일갈에 사자들은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핸드폰들은 주머니에 들어가서도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느라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가신들이 눈을 부라리자 차사들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꿨다.

 

인황사자들 중에 괜찮은 생각을 올린 친구가 있습니다.”

 

인황사자가 무시무시한 가신들의 눈을 피해 천황사자를 보고 말했다.

 

무언가?”

 

천황사자가 물었다.

 

작가님을 병원에 입원시켜서 검진을 받게 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작가님을 입원시킨단 말인가?”

 

제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인황사자는 말을 끊고 조왕신을 바라봤다.

 

날 왜 보느냐? 그런 그윽한 눈으로 보면 내가 너에게 반하기라도 한다더냐?”

 

조왕신은 새침하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조왕신을 홀리겠습니까? 저는 다만, 작가님이 입원하시는데 조왕신께서 일조하시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내가?”

 

모두 인황사자를 재촉의 눈빛으로 보았다.

 

저 싱크대를 보아하니 그간 작가님께서 작품에만 전념하시느라 전혀 돌보지 않은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작가님께서 무탈하신 걸 보면 조왕신님이 얼마나 부엌을 살뜰히 보살피셨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에휴! 영례가 그간 쌓아놓은 설거지 거리가 며칠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건지 기억도 안 난다. 너무 오래 되어 곰팡이가 슬려는 것을 내가 기함으로 내쫓고, 냉장고 안에도 음식들이 오래 되어 대장균이 창궐하려는 것을 살기로 누르고 있는 참이다.”

 

인황사자가 조왕신을 치하하자 조왕신은 그간의 노고를 하소연하며 자화자찬에 빠졌다. 그러자 성주신도 거기에 동참했다.

 

어디 부엌뿐이겠느냐? 오래 전 화장실이 지붕 아래로 들어온 이래로 측간신 고것이 조왕신과는 함께 못 있겠다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내가 화장실까지 돌보고 있지 않겠느냐?”

 

이대로 두면 두 가신의 하소연이 3일을 넘기게 생기자 인황사자가 얼른 말을 막았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분의 고단한 정성이 작가님을 지금껏 버티게 해 주시고, 저희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꾸준히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걸 저희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작가님의 몸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으니 어서 병원으로 모셔야겠지요? 사람이 병원에 가려면 어디가 아파야하지 않겠습니까? 혈전이 쌓인다고 몸이 아픈 걸 알겠습니까? 하지만 상한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토사광란이 나고 119를 부르겠지요?”

 

그제야 조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구나. 나만 믿거라. 119 누를 힘만 남겨놓고 기운이 쏙 빠지게 하마.”

 

조왕신이 굳게 약속하자 지황사자가 인황사자에게 물었다.

 

인황 후배! 우린 무얼 하면 되겠나?”

 

인간의 명줄을 관장하시는 분이 명부차사님이시니 그 분도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읽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우리처럼 다음 편을 절실히 기다려야 우리 뜻에 동참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자 천황사자가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천황사자 중에 명부차사님과 말벗하는 친구가 있네. 그 친구에게 한번 물어보지.”

 

천황사자가 문자를 보낸 후, 모두들 천황사자의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기다림의 정적 속에 방안을 울리는 건 영례의 앙상한 손가락이 자판 위로 춤을 추는 소리뿐이었다.

 

그 친구란 놈은 바쁜 게냐? 왜 이리 답을 안 주는 것이야?”

 

조왕신이 기다리다 못해 다그쳐 물었다.

 

조왕신님, 조금만 여유를 가지십시오. 문자 보낸 지 아직 1분도 안 되었습니다.”

 

천황사자는 다그치는 조왕신에게 짜증이 났지만 감히 표는 내지 못하고 인황사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 명부차사님이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안 읽으시면 어쩌지?”

 

제 예상으론 80퍼센트의 확률로 읽으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여자 사자들은 모두 읽고 있거든요. 혹시 그 친구 분도 여자 분입니까?”

 

그렇다네.”

 

다행입니다. 만약 명부차사님이 그 소설을 안 읽으시면 읽어보라고 권유하는데 아무래도 같은 여자 분이 유리하지요. 공감대 형성도 잘 되고……. 그런데 문자가 안 오고 있네요. 대책 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가면서 각자 할 일을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냥 간단 말이냐?”

 

삼사자가 간다는 말에 성주신이 놀라 물었다.

 

저희도 어서 가서 작가님의 명을 늘이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행동에 옮겨야지요. 저희가 가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명부차사가 그 소설을 읽는지 안 읽는지 알려는 주고 가야 할 것 아니냐?”

 

그 결과를 안다고 성주신이나 조왕신이 상황에 도움될 것은 없었다. 단지, 가신들도 궁금해 조바심이 나고 있어 답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문자가 아니 오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과는 나중에 시간이 되는 사자를 보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삼사자가 막 사라지려는 순간 천황사자의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성주신은 반쯤 사리지고 있는 천황사자의 소매를 얼른 잡았다. 삼사자는 흐려지던 형체가 다시 분명해졌다. 장문의 글이었는지 천황사자는 스크롤을 올리며 한참을 읽어 내려갔다.

 

! 이 친구 말은 다행이 명부차사님께서도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구독자시랍니다. 아까 인황 후배가 단톡방에 올렸던 글을 명부차사님께서도 보신 모양입니다. 명부차사님께선 수많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던 작가가 타계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며 본인 또한 독자로서 슬픔을 금할 길 없지만 작가의 주어진 운명을 아무리 명부차사라도 사사로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주신과 조왕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황사자와 인황사자라고 다르진 않았다.

 

친구는 끝에 명부차사님께선 완결이 너무 궁금하다시며 한숨을 수십 차례 내쉬고 방안을 불안하게 서성이신다고 했습니다.”

 

천황사자의 말이 끝나자 인황사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명부차사님도 작가님이 소설을 완결 지으시길 갈망하십니다. 우리와 뜻이 같으시지요. 다만, 작가님의 명을 늘이려면 위에다 고할 명분이 필요하신 겁니다. 그 명분을 우리가 만들어주면 되는 겁니다.”

 

명분을 어떻게 만드는가?”

 

지황사자가 인황사자에게 물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청원…… 상소를 올리는 겁니다. 최대한 많은 사자들의 서명을 받아서요. 사자의 3분의2 정도만 되어도 명부차사님이 뒷일을 감당하시기 수월해 지실 겁니다.”

 

옳거니! 자네가 역시 앞으로 저승을 이끌 동량일세.”

 

인황사자의 설명을 들은 지황사자는 인황사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저 인황사자는 생전에 뭐 하던 놈이냐?”

 

조왕신이 천황사자에게 물었다.

 

독립운동하다 일본군에게 잡혀 온갖 고신을 받고 죽었습니다.”

 

! 역시 싹수가 된 놈이로구나.”

 

조왕신과 성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후배가 그 당시에 몇 안 되는 미국 유학파입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지요.”

 

지황사자는 인황사자를 추켜세웠다.

 

그럴 거 같았다. 훌륭한 작품을 쓰는 작가를 알아보고 아끼는 마음을 보고 분명 범상치 않은 놈이라 생각했다.”

 

성주신과 조왕신도 인황사자를 칭찬했다. 지황사자의 후배 자랑이 계속 이어질 낌새를 보이자 인황사자는 얼른 두 선배 차사들의 소매를 이끌었다.

 

가신님들 저희는 작가님을 위해 중차대한 일을 하러 이만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큰일 하러 가야하니 내 더는 붙잡지 않을 것이다. 부디 뜻하는 바를 꼭 이루거라.”

 

성주신과 조왕신은 손까지 흔들어주며 배웅했다.

 

 

저승으로 돌아온 삼사자는 각자 단톡방에 글을 올려 당장 모일 수 있는 사자들부터 소집시킨 뒤 서명을 받았다. 사자들이 한달음에 달려오는 바람에 한꺼번에 많은 수가 모여 길게 줄을 서야 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임여사 작가가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완결 지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몇 분 늦게 도착한 어느 사자는 망자를 데리러 갈 시간이 다 돼간다며 기다란 줄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줄을 선 사자들이 그를 앞으로, 앞으로 보내 먼저 서명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미 명이 다한 영례를 살리려는 저승사자들의 열망이 응급실 의사보다 뜨거웠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명의 행렬이 몇 시간에 걸쳐 줄어갔다. 당장 시간이 되는 사자들은 거의 다 서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도 겨우 수천이었다. 저승사자는 망자를 데리고 일곱 지옥을 무려 49일에 걸쳐 다니기 때문에 대다수 사자들이 지옥에 있었다. 영례를 담당하고 있는 삼사자는 서명지를 세 뭉치로 나눠 가졌다. 셋이 흩어져서 일곱 지옥을 누비며 서명을 받으러 다닐 계획이었다. 시간은 3일도 채 남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목표한 서명을 다 받는 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낯빛이 무거웠다. 삼사자 주변에는 서명을 마치고도 아직 가지 않은 많은 사자들이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두 선배 사자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인황사자가 갑자기 서명을 받던 책상 위로 올라가 소리쳤다.

 

여기 모여 뜻을 함께 해 주신 차사님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기꺼이 달려와 줄을 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서명해 주신 분들은 전체 저승사자의 1할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면 3분의2는 동참해 주셔야 하는데, 우리 셋이 일곱 지옥을 뛰어다닌다 해도 어쩌면 3일도 채 안 남은 시간에 수만의 서명을 받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인황사자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사자들이 손을 들으며 외쳤다.

 

나에게도 몇 장 주시오. 도산지옥(刀山地獄)은 내가 다녀오겠소.”

 

나도 주시오. 나는 화탕지옥(火湯地獄)을 담당하리다.”

 

사자들이 저마다 다녀올 지옥 이름을 부르며 서명지를 받아갔다. 지원자가 워낙 많아 한 지옥을 서너 명의 사자들이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원! 지옥에 있는 사자들 서명 받아 오는 데 하루도 안 걸리게 생겼구먼.”

 

천황사자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했다. 서명지를 받아 든 사자들은 혹시 다른 말이 더 있을까 하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성질 급한 사자 몇은 서명지를 받자마자 지옥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서명지를 다 나눠 준 인황사자는 다시 소리쳤다.

 

여러 차사님들 덕분에 우리의 하나된 마음을 명부차사님께 보여드리는 건 방도가 생겼습니다. 이제 서명지와 함께 청원문을 써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생전에 대과에 급제하셨거나, 변호사 출신이거나, 문학상 하나 정도는 타 본 작가이셨던 분 계십니까?”

 

몇 명의 사자가 조용히 손을 든 반면 한 사자가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 옆에 계신 차사님을 천거하오. 이 분은 고려 때 정2품 내사시랑을 지내신 분이오. 이분의 글은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단아하여 읽는 이들 모두 탄복하게 만듭니다.”

 

그 말에 손을 들었던 사자들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이렇게 서명과 청원문까지 해결되었다.

 

다음 날, 삼사자는 지옥으로 간 사자들이 서명을 받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영례의 집에 들러 가신들이 맡은 임무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가신들은 사자들을 보자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처럼 악다구니를 퍼붓진 않았다. 조왕신이 식기와 음식들에 손을 써둔 덕분에 영례는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설사로 끝내시면 안 됩니다. 꼭 병원으로 모셔야 합니다.”

 

걱정 마라 이놈들아. 시간이 지날수록 복통이 점점 더 심해져서 걷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영례가 아프면 내 가슴이 찢어지지만 영례를 오래 살려두기 위해 내 순간의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영례를 가장 살리고 싶어 하는 건 역시 가신들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삼사자는 그들을 믿고 조용히 저승으로 돌아왔다.

 

천황사자의 권한으로 영례의 죽음을 유예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많은 사자들의 도움으로 목표치를 상회하는 서명을 받은 삼사자는 서명지를 첨부한 청원문을 명부차사에게 올렸다. 청원문을 읽은 명부차사는 필체와 필력에 탄성을 내뱉었다.

 

한 획, 한 획에 너희들의 간절함이 녹아 있는 명문이로다. 내가 명부차사의 임을 맡고 두 번째로 이런 상소를 받아 보는구나.”

 

명부차사는 두껍게 쌓여있는 서명지 위에 손을 올렸다.

 

내 다시는 인간의 정해진 수명을 어기는 일이 없게 하리라 다짐했거늘 너희들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고, 의지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으니 내 다짐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구나. 임영례의 수명을 저승사자와의 로맨스가 완결될 때까지로 연장하겠노라. 이는 다만 너희의 의지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고된 일을 하는 틈틈이 임영례의 글을 읽으며 고단함을 풀고 다시 맡은바 임무에 충실할 힘을 보충하여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다.”

 

삼사자는 명부차사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서로 끌어안고 소리 질렀다. 명부차사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린 삼사자는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나오자마자 단톡방에 이 소식을 알렸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구독하는 모든 사자들이 저승과 이승에서, 그리고 지옥에서 함께 환호했다.

 

 

월요일 아침 저승사자와의 로맨스’ 174화를 기대하며 웹소설 플랫폼을 연 저승사자들은 깊은 실망감에 젖었다. 작가의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휴재한다는 알림이 떴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들의 실망은 금세 다음 편에 대한 기대로 승화했다. 건강을 쥐어짜가며 쓴 글보다 한결 좋아진 몸으로 쓰는 글이 훨씬 좋을 것이라 서로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부추겼다.

 

영례의 담당 사자들은 얼결에 49일의 휴가가 생겼다. 휴가기간 동안 수시로 영례의 집에 들러 가신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영례의 건강을 살폈다. 며칠간 병원에 입원했던 영례는 퇴원 후 스스로 건강을 돌보기 시작했다. 입원하면서 받은 검진 결과가 너무 참담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생전에 의사였던 저승사자 하나가 영례의 담당의사에게 잠깐 빙의해 잔뜩 겁을 주기까지 했다. 영례는 이미 떠난 사람 그리워하며 제 건강을 해쳐봐야 저만 손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틈틈이 운동도 하고 일도 줄여나갔다. 덕분에 일주일에 두 편씩 올라오던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는 일주일에 한 편으로 줄었다.

 

저승사자와의 로맨스200화를 바라보던 어느 날, 인황사자가 지황사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명부차사님이 그러셨지요? 인간의 수명을 늘여달라는 상소를 받은 게 이번에 두 번째라고. 처음은 누구였습니까?”

 

이순신일세.”

 

예에?”

 

지황사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인황사자의 입은 함지박 만해졌다.

 

이순신이 원래는 괴악한 무리들의 고신을 받고 죽을 운명이었지. 하지만 그 때 이 나라를 걱정한 저승사자들이 한마음으로 왜놈들을 내쫓을 때까지만 살려달라고 했다네.”

 

아아!”

 

인황사자는 얼이 빠진 얼굴로 탄복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또 물었다.

 

그러면 임 작가님이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오르신 겁니까?”

 

지황사자는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인황사자를 쳐다보았다.

 

작가님과 장군님은 카테고리가 다르네. 비교를 삼가시게.”

 

 

저승사자들의 본분을 망각한 청원소동이 있은 지 2년이 지났다. 영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저승사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저승사자와의 로맨스를 무사히 완결 지었다. 삼사자는 명부차사의 명을 받아 영례의 혼백을 거두러 갔다. 2년 전처럼 영례를 지키는 가신들이 극악무도하게 저지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삼사자를 맞이했다. 삼사자는 가신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영례의 뒤에 섰다. 영례는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지만 2년 전보다 혈색도 좋아지고, 손가락에 살도 약간 붙어 있었다.

 

작가님을 모심에 있어 모두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네.”

 

천황사자가 두 후배 사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영례에게 약속된 시간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그 몇 분 동안 인황사자는 별 뜻 없이 영례가 쓰고 있는 글을 보았다. 모니터에 채워지는 글을 읽던 인황사자는 오른 손을 들어 모니터를 가리켰다.

 

, , , !”

 

인황사자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딸꾹질처럼 만 반복했다.

 

작가님 앞에서 이 무슨 망동인가?”

 

지황사자가 인황사자를 꾸짖었다.

 

큰일 났습니다, 선배님들! 이 글 한번 읽어 보십시오.”

 

뭔데 그러나? 유서라도 된단 말인가?”

 

천황사자와 지황사자는 모니터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두 차사 모두 인황사자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연실색한 삼사자와 달리 성주신과 조왕신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뭔지 아시겠지요?”

 

인황사자가 외쳤다.

 

시즌투(2)로세.”

 

천황사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에 대고 말했다. 영례가 쓰고 있는 글은 저승사자와의 로맨스에서 서브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격상시킨 두 번째 시즌이었다.

 

삼사자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번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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