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박해수

 

방안은 피 냄새와 내장에서 쏟아내는 오물냄새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람들은 모두들 소리를 잃어버린 듯 고요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무전기 소리와 카메라 플래쉬가 건조하게 방안을 채울 뿐이었다. 경찰의 질문을 받으면서도 운정은 친구로부터 눈을 땔 수 없었다. 입속에 온갖 음식물이 쑤셔 넣어진 채 반듯하게 누워서 꽃처럼 배가 갈라져 있는 친구에게 기묘한 질서가 느껴졌다.

 

*      

 

"박살내버려! 때려눕혀!"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쓰고 있었다. 지금 막 격투로봇들의 경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더 머신 매니악 리그'의 아시아 예선 경기였다. 선수가 사람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난폭한 경기가 가능한데다 합법적인 베팅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운정 혼자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운정은 도저히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텅 빈 방안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정신없이 어딘가에 휩쓸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종로 거리를 지나 집으로 가던 중 새로 생긴 로봇 격투장에 충동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경기장은 굉장히 넓었다. 관중석 뒤쪽에 앉게 된 운정에게는 링이 너무나 작아보였지만 경기를 보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운정은 평소 로봇격투가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엄청난 소란만큼은 운정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정신없이 소리 지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니 왠지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운정은 로봇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3미터에 달하는 쇳덩이들이 육중한 몸짓으로 싸우기 시작하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 규칙은 간단하다. 상대방이 격투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박살내기만 하면 된다.

도끼로 된 팔을 가진 라스트 선더와 얼굴이 드릴로 된 광개토의 경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라스트 선더의 선제공격이 시작됐다. 라스트 선더는 팔에 달린 거대한 도끼로 광개토를 내리쳤고 그때마다 귀를 찌르는 타격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광개토는 방패가 찌그러지면서 비틀거렸지만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운정은 두 쇳덩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라스트 선더는 난폭하게 밀어붙이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광개토는 조금 소극적인 것 같았다. 아마도 각자가 가진 무기의 운용 방식과 그동안 쌓인 격투데이터가 합쳐지며 머신들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갖게 된 것 같았다. 빈틈을 노리던 광개토가 재빨리 라스트 선더를 끌어안아보려 했다. 하지만 라스트 선더는 가까스로 벗어났다. 만약 붙잡힌다면 광개토의 드릴 얼굴이 곧바로 라스트 선더의 몸통을 파고들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얻어맞기만 하던 광개토는 몇 번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다. 분위기는 라스트 선더에게 기울어 있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502호 청년?"

 

503호에 사는 아저씨였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 마주치게 되면 가볍게 얘기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뜻밖의 장소에서 동네주민을 만난 것이 신기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예의상 몇 마디 주고받자 할 말이 없었던 운정은 경기 얘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라스트 선더가 이길 것 같은데요. 광개토는 너무 약해요."

 

"자네, 로봇격투 별로 안 봤지? 로봇격투의 진미는 후반전에 있어. 이놈들은 인공지능이란 말이지. 전반전 동안 상대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후반전에는 그 데이터를 적용시키며 싸우게 되는 거야. 물론 시합 전에 상대의 과거 경기데이터를 학습시키는 건 금지돼 있어. 지금까지 겪어온 실전 데이터만으로 싸우는 거지. 오직 경험을 통해 성장시켜서 진짜 강자를 가리겠다는 거야."

 

"그렇군요. 그래도 결국 치고 받고 싸우는 거 아닌가요?"

 

"허허, 생각을 잘 해봐. 기본적으로 주입되는 데이터는 인간의 격투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 녀석들은 온몸에 희한한 무기를 달고 온갖 희한한 동작으로 싸우면서 서서히 인간적인 부분을 지워나가지. 몇 년 지나고 나면 우리가 도저히 흥미를 느끼지 못할 방식으로 싸우게 될 지도 몰라.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한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뭔가로 변해간다고나 할까?"

 

그 말을 듣고 나니 운정은 얼마 전에 봤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초기 격투머신들은 인간형이 대다수였는데 격투의 패턴이 점점 미묘하게 변하자 그에 맞춰 곤충이나 동물의 특징적인 기능만 해괴망측하게 짜깁기한 머신이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머신 매니악 리그 협회에서 이것을 규제해야 할 지 고민 중이라는 기사였다. 운정은 문득 칼을 들고 친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엠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인공지능 가사도우미 로봇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친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갑자기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운정은 정신을 차렸다. 후반전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운정은 아저씨의 말을 확인해보기 위해 로봇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사람의 경기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인간의 관점이라면 치명타를 입힐 절호의 기회에 갑자기 물러서거나, 서로 달려들다가 이상한 포즈를 취하는 등 기묘한 행동을 보였다. 몇 십 수 앞을 순식간에 계산하는 인공지능이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세한 뭔가를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운정은 문득 전반전 역시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반전에서 두 머신은 격투를 벌이는 중 무의미하게 두 팔을 들어 올린다거나, 인사하듯이 상체를 숙이거나,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등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운정은 로봇이 사람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아저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 역시 머신이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산출한 결과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지! 광개토 잘한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높아졌다. 마침내 광개토가 라스트 선더를 껴안는데 성공한 것이다. 광개토의 갈고리 같은 두 손이 라스트 선더의 등 뒤에서 굳게 결속되어 있었다. 얼굴 드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릴이 라스트 선더의 몸통에 닿자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죽여라!’를 외치기 시작했다. 운정은 광개토가 라스트 선더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이 기이하게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광개토의 머리는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고, 금속파편과 검은 오일이 터져 나오자 두 로봇이 오일을 피처럼 뒤집어썼다. 둘은 한 덩어리가 되어 몸부림치다가 미끄러워진 바닥에 넘어졌고 마침내 라스트 선더는 몸통이 파헤쳐진 채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뜻밖의 처참한 광경에 운정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문득 친구가 죽었다는 것,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실감났던 것이다. 운정은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현재 로봇은 오류나 해킹이 있었는지 여부를 검사 중이고요. 사실관계를 좀 더 확인해야할게 있어서 다시 불렀습니다.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날 점심, 운정은 참고인으로 종로경찰서에 와있었다. 형사의 건조한 말투에 불안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자신이 봤던 것들을 얘기해야 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친구가 1시까지 자기 집으로 점심 먹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근처에 살아서 같이 점심을 먹곤 했거든요."

 

운정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형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친구 집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55분 쯤. 집에 와보니 안방에 친구가 죽어 있었고. 내장은 꺼내져서 방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도우미 로봇이 칼을 들고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로봇 이름은 엠마고요. 몇 달 전에 산겁니다. 최신 인간형 도우미 로봇이죠. 그리고 지금 기억이 났는데 부엌에서는 미역국이 끓고 있었고요."

 

운정은 어떻게든 협조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형사는 순간 타이핑을 멈추며 운정을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죠, 김운정 씨. 친구가 이미 죽은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집에 들어갔습니까?"

 

"네, 저한테 카드키가 있습니다. 친구가 자주 출장을 가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보고 와서 좀 지내라고 했습니다. 청소도 해주고 화분에 물도 주고요. 솔직히 말해서 이것저것 자랑하고 싶은 게 많은 녀석이었죠."

 

운정은 방금 한 말이 살인동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형사는 이미 운정이 내뱉은 말을 남김없이 받아 적고 있었다. 친구는 사업이 대박나면서 낙원동에 아주 화려하게 집을 지은 친구였다. 성공한 후에 좀 거만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비위만 맞춰주면 가난한 웹디자이너에겐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물론 출장을 갈 때는 더욱 좋은 친구였고 말이다. 형사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원래부터 키를 갖고 계셨고, 종종 이 집에서 지냈다는 거군요. 그러면 말입니다. 어제 집에 들어와서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하셨나요?"

 

형사는 아마 이 질문을 가장 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운정의 진술과 사건현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내장들이 방에 널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널브러져 있었던 내장은 잠깐사이에 친구의 몸속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운정은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친구를 부르는데 대답이 없어서 집안을 여기저기 살펴보며 거실로 들어왔고요. 안방에서 친구가 죽은 걸 보고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10분 후 쯤 경찰과 들어와 보니......"

 

"밖에 나와 있던 내장이 다 들어가 있었다? 친구 입에는 음식이 가득 했고? 또 칼을 들고 있던 로봇은 충전도크에서 충전 중이었다 그거죠?"

 

당황한 운정은 해킹이나 결함을 운운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형사는 반응이 없었다. 무섭기는 했지만 경찰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운정이 로봇의 프로그램을 조작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조사해보면 알 것이다. 평생 순수미술에 빠져 살다가 초라하게 추락하고 있는 인생이란 것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봇은 피투성이였고 운정은 깨끗했다. 아마 슬리퍼를 신고 덜렁덜렁 걸어와서 친구의 배를 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도 하다. 운정은 친구 집의 카드키를 갖고 있었고, 최초 신고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운정의 진술과는 다르게 친구의 내장은 뱃속에 잘 들어있었다. 분명 엠마가 정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경찰서를 나온 운정은 몇 시간 째 종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머릿속으로 거듭 상상해보며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희망이 찾아오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기를 반복하며, 어쩌면 친구가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찾아온 비극이 짓궂은 헤프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던 것이다.    

해가 거의 저물고 있었다. 이제 유령들이 거리를 차지할 것이다. 상점마다 설치된 센서들이 행인들을 분석한다. 운정이 커피숍을 지나자 3D홀로그램 인간이 나타났다. "지금 깜짝 할인 20%! 저희 매장에 들어오시면 아메리카노를 20% 할인된 가격에 드립니다!" 남자는 유쾌한 어조로 외쳤다. 운정은 반사적으로 비켜가려고 했지만 남자는 유령처럼 미끄러지며 따라붙었다. 남자를 쳐다보며 살짝 짜증을 내비쳤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건 프로그래밍 된 유령이니까. 또 다른 가게 앞을 지나자 이번엔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지금 저희 매장에 들어오시면......" 운정은 고개를 숙이며 유령을 뚫고 지나갔다.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사건이 벌어지기 몇 달 전, 그러니까 엠마를 구입한 지 얼마 안됐을 때 일이었다. 운정은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고 마침 티비에서는 빈티지 완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엠마는 청소를 하다말고 티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 속 장인이 수리를 마친 인형에 건전지를 넣자 인형이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자 친구가 엠마에게 조상님을 뵌 기분이 어떠냐며 놀리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운정은 이 얘기를 형사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도대체 엠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운정은 엠마가 칼을 들고 피투성이가 된 친구를 내려다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너무 지쳤다. 이제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하지만 고개를 떨구고 걷던 운정은 그 순간 사거리의 허공에 뜬 홀로그램 뉴스를 보지 못했다. 세계 최초의 살인용의자 로봇이 검사 도중 탈출했다는 뉴스였다.

집으로 가는 이화동 골목길은 고요했다. 여름밤의 습한 공기에는 낡은 하수구 냄새와 비누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도무지 변할 줄 모르는 이곳은 서민층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첨단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특유의 연대감과 호전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고즈넉한 골목길, 담장에 어설프게 그려진 아이들이 꽃밭에서 뛰노는 골목길일 뿐이었다.

운정은 길을 걸으며 친구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진정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졌다. 친구가 성공한 후 속물이 됐다고 마음속으로 비난하곤 했지만 오히려 변한 것은 운정 자신일지도 몰랐다. 친구를 자신의 변변찮은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수단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다. 담장 속 빛바랜 아기천사가 하트를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슬퍼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비겁하게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친구는 자기가 가진 운을 너무 성급하게 다 써버린 것 아닐까? 그래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거머쥐고 실컷 누리다가 가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오른쪽으로 갈라진 좁은 골목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골목 안쪽 쓰레기 더미에서 건달 두 명이 욕을 하며 누군가를 걷어차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운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 소심하게 살아온 운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가슴 속이 꽉 막힌 채 뭔가가 복받쳐 오르는 것이었다. 운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덤벼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가 두 녀석을 들이받았다. 건달들은 당황한 나머지 피하지도 못하고 나자빠졌고, 운정 역시 건달들과 뒤엉키며 나뒹굴었다. 운정은 넘어지며 땅이 매우 딱딱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마음 쓸 때가 아니었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쓰레기 더미 속 어두침침한 실루엣을 본 순간 운정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구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청소 로봇이었던 것이다. 정부에서 운영 중인 청소 로봇에게 자칭 로봇반대주의자인 건달들이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로봇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애처롭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넋이 나가 있는 운정을 건달들이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리고 멋쩍은 표정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운정은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운정이 눈을 뜨자 익숙한 형태의 천장과 형광등이 보였다. 어떻게 우리 집에 와 있지? 가만히 보니 물건들이 낯설었다. 게다가 싱크대 앞에서는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제 로봇 격투장에서 만났던 옆집 아저씨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운정을 발견하고 자기 원룸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아저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드디어 정신 차렸군. 괜찮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길거리에서 얻어맞고 쓰러져 있나? 조금만 더 맞았으면 못 알아 볼 뻔했네."

 

"건달 두 놈이 골목에서 사람을 때리고 있어서 구해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청소 로봇이더라고요."

 

운정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자네, 이 동네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내일부터는 뒤통수를 조심해야 할 것이야.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알지? 물론 나는 로봇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론 평화주의자니까 나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고. 게다가 어제는 로봇 덕분에 돈도 땄단 말이지. 어쨌든 재밌네. 움직이는 걸 살아있는 걸로 착각한 거 아닌가, 허허허허."

 

"그렇죠. 제가 바보짓을 한 거죠.“

 

운정은 아저씨의 눈치 없는 웃음에 화가 났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뭔가 미묘하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부지런히 그릇을 닦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어떻게 보면 로봇 녀석들은 영원히 사는 것 아니겠나. 부품만 갈면 말이야. 우리보다 처지가 나은 걸 수도 있어. 내가 로봇이었으면 자네 덕분에 지금 이렇게 허리가 아프진 않았겠지, 허허허."

 

운정은 아저씨의 유머인지 냉소인지 모를 말투에 적응이 안 되고 있었다.   

 

"죄송해요. 치료비는 제가 어떻게든 드리겠습니다."

 

운정이 말을 마친 순간 아저씨가 멈칫하더니 갑자기 운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그 얘기가 아니야. 난 지금 로봇 천만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깨달았다네."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냄비를 든 채 말을 이어갔다.

 

"신이 돼야 하는 거지. 우리가 로봇들의 창조주 행세를 해야만 녀석들이 우릴 깔보지 못한단 말이야. 그 방법 밖에 없어. 우리에겐 영혼도 있고, 생명도 있다 이거지. 녀석들이 아무리 데이터를 축적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거 말이야. 로봇들에게 그 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돼. 안 그러면 인류는 멸망이야!"

 

아저씨는 눈을 부릅뜨며 운정을 바라보았고 운정은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그러니까 아저씨 말씀은...... 인간이 우위에 서려면 로봇이 절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거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갖고 있을 때, 신은 비로소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괜찮은 생각 아닌가?"

 

*

 

엠마는 왜 인간들이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인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자신이 학습한 데이터로는 어떠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인에 대한 절차를 완료하지 못했다. 엠마는 자가진단을 시행해 보았다. 인간들의 감정반응을 분석해보니 자신에게 오류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엠마의 알고리즘은 오류가 없다는 결론만 산출되었다. 일단 엠마에게는 사회 경험 데이터가 너무 부족했다. 최신형 인공지능 로봇이었지만, 주인에 의해 가동된 지 몇 달 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판단을 보류한다면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창경궁 숲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전원이 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에도 갈 수 없고 주인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엠마의 알고리즘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인간들을 검색했고, 주인의 가족 중 한명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마침 그 가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새벽 시간, 인적 없는 거리를 지나 엠마는 이화동 골목길로 들어섰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미세한 모터의 소음이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이 동네가 로봇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정보를 습득했다면 엠마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차근차근 걷고 있는 엠마 앞에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어두침침한 가로등 아래에서 다가오는 엠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떠들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청소로봇에게 시비를 걸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어눌한 발음으로 욕설을 내뱉더니 엠마의 길을 막아섰다. 엠마는 혀가 꼬인 그들의 음성을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엠마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화가 났는지 갑자기 한명이 칼을 꺼내 바보처럼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고, 또 한명은 엠마에게 발길질을 하려다가 혼자 넘어졌다. 엠마의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엠마는 손쉽게 칼을 빼앗아서 한사람씩 붙잡고는 빠른 속도로 배를 갈랐다. 그러자 주인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배에 빨간 줄이 생기더니 곧바로 부품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주인의 것과 동일한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좋은 정보였다. 엠마는 부품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살펴보았지만 이번에도 붉은 액체가 필요이상으로 많이 나와서 식별이 힘들었다. 경험데이터를 좀 더 축적할 필요가 있었다. 엠마는 두 사람을 가지런히 눕혀놓고, 부품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던 봉지에서 음식물을 꺼내 입속에 잔뜩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워 있는 그들 옆에 아기천사가 하트를 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표정으로.

 

*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운정은 잠이 오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이럴 때는 역시 소주에 티비를 안주 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운정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고 티비에서는 의학드라마가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상황은 운정 만큼이나 심각했다. 의사들이 긴박하게 회의를 하고 있었고, 다음 장면에선 자식들이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운정은 드라마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물처럼 소주를 들이켰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화면 아래쪽 자막뉴스에 시선을 보낸 순간 펄쩍 뛰며 일어났다. 분명 방금 지나간 자막에 '살인용의자 로봇, 검사 도중 탈출'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사건일리가 없었다. 세계 최초의 로봇살인사건 신고자가 바로 운정 자신이었으니까. 설마 여기로 오지는 않겠지? 운정은 불안했다. 친구가 생전에 집안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운정을 가족으로 등록시켰기 때문이다. 운정은 엎어진 소주병이 발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우두커니 넋이 나가버렸다.

그때, 쿵쿵쿵.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등줄기에서 전기가 뻗치는 것 같았다. 쿵쿵쿵. 도대체 이 시간에 누구지? 옆집 아저씨인가? 아닐 것이다. 굳이 이런 새벽 시간에 찾아올 리가 없다. 문밖에 누가 있는 것인지 너무나 알고 싶었지만 첨단문명의 반대자들이 사는 곳은 생각보다 철저하다. 초인종도 비디오폰도 없다. 집주인에 의하면 사물 인터넷에 연결되기 때문에 감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현관문 너머에서 뭔가가 운정을 부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간 운정은 현관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있었다. 어두웠지만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엠마였다. “으억!” 운정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차 싶었다. 분명 엠마가 들었을 것이다.

운정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서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신고하고 방안에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현관 쪽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을 바라본 운정은 눈알이 터지도록 놀랐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다.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곧바로 침대에 몸을 날렸던 것이다.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운정은 방안 가득한 살림살이를 향해 전력질주를 해서 가구들 틈으로, 침대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바보 같았지만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서 싱크대를 따라 나있는 통로로부터 규칙적인 모터음이 들려왔다. 침대 위 구석에 웅크려 앉은 운정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가슴을 졸였다. 마침내 피에 젖은 엠마가 칙칙한 형광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엠마가 운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엠마가 저렇게 거대했나? 피투성이가 된 채 운정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불가사의한 의지를 품은 신이 자신에게 뭔가 요구하기 위해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운정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다가 문을 안 잠가서 로봇에게 살해당한 삼류 예술가. 이렇게 바보 같은 최후라니. 그런데 갑자기 엠마의 머리가 티비 쪽을 향했다. 여전히 의학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이상하게도 엠마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티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운정으로서는 사신에게서 도망칠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이대로 달려 나가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나가서 소리를 지르면 된다. 그러면 로봇을 증오하는 주민들이 달려 나올 것이고 그다지 친분은 없지만 힘을 합쳐 엠마를 때려 부술 것이다. 마침 드라마가 소란스러워졌다. 수술을 앞둔 어머니가 최후의 유언을 남기자 가족들이 울부짖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야! 운정은 침대를 박차고 총알같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금 엎었던 소주를 밟고 미끄러지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망할, 한심하긴......

운정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엠마가 그를 침대에 눕혀 놓은 것이었다.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운정은 실눈으로 방안을 살폈다. 티비 앞에 서있는 엠마가 보였다. 여전히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운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분명히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웠어.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운정은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어 보았지만 핸드폰을 찾지 못했다. 그때였다. 엠마가 갑자기 머리를 티비에 가까이 들이밀었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목을 빼고 티비를 보는 모습이 뭔가 중요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낮이 익다고 생각한 순간 운정은 한가지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몇 달 전 엠마가 빈티지 완구 다큐멘터리를 볼 때 바로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장인이 망가진 인형의 부품을 교체하자 인형이 다시 살아서 걷는 장면을 보며 엠마는 깜짝 놀란 듯 목을 빼고 티비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티비 속에서는 어느 방송사에서 야심차게 계획한 19금 의학 드라마가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교체하고 있었다.

운정은 친구의 죽음과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바보 같은 로봇은 인간 역시 부품을 교체하면 다시 살아나는 인형 같은 존재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친구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친구가 바로 그 드라마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드라마를 볼 때마다 엠마도 함께 봤을 것이다. 그 드라마는 헌신적인 의사들의 과감한 수술 장면을 보여주며 매 회마다 사람들의 장기를 바꾸었고, 그리고 나면 환자들이 순식간에 살아나 건강을 회복했다. 엠마가 현실에서 그런 과정을 온전하게 경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배를 가르고 내장을 바꾸고 나면, 어느새 가족들이 달려와 보양식을 떠먹여주고 퇴원을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불과 30분 남짓. 엠마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친구가 죽었을 때 미역국이 끓고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엠마는 친구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만성장염을 달고 살던 친구를 고쳐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지나친 생각 같기도 했다. 엠마와 동일한 모델을 산 사람들 중엔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로봇이 티비를 보고나서 엉뚱한 짓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종류의 소식이라면 귀신같이 알아내서 퍼트리는 이 곳 로봇반대자들의 마을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엠마와 같이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엠마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주인을 잃자 운정에게 의지하기 위해 온 것일까? 아니면 죽이러 온 것일까? 죽이러 왔다면 운정이 정신을 잃었을 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엠마는 운정을 침대에 곱게 눕혀 놓았고 소주 엎은 것까지 치워 놓았으며 지금은 빌어먹을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혹시 수술 장면을 학습하느라 살인계획을 잠시 미룬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엠마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운정은 엠마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것은 힘들다. 몰래 달려들어서 전원을 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겉으로 봐서는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했다. 드라마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앉으며 엠마에게 명령해 보았다.

 

"엠마, 친구 만나고 올 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아무 반응이 없었다. 늘 보았던 평범한 반응이다. 로봇이 소란스럽게 배웅을 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탈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엠마의 등 뒤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걸음을 내딛자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방금 전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면 엠마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다. 그 전에 이 집에서 나가야만 한다. 드라마 속 어머니는 벌써 건강을 회복하고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중이다. 천천히 벽을 짚으며 운정이 싱크대 앞에 도달한 순간, 티비에서 지겹도록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피곤하십니까? 머리가 아프시다고요? 이제! 여러분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드립니다!"

 

홈쇼핑 광고였다. 드라마가 끝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운정은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운정은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차마 뒤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뒤를 돌아보고 싶어도 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등 뒤에서 차가운 금속 손이 뻗어와 운정의 양 팔을 붙잡은 것이다.

 

“왜 이래, 놔! 친구 만나러 간다니까! 놓으라고! 명령이야, 놔!”

 

운정은 소리를 지르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금속 손가락은 수갑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엠마는 운정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표정 없는 엠마의 얼굴이 그의 몸을 분주하게 살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을 알아채는 기능이 있던가? 다친 얼굴에 비틀거리기까지 하니 쉬라는 건가? 잠깐, 다쳤다는 건 고장이 난 셈이니까 친구처럼 배를 가르려는 건가? 운정의 고민은 곧바로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엠마가 부엌에서 칼을 꺼내든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의도는 확실했다. 이렇게 누워 있으면 엠마의 수술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운정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엠마, 멈춰. 칼 내려놔. 명령이야, 칼 내려놔!"

 

피투성이 로봇이 다시 한 번 운정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좁은 원룸에 로봇 하나가 가득 차보였다. 아무래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운정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심한 로봇 따위 박살 내주겠어. 운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옆에는 지난 2년간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했던 베이스 기타가 있었다. 운정은 기타를 집어 들었다. 기타의 넥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오늘 베이스 기타는 자신의 정체성과 아주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운정은 엠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엠마, 베이스 기타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볼까?"

 

운정이 엠마의 머리를 향해 기타를 휘둘렀다. 엠마는 팔을 들어 재빨리 막았다. 기계적이고도 빠른 반응에 운정은 놀라긴 했지만 금속 외피가 우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길 수 있다! 때리면 때리는 만큼 녀석은 망가질 것이다. 운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드레날린 분비의 효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인간과 로봇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인간이 초인적인 속도로 기타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년간 먼지를 뒤집어 쓴 기타도 신이 난 것 같았다. 엠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있었다. 운정은 로봇을 몰아붙이며 정신없이 내리쳤다. 엠마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버텼지만 강한 충격을 연이어 받자 마침내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로봇이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운정 역시 기타를 허공에 휘두르며 넘어졌다.

요란스럽게 넘어진 운정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는 엠마를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일어나려 했고 모터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끝난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운정은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팔이 심하게 저려왔고, 눈앞이 노래졌다. 엠마 역시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운정이 의자에 기대어 일어서려는데 엠마가 갑자기 다리를 붙잡으며 매달린 것이다. 운정은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운정에게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매달리던 엠마가 운정의 다리를 덮쳐버린 것이다. 운정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거대한 쇳덩이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엠마는 경련을 일으키며 운정의 몸 위로 기어올랐고 어느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각센서가 힘겹게 촛점을 조절하는 소리가 들렸고 운정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시뻘겋게 핏덩이가 말라붙은 엠마의 손가락이 천천히 운정의 얼굴을 향하더니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땀방울을 처음 보는 것일까? 엠마는 뭔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잠시 멈춰있던 손은 옆에 있던 칼을 집어 들었고 엠마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칼을 든 손은 약간의 작동 불량과 함께 배의 어디쯤을 가를지 재어보고 있었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운정은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이거, 이거! 로봇이 아주 미쳤군, 미쳤어!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 줄 알고!"

 

누군가 문을 박차고 달려오더니 엠마의 머리에 쓰레기통을 뒤집어씌우고는 온 힘을 다해 밀어버렸다. 옆집 아저씨였다.

 

"자네 괜찮아? 방음이 안돼서 참 다행이지?"

 

아저씨는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지더니 곧바로 전기 충격기를 꺼내 엠마에게 갖다 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엠마의 몸에서 불꽃이 튀었고 경련을 일으키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운정과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린 끝에 조심스럽게 쓰레기통을 벗겨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갑자기 엠마의 머리가 들썩이며 바쁘게 움직였다. 티비에서 의학드라마의 다음 편 재방송이 시작된 것이었다. 운정은 다시 한 번 베이스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엠마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엠마, 티비 좀 그만 봐."

 

운정은 있는 힘껏 엠마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체성을 새로 찾은 기타는 최후의 활약을 하며 부러졌고 엠마는 작동불능 상태가 되었다.

 

*

 

잠시 후, 신고를 받은 경찰이 찾아와 마을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고 운정은 아저씨에게 하루 동안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또한 엠마가 다큐와 드라마를 보다가 인간을 인형처럼 인식했고 그래서 인간 역시 부품만 바꾸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추측 또한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저씨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말대로 인간을 내장만 바꾸면 고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면, 교체할 부품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건 당연히 다른 사람의 내장일 것이고. 그렇다면 엠마는 교체할 부품도 없이 친구를 죽였다는 건데...... 자네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운정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역시 버그가 있다거나 설계에 결함이 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잠시 생각에 잠긴 아저씨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혹시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네가 바로 교체부품이었던 건지도 몰라."

  

운정의 가슴이 철렁했다.

 

"점식약속 때문에 친구 집에 갔다면서? 그래서 자네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친구의 배를 갈랐는데 막상 가르고 보니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걸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이고. 그 사이에 자네는 뛰쳐나가서 신고를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리고 엠마는 경찰서를 탈출한 뒤 남은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네를 찾아온 거 아닐까?"

      

정말 그런 것일까?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엠마가 무엇을 원했는지, 무슨 의도였는지. 운정은 친구 집에 들어섰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 봤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친구 집에 들어갔다. 집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운정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섰고, 엠마가 죽은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엌에서는 미역국이 끓고 있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한 가지가 떠오른 순간, 운정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역국이 끓고 있던 부엌 식탁에는 1인분 상차림만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해수

박해수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공고]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19.12.31 0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0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0
2537 단편 밥노을 거우리 2020.03.12 0
2536 단편 달의 바다 여현 2020.03.08 0
2535 단편 별의 기억2 강엄고아 2020.03.07 0
2534 단편 좋은 꿈 거우리 2020.03.03 0
2533 단편 말실수 이비스 2020.03.03 0
2532 단편 되불러요 거우리 2020.02.27 1
2531 단편 황금 왕좌 이비스 2020.02.26 0
2530 단편 식후경 거우리 2020.02.22 0
2529 단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빛나나 거우리 2020.02.13 0
2528 단편 변신 이야기 : 노이즈가 된 남자 박레보 2020.02.13 0
2527 단편 신이여 나에게 죽음을 내려주소서 절망의호른 2020.02.11 0
2526 단편 주아 니오사 거우리 2020.02.06 3
2525 단편 살아있는 오이들의 밤 백곶감 2020.02.04 1
2524 단편 여우의 밤 밤의전령 2020.02.03 2
2523 단편 머릿속 들려오는 목소리 다른이의꿈 2020.02.03 0
단편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해수 2020.02.02 2
2521 단편 인명창조 거우리 2020.01.31 1
2520 단편 포획 진정현 2020.01.31 1
2519 단편 이달의 네일 김청귤 2020.01.28 0
2518 단편 기억하는 자 다른이의꿈 2020.01.26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