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난 겨울방학에 내가 속한 동아리는 설악산의 학교 수련장으로 MT를 갔다. 우리 학교의 수련장은 설악산, 지리산, 그리고 서해안의 천리포 해수욕장에 있는데, 뭐 아주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다른 대학 수련장에 비하면 정말 판자집이라고 해야 할 만큼 열악한 환경을 자랑한다. 천리포에는 H대학 수련장도 가까이 있는데 H대 것을 호텔이라 하면 우리 학교 수련장은 오막살이 사촌 쯤 된다.

설악산 수련장에 갔던 지난 겨울에도 바로 그 '시설'이 문제였다. 영하 15 도를 오락가락 하는 강추위가 전국적으로 내습한 겨울날에 서울에서 4시간 동안 전기차를 달려 수련장에 도착하고 보니 관리인 아저씨 말씀이 수도가 얼어서 터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언제인데 수도가 얼어터지는 일조차 막을 수 없다니 이 무슨...!

한두 명도 아니고 2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34일간 집단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수도가 없다니 이거 보통일이 아니었다.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수련장에서 조금 걸어 나가 비탈길을 10m 즈음 내려가면 있는 큼직한 개울에서 직접 물을 길어다 쓰는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꼼지락 거리기도 싫은 영하 15도에 그 많은 물을 길러 밖으로 나가야 하는 괴로움은 정말 닥쳐본 사람 아니면 실감할 수 없을 거다. 애초에 수도란 것도 그 개울물을 펌프로 퍼 올리는 시스템이었다.

어둑어둑한 초저녁이 되니까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물을 뜨러 나갔던 1학년 여학생 하나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면서 거의 졸도할 지경이 되어 수련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커다란 도사견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물을 구하기 위해 개울로 내려가려면 수련장 관리인 아저씨의 집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글쎄 그 앞에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황소만한 도사견이 버티고 있지 않았겠는가. 아마 관리인 아저씨가 깊은 산 속에서 외롭고 무서우니까 맹견을 키웠던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저녁에 도사견이 어슬렁거리다가 물 뜨러 가던 후배랑 마주쳤고 그 여학생은 기절초풍해서 수련장 안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이었다.

어찌해야할지 다들 난감했다. 물을 떠 와서 밥은 해 먹어야겠는데 무시무시한 도사견은 길을 막고 으르렁 거리고 있고.

그래서 학번이 제일 높은 내가 나섰다.

얘들아 너네들도 알잖냐. 벌써 10년 전부터 사람을 물지 않도록 유전자 처리되지 않은 개는 풀어서 기르지 못하는 거. 사람 무는 개 풀어 놓는 것은 이제는 불법이야.”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유전공학과에 다니는 후배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21세기 유전공학의 위대한 승리죠!”

물론 저녁 당번인 1학년 여학생들도 다들 알고 있었을 거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저 도사견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어디 이론과 실전이 같을 수 있는가.

그럼 오빠들이 몸으로(?!) 증명해 봐요!”

유전자 처리된 도사견이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와 그 유전공학과 후배보고 개울에 가서 물을 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에 몰렸고 후배와 함께 큼직한 물통을 들고 어두컴컴한 바깥에 나서게 됐다.

막상 직접 봤더니 그 도사견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머리가 내 허벅지까지 오고 덩치가 둔중한 것이 정말 성내고 달려들면 사람 하나 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후배도 무서운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절반은 내게 이야기하듯이, 나머지 절반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 풀어 기르는 개는 절대로 사람 안 물어요. 유전자 레벨에서 공격성이 이미 제거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아시죠? 이건 과학이에요."하고 다짐을 했다.

그 무서운 도사견이 우리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다가 내 허벅지에 머리를 툭툭 부딪히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유전공학의 은총 덕분에 우리는 간신히 물을 떠오는 데 성공했고, 나와 후배가 무사히 다녀오는 것을 본 후배들은 그때서야 유전자 재처리를 받아서 풀어 기르는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납득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물이 필요할 적마다 아무나 보내서 물을 길어 올 수 있었다. 20 여명이 밥해먹고 설거지하고 ... 한두 번 떠온 것만으로는 물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어느 또 다른 1학년 여학생이 물을 길어 올 차례가 되자 다시 문제가 생겼다. 눈물을 징징 짜면서 자기는 도저히 무서워서 못 가겠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개에게 크게 물린 적이 있었단다.

... 아무리 사람을 물지 않는다지만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길에 저런 흉물이 계속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것은 내 생각에도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앞으로 3일을 더 묵어야 한단 말이다.

결국 늦은 밤에 관리인 아저씨를 찾아갔다. 관리인 아저씨 집 앞에는 예의 그 도사견이 콧김을 식식 내뿜으며 서있었던지라 영하 10여 도의 강추위인데도 식은땀이 났다. ... 저놈이 그래도 사람 안 무는 개였으니 망정이지.

예의에 어긋나지만 현관문을 쾅쾅 두드려 관리인 아저씨를 깨우고 하소연했다. 저 도사견 때문에 무서워서 아이들이 길을 못 다닙니다. 죄송하지만 좀 묶어주실 수 없을까요??????

그랬더니 선잠에서 깨어난 관리인 아저씨 말씀하시기를...

"뭐요? 개가 풀려 있다고요? 그놈 늘 묶어놓는데 어떻게 줄을 풀은 거지? "

그 도사견은 유전자 재처리를 받아 풀어 키우는 개가 아니라 늘 묶여 있는, 사람 무는 개였던 것이다!

내가 수련장으로 돌아와서 이 말을 전했을 때 그날 물 뜨러갔던 사람 중에 몇 명이 졸도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김달영

landau

댓글 2
  • No Profile
    홍청망청 20.01.12 13:47 댓글

    ㅎㅎㅎ 귀여운(?!) 반전이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 홍청망청님께
    No Profile
    글쓴이 김달영 20.01.12 21:09 댓글

    감사합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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