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인명창조

2020.01.31 16:5001.31

수천 번도 넘는 아침을 일깨운 종탑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두꺼운 기둥이 조릿대처럼 부러지며 깨진 벽돌이 쏟아졌다.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종이 널브러지자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먼지 구덩이를 나뒹구는 피투성이의 시신 위로 재차 폐허가 무너져 내렸다. 역한 연기가 구름마저 밀어내고 성소의 하늘을 뒤덮었다. 불로 된 파도가 차례차례 집과 거리를 집어삼켰다. 넘실거리는 불길 너머로 간간이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드높은 첨탑도 고색창연한 색유리도, 몇천몇만이나 되는 순례자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길도 더 알아볼 수 없었다.

노인은 침소의 창턱을 붙잡은 채 신음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등 뒤로, 복도를 메우는 다급한 발걸음이 들렸다. 피와 그을음으로 얼룩진 갑옷이 철컥철컥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채 식지도 않은 무기를 거머쥔 채 근위병들이 들이닥쳤다. 코를 찌르는 쇳내가 금세 방을 채웠다.

“발렌티노 성하! 이만 피하셔야 합니다!”

창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보이지 않는 이빨처럼 노인의 귓전을 물어뜯었다. 노인은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관절이 불거진 손가락이 발악하듯 창틀을 파고들었다. 길게 늘어진 로브 아래로 노쇠한 심장이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날 내버려 두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은신처로 모시겠습니다!”

예상한 바였다. 노인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턱 뒤편이 지끈거리도록 힘을 주었다.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던, 가까스로 꽁꽁 감추던 가능성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빠져나갈 수 있다. 어쩌면 저항군을 모을 수 있다.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 손을 놓고 저들을 따라갈 수 있다. 어쩌면, 어쩌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저들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곳이 아직 있단 말입니까?”

그는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그 어떤 공국의 어떤 성채도, 어떤 성인의 어떤 유물도 저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설령 그대와 내가 바다 건너로 몸을 피한다 한들 이 추격이 멈추겠습니까? 기어이 더 먼 곳으로 도망가면서까지, 더 많은 죽음과 비명을 우리 뒤편으로 끌고 다니겠단 말입니까?”

하오나 교황 성하, 적이다! 절규하듯 그들은 무기를 뽑았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삽시간에 끝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들은 사그라졌다. 진흙을 긁어내고 웃자란 풀을 베듯 빨랐다. 노인은 일이 벌어지는 내내 굵은 눈물을 흘렸다. 달아오른 피가 전신을 내달렸지만 그 반대로 머릿속은, 손과 발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옷자락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몸의 떨림이 심해졌다. 소란이 금세 사그라졌다. 철벅. 새로운 기척이 등 뒤편에서 끼쳤다. 피 냄새와 섞여 풍기는 알싸한 악취. 썩은 살과 흘러내리는 고름의 내음. 균류처럼 유독한 홀씨를 퍼뜨리는 그 발걸음.

“이 자가 이들의 현인신(現人神)이다.”

낮고 거칠었다. 목구멍까지 진흙을 채워 넣은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돌을 깎고 잎사귀를 베는 소음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노인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몸에 힘을 주고, 깊게 숨을 쉬었다. 구역질 나는 악취가 혀뿌리까지 스몄다. 더 마음이 기울기 전 몸을 돌렸다. “아니다.”

이제 그들을 마주 본 채, 다시 입을 열어야―. 저도 모르게 노인은 숨을 삼켰다.

지옥의 힘. 악마의 군대. 모든 죄악과 부정을 저지른 이들. 많은 흉흉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짐짓 크고 무서운 말들일 뿐이었다. 이 순간 지금 이곳에서 마주하기 전까지, 노인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진짜로 본 적이 없었다.

누덕누덕 기워진 몸뚱이는 손바닥만큼이라도 온전한 곳이 없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몸통, 벌집처럼 너덜너덜한 팔, 깜부기병에 걸린 이삭처럼 검게 썩어들어간 다리, 누르스름한 뼈를 드러낸 목, 썩은 노른자처럼 부푼 눈두덩. 그러나 흉흉한 안광과 자수정처럼 예리한 그 이빨. 쥐고 있는 무기는 잔뜩 녹이 슨 채 그나마도 굳은 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노인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늘 아래 결코 이 땅을 걸을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가늠했다. 끈끈한 즙액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우린 너를 안다. 너는 이들의 현인신이다.”

똬리를 튼 뱀처럼 그 목소리는 들렸다. 파리의 날갯짓. 노인은 고개를 폈다.

“아니다, 나는 이곳의 현인신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없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그것들은 또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기를 든 손이 느슨해졌다. 진작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팔다리가 삭정이처럼 힘없이 처졌다. “그럼 넌 누구냐.”

“나는 이들 모든 믿음의 표상이오, 단 하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이다. 그리고 이런 자격으로 감히 너희의 현인신을 알현하기를 요청한다.”

연기는 멈추지 않고, 비명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콧구멍과 가슴팍과 머릿속까지를 채운 고약한 부패의 냄새. 벌름거리는 목젖. 새어 나오는 신음.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이물스러워진 다리. 폭발할 것처럼 갈빗대를 두들기는 심장. 노인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한참을 더 견뎌야 했다.

 

 

그대가 그 현인신은 아닌 현인신이로군.

말은 귀가 아닌 목덜미와 눈 뒤편을 먼저 어루만졌다. 그 숨결은 세상 모든 독사와 전갈과 독벌레의 유해한 기운을 실어 왔다. 노인은 피가 나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기도문을 읊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사제였을 때, 일개 평신도였을 때, 아니 그조차 아닌 어떤 배부른 어린 것이었을 때를 곱씹으며.

장정 수십은 들어올 만큼 큰 천막이었다. 그러나 중앙에 있는 것을 피하거든 몸을 돌려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통로뿐 남지 않았다. 덩어리는 살코기를 잔뜩 쌓아 윤기 나게 굳힌 것처럼 보였다. 창백하게 부푼 살집, 거칠게 얽은 딱지와 벌겋게 부어오른 염증.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몸은 짓무른 과육처럼 연신 흘러내렸다. 그런 것이 눈과 코와 귀를 달고 있었다. 천막으로 이어지는 창자와 관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노인은 무심코 벽에 손을 대었다가 화들짝 떼었다. 따뜻했고 조금씩 움직였다. 누군가의 살결처럼. 살아있는 것처럼.

? 막상 닥치니 입을 함부로 못 놀리겠나? 느물거리며 그것이 말을 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왔다. 누군가는 애원하러, 누군가는 협상하러, 장렬히 산화하여 내 마음을 돌려놓고자 온 자들도 있었지. 그들 또한 종래에는 나의 축복을 받았다. 눈 감지 않는 몸이 되어 이 세상을 걷고 있어. 왜 너는 아무 말을 않지? 아니면

우렁우렁 천막이 뒤흔들렸다. 웃음은 아지랑이처럼 서서히 피었다.

칼부림이라도 해볼 셈인가? 날 암살하러 이곳까지 오길 청했어?

“나는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이국의 현인신이여.” 흐음. 그것이 의뭉스럽게 신음했다.

“그 반대이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자 왔소. 그대의 까닭을 듣고자 왔소.”

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면 스스로를 다그쳤다. 살덩이가 뒷말을 재촉하는 듯 느리게 고개를 꺼덕거렸다.

“그대 병사들의 칼끝이 나를 겨누었고 또 수도 없이 많은 나의 사람들을 베어 넘겼소. 허물어진 우리의 성벽이, 불타 없어진 거리가 채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요. 그저 악인이라 단정짓기는 쉬울 것이오. 그러나 그 정도의 힘을, 그 정도의 의지를 지닌 자라면 마땅히 나름의 대의가 있으리라 믿었소. 유치한 정복욕 따위가 아닌, 분명 그대만의 덕성을 따라 움직였으리라 믿었소. 그렇기에, 그 까닭과 나름의 대의를 들으러 왔소.”

프흐흐흐흐. 음산한 웃음소리가 천막을 메웠다. 바닥에서부터 스민 떨림이 등뼈와 목덜미를 타고 마음속으로 맺혔다. 노인의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병사들의 꼴을 보고도 그렇게까지 생각하다니, 과연 믿는 바는 달라도, 어딘가의 현인신답군. “나는 현인신이 아니오.” 노인이 빠르게 덧붙였다.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대가 그리 생각한다면 고쳐 말할 수밖에 없소.”

난 시인이 아니다. 말과 생각에 있어 어떤 깨우침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너처럼은, 아니 너와 가까이에서 믿음을 구하던 그 누구처럼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난 너를 현인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너의 땅에 있던 자들은 이미 네 옷깃과 표상을 보며 고갤 조아리는데 더 익숙해지지 않았느냐? 분명히 있는 것 살아 숨 쉬는 것을 믿는 데에 어디 잘못된 구석이 있을까? 그래서, 내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그곳의 현인신이 아닌 현인신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현인신이시여. 나와 다른 까닭을 좇아 사람들을 이끄는 그대여. 이 자리에서 진정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명패 따위가 아니니.”

이 말이 대화의 궤적을 바로잡았다. 그것은 동굴처럼 깊게 부풀고 쪼그라들길 반복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에게 믿음을 바친 이들이, 그리고 그들에게 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부활, 이라고 성급한 이들은 칭하지요. 그러나 죽지 않게 되는 것이 도리어 어울린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합니다. 나를 이곳까지 호송하고 지금도 이역만리의 땅에서 녹슨 날붙이를 휘두르는 그대의 병사들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살덩이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굴렸다. 전차의 바퀴만 한 그것에서 예리한 안광이 쏟아졌다.

부활이라는 말은 나도 쓰지 않는다. 돌아온다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 내리고 나서야 나올 수 있는 말. 죽음에 되레 머리를 조아리는 말이다. 죽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현인신으로써 나의 대의이다.

이젠 노인이 아니라 그것이 말을 고를 차례였다. 길고 뜨겁고 헐떡이는 시간이 지나갔다.

산 것은 죽는다. 죽은 것은 살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다시는 죽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난 나를 믿는 모든 이들을 거짓으로 죽여두었다. 끊임없이 다가오되 결코 다다르지는 않는 완전한 끝. 죽음을 그렇게 나는 모두에게서 유예한다. 그것이 내가 약속한 것이다.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마어마한 힘이 그들을 막아서더라도 말입니까?”

제아무리 역한 괴질이라도 이미 썩은 몸을 해할 순 없다. 제아무리 서슬 퍼런 날붙이라도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에 작은 흉이 더해질 뿐이다. 제아무리 지엄한 힘이라도, 설령 시간 그 자체라 한들 들러붙은 크고 작은 병변이 늘어나고 줄어들 뿐이다. 나를 믿는 이들은 그렇게 삶을 얻었다. 무엇도 잃거나 잊지 않아도 되는 삶. 지금 이대로의 나와 나의 사람들과 함께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

노인은 조금 미심쩍은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마침 천막 바깥으로 그것의 병졸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이미 셀 수 없이 마주친 광경인데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나도 안다. 살덩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그러나 저들은 나의 꼭두각시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인형도 아니야. 오히려 감각을 깨우침에 따라 저들의 즐거움은 나날이 늘어간다.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고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의 믿음이 훑어내린 모든 마을에서, 축복받은 자들이 어찌나 빠르게 새 삶에 적응하는지 알면 놀랄걸.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오지 않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거스르는 일이 아닙니까?”

 

크르릉. 흡사 짐승의 울음처럼 들렸다. 노인은 조금 뒤에야 그것이 세찬 콧김임을 알았다.

그래. 언제나 너처럼 말하는 이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 똑같이 되물었다. 누굴 잃어본 적이 있나?

선뜻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노인은 작게 읊조리며 뒷말을 기다렸다.

난 있다. 난 너무도 많이 그들을 잃었다. 다신 새로워질 수도 함께 나눌 수도 없는 반쪽짜리 기억과 말만 갖고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았다. 문득 그 모습이, 버릇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듯 아픈 까닭에 지새운 밤이 너무도 많다. 영영 쫓아갈 수 없는 곳으로 그들이 떠났는데도 아직도 내가, 하늘과 들판과 강과 나무가, 이 세상 모든 게 아직 그대로인 것을 볼 때마다 차라리 온몸이 찢어져 고통스럽게 죽길 바란 적이 너무도 많다.

“그대는 스스로를 시인이 아니며 어떤 깨우침도 받지 못했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그대는 이미 시인이며 스스로 깨우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생각보다 지혜로운 이입니다.”

그래, 그것이 너의 세상이었겠지. 그것이 네가 자라온 방식이었겠지.

그것은 끓어 넘치기 전의 솥처럼 씨근거렸다. 언뜻 분개하는 듯, 그러나 내면에는 실상 더 차갑고 아픈 맛이 감돌았다.

온통 친절하고 보송보송한 말들. 서로의 기분을 헤아리고 따스한 말을 서로 주고받는 곳. 너의 믿음에 대해 나는 안다. 그들의 현인신 아닌 현인신이 되려거든 얼마나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야 하는지, 얼마나 그 손이 깨끗하고 피부가 보드라운 채 목소리가 굵어져야만 그 자격이나마 얻을 수 있는지. 그러고도 한참이나 저들끼리의 경합이 펼쳐진 뒤에야 뽑히는 것이 비로소 너임을 안다. 그래서 네가 뭘 알지? 넌 진정 누구도 잃어 본 적이 없다.

이것 또한 대답하기 힘든 말이었다. 노인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얼어붙은 똥과 해골이 굴러다니던 곳에서, 들개가 침을 흘리는 가운데 태어났다. 내 울음소리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 그 뒤 난 현인신의 씨앗을 품었다는 걸 알 때까지, 네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 중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아니 버텼다. 눈이 벌겋게 될 때까지 가축의 똥 냄새를 맡으며 흙을 파먹었다. 바깥으로 쫓겨나 생긴 상처가 덧나 결국 눈을 상하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와 썩은 내장을 허겁지겁 넘기다 속이 상해 다 게워내는 날도 허다했다. 이런즉슨 내가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내게 다가와 준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모두 없어졌다. 떠나버렸다.

잿불이 오그라지듯 살덩이가 줄어들었다. 잔뜩 퍼져있던 눈과 코와 귀가, 입이 잠깐이나마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노인은 그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분명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따위 것이 이치라면 나는 이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이다. 더없는 배신이다. 어떤 애절한 이름이라도 언젠가 잊히고 더럽혀지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이라도 언젠가 텅 빈 기억으로밖에 남지 못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이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믿음이고 행복이다. 나는 나 같은 이를 더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잊거나 잊히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오직 지금 우리가 아는 이대로의 세상에서 영원히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렇소. 난 그대 말마따나, 어쩌면 평생 흙도 피도 손에 묻혀본 적 없는 어린 것일지도 모르오. 세상과 철저히 단절되어 이 옷과 믿음의 상징만을 떠받든 철딱서니 없는 아이일 수도 있소. 그렇다 한들 내가 생명의 순리를 모르는 딱한 처지는 아니지요.”

노인이 허리를 폈다.

“죽은 것은 다시 살 수 없다고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그대에게 믿음을 바친 이들이 새 생명을 잉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나는 압니다.”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낮게 대거리했다.

누구도 죽지 않는 곳에서는 누구도 새로운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다.

“그대 말마따나 나는 누군가의 아비가 된 적도, 부부의 연을 맺은 적도 없소. 그러나 한편으로 내 스스로, 또 다른 사제들이 한 쌍이 된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고 또 들었소. 그대 또한 알겠지. 둘의 아이가 생긴다는 것. 그 결실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 말이오.”

노인이 제 허벅다리와 무릎을 주물렀다. 주변을 살펴 앉을 자리를 찾았다. 살덩이가 뻗치지 않은 곳을 간단히 정리했다. 앙상한 무릎이 바닥과 퉁명스레 부딪혔다.

“이 아이, 나의 배우자를 위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겠다는 결심. 언젠가 함께할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고 그래서 좀 더 나은 곳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몸부림치는 그 힘. 까마득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금 우리의 모든 글자와 옷과 바퀴를 만들 수 있게 해준 힘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겠지요. 더불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도.”

더 나은 곳이 되지 않아도 좋은 힘을 나는 이들에게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이제 방울뱀처럼 고개를 쳐든 채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씩씩거리는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 반대로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자세로 노인은 스스로를 겸양하였다.

“말했다시피 나는 그대를 들으러 왔소. 누군가의 까닭을 대의를 듣는다는 것은 나를 오롯이 내려놓은 뒤에야 가능한 것. 그대에겐 그대의 뜻과 맥락이 있음에, 둘 중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저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답을 찾아냈을 뿐.”

어느새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이내 두 손을 모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그것에게는 생경한 어절과 운율을 뱉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조아렸다.

뭐 하는 거냐? 살덩이가 거칠게 물었다.

“말마따나, 나는 무엇 하나 삶에 쓸모있는 것은 익힌 적 없는 어린 것입니다.”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노인은 입을 열었다. 어떤 자기 감각도 판단도 들어있지 않은 물방울처럼 그저 거기 머무르는 말.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딱 두 가지의 것을 하려 합니다. 나는 듣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 믿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인의 맞잡은 손이 더욱 간절해졌다.

“우리의 믿음에는,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허나 외람된 말이겠으나, 나는 경전의 이러한 해석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범부라면 설령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도무지 가지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믿는다는 것. 들은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진정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뒤에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주위에 메아리쳤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둘을 휘감는 기척만은 분명했다. 노인은 발가락을 꼭 오므렸다. 눈을 굳게 감았다. 살덩이는 거미줄에 붙잡힌 벌레처럼 몸을 떨었다.

멈춰라, 멈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치니, 순리니 하는 따분한 말은 더 하지 않겠습니다. 나 또한 그대와, 그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더운 피와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까닭입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정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들어와라! 이놈을 끌어내라! 그것이 새된 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곳의 이 대화가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될지, 그때마다 어떤 이름과 목소리가 내걸릴지 나는 모릅니다. 어쩌면 작금 나의 선택은 미래 그들이 보기엔 망집이 될지 모르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대와 나 모두는 어느 한 극단 아래 서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곳에도 함부로 멈춰선 안 되겠지요. 그래서 아직은, 설령 다른 믿음과 다른 이름을 따른다 한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너는 아직도 내 말을 안 듣고 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 아니냐! “더없이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맞닿았다.

“들었기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대를 위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천막이 들썩거렸다. 온 세상이 민들레 씨앗이 날리듯 정신없이 뜨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별처럼 이글거리는 기운이 노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야 그대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얼굴을 맞대고 나서야 그대의 이야기를 나는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손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제야 그대를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대와 그대가 지키고자 하였던 모든 이들에게 지극한 축복과 안식이 내릴 것을 나는 믿습니다, 기도드립니다.”

눈이 멀도록 강한 섬광이 둘을 집어삼켰다. 둘이 있는 천막을, 죽지 않는 자들이 돌아다니는 마을을, 성을, 알려진 모든 숲과 산과 강과 바다를 뒤덮었다. 이윽고 그 모든 것이 졸아들었다 하나의 점으로.

 

*

 

노인은 손톱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창틀을 붙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관절을 달래며 다시 얼굴을 들었다. 길이 들지 않은 수레처럼 뻑뻑한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돌렸다. 어떤 물감의 색으로도 나타낼 수 없을 만큼 푸른 하늘, 그 아래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기척. 벽돌을 굽고 도기를 빚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태어나고 늙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 마을 외곽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사과나무 장작을 때는 향긋한 냄새였다.

방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교황 성하. 기상하셨습니까?”

“그래. 곧 나감세. 가서 일들 보게.” 노인은 손까지 휘저으며 문을 열려던 것을 만류했다.

그가 다소 황급하게 그들을 물린 것은, 와중 제 옷자락을 붙잡고 부스럭거리던 무언가를 눈치챈 까닭이었다. 딱딱한 껍데기에 보석처럼 빛나는 눈, 세 쌍의 다리를 가진 작고 검은 벌레. 그러나 어디선가 입은 상처인지 그 등딱지에는, 흡사 사람의 이목구비처럼 생긴 무늬가 넙데데하게 박혀 있었다. 그때의 그것, 커다란 살덩이에서 돌아와 잠시나마 해 보였던 어느 누군가의 얼굴. 노인은 조심스레 손을 모아 벌레를 옷에서 떼어냈다. 날갯짓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끝끝내 그의 손을 벗어나진 않았다.

“이것이 옳다고는, 영영 나의 방식으로 우리가 남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진 벌레가 더듬이를 한껏 꺼드럭거렸다. 바늘 끝보다도 작은 위턱을 여닫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와 나의 모든 자손이 죽어 없어지고 작금의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미래가 오거든, 그때 또다시 그대처럼 생각하는 이가 나온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그대의 답이 우리 모두를 이끌게 될지 모르지요.”

벌레를 날려 보내고, 노인은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벽에 배꼽이 닿도록 몸을 붙였다. 창틀엔 이미 팔꿈치 모양의 얕은 고랑이 나 있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기나긴 기도를 그는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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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9 단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빛나나 거우리 2020.02.13 0
2538 단편 변신 이야기 : 노이즈가 된 남자 박레보 2020.02.13 0
2537 단편 신이여 나에게 죽음을 내려주소서 절망의호른 2020.02.11 0
2536 단편 주아 니오사 거우리 2020.02.06 2
2535 단편 살아있는 오이들의 밤 백곶감 2020.02.04 1
2534 단편 여우의 밤 밤의전령 2020.02.03 2
2533 단편 머릿속 들려오는 목소리 다른이의꿈 2020.02.03 0
2532 단편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해수 2020.02.02 2
2531 단편 영혼을 부탁해 임채성 2020.01.31 0
단편 인명창조 거우리 2020.01.31 1
2529 단편 포획 진정현 2020.01.31 1
2528 단편 이달의 네일 김청귤 2020.01.28 0
2527 단편 기억하는 자 다른이의꿈 2020.01.26 0
2526 단편 파랑새 거우리 2020.01.2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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