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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파랑새

2020.01.25 16:2301.25

파랑새

 

“술 마시고 전기장판 쓰지 말아요.”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왜, 몸에 알콜 돌면 확 불이라도 붙어?” 그가 입을 흐물거리며 대거리했다. 언동에 걸맞게 벌써 반쯤 누운 채였다. 엉거주춤 들어 올린 상반신을 팔꿈치가 떠받들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술 마시면 열 오르잖아요. 그게 다 몸이 체온조절 못 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알아요?” “몰라.”

남자는 다른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속은 폭신하고 겉은 부들부들했다. 빨리 턱끝까지 끌어 올린 채 잠을 청하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뜨거워도 뜨거운 줄 모르고 계속 자죠.” “에이, 그런 것 갖고 뭔 일 날까 봐.”

“저온 화상이라고 못 들어봤어요? 그리고 불날 수도 있고요. 정신없이 다루다 보면.”

꽈리처럼 돌돌 말려있던 남자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렸다. 이불자락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벌써 등까지를 뜨뜻하게 지지던 그는 볼멘소리를 냈다. 낮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개수대에 물이 떨어져 고이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괜히 쩝쩝거렸다. 낡은 카펫처럼 변한 혀를 씹고 비비고 구부렸다.

“나 물 좀 갖다주라.” “됐거든요. 알아서 떠먹어요.”

샐쭉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신음했다. 하는 수 없이 두 발로… 아니 무르팍과 손바닥으로 일어섰(?)다. 그 꼴로 부엌까지 설설 기었다. 도중 한 손을 들어 열이 오른 얼굴을 벅벅 긁었다. 각질이 오소소 떨어졌다. 가뭄이 와 말라비틀어진 땅을 파헤치는 기분이었다.

“이것 봐, 이것 봐. 술도 또 어디서 이런 걸 들고 왔담, 도수도 엄청 세네.”

목구멍에 정신없이 찬물을 붓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쪼그려 앉은 여자가 소반 위 장렬하게 널브러진 혼술의 흔적을 가리켰다. 모로 누워 비긋이 구르는 것은 입술이 덕지덕지 묻은 잔이요, 우두커니 선 채 투명한 것은 더 이상 속에 든 게 없는 병이요, 마지막으로 탁상부터 방바닥까지 고루고루 얼룩진 흔적은 칠칠맞게 흘린 술이었다.

“고ㄹ, 양주.” “고양이 주요?”

텁텁하던 혀에 물이 닿자 이제는 반대로 국숫발처럼 풀어 헤쳐졌다. 그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젖은 개처럼 휘둘렀다. 뇌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 ! 목을 가다듬자 건전지만 한 가래가 꿀꺽 넘어갔다.

“고, 량, 주. 중국집 가면 있는 것 있지? 수수로 빚은 건데…. 뭐 그건 됐고.”

남자는 혼자서 뜸을 들였다. 넥타이라도 정리하듯 멱을 쓰다듬었다.

“원래 좋은 술은, 아니 센 술은 좋게 마시는 법을 알아야지. 낮에 혼자 펴놓고, 조금씩 잘 마시면 이게 알딸딸―한 게 그렇게 좋을 거가 없어. 막 마시고 취하는 게 보다는.”

“그래요. 좋겠네요―막이 아니라 잘 마시는 법 알아서.”

짐짓 앙칼진 목소리. 그러나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남자라도 얼핏 들었다. 제가 허물을 벗듯 빠져나온 이불을 퍽퍽 정리하는 기척. 그의 입가에 실없는 웃음이 피식 걸렸다.

“있잖냐, 처음엔 니가 요정인 줄 알았다.” “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근본 없는 말은 받아치기 힘든지, 그녀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낌새도 사라졌다. 남자는 제자릴 도는 팽이처럼 빙빙 도는 눈길을 가까스로 달랬다. 아니, 팽이란 원래 제자릴 도는 것인데….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주. 부끄러우니까 그만 해요.”

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아마 얼굴이 돌연변이 대추 괴물처럼 변해버린 뒤부터―그는 도무지 역정을 내거나 펑펑 울거나 할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방귀를 뀌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은 웃음만 줄곧 튀어나왔다. 무언가에 대해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갈라치면, 어느새 붓이 갈라지듯 온갖 가느다란 잡념과 목마름 따위가 끼어들어 집중을 망치는 것이다.

“그래, 그래. 미안하다, 우리 딸. 미안해.” “미안하긴 뭐가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혼자 조금만 마신 거야. 또 괜찮을 것 같았어.”

빨리 이불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보니 이부자리는 제가 박차고 나올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딸이 맘씨는 참 착한데, 손이 야무지지 못한 게 아쉬웠다. , 그래서 시집은 가겠냐? 내가 그래도 할아버지 소리는 듣고 죽어야지 싶은데!

조각난 순간이 불쑥 튀어 올랐다.

“야, 그다음에, 네가 뭐라고 했지?” “네?”

남자는 헷갈렸다. 스스로 되뇌는 것과 현실의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엇을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비틀거리는 초침이 서서히 시간을 떠밀었다. 섬광처럼 기억이 번뜩였다.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보닛을 두들기던 빗방울. 에어컨에서 나던 꿉꿉한 냄새. 깜빡깜빡.

“그래 기억났어 참! 아 뭐래. 이랬잖아. 너 이거 잘하지.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아빠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졸라 꼰대 같으니까! 너 그랬었지. 맞아. 그때 사거리 지나기 막 전에.”

팔뚝이 저렸다. 근육이 전혀 다른 생명체처럼 뼈를 붙잡고 조였다. 남자는 무심코 다른 손으로 살갗을 문질렀다. 지나기 전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혀가 늘어졌다. 문득 시끄러워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 바로 안쪽에서 울렸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니야.”

그는 억지로 몸을 가누었다. 절에서나 볼 법한 자세로 정좌하여 비틀거렸다. 금세 균형이 무너져 어깨를 벽에 들이받다시피 기댔다. 뼈가 욱신거리는 것을 참고 한 손을 내저었다.

“아니다. 그때.” “뭐가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꼭 뭔가 꿰뚫리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금세 알 수 없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면 거릴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설설 끓어올랐다. 자꾸 기억이 무너져 허둥거리다 보면, 바로 조금 전의 소리조차 똑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일 아니야. 내가 잘못 기억했구나.”

그래요? 괜찮아요, 아빠. 목소리가 머릿속에 스몄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귀를 부여잡았다. 손을 벙어리장갑처럼 모아 퍽퍽 귓구멍을 두들겼다. 그렇게 안 하면 어딘가 떨어질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빠.” “왜 그렇게 말하니? 뭐가?”

“…괜찮아요, 아빠.” 녹음된 것처럼 똑같았다. 유리그릇에다 대고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제 스스로 어떤 대답을 바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돌연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다. 뻘처럼 끈적한 것이 뱃속을, 눈과 코와 귀를 움키고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열자 다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가? 뭐가 그렇냐고? 뭐가 괜찮은데? 왜 그렇게 말하지?”

괜찮아요, 아빠. 사랑해요. “아냐, 아냐, 아냐아냐아냐아냐, 아니라고.”

턱이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허겁지겁 찬물을 들이켜던 것이 조금 전인데, 어느새 다시 숨에서 단내가 났다. 아니 구린내가 났다. 마른 점막과 알코올에 젖은 찌꺼기가 빚은 구역질 나는 것. 입천장과 잇몸에 혀가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종이 구기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지금도, 그때도.”

허위허위 바닥을 훑던 손끝에 머리칼과 먼지가 감겼다. 이윽고 얇고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바스락거리며 그의 손길을 밀어냈다. 온몸을 떨며 남자는 말미잘처럼 움츠러들었다. 절취선을 내버려 둔 채 삐뚤삐뚤 뜯어진 편지 봉투였다. 허물을 벗다 죽어버린 벌레처럼 내용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4주 동안 주 1회씩, 동일한 교육장에서 총 16시간 진행됩니다. 수강료와 함께 본인확인용 신분증을 해당 교육장의 접수창구에 제출해야 합니다. 임시운전면허증은 본인확인용 신분증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귀하의 경우 특별교통안전교육은 면허취득 과정 중 일부로서.

“미,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해, 우리 딸.”

“아니에요, 아빠. 나 행복해요. 아빠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사랑해요.”

“내가 잘못했다.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사랑해요, 아빠. 아빠 딸이라서 정말 행복해요.” “그게 아니잖아!”

 

남자는 벽을 밀쳐 일어났다. 금세 얼굴부터 이불에 처박았다. 퀴퀴한 냄새가 곧장 목젖까지 밀려 들어왔다. 제 체온으로 달궈진 이부자리가 빨판처럼 들러붙었다. 씨근거리며 고개를 오르내렸다.

“그, 그게 아니잖아. 넌 그때도 그렇게 안 말했잖아. 너는, 그러니까… 하지만 정말 요 앞이었는데. 괜찮을 줄 알았어. 아 뭐래, 혼자 가도 되니까 술이나 깨요 미쳤어 아빠? 요즘 정말 큰일 나려고 해?

뒤죽박죽 헝클어진 말이 마구 쏟아졌다. 제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실제 들었던 것을 딱 잘라 나눌 수 없었다. 형상으로 그릴 수도 말로 재현할 수도 없는 어떤 인상과 느낌만 두리뭉실 떠올랐다. 조수석에서 연신 투덜대던 것. 네비를 두들기면서도 손가락이 자꾸 얼음을 만지듯 미끄러지던 것. 뭉개진 그림처럼 누차 흐릿해지다가 확 다가오던 한 쌍의 섬광. 불현듯 가슴팍이 따가웠다. 악취가, 심지 없는 불꽃이 혈관을 타고 들풀처럼 번졌다. 머리뼈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라려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그, 그 말 좀 그만해. 그것.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지만 계속 소리가 났다. 메아리처럼 왕왕 벽과 벽을 오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빠. 자랑스러워요. 아빠 딸이라서 행복해요. 고마워요.

남자는 꼴사납게 엉덩이를 쳐들었다. 제 땀과 분비물로 뒤범벅된 이불에 더욱 깊게 코를 처박았다. 소리는 사라졌지만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더욱 강해졌다. 제아무리 악취를 퍼붓고 코를 숨긴다한들 억누를 수 없었다. 바늘처럼 따끔따끔 점막과 콧구멍을 찔러대는 얇은 내음. 모기향 냄새라고 그는 생각했다.

“넌 그렇게 말 안 할거잖아!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지금 여기에서도 안 그럴 거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할 리 없어. 넌 가짜야!”

빙그르르. 술잔이 제자릴 도는 소리가 났다. 꼭 누군가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열기가 무럭무럭 올라왔다. 전기장판에 쭈그려 있는 지금도 무릎이 배겼다. 그런데 모기향이라니? 계절이 맞지 않는다. 매캐한 것이다. 무언가 태우는 냄새.

남자가 몸을 쳐들었다. 방의 풍경이 그를 잡아먹을 듯 덮쳤다. 갑자기 모든 게 조금 더 정확하고 뚜렷해졌다. 가슴이 뜨겁던 것도 속이 활활 타던 것도 없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있던 적도 없던 것을 찾아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바닥을 뒹구는 술병도 종량제 봉투도 머리칼이 잔뜩 걸린 수챗구멍에도 그러나 오롯이 한 사람의 흔적뿐 남지 않았다.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그가 소반에 달려들었다. 손을 휘젓다가 병을 후려쳤다. 바닥에 고여있던 것이 휘청였다. 유리가 법석대는 소리가 방을 메웠다. 내용물은 그러나 채 목도 타고 넘지 못했다. 아냐, 아냐, 다시 와, 다시, 아냐, 다시 와, 다시, 다시, 다시, 아냐. 여기 있어. 미안해, 다시.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발악하듯 신음이 쏟아졌다. 남자는 손가락을 꺾어가며 병 허리를 움켜잡았다. 혀부터 밀어 넣어 우악스럽게 내벽을 핥았다. 앞니로 유리를 깨물고 누르고 긁었다. 유리가 헛돌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침에 젖은 병목이 번들거렸다. 차츰 심지 없는 불꽃이 되살아났다. 화끈한 감각이 전신으로 내달렸다. 가슴이 누덕누덕 기워지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는 주문이라도 외듯 전기장판 다이얼을 붙잡았다.

주변이 점차 흐려졌다. 모든 잊어버린 것들이 현실이 되고 모든 바랐던 것들이 형상과 소리를 갖추어 재차 떠올랐다. 그는 손발의 감각이 멍해지는 것을, 서서히 지금 여기의 내가 사라지는 것을 즐겼다. 엉망이 된 머릿속이 빚을 또 다른 백일몽을 그렸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더 이상 이곳에는 없는 어떤 목소리가 고막을 때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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